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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복 받을 짓(2)/ 엡6:1-3/ 어버이주일설교/ 2015-05-10
100% 복 받을 짓(2) 엡6:1-3 하나님의 말씀 에베소서 6장입니다 신약 성경으로 316면이 되겠습니다. 우리 1절부터 3절 그냥 읽지 마시고, 마음에 새기시고 이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이 저와 여러분들 우리 사회에 가득 차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 다 같이 읽습니다. 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아멘 성경의 부모님: 경외라는 단어는 하나님에게만 쓰는 단어인데 부모에게도 동일하게 씁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반열에 둔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기독교를 근본도 없는 불효자식이라고 말을 하지만은, 그건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레위기 19장 3절에 보면 부모님을 경외하라 이렇게 말합니다. 경외라는 단어는 하나님에게만 쓰는 단어인데 부모에게도 동일하게 씁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모님을 하나님의 반열에 둔다고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십계명 가운데 약속이 있는 두 계명이 있는데요, ‘천대까지 잘 된다.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한다.’라고 하는 주석이 붙어 있는 여러분 계명은 2계명하고 5계명입니다. 2계명은 ‘하나님만 섬기고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땅에서 잘 될 거다. 천 대까지 복을 누린다.’ 그러고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생명이 길리라.’ 이렇게 말한다고요. 1. 성경은 노부모도 공경을 중요시 여긴다.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백성은 아멘 하라. 하나님은 연세 들고 힘없고 병든 부모님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만큼 성경은 부모 공경을 중요시 여기고, 또 우리 하나님은 살아 있는 부모님에게 잘 하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 또 한 가지 우리가 아셔야 되는 것이 부모님은 돈이 많고 힘 있고 건강한 부모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연세가 드시고 돈이 없고 건강이 여의치 못한 부모를 공경하라, 주안에서 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그저 우리가 예수 믿는 것만 부모에게만 공경을 하라는데 주안에서 in Christ 라는 말은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져 있어요. 부모님이 연세가 들고, 돈이 없고 나에게 짐이 될 때에도 그 부모님을 공경하라. 그러면서도 모세오경에 보면 출애굽기 21장 15절에 보면 자기 어머니나 아버지를 치는 자는 반듯이 죽일지니라. 그리고 17절에 보면 ‘ 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듯이 죽일지니라.’ 그래요. 신명기에는 자식이 술을 먹고 방탕하고, 부모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그 부모는 자식을 그 성읍의 장로들에게 데리고 와서 타이르고 그 말을 듣지 아니하면 성읍 사람들이 전부 돌로 쳐 죽여라. 옛날 우리나라도 그랬지요, 마을에서 말 안 듣는 자식은 멍석에 말아서 멍석말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하면 모든 백성이 아멘으로 화답을 하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루트도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부모를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이야기 했다고요. 오늘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 어버이날인데 그저 하루 엄마 아버지 잠깐 생각하고, 눈물 흘리고 돌아가는 시간이 아니고, 우리나라가 지금 굉장히 어렵고 힘들고 여러분들의 삶이 팍팍한데 나라 경제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여러분들의 가정의 삶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지난주 이번 주 이야기 했지요. 어린아이를 귀하게 여길 때 하나님이 복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섬기는 것이 아이를 영접하는 거다 이랬다고요. 오늘 성경 말씀도 우리 하나님은 연세 들고 힘없고, 병든 부모님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믿어서 여러분들이 그 하나님을 잘 섬김으로 우리 대한민국을 다시 경제적으로 일으키는 귀한 교회가 되고, 여러분들 자신이 복 받는 삶의 출발점이 되시는 귀한 주일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 쉬워요. 여러분 정말 좀 그러세요. 무역 잘하고 제도 잘하고 이런다고 해서 나라 사는 것 아닙니다. 2.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되요. 어린이와 어른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복 받는 비결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복을 하나님에게 비는 것이 대제사장이 중요한 직임.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는 것은 구약의 모든 의식이 예수님에서 완성된 것.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되요. 어떻게 복을 주는가? 두 가지입니다. 어린아이 무시하지 않고, 연세 드신 어른과 부모님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복 받는 비결입니다. 이것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오늘 이 말씀은 여러분 설교 했지만 여러분들이 한 번 더 가슴에 좀 담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민수기 6장을 한번 펴 보세요. 204면입니다. 22절부터 204면 다 펴세요, 오늘 설교 핵심만 간단하게 할 텐데 22절에 보세요.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그러면서 27절에 보세요, 그들은 여기에 그들은 누구지요? 그 앞에 보면, 아론과 그의 아들들, 아론은 대제사장이고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입니다. 그러니까 이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은 이같이 23절에서부터 26절의 내용과 같이 “내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을 빌어 줘라.” 곧, 대제사장이 하는 일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복을 하나님에게 비는 것이 대제사장의 중요한 직임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뭐 여러분들이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하나님이니까 “하나님 축복하소서.” 이러는데, 그 말은 참 잘못된 거지요. 하나님보다 더 높은 분에게 “복을 빌어 주소서.” 이런 말로 하는데,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보다 “예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라는 이 말이 가장 정확한 말입니다. 그럼 왜 그런가 하면, 제 이야기가 아니고, 구약신학의 가장 권위자라 하면 칼델리치 주석을 말합니다. 그분이 하는 이야기가 우리 신약에서도 그러거든요. “예수님은 영원한 대제사장이다.” 그래요. 그래서 앞에서 죽인다 이런 말은 이야기했던 대로 시민법이고,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는 것은 구약의 모든 의식이 예수님에서 완성된 것을 말하거든요. 그러면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의미는 무슨 말이냐 하면은 주문이 아니에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의 보좌 앞에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는데, 그 은혜의 보좌 우편에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계신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께 축복을 해 주시는 거예요. 요즘 좀 쉬운 말로 하면, 여러분들이 “우리 아들 서울 대학 가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를 하면, 무엇이든지 기도 되요. 성경에 그래 놨어요. 무엇이든지 기도해도 되는데, 그 기도를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이 받아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방향으로 하나님에게 빌어서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이 빈 대로 우리에게 응답하신다고요. 3. 칼델리치가 말하기를 “예수님이 이 땅의 대제사장의 직임의 축복권을 삼직에게 위임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로, 부모가 자녀를 향하여 축복을 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 두 번째 로 교사, 세 번째 담임 목사님에게 축복권을 위임하셨다.”라고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흔히들 말할 때, 기도 응답은 4가지라 하지요. 하나는 yes라는 응답, no라는 응답, wait라는 응답, 그 다음에 change라는 응답이 있지요. “하나님, 우리 아들 서울대학 가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를 하는데, 예수님이 가만히 보니까 “부모님, 죄송합니다. 얘는 보니까 서울대학보다 백석대학 가는 게 훨씬 낫겠습니다.” 싶을 때, 예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저 사람이 서울대학 보내기를 원하는데, 하나님 쟤는 백석대학 가는 것이 자기에게나 모든 사람에게 좋겠습니다.”라고 간구해 주기 때문에 기도가 뭐로 들어와요? 체인지, 바꾸어서 돌어온다고요. 그것도 응답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성경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은 기도할 때마다 No로 응답 받는 것이 좋습니까, Wait로 응답 받는 것이 좋습니까, Change로 응답 받는 것이 좋습니까? 예스로 응답 받는 것이 좋아요? 물론 예스로 받아야지요. 그러려면 예수님이 우리의 기도를 바꾸지 아니하도록 우리가 제대로 사는 것이 중요한 거거든요.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의 동기까지 아신다고요. 자 그런데 칼델리치가 이야기하기를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대제사장의 직임 축복권을 삼직에게 위임해 놨다는 거예요.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 삼직의 첫 번째가 누구냐 하면 부모라는 거예요. 그래서 부모님이 여러분들 자녀를 향하여 축복을 할 때에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부모님을 거역하거나 무시하면 안 돼요. 아무리 연세가 많아도. 그런데 우리 부모들끼리 비밀 하나 이야기 합시다. 입으로는 자식에게 복을 빌지만 어떤 자식에게는 내가 부모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빕니다. 하나님 이 마음 알아요. ㅎ ㅎ 우리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 성도 여러분, 또 이 땅에 모든 사람들이 부모님이 진심으로 복을 빌 수 있는 그런 자녀로 변화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이잖아요, 부모도.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잖아요. 왜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해야 되는가? 진심으로 부모가 하나님께 복을 빌 수 있도록 그래야 돼요. 또 두 번째로 교사에게 있다는 겁니다. 다음 주에 우리 스승의 주일이지만, 우리나라가 지금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엄마들 회개해야 돼요. 아이들이 선생님을 존경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것 같아요. 정말 여러분 선생님이 자기의 제자들을 향하여 진심으로 복을 빌어 줄 때, 예수님에게서 위임 받은 권세로 복을 빌어 줄 때, 그 자녀가 복 받는 줄 아셔야 됩니다. 선생님이 못난 선생님일수록 잘 해 줘 보세요. 아무리 악하고 못난 선생님이라도, 한 아이 정도는 좋아하고 복 빌어 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요. 선생님 비판하지 마세요. 여러분. 우리 흔히 뭐 그런 것 있잖아요. 연예인들이 대부분 보니까 학교 다닐 때에 좀 문제 아이였더라고요. 그 애들이 제대로 그 길 들어간 것이 뭡니까? “그 사람이 보고 싶다” 이런 데 보면 그 말썽쟁이, 정말 우리 반에 이 아이만 없으면 하는 그 아이를 어떤 선생님이 축복해 주고 쓰다듬어 준 그 아이는 잘 된다고요. 우리가 지금 이것 회복해 내야 됩니다. 세 번째로 담임 목사님에게 했다는 겁니다. 저도 여러분 참 교수 생활도 10년 하고, 목회도 하고 아버지도 되고 했는데 정말 목사는 여러분들이 선생님도 마찬가지라 생각해요. 여러분들의 시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부모의 마음을 주세요.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복을 빌기를 원하지만 그래도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목사님도 인간이기 때문에 진심으로 복 빌어 주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요. 4. 공경은 카베드라는 말인데 무겁게 여긴다는 말, 부모님의 말씀을 경홀히 가볍게 듣지 말고 무겁게 들으세요. 선생님의 말씀을 무겁게 듣도록 하세요. 담임 목사님의 설교를 사회의 통념으로 판단하지 말고 무겁게 들을 때, 하나님께서 네 생명이 길리라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 복 빌어 주고 싶은가? 오늘 보면 공경하는 사람입니다. 공경은 뭐냐 하면은요 공경은 카베드라는 말인데 무겁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부모님의 말씀을 경홀히 가볍게 듣지 마세요. 무겁게 들으세요. 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 돌아가셨습니까, 교회에 어른들의 말을 무겁게 들으세요.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은 선생님의 말을 흩은 말씀도 무겁게 듣도록 하세요. 교회에 와서 여러분들이 설교를 여러분들의 가치관이나 사회의 통념으로 판단하지 말고, 무겁게 들으세요. 그런 사람을 복 주지만, 여러분 우리 부모들 솔직히 이야기 해 봅시다, 어떤 자녀에게 진정으로 마음이 갑니까? 내가 흘려 가는 이야기도 마음에 새기고 무겁게 듣는 사람 아닙니까? 오늘 이 마음 회복해 내야 되요. 선생님도 마음 마찬가지 입니다. 아무리 성질이 더럽고 나쁜 선생님도 자기의 말을 흘려듣지 않는 학생이 아주 귀하게 여겨지거든요. 목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들이 목사님에게 뭐 잘 하는 것, 설교 말씀을 무겁게 듣고, 교회의 광고를 무겁게 들을 때, 하나님께서 네 생명이 길리라 그런 겁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마는 제가 한달 전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우리 이태경 집사님이 오산에 병원을 하는데 이층이 늘 비어 있었는데 건강검진센터를 만들었잖아요. 내가 물어 보니까 거기엔 아직 적자가 많이 납니다. 이래서 제가 아 우리 교인들 가운데 국가에서 주는 건강 검진 받으러 가라고 교회에서 차까지 대절하고, 또 다 가면은 디시도 해 준다고 했는데, 그 말을 무겁게 들은 사람 한 사람 있습니다. 딱 한 명 갔어요, 누가 간줄 아세요? 우재만 장로님이 갔어요. 그런데 장로님이 가서 건강 검진 받았는데 대장에 용정이 여러 개 있는데 하나는 너무나 커서 여기서 안 된다고, 강동경희대 가라고, 갔는데 암이었어요. 그래서 조직 검사 결과 암으로 나왔는데 이틀 전에 저에게 와서 목사님 내일 결과 나오는데 하고, 자신이 무릎을 꿇고 안수 해 달라 하더라고, 그래서 나도 연세도 저보다 많잖아요. 내일 모래 70이잖아요. 기도했는데 그 다음날 참 할렐루야 목사님 전이도 안 되고 깨끗하고 수술 잘 되었답니다. 여러분 저를 주목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여러분들이 부모의 말을 중하게 듣고, 아이들에게 선생님 말을 중하게 듣고, 교회의 설교나 광고를 중하게 들으세요. 그것 어렵지 않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요 쉬운 것은 잘 안 들으려 하고 어려운 것만 주면은 그것 뭐 권위 있는 줄 안다고요, 예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일 맡기는 거예요. 오늘도 여러분 보시면서 제가 참 우리 유치부 얘들이 복 받을게 제가 그랬잖아요. 아이들에게 명찰 달으라고, 왜 저도 이름 다 못 외우겠거든요. 그래서 제가 지난 주일도 그런 이야기 했지 않습니까? 아이들 명찰 달면 뭐 해주라고요? 또 다 잊어버렸나? 한 번 따라 합시다. “와 네가 박지훈 집사 아들이냐?” 왜 안 따라하나?ㅎ ㅎ 여러분 복도에서 그래 보세요. 우리 교회 정말 좋아집니다. 교회 뭐 여러분들이 전 재산 팔아 가지고 이러는 것은 이단이고요. 이것 작은 것 하나 못합니까? 그러면 정말 우리 교회 차고 넘쳐요. 오늘 그래서 제가 엘리베이터 내리는 데 박은세 해 놨더라고. 그 동안에 이름은 알았지만 얼굴은 몰랐거든요. 박지훈 해 놔서 내가 “아, 네가 박지훈 집사 딸이구나.” 하고 내가 손 여기로 줬잖아. 스마일. 5.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면 자기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며 돈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깁니다. 고려장 하려고 어머니 지고 갈 때 나뭇잎 따서 버리는 어머니 마음(아들이 돌아갈 길 잃어버릴까 봐). 고려장 시대 원나라 사신의 숙제, 통나무 밑동과 새끼 말? 어머니의 지식으로 나라의 큰일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이 작은 것 한번 해 보자고요. 그리고 제가 한 대로 그대로 했어요? 내가, “야, 박지훈 집사님, 우리 교회 최고다. 얼마나 좋은데. 너 아빠 좋은 분 두어서 좋겠다.”고. 여러분, 이것이 우리나라 살리는 길이고, 자신이 사는 길임을 아셔야 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해 보세요. 여러분 우리 교회에 다른 것은 몰라도 제가 우리 아이들과 어른들이 참 편하게 하잖아요. 우리 김종대 목사님도 뭐 축도하겠지만, 이성근 장로님, 다른 교회에 일생 동안 해 왔지만 우리 믿음 안에서 한 가족이잖아요. 이성근 장로님 여기에서 다른 데 가보세요. 은퇴하고 가보면 출석할 교인이 없어 눈물 흘린다고. 사람은 돈으로 경제적인 가치로 보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 부모들에게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은, 부모들은 자식에게요 신앙의 유산 물려주려고 해야 돼요. 그 신앙의 유산이라는 게 주일날 교회 가고 십일조 하라는 것만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심어 주세요. 왜 경외함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면 자기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해요. 그것 아세요? 또 하나님을 경외하면 돈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겨요. 정말 그렇게 될 때, 우리나라 살아나는 겁니다. 어떠한 경제정책 쓸모없습니다. 이젠 여러분 수출 대한민국 아닙니다. 건설 대한민국 아닙니다. 이제는 사람을 귀하게 여길 때 우리나라 경제 살아나요. 누가 사람을 귀하게 여깁니까? 하나님 무서운 줄 아는 사람이지요. 뭐 타 종교 이야기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이야기 할게요, 여러분 우리 저도 뭐 요즘 등산 자주 가니까 절에 가보면 뭐 위패들 49제 지낸다고 쫙 해 놓은 것들 이래 보는데요, 여러분 우리나라 고려장이 어느 시대에 생긴 겁니까? 고려 시대입니다. 그 고려 시대는 불교의 가장 중흥 기였어요. 아시지요, 그 고려장 시절에 엄마 지게 지고 산에 어머니 버리러 가는데 엄마는 지게에서 나뭇잎 따서 뚝뚝 버립니다. 엄마 왜 그래요 하니까 너 돌아갈 길 잃어버릴까 봐, 그게 부모에요. 그것이 스승이고 목사의 마음이에요. 여러분 또 고려장 이야기 있잖아요, 중국 원나라에서 우리나라 고려장 힘들게 하려고, 사신이 와서 숙제 낸 것, 아시지요? 나무 한 통을 내놔 놓으면서 똑 같은 나무를 어느 것이 밑동이고 어느 것이 위냐? 사법 고시 수석 한 대신들이 모여서 그 문제 못 풀고 끙끙거릴 때, 어머니 고려장 하는 것 하지 못해서 다락방에 숨겨 놓은 대신이 근심 어린 눈빛 있으니까 엄마는 애들 눈빛만 봐도 알잖아요. “무슨 일이 있냐?” “예, 오늘 원나라 사신이 와서 이 숙제 냈는데 이것 풀지 못하면 나라 큰일 납니다.” 하니까 “뭔데?” “어머니, 보세요. 이 통나무가 어디가 밑이고 어디가 위인 것을 어떻게 알겠어요?” “어허, 뭐 그런 것 걱정하냐? 그 통나무 물에 넣어 봐라. 가라앉는 쪽이 밑동이니라.” 이것은 스마트폰의 지식 가지고 되는 게 아니에요. 요즘은 참 세상이 거꾸로 돼 가지고 오래 산 사람이 짧게 산 사람에게 묻고 사니까 권위가 사라지는 것 같은데, 그 지식은 사용법은 없더라도, 삶의 지혜는 어른들에게 있어요. 그러고 나니까 또 원나라 사신이 말 두 마리를 가지고 왔는데 똑 같이 생긴 말보고 어느 것이 어미고 어느 것이 새끼냐? 사법 고시 수석 한 사람도 모른 거예요. 전전긍긍하니까 또 어머니에게 와 가지고 그렇다고 하니까 “뭐 그런 것 가지고 고민하느냐? 두 마리 앞에 말 여물을 갖다 놔 봐라. 먼저 먹는 말이 새끼니라.” 할렐루야. ㅎ ㅎ ㅎ 여러분, 옛날에 누가 그랬어요. “미안합니다, 이런 말해서. 똥은 먼저 누는 게 깔리지만, 사람은 먼저 나는 게 결코 깔리는 법이 없대요. 요즘은 수세식이라 그렇지도 않겠지만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지금 어려운 것은 정말 모든 사람을 경제적인 논리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서, 여러분 참 젊은 사람들 어린 아이들도 존귀히 여김을 받는 교회, 또 이제 정말 내 한 자리 지키는 것도 힘든 연세 드신 분들 존귀히 여김으로 하나님이 약속한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이 여러분들의 가정과 교회와 나라에 넘쳐 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특별히 어머니들에게 부탁합니다. 그러려면 여러분들 아이들에게 귀찮다고 스마트폰 주고, 텔레비 보게 하지 말고요, 성경을 읽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는 젊은 어머니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봉헌 기도◈ 아버지 하나님 이 땅이 언제부터 머리 좋은 사람들만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습니까? 이 예물 속에 있는 헌금의 정신이 잘 실천이 되어져서 머리는 좋지 못해도 몸 좋은 사람, 손재주 있는 사람 아니면 정말 아무런 능력이 없는 장애우들까지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이 땅이 되도록 드리는 헌금의 정신이 모든 사람들 속에 살아나는 복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축도◈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가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내게 비치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주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그들을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하나님의 말씀과 어버이의 말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중하게 여겨서 순종함으로 자자손손 복을 받기를 원하는 믿음의 권속들과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 땅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항상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김종웅 목사(쉼과회복이있는교회)
3가지 효도 /눅16:19-31 2010-08-04 15:46:56 read : 47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절 :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 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 서(눅16:27) 한국가정 ‘ 효’ 아카데미(대표 박재천)가 어버이날을 앞두고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효도 방법 13가지“를 발표했습니다. 한국가정 ‘ 효 ’ 아카데미는 ”진정한 효도란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 이라며 ”일상생활에
3가지 효도 /눅16:19-31 2010-08-04 15:46:56 read : 47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절 :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 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 서(눅16:27) 한국가정 ‘ 효’ 아카데미(대표 박재천)가 어버이날을 앞두고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효도 방법 13가지“를 발표했습니다. 한국가정 ‘ 효 ’ 아카데미는 ”진정한 효도란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 이라며 ”일상생활에서 작은 실천으로 부모님께 감동을 선물하자“ 고 밝혔습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효도방법 13가지] •문안 인사를 드린다.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고 외출 할 때에는 행선지를 말씀 드려 부모의 걱정을 덜어드리는 것. •대답을 잘하고 말씀을 잘 들어 드린다. 부모님이 부르면 큰 소리로 대답하고 •표정을 밝게 한다. 항상 환한 표정을 보여 드려야한다. 부모 섬기는데 밝은 얼굴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궁금증을 풀어 드린다. 부모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늘 자신의 평안함과 안부를 전하도록 노력 하고 •건강을 유지한다. 평안하고 자신의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아픔을 부모에게 보여서는 안된다, 자녀의 아픔은 곧 부모님께 마음의 고통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벼운 일감을 드린다. 부모님께 가벼운 일감을 드려 그분들의 존재가 꼭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도록 해드려야한다. •부모님이 힘들거나 괴로울 때 힘이 되어 드린다. 부모님이 힘들거나 괴로울 때 힘이 되어드린 다. 비록 부모님의 배움과 능력이 부족해도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 •맛있는 음식을 해드린다. 자주 맛있는 음식을 해 드린다. •용돈을 절약해 사랑의 선물을 사 드린다. 자신의 생일날에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선물을 드린다. •등을 긁어 드린다. 등을 긁어 드린다. •친구들을 만나게 해 드린다. 친구를 만나게 해 드린다. 서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게 한다. •부모님의 실수를 너그럽게 이해한다. 늙으면 일을 하는데, 잘 안된다. •사랑의 표현을 한다. 사랑을 전하는 방법으로는 편지나 휴대전화 문자메세지를 통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식탁 위나 부모 옷 주머니, 지갑 속에 사랑의 쪽지를 넣어 드려야 한다. •교회출석하게 하여 천국을 소망하게 한다. 영원한 내세 축복을 얻게 하는 것이 최고의 효도이다.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 갑니다. 예수 믿고 죽은 자는 천국에 가서 영광중에 살고 있고, 믿지 않고 죽은 자는 지옥에 가서 불꽃 중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러 종교의 효도관을 보면, 유태교나 이스람교는 죽은 부모에 대하여 제사제도가 없습니다. 기독교도 죽은 후에는 제자제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나, 유교는 죽은 후에 제사가 있습니다. 불교의 효도관으로 살아가는 자는, 부모가 불교를(유교) 믿으니, 교회가지 말라 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 입장에서 볼 때에 부모노릇을 잘못했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를 잘못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부모와 자식관, 형제관, 자매관에 대한 진리교훈을 예수님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2:46-50절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부모 형제관을 인정하셨지만, 거기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형제, 자매, 모친이요, 영원한 천국나라에서도 참 형제 부모라고 하신 것입니다. 진리에서 떠난 부모, 자식의 형제, 자매는 세상에서만 형제라도 죽음후에는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므로,, 참 가족 관계가 되려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타락으로 맺은 관계가 많으니, 타락한 부모자식관계, 사망적 부모자식관계, 영원한 지옥, 저주를 받는 부모자식관계, 죽음선에서 사라질 부모자식관계를 정리하고, 진리적 부모자식관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부모자식관계만이, 참 부모자식관계요, 영원한 축복관계가 되며, 거기에서 바른 효도가 이루어집니다. 기독교 효도에 대하여 성경은 종합적으로 세 가지면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세 가지 효도관을 살려보면,,,,,,,. ①살아 있는 부모에 대한 효도 ②천국 간 부모에 대한 효도 ③지옥 간 부모에 대한 효도. 이상 3가지 효도에 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一. 살아 있는 부모에 대한 효도 지금 살아 있는 부모에게 효도 혹 대접을 하는데, ①일반차원에서의 효도 혹 대접이 있습니다. 육적면으로 물질대접을 하고, 평안케 하여 주고, 관광시켜 드리고, 온천을 시켜 드리고, 건강하게 보약을 잡수시게 하고, 편안한 죽음 을 맞이하게 하는 일반적 효도가 있습니다. ②특수적인 효도 혹 대접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천국 가도록 하는 특수 대접이 있습니다. 복음, 구원, 영생에 대한 영적면으로 특별 대접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 실천이 특수 효도입니다. 믿지 않는 부모 대접은, 어떤 대접이나 효도를 한다 해도, 효과가 없고, 참 효도는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육은 죽음선에서 영원히 지옥 저주로 갑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부모 노릇을 해야 하고, 또 자식 노릇을 해야, 기독교의 참된 효도입니다. 유교나 불교나 이종교에서 말하는 효도는 영원한 불행으로 가는 짓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효도로 부모님께서 예수믿어 금생과 내생까지 복을 받게 하여 드리는 것이 참된 효도입니다. 二. 천국 간 부모에 대한 효도 세상에서 예수 믿고 천국간 부모는, 세상에 살아 있는 자식에 대하여 전혀 관계가 없는 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또 관계가 있어서 부모의 소원, 바램, 격려가 있고, 자식은 부모의 소원대로 살아서 참 효도를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12:1-2절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했습니다. 천국 간 부모는 신앙의 증인되어 부탁하며, 격려 합니다. 세상에서 신앙 성공하라 하나님 아버지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 영광을 얻는자가 되라, 요셉같은 위대한자가 되라, 다니엘같은 신앙성공자가 되라. 아브라함같이 175세 노년까지 범사에 복을 받는자가 되라. 바울같은 신앙성공자가 되라고 부탁하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또 천국에서 큰자 되라, 해와 같이 빛나는자, 별과 같은 영광자 되라고(마5:19,고전15:40-,단12:3) 소원하고, 바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바울, 주기철, 한상동, 양경열, 내 부모는, 나의 뺨에 입을 맞추고, 나를 입히고, 먹이고, 자라게 하여 준 가장 가까운 믿음의 증인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서서 신앙성공하라고 증인 일을 합니다. 천국간 주기철 목사님은 자녀들에게, 성도들에게 어떤 부탁을 하고 있겠습니까? 천국에서 영광자 되기를 격려합니다. 큰 상을 받는 자 되기를 천국에서 바라고 계십니다. 증인되는 부모가 신앙 성공 위하도록 어떤 부탁을 하실까요? 얽매이고 무겁게 눌리는 죄를 벗어나라, 인내로 경주에 경주하라, 예수를 바라보라, 즐거움에 참여하라, 천국에서 큰자 되라는, 소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소원에 맞추어서 사는 것이, 자식으로 참 효도입니다. 부모 노릇 하고, 자식 노릇을 바로 하는 것이 기독교의 참 효도입니다. 우리 모두 신앙성공하여 천국에서 큰자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三. 지옥 간 부모에 대한 효도 불신자들이 죽어서 지옥 가서 고통 중에서, 소원하고 바라고 세상사는 자식에 대한 간절함을 죽음 넘어, 지옥 소식을 하나님이 앞 당겨 와서, 부모의 소원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예언하여 주고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뜻을 받아서 사는 것이 효도요, 대접생활입니다. 누가복음 16:27-28절에 “가라사대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보내요 내 아버지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했습니다. 이 죽음 넘어 지옥에서 들러오는, 소식을 듣는 모든 인생들이여! 예수 믿고 고통 받는 곳에 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지옥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입시철에 보면 세상에서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고, 새벽 밤마다 특별 기도를 하고, 목사님께 기도를 부탁하고, 현금을 드리고, 자식이 큰자 되기를, 영화로운 자 되기를 바라는 것같이, 부모의 간절한 소원을 듣는 자식이, 참 효도하는 자식이요, 진리의 자식입니다. 참된 진리의 효도입니다. 누가복음 9:59-62절에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 하옵소서 할 때에 예수님은 너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라” 너는 부친 장사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누가 먼저 죽을지 모르므로 부친 장사 핑계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하나님나라를 전파를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바르게 밭을 갈수가 없으니, 앞만 보고 가야함같이, 믿는 일을 부모나 세상일로, 핑계하여 망가트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고 죽은 부모의 시신을 금관에 넣어 장사하고, 옥관에 넣어서 장사한들 무슨 소용 있는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이 없는데, 장사에 모든 것을 기울여 한다 해도, 소용이 없다 했습니다. 자식 손으로 지옥 불구덩에 넣는 짓이 됩니다. 먼저 네가 복음을 듣고, 부모에게 복음을 전하여, 참 부모, 참 진리자식이 되라 합니다. 기독교의 효도를 세 가지면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살아계신 부모에게는 예수믿게 하여 영생, 구원, 복음, 내세의 천국에 대한 대접을 해야 합니다. 부모 노릇 하고 자식 노릇을 주안에서 할 때에만, 참 효도입니다. 둘째: 천국 간 증인부모님의 소원은 천국에서 큰자, 열고을 권세, 영광자 상급자 되는 것이니. 큰자 되게, 잘 믿는 성도가 됩시다. 셋째: 지옥간 부모의 소원을 듣는 자식이 참 효도하는 자입니다. 고통 받는 곳에 가지 않는 자 식이 됩시다. 기독교의 효도 되로, 진리대로 살아서 우리 모두 금생과 내생에 영광자 존귀자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3가지 효도/ 눅16:19-31/ 2010-05-08
3가지 효도 눅16:19-31 요절 :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 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 서(눅16:27) 한국가정 ‘ 효’ 아카데미(대표 박재천)가 어버이날을 앞두고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효도 방법 13가지“를 발표했습니다. 한국가정 ‘ 효 ’ 아카데미는 ”진정한 효도란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 이라며 ”일상생활에서 작은 실천으로 부모님께 감동을 선물하자“ 고 밝혔습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효도방법 13가지] •문안 인사를 드린다.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고 외출 할 때에는 행선지를 말씀 드려 부모의 걱정을 덜어드리는 것. •대답을 잘하고 말씀을 잘 들어 드린다. 부모님이 부르면 큰 소리로 대답하고 •표정을 밝게 한다. 항상 환한 표정을 보여 드려야한다. 부모 섬기는데 밝은 얼굴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궁금증을 풀어 드린다. 부모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늘 자신의 평안함과 안부를 전하도록 노력 하고 •건강을 유지한다. 평안하고 자신의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아픔을 부모에게 보여서는 안된다, 자녀의 아픔은 곧 부모님께 마음의 고통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벼운 일감을 드린다. 부모님께 가벼운 일감을 드려 그분들의 존재가 꼭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도록 해드려야한다. •부모님이 힘들거나 괴로울 때 힘이 되어 드린다. 부모님이 힘들거나 괴로울 때 힘이 되어드린 다. 비록 부모님의 배움과 능력이 부족해도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 •맛있는 음식을 해드린다. 자주 맛있는 음식을 해 드린다. •용돈을 절약해 사랑의 선물을 사 드린다. 자신의 생일날에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선물을 드린다. •등을 긁어 드린다. 등을 긁어 드린다. •친구들을 만나게 해 드린다. 친구를 만나게 해 드린다. 서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게 한다. •부모님의 실수를 너그럽게 이해한다. 늙으면 일을 하는데, 잘 안된다. •사랑의 표현을 한다. 사랑을 전하는 방법으로는 편지나 휴대전화 문자메세지를 통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식탁 위나 부모 옷 주머니, 지갑 속에 사랑의 쪽지를 넣어 드려야 한다. •교회출석하게 하여 천국을 소망하게 한다. 영원한 내세 축복을 얻게 하는 것이 최고의 효도이다.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 갑니다. 예수 믿고 죽은 자는 천국에 가서 영광중에 살고 있고, 믿지 않고 죽은 자는 지옥에 가서 불꽃 중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러 종교의 효도관을 보면, 유태교나 이스람교는 죽은 부모에 대하여 제사제도가 없습니다. 기독교도 죽은 후에는 제자제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나, 유교는 죽은 후에 제사가 있습니다. 불교의 효도관으로 살아가는 자는, 부모가 불교를(유교) 믿으니, 교회가지 말라 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 입장에서 볼 때에 부모노릇을 잘못했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를 잘못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부모와 자식관, 형제관, 자매관에 대한 진리교훈을 예수님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2:46-50절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부모 형제관을 인정하셨지만, 거기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형제, 자매, 모친이요, 영원한 천국나라에서도 참 형제 부모라고 하신 것입니다. 진리에서 떠난 부모, 자식의 형제, 자매는 세상에서만 형제라도 죽음후에는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므로,, 참 가족 관계가 되려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타락으로 맺은 관계가 많으니, 타락한 부모자식관계, 사망적 부모자식관계, 영원한 지옥, 저주를 받는 부모자식관계, 죽음선에서 사라질 부모자식관계를 정리하고, 진리적 부모자식관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부모자식관계만이, 참 부모자식관계요, 영원한 축복관계가 되며, 거기에서 바른 효도가 이루어집니다. 기독교 효도에 대하여 성경은 종합적으로 세 가지면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세 가지 효도관을 살려보면,,,,,,,. ①살아 있는 부모에 대한 효도 ②천국 간 부모에 대한 효도 ③지옥 간 부모에 대한 효도. 이상 3가지 효도에 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一. 살아 있는 부모에 대한 효도 지금 살아 있는 부모에게 효도 혹 대접을 하는데, ①일반차원에서의 효도 혹 대접이 있습니다. 육적면으로 물질대접을 하고, 평안케 하여 주고, 관광시켜 드리고, 온천을 시켜 드리고, 건강하게 보약을 잡수시게 하고, 편안한 죽음 을 맞이하게 하는 일반적 효도가 있습니다. ②특수적인 효도 혹 대접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천국 가도록 하는 특수 대접이 있습니다. 복음, 구원, 영생에 대한 영적면으로 특별 대접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 실천이 특수 효도입니다. 믿지 않는 부모 대접은, 어떤 대접이나 효도를 한다 해도, 효과가 없고, 참 효도는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육은 죽음선에서 영원히 지옥 저주로 갑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부모 노릇을 해야 하고, 또 자식 노릇을 해야, 기독교의 참된 효도입니다. 유교나 불교나 이종교에서 말하는 효도는 영원한 불행으로 가는 짓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효도로 부모님께서 예수믿어 금생과 내생까지 복을 받게 하여 드리는 것이 참된 효도입니다. 二. 천국 간 부모에 대한 효도 세상에서 예수 믿고 천국간 부모는, 세상에 살아 있는 자식에 대하여 전혀 관계가 없는 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또 관계가 있어서 부모의 소원, 바램, 격려가 있고, 자식은 부모의 소원대로 살아서 참 효도를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12:1-2절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했습니다. 천국 간 부모는 신앙의 증인되어 부탁하며, 격려 합니다. 세상에서 신앙 성공하라 하나님 아버지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 영광을 얻는자가 되라, 요셉같은 위대한자가 되라, 다니엘같은 신앙성공자가 되라. 아브라함같이 175세 노년까지 범사에 복을 받는자가 되라. 바울같은 신앙성공자가 되라고 부탁하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또 천국에서 큰자 되라, 해와 같이 빛나는자, 별과 같은 영광자 되라고(마5:19,고전15:40-,단12:3) 소원하고, 바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바울, 주기철, 한상동, 양경열, 내 부모는, 나의 뺨에 입을 맞추고, 나를 입히고, 먹이고, 자라게 하여 준 가장 가까운 믿음의 증인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서서 신앙성공하라고 증인 일을 합니다. 천국간 주기철 목사님은 자녀들에게, 성도들에게 어떤 부탁을 하고 있겠습니까? 천국에서 영광자 되기를 격려합니다. 큰 상을 받는 자 되기를 천국에서 바라고 계십니다. 증인되는 부모가 신앙 성공 위하도록 어떤 부탁을 하실까요? 얽매이고 무겁게 눌리는 죄를 벗어나라, 인내로 경주에 경주하라, 예수를 바라보라, 즐거움에 참여하라, 천국에서 큰자 되라는, 소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소원에 맞추어서 사는 것이, 자식으로 참 효도입니다. 부모 노릇 하고, 자식 노릇을 바로 하는 것이 기독교의 참 효도입니다. 우리 모두 신앙성공하여 천국에서 큰자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三. 지옥 간 부모에 대한 효도 불신자들이 죽어서 지옥 가서 고통 중에서, 소원하고 바라고 세상사는 자식에 대한 간절함을 죽음 넘어, 지옥 소식을 하나님이 앞 당겨 와서, 부모의 소원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예언하여 주고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뜻을 받아서 사는 것이 효도요, 대접생활입니다. 누가복음 16:27-28절에 “가라사대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보내요 내 아버지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했습니다. 이 죽음 넘어 지옥에서 들러오는, 소식을 듣는 모든 인생들이여! 예수 믿고 고통 받는 곳에 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지옥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입시철에 보면 세상에서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고, 새벽 밤마다 특별 기도를 하고, 목사님께 기도를 부탁하고, 현금을 드리고, 자식이 큰자 되기를, 영화로운 자 되기를 바라는 것같이, 부모의 간절한 소원을 듣는 자식이, 참 효도하는 자식이요, 진리의 자식입니다. 참된 진리의 효도입니다. 누가복음 9:59-62절에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 하옵소서 할 때에 예수님은 너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라” 너는 부친 장사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누가 먼저 죽을지 모르므로 부친 장사 핑계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하나님나라를 전파를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바르게 밭을 갈수가 없으니, 앞만 보고 가야함같이, 믿는 일을 부모나 세상일로, 핑계하여 망가트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고 죽은 부모의 시신을 금관에 넣어 장사하고, 옥관에 넣어서 장사한들 무슨 소용 있는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이 없는데, 장사에 모든 것을 기울여 한다 해도, 소용이 없다 했습니다. 자식 손으로 지옥 불구덩에 넣는 짓이 됩니다. 먼저 네가 복음을 듣고, 부모에게 복음을 전하여, 참 부모, 참 진리자식이 되라 합니다. 기독교의 효도를 세 가지면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살아계신 부모에게는 예수믿게 하여 영생, 구원, 복음, 내세의 천국에 대한 대접을 해야 합니다. 부모 노릇 하고 자식 노릇을 주안에서 할 때에만, 참 효도입니다. 둘째: 천국 간 증인부모님의 소원은 천국에서 큰자, 열고을 권세, 영광자 상급자 되는 것이니. 큰자 되게, 잘 믿는 성도가 됩시다. 셋째: 지옥간 부모의 소원을 듣는 자식이 참 효도하는 자입니다. 고통 받는 곳에 가지 않는 자 식이 됩시다. 기독교의 효도 되로, 진리대로 살아서 우리 모두 금생과 내생에 영광자 존귀자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3대가 함께 사는 가정/ 히11:3-11/ 어버이주일설교/ 2001-05-08
3대가 함께 사는 가정 히11:3-11 지난 월요일 무의탁 노인들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여전도 회원들이 모은 구제비를 가지고 임원들과 함께 담양군 용면 추성리 그러니까 담양댐 상류 골짜기에 사는 장씨 할머니와 김씨 할머니 댁이었습니다. 김씨 할머니는 단간 방 뿐인 좁은 집에서 홀로 사는데 아들 하나 있지만 소식이 끊어진지 오래라고 했습니다. 귀가 어두워져서 말도 알아듣지 못하고 돈을 드려도 어떻게 어디다 써야할 줄도 모르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이장에게 봉투를 건네주고 할머니에게 잡수실 것도 대접하고 유익하게 사용해 주시라고 하였습니다. 할머니들은 마을에 또 한 분 어려운 분이 있다면서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들을 보이셔서 가 보았습니다. 할머니들이 도시 변소 칸 보다 못한 집에 산다고 하더니 그런 헛간 같은 곳에 한쪽은 방이고 한 쪽은 부엌이었습니다. 75세라고 하는데 거동이 불편하지만 교회를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마침 어디 나가고 계시지 않아서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을 전하고 왔습니다. 또 4가정을 더 찾아보았습니다. 만나지 못한 분들은 면사무소를 찾아가서 부면장에게 전하고 왔습니다. 잘 찾아왔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우리 여전도 회원들의 작은 정성을 하나님께서 무척 기뻐하시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시골 교회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에게 송금한 금액도 그렇게 유용하게 쓰일 것입니다. 할머니들 나이가 80이라고 하면, 1910년대에 출생한 분들입니다. 구 한말 어려웠던 시대에나서 일제 시대와 해방, 그리고 6·25동란 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배고팠던 날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광야 인생을 살고 늙고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11:10)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3대가 한 가정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비록 저들은 좋은 집이 아니라 장막에 거하고 있었고 큰 어려움도 많았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유대의 왕들이 출생하였고 나중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셨습니다. 육신적으로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 손자 야곱과 3대가 함께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순종하여 나가는 길에 하란에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약 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렀을 때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가야 했고, 그곳에서는 아내를 잃을 위기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언약의 자손을 얻으려고 아내의 몸종 하갈을 맞아 아이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가정에 불화가 컸습니다. 그의 나이 1백세가 되어서야 언약의 자손 이삭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백75세에 죽기까지 가나안 땅에서 살았습니다. 광야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175세에 일생을 마치니 그의 아내가 먼저 묻혔던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늙어서 175세로 세상을 떠날 때, 아들 이삭은 75세의 노인이 되었고, 손자 야곱은 15세 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3대가 함께 살았습니다. 이삭도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창27:1)라고 하였습니다. 그도 늙고 쇠약해졌습니다.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장사 지낸바 됩니다. 그의 나이 1백 8십세 였습니다(창35:29). 야곱도 아들 요셉이 총리가 된 애굽 땅에 가서 살다가 세상을 떠나 조상들이 묻힌 막벨라 굴에 묻혔습니다. 누구나 세상에 사는 동안 항상 평안(平安)하지만 않습니다. 어느 시대 누구라도 인생 광야 길은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야곱이 노년에 애굽에 내려가서 바로 왕을 만나서 한 말이 있습니다.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하였습니다. 내 인생 길이 험악했다는 고백입니다. 자녀들은 일생을 살아오면서 고생 많이 하신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세상을 살다가 갈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가족간에나 일가 친척 간에 어른을 향하여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는 말씀대로 효도해야 합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인륜 가운데 첫째 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섬겨서 효도하는 후손에게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불효하는 자에게는 화가 미친다고 하셨습니다. 험악한 세상을 살아온 부모를 섬겨 효도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했습니다.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21:15) 했습니다. 이런 계명을 주신 하나님이 불효자를 징벌하실 것이요, 효도하는 자에게는 축복하십니다. 부모님이 살면 얼마나 더 삽니까? 힘들고 어렵더라도 효도하십시오. 큰복을 누릴 것입니다. 자녀를 향하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유업을 이을 자로 믿음 안에서 살게 하여야 합니다. 저들도 자라면 어른들과 같이 험악한 인생 광야를 가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2. 아브라함 일가는 언약을 바라면서 소망 중에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 광야 길이 겹겹의 장애물이요 험난한 길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하신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니라\"(창12:2)는 말씀대로 \"육축과 은금이 풍부\"(창13:1)하였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24:1)주셨습니다. 아내 사라는 나이 늙었으나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잉태하여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11:10) 하였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약속을 다 보지 못하였지만,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면서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했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거친 인생 광야를 가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불평이나 불만보다는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회 있는 대로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성경은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5:17) 했습니다. 믿음 안에서 화목하게 살아야 합니다. 야곱도 청년의 때에 욕심도 많고 경건하지 못하여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내가 넷에 12아들을 두었는데 가정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많았습니다. 나중에는 경건한 믿음의 인물이 되었지만 그도 조상들의 가는 길로 갔습니다. 우리의 인생 길이 거칠고 험하여도 아브라함과 같이 인생 나그네 길에 순례의 길임을 알고 불평하지 맙시다. 포기하지도 맙시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이 땅에 보냈으니 내 인생 순례를 다하는 그 순간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소망의 세계를 바라봅시다. 이 세상 소망은 무너져도 하늘에 예비한 하나님의 축복은 영원합니다. 가족의 믿음 안에서 가정 천국을 이룹시다. 조선시대에 백성들의 신분은 양반과 평민이 있었는데 백정은 평민 보다 더 천대를 받았습니다. 백정은 기와집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비단 옷이나 짚신도 신을 수 없었고 담배도 피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 지나갈 때도 길옆으로 비켜서서 허리를 구부리고 있어야 했으며, 길을 걸을 때도 허리를 구부리고 뛰어 가듯이 껑충거리며 다녀야 했답니다. 상투를 틀 수도 없고 아들을 날 때까지 머리를 묶지도 못했으며 망건도 쓰지 못했습니다. 혼인을 할 때도 말 대신에 소를 타야 하는 철저하게 비천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박씨라는 백정이 장티푸스에 걸렸습니다.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아서 죽을 형편이 되었는데 에비슨 의사(선교사)가 집에 찾아가서 치료를 해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집안 식구가 예수를 믿었고 아들은 교육을 받고 세브란스 의학 1회 졸업을 해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박씨는 예수를 믿고 백정들에게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장로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 믿고 장로가 되었으니 복스럽게 변화 받은 분입니다. 교회에서야 평민 양반 구별이 없었습니다. 백정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천하보다 귀한 생명입니다. 양반이라 하여 백정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자랑할 수 없는 것이 교회입니다. 유덕용 목사님은 우리 총회신학교를 나와서 우리 교단 목사가 되었습니다. 내가 3학년일 때에 학교의 특별 초청을 받아서 설교를 했습니다. 청년 시절에 문둥병에 걸려서 짐승처럼 천대를 받으면서 소록도로 끌려갔었다고 합니다. 차라리 죽고 싶어서 얼마 동안 식음을 중단하였는데, 어느 간호원의 격려와 사랑으로 교회를 나갔답니다. 그리고 예수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고 간증합니다. 손가락이 끊어져 나가 버린 몽당 손을 보이면서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께로 나가는 축복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눈물이 핏방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눈물은 다시 감사의 눈물이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인생 절망의 깊은 늪에서 다시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교인들이 목사님의 손을 맞잡고 반기면서 위로합니다. 예수 안에는 건강한 사람이나 흉악한 병에 걸리고 불구가 된 사람이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놀랍게 변화한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직도 거룩하지 못하고 경건하지 못하는 죄와 허물이 많은데도 하나님 앞에서 여러 가지로 신분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대속하시고 죄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혔던 죄의 담을 헐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에 떨어졌던 우리를 하나님 나라 백성 삼아 주시고 모든 믿는 자들과 믿음의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생각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밖에 있어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1-12)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을 이방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언약 백성의 상징으로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이방인에게는 무할례당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불쌍한 인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조상 적부터 하나님의 여러 가지 언약을 소망 삼고 살았는데 이방인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이방인에게도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어느 민족이라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생각하면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허물과 죄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죄인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목자 없는 양같이 인생 길에서 방황하였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 자랑을 좇아 끝없는 욕망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세상 권세를 잡은 마귀의 올무에 걸려서 운명론(運命論)과 사주팔자(四柱八字)에 인생을 포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4:16) 하였는데, 그 예언의 말씀대로 어두움에 살던 우리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은혜를 깊이 생각하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각양 은혜를 주실 것을 소망 중에 인내해야 합니다. 평탄한 길을 갈 때 감사하고 어려움이 있을 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 은혜로 죄로 막힌 담이 무너졌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2:14)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혔던 담을 헐어 버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죄인들은 자신의 공력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갈 길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씻어 정케 하시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가로막혔던 담도 무너졌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이 없이 십자가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민족이나 신분이나 성별의 차이가 없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곳에 들어가면 사형에 처한다는 경고문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방인들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마27:51). 이것은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은혜를 사모하면서 전능하시고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건물을 이어주는 모퉁이 돌이 되셨습니다. 빌레몬서에 보면 빌레몬이 그의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믿음의 형제로 맞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유인이요, 재산이 많은 빌레몬이나 종 신세가 되었던 오네시모가 예수님 안에서 같은 하늘 나라 시민입니다. 예수를 믿는 저들은 세상 제도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주인이었던 빌레몬은 자기의 노예 오네시모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세상 적으로 보면 종의 신분에서 자유를 얻은 자였지만 자원하여 복음을 위해 바울을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나 빌레몬이나 오네시모나 변해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그 지체가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선교사님과 동역 하면서 외국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을 섬깁니다. 장애자들의 영혼을 귀하게 여겨서 위로하고 돕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남과 북의 성도들이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는 하나가 되기가 어려운 장애물이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부부가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가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교회 성도들이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계속하여 지어쪄 가는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공사 중인 사람들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온전하게 되어야 합니다. 이방인들이 유대인 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져 가고 있음을 알고 이해하고 도와야 했습니다. 우리가 성도들을 볼 때에 완전하기를 기대하면 안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의 형상을 닮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공사가 진행 중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소망 중에 바라보고 기대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담을 헐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예배와 기도와 찬양으로 아버지 앞에 나가야 합니다. 또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을 헐어 주었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지역이나 민족 또는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부족함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같은 교회 성도이던지, 부부간이던지, 부모와 자녀간이든지, 친구간이거나 이웃간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변화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갑시다.
3대가 함께 사는 가정/히11:3-11 2001-11-21 14:10:18 read : 26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난 월요일 무의탁 노인들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여전도 회원들이 모은 구제비를 가지고 임원들과 함께 담양군 용면 추성리 그러니까 담양댐 상류 골짜기에 사는 장씨 할머니와 김씨 할머니 댁이었습니다. 김씨 할머니는 단간 방 뿐인 좁은 집에서 홀로 사는데 아들 하나 있지만 소식이 끊어진지 오래라고 했습니다. 귀가 어두워져서 말도
3대가 함께 사는 가정/히11:3-11 2001-11-21 14:10:18 read : 26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난 월요일 무의탁 노인들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여전도 회원들이 모은 구제비를 가지고 임원들과 함께 담양군 용면 추성리 그러니까 담양댐 상류 골짜기에 사는 장씨 할머니와 김씨 할머니 댁이었습니다. 김씨 할머니는 단간 방 뿐인 좁은 집에서 홀로 사는데 아들 하나 있지만 소식이 끊어진지 오래라고 했습니다. 귀가 어두워져서 말도 알아듣지 못하고 돈을 드려도 어떻게 어디다 써야할 줄도 모르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이장에게 봉투를 건네주고 할머니에게 잡수실 것도 대접하고 유익하게 사용해 주시라고 하였습니다. 할머니들은 마을에 또 한 분 어려운 분이 있다면서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들을 보이셔서 가 보았습니다. 할머니들이 도시 변소 칸 보다 못한 집에 산다고 하더니 그런 헛간 같은 곳에 한쪽은 방이고 한 쪽은 부엌이었습니다. 75세라고 하는데 거동이 불편하지만 교회를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마침 어디 나가고 계시지 않아서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을 전하고 왔습니다. 또 4가정을 더 찾아보았습니다. 만나지 못한 분들은 면사무소를 찾아가서 부면장에게 전하고 왔습니다. 잘 찾아왔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우리 여전도 회원들의 작은 정성을 하나님께서 무척 기뻐하시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시골 교회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에게 송금한 금액도 그렇게 유용하게 쓰일 것입니다. 할머니들 나이가 80이라고 하면, 1910년대에 출생한 분들입니다. 구 한말 어려웠던 시대에나서 일제 시대와 해방, 그리고 6·25동란 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배고팠던 날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광야 인생을 살고 늙고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11:10)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3대가 한 가정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비록 저들은 좋은 집이 아니라 장막에 거하고 있었고 큰 어려움도 많았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유대의 왕들이 출생하였고 나중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셨습니다. 육신적으로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 손자 야곱과 3대가 함께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순종하여 나가는 길에 하란에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약 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렀을 때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가야 했고, 그곳에서는 아내를 잃을 위기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언약의 자손을 얻으려고 아내의 몸종 하갈을 맞아 아이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가정에 불화가 컸습니다. 그의 나이 1백세가 되어서야 언약의 자손 이삭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백75세에 죽기까지 가나안 땅에서 살았습니다. 광야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175세에 일생을 마치니 그의 아내가 먼저 묻혔던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늙어서 175세로 세상을 떠날 때, 아들 이삭은 75세의 노인이 되었고, 손자 야곱은 15세 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3대가 함께 살았습니다. 이삭도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창27:1)라고 하였습니다. 그도 늙고 쇠약해졌습니다.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장사 지낸바 됩니다. 그의 나이 1백 8십세 였습니다(창35:29). 야곱도 아들 요셉이 총리가 된 애굽 땅에 가서 살다가 세상을 떠나 조상들이 묻힌 막벨라 굴에 묻혔습니다. 누구나 세상에 사는 동안 항상 평안(平安)하지만 않습니다. 어느 시대 누구라도 인생 광야 길은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야곱이 노년에 애굽에 내려가서 바로 왕을 만나서 한 말이 있습니다.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하였습니다. 내 인생 길이 험악했다는 고백입니다. 자녀들은 일생을 살아오면서 고생 많이 하신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세상을 살다가 갈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가족간에나 일가 친척 간에 어른을 향하여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는 말씀대로 효도해야 합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인륜 가운데 첫째 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섬겨서 효도하는 후손에게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불효하는 자에게는 화가 미친다고 하셨습니다. 험악한 세상을 살아온 부모를 섬겨 효도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했습니다.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21:15) 했습니다. 이런 계명을 주신 하나님이 불효자를 징벌하실 것이요, 효도하는 자에게는 축복하십니다. 부모님이 살면 얼마나 더 삽니까? 힘들고 어렵더라도 효도하십시오. 큰복을 누릴 것입니다. 자녀를 향하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유업을 이을 자로 믿음 안에서 살게 하여야 합니다. 저들도 자라면 어른들과 같이 험악한 인생 광야를 가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2. 아브라함 일가는 언약을 바라면서 소망 중에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 광야 길이 겹겹의 장애물이요 험난한 길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하신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니라"(창12:2)는 말씀대로 "육축과 은금이 풍부"(창13:1)하였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24:1)주셨습니다. 아내 사라는 나이 늙었으나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잉태하여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11:10) 하였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약속을 다 보지 못하였지만,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면서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했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거친 인생 광야를 가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불평이나 불만보다는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회 있는 대로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성경은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5:17) 했습니다. 믿음 안에서 화목하게 살아야 합니다. 야곱도 청년의 때에 욕심도 많고 경건하지 못하여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내가 넷에 12아들을 두었는데 가정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많았습니다. 나중에는 경건한 믿음의 인물이 되었지만 그도 조상들의 가는 길로 갔습니다. 우리의 인생 길이 거칠고 험하여도 아브라함과 같이 인생 나그네 길에 순례의 길임을 알고 불평하지 맙시다. 포기하지도 맙시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이 땅에 보냈으니 내 인생 순례를 다하는 그 순간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소망의 세계를 바라봅시다. 이 세상 소망은 무너져도 하늘에 예비한 하나님의 축복은 영원합니다. 가족의 믿음 안에서 가정 천국을 이룹시다. 조선시대에 백성들의 신분은 양반과 평민이 있었는데 백정은 평민 보다 더 천대를 받았습니다. 백정은 기와집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비단 옷이나 짚신도 신을 수 없었고 담배도 피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 지나갈 때도 길옆으로 비켜서서 허리를 구부리고 있어야 했으며, 길을 걸을 때도 허리를 구부리고 뛰어 가듯이 껑충거리며 다녀야 했답니다. 상투를 틀 수도 없고 아들을 날 때까지 머리를 묶지도 못했으며 망건도 쓰지 못했습니다. 혼인을 할 때도 말 대신에 소를 타야 하는 철저하게 비천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박씨라는 백정이 장티푸스에 걸렸습니다.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아서 죽을 형편이 되었는데 에비슨 의사(선교사)가 집에 찾아가서 치료를 해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집안 식구가 예수를 믿었고 아들은 교육을 받고 세브란스 의학 1회 졸업을 해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박씨는 예수를 믿고 백정들에게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장로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 믿고 장로가 되었으니 복스럽게 변화 받은 분입니다. 교회에서야 평민 양반 구별이 없었습니다. 백정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천하보다 귀한 생명입니다. 양반이라 하여 백정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자랑할 수 없는 것이 교회입니다. 유덕용 목사님은 우리 총회신학교를 나와서 우리 교단 목사가 되었습니다. 내가 3학년일 때에 학교의 특별 초청을 받아서 설교를 했습니다. 청년 시절에 문둥병에 걸려서 짐승처럼 천대를 받으면서 소록도로 끌려갔었다고 합니다. 차라리 죽고 싶어서 얼마 동안 식음을 중단하였는데, 어느 간호원의 격려와 사랑으로 교회를 나갔답니다. 그리고 예수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고 간증합니다. 손가락이 끊어져 나가 버린 몽당 손을 보이면서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께로 나가는 축복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눈물이 핏방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눈물은 다시 감사의 눈물이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인생 절망의 깊은 늪에서 다시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교인들이 목사님의 손을 맞잡고 반기면서 위로합니다. 예수 안에는 건강한 사람이나 흉악한 병에 걸리고 불구가 된 사람이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놀랍게 변화한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직도 거룩하지 못하고 경건하지 못하는 죄와 허물이 많은데도 하나님 앞에서 여러 가지로 신분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대속하시고 죄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혔던 죄의 담을 헐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에 떨어졌던 우리를 하나님 나라 백성 삼아 주시고 모든 믿는 자들과 믿음의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생각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밖에 있어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1-12)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을 이방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언약 백성의 상징으로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이방인에게는 무할례당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불쌍한 인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조상 적부터 하나님의 여러 가지 언약을 소망 삼고 살았는데 이방인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이방인에게도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어느 민족이라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생각하면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허물과 죄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죄인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목자 없는 양같이 인생 길에서 방황하였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 자랑을 좇아 끝없는 욕망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세상 권세를 잡은 마귀의 올무에 걸려서 운명론(運命論)과 사주팔자(四柱八字)에 인생을 포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4:16) 하였는데, 그 예언의 말씀대로 어두움에 살던 우리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은혜를 깊이 생각하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각양 은혜를 주실 것을 소망 중에 인내해야 합니다. 평탄한 길을 갈 때 감사하고 어려움이 있을 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 은혜로 죄로 막힌 담이 무너졌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2:14)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혔던 담을 헐어 버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죄인들은 자신의 공력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갈 길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씻어 정케 하시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가로막혔던 담도 무너졌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이 없이 십자가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민족이나 신분이나 성별의 차이가 없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곳에 들어가면 사형에 처한다는 경고문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방인들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마27:51). 이것은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은혜를 사모하면서 전능하시고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건물을 이어주는 모퉁이 돌이 되셨습니다. 빌레몬서에 보면 빌레몬이 그의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믿음의 형제로 맞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유인이요, 재산이 많은 빌레몬이나 종 신세가 되었던 오네시모가 예수님 안에서 같은 하늘 나라 시민입니다. 예수를 믿는 저들은 세상 제도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주인이었던 빌레몬은 자기의 노예 오네시모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세상 적으로 보면 종의 신분에서 자유를 얻은 자였지만 자원하여 복음을 위해 바울을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나 빌레몬이나 오네시모나 변해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그 지체가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선교사님과 동역 하면서 외국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을 섬깁니다. 장애자들의 영혼을 귀하게 여겨서 위로하고 돕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남과 북의 성도들이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는 하나가 되기가 어려운 장애물이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부부가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가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교회 성도들이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계속하여 지어쪄 가는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공사 중인 사람들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온전하게 되어야 합니다. 이방인들이 유대인 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져 가고 있음을 알고 이해하고 도와야 했습니다. 우리가 성도들을 볼 때에 완전하기를 기대하면 안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의 형상을 닮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공사가 진행 중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소망 중에 바라보고 기대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담을 헐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예배와 기도와 찬양으로 아버지 앞에 나가야 합니다. 또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을 헐어 주었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지역이나 민족 또는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부족함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같은 교회 성도이던지, 부부간이던지, 부모와 자녀간이든지, 친구간이거나 이웃간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변화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갑시다.
가르치라 /잠22:4-6 2012-08-17 15:50:10 read : 8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교사는 아버지이다. 2. 아버지 보다 더 좋은 교사는 어머니이다. 3. 어머니 보다 더 좋은 교사는 따뜻한 가정이다. 4. 가정 보다 더 좋은 교사는 성경이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거니와 영혼을 지키는 자는 이를 멀리 하느니라 마땅히 행
가르치라 /잠22:4-6 2012-08-17 15:50:10 read : 8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교사는 아버지이다. 2. 아버지 보다 더 좋은 교사는 어머니이다. 3. 어머니 보다 더 좋은 교사는 따뜻한 가정이다. 4. 가정 보다 더 좋은 교사는 성경이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거니와 영혼을 지키는 자는 이를 멀리 하느니라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언 22장 4-6절) 오늘은 어린이와 가정을 더욱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는 가정, 신약에는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 두 기관만 건강하면 모든 것은 다 건강하리라 생각합니다. 가정의 꽃은 어린이 입니다. 어린이가 없는 가정은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린이들에 대해서는 예수님도 관심을 많이 가졌습니다.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했습니다. 우리나라 유교 전통에 의하면 어린이를 비하하는 관습이 많았으나 근래에는 어린이를 참으로 귀하게 생각하는 서양문화가 정착이 되어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서양문화라기 보다는 성경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하고 미래의 주인공들인 이 어린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한번 생각해 봅니다. 종교심리학자들에 의하면 6-8살 때에도 회심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10-11살 때 가장 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12-16살 때는 가장 확고하게 변화의 경험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0세가 넘어가면 이 변화의 속도가 급속하게 줄어든다고 합니다. 그러니 20세 이전에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년이 되면 종교교육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성인이 되어서는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환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떤 계기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순수하기 때문에 그 깨끗한 마음에 신관을 심어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어서 확실하게 어려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시절에 철저하게 오전 시간에는 성경을 가르쳐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의식화시켜 그 심령 속에 신 개념을 확실하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처럼,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서도 그것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자녀에게 마땅히 행할 것을 누가 어디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는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교사는 아버지입니다.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아버지라는 존재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어린 자녀들이 어렸을 때 누구를 가장 많이 모방합니까? 바로 아버지를 가장 많이 모방하고 아버지를 따르려고 합니다. 특히 아들들은 어렸을 때 미래의 꿈을 물어 보면 자신의 아버지처럼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그런 아버지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손을 잡고 교회에 같이 나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여 줄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슈바이처박사는 말합니다. “나는 유년 시절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서 성전에 나아가서 예배에 참석함으로써 경건을 배우게 되었다” 라고 회고 있습니다. (예화) 미국의 농림장관을 지낸바 있는 ‘몰튼’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내가 막내 아들을 낳다가 그만 난산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내의 제삿날이 되면 아들들을 데리고 아내의 묘소에 찾아갔답니다. 그곳에 가는 묘비에 이렇게 쓰여져 있다고 합니다. <스톨링 몰톤의 아내, 그리고 조이, 폴, 마크 몰톤의 어머니, 프랑스 여인 캐롤라인 여기에 잠들다> 이것을 보면 이렇게 이야기 한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기 잠드신 어머니를 슬프게 하는 일을 하거나, 욕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으면 이 묘비에서 그 이름을 빼버리겠다.” 이 준엄하고 경건한 아버지의 말씀 한마디가 얼마나 멋진 교육이며, 훌륭한 교사입니까? 그런 아이들이 커서 어찌 세상에서 그릇되게 살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둘째로 아버지 보다 더 좋은 교사는 어머니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보다 더 좋고, 정다운 사람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어머니가 아니고 엄마입니다. 아이들도 엄마, 시집가서도 여전히 엄마입니다. 어떤 분은 60이 되어서도 엄마라고 부릅니다. 포학했던 연산군도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호소하기를 “나도 어머니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라고 했다 합니다. 연산군이 그렇게 포학했던 것은 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합니다. 그 만큼 어머니의 비중과 역할이 큰 것입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갔다 오면 어머니가 있든 없든, 어머니를 찾습니다. 그 이유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공했다하는 사람 배후에는 의례적으로 이름있는 어머니들이 숨어 있습니다. 나폴레옹 말하기를 “자식의 운명은 언제나 그 어머니가 만든다”하면서 강조한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 여인들이여 훌륭한 어머니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래야 모든 자녀가 훌륭해 질수 있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서양 격언에 이런 말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훌륭한 어머니는, 백사람의 교사보다 낫다”라 했습니다. 백사람의 스승한테서 받는 영향력이 지대하지만, 그러나 그 보다도 한 사람의 훌륭한 어머니한테서 받는 영향은 이 보다도 더 크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존재와 그 영향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예화) 아브라함 링컨은 9세에 어머니 낸시 여사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두고 임종하기 직전에 불러 놓고 이렇게 유언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늘 성경을 읽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라,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기도하기를 힘써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이다.” 그 어머니 낸시 여사는 평상시에도 통나무에 앉아서 성경을 읽어주곤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야기 합니다. 링컨이 노예해방운동을 전개한 것은 바로 이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의 영향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아이들에게 마땅히 행할 바를 어려서 가르치면 그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스승이고, 어머니의 무릎은 학교이고, 어머니의 말씀은 교과서이고, 어머니의 눈동자는 교육의 정신인 것입니다. 어머니가 이렇게 중요한 사람이기에 어머니가 잘 못했을 때에는 엄청난 악영향을 자녀들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예화) 네로황제의 어머니는 성품이 그렇게 포학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네로가 역사상 가장 포악한 군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히틀러는 그렇게 포학하고 잔인한 사람이 된 것이 행실이 바르지 못한 어머니의 영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히틀러가 가장 경멸하는 사람이 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여자이고, 유태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려서 히틀러 아버지는 행상이었는데 멀리 아버지가 장사를 떠나면 그의 어머니는 오랜 시간을 참지 못하여 옆집 유태인 남자와 같이 바르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마다 히틀러는 제발 그러지 말라 해도 어머니는 돌아서지 않았다 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상처를 많이 받고 자랐고 그런 그가 나중에 최고 리더의 위치가 되자 그렇게 포학하고 잔인한 사람이 되어 유태인들을 600만 명이나 죽이게 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 온 것입니다. 그러니 어머니의 영향이라는 것이 대단하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왕이면 훌륭한 어머니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처럼, 요한 웨슬레 어머니처럼 수잔나처럼, 그리고 성경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와 같은 훌륭한 어머니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어머니 보다 더 좋은 교사는 바로 따뜻한 가정입니다. 가정은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가정은 피와 애정으로 뭉쳐진 장소입니다. 가정은 상호 경쟁하는 이해 집단이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가 있는 세상도 아닙니다. 네 것 내 것이 없는 혈육의 집단입니다. 그래서 페스탈로찌는 말하기를 “가정은 도덕의 학교다” 했습니다. 그곳에는 안식이 있습니다. 평안도 있습니다. 하루종일 밖에 나가서 일하던 사람이 저녁이 되면 모두 다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곳에는 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환경이라면 그곳이 초막일지라도, 궁핍할지라도, 그곳은 훌륭한 학교요 스승이요 교사입니다. 여러분 비행청소년들에게는 한 가지 뚜렷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좋은 가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부모가 때로는 있고, 부자 아버지와 유명 인사인 어머니가 있을지는 몰라도 좋은 교육처로서의 가정은 없고 안식할 만한 곳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밖으로 도는 것입니다. ‘Sweet Home’이 되어야 합니다. 따뜻한 가정을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노력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기술이 필요합니다. 넷째로 가정 보다 더 좋은 교사는 바로 성경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무엇을 가르치라는 말입니까? 마땅히 행할 길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성경의 말씀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가르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학교에 갔다 오면 피아노, 컴퓨터, 주산 웅변, 영어, 수학, 미술, 등등 정신이 없을 정도입니다. 여기서 가르치라는 말은 어떤 기능을 가르치라는 말이 아니라, 궁극적인 것,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하나님이 없는 교육은 약삭빠른 악마를 생산할 뿐이다” 라 했습니다. 교육을 하되 요령만 가르치고 기능만 가르치면 고등 사기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즈음 많이 배운자들이 더 크게 도둑질한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배우기는 배웠는데 하나님의 없는 교육이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신학자 내촌감상은 말하기를 “가정 건설에서 예수가 빠진 가정은 집단이지, 가정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2차 대전때 유태인을 600만명 학살한 히틀러의 일급 참모였던 괴링은 사형을 당하기 직전에 남긴 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내 어린 딸을 교회에 보내 달라” 하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때에 비로서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알았고, 성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그때에야 깨달은 것입니다. 종교심리학자들은 자녀들이 어려서 잘 받아들이고 액면 그대로 수용하는 6살에서 16세 이전에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20세가 넘으면 성경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어렸을 때 보다는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가능한 어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각인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화) 사실이 아이들이 어리면 시간 맞추어 교회에 데리고 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주일날 아침이 되면 정신이 없습니다. 어느 성가대원 어머니가 아이가 여섯입니다. 그런데도 언제나 보면 제시간에 도착합니다. 그것도 여섯 아이를 모두 데리고 말입니다. 그래서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쩔쩔매는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여섯 아이를 모두 데리고 늦지 않게 오는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그랬더니 아주 쉽게 대답해 주는 것입니다. “토요일 밤에는 옷을 모두 입혀서 재우면 되거든요” 이 얼마나 지혜로운 여인입니까? 옷은 좀 구겨질지 모르지만, 대신 자녀들의 영혼은 구겨지지 않게 키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어머니라고 생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가정이라면 훌륭한 자녀들이 만들어지리라 생각이 되어 집니다. 여러분,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과연 나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얼마나 훌륭한 교사역할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 가정은 과연 달콤한 가정인가?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얼마나 성경을 자녀들에게 중요한 가치라 생각하여 자주 가르치고 있는가? 마땅히 행할 바라를 가르치는 가정들이 되어서 위대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시기를 바랍니다.
가르침을 지켜 행합시다 /신5:16 2014-06-02 15:02:52 read : 7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신 5:16)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늙으면 섧다네. 눈 어두워 그렇지. 돋 보기 안경 쓰고 확대경 손에 드나 그래도 안보여 두 번, 세 번 살핀다네. 늙으면 섧다네. 귀먹어 그렇지. 남의 소리 반타작. 묻기 뭣해
가르침을 지켜 행합시다 /신5:16 2014-06-02 15:02:52 read : 7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신 5:16)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늙으면 섧다네. 눈 어두워 그렇지. 돋 보기 안경 쓰고 확대경 손에 드나 그래도 안보여 두 번, 세 번 살핀다네. 늙으면 섧다네. 귀먹어 그렇지. 남의 소리 반타작. 묻기 뭣해 지나고, 재빠른 전화 소리는 정말 듣기 힘들다네. 늙으면 섧다네. 무시당해 그렇지. 수에도 치지 않는 젊은이의 풍조로다. 무언가 저들끼리만 쑥덕쑥덕 하누나. 늙으면 섧다네. 짝 잃으니 그렇지. 백년해로 약속 어겨 어느 한 쪽 먼저 가니 남은 쪽 외로움이야 일러 무엇하리요. 늙으면 섧다네. 병들어 그렇지. 내 몸은 내 몸이나 내 맘대로 못하니 옆에서 돌보지 않으니 꼼짝 못해 답답하지.” (한영선 목사 “늙은이는 서럽다네) 모세는 시내 산에서의 언약과 십계명에 대해 회고하며 율법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앞날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현재 그의 가르침을 듣고 있는 신세대들에게 과거에 그들의 부모 세대에 주어진 율법이 어떻게 적용되었는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주며 여호와께서 명령하셨다고 합니다. 모세는 새로운 세대들에게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 (민5:2)다고 말하고 그 율법 언약이 이스라엘의 열조와 세운 것이 아니라 지금 가르침을 듣고 있는 새로운 세대들과 세운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듣는 새로운 세대의 대부분은 호렙 산에서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던 때에 있지 않고 광야 생활에서 태어난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우리'라는 말을 사용해서 이 새로운 세대가 호렙 산의 율법 언약에 동참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언약의 적용이 단순히 그 율법을 받았던 세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게 적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제 곧 가나안에 들어가려고 하는 시점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언약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제 새로운 세대로 구성된 이스라엘은 그 율법의 언약을 다시금 상기하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을 제일의 가치로 알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정복 사업에 충실해야 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주시고 지키도록 명령하시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죄와 죽음에서 건져내시는 구원자이심과 또한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도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정녕 그분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구하신 능력과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신 4:5)이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구원의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주권적 능력을 늘 기억하고 주신 율법을 지키는 일에 온 힘을 기울여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율법에 대한 순종의 자세만이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죄의 삯인 사망으로부터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십계명은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흔히 개혁주의자들은 1-4계명을 하나님에 관한 계명으로, 5-10계명을 사람에 관한 것으로 구분합니다. 모세는 이 십계명을 다시 상기 시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있어 유일한 가치 기준이 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1, 2계명은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으로 표현하거나 하나님이 그런 형상화된 존재인 것처럼 섬기지 말 것을 명합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는 우상 숭배에 해당됩니다. 또한 3계명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 것을 명하십니다. 여호와의 이름이란 바로 하나님의 신격 그 자체이므로 그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4계명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명합니다. 이 안식의 규례는 천지의 창조 와 구속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후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적 의미를 분명히 드러내게 됩니다. 이 안식일은 특히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집에 거하는 모든 사람은 물론 노동의 도구인 가축들도 쉬게 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주력하는 것이 안식일에 해야 할 일 이었습니다. 그리고 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간의 법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 됩니다. 이어 계속되는 계명들은 이웃 간에 선한 일을 통하여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내용들입니다. 이러한 이웃 사랑의 계명이 하나님 사랑의 계명과 대칭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구조가 바로 십계명의 양대 구조였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 만물에는 철저한 질서가 있습니다.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별들, 행성(行星)들 사이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작은 원자의 세계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동물의 세계에도 질서가 있고, 식물의 세계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모든 자연 만물은 이 질서를 깨뜨리지 않고 지켜갑니다. 우리는 자연의 질서를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철저한 위계질서가 있습니다. 바로 그 계명이 제5계명입니다. 인간 사회의 질서 가운데 최고의 질서는 바로 도덕적인 질서입니다. 요즘 도덕 얘기를 하면 구석기 시대 인간 취급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도덕적 질서가 깨지면 인류는 망합니다. 그것이 바로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이고, 소돔과 고모라 시대의 멸망 입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십계명을 가르쳤다합니다. 선생님이 종이에게 십계명을 간략하게 써서 나누어주고 외우게 시켰습니다. 아이들이 외우기 쉽게 종이에 복사를 해주면서 글씨를 모르면 부모님께 여쭤보고 집에서 꼭 외워오도록 숙제를 내주었다합니다. 집에서 가만히 보니까 큰 아이가 그걸 부지런히 외우고 있었다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제 5번 다섯번째 계명"하고서는 "네 부모를 공격하라”"네 부모를 공격하라”, 이렇게 외우고 있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애야, 자세히 봐. 어디가 공격이냐? 공격이 아니고 공경이야. 공경하라고 했어"했더니 그 아이 하는 말이 "아버지, 공격하고 공경하고 뭐가 달라요? 똑같은 것 아니에요?”하고 이상하다는 듯이 묻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어린애가 철이 없어 아직 낱말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한 얘기이나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공격"과 "공경"을 구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 노인들이 자식들의 공경을 받지 못하고 공격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공경(카베드 kabhed)라는 말은 "무겁다", "무게를 둔다'는 뜻으로 부모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인간적인 윤리 수준을 넘어서는 마음으로 부모를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무겁다는 말은 그만큼 책임이 크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얼마나 비중을 갖는 계명인지 알게 해 줍니다. 따라서 자녀가 부모를 높이고 두려워하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 하나님의 언약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동체는 부모와 자녀의 상호 관계로 이루어진 가정을 기본으로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킬 때 그 결과로서 복을 받는다는 말씀에 기록된 약속과 부모를 공경할 때 받을 복이 동일하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됩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신 4:40)합니다. 자녀에게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도록 가르치고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는 순환 속에서 부모와 자녀는 복에 대한 동일한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부모가 자녀에게 단지 육신을 낳아 준 부모로서만이 아니라 영적인 인도자의 위치에 서있다는 사실과 이에 따라 자녀들 역시 부모를 대할 때 곧 하나님의 가르침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처럼 부모를 공경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진리를 보여 줍니다. 부모공경에 대한 계명은 십계명 가운데서‘결코~해서는 안된다’라는 뜻의 부정어(로)가 전혀 사용되지 않는 유일한 명령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가져야할 태도를 부모에게 가져야할 태도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레위기19:3절은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표현과 함께 경외하라는 말은 부모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것은 육신의 부모가 하나님의 대행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부모님을 올바로 공경하지 못한다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며,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부모를 거역하는 죄를 가장 중요한 죄로 간주합니다.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21:15)”하시고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지니라(출21:17)”하시며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질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신21:18~21)”라고 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상습적으로 부모의 말을 거역하는 것까지 돌로 쳐서 죽일 죄라고 단정 지음으로 하나님께서 부모 공경의 율법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셨는지를 보여줍니다. 바울 사도는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딤전 5:4)고 합니다. 세계적인 사회학자인 토니 캄폴로(Tony Campolo)가 초등학교 2학년 시절 그가 살던 집은 복잡한 도시 한 복판이었고 유난히 횡단 도로가 많아서 어머니는 늘 옆집에 사는 6학년 누나에게 용돈을 주고 함께 학교로 가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나가 옆에 동행하는 것을 창피하게 느낀 어린 토니는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엄마에게 누나에게 줄 그 용돈을 자기에게 주면 자기 혼자 걸어가겠다고 우겼다고 합니다. 마침내 허락을 얻어 낸 그는 자기 또래의 아이들보다는 일찍 학교에 혼자 등교하는 아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나중에 커서 중학생이 되었을 때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이 얼마나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독립적인 소년인가를 자랑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토니의 어머니가 조용히 미소를 흘리면서 이런 말을 하시더랍니다.“네가 그때 혼자 학교 가겠다고 독립 선언을 한 후 너는 용돈도 생기고 자존심 세워서 편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토니야, 그때부터 2년 이상 이 엄마는 네가 학교 나설 때마다 몸을 숨기고 너를 따라 다녔고 네가 학교에서 귀가할 시간이면 나도 학교 모퉁이에 있다가 너를 따라 집으로 왔단다. 혹시나 혹시나 네게 이 엄마가 필요할 때가 있을까 해서 말이야” 이것이 바로 부모의 사랑입니다. 이런 부모의 사랑을 알고 이해하는 인생이라면 부모에게 효도함이 마땅하고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15-6년 전에 캘리포니아 주에서 조사된 바에 의하면 한인교포 학생들의 수학점수가 미국 학생들보다 갑절이나 높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합니다. 미국의 교육학자들이 그 원인을 조사해 보았다합니다. 연구 결과 매우 특이한 원인을 발견하였다 합니다. 한국 학생의 부모들의 열성적인 교육열이 아이들로 하여금 공부를 잘하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고, 입신양명의 전통적 가치관도 한국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그런데 실제로 당사자인 학생들에게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많은 아이들의 공통된 대답이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열심히 공부를 한다고 하더랍니다. 두 아들을 둔 할머니가 있었다합니다. 장남은 사업에 크게 성공했다합니다. 넓은 집과 풍성한 식탁, 호화스런 옷…. 남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풍족했다합니다. 둘째 아들은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했다합니다. 먹고 살기가 빠듯해 항상 정신이 없었다합니다. 더구나 자녀들이 많아서 더욱 생활이 어려웠다합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장남 집보다는 차남 집에 머물기를 더 좋아했다합니다. 하루는 장남이 어머니에게 말했다합니다. "동생은 먹고 살기도 힘들어요. 어머니가 그곳에 가시면 부담스러워해요. 제가 더 좋은 음식과 옷으로 잘 봉양할 테니 저희 집에서 사세요" 할머니는 넉넉한 웃음을 짓더니 "내게 필요한 것은 좋은 음식과 옷이 아니란다. 네 동생은 밤마다 내 등을 긁어준다. 학교에서 돌아온 손자들은 그 날의 재미있는 일들을 들려주지" 라고 말하더랍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에서도 또한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고 합니다. 한동안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책“연탄 길”(이철환)에 한 실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현태란 이름을 가진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늘 사고치고 친구들과 패싸움하고 심지어 절도까지...아무리 타일러도 막무가내인 아들, 언제 교도소로 들어갈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자식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마지막 충격 요법으로 아들이 교도소에 가기 전 자신이 먼저 교도소에 가서라도 자식의 교도소 행을 막아보겠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귀금속 가게에 들어가 마음에 없는 도적질을 하는체 하고 쉽게 붙잡혀 교도소에 간 후 면회 온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합니다.“아들아, 이 아버지를 용서해라.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아버지가 순간적으로 잘못을 저질렀다. 아버지가 이 모양이니 넌들 바른 길을 갈수가 있었겠니. 그러나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너는 꿈에라도 이런 곳을 기웃거려서는 안 된다. 교도소는 인간을 처참하게 만드는 곳이란다.” 그런데 이런 아버지를 면회하고 나오는 길에 어머니는 아들 현태를 붙잡고 통곡으로 절규하면서 폭탄선언을 한다합니다.“현태야, 할 말이 있다. 네 아버진 도둑질 같은 거 하지 않았어. 정말이다. 이 엄마가 네 아버지를 안다. 네 아버지는 절대 그런 일 하실 분이 아니다. 너 때문에 일부러 그러신 거야. 교도소가 사람 있을 곳 아니라는 걸 너에게 보여 주려고 생떼 같은 네 놈, 거기서 네 젊은 시절 다 보낼까봐서 네가 갈 그 곳에 미리 가셔서 네가 오는 걸 막아 보시려고” 현태는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충격, 이 아버지의 희생으로 아들 현태는 이 날부터 마음먹고 다시 태어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합니다. 검정고시 치르고 전문대학에 진학하여 새 인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합니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 가문의 성공 비결은 엄격한 가정교육에 있다합니다. 부시 대통령의 어머니 바버라 부시 여사는‘훈련소 조교’로 불릴 만큼 자녀들을 철저하게 훈육시켰다합니다.“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물건은 항상 제 자리에 놓아라. 귀가시간을 엄수하라.” 바버라 여사는 이런 글이 쓰인 쪽지를 자녀들의 방에 붙여놓았다 합니다. 한번은 아들 부시가 텍사스 주지사에 출마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자회견을 열어 아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합니다.“그것은 대통령의 아들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출마의사를 당장 철회해야 한다.” 부시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주지사 출마를 포기했다합니다. 세계의 명문가들은 대부분 이런 엄격한 교육과 순종을 통해 만들어졌다합니다. 그런데 다른 계명에는 없는 유일하게 이 계명에만 따르는 복의 약속이 있습니다. (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엡 6: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신 5:16)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고 행복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효심이 지극한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의 가정은 매우 가난해서 그의 어머니가 매일 가방에 물건을 가득 담아 상점에 배달하는 일을 했습니다. 소년은 어머니가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팠습니다. 왜냐하면 가죽으로 만든 가방이나 천으로 만든 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어머니가 땀을 뻘뻘 흘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소년이 어머니를 생각하며 종이로 가방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밑바닥이 네모난 종이 쇼핑백을 만들었는데 아주 깊숙했습니다. 가볍고 편리한 이 종이 쇼핑백의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고 발명자인 소년은 이 종이 백으로 말미암아 큰돈을 벌었습니다. 이 소년의 이름은 찰스 스틸웰 이라 합니다. 그가 어머니를 생각하며 1887년 발명했던 종이 쇼핑백으로 그는 가난을 극복하고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게 되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을 증거하는 한 예라 하겠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행하며 한 영혼을 전도하는 사명을 감당하되 어버이 주일을 지키며 어버이에 대한 가르침을 지켜 행하며 영광 돌리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가문에 없던 이름 /눅1:5-25, 57-66 2013-06-04 15:36:03 read : 15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자식이 부모의 뒤를 이어주는 것처럼 부모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물리적으로 대를 잇는 것만이 아니고 부모의 정신 · 가치관 · 가업을 이어주기를 대부분의 부모는 바랍니다. 영화 <친구>를 보면 선생님이 수업 중에 물어보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뭐하시노? 아버지 뭐하시노?’ 동수라는 학생이 대답합니다. ‘장의
가문에 없던 이름 /눅1:5-25, 57-66 2013-06-04 15:36:03 read : 15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자식이 부모의 뒤를 이어주는 것처럼 부모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물리적으로 대를 잇는 것만이 아니고 부모의 정신 · 가치관 · 가업을 이어주기를 대부분의 부모는 바랍니다. 영화 <친구>를 보면 선생님이 수업 중에 물어보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뭐하시노? 아버지 뭐하시노?’ 동수라는 학생이 대답합니다. ‘장의사를 하십니다.’ 동수가 삐뚤어지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자기 아버지처럼 장의사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가 노여워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내가 언제 너보고 장의사가 되라고 했느냐? 네가 뭔데 아버지가 일평생 하던 일을 무시하느냐?’ 아버지의 깊은 섭섭함이 담겨져 있는 말입니다. 반대로 영화 <대부 1편>을 보면 막내아들 알 파치노가 아버지 병원에 문안을 갔다가 아버지가 라이벌 갱에 의해 위험에 처해있는 것을 발견하고 재빨리 아버지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염려 마세요. 제가 함께 있습니다. 제가 앞으로 아버지를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아버지는 총을 여러 방 맞아서 중태에 있고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인데 그 아들의 말을 듣고 너무 좋아서 눈 가장자리에 눈물이 흐르는 모습을 보입니다. 정말로 가슴이 뭉클해지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을 보기 위해서라도 그 영화를 다시 보셔야 됩니다. 사실 그 아버지는 막내아들만큼은 마피아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정당한 직업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판사라든가 주지사라든가 상원의원이라든가. 그러나 가문의 위기 때문에 막내아들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마피아 보스가 된다는 줄거리 아닙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자식을 하나 내지는 둘만 낳고 자식에게 올인을 하다보니까 자식이 아버지의 복사본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 대통령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고 그것을 국민들이 흐뭇하게 생각하는 듯합니다. 뭔가 운명론적인 느낌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또 연예인이든, 운동선수든 부모의 후광을 입고 같은 분야에 진출하는 사람들이 많고 팬들이 그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그런 흐뭇한 감정을 자아내지 못하는 직업이 있다면 목사에요. 옛날만 해도 아들이 아버지 뒤를 이어 목사가 되는 것을 흐뭇하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교회세습 논쟁 때문에 그런 흐뭇함은 사라져 버리고 오히려 자식이 목사가 되지 않음으로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제가 미국에 살 때 알던 친구들을 보면, 이 설교를 본인들이 들으면 언짢아할지 모르지만, 자기의 삶을 자식이 그대로 답습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자기가 다니던 학교에 자식도 다니기를 바라고 자기가 유학을 갔기 때문에 자식도 유학을 가기를 바라고 자기가 가진 직업을 자식도 갖기를 바라고 자기의 생활수준을 자식도 누려주기를 바라고 심지어 자기가 다니는 컨트리클럽에 자식도 멤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자식이 아니고 복제인간이에요. 부모의 삶을 자식이 그대로 복사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생김새만 붕어빵이 아니고 사는 방식도 붕어빵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 마음속에 물어보고 싶어요. ‘자네는 자신이 그렇게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 자네가 누렸던 삶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느냐?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하느냐? 자식이 자네보다 더 나아야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느냐? 왜 자네와 똑같은 삶을 물려주기 위해 그렇게 안간힘을 쓰느냐?’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제 자신이 그렇게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고, 제가 이제껏 걸어온 길이 최선의 길이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제 아이가 저처럼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더 낫기를 바랍니다. 제가 걸어온 길이 저에게는 필요했을지 모르지만 저의 아이에게도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갈 길이 있고 자기의 운명이 있고 자기의 소명이 있습니다. 저는 그 믿음을 가지고 이제껏 살아왔고 제 아이도 그렇게 하기를 바래요. 이것은 극심한 개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개성대로 살면 되지 않느냐.’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제 자신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 삶은 저 한 사람이 사는 것으로 족하고 자식이 그것을 반복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하나님의 창의력, 하나님의 상상력이 역사할 기회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엄마들이 자식을 닦달하는 시대에는 어떻게 하나님의 창의력이 역사할 수 있습니까? 기도할 때는 하나님 뜻대로 해달라고 하면서 자식을 키울 때는 엄마의 뜻대로 키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하실 틈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느지막한 나이에 아들을 낳습니다. 경사가 났습니다. 이름을 지으려고 하는데 친족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사가랴라고 짓고자 합니다. 그때 엘리사벳이 대답하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친족들이 말하기를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그러면서 아버지 사가랴에게 물어봅니다. 사가랴는 지금 벙어리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사가랴가 서판을 달라고 해서 서판에 쓰기를 ‘그 이름은 요한이라’ 그 순간에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했습니다. 왜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었느냐. 하나님이 지시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장 13절에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이 요한이 바로 세례요한인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도 우리와 똑같이 생각했습니다. 아들을 낳으면 아버지의 이름대로 작명을 하고 아버지의 가업을 승계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조지 부시의 아버지 이름도 조지 부시인 것처럼. 이름이라는 것은 그냥 사람을 부르는 이름 이외에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운명, 그 사람의 사명, 역할 이런 것을 그 이름이 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죄에서 백성을 구한다는 뜻으로 예수라 하라고 천사가 명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가랴의 친척들이 아기에게 아버지의 이름대로 이름을 지어주려고 했는데 부모가 반대했어요.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친족 중에 이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 가문에 역사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이 아기가 가문에 없던 이름을 가짐으로 가문에 없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라는 이름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는 길을 예비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 아기가 그저 아버지의 이름을 이어받고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이전에 알 수 없었던, 아무도 한 적이 없었던,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님이 뜻하고 계획하신 일을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예수님을 믿었다고 그렇게 모태신앙을 따지고, 믿음의 유산을 강조하고, 어머니의 기도의 힘으로 자식이 주의 종이 되었다는 말하기를 좋아합니까.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예수님을 믿었다고.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120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몇 천 년이나 된 것처럼 행세를 하지 않습니까. 어머니의 기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그리고 기도도 하는 것이지, 어머니의 기도가 하나님의 섭리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기도를 하지만 기도를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이 부모의 기도에 힘입어 예수님을 믿은 게 아닙니다. 길선주 목사님이나 유관순 열사나 김익두 목사님이나 이승만 박사나 안창호 선생이나 서재필 박사나 이런 수많은 믿음의 종들이 가문의 전통에 의하여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에요. 한국교회의 성장에 모태가 된 수많은 목사님들이 모태신앙이어서 목사가 된 것이 아니에요. 부모에게 믿음을 배워서 훌륭한 목사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에 의하여 그 일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를 믿습니까. 아니면 부모의 신앙이 무슨 적립카드와 같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또 하나의 공로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데 가서 결제할 때 ‘적립되는 카드 있으세요?’라고 물어보면 ‘그런 것 없어요!’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즘처럼 바쁜 시대에 적립카드 찾아서 그런 레스토랑 찾아가고. 그러려면 아예 가지를 마세요. 저는 유명한 목사님들에게 비교할 수 없는 작은 존재지만, 모태신앙이어서 목사가 된 게 아닙니다. 저의 조상님들 중에는 목사는 물론 없고 집사도 없었어요. 교회 다니는 분들이 없었어요. 믿음의 유산을 이어 받아서 목사가 된 게 아닙니다. 제가 목사가 된 것은 가문의 놀람이었어요. 물론 지금은 다들 교회를 다니시지만. 하나님의 놀라움이 이런 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기도의 힘이라든가 믿음의 유산을 과대평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부모의 믿음의 그릇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을 우리는 하기 좋아하는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정말로 개천에서 용이 납니다. 그 말은 가문의 유산, 가문의 전통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들을 세우신다는 얘기에요. 다윗의 가문만을 봐서는 다윗을 이해할 수 없고, 아브라함의 조상을 봐서는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없고, 바울의 가문만을 봐서는 바울의 역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혈통과 가문을 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부르십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자식의 성적이 어머니의 성적이라고 생각하고, 자식의 믿음이 어머니의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한, 개천에서 용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보다 더 나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우리나라와 교회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의 이름도 아니고 가문에 있던 이름도 아니고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는 말은 이 가문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소명과 은사를 부여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할 수 없었던 일을 요한이 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에요. 미국을 신세계라고 불렀던 이유가 있습니다.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이 미국을 노래한 곡이었지요. 구세계는 유럽대륙을 말합니다. 유럽은 계급사회였습니다. 귀족과 평민 계급이 존재했습니다. 성직자도 계급에 속했습니다.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을 보면 귀족 자제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두 종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적색 옷을 입는 군대 장교가 되던가, 아니면 흑색 옷을 입는 성직자가 되는 것 중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대조적으로 미국은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시작한 국가였기 때문에 구세계의 계급이 더 이상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귀족과 평민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았어요. 과거 유럽의 출신이 어떠했든 미국에 오면 누구든지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누구든지 대통령이 될 수 있고 누구든지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미국의 정신이었습니다. 이것이 미국을 세계 모든 사람들이 가서 살고 싶은 나라가 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교회도 전통과 계급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목사가 될 수 있고 누구든지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설교가들이 미국에서 나왔고 유명한 교회들이 미국에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설교가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스웨덴의 유명한 설교가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없기 때문에. 반대로 미국의 유명한 설교가의 이름을 적어도 한둘은 다 아실 것입니다. 그만큼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에요. 목사가 되기 위하여 전통이나 통념을 따를 필요가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를 따르는 것이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엄청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자유를 제공하는 것이 됩니다. 사람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 하나님에게도 자유를 제공하는 것이 됩니다. 중국이 수천 년 동안 여자들의 발을 싸매어 놓을 때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는데 풀어놓으니까 중국 여성이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부여했던 족쇄를 풀어놓아야 하나님이 그 삶속에 역사하시고 그 생각 속에 역사하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인간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자꾸 옛날 생각으로 사람을 묶어놓으면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자녀에게 – 이미 그 때는 지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 사가랴라는 이름을 지어주지 말고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어줘야 됩니다, 아들이든 딸이든. 다시 말하면 자식이 부모의 연장선이 되기를 기대하지 말고 하나님의 꿈을 꾸고 하나님의 계획을 여쭤봐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셔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서 향을 피우는 동안 천사가 나타나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의 간구함’이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기도가 어머니의 기도만큼 효험이 있습니다. 어미가 기도를 못하면 아비라도 기도를 해야 됩니다. 자식이 ‘아빠, 어디 가?’라고 물어보면 ‘아빠는 널 위해 기도하러 간다.’라고 대답하셔야 됩니다. 자식이 아비보다 더 위대할 수 있음을 믿어야 됩니다. 미래가 과거보다 더 나을 수 있음을 믿어야 됩니다. 이후의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가정 공동체/ 잠4:1-4, 골3:18-21/ 2010-05-12
가정 공동체 잠4:1-4, 골3:18-21 5월은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입니다. 또한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가정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전통적인 유교 규범하의 가정의 개념은 점점 그 힘이 상실돼 가고 있다. 부부 중심의 핵가족 제도로서의 오늘날의 가정 형태는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의 가정이 점차 파괴되어 가고, 남녀평등을 부르짖는 여성들의 목소리 또한 만만치 않으며, 직장여성들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가정의 재정 의존도도 달라져 가고 있어 새로운 가정에 대한 가치관 정립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유교문화권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는 가부장제 문화의 영향을 받아 남성지배적 사고 속에 남녀의 관계가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유지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산업화의 발전으로 인해 여성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게 됨에 따라 여성 또한 노동자로 산업현장에 뛰어들게 되지만 가부장적 문화에서 비롯되는 남녀차별의식을 사회에서 여성을 상품화하며 도구화 하게 됩니다. 이런 면을 직시하면서 건강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남녀간의 동반자 관계를 회복하는 길이 급선무입니다. 부부는 평등해야 하고, 사랑의 관계여야 합니다. 부부관계가 주종의 관계로 전통적인 통념에 젖어 가부장적 사고로 남편이 군림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부모가 원하는 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물건하고는 다릅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양육해야 할 청지기적 사명이 있는 위탁자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따라서 부모는 가정 안에서 인격형성의 스승이기도 하고 모범이 되기도 합니다. 부모의 삶, 언행 그 자체는 자녀들에게 소리 없는 강의로 교육되어지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부모의 삶, 신앙생활, 진실성, 부지런한 삶, 봉사생활은 그대로 자녀들이 삶과 가치관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것,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것,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할 것, 부모가 자녀들에게 자비로울 것 등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 교훈들은 상호화합적인 성격 때문에 가정 공동체를 특징짓고 있습니다. 부부간의 윤리에는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적용되고, 그리고 자녀들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순종하는 가운데 사회의 일원으로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함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부부간에는 복종과 사랑이 필요하고 부모와 자녀 간에는 순종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이들 교훈 속에서 흐르는 주제는 인간은 상호책임적인 존재라는 것이고,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하고 서로 책임을 져야 하는 관계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만 역할과 직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합니다. 가정공동체는 인격적인 평등을 전제로, 부부는 복종하고 사랑하며, 친자 간에는 순종하고 이해함으로 성실을 다해 봉사하고 의와 공평으로 베푸는 가정공동체는 건강한 사회를 불러일으킵니다. 과학과 기술의 문명이 최고도에 도달한 오늘날에 있어서 지난날에 인간들을 단합시키던 여러 가지의 유대들은 하나씩 둘씩 없어져가고 인간들은 피차간에 점점 소외되어 그 고독감은 나날이 더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배워야 할 가장 긴급한 교훈은 인간의 지성을 총동원해서 인간들이 하나의 가족으로서 함께 살기를 배우는 길입니다. 우리 기독교 사상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개인과 교회와 흩어진 인간 가족들이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종전처럼 가족이란 것을 좁은 혈연관계로만 보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이 가족 관념을 확대시켜서 온 인류를 포함하는 보편적인 인간 공동체의 개념으로 바꿔야 할 때가 왔습니다. 원래 기독교 공동체는 역사의 종말을 개대하며 세속적인 질서에 대해서 한 작은 집단으로서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성(性)의 진정한 중요성과 가족 관계와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 창조성의 중요성을 발전시킬 과업이 있습니다. 중세기 종교개혁자 루터의 사상과 초기 청교도 중에서 결혼한 사람의 생활을 하나님께 귀의하는 생활로 보며 그 가정생활의 즐거움을 하나님의 선하심을 축하하는 것으로 보는 인생에 대한 적극적인 견해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그의 사랑을 키울 수 있는 집단생활을 제공하는 두 가지의 주요한 후보지의 하나는 가족이요 다른 하나는 교회입니다. 이처럼 가족과 교회 안에서의 생활의 바탕은 공공한 질서의 기능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공동체의 중요성을 회복하여 이것을 인생의 기본적인 질서로서의 정당한 위치에 다시 올려 놓아야 합니다. 결혼과 가족관계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인 동시에 사회적인 발전입니다. 가족은 결혼해서 성립된 인간 공동체의 확장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정은 결혼해서 성립된 그의 소명을 실천하는 장소이며, 기독교 공동체의 핵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정은 조물주 하나님이 인간의 지상적인 생활을 축복하시며, 인간의 가장 심오한 일상적인 요구에 수응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스스로 설계하신 제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정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태어난 가정으로 부모와 형제 자매들이 속한 가정입니다. 둘째는 결혼으로 이룩한 가정으로 아내와 남편 혹은 아들과 딸들로 구성되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육신에 속한 두 종류의 가정 이외에 영적인 가정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집 즉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새로운 가정을 말합니다(고전3:9). 하나님의 가정이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축복 속에 안겨 있는 가정입니다. 내가 태어난 가정도 그리고 결혼으로 성립된 가정도 혹은 교회를 통하여 영적으로 맺어진 가정도 하나님의 사랑의 후광 속에 안겨 있지 않다고 하면, 위기와 어둠이 그림자처럼 찾아들게 됩니다. 기독교 가정이 행복에 미치는 중요성은 참으로 큽니다. 하나님을 그 가정에 모시고 있는 분위기가 부부 사이나 자녀들과의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가정은 그 집안에 들어서면 얼른 예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축복으로서 머물러 있지 않는 가정은 들어서자마자 그 공기를 알게 됩니다. 신앙이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도 좋은 가구나 다른 재산보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는 행복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은 하나의 인격이 성장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학교이며, 그곳의 위대한 교사요 부모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여러 가정의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정의 형태는 첫째로 아이들을 위주로 사는 가정의 형태입니다. 즉 아이들 중심의 가정입니다. 이런 형태의 아이들은 유아독존적 성격이 되어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운 성격으로 생존경쟁에서 도피자가 됩니다. 둘째는 부모 위주의 가정 형태입니다. 유교 규범하의 가정개념으로 부모의 절대적인 주장에 이런 가정의 아이들은 반항적인 인간성을 가지고 타인을 학대 구박하는 성격이 되어 버립니다. 셋째는 여자 위주의 가정형태입니다. 이런 가정은 편견적인 인간이 되기 쉽습니다. 어머니와 자식이 짝하고 아버지는 소외되어 분열적 성격의 소유인간형이 도비니다. 네째는 개인주의적 가정형태입니다. 한 집에 살기는 살지만, 제각기 살고 있는 형태로 일종의 여관과 같은 상태입니다. House는 있어도 Home이 없기 때문에 가정이 긴요함이나 행복감이나 그리워하는 느낌도 모르고 가출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가정형태로 하나님 중심의 가정공동체는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놓이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대인관계로 부모를 공경하며 자녀를 사랑하는 가정공동체가 바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정의 본형입니다. 유명한 여성가정학자인 “버지니아 사타이어”(Virginia Satir)가 말한 가정공동체의 특징을 말하면서 오늘의 설교를 거두기로 합니다. 첫째는 자기의 가치를 인정하고 자기를 존중히 여기는 가정(Self Worth), 둘째는 서로간의 뜻이 통하는 가정(Communication), 셋째는 규칙이 있고 질서가 있는 가정(Rule), 넷째는 사회와 잘 조화되어 연결된 가정(Link to Society)등 이 4가지 요소가 특징을 이룰 때 그 가 정은 행복한 가정공동체가 됩니다.
가정, 아버지, 그리고 남성(1)/ 창1:26-28/ 2011-05-10
가정, 아버지, 그리고 남성(1) 창1:26-28 가정의 달을 맞아 가정에서의 아버지, 가장(家長), 남성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진단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최초의, 그리고 유일의 사회단위인 가정이 무참히도 파괴되는 현장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과 가장, 즉 남자에 대하여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여기에 대한 성경이 교훈을 듣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제가 아버지학교에 나가 강의하는 내용을 참고로 하여 한 달간 네 시간 동안 이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우리시대의 일그러진 우상인 남성상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아버지가 바로 서면 가정이 바로 섭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남성상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남자는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남성입니다. 가정(家庭)을 벗어난 남성이나 아버지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됩니다. [막10:6-9] “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남자 만드신 목적이 가정을 이루는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남성들이 가정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비뚤어진 남성상은 비뚤어진 환경과 생각들로부터 기인합니다. ‘남성’ 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흔히 성을 떠올립니다. 여름이면 아니 요샌 시도 때도 없이 개고기를 먹기 위해 야단입니다. 정력에 좋다고들 그럽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정력에 좋다면 양잿물도 마실 것입니다. 정력=남성? 정말 남성은 성으로 다 말할 수 있는 동물적 존재일 뿐입니까? 물론 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부부의 선물입니다. 성결을 유지할 때만 그렇습니다. [잠5:15-19]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이 말씀은 성의 아름다움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결을 지킬 때만 하나님의 좋은 선물임을 분명히 합니다. 세실 마이어스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의 아들은 존경할 수 있고, 모방할 만한 남자를 필요로 합니다. 딸들도 역시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딸들에게 있어서 미래의 남성을 판단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준입니다. 딸이 선택한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으로부터 남성의 이상형을 잘못 받아들인 결과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아버지가 훌륭하고, 행복하게 생활하는 남자라면 후에 딸도 그런 남성을 고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버지의 건강한 남성됨이란 그 아들과 딸에게 남성으로서 또는 여성으로서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키워나가며 자신의 性을 현실화시키는데 엄청난 발판이 되어줍니다.” 한국 남자는 어떻게 남성으로 성장합니까? 고등학교나 대학 시절부터 생존경쟁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술과 담배 또는 여자로 풀어가라고 선배와 사회는 가르쳤습니다. 특히 결혼의 첫 순간까지 순결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딱지를 뗀다’는 식으로 동정 해방식을 하는 걸 자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누가 여자를 많이 ‘따먹었느냐’에 따라 자신의 남성됨을 드러내려 하며, 누가 여자들과 “관계를 많이 맺었느냐”에 따라 자신의 남성됨을 과시하는 세상 관습과 풍속에 생각 없이 조각되어지고 다듬어진 우리의 남성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남자는 결혼 전에는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결혼 후에는 여자에게서 벗어나려고 노력합니다. 유교가 가져다 준 비뚤어진 남성상 첫째, 남성이 여성보다 신체적으로 강함을 나타낸 말 남자는 죽어도 전장에 가서 죽어라. 남자는 배짱, 여자는 절개 둘째, 남성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말 장닭이 울어야 날이 샌다. 아내 행실은 다홍치마 때부터 버릇을 가르쳐 휘어잡아야 한다. 남아 일언 중천금 셋째, 남성들의 여성적 외모나 행위를 금하는 내용의 말 남자가 빨래를 널면 재수 없다. 사내가 부뚜막 맛을 알면 계집을 못 거느린다. 남자가 바가지로 물을 떠먹으면 수염이 나지 않는다. 넷째, 여자에게 남자의 존귀함을 알리는 말 남자는 떡의 귀를 먹지 않는다. 남자의 옷으로 걸레를 만들지 않는다. 남자가 길을 떠날 때 여자가 앞을 가로질러 가면 재수가 없다. 남자가 밥상 귀퉁이에 앉아서 밥을 먹으면 출세를 못 한다. 남성됨에 대한 그릇된 인식 1) 남자는 키가 크고 힘이 세야 한다. 우리 사회는 람보 콤플렉스가 있어서 키가 작거나 힘이 약하면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사 신드롬’, ‘슈퍼맨 신드롬’, ‘도깨비 신드롬’으로 돈 버는 기계가 되어 삭막한 세상에 내팽겨진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남성은 람보가 아니라 균형 잡힌 성품과 훌륭한 인격을 갖춘 성숙한 이입니다.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내적 성숙함입니다. 2) 남자는 냉정해야하며 울거나 감정을 쉽게 드러내서는 안 된다. 남자 중에도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쉽게 기뻐하고 눈물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런 사람에게 충고를 한마디 합니다. \"남자답지 못해!\" “남자가 뭐 그런 것 가지고 우니?” “남자가 뭐 그렇게 웃음이 헤프니?!” “남자가 좁쌀스럽게 여자처럼 촐랑거리긴...” “남자가 뭐 그리 입이 싸니?” 남성들이 이제 감정을 빼앗겨버린 인간이요, 신분이 위협당한 인간이요, 자격이 무시된 인간이요 위치를 박탈당한 인간이요, 남자로서의 한 존재의 존귀함을 상실한 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남성으로서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감정이 박제된 인간=남성? EX) 화장실, “남자가 흘려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남자들이여! 눈물을 흘려라! 그럼 감정도 없고 눈물 한 번 안 흘리는 남자가 가장 남자다운 남자입니까? 이는 잘못된 남성상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남성은 자신과 다른 이의 감정에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롬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그렇다고 남성이기를 포기할 수도 없고, 이 사회의 그릇된 남성상으로 옥조여오는 현실 앞에서 차라리 여성으로 살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남성들이 자기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모임이 활발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이 잘못된 남성상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남성이 많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마11:17)에서 묘사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처럼,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않는다’는 무감각한 인간이 되어 무감각한 시대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3) 남자는 강해야 하며 부드럽고 친절하고 다정한 것은 남자다운 것이 아니다. 영화나 TV는 \"터프가이\"다, \"열혈남아\"다 하면서 강하고 거친 남자의 상을 이상적인 남자의 상인 양 보여줍니다. 남성은 강해야 한다면 그것은 힘이나 근육이 아니라 남을 사랑하는데 강해야 합니다. 거칠게 행동하는 것이 남자답다고 잘못 생각하고 참 인간의 부드러운 면을 개발시키지 못하는 남성은 균형 잡히지 않은 미성숙한 상태로 머무르게 됩니다. 4) 남자는 여자보다 능력이 있어야 하며 뭐든지 잘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자는 여자보다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은 돈을 벌어오고 아내는 전업주부로서 집에서 가사를 하는 것이 보편적인 모습이어서 그런지, 남자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여자도 자신보다 남자가 더 능력이 있길 바랍니다. 이런 남성 콤플렉스는 그 대표적인 예가 마초(macho) 이미지와 마치스모(machismo) 현상입니다. 마초란 신체적, 성적, 심리적, 또는 지적으로 남성은 우월하다고 여기며 행동하는 남성으로 권위주의적인 남성 또는 남존여비 신봉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나약한 감정이나 불안정한 성 정체감을 감추기 위해 초남성다움(hyper-masculinity)을 더욱 드러내려 합니다. 마초 이미지가 지배적인 사회일수록 남성에게 이 이미지는 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인간의 덕목으로 추구하는 우월성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편견에 힘입어 남성에게 부과된 억압된 가치입니다. 남성과 여성은 경쟁자도 보호자도 아닌 서로의 도움이 필요한 동반자관계라는 것을 서로 명심해야 합니다. 5) 남자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성공해야하며 직장생활을 가정생활보다 우위에 두어야 한다. 물론 남자는 한명의 직장인으로서 더 나아가 가정의 가장으로서 직장생활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성공과 부에 대한 지나친 과대평가 때문에 정작 가장 중요한 가정에 소홀하기 쉽습니다. 안타깝게도 가정의 기능이 점점 더 약화되어가고 있으며 뉴스를 보면 가정이 파괴되고 가정 안의 신뢰와 사랑을 잃어버리는 어두운 사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돈 때문에 가족을 살인하질 않나, 10대들의 탈선과 돌아오지 않는 가출, 원조교제라 하는 10대 성매매, 남자들의 비상식적인 술 문화, 아내의 불륜, 부모학대 등 참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하는 사건들이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가정 파탄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가정의 가장, 남편, 아버지가 가정의 사랑과 화목을 위하여 시간을 투자하고 진정으로 가족들과의 사랑과 일치를 최우선으로 두며 노력한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남성상은 남성 자신에게는 참된 자유를 빼앗고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큰 고통을 주며 사회 속에서 많은 갈등과 억압을 만듭니다. 1) 서로를 이겨야 하는 경쟁자로 생각하며, 어떤 일이든 완벽하게 이루어야 만족을 할 수 있고 항상 지도자나 우두머리가 되려고 합니다. 진정한 벗이 되려하질 않고 나를 이겨서 앞서려고만 하는 경쟁자 옆에 누가 기쁘게 다가가려하겠습니까? 미성숙한 자아상을 만들 뿐입니다. 2) 다른 사람에게, 특히 이성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3) 성의 차이를 이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으로 사용합니다. 4) 남들과 비교했을 때 무능함과 열등의식을 느낍니다. 5)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힘들며, 다른 이의 잘못도 쉽게 용서하지 못합니다. 6) 실수나 실패가 두려워 어떤 일을 시작하기가 두렵습니다. 7) 이성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동성하고만 어울리려 합니다. 아버지의 남성됨은 가정을 세우기 위한 남성됨이지, 윤리와 도덕을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요, 아버지의 남성됨은 가장의 위치를 감당하기 위한 남성됨이지, 사회 속으로 방황하는 자녀들을 쏟아내 놓기 위함이 아닙니다. 당신의 남성됨의 성적 순결은 가정의 순결이요, 교회의 순결이요, 또한 사회의 순결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남성의 순결은 여성의 순결과 함께 영적 성결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마음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남성됨은 모든 인류의 性의 기초요, 하나님이 계획하신 하나 됨의 시초입니다. 아버지의 남성적 가치관과 존엄성을 깨달으십시오! 남성적 性의 순결을 지키십시오! 하와를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듯 당신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깨끗한 신부로 이끌어 나오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과 감격으로 들뜬 마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최초의 사회 가정 : 번성, 정복, 다스림.
가정과 교회/ 엡5:21-33/ 어버이주일설교/ 2002-05-13
가정과 교회 엡5:21-33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어버이날 저녁에는 많은 가정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외식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밤늦게까지 서울의 교통이 혼잡을 이루었다는 뉴스 보도가 있었습니다. 외형상으로 보면 어버이 주일이 발전하는 것 같고 어버이들이 공경을 받고 있는 것 같은 현상입니다. 그렇지만 현대사회는 가정문제가 점점 더 갈등이 깊어가고 사회문제가 곧 가정문제로 직결되는 현상들을 보게 됩니다. 가정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되지만 귀족이나 재벌, 심지어 대통령 가정에게까지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위에 가장 중요한 두 기관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은 가정과 교회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가지고 설명을 했습니다. 즉 가정을 가지고 교회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머리와 몸의 관계입니다. 지체관계로 교회를 설명했습니다. 이 두 가지 설명이 본문 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 관계를 남편과 아내 관계로, 머리와 몸의 관계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교회와 가정을 묶어서 전하고 있는 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원리는 신앙생활의 원리요 가정건설의 원리요 교회건설의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복종의 복식게임 첫번째 원리는 사랑과 복종의 원리입니다. 본문 22절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5절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 말씀을 한번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듭거듭 반복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고 강조를 합니다. 여러분, 사랑이 어렵습니까? 복종이 어렵습니까? 이 두 가지는 둘 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원리를 알면 이 두 가지는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의 첫번째 원리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과 아내가 남편을 복종하는 것으로 규정을 했습니다. 이 두 가지에 있어서 우선적인 질서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이고 아내는 남편을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서열이 먼저냐 순서가 먼저냐 그것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사랑과 복종의 원리에서 주님은 이렇게 전제를 합니다. 21절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두 가지 조건을 앞세웠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것과 피차 복종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복종의 원리는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피차 사랑하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복식게임이다, 가정생활은 복식게임이다, 교회생활은 복식게임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새겨둘 만합니다. 우리는 복식게임을 하는 가정생활과 교회생활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살이가 행복하고 하나님의 축복 안에 풍성한 삶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단식게임을 하는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홀로 잘난 척 하고 홀로 최고인줄 알고 남을 의식하지도 않고 남을 배려하지도 않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지도 않는 오직 자기만의 인생을 살아가는 단식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과 복종의 복식게임 안에서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생활을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 어느 정신건강 상담가의 사례입니다. 한번은 자기 집 아이가 상담가인 엄마에게 와서 ”어머니, 내 친구가 큰일났어요. 공부도 잘하는 아이인데 요즘 며칠동안 공부도 안하고 울기만 하고 나한테 가출을 하겠다고 해요. 어머니, 좀 도와주세요.” 그래서 그 친구를 데리고 오라고 해서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이 아이는 공부를 잘 하는 학생입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한번도 칭찬을 받아보지 못한 아이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성적표를 가지고 가도 칭찬할 줄 모르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였습니다. 한번은 공휴일이 되어 온 가족이 놀러 가기로 했는데 이 아이는 고3생인데다가 도저히 같이 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한다고 혼자 집에 있겠다고 했습니다. 오랜만에 보고 싶었던 비디오테잎을 빌려다가 비디오를 틀었는데 테잎이 감겨서 작동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 고치려다 텔레비전도 안 나오게 됐습니다. 저녁에 아버지가 돌아와 오늘 뭐했냐고 물으시는데 할 말이 없었습니다. ”비디오를 보다가 고장이 났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 때 그 아버지가 그만 폭군으로 변하여 그 아이 보는 앞에서 비디오와 텔레비전을 다 부숴 버렸습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이는 비디오와 텔레비전이 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망가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나는 이제 이 집에 있을 필요가 없다. 나는 아버지 앞에 아무런 존재도 아니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아이를 보고 이 상담가가 이렇게 상담을 했습니다. ”얘야, 너 가출을 하기로 생각한 것은 정당한 거야. 나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가출을 하겠다. 그런 경우에는 가출을 할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한 거야. 너 같은 환경에서 가출할 생각이 없다면 그 얘가 바보지 네가 정상이야” 하고 이 아이의 말을 그대로 따라 가준 것입니다. 몇 시간 동안 이 아이의 아픈 상처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그 부모에게도 칭찬 한 마디 듣지 못하고 자란 아이이기 때문에 친구 어머니 앞에 완전히 마음이 열린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정신적인 개방이 일어났습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부모님에게 하고 싶었던 그 이야기들이 그날 밤에 전부 다 토해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 가출하는 것 좋아, 그런데 내가 좋은 방법을 하나 알고 있단다. 내 방법대로 가출하면 정말 잘 될 거야. 너 내 말에 순종하겠니?” ”예, 하겠습니다.” ”너 지금 고3이 아니냐? 이제 몇 달 있으면 시험을 쳐야 하는데 지금까지 공부를 잘해 왔던 대로 몇 달 동안 열심히 공부를 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을 해라. 그러면 깨끗하게 가출이 된다. 그렇게 해서 가출을 해 보자. 나도 도와줄게” 아이가 이 어머니의 말을 받아들여서 마음을 잡고 공부를 하여 대학에 입학해서 완전히 회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가정이나 교회생활에서 상대방의 어려움과 고통 혹은 내게 대해서 잘못한 것과 섭섭하게 했던 것에 대해 어떤 반응을 일으킵니까? 혼자 단식게임을 해 버리고 끝내버립니다. 아무리 죽을 짓을 했어도 그 고통은 복식게임을 해 주라는 것입니다. 위로를 해 주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복종은 그런 묘미가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복종은 굴종입니다. 사랑이 있는 복종이라야 보람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또 복종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과 복종은 아름다운 복식의 의미입니다. 이 두 가지는 언제나 함께 해야 됩니다.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기적을 행하는 사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조지 워싱턴의 어머니는 기자들에게 많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머니, 어떻게 아들을 대통령으로 키울 수 있었습니까?” 그때마다 그 어머니의 입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내 아들을 하나님께 복종하는 아들로 키운 것뿐입니다.” 노아는 지금 쓸 배가 아닌 120년 후에 쓸 배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했습니다. 바다도 아니고 산에서 지으라는 말씀을 복종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영적 119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과 복종의 원리로 가정을 세우고 교회를 세워가라고 하십니다. 사랑과 복종은 ’영적 119’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과 복종하는 것은 영적 119라는 것입니다. 119차가 지나가면 다 비켜주어야 됩니다. 사랑하는 것과 복종하는 것은 미룰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산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선 119는 가서 긴급상황을 수습해야 되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따지고 분석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고받는 사람이 ”어쩌다 그런 일이 일어났소?” 라고 묻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따지는 일은 뒤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출동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먼저 계산해보고 하지 마십시오. 무조건 사랑해 봅시다. 계산은 다음에 합시다. 복종도 이해하고 복종하려 하지 말고 복종해 놓고 한번 계산 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들에게 사랑은 너무 조건이 많아지고 복종은 너무 이권적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그대로 고착화되어 버린 것이 하나의 위기입니다. 가정의 부부사랑, 부부관계, 식구들끼리는 사랑과 복종의 원리가 살아나야만 하나님이 의도한 가정이 건설되고 주님이 의도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한 가지 우리가 용어를 조심해야 되겠다는 것을 느낍니다. 흔히 우리가 ’결손가정’이라고 표현합니다. 요즘 보도에도 결손가정의 아이들에게 문제가 많다고 보도를 하는데 그런 보도도 해석이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진정한 결손은 사랑의 결손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부모님이 있으면서도 사랑이 병든 가정이 결손가정입니다. 복종이 결여된 가정이 결손가정입니다. 흔히 결손가정은 문자적으로 부부 중에 한 쪽이 없거나 양쪽이 없으면 결손가정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보면 아버지 혹은 어머니만 있는 가정이라도 건강한 가정이 많습니다. 그런 가정에서 아이들이 바로 자라는 가정들이 다수입니다. 양쪽 부모가 없는 가정이라도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나고 있는 소년소녀 가장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자적으로 결손가정 아이들이 문제가 많다고 매도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입니다. 사실 아버지가 계시면서도 아버지답지 못해서 없는 것만 못한 가정이 있고 어머니답지 못해서 차라리 없는 것만도 못한 가정이 우리 주변에 많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결손가정은 사랑의 결손, 복종의 결손입니다. 문제 있는 가정에는 사랑이 계산되고 복종이 이권다툼이 되는 그 가정이 문제가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가족사랑, 우리들의 교우사랑은 영적 119의 사랑과 복종의 원리로 가정과 교회를 세워가기를 바랍니다. 떠나고 만나는 복식게임 두번째 원리는 떠나고 만나는 원리입니다. 32절에 보면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라고 했습니다. 사람이라는 말은 남자를 말합니다.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육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가정의 원리이며 교회의 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떠나서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메시야로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건설했습니다. 자녀들은 결혼을 하면 부모를 떠나는 관계가 정립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 떠난다는 말은 인격적인 성숙을 말합니다.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독립적인 가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영적인 의미는 새로운 관계로 정립된다는 것입니다. 독신으로 있을 때의 아들이 아니고 가정을 이룬 아들로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관계를 설정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홀로 있을 때에 부모관계가 아니고 이제는 아내와 합한 가정으로서 부모관계를 재정립하라는 것입니다. 떠남과 만남은 매우 소중한 관계가 있습니다. 떠나는 것을 분명하게 해야만 만남도 의미가 있습니다. 떠나는 것이 지저분하면 시작이 지저분합니다. 분명하게 떠나야 출발이 깨끗해집니다. 저도 결혼식에 참석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 많은 결혼식 중에 딱 한번 황당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여자 하나에 남자 둘이 나타난 것입니다. 드라마에서는 가끔 있는 일인데 실재로 보니까 남의 일이지만 정말 황당했습니다. 깨끗하게 떠나고 깨끗하게 만나는 인간관계가 안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떠남과 만남은 가정과 교회 건설에 중요한 원리입니다. 우리들 가정에는 떠나 보내야 될 것들이 자리를 잡으면 안 됩니다. 남편의 마음에 다른 여자가 있고, 아내의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다면 그 가정은 불행한 것입니다. 깨끗이 떠날 것들은 깨끗이 떠나야 됩니다. 그리고 합해져야 됩니다. 우리들의 생활양식 속에도 떠나 보낼 것을 분명하게 떠나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새로운 일과 새로운 축복과의 만남이 이루어질 줄을 믿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술, 담배, 노름, 심지어 사기치는 버릇, 악덕 채무버릇 등 온갖 버릇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 믿으러 옵니다. 예수 믿으러 오는 사람들은 온갖 버릇들이 없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때 내가 예수 믿고 술을 끊겠다, 담배를 끊겠다 자신하고 끊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염려를 다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고 보면 하나씩 서서히 다 떠나 보내게 됩니다. 예수 믿고 은혜를 받고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 앞에 청산해야 될 것들이 하나 둘씩 청산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성숙이 우리 앞에 있기 때문에 새로운 은혜의 자리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을 믿습니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그 비밀이 크도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떠나고 깨끗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살면 그것은 비밀입니다. 비밀은 깨닫고 나면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비밀을 깨닫는 감동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닮아 가는 하나되는 원리 세번째 원리는 예수님을 닮아 가는 하나되는 원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머리이고 우리는 몸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하나되는 사랑의 공동체 이것이 교회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해석이 없습니다. 사랑은 그 본질의 의미만 가지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랑의 의미는 자기희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희생하여 세상을 사랑한 것이 사랑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희생이 있는 거기에서 사랑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는 자기희생이 없는 거짓사랑을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희생이 있는 사랑, 그리고 자기자신을 낮추는 복종이 바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하나됨의 원리입니다. 가가와 도요히꼬는 ’교회는 온갖 쓰레기를 모아 둔 쓰레기통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공동체는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입니다. 실패로 인한 상처를 안고 교회를 떠난 한 성도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하고 그 후유증으로 많은 성도들 앞에 피해를 끼쳤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영적으로 시험이 들어서 교회를 등지고 예수님과 담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럴수록 주님께 매달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품에 안겨야 되는데 그만 이 사람은 교인들을 볼 면목이 없기 때문에 교회를 등지고 산촌 변두리에 묻혀서 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야인처럼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산나물을 삶으려고 아궁이에 불을 땠습니다. 장작을 가지고 불을 지피는데 산나물은 적당하게 데쳐야 되니까 장작을 몇 개 꺼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장작개비는 저절로 불이 꺼져 버렸습니다. 이 사람이 일을 한참 하다가 불이 꺼진 장작개비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이 사람이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아궁이의 장작개비가 활활 불이 탔지만 바깥에 끄집어내어 놓으니까 그대로 꺼져버린 이 장작개비가 내 모습이구나, 교회를 등진 내 모습이 타다가 꺼져버린 장작개비와 같은 모습이구나’ 그 장작개비를 보고 교회로 나아갔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정이요.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소중합니다. 가정도 소중합니다. 주님이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복종으로 우리 가정과 교회를 인테리어 하고 떠남과 만남의 원리로 우리 가정과 교회를 아웃테리어 해서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 가는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함께 우리 부모님들에게도 한번 새겨두고 싶은 말씀을 한마디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하고 우리 자식들에게 좋은 영향을 물려주는 부모로 살고 가야 됩니다. 오늘 젊은 세대들이 저지르는 그 악의 대부분은 어른들에게 배운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들이 부모가 되어 또 다른 악을 저지르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결손가정의 약점을 교회가 보완해 주어야 되고, 사랑이 병든 가정, 복종이 결여된 가정이 교회를 통하여 채워지고 은혜를 받고 그런 가정들이 묶어져서 하나님의 교회가 또한 사랑과 복종의 공동체가 되어가야 할 줄을 믿습니다. 어느 유명한 인사의 간증을 말씀드립니다. 이 분은 한국 교회의 지도자 중 한 분입니다. 그 분이 칠십 평생을 살면서 부모님께 너무나 귀한 유산을 받은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집에 돌아와 보면 어머니가 자주 집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어디 가셨습니까?” ”교회에 갔는가 보더라” ”왜요?” ”뭐 먹을 게 생겼는지 챙겨서 목사에게 가지고 가더라” 그러면서 이 아버지가 이 아들에게 꼭 토를 달아주는 것이 ”얘, 네 어미가 목사에게 하는 거 나한테 반만 하면 열녀문을 세워줄 거다” 그러면서도 그 아이에게 어머니를 한번도 비방하지 않았습니다. 이 분이 그 부모 밑에 살면서 교회가 첫째고 목사님이 첫째라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이 사람도 칠십 평생동안 그 부모님이 물려준 그대로 신앙생활을 하니까 놀라운 축복을 받고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혼자는 무슨 소리든 하십시오. 부부는 안방에서 무슨 소리를 하든 괜찮습니다. 동경대학 총장을 지내신 그 어른은 사랑과 행복의 미학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부관계는 천사의 말과 악마의 말을 동시에 듣는다’는 것입니다. 악마가 부르짖는 소리를 부부끼리는 하십시오. 그러나 자식들이 듣는 앞에서 해서는 안됩니다. 못난 부모들은 서로를 비방합니다. 이놈아, 네 애비처럼 살지 말아라, 이놈아 네 애미처럼 살지 말아라, 그런 소리를 자식들 듣는 자리에서 일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현장교육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부모를 따라서 꼭 그렇게 하게 됩니다. 저는 이 명사의 간증 속에 큰 교훈이 있다고 봅니다. 자기들이 듣는데서 교회를 그렇게 사랑하고 목사를 사랑하는 그 부모의 믿음대로 하니까 복을 받더라는 것입니다.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맺는 말 영국의 정치가 처칠이 왜 위대한 줄 아십니까? 효자 중에 효자입니다. 처칠 수상이 전성기에 있을 때 신문사에서 몰래 취재를 했습니다. 처칠의 유치원 선생님부터 대학 스승까지 처칠과 관계된 스승들을 전부 기획취재를 해서 이런 처칠을 키워낸 스승들을 찬양하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때 이 처칠이 그 기사를 보고는 신문사에 당장 편지를 썼습니다. ”귀 신문사의 보도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빠졌습니다. 내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스승은 나의 어머니입니다. 내 어머니가 빠졌습니다.” 여러분, 처칠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더 위대합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를 향하여 깊은 효행으로 우리 앞에 또 다른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정치적인 영향이너무 위대하니까 그의 효심은 감춰져 있지만 그분의 글 속에는 놀라운 효도의 흔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버이주일을 맞이해서 우리 가정과 교회가 오늘 가르쳐 주시는 사랑과 복종의 원리, 떠남과 만남의 원리, 예수님을 닮아 가는 이 세 가지 원리 안에서 행복한 가정과 교회를 세워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정과 교회의 축복/ 엡6:1-4/ 2010-05-25
가정과 교회의 축복 엡6:1-4 유대인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탈무드에 보면 사람에게는 3단계의 시기가 있다 하였습니다. 첫째는 소년기, 둘째는 청년기, 그리고 셋째는 장년기를 살면서 그 단계마다 역할이 다르다 하였습니다. 소년기는 부모를 위해 살고 청년기에는 자신을 위해 살다가 장년기가 되면 자식을 위해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소년기에 “부모를 위해 산다”는 말이 쉽게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보세요. 자녀들의 의지나 생각이나 원하는 것은 무시를 당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부모의 의사대로 자녀들을 이끌어 갑니다. 하루의 일과를 보세요. 요즘은 아이들이 놀이터에는 없다질 않습니까 학교에서 돌아오면 적게는 3군데 많게는 5군데를 돌고 집에 오면 학교 숙제하고 그러면 밤 11시가 넘으니 자야되지요. 우리 초등학교 때 정문 앞에서 번데기를 팔던 분이 계셨죠. 아이스크림도 했고. 그분들이 뺑뺑이라는 걸 돌려요. 주택복권을 작게 축소한 모양이죠. 그리고 아저씨가 그 원반을 손으로 돌리면 우리는 깃털이 달린 그 앞에는 날카로운 침이 꽂힌 그땐 그걸 찍기라고 그걸 가지고 찍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돈을 내고도 1봉지 찍히면 번데기 1봉지 10봉지 찍히면 10봉지 그런데 10봉지 잘 찍으려면 아저씨가 그 원반을 돌리기가 무섭게 딱- 찍어야 10봉지가 찍히는데 그걸 잘 찍는 애가 있어요. 그럼 돈은 다른 애가 내고 찍기는 그 애가 찍는데 그 애가 하도 잘 찍으니까 나중엔 아저씨가 자기 돈 안내면 못 찍는다 그래서 반에서 아예 돈을 미리 주고 계약 아닌 계약을 맺죠. 10봉지 찍으면 반은 네 꺼다. 아니다 3봉지만 가져가라. 나중엔 10봉지가 자꾸 줄어들어서 말만 10봉지 자리지 실제로는 3-4봉지 정도밖에는 안되게 만들던 아저씨도 생각나십니까? 길거리 리어카에다 멍게, 해삼 팔던 아저씨. 옷 핀을 길게 펴서 꼭 찍어서는 너도 찍고 나도 찍고 먹고 나면 사과에 푹 찔러 놓고 가고. 입술에 뻘건 고추장 물 묻히고는 좀더 큰 거 고르려고 하던 그 때 그 시절을 아십니까? 이제 그런 추억은 박물관에나 있죠. 요즘은 그렇게 자녀 교육을 하였다가는 아마 아동학대죄로 걸릴 줄로 모를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분들이 우리 나라를 살려낸 분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보고, 공주님, 왕자님처럼 양육을 하지마는 막상 “자녀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하는 문제에 부딪히면 할 말이 막히고 맙니다. 그러나 진짜 더 불행한 것은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 되시며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는 하나님! 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세상적인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5월! 이 가정의 달에 자녀다운 자녀, 부모로서 부모다운 모습 그래서 우리의 가정을 이 지상의 천국으로 만들어 갈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을 보세요! 그들은 너무나도 많은 환난을 겪었습니다. '잔인'이라는 단어가 제일 어울릴 정도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인 비극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녀들을 얼마나 얼마나 훌륭하게 키웠는지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모든 분야에서 세계적인 인물들을 배출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는 이스라엘을 가리켜서 “저들의 뒤 속에는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무서운 피가 흐르고 있다. 그 피는 바로 정열의 피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잔혹한 역사 속에서도 위대한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을까요? 이 역사가는 이스라엘을 두 개의 수레바퀴로 비유하면서 이스라엘이라는 수레의 한 바퀴는 교육이요 또 다른 한쪽의 바퀴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심장에서 흐르고 있는 그 열정의 피를 분석해 보면 신 6:4-9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4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절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절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절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9절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 찌니라”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 이것이 바로 그 엄청난 박해와 역경 속에서도 이스라엘을 위대한 민족으로 만든 근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공적인 교육으로 우리의 자녀들이 승리하기를 원하시면 아멘! 그러면 이렇게 교육해 보세요. 첫째> 교육을 시킬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둘째> 상징적 도구를 사용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상상의 나래를 펼쳐 주어야 합니다. 독일의 발도르프라는 교육을 보니까 아이들을 고정관념에서 상상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도구들을 많이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인형 하나를 만들어도 얼굴엔 눈, 코, 입, 귀를 만들지 않아요 왜냐하면 아이들이 스스로 그 얼굴을 그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웃는 인형, 우는 인형, 미운 인형, 예쁘게 만든 인형을 보면 아이들은 더 이상의 상상을 그릴 수 없기에 vision이 없는 아이가 된다는 거예요. 셋째> 일관성 있게 반복적인 교육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세 가지를 다 교육의 장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명절이 되어보세요! 늦잠도 자고, 아니면 여행을 떠나고 그도 안되면 방콕하고 방에 콕 박히는 것을 방콕이라 하죠.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명절을 자녀 교육을 위한 기회로 삼았습니다. 가령 장막절이 되면 자녀들을 데리고 나가 들판에 천막을 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1주일 동안이나 지나게 합니다. 이것도 하루 이틀이나 1주일 이상 계속되면 얼마나 힘이 들고 귀찮겠어요. 아이! 아버지! 우리 T.V봐야 되는데 아이! 아빠! 나 컴퓨터 해야 하는데 아이! 아빠! 나 샤워하고 싶어 아이! 아빠! 나 갈래 왜? 비데 해야 되는데 그러면 그때 아빠가 얘들아! 옛날에 우리 조상님들이 이런 천막을 치고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사셨단다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드셨겠니 너희는 고작 1주일도 힘들다고 하는데 그분들은 40년이야 40년. 그런데 그런 천막 생활 속에서 고생을 하면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단다. 편안한 것만 좋아하면 사람이 나태해지고 교만해져서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을 뿐 아니라 아예!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는거야. 너희들은 살면서 어려울 때면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하면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반에는 불기둥이 되셔서 우리를 지켜 주시는 거야! 이번엔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한밤중에 한참 곤하게 자는데 아이들을 깨웁니다. 깨울 때 어떻게 깨울까요? 일어나! 일어나! 어떻게 깨우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아! 곤하게 잠든 사람을 깨우니 얼마나 짜증이 납니까. 자녀들이 온 몸을 비틀면서 우~~~~~아아아아 아이고 아빠! 왜 깨우고 그러세요. 지금 몇 신데 이 정도일까요? 아빠! 지금이 몇 시야. 왜 그래 아버지가 대답을 합니다. 얘들아 옛날에 우리 조상들께서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시다가 하나님의 인도로 이집트 땅을 떠나실 때 한 밤중에 이스라엘 민족을 깨우시고는 허리띠를 띠게 하시고 자유를 주셨단다. 이 유월절은 해외로 놀러 가는 주간이 아니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이야! 졸리고 피곤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크신 복을 내리시는 거란다. 이렇게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와 축복을 기억하게 하고 옛날의 일을 명절과 무교병과 텐트라는 도구로서 상상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수 4:1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갈라진 요단강을 다 건넌 후에 그 강바닥에 있는 돌을 12개 골라서 강 언덕에 쌓아둔 다음. 여호수아가 이런 말을 합니다. 후대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와서 이 강 언덕에 쌓여 있는 이 돌들이 무엇이냐고 묻거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요단 강물에서도 하나님께서 발바닥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서도 구원해 주신 징표라고 가르치라. 하나의 돌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하나님의 축복을 상상할 수 있고 기억할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집에는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생각하고, 그려낼 수 있는 물건이 얼마나 있습니까? 물건이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가르치고 있으십니까? 아니면 T.V 화면만 점점 커진 채 T.V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까? 금요일 저녁 10:30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매일 새벽 5시에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주일날이 놀러 가는 날로 가르치고 계시지 않습니까? 왜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달아 주는지 가르치십니까?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는 이유는 1910년경 미국의 한 여성이 어머니를 추모하면서 교인들에게 하얀 카네이션을 나누어 드린 것이 기화가 되어서 어머니에 대한 사람을 나타내는 상징의 꽃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1925년도에 이 카네이션이 도입되어서 어버이날이나 스승의 날이 되면 자녀들과 학생들이 부모님과 스승님에게 붉은 카네이션을 내 심장에서 흐르는 피처럼 사랑합니다. 라는 의미로 달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런 일들은 반복적으로 계속되어질 때 그것이 교육인 것입니다. 어버이에게 효도하라. 입이 마르도록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바로 5월 8일에 이런 의미를 가르쳐 준 후에 어머니 가슴에 꽃을 달아 드린다면 우리의 후손들이 이것을 보고 우리가 늙어서도 성문에서 원수와 말할 때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줄을 믿습니다. 이제부터라도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상징적 도구를 잘 사용하세요. 그리고 실망하지 말고 반복적으로, 일관성 있게 가르치면 그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게 임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버이 주일이 되면 전 어버이 주일이 아니더라고 참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8남매를 모두 공부시켜주신 어머니,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지금 무엇이 되었을까? 매일 매일 쓰시던 일기장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이 목사 아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글을 쓰셨던 어머니. 손마디가 굵어지셔서 손가락 안에서는 빙글빙글 돌지만 손가락 밖으로는 빠지지 않던 반지를 비눗물까지 바르시면서 너 결혼하거든 네 아내에게 주어라. 하시던 가슴에 뼈만 남으셨던 어머니. 지금도 어머니 보고 싶은 내 어머니. 어머니 그러면 제 아내에게 좀 미안해요. 왜냐하면 아직 장모님께선 생존해 계시니까요. 그래서 여보 폰뱅킹으로 용돈이라도 보내드려. 그리고 전화해서 장모님 죄송합니다 찾아 뵙지도 못하고요. 괜찮아! 박 목사님 장모님께선 저에게 꼭 목사님이라고 부르셔요. 이젠 83세시라 정말 많이 늙으셨는데도 오히려 건강 조심하라고 하시면서 역으로 위로하시던 어머니. 이번 어버이날을 교육의 기회로 삼지 못했다면 스승의 날에는 그날을 기회로 꽃 한송이 속에 있는 사랑의 모습으로 나의 자녀들에게는 교육의 기회로 활용하시기를 바랍니다. 필요하다면 어버지 날도 우리 만드십시다. 더 필요하다면 고모의 날. 이모의 날, 권사님의 날, 집사님의 날 그래서 내 모든 삶의 자리에서 교육의 기회가 되고 내 집안에 놓여지는 장식물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상상할 수 있도록 놓여지고 살아 있는 동안 꾸준히 반복해서 가르치면 내 삶 속에서 부모님을 공경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모습을 남편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지내면 우리 후손 대에는 이 땅에서 천국을 가꾸어 가는 복된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가정과 교회의 축복 중에 가정의 축복에 대해서 말씀을 선포할 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우리 가운데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정과 부모 공경/ 엡6:1-3/ 차용철 목사/ 2007-05-08
가정과 부모 공경 엡6:1-3 “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엡6:1-3) <序言> 옛날 젊은 부부가 홀로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 부부에게는 어린 아기가 있었는데, 농사 일이 바쁘다 보니 부부가 함께 밭에 나가 일을 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어느날 밭에서 돌아온 부인은 기절 초풍할 장면을 보았습니다. 시아버지가 낮잠을 자다가 아기를 깔고 자는 바람에 아기가 죽고 만 것입니다. 부인은 그 아기를 안고 얼른 바깥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혹시라도 시아버님께서 ‘자신이 아기를 깔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괴로워 하실까?’ 하고 , 이 사실을 비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부인은 울면서 아기를 안고 밭에서 일하는 남편에게 달려가 자초지정을 말했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말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어린 아기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이런 불효 막심한 자식, 왜 하필이면 할아버지한테 깔려 죽어서 할아버지의 심기를 괴롭게 하느냐 이놈! 너 같은 불효 자식이 천하에 어디 있겠느냐 이놈!” 하며 뺨따귀를 세차게 내려 쳤습니다. 그랬더니 죽었던 아기가 깜짝 놀라 깨어 나더랍니다. 이 사연이 널리 퍼지면서 그 지역에 효자와 효부가 산다 하여 ‘효자동’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독재시대에서 자유시대로,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탈시대로 바뀌면서 부모의 세대와 자녀 세대의 가치관과 인생관과 세계관의 갭이 좁힐 수 없을 만큼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만큼 갈등과 분열과 충격은 커지고 있습니다. 요즘같이 경제적으로 힘들 때는 갈등이 더 많이 나타나게 됩니다. 조사결과를 보면 부모 문제가 얼마나 가정을 황폐하게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까리따스 노인학대상담센터와 한국재가노인복지협의회가 2001.3.~2002.3.까지 노인학대상담전화(1588―9222)를 통해 접수된 498건을 중심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가해자로는 아들이 189명(44.1%)으로 가장 많았고, 며느리(112명,26.1%)가 두 번째였고, 그 다음으로 딸(58명,13.5%) 배우자(18명,4.2%) 사위(13명,3.0%) 손자(8명,1.9%) 순이었습니다. 행복은 가정 안에서 부모와의 세계관을 좁히는 만큼 회복됩니다. <本論> 1.부모의 세계관을 이해해야 합니다. 제가 대구에서 목회를 할 때 일입니다. 교회 앞에 고급 아파트가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우리 교회에 등록되지는 않은 상태였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우리 교회를 지속적으로 나왔습니다. 그 시어머니는 권사이고 며느리는 목사 딸입니다. 그 며느리에게는 어린아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두 분이 모두 신앙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어머니는 새벽예배만 나오고 며느리는 주일 오전예배만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두 분이 예배를 각기 다른 시간에 나오는 것은 서로 보기 싫어서였습니다. 그 집은 고부 갈등이 심한 가정이었던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제게 한 말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자신은 아들이 선볼 때 며느리 될 사람이 목사 딸이라고 해서 믿음이 좋을 것으로 생각해서 묻지도 않고 결혼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살다가 보니 믿음이 형편 없더라는 것입니다. 손자가 아프면 자기는 기도를 하는데 며느리는 감기만 걸려도 약을 먹이고 병원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 가정의 예를 보면 시어머니가 나쁜 사람이거나 며느리가 신앙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아서입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순전히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물로 허기를 채우고 초근목피로 연명을 했습니다. 극동방송에서 김삼환 목사님 얘기를 들으니까 소나무 껍질을 먹어서 변을 보면 안 나와서 손가락으로 잡아 뺐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속담과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 속담이 생겼겠습니까? 그들의 소원은 오직 배부르게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인사가 “진지 드셨습니까?”입니다. 라디오만 틀면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하는 노래가 나왔습니다. 오직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밥그릇 싸움이라면 피튀기는 싸움을 합니다. 정치적으로 공포 속에서 살았습니다. 일제의 식민 통치와 6.25 동란과 무장 공비의 활동과 군부 독재를 지내 오면서 생사의 갈림길에서 갈등했습니다. 나름대로의 생존법칙을 가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에 대한 배신 속에서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반전될 때마다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어떤 일에도 앞서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소극적인 삶을 살수 밖에 없었습니다. 강한 자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합니다. 문화적으로 속박되어 살아왔습니다. 사회 전반에 걸친 유교적 관습 속에서 억눌려 살아왔습니다.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결혼할 수 없었고 아들을 낳지 못하면 쫒겨 나기도 했고 갖은 구타를 핍박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그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참아야 했고 아부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 지에 표준을 맞춥니다. 신앙적으로 편협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기독교 선교의 초기에는 신학자와 선교사들이 교리에 집중했습니다. 그들에게 배운 목회자들은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다양한 은혜를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옳다고 생각하는 진리를 지키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에게 신앙적 배려와 포용과 협력과 연합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조금만 변화를 주려 하면 두려워 합니다. 부모의 신앙관과 우리의 신앙관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신앙관은 바뀌기 힘듭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신앙관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분들의 신앙관을 이해하고 인정해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을 오늘날 우리의 환경과 우리의 관념에서 판단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모독이요 폭력인 것입니다. 2.부모의 소외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시골 출신이라 고등학교 때 도시로 나오면서 자취를 했습니다. 그 집은 주인 가정의 방들이 가운데 있고 양 옆으로 자취방이 대문까지 있는 집이었습니다. 제 방 맞은 편에 한 가정이 살았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와 딸은 직장 아들은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그 아버지는 연세가 많았는데 매일 노인정에 나갔습니다. 어느 날 저 혼자 집에 있을 때 방문을 열어 보니 할아버지가 약을 먹고 신음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를 업고 도립병원으로 갔습니다. 제 등에 있을 때는 숨을 쉬었는데 병원에 도착하니 멎었습니다. 바로 영안실로 안치되었습니다. 그 자녀는 뒤에 아버지가 죽은 사실을 알고 죽을만한 이유가 없는데 왜 죽었는지 모르겠다며 울었습니다. 제게 말하길 “매일 노인정에 가시길래 다른 할아버지들과 내기 장기도 두고 하라고 얼마씩 주었는데...”했습니다.여러분 생각엔 이 할아버지가 왜 음독 자살한 것 같습니까? 지난 3월 부산대 사회복지과 서정화씨가 제출한 ‘노인 자살 예방을 위한 사회 사업 개입 전략’이라는 주제의 박사 학위 논문에 실은 설문조사를 보면, 부산 울산 경남에 거주하는 60살 이상 남녀 512명 가운데 86.5%(443명)가 자살을 고려해 보았다고 응답했습니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이유로는 전체의 26.8%(137명)가 ‘건강악화’로 꼽았고, 25.2%(129명)가 ‘가족 갈등’으로, 21.3%(109명)가 ‘심한 고독’이었습니다. 가족 갈등과 심한 고독은 심리적으로 비슷한 문제입니다. 응답자 중 72.0%가 ‘매사에 의욕이 없고 우울하거나 슬플 때가 있다’ 대답해 초기 우울증세를 보였습니다. 그 만큼 외롭고 고독합니다. 아버지들은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가지고 살았고 가정에서도 가부장적 권위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어머니들은 불합리한 문화 구조 속에서도 자녀 양육권은 있었고 오로지 자녀 양육만이 유일한 낙이었고 소망이었습니다. 이젠 나이가 많아지면서 사회로부터도 냉대를 당하고 심지어 가정에서도 가장으로 인정해 주지 않고 자녀도 남의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가족의 구성원들 중 누구도 과거의 지위를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거기에다가 말 상대도 해주지 않습니다. 손자들도 대화가 안 됩니다.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오로지 며느리 간섭하고 며느리와 싸울 때입니다. 심한 배반감과 허탈감과 고독함을 가집니다. 부모를 공경하려면 육체적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합니다. 아픈 곳이 있을 때 진료와 치료에 힘써야 합니다. 먹는 문제, 입는 문제, 잠자는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 용돈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부분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노인들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 하는 것이 모멸감과 소외감과 고독함입니다. 실은 며느리를 간섭하는 것도 그런 문제입니다. 부모의 자존감을 세워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위치를 확인시켜 드려야 합니다. 부모의 의사와 결정을 존중해야 합니다. 말을 많이 들어 드려야 합니다. 무엇이든 설명을 해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잠언23:25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했습니다 (잠15:20). 3.부모를 공경하는 데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러시아 혁명이 있을 때 공산당들은 집들을 모두 태워 버리고 곡식들을 모조리 없애 버렸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모두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때 모스크바로 여행을 갔던 어떤 사람이 들판에 주저 앉아 어린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어머니를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풀뿌리를 캐다가 어린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여행하는 사람은 그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고 기운이 없어 보이기에 어린 아이를 품에서 떼어 냈더니 그 어머니의 젖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젖꼭지를 칼로 잘라서 피를 빨리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먹지 못해서 젖이 나지 않고 아기가 젖을 달라고 울 때 그 어머니는 젖꼭지를 잘라 피를 마시우게 했던 것입니다. 부모는 우리를 위해 희생했습니다. 부모는 우리를 낳아 주신 분들입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 피를 서말 서되를 흘린다고 했고 기를 때 젖을 여덞섬 너말로 키운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먹지 못할 때에도 우리는 먹였고 입지 못하면서도 우리는 입혔고 자지 못하면서도 우리는 재웠습니다. 그들은 공부를 하지 못했으나 허리 띠를 졸라 매가며 우리에게 공부를 시켰습니다. 만일 우리 생각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부모에게 그럴만한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죽어 마땅합니다 (레20:9, 신기21:18-21, 잠30:17). 우리는 그에 비하면 너무 잔인할 정도로 부모에게 희생하지 않습니다. 지금 학생들은 공부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말하지만 부모는 직장에서 서류로 머리를 맞아 가고 몸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한 달 백만원 대를 벌어오면 수십만원짜리 핸드폰 디카 엠피쓰리 쌉니다. 신발 하나를 사도 싼 것은 챙피해서 못 신는다고 비싼 메이커 삽니다. 그래도 부모는 사줍니다. 아이가 왕따 당할까 봐... 우리는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싼 신발 신으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왕따 당하는 것이 두렵습니까? 이제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이어야 하고 구체적인 실천을 하려면 희생해야 합니다. 부모가 희생없이 자녀 기를 수 없는 것처럼 자녀도 희생없이 보답할 수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종교적으로 희생해야 합니다. 부모 희생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내가 양보하기 싫어도 부모를 위해 일정부분 양보해야 합니다. 내가 싫어하더라도 부모가 기뻐하는 것이라면 일정부분 희생해야 합니다. <結言> 부모공경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출애굽기20:12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했습니다 (신5:16). 부모공경은 하나님께서 복을 약속하신 첫 계명입니다. 에베소서6:2-3에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조건없이 공경해야 합니다. 이젠 부모를 이해해야 합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희생해야 합니다.
가정과 부모 공경/ 엡6:1-3/ 차용철 목사/ 2007-05-13
가정과 부모 공경 엡6:1-3 <本文> “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序言> 옛날 젊은 부부가 홀로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 부부에게는 어린 아기가 있었는데, 농사 일이 바쁘다 보니 부부가 함께 밭에 나가 일을 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밭에서 돌아온 부인은 기절초풍할 장면을 보았습니다. 시아버지가 낮잠을 자다가 아기를 깔고 자는 바람에 아기가 죽고 만 것입니다. 부인은 그 아기를 안고 얼른 바깥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혹시라도 시아버님께서 '자신이 아기를 깔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괴로워하실까?' 하고 , 이 사실을 비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부인은 울면서 아기를 안고 밭에서 일하는 남편에게 달려가 자초지정을 말했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말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어린 아기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이런 불효막심한 자식, 왜 하필이면 할아버지한테 깔려 죽어서 할아버지의 심기를 괴롭게 하느냐 이놈! 너 같은 불효자식이 천하에 어디 있겠느냐 이놈!” 하며 뺨따귀를 세차게 내려 쳤습니다. 그랬더니 죽었던 아기가 깜짝 놀라 깨어나더랍니다. 이 사연이 널리 퍼지면서 그 지역에 효자와 효부가 산다 하여 '효자동'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독재시대에서 자유시대로,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시대로 바뀌면서 부모의 세대와 자녀 세대의 가치관과 인생관과 세계관의 갭이 좁힐 수 없을 만큼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만큼 갈등과 분열과 충격은 커지고 있습니다. 요즘같이 경제적으로 힘들 때는 갈등이 더 많이 나타나게 됩니다. 조사결과를 보면 부모 문제가 얼마나 가정을 황폐하게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까리따스 노인학대상담센터와 한국재가노인복지협의회가 2001.3.~2002.3.까지 노인학대상담전화(1588―9222)를 통해 접수된 498건을 중심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가해자로는 아들이 189명(44.1%)으로 가장 많았고, 며느리(112명,26.1%)가 두 번째였고, 그 다음으로 딸(58명,13.5%) 배우자(18명,4.2%) 사위(13명,3.0%) 손자(8명,1.9%) 순이었습니다. 행복은 가정 안에서 부모와의 세계관을 좁히는 만큼 회복됩니다. <本論> 1.부모의 세계관을 이해해야 합니다. 제가 대구에서 목회를 할 때 일입니다. 교회 앞에 고급 아파트가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우리 교회에 등록되지는 않은 상태였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우리 교회를 지속적으로 나왔습니다. 그 시어머니는 권사이고 며느리는 목사 딸입니다. 그 며느리에게는 어린아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두 분이 모두 신앙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어머니는 새벽예배만 나오고 며느리는 주일 오전예배만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두 분이 예배를 각기 다른 시간에 나오는 것은 서로 보기 싫어서였습니다. 그 집은 고부 갈등이 심한 가정이었던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제게 한 말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자신은 아들이 선볼 때 며느리 될 사람이 목사 딸이라고 해서 믿음이 좋을 것으로 생각해서 묻지도 않고 결혼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살다가 보니 믿음이 형편 없더라는 것입니다. 손자가 아프면 자기는 기도를 하는데 며느리는 감기만 걸려도 약을 먹이고 병원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 가정의 예를 보면 시어머니가 나쁜 사람이거나 며느리가 신앙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아서입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순전히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물로 허기를 채우고 초근목피로 연명을 했습니다. 극동방송에서 김삼환 목사님 얘기를 들으니까 소나무 껍질을 먹어서 변을 보면 안 나와서 손가락으로 잡아 뺐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속담과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 속담이 생겼겠습니까? 그들의 소원은 오직 배부르게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인사가 “진지 드셨습니까?”입니다. 라디오만 틀면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하는 노래가 나왔습니다. 오직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밥그릇 싸움이라면 피 튀기는 싸움을 합니다. 정치적으로 공포 속에서 살았습니다. 일제의 식민 통치와 6.25 동란과 무장 공비의 활동과 군부 독재를 지내 오면서 생사의 갈림길에서 갈등했습니다. 나름대로의 생존법칙을 가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에 대한 배신 속에서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반전될 때마다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어떤 일에도 앞서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소극적인 삶을 살수 밖에 없었습니다. 강한 자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합니다. 문화적으로 속박되어 살아왔습니다. 사회 전반에 걸친 유교적 관습 속에서 억눌려 살아왔습니다.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결혼할 수 없었고 아들을 낳지 못하면 쫓겨나기도 했고 갖은 구타를 핍박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참아야 했고 아부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 지에 표준을 맞춥니다. 신앙적으로 편협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기독교 선교의 초기에는 신학자와 선교사들이 교리에 집중했습니다. 그들에게 배운 목회자들은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다양한 은혜를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옳다고 생각하는 진리를 지키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에게 신앙적 배려와 포용과 협력과 연합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조금만 변화를 주려 하면 두려워합니다. 부모의 신앙관과 우리의 신앙관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신앙관은 바뀌기 힘듭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신앙관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분들의 신앙관을 이해하고 인정해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을 오늘날 우리의 환경과 우리의 관념에서 판단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모독이요 폭력인 것입니다. 2.부모의 소외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시골 출신이라 고등학교 때 도시로 나오면서 자취를 했습니다. 그 집은 주인 가정의 방들이 가운데 있고 양 옆으로 자취방이 대문까지 있는 집이었습니다. 제 방 맞은편에 한 가정이 살았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와 딸은 직장 아들은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그 아버지는 연세가 많았는데 매일 노인정에 나갔습니다. 어느 날 저 혼자 집에 있을 때 방문을 열어 보니 할아버지가 약을 먹고 신음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를 업고 도립병원으로 갔습니다. 제 등에 있을 때는 숨을 쉬었는데 병원에 도착하니 멎었습니다. 바로 영안실로 안치되었습니다. 그 자녀는 뒤에 아버지가 죽은 사실을 알고 죽을만한 이유가 없는데 왜 죽었는지 모르겠다며 울었습니다. 제게 말하길 “매일 노인정에 가시기에 다른 할아버지들과 내기 장기도 두고 하라고 얼마씩 주었는데...”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엔 이 할아버지가 왜 음독자살한 것 같습니까? 지난 3월 부산대 사회복지과 서정화씨가 제출한 '노인 자살 예방을 위한 사회사업 개입 전략'이라는 주제의 박사 학위 논문에 실은 설문조사를 보면, 부산 울산 경남에 거주하는 60살 이상 남녀 512명 가운데 86.5%(443명)가 자살을 고려해 보았다고 응답했습니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이유로는 전체의 26.8%(137명)가 '건강악화'로 꼽았고, 25.2%(129명)가 '가족 갈등'으로, 21.3%(109명)가 '심한 고독'이었습니다. 가족 갈등과 심한 고독은 심리적으로 비슷한 문제입니다. 응답자 중 72.0%가 '매사에 의욕이 없고 우울하거나 슬플 때가 있다' 대답해 초기 우울증 증세를 보였습니다. 그 만큼 외롭고 고독합니다. 아버지들은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가지고 살았고 가정에서도 가부장적 권위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어머니들은 불합리한 문화 구조 속에서도 자녀 양육권은 있었고 오로지 자녀 양육만이 유일한 낙이었고 소망이었습니다. 이젠 나이가 많아지면서 사회로부터도 냉대를 당하고 심지어 가정에서도 가장으로 인정해 주지 않고 자녀도 남의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가족의 구성원들 중 누구도 과거의 지위를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거기에다가 말 상대도 해주지 않습니다. 손자들도 대화가 안 됩니다.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오로지 며느리 간섭하고 며느리와 싸울 때입니다. 심한 배반감과 허탈감과 고독함을 가집니다. 부모를 공경하려면 육체적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합니다. 아픈 곳이 있을 때 진료와 치료에 힘써야 합니다. 먹는 문제, 입는 문제, 잠자는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 용돈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부분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노인들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 하는 것이 모멸감과 소외감과 고독함입니다. 실은 며느리를 간섭하는 것도 그런 문제입니다. 부모의 자존감을 세워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위치를 확인시켜 드려야 합니다. 부모의 의사와 결정을 존중해야 합니다. 말을 많이 들어 드려야 합니다. 무엇이든 설명을 해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잠언23:25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했습니다(잠15:20). 3.부모를 공경하는 데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러시아 혁명이 있을 때 공산당들은 집들을 모두 태워 버리고 곡식들을 모조리 없애 버렸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모두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때 모스크바로 여행을 갔던 어떤 사람이 들판에 주저앉아 어린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어머니를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풀뿌리를 캐다가 어린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여행하는 사람은 그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고 기운이 없어 보이기에 어린 아이를 품에서 떼어 냈더니 그 어머니의 젖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젖꼭지를 칼로 잘라서 피를 빨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먹지 못해서 젖이 나지 않고 아기가 젖을 달라고 울 때 그 어머니는 젖꼭지를 잘라 피를 마시우게 했던 것입니다. 부모는 우리를 위해 희생했습니다. 부모는 우리를 낳아 주신 분들입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 피를 서 말 서 되를 흘린다고 했고 기를 때 젖을 여덞 섬 너 말로 키운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먹지 못할 때에도 우리는 먹였고 입지 못하면서도 우리는 입혔고 자지 못하면서도 우리는 재웠습니다. 그들은 공부를 하지 못했으나 허리띠를 졸라 매가며 우리에게 공부를 시켰습니다. 만일 우리 생각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부모에게 그럴만한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죽어 마땅합니다(레20:9, 신21:18-21, 잠30:17). 우리는 그에 비하면 너무 잔인할 정도로 부모에게 희생하지 않습니다. 지금 학생들은 공부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말하지만 부모는 직장에서 서류로 머리를 맞아 가고 몸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한 달 백만 원대를 벌어오면 수십만 원짜리 핸드폰, 디카, 엠피쓰리 쌉니다. 신발 하나를 사도 싼 것은 창피해서 못 신는다고 비싼 메이커 삽니다. 그래도 부모는 사줍니다. 아이가 왕따 당할까 봐... 우리는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싼 신발 신으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왕따 당하는 것이 두렵습니까? 이제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이어야 하고 구체적인 실천을 하려면 희생해야 합니다. 부모가 희생 없이 자녀 기를 수 없는 것처럼 자녀도 희생 없이 보답할 수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종교적으로 희생해야 합니다. 부모 희생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내가 양보하기 싫어도 부모를 위해 일정부분 양보해야 합니다. 내가 싫어하더라도 부모가 기뻐하는 것이라면 일정부분 희생해야 합니다. <結言> 부모공경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출애굽기20:12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했습니다(신5:16). 부모공경은 하나님께서 복을 약속하신 첫 계명입니다. 에베소서6:2-3에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조건 없이 공경해야 합니다. 이젠 부모를 이해해야 합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희생해야 합니다.
가정과 천국의 신비 엡5:31-33 2002-01-29 11:19:15 read : 65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31-32절) 왜 부모를 떠나는가? 그것은 부모를 떠나서 또 하나의 새로운 관계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는 세상을 떠나서 예수를 만나는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이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정과 천국의 신비 엡5:31-33 2002-01-29 11:19:15 read : 65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31-32절) 왜 부모를 떠나는가? 그것은 부모를 떠나서 또 하나의 새로운 관계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는 세상을 떠나서 예수를 만나는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이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서 관계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만 믿으면 나는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그래서 주인과 종의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으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시면 내가 그의 신부가 됩니다. 그래서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종의 관계, 아들의 관계, 신부의 관계가 있는데 이 세 관계는 다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내가 종이 되어서 일하게 됩니다. 이 관계는 일의 관계입니다. 충성하고, 섬기는 관계며,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도 듣고 충성된 종으로서 상도 받고, 면류관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면 내가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또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녀됨의 권세를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권세를 받아서 천국에 가는 유업을 받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시고 사랑을 나누면서 교제하고, 행복을 얻는 관계입니다. 종으로 일할 때는 삯을 받고 칭찬을 받으며 아들로 믿게 될 때는 거기에서 유업을 받고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신랑 신부의 관계가 되면 사랑의 관계를 형성해서 행복하고, 교제하면서 인격적인 만남을 이룹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인격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다만 명령의 관계고, 순종의 관계며, 일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인격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보호의 관계이며, 돌봄의 관계이며, 유업을 받는 관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신랑 신부의 관계는 일대일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이 관계는 철저하게 서로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여기에서만 진정한 행복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성장의 단계를 보면 처음에 하나님을 만날 때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만나서 주인에게서 무엇을 얻습니다. 또 도움을 받습니다. 조금 더 은혜를 받으면 내가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는 위대한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고 마음에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성숙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전부가 되어서 마치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고 교제하듯이 하나님과 교제하므로 행복을 얻고 만족을 얻으며 기쁘게 살아가는 관계가 됩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연합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은 주인과 종의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종이고, 모세도 종이며, 여호수아, 이사야 모두 종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렇게 부르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연합하듯이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격적으로 성숙하면 신랑 신부의 관계로 일생을 살 듯이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 때 우리의 심령속에 하늘의 천국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31-33절) 먼저, 둘이 한 몸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비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남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연합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연합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연합은 인격적이고 영적인 교통을 상징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형상을 따라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고 창세기 1장 27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자 혼자만의 형상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함께 만날 때 하나님의 형상이 내게 온전히 나타나게 됩니다. 남녀의 연합은 결국 신비한 비밀인데 천국의 즐거움, 기쁨을 땅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 남녀의 연합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신비하게 봐야 합니다. 부부의 만남은 남녀의 성적인 만남이며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지으시고 우리의 성이 그 인격을 표현하는 도구라면 부부는 인격적으로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일대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우리가 회사에 가서 사장과 일대일이 안됩니다. 이것은 권위상 차이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일대일이 안됩니다. 이것은 보호자의 입장에서 자녀는 약한 존재로 섭니다. 이 세상 어디에 가도 일대일의 존재는 안됩니다. 빈부, 학력, 인물, 모든 것에서 비교되는 차등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부부는 일대일 인격적으로 만나는 유일한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대일의 인격으로 만나는 것은 부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남편 앞에 있는 아내는 일대일의 인격적 존재의 존엄성을 다 받고 있습니다. 남편도 그 아내 앞에서 일대일의 인격적 존재의 존엄성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존엄성이 깨질 때는 그 가정은 이름만 남게 됩니다. 마이크 메이슨이라는 사람이 쓴「결혼의 신비」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가정생활의 고전적인 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듯 진정한 남녀의 교제만이 하나됨의 신비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내가 하나됨의 신비에 이르듯이 남녀의 교제만이 하나님과 하나됨의 신비를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이런 해석을 내렸습니다. '부부의 관계로 경험으로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고귀한 성취가 있다면 그것은 진실과 헌신으로 하나되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24-25절에 보면 부부가 연합하기 위해서 옷을 벗었다고 했습니다. 옷을 벗는다는 것은 자기 전 존재를 진실하게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또 연합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최상의 헌신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의 만남은 진실과 헌신입니다. 이 이상의 헌신이 없습니다. 이 이상의 진실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자기 존재를 벌거벗은 존재로 진실하게 내놓아야 되며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듯 헌신하는 것은 이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고전 7:3-4절에 보면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남편은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는 남편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연합을 위해서 자기 존재를 내어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함께 잠을 자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엄마는 아이들과 함께 자고 남편은 건너방에서 따로 자는 것, 이것은 성서적인 것이 아닙니다. 남자가 집안에 서재를 꾸며놓고 혼자 거기에서 연구하고 잠자는 것도 올바르지 못합니다. 연구했으면 잘 때는 같이 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건강상의 이유나 특별한 기도를 위해서라면 허락을 받고 하라고 성서가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우리 교회 여 집사님이 12시에 철야하러 왔어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오셨느냐고 했더니 아이 대학 진학을 위해서 백일기도를 시작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어서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백일기도는 새벽에 해도 됩니다. 자식 대학가는 것 가는대로 내버려두어야지 백일기도 한다고 떨어질 것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격을 세워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실력없는 것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가서 주무시죠." 자야 할 자리에 가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라고 제가 집으로 보내드린 일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부부는 서로 존경과 사랑으로 연합해야 됩니다.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33절) 인생이 육체가 연합되었다고 그것으로 일생을 다 사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도 쇠합니다. 정욕도 갑니다. 육체의 연합도 식어집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견고한 연합만이 일생을 강한 끈으로 연합시킬 수 있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이런 글을 읽고 혼자 웃었습니다. "아내가 예뻐보일 때..." 이런 제목의 글인데 20대 후반은 남편을 위해서 예쁜 아기 낳아줄 때 아내가 예뻐보이고, 30대 후반은 좋은 집에 못산다고 불평하지 않고 잘 참아주는 아내를 볼 때 예뻐보이고, 40대 후반은 "당신 건강해요. 건강해야 되요" 하면서 보약 다려줄 때 예뻐보이고, 50대 후반은 "당신은 참 훌륭한 사람이야"라고 칭찬해 줄 때 아주 예뻐보이고, 60대 후반은 '당신과 살아온 생은 참 행복한 삶이었다'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싱긋이 웃어줄 때 예뻐보이고, 70대 후반은 조용히 "우리가 죽거든 양지바른 곳에 함께 묻힙시다." 하면서 주름잡힌 얼굴로 쳐다볼 때 아주 예뻐보이더랍니다. 그런데 여기에 공통점이 있었는데 남자는 늙어서까지 여자에게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달라는 당부를 잃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남편을 존경해달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자존감을 지켜줄 때 남자들은 아내가 가장 예뻐보인다고 합니다. 아무리 예쁜 여자도 남편을 무시하면 정이 뚝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 날로 미워지기 시작합니다. 남편을 자꾸 세워주면 어떤 여자도 포근한 가운데 예뻐보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남편도 훌륭한 가문의 남자였고 부인도 명문대학을 나온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남편은 그 부인에게서 포근함도 느끼지 못하고 항상 지적만 당하면서 기죽어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지지리도 못난 여자와 눈이 맞아가지고 도망을 쳤습니다. 이 부인이 목사님에게 상담하기를 "목사님, 정말로 자존심이 상합니다. 잘난 여자와 도망갔으면 이렇게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겠습니다. 천하에 못생기고, 배운 것도 없고, 가문도 형편없는 여자와 도망갔으니 너무 창피합니다." 할 때 목사님이 "나라도 도망가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부인이 너무 똑똑하고 완벽해서 남편이 거기 붙어있을 수가 없어서 도망갔습니다. 남편을 존경한다고 하는 것은 아내가 순종해 준다는 얘기입니다. 순종한다는 말은 헬라어 원어를 보면 '아래에서 받들어 준다, 잘 들어준다'는 말입니다. 잘나고 똑똑한 것이 있어도 남편 앞에서만은 감추어야 됩니다. 다른 곳에 가서는 똑똑한 것을 아무리 나타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만은 '똑' 소리가 싹 사라지고 '덕' 소리만 나야 됩니다. 여자가 너무 똑똑해서 남편에게서 '똑' 소리가 나면 남편이 그때부터 기가 죽습니다. 하늘은 높고 넓어서 땅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땅을 품어야 되는데 하늘이 좁아지면 땅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늘은 품어야만 되기 때문에 품을 곳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 친구 목사가 있는데 친구 목사는 외모가 외소하고 부인은 헤비급입니다. 그래서 밤에 잘 때 부인은 쑥 올라오고 남편은 쑥 내려갑니다. 그 친구가 나한테 와서 하는 말이"우리 식구는 얼마나 태산처럼 헤비급인지 안을 수가 없어" 그래요. 그래서 제가 "자네가 하늘인데 하늘이 안아야지 땅이 안아서야 되겠어 땅이 안으면 거꾸로 되어서 뒤집어지겠네.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언제나 여자는 땅처럼 남편은 하늘처럼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의 신비입니다. 혹시 이 가운데 똑똑한 부인 있습니까 너무 똑똑한 척 하지 마십시오. 똑똑한 척은 세상에 나가서 하십시오. 가정에서는 똑 소리를 죽이십시오. 우리는 다윗과 미갈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됩니다. 다윗은 서민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미갈은 사울 왕의 딸로 왕가의 공주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차이가 너무 많습니다. 가문, 교육, 배경, 인생관, 취미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정략적으로 다윗과 미갈을 결혼시켰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난 후에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너무 너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추고 기뻐 뛰노느라고 옷이 벗어지는 줄도 몰랐습니다. 삼하 6장 16절에 보면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라고 했습니다. 미갈이 이것을 보고 남편을 업신여겼습니다. '저 사람은 원래 출신이 그런 사람이야 왕 이 체통도 없이 벌거벗고 춤을 춰' 하면서 아니꼬운 눈초리로 멸시하면서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집에 들어올 때 멸시하는 투로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정색을 하고 입을 엽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삼하 6:21-22) 이 말이 떨어지면서부터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별거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남남이 되어버린 것이죠. 다윗이 아내 미갈로부터 자존심이 상처를 받은 후로는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별거를 하게 되었고 다윗은 후에 밧세바를 만나게 됩니다. 다윗 왕가의 비극이 뭡니까? 바로 아내가 남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는데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여자가 20년 길러놓은 남자를 다른 남자가 20분만에 망칠 수 있다. 그러므로 남편을 세워주어야 한다." 아내에게 순종을 명령하신 것은 남편을 세워주기 위한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것은 자기 존재가 주님을 만난 천사같이 되라는 말입니다. 한문으로 지아비 부(夫)자는 하늘 천(天)에서 조금 솟은 것입니다. 이 말은 남편을 하늘보다 높이 받들라는 말입니다.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면 자기도 하늘처럼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자는 순종함으로 행복합니다. 순종함으로 자기 존재가 올라갑니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왕노릇 하고 싶어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만은 왕으로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회사에 가서는 멸시 당하고, 무시 당해도 가정에서만은 높은 자리에 세워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는 자기 아내를 사랑하므로 연합하라고 말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8) 자기를 희생한다는 말은 자기 이기심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살면서 날마다 자기를 별세시켜야 합니다. 자기 희생이란 어렵고 하기 싫은 일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했을 때 여자가 잘못했을지라도 남자가 먼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머리됨의 원리입니다. "그래도 내가 남자인데..." 하면서 목에 힘주고 있으면 머리됨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교인들과 함께 기도원에 가는데 우리 식구와 무슨 얘기를 하다가 제 자존심에 상처가 와서 마구 화를 냈습니다. 원래 제가 제 집 식구를 사랑하다가 존경하는 단계까지 갔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한신교회를 개척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제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가 저를 설득해서 개척하자고 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위대하고 또 나를 복되게 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단계를 넘어서 존경하는 단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으로 존경스럽게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추켜 세워주어서 그랬는지 자기도 모르게 우쭐거리면서 매사에 집에서도 무슨 얘기가 나오면 잘못한 것은 다 나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어떤 때는 속이 아려도 너무 존경해서 제가 참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기도원에 가면서 무슨 얘기가 나왔는데 내가 안했는데 잘못을 돌려요. 그래서 제가 화를 냈더니 운전하는데 마구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논두렁 길을 가는데 사고 나겠어요. 그렇다고 내가 자존심이 있지 잘못했다는 말은 못하겠어요. 그래도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자동차를 세우라고 하고는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사랑하는 여종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이 종을 용서하소서. 제가 오래 참지 못하고 화낸 것을 용서하여 주소서." 먼저 기도를 하고 나니까 잘못했다고 말하기가 쉬워요. 그래서 "여보, 내가 잘못했소" 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랬더니 자동차가 제대로 가요. 그렇게 하고 기도원에 가서 설교를 하니까 설교가 잘되요. 아내는 연약한 그릇인데 괴롭혀놓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면 내가 어떻게 설교하겠습니까 제가 그때 느낀 것은 남자는 자존심상 잘못했다는 말을 하기가 참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잘못한 것 없이 자기가 잘못했다고 죽지 않습니까 잘못은 다 우리들이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내가 잘못했다." 그럽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을 보면서 격에 맞지 않는 말을 해도 남편이 옆에서 참고 들어주면서 같이 가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정생활은 모든 것을 다 수용하고 사는 것입니다. 미국의 컬럼비아 바이블 컬러지 학장이었던 맥컬리킨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의 부인이 침해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곁에 있으면 안정감을 가지고 편안히 있고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집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불안해서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학장직을 여러해 더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장직을 사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이제 나는 아내의 곁으로 돌아간다. 42년전 결혼서약을 할 때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 아내를 돌볼 것을 이미 약속한 것이기에 나는 그 서약을 지키고 싶다. 내 아내가 40년동안 나를 돌보아 주었기에 이제는 내가 그 사람의 빚을 갚기 위해 아내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아내에 대한 사랑과 기쁨 때문에 나는 그의 곁으로 간다." 그가 학장직을 사임하고 이 선언을 하면서 가정으로 돌아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학장으로 있을 때보다 더 그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학장직을 몇 년동안 수행하는 것보다 자기 아내의 침해를 곁에서 돕기 위해서 가정으로 돌아간 위대함이 전 세계 남편들에게 더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만남이며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신비를 몸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될 때 남편은 예수님처럼 위대하게 되며 아내는 예수와 함께 사는 위대한 천사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사도 바울이 결혼을 말하다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게 된 것은 부부의 연합은 결국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목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천국의 모형이며, 가정생활은 천국 생활을 연습하는 것이 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종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라고 천국가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가는 문턱까지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땅에서 충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들어가서는 아들도, 종도 없고 신부만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날 때 주님의 영광이 내 영광이며, 주님의 영화로운 인격이 내 인격이며, 주님의 찬란한 빛이 내 빛이 되어 일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곳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되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듯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부부를 머리와 몸으로 비유한 것은 나눌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머리와 몸은 생명의 관계입니다. 신랑이 머리요, 신부가 몸이 되는 것은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나, 어떤 위험이라도 갈라놓을 수 없는 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해 준 것입니다. 부부의 연합은 참으로 천국을 이루는 신비이며, 이것은 행복을 얻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실 때 내가 그 품속에서 안식을 얻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종을 거느리고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삼고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신부를 만날 때만 하나님은 행복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므로 하나님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종노릇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이 외롭습니다. 내가 아들 노릇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이 외롭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전부로 삼고 하나님이 나의 신랑이 될 때 하나님은 행복해 하십니다. 하나님의 행복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내가 행복해지는 것으로 끝나지 마십시오. 주님을 신랑으로 모시게 되면 주님이 나 때문에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오 주님이시여, 나를 신부 삼아 행복하소서." 이것이 바로 신앙의 극치입니다. 우리가 가정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신비의 경지에 이르러서 천국을 끌어 땅으로 안고 땅의 삶이 천국으로 이어가는 위대한 신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 5:31-33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31-32절) 왜 부모를 떠나는가? 그것은 부모를 떠나서 또 하나의 새로운 관계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는 세상을 떠나서 예수를 만나는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이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서 관계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만 믿으면 나는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그래서 주인과 종의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으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시면 내가 그의 신부가 됩니다. 그래서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종의 관계, 아들의 관계, 신부의 관계가 있는데 이 세 관계는 다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내가 종이 되어서 일하게 됩니다. 이 관계는 일의 관계입니다. 충성하고, 섬기는 관계며,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도 듣고 충성된 종으로서 상도 받고, 면류관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면 내가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또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녀됨의 권세를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권세를 받아서 천국에 가는 유업을 받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시고 사랑을 나누면서 교제하고, 행복을 얻는 관계입니다. 종으로 일할 때는 삯을 받고 칭찬을 받으며 아들로 믿게 될 때는 거기에서 유업을 받고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신랑 신부의 관계가 되면 사랑의 관계를 형성해서 행복하고, 교제하면서 인격적인 만남을 이룹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인격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다만 명령의 관계고, 순종의 관계며, 일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인격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보호의 관계이며, 돌봄의 관계이며, 유업을 받는 관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신랑 신부의 관계는 일대일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이 관계는 철저하게 서로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여기에서만 진정한 행복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성장의 단계를 보면 처음에 하나님을 만날 때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만나서 주인에게서 무엇을 얻습니다. 또 도움을 받습니다. 조금 더 은혜를 받으면 내가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는 위대한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고 마음에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성숙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전부가 되어서 마치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고 교제하듯이 하나님과 교제하므로 행복을 얻고 만족을 얻으며 기쁘게 살아가는 관계가 됩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연합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은 주인과 종의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종이고, 모세도 종이며, 여호수아, 이사야 모두 종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렇게 부르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연합하듯이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격적으로 성숙하면 신랑 신부의 관계로 일생을 살 듯이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 때 우리의 심령속에 하늘의 천국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31-33절) 먼저, 둘이 한 몸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비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남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연합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연합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연합은 인격적이고 영적인 교통을 상징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형상을 따라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고 창세기 1장 27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자 혼자만의 형상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함께 만날 때 하나님의 형상이 내게 온전히 나타나게 됩니다. 남녀의 연합은 결국 신비한 비밀인데 천국의 즐거움, 기쁨을 땅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 남녀의 연합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신비하게 봐야 합니다. 부부의 만남은 남녀의 성적인 만남이며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지으시고 우리의 성이 그 인격을 표현하는 도구라면 부부는 인격적으로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일대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우리가 회사에 가서 사장과 일대일이 안됩니다. 이것은 권위상 차이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일대일이 안됩니다. 이것은 보호자의 입장에서 자녀는 약한 존재로 섭니다. 이 세상 어디에 가도 일대일의 존재는 안됩니다. 빈부, 학력, 인물, 모든 것에서 비교되는 차등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부부는 일대일 인격적으로 만나는 유일한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대일의 인격으로 만나는 것은 부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남편 앞에 있는 아내는 일대일의 인격적 존재의 존엄성을 다 받고 있습니다. 남편도 그 아내 앞에서 일대일의 인격적 존재의 존엄성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존엄성이 깨질 때는 그 가정은 이름만 남게 됩니다. 마이크 메이슨이라는 사람이 쓴「결혼의 신비」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가정생활의 고전적인 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듯 진정한 남녀의 교제만이 하나됨의 신비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내가 하나됨의 신비에 이르듯이 남녀의 교제만이 하나님과 하나됨의 신비를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이런 해석을 내렸습니다. '부부의 관계로 경험으로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고귀한 성취가 있다면 그것은 진실과 헌신으로 하나되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24-25절에 보면 부부가 연합하기 위해서 옷을 벗었다고 했습니다. 옷을 벗는다는 것은 자기 전 존재를 진실하게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또 연합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최상의 헌신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의 만남은 진실과 헌신입니다. 이 이상의 헌신이 없습니다. 이 이상의 진실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자기 존재를 벌거벗은 존재로 진실하게 내놓아야 되며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듯 헌신하는 것은 이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고전 7:3-4절에 보면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남편은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는 남편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연합을 위해서 자기 존재를 내어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함께 잠을 자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엄마는 아이들과 함께 자고 남편은 건너방에서 따로 자는 것, 이것은 성서적인 것이 아닙니다. 남자가 집안에 서재를 꾸며놓고 혼자 거기에서 연구하고 잠자는 것도 올바르지 못합니다. 연구했으면 잘 때는 같이 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건강상의 이유나 특별한 기도를 위해서라면 허락을 받고 하라고 성서가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우리 교회 여 집사님이 12시에 철야하러 왔어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오셨느냐고 했더니 아이 대학 진학을 위해서 백일기도를 시작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어서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백일기도는 새벽에 해도 됩니다. 자식 대학가는 것 가는대로 내버려두어야지 백일기도 한다고 떨어질 것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격을 세워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실력없는 것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가서 주무시죠." 자야 할 자리에 가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라고 제가 집으로 보내드린 일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부부는 서로 존경과 사랑으로 연합해야 됩니다.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33절) 인생이 육체가 연합되었다고 그것으로 일생을 다 사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도 쇠합니다. 정욕도 갑니다. 육체의 연합도 식어집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견고한 연합만이 일생을 강한 끈으로 연합시킬 수 있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이런 글을 읽고 혼자 웃었습니다. "아내가 예뻐보일 때..." 이런 제목의 글인데 20대 후반은 남편을 위해서 예쁜 아기 낳아줄 때 아내가 예뻐보이고, 30대 후반은 좋은 집에 못산다고 불평하지 않고 잘 참아주는 아내를 볼 때 예뻐보이고, 40대 후반은 "당신 건강해요. 건강해야 되요" 하면서 보약 다려줄 때 예뻐보이고, 50대 후반은 "당신은 참 훌륭한 사람이야"라고 칭찬해 줄 때 아주 예뻐보이고, 60대 후반은 '당신과 살아온 생은 참 행복한 삶이었다'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싱긋이 웃어줄 때 예뻐보이고, 70대 후반은 조용히 "우리가 죽거든 양지바른 곳에 함께 묻힙시다." 하면서 주름잡힌 얼굴로 쳐다볼 때 아주 예뻐보이더랍니다. 그런데 여기에 공통점이 있었는데 남자는 늙어서까지 여자에게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달라는 당부를 잃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남편을 존경해달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자존감을 지켜줄 때 남자들은 아내가 가장 예뻐보인다고 합니다. 아무리 예쁜 여자도 남편을 무시하면 정이 뚝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 날로 미워지기 시작합니다. 남편을 자꾸 세워주면 어떤 여자도 포근한 가운데 예뻐보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남편도 훌륭한 가문의 남자였고 부인도 명문대학을 나온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남편은 그 부인에게서 포근함도 느끼지 못하고 항상 지적만 당하면서 기죽어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지지리도 못난 여자와 눈이 맞아가지고 도망을 쳤습니다. 이 부인이 목사님에게 상담하기를 "목사님, 정말로 자존심이 상합니다. 잘난 여자와 도망갔으면 이렇게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겠습니다. 천하에 못생기고, 배운 것도 없고, 가문도 형편없는 여자와 도망갔으니 너무 창피합니다." 할 때 목사님이 "나라도 도망가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부인이 너무 똑똑하고 완벽해서 남편이 거기 붙어있을 수가 없어서 도망갔습니다. 남편을 존경한다고 하는 것은 아내가 순종해 준다는 얘기입니다. 순종한다는 말은 헬라어 원어를 보면 '아래에서 받들어 준다, 잘 들어준다'는 말입니다. 잘나고 똑똑한 것이 있어도 남편 앞에서만은 감추어야 됩니다. 다른 곳에 가서는 똑똑한 것을 아무리 나타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만은 '똑' 소리가 싹 사라지고 '덕' 소리만 나야 됩니다. 여자가 너무 똑똑해서 남편에게서 '똑' 소리가 나면 남편이 그때부터 기가 죽습니다. 하늘은 높고 넓어서 땅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땅을 품어야 되는데 하늘이 좁아지면 땅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늘은 품어야만 되기 때문에 품을 곳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 친구 목사가 있는데 친구 목사는 외모가 외소하고 부인은 헤비급입니다. 그래서 밤에 잘 때 부인은 쑥 올라오고 남편은 쑥 내려갑니다. 그 친구가 나한테 와서 하는 말이"우리 식구는 얼마나 태산처럼 헤비급인지 안을 수가 없어" 그래요. 그래서 제가 "자네가 하늘인데 하늘이 안아야지 땅이 안아서야 되겠어 땅이 안으면 거꾸로 되어서 뒤집어지겠네.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언제나 여자는 땅처럼 남편은 하늘처럼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의 신비입니다. 혹시 이 가운데 똑똑한 부인 있습니까 너무 똑똑한 척 하지 마십시오. 똑똑한 척은 세상에 나가서 하십시오. 가정에서는 똑 소리를 죽이십시오. 우리는 다윗과 미갈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됩니다. 다윗은 서민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미갈은 사울 왕의 딸로 왕가의 공주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차이가 너무 많습니다. 가문, 교육, 배경, 인생관, 취미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정략적으로 다윗과 미갈을 결혼시켰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난 후에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너무 너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추고 기뻐 뛰노느라고 옷이 벗어지는 줄도 몰랐습니다. 삼하 6장 16절에 보면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라고 했습니다. 미갈이 이것을 보고 남편을 업신여겼습니다. '저 사람은 원래 출신이 그런 사람이야 왕 이 체통도 없이 벌거벗고 춤을 춰' 하면서 아니꼬운 눈초리로 멸시하면서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집에 들어올 때 멸시하는 투로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정색을 하고 입을 엽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삼하 6:21-22) 이 말이 떨어지면서부터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별거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남남이 되어버린 것이죠. 다윗이 아내 미갈로부터 자존심이 상처를 받은 후로는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별거를 하게 되었고 다윗은 후에 밧세바를 만나게 됩니다. 다윗 왕가의 비극이 뭡니까? 바로 아내가 남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는데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여자가 20년 길러놓은 남자를 다른 남자가 20분만에 망칠 수 있다. 그러므로 남편을 세워주어야 한다." 아내에게 순종을 명령하신 것은 남편을 세워주기 위한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것은 자기 존재가 주님을 만난 천사같이 되라는 말입니다. 한문으로 지아비 부(夫)자는 하늘 천(天)에서 조금 솟은 것입니다. 이 말은 남편을 하늘보다 높이 받들라는 말입니다.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면 자기도 하늘처럼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자는 순종함으로 행복합니다. 순종함으로 자기 존재가 올라갑니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왕노릇 하고 싶어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만은 왕으로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회사에 가서는 멸시 당하고, 무시 당해도 가정에서만은 높은 자리에 세워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는 자기 아내를 사랑하므로 연합하라고 말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8) 자기를 희생한다는 말은 자기 이기심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살면서 날마다 자기를 별세시켜야 합니다. 자기 희생이란 어렵고 하기 싫은 일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했을 때 여자가 잘못했을지라도 남자가 먼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머리됨의 원리입니다. "그래도 내가 남자인데..." 하면서 목에 힘주고 있으면 머리됨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교인들과 함께 기도원에 가는데 우리 식구와 무슨 얘기를 하다가 제 자존심에 상처가 와서 마구 화를 냈습니다. 원래 제가 제 집 식구를 사랑하다가 존경하는 단계까지 갔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한신교회를 개척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제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가 저를 설득해서 개척하자고 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위대하고 또 나를 복되게 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단계를 넘어서 존경하는 단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으로 존경스럽게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추켜 세워주어서 그랬는지 자기도 모르게 우쭐거리면서 매사에 집에서도 무슨 얘기가 나오면 잘못한 것은 다 나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어떤 때는 속이 아려도 너무 존경해서 제가 참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기도원에 가면서 무슨 얘기가 나왔는데 내가 안했는데 잘못을 돌려요. 그래서 제가 화를 냈더니 운전하는데 마구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논두렁 길을 가는데 사고 나겠어요. 그렇다고 내가 자존심이 있지 잘못했다는 말은 못하겠어요. 그래도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자동차를 세우라고 하고는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사랑하는 여종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이 종을 용서하소서. 제가 오래 참지 못하고 화낸 것을 용서하여 주소서." 먼저 기도를 하고 나니까 잘못했다고 말하기가 쉬워요. 그래서 "여보, 내가 잘못했소" 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랬더니 자동차가 제대로 가요. 그렇게 하고 기도원에 가서 설교를 하니까 설교가 잘되요. 아내는 연약한 그릇인데 괴롭혀놓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면 내가 어떻게 설교하겠습니까 제가 그때 느낀 것은 남자는 자존심상 잘못했다는 말을 하기가 참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잘못한 것 없이 자기가 잘못했다고 죽지 않습니까 잘못은 다 우리들이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내가 잘못했다." 그럽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을 보면서 격에 맞지 않는 말을 해도 남편이 옆에서 참고 들어주면서 같이 가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정생활은 모든 것을 다 수용하고 사는 것입니다. 미국의 컬럼비아 바이블 컬러지 학장이었던 맥컬리킨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의 부인이 침해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곁에 있으면 안정감을 가지고 편안히 있고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집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불안해서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학장직을 여러해 더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장직을 사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이제 나는 아내의 곁으로 돌아간다. 42년전 결혼서약을 할 때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 아내를 돌볼 것을 이미 약속한 것이기에 나는 그 서약을 지키고 싶다. 내 아내가 40년동안 나를 돌보아 주었기에 이제는 내가 그 사람의 빚을 갚기 위해 아내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아내에 대한 사랑과 기쁨 때문에 나는 그의 곁으로 간다." 그가 학장직을 사임하고 이 선언을 하면서 가정으로 돌아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학장으로 있을 때보다 더 그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학장직을 몇 년동안 수행하는 것보다 자기 아내의 침해를 곁에서 돕기 위해서 가정으로 돌아간 위대함이 전 세계 남편들에게 더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만남이며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신비를 몸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될 때 남편은 예수님처럼 위대하게 되며 아내는 예수와 함께 사는 위대한 천사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사도 바울이 결혼을 말하다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게 된 것은 부부의 연합은 결국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목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천국의 모형이며, 가정생활은 천국 생활을 연습하는 것이 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종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라고 천국가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가는 문턱까지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땅에서 충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들어가서는 아들도, 종도 없고 신부만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날 때 주님의 영광이 내 영광이며, 주님의 영화로운 인격이 내 인격이며, 주님의 찬란한 빛이 내 빛이 되어 일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곳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되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듯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부부를 머리와 몸으로 비유한 것은 나눌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머리와 몸은 생명의 관계입니다. 신랑이 머리요, 신부가 몸이 되는 것은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나, 어떤 위험이라도 갈라놓을 수 없는 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해 준 것입니다. 부부의 연합은 참으로 천국을 이루는 신비이며, 이것은 행복을 얻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실 때 내가 그 품속에서 안식을 얻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종을 거느리고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삼고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신부를 만날 때만 하나님은 행복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므로 하나님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종노릇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이 외롭습니다. 내가 아들 노릇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이 외롭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전부로 삼고 하나님이 나의 신랑이 될 때 하나님은 행복해 하십니다. 하나님의 행복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내가 행복해지는 것으로 끝나지 마십시오. 주님을 신랑으로 모시게 되면 주님이 나 때문에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오 주님이시여, 나를 신부 삼아 행복하소서." 이것이 바로 신앙의 극치입니다. 우리가 가정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신비의 경지에 이르러서 천국을 끌어 땅으로 안고 땅의 삶이 천국으로 이어가는 위대한 신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정과 천국의 신비/ 엡5:31-33/ 2004-05-25
가정과 천국의 신비 엡5:31-33 왜 부모를 떠나는가? 그것은 부모를 떠나서 또 하나의 새로운 관계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는 세상을 떠나서 예수를 만나는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이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서 관계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만 믿으면 나는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그래서 주인과 종의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으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시면 내가 그의 신부가 됩니다. 그래서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종의 관계, 아들의 관계, 신부의 관계가 있는데 이 세 관계는 다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내가 종이 되어서 일하게 됩니다. 이 관계는 일의 관계입니다. 충성하고, 섬기는 관계며,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도 듣고 충성된 종으로서 상도 받고, 면류관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면 내가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또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녀됨의 권세를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권세를 받아서 천국에 가는 유업을 받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시고 사랑을 나누면서 교제하고, 행복을 얻는 관계입니다. 종으로 일할 때는 삯을 받고 칭찬을 받으며 아들로 믿게 될 때는 거기에서 유업을 받고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신랑 신부의 관계가 되면 사랑의 관계를 형성해서 행복하고, 교제하면서 인격적인 만남을 이룹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인격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다만 명령의 관계고, 순종의 관계며, 일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인격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보호의 관계이며, 돌봄의 관계이며, 유업을 받는 관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신랑 신부의 관계는 일대일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이 관계는 철저하게 서로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여기에서만 진정한 행복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성장의 단계를 보면 처음에 하나님을 만날 때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만나서 주인에게서 무엇을 얻습니다. 또 도움을 받습니다. 조금 더 은혜를 받으면 내가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는 위대한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고 마음에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성숙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전부가 되어서 마치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고 교제하듯이 하나님과 교제하므로 행복을 얻고 만족을 얻으며 기쁘게 살아가는 관계가 됩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연합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은 주인과 종의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종이고, 모세도 종이며, 여호수아, 이사야 모두 종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렇게 부르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연합하듯이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격적으로 성숙하면 신랑 신부의 관계로 일생을 살 듯이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 때 우리의 심령속에 하늘의 천국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31-33절) 먼저, 둘이 한 몸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비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남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연합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연합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연합은 인격적이고 영적인 교통을 상징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형상을 따라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고 창세기 1장 27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자 혼자만의 형상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함께 만날 때 하나님의 형상이 내게 온전히 나타나게 됩니다. 남녀의 연합은 결국 신비한 비밀인데 천국의 즐거움, 기쁨을 땅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 남녀의 연합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신비하게 봐야 합니다. 부부의 만남은 남녀의 성적인 만남이며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지으시고 우리의 성이 그 인격을 표현하는 도구라면 부부는 인격적으로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일대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우리가 회사에 가서 사장과 일대일이 안됩니다. 이것은 권위상 차이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일대일이 안됩니다. 이것은 보호자의 입장에서 자녀는 약한 존재로 섭니다. 이 세상 어디에 가도 일대일의 존재는 안됩니다. 빈부, 학력, 인물, 모든 것에서 비교되는 차등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부부는 일대일 인격적으로 만나는 유일한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대일의 인격으로 만나는 것은 부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남편 앞에 있는 아내는 일대일의 인격적 존재의 존엄성을 다 받고 있습니다. 남편도 그 아내 앞에서 일대일의 인격적 존재의 존엄성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존엄성이 깨질 때는 그 가정은 이름만 남게 됩니다. 마이크 메이슨이라는 사람이 쓴「결혼의 신비」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가정생활의 고전적인 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듯 진정한 남녀의 교제만이 하나됨의 신비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내가 하나됨의 신비에 이르듯이 남녀의 교제만이 하나님과 하나됨의 신비를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이런 해석을 내렸습니다. ’부부의 관계로 경험으로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고귀한 성취가 있다면 그것은 진실과 헌신으로 하나되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24-25절에 보면 부부가 연합하기 위해서 옷을 벗었다고 했습니다. 옷을 벗는다는 것은 자기 전 존재를 진실하게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또 연합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최상의 헌신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의 만남은 진실과 헌신입니다. 이 이상의 헌신이 없습니다. 이 이상의 진실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자기 존재를 벌거벗은 존재로 진실하게 내놓아야 되며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듯 헌신하는 것은 이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고전 7:3-4절에 보면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남편은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는 남편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연합을 위해서 자기 존재를 내어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함께 잠을 자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엄마는 아이들과 함께 자고 남편은 건너방에서 따로 자는 것, 이것은 성서적인 것이 아닙니다. 남자가 집안에 서재를 꾸며놓고 혼자 거기에서 연구하고 잠자는 것도 올바르지 못합니다. 연구했으면 잘 때는 같이 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건강상의 이유나 특별한 기도를 위해서라면 허락을 받고 하라고 성서가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우리 교회 여 집사님이 12시에 철야하러 왔어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오셨느냐고 했더니 아이 대학 진학을 위해서 백일기도를 시작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어서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백일기도는 새벽에 해도 됩니다. 자식 대학가는 것 가는대로 내버려두어야지 백일기도 한다고 떨어질 것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격을 세워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실력없는 것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가서 주무시죠.” 자야 할 자리에 가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라고 제가 집으로 보내드린 일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부부는 서로 존경과 사랑으로 연합해야 됩니다.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33절) 인생이 육체가 연합되었다고 그것으로 일생을 다 사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도 쇠합니다. 정욕도 갑니다. 육체의 연합도 식어집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견고한 연합만이 일생을 강한 끈으로 연합시킬 수 있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이런 글을 읽고 혼자 웃었습니다. ”아내가 예뻐보일 때...” 이런 제목의 글인데 20대 후반은 남편을 위해서 예쁜 아기 낳아줄 때 아내가 예뻐보이고, 30대 후반은 좋은 집에 못산다고 불평하지 않고 잘 참아주는 아내를 볼 때 예뻐보이고, 40대 후반은 ”당신 건강해요. 건강해야 되요” 하면서 보약 다려줄 때 예뻐보이고, 50대 후반은 ”당신은 참 훌륭한 사람이야”라고 칭찬해 줄 때 아주 예뻐보이고, 60대 후반은 ’당신과 살아온 생은 참 행복한 삶이었다’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싱긋이 웃어줄 때 예뻐보이고, 70대 후반은 조용히 ”우리가 죽거든 양지바른 곳에 함께 묻힙시다.” 하면서 주름잡힌 얼굴로 쳐다볼 때 아주 예뻐보이더랍니다. 그런데 여기에 공통점이 있었는데 남자는 늙어서까지 여자에게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달라는 당부를 잃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남편을 존경해달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자존감을 지켜줄 때 남자들은 아내가 가장 예뻐보인다고 합니다. 아무리 예쁜 여자도 남편을 무시하면 정이 뚝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 날로 미워지기 시작합니다. 남편을 자꾸 세워주면 어떤 여자도 포근한 가운데 예뻐보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남편도 훌륭한 가문의 남자였고 부인도 명문대학을 나온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남편은 그 부인에게서 포근함도 느끼지 못하고 항상 지적만 당하면서 기죽어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지지리도 못난 여자와 눈이 맞아가지고 도망을 쳤습니다. 이 부인이 목사님에게 상담하기를 ”목사님, 정말로 자존심이 상합니다. 잘난 여자와 도망갔으면 이렇게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겠습니다. 천하에 못생기고, 배운 것도 없고, 가문도 형편없는 여자와 도망갔으니 너무 창피합니다.” 할 때 목사님이 ”나라도 도망가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부인이 너무 똑똑하고 완벽해서 남편이 거기 붙어있을 수가 없어서 도망갔습니다. 남편을 존경한다고 하는 것은 아내가 순종해 준다는 얘기입니다. 순종한다는 말은 헬라어 원어를 보면 ’아래에서 받들어 준다, 잘 들어준다’는 말입니다. 잘나고 똑똑한 것이 있어도 남편 앞에서만은 감추어야 됩니다. 다른 곳에 가서는 똑똑한 것을 아무리 나타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만은 ’똑’ 소리가 싹 사라지고 ’덕’ 소리만 나야 됩니다. 여자가 너무 똑똑해서 남편에게서 ’똑’ 소리가 나면 남편이 그때부터 기가 죽습니다. 하늘은 높고 넓어서 땅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땅을 품어야 되는데 하늘이 좁아지면 땅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늘은 품어야만 되기 때문에 품을 곳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 친구 목사가 있는데 친구 목사는 외모가 외소하고 부인은 헤비급입니다. 그래서 밤에 잘 때 부인은 쑥 올라오고 남편은 쑥 내려갑니다. 그 친구가 나한테 와서 하는 말이”우리 식구는 얼마나 태산처럼 헤비급인지 안을 수가 없어” 그래요. 그래서 제가 ”자네가 하늘인데 하늘이 안아야지 땅이 안아서야 되겠어 땅이 안으면 거꾸로 되어서 뒤집어지겠네.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언제나 여자는 땅처럼 남편은 하늘처럼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의 신비입니다. 혹시 이 가운데 똑똑한 부인 있습니까 너무 똑똑한 척 하지 마십시오. 똑똑한 척은 세상에 나가서 하십시오. 가정에서는 똑 소리를 죽이십시오. 우리는 다윗과 미갈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됩니다. 다윗은 서민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미갈은 사울 왕의 딸로 왕가의 공주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차이가 너무 많습니다. 가문, 교육, 배경, 인생관, 취미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정략적으로 다윗과 미갈을 결혼시켰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난 후에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너무 너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추고 기뻐 뛰노느라고 옷이 벗어지는 줄도 몰랐습니다. 삼하 6장 16절에 보면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라고 했습니다. 미갈이 이것을 보고 남편을 업신여겼습니다. ’저 사람은 원래 출신이 그런 사람이야 왕 이 체통도 없이 벌거벗고 춤을 춰’ 하면서 아니꼬운 눈초리로 멸시하면서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집에 들어올 때 멸시하는 투로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정색을 하고 입을 엽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삼하 6:21-22) 이 말이 떨어지면서부터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별거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남남이 되어버린 것이죠. 다윗이 아내 미갈로부터 자존심이 상처를 받은 후로는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별거를 하게 되었고 다윗은 후에 밧세바를 만나게 됩니다. 다윗 왕가의 비극이 뭡니까? 바로 아내가 남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는데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여자가 20년 길러놓은 남자를 다른 남자가 20분만에 망칠 수 있다. 그러므로 남편을 세워주어야 한다.” 아내에게 순종을 명령하신 것은 남편을 세워주기 위한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것은 자기 존재가 주님을 만난 천사같이 되라는 말입니다. 한문으로 지아비 부(夫)자는 하늘 천(天)에서 조금 솟은 것입니다. 이 말은 남편을 하늘보다 높이 받들라는 말입니다.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면 자기도 하늘처럼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자는 순종함으로 행복합니다. 순종함으로 자기 존재가 올라갑니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왕노릇 하고 싶어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만은 왕으로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회사에 가서는 멸시 당하고, 무시 당해도 가정에서만은 높은 자리에 세워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는 자기 아내를 사랑하므로 연합하라고 말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8) 자기를 희생한다는 말은 자기 이기심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살면서 날마다 자기를 별세시켜야 합니다. 자기 희생이란 어렵고 하기 싫은 일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했을 때 여자가 잘못했을지라도 남자가 먼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머리됨의 원리입니다. ”그래도 내가 남자인데...” 하면서 목에 힘주고 있으면 머리됨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교인들과 함께 기도원에 가는데 우리 식구와 무슨 얘기를 하다가 제 자존심에 상처가 와서 마구 화를 냈습니다. 원래 제가 제 집 식구를 사랑하다가 존경하는 단계까지 갔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한신교회를 개척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제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가 저를 설득해서 개척하자고 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위대하고 또 나를 복되게 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단계를 넘어서 존경하는 단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으로 존경스럽게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추켜 세워주어서 그랬는지 자기도 모르게 우쭐거리면서 매사에 집에서도 무슨 얘기가 나오면 잘못한 것은 다 나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어떤 때는 속이 아려도 너무 존경해서 제가 참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기도원에 가면서 무슨 얘기가 나왔는데 내가 안했는데 잘못을 돌려요. 그래서 제가 화를 냈더니 운전하는데 마구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논두렁 길을 가는데 사고 나겠어요. 그렇다고 내가 자존심이 있지 잘못했다는 말은 못하겠어요. 그래도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자동차를 세우라고 하고는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사랑하는 여종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이 종을 용서하소서. 제가 오래 참지 못하고 화낸 것을 용서하여 주소서.” 먼저 기도를 하고 나니까 잘못했다고 말하기가 쉬워요. 그래서 ”여보, 내가 잘못했소” 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랬더니 자동차가 제대로 가요. 그렇게 하고 기도원에 가서 설교를 하니까 설교가 잘되요. 아내는 연약한 그릇인데 괴롭혀놓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면 내가 어떻게 설교하겠습니까 제가 그때 느낀 것은 남자는 자존심상 잘못했다는 말을 하기가 참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잘못한 것 없이 자기가 잘못했다고 죽지 않습니까 잘못은 다 우리들이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내가 잘못했다.” 그럽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을 보면서 격에 맞지 않는 말을 해도 남편이 옆에서 참고 들어주면서 같이 가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정생활은 모든 것을 다 수용하고 사는 것입니다. 미국의 컬럼비아 바이블 컬러지 학장이었던 맥컬리킨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의 부인이 침해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곁에 있으면 안정감을 가지고 편안히 있고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집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불안해서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학장직을 여러해 더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장직을 사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이제 나는 아내의 곁으로 돌아간다. 42년전 결혼서약을 할 때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 아내를 돌볼 것을 이미 약속한 것이기에 나는 그 서약을 지키고 싶다. 내 아내가 40년동안 나를 돌보아 주었기에 이제는 내가 그 사람의 빚을 갚기 위해 아내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아내에 대한 사랑과 기쁨 때문에 나는 그의 곁으로 간다.” 그가 학장직을 사임하고 이 선언을 하면서 가정으로 돌아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학장으로 있을 때보다 더 그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학장직을 몇 년동안 수행하는 것보다 자기 아내의 침해를 곁에서 돕기 위해서 가정으로 돌아간 위대함이 전 세계 남편들에게 더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만남이며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신비를 몸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될 때 남편은 예수님처럼 위대하게 되며 아내는 예수와 함께 사는 위대한 천사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사도 바울이 결혼을 말하다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게 된 것은 부부의 연합은 결국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목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천국의 모형이며, 가정생활은 천국 생활을 연습하는 것이 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종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라고 천국가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가는 문턱까지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땅에서 충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들어가서는 아들도, 종도 없고 신부만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날 때 주님의 영광이 내 영광이며, 주님의 영화로운 인격이 내 인격이며, 주님의 찬란한 빛이 내 빛이 되어 일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곳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되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듯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부부를 머리와 몸으로 비유한 것은 나눌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머리와 몸은 생명의 관계입니다. 신랑이 머리요, 신부가 몸이 되는 것은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나, 어떤 위험이라도 갈라놓을 수 없는 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해 준 것입니다. 부부의 연합은 참으로 천국을 이루는 신비이며, 이것은 행복을 얻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실 때 내가 그 품속에서 안식을 얻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종을 거느리고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삼고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신부를 만날 때만 하나님은 행복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므로 하나님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종노릇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이 외롭습니다. 내가 아들 노릇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이 외롭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전부로 삼고 하나님이 나의 신랑이 될 때 하나님은 행복해 하십니다. 하나님의 행복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내가 행복해지는 것으로 끝나지 마십시오. 주님을 신랑으로 모시게 되면 주님이 나 때문에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오 주님이시여, 나를 신부 삼아 행복하소서.” 이것이 바로 신앙의 극치입니다. 우리가 가정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신비의 경지에 이르러서 천국을 끌어 땅으로 안고 땅의 삶이 천국으로 이어가는 위대한 신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정과 천국의 신비/엡5:31-33 2001-12-08 23:51:54 read : 36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왜 부모를 떠나는가? 그것은 부모를 떠나서 또 하나의 새로운 관계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는 세상을 떠나서 예수를 만나는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이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서 관계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만 믿으면 나는 하나
가정과 천국의 신비/엡5:31-33 2001-12-08 23:51:54 read : 36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왜 부모를 떠나는가? 그것은 부모를 떠나서 또 하나의 새로운 관계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는 세상을 떠나서 예수를 만나는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이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서 관계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만 믿으면 나는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그래서 주인과 종의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으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시면 내가 그의 신부가 됩니다. 그래서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종의 관계, 아들의 관계, 신부의 관계가 있는데 이 세 관계는 다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내가 종이 되어서 일하게 됩니다. 이 관계는 일의 관계입니다. 충성하고, 섬기는 관계며,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도 듣고 충성된 종으로서 상도 받고, 면류관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면 내가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또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녀됨의 권세를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권세를 받아서 천국에 가는 유업을 받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시고 사랑을 나누면서 교제하고, 행복을 얻는 관계입니다. 종으로 일할 때는 삯을 받고 칭찬을 받으며 아들로 믿게 될 때는 거기에서 유업을 받고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신랑 신부의 관계가 되면 사랑의 관계를 형성해서 행복하고, 교제하면서 인격적인 만남을 이룹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인격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다만 명령의 관계고, 순종의 관계며, 일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인격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보호의 관계이며, 돌봄의 관계이며, 유업을 받는 관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신랑 신부의 관계는 일대일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이 관계는 철저하게 서로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여기에서만 진정한 행복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성장의 단계를 보면 처음에 하나님을 만날 때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만나서 주인에게서 무엇을 얻습니다. 또 도움을 받습니다. 조금 더 은혜를 받으면 내가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는 위대한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고 마음에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성숙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전부가 되어서 마치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고 교제하듯이 하나님과 교제하므로 행복을 얻고 만족을 얻으며 기쁘게 살아가는 관계가 됩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연합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은 주인과 종의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종이고, 모세도 종이며, 여호수아, 이사야 모두 종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렇게 부르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연합하듯이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격적으로 성숙하면 신랑 신부의 관계로 일생을 살 듯이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 때 우리의 심령속에 하늘의 천국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31-33절) 먼저, 둘이 한 몸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비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남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연합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연합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연합은 인격적이고 영적인 교통을 상징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형상을 따라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고 창세기 1장 27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자 혼자만의 형상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함께 만날 때 하나님의 형상이 내게 온전히 나타나게 됩니다. 남녀의 연합은 결국 신비한 비밀인데 천국의 즐거움, 기쁨을 땅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 남녀의 연합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신비하게 봐야 합니다. 부부의 만남은 남녀의 성적인 만남이며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지으시고 우리의 성이 그 인격을 표현하는 도구라면 부부는 인격적으로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일대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우리가 회사에 가서 사장과 일대일이 안됩니다. 이것은 권위상 차이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일대일이 안됩니다. 이것은 보호자의 입장에서 자녀는 약한 존재로 섭니다. 이 세상 어디에 가도 일대일의 존재는 안됩니다. 빈부, 학력, 인물, 모든 것에서 비교되는 차등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부부는 일대일 인격적으로 만나는 유일한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대일의 인격으로 만나는 것은 부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남편 앞에 있는 아내는 일대일의 인격적 존재의 존엄성을 다 받고 있습니다. 남편도 그 아내 앞에서 일대일의 인격적 존재의 존엄성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존엄성이 깨질 때는 그 가정은 이름만 남게 됩니다. 마이크 메이슨이라는 사람이 쓴「결혼의 신비」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가정생활의 고전적인 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듯 진정한 남녀의 교제만이 하나됨의 신비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내가 하나됨의 신비에 이르듯이 남녀의 교제만이 하나님과 하나됨의 신비를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이런 해석을 내렸습니다. '부부의 관계로 경험으로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고귀한 성취가 있다면 그것은 진실과 헌신으로 하나되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24-25절에 보면 부부가 연합하기 위해서 옷을 벗었다고 했습니다. 옷을 벗는다는 것은 자기 전 존재를 진실하게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또 연합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최상의 헌신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의 만남은 진실과 헌신입니다. 이 이상의 헌신이 없습니다. 이 이상의 진실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자기 존재를 벌거벗은 존재로 진실하게 내놓아야 되며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듯 헌신하는 것은 이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고전 7:3-4절에 보면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남편은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는 남편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연합을 위해서 자기 존재를 내어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함께 잠을 자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엄마는 아이들과 함께 자고 남편은 건너방에서 따로 자는 것, 이것은 성서적인 것이 아닙니다. 남자가 집안에 서재를 꾸며놓고 혼자 거기에서 연구하고 잠자는 것도 올바르지 못합니다. 연구했으면 잘 때는 같이 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건강상의 이유나 특별한 기도를 위해서라면 허락을 받고 하라고 성서가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우리 교회 여 집사님이 12시에 철야하러 왔어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오셨느냐고 했더니 아이 대학 진학을 위해서 백일기도를 시작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어서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백일기도는 새벽에 해도 됩니다. 자식 대학가는 것 가는대로 내버려두어야지 백일기도 한다고 떨어질 것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격을 세워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실력없는 것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가서 주무시죠." 자야 할 자리에 가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라고 제가 집으로 보내드린 일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부부는 서로 존경과 사랑으로 연합해야 됩니다.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33절) 인생이 육체가 연합되었다고 그것으로 일생을 다 사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도 쇠합니다. 정욕도 갑니다. 육체의 연합도 식어집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견고한 연합만이 일생을 강한 끈으로 연합시킬 수 있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이런 글을 읽고 혼자 웃었습니다. "아내가 예뻐보일 때..." 이런 제목의 글인데 20대 후반은 남편을 위해서 예쁜 아기 낳아줄 때 아내가 예뻐보이고, 30대 후반은 좋은 집에 못산다고 불평하지 않고 잘 참아주는 아내를 볼 때 예뻐보이고, 40대 후반은 "당신 건강해요. 건강해야 되요" 하면서 보약 다려줄 때 예뻐보이고, 50대 후반은 "당신은 참 훌륭한 사람이야"라고 칭찬해 줄 때 아주 예뻐보이고, 60대 후반은 '당신과 살아온 생은 참 행복한 삶이었다'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싱긋이 웃어줄 때 예뻐보이고, 70대 후반은 조용히 "우리가 죽거든 양지바른 곳에 함께 묻힙시다." 하면서 주름잡힌 얼굴로 쳐다볼 때 아주 예뻐보이더랍니다. 그런데 여기에 공통점이 있었는데 남자는 늙어서까지 여자에게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달라는 당부를 잃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남편을 존경해달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자존감을 지켜줄 때 남자들은 아내가 가장 예뻐보인다고 합니다. 아무리 예쁜 여자도 남편을 무시하면 정이 뚝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 날로 미워지기 시작합니다. 남편을 자꾸 세워주면 어떤 여자도 포근한 가운데 예뻐보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남편도 훌륭한 가문의 남자였고 부인도 명문대학을 나온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남편은 그 부인에게서 포근함도 느끼지 못하고 항상 지적만 당하면서 기죽어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지지리도 못난 여자와 눈이 맞아가지고 도망을 쳤습니다. 이 부인이 목사님에게 상담하기를 "목사님, 정말로 자존심이 상합니다. 잘난 여자와 도망갔으면 이렇게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겠습니다. 천하에 못생기고, 배운 것도 없고, 가문도 형편없는 여자와 도망갔으니 너무 창피합니다." 할 때 목사님이 "나라도 도망가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부인이 너무 똑똑하고 완벽해서 남편이 거기 붙어있을 수가 없어서 도망갔습니다. 남편을 존경한다고 하는 것은 아내가 순종해 준다는 얘기입니다. 순종한다는 말은 헬라어 원어를 보면 '아래에서 받들어 준다, 잘 들어준다'는 말입니다. 잘나고 똑똑한 것이 있어도 남편 앞에서만은 감추어야 됩니다. 다른 곳에 가서는 똑똑한 것을 아무리 나타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만은 '똑' 소리가 싹 사라지고 '덕' 소리만 나야 됩니다. 여자가 너무 똑똑해서 남편에게서 '똑' 소리가 나면 남편이 그때부터 기가 죽습니다. 하늘은 높고 넓어서 땅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땅을 품어야 되는데 하늘이 좁아지면 땅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늘은 품어야만 되기 때문에 품을 곳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 친구 목사가 있는데 친구 목사는 외모가 외소하고 부인은 헤비급입니다. 그래서 밤에 잘 때 부인은 쑥 올라오고 남편은 쑥 내려갑니다. 그 친구가 나한테 와서 하는 말이"우리 식구는 얼마나 태산처럼 헤비급인지 안을 수가 없어" 그래요. 그래서 제가 "자네가 하늘인데 하늘이 안아야지 땅이 안아서야 되겠어 땅이 안으면 거꾸로 되어서 뒤집어지겠네.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언제나 여자는 땅처럼 남편은 하늘처럼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의 신비입니다. 혹시 이 가운데 똑똑한 부인 있습니까 너무 똑똑한 척 하지 마십시오. 똑똑한 척은 세상에 나가서 하십시오. 가정에서는 똑 소리를 죽이십시오. 우리는 다윗과 미갈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됩니다. 다윗은 서민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미갈은 사울 왕의 딸로 왕가의 공주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차이가 너무 많습니다. 가문, 교육, 배경, 인생관, 취미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정략적으로 다윗과 미갈을 결혼시켰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난 후에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너무 너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추고 기뻐 뛰노느라고 옷이 벗어지는 줄도 몰랐습니다. 삼하 6장 16절에 보면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라고 했습니다. 미갈이 이것을 보고 남편을 업신여겼습니다. '저 사람은 원래 출신이 그런 사람이야 왕 이 체통도 없이 벌거벗고 춤을 춰' 하면서 아니꼬운 눈초리로 멸시하면서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집에 들어올 때 멸시하는 투로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정색을 하고 입을 엽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삼하 6:21-22) 이 말이 떨어지면서부터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별거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남남이 되어버린 것이죠. 다윗이 아내 미갈로부터 자존심이 상처를 받은 후로는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별거를 하게 되었고 다윗은 후에 밧세바를 만나게 됩니다. 다윗 왕가의 비극이 뭡니까? 바로 아내가 남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는데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여자가 20년 길러놓은 남자를 다른 남자가 20분만에 망칠 수 있다. 그러므로 남편을 세워주어야 한다." 아내에게 순종을 명령하신 것은 남편을 세워주기 위한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것은 자기 존재가 주님을 만난 천사같이 되라는 말입니다. 한문으로 지아비 부(夫)자는 하늘 천(天)에서 조금 솟은 것입니다. 이 말은 남편을 하늘보다 높이 받들라는 말입니다.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면 자기도 하늘처럼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자는 순종함으로 행복합니다. 순종함으로 자기 존재가 올라갑니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왕노릇 하고 싶어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만은 왕으로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회사에 가서는 멸시 당하고, 무시 당해도 가정에서만은 높은 자리에 세워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는 자기 아내를 사랑하므로 연합하라고 말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8) 자기를 희생한다는 말은 자기 이기심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살면서 날마다 자기를 별세시켜야 합니다. 자기 희생이란 어렵고 하기 싫은 일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했을 때 여자가 잘못했을지라도 남자가 먼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머리됨의 원리입니다. "그래도 내가 남자인데..." 하면서 목에 힘주고 있으면 머리됨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교인들과 함께 기도원에 가는데 우리 식구와 무슨 얘기를 하다가 제 자존심에 상처가 와서 마구 화를 냈습니다. 원래 제가 제 집 식구를 사랑하다가 존경하는 단계까지 갔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한신교회를 개척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제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가 저를 설득해서 개척하자고 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위대하고 또 나를 복되게 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단계를 넘어서 존경하는 단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으로 존경스럽게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추켜 세워주어서 그랬는지 자기도 모르게 우쭐거리면서 매사에 집에서도 무슨 얘기가 나오면 잘못한 것은 다 나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어떤 때는 속이 아려도 너무 존경해서 제가 참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기도원에 가면서 무슨 얘기가 나왔는데 내가 안했는데 잘못을 돌려요. 그래서 제가 화를 냈더니 운전하는데 마구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논두렁 길을 가는데 사고 나겠어요. 그렇다고 내가 자존심이 있지 잘못했다는 말은 못하겠어요. 그래도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자동차를 세우라고 하고는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사랑하는 여종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이 종을 용서하소서. 제가 오래 참지 못하고 화낸 것을 용서하여 주소서." 먼저 기도를 하고 나니까 잘못했다고 말하기가 쉬워요. 그래서 "여보, 내가 잘못했소" 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랬더니 자동차가 제대로 가요. 그렇게 하고 기도원에 가서 설교를 하니까 설교가 잘되요. 아내는 연약한 그릇인데 괴롭혀놓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면 내가 어떻게 설교하겠습니까 제가 그때 느낀 것은 남자는 자존심상 잘못했다는 말을 하기가 참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잘못한 것 없이 자기가 잘못했다고 죽지 않습니까 잘못은 다 우리들이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내가 잘못했다." 그럽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을 보면서 격에 맞지 않는 말을 해도 남편이 옆에서 참고 들어주면서 같이 가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정생활은 모든 것을 다 수용하고 사는 것입니다. 미국의 컬럼비아 바이블 컬러지 학장이었던 맥컬리킨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의 부인이 침해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곁에 있으면 안정감을 가지고 편안히 있고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집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불안해서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학장직을 여러해 더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장직을 사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이제 나는 아내의 곁으로 돌아간다. 42년전 결혼서약을 할 때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 아내를 돌볼 것을 이미 약속한 것이기에 나는 그 서약을 지키고 싶다. 내 아내가 40년동안 나를 돌보아 주었기에 이제는 내가 그 사람의 빚을 갚기 위해 아내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아내에 대한 사랑과 기쁨 때문에 나는 그의 곁으로 간다." 그가 학장직을 사임하고 이 선언을 하면서 가정으로 돌아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학장으로 있을 때보다 더 그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학장직을 몇 년동안 수행하는 것보다 자기 아내의 침해를 곁에서 돕기 위해서 가정으로 돌아간 위대함이 전 세계 남편들에게 더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만남이며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신비를 몸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될 때 남편은 예수님처럼 위대하게 되며 아내는 예수와 함께 사는 위대한 천사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사도 바울이 결혼을 말하다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게 된 것은 부부의 연합은 결국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목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천국의 모형이며, 가정생활은 천국 생활을 연습하는 것이 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종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라고 천국가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가는 문턱까지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땅에서 충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들어가서는 아들도, 종도 없고 신부만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날 때 주님의 영광이 내 영광이며, 주님의 영화로운 인격이 내 인격이며, 주님의 찬란한 빛이 내 빛이 되어 일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곳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되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듯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부부를 머리와 몸으로 비유한 것은 나눌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머리와 몸은 생명의 관계입니다. 신랑이 머리요, 신부가 몸이 되는 것은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나, 어떤 위험이라도 갈라놓을 수 없는 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해 준 것입니다. 부부의 연합은 참으로 천국을 이루는 신비이며, 이것은 행복을 얻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실 때 내가 그 품속에서 안식을 얻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종을 거느리고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삼고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신부를 만날 때만 하나님은 행복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므로 하나님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종노릇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이 외롭습니다. 내가 아들 노릇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이 외롭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전부로 삼고 하나님이 나의 신랑이 될 때 하나님은 행복해 하십니다. 하나님의 행복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내가 행복해지는 것으로 끝나지 마십시오. 주님을 신랑으로 모시게 되면 주님이 나 때문에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오 주님이시여, 나를 신부 삼아 행복하소서." 이것이 바로 신앙의 극치입니다. 우리가 가정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신비의 경지에 이르러서 천국을 끌어 땅으로 안고 땅의 삶이 천국으로 이어가는 위대한 신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정생활의 비결 /엡6:1-3 2012-08-28 11:31:04 read : 23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5월의 신록이 깊어지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우리의 부모님입니다. 계절의 여왕이요, 꿈과 희망의 계절이며, 또한 가정의 달이기도 한 이 5월에 우리는 그 동안 효도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부모님을 생각할 때 가슴이 저려옵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서 부모님이 최근이나 일찍 돌아가셔서 효도할 수 있는 기회
가정생활의 비결 /엡6:1-3 2012-08-28 11:31:04 read : 23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5월의 신록이 깊어지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우리의 부모님입니다. 계절의 여왕이요, 꿈과 희망의 계절이며, 또한 가정의 달이기도 한 이 5월에 우리는 그 동안 효도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부모님을 생각할 때 가슴이 저려옵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서 부모님이 최근이나 일찍 돌아가셔서 효도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살아생전에 불효한 것, 마음 편하게 해드리지 못하고 속 썩여 드린 일만 생각이 날 것입니다, 또 부모님이 살아계신다 해도 이 세상의 생존경쟁 속에 바쁘게 사느라 제대로 효도하지 못하고, 또 삶 속에 다가오는 여러 가지 실패와 어려움 때문에 마음을 아프게 하고 걱정 끼쳐드린 것 등 잘 해드리지 못한 것만이 생각날 것입니다. 요즘 사회학자 가운데 에이지퀘이크(agequake)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이라는 ‘age’와 흔들린다는 ‘quake’를 합해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예를 들어 ‘지진’을 영어로 어스퀘이크(earthquake)라고 하는데 땅이 흔들리고 이로 인해 오는 혼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에이지퀘이크란 말은 사회의 구성원들의 연령 구조에 큰 변화가 일어나서 사회에 큰 충격파를 던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특히 인구의 고령화에 따른 사회 경제적인 충격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 위해 생겨난 말입니다. 우리 사회는 2000년에 들어서면서 만 65세 이상의 인구 비중이 7,2%가 되어 정식으로 고령화 국가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작년 2010년에 들어서서는 소위 노령인구가 510만명으로 집계되어 총인구의 10%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노인들의 평균 수명 증가와 가임 여성들의 출산율 저하로 우리나라는 이제 전 세계에서 가장 급속한 속도로 인구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런 노령화 사회현상이 촉진되면서 이미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노인들의 사회 보장 문제가 최대의 사회 현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논의의 뒤안길에서 아직도 논의되기를 기피하고 있는 최대의 숨겨진 또 하나의 사회 현안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소위 노인 학대의 문제입니다. 어느 기관이 조사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의하면 전체 응답 노인의 8,2% 무려 10%에 가까운 노인들이 그들의 자녀 및 가족원으로부터 학대받고 있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 못지 않은 빠른 사회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던 한 시대가 있었다면 바로 1세기의 로마제국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위 로마제국이 전 세계를 정복하며 가져온 팍스-로마나의 식민지 문화, 개방적인 로마 문화는 당시의 기존 전통 윤리에서 사람들을 해방하기 시작했고 가정 붕괴가 촉진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바울사도는 소아시아의 가장 로마적인 도시였던 에베소에서 복음을 받아드리고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들이 된 에베소 교회를 향해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 중에 효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효에 대해서 1-3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이 효를 해야합니까? 첫째,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하나님께서 보실 때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은 지극히 옳은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옳다는 것은 “원리에 맞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계에 기본 원리를 세우신 것처럼 인간 세계에 기본 원리를 세워 놓으셨습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은 자연의 기본 원리에 맞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여 희생하고 자식은 그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인간 세계의 기본 원리에 맞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효도하는 일은 옳은 일입니다.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부모가 나 하나를 위해 어떤 희생과 사랑을 쏟았는가를 알아야합니다. 여러분, 가시고기와 논바닥에 사는 우렁이를 아실 것입니다. 부성애가 강한 가시고기와 모성애가 강한 우렁이가 떠오릅니다. 가시고기는 소설로서 더욱 유명합니다.가시고기는 산란기에 암컷이 알을 낳고 떠나면 숫놈은 알이 부화될 때까지 신선한 공기를 제공하고 침입자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새끼들이 둥지를 떠날 때 죽은 아비의 사체를 다 뜯어 먹습니다. 그렇게 다 주고 생을 마감하는 작은 물고기입니다.가족을 위해 수고하다 조용히 한 세상을 마감하는 아버지들의 함축된 모습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드라마입니다.또 우렁이는 제 몸에다 알을 낳으며 새끼들은 어미의 살을 파먹으며 성장합니다.한 점의 살도 남김없이 새끼들에게 먹이로 주고 빈 껍데기가 되어 조용히 물에 떠내려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묻습니다. 가족을 보호하고 울타리가 되는 아버지의 희생과 살을 깎아 먹이는 어머니의 희생은 어디에서 보상받게 될까요?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 그들은 우리 인생의 울타리이십니다. 그 울타리 안에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분명 부모님은 우리의 자랑입니다. 부모님을 높이십시오. - 그것이 옳습니다. 둘째, 효도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십계명 중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여기 ‘공경하라'는 히브리어 ’k bad'는 ‘무겁다'는 뜻입니다. 즉, ’공경한다'는 것은 ‘무게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신 부모님께는 우리가 도저히 흉내내거나 상상할 수 없는 삶의 무게, 경륜의 무게, 인식의 무게가 있는 법입니다. 바로 그 무게를 인정하는 것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 무게를 인정하면 귀히 여기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무게'란 ’긍지'와 동의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님 인생의 무게를 존중한다는 것은 자식으로써 부모님에 대한 긍지를 품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요, 만약 이 긍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부모님의 무게를 인정하기는커녕 깃털보다 더 가벼이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효도란 함께 모시고 사느냐 아니냐, 용돈을 얼마나 드리느냐, 얼마나 호강을 시켜 드리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참된 효도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주신 부모님에 대한 긍지 여부에 따라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요즘, 자식들의 고민이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는 문제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 가정이 한 둘이 아닙니다. 특히 맞벌이 부부라든지, 부모를 모실 수 있는 환경이 안 되어있는 분들은 요양원이나 시설에 보내는 것에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을 낳아 주신 부모님이 단지 귀찮아서, 혹은 남의 손을 빌어 형식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양로원에 보내는 것은 물론 천륜을 어기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에 대하여 긍지를 갖고 살아가는 자식이 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부모님께서 노인들을 위해 특수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양로원에서 같은 또래의 노인들과 함께 살기를 진정으로 원하시기에 양로원에 모셔다 드리고 정기적으로 찾아뵙는다면, 그것은 결코 불효가 아닙니다. 도리어 참된 효도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을 한 집에 모시고 살면서도 함께 사는 애완용 강아지만도 못하게 여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씻을 수 없는 불효입니다. 따라서 내 부모님의 재산이 얼마냐, 내 부모님이 얼마나 출세한 분이냐, 얼마나 배운 분이냐에 상관없이, 그 분의 자식으로 태어난 데 대한 긍지가 참된 효도의 필수조건이 됩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도 존중도 섬김도 오직 이 긍지로부터만 비롯되는 까닭입니다. 셋째, 효도는 중요한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오늘 본문 3절을 보면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여러 계명들이 있습니다. 그 계명들은 다 마땅히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그런데 유독 이 계명에만 뒤에 보너스가 붙어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잘 되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땅에서 장수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 공경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그 일에 무슨 상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모 공경하기가 참 어렵기 때문에 상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부모를 극진히 공경하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어야 합니다. 충분히 상을 줄 이유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는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노부모가 치매에 걸려 자꾸만 집을 나가시는 부모를 공양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수다가 심한 노부모를 극진히 공양하는 일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고부간의 갈등이 심한 부모를 모시기는 더욱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부모 공경하는 일에 예부터 상이 주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를 공경하는 자식이 복을 받습니다. 천하없어도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식은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부모는 자식에게 공양 받고 효도하기만을 기다리면 안 됩니다. 부모는 자식으로 하여금 부모를 공경하게 해서 복을 받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적극적인 부모의 역할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공경해서 이 약속된 복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저는 오늘 이 메시지를 시작하면서 노인 학대의 이야기을 언급했습니다만 가장 잔인한 부모 학대, 노인 학대는 부모 앞에서 우리가 잘못된 인생을 사는 일입니다. 여자 홀몸으로 힘든 농사일을 하며 아들을 판사로 키워낸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노모는 아들 생각만 하면 밥을 한 끼 굶어도 배가 부른 것 같고, 잠을 청하다가도 아들 생각에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비록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그 아들로 인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아 남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이 노모가 한 해 농사를 마치고 손수 정성으로 기른 것들을 한 보따리 가득 싸서, 세상에서 제일 귀한 아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 아들집을 찾아갔습니다. 아들 집에 도착해보니 아들 며느리는 집에 없고 손주만 혼자 놀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판사이기도 하지만 부잣집 딸을 며느리로 둔 덕택에 촌 할머니의 눈에 신기하기만 한 살림살이가 집안에 가득했습니다. 할머니는 이곳저곳 집안 구경을 하다가 안방 경대에 올려져 있는 가계부를 보게 되었습니다. 부잣집 딸이라 가계부 따위는 쓰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며느리가 가계부를 쓴다고 생각하니 며느리가 참 기득하다는 생각이 들어 가계부를 살펴보았습니다. 각종 세금, 부식비, 의류비 등 섬세하게 쓰여진 가계부를 보면서 감격해 하다가, 문득 ‘촌년 10만원’이란 항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건 무엇을 산 것일까 하고 자세히 보니까 매달 같은 날짜에 지출한 것을 보고 시골에 사는 자신에게 보내준 용돈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순간 할머니는 머리를 뭔가로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한참을 서 있다가 아들에게 주려고 무거운 줄도 모르고 이고지고 싸가지고 온 것을 다시 주섬주섬 다 싸서 고속버스를 타고 시골로 내려가고 말았습니다. 고속버스 안에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아들에게서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아마도 집에 전화를 하다가 집에 놀고 있던 아들 녀석에게 할머니가 오셨다가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입니다. 판사 아들이 어머니에게 “오랜만에 오셨는데 왜 주무시지도 않고 그냥 가셨냐?”고 묻자 어머니는 가슴 속에서 폭탄이 터지듯이 대답했습니다. “아니 왜? 촌년이 어디서 자-.” 화를 내시는 어머니의 말씀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아들이 “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묻자, 할머니는 “무슨 말? 나보고 묻지 말고 네 방 경대 위에 있는 공책한테 물어보면 잘 알거다.” 그러면서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판사 아들은 집에 돌아와 가계부를 펼쳐 보고서 어머니가 왜 그렇게 역정을 내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내와 싸우자니 판사 집에서 큰 소리 난다고 소문이 날 것이고, 아내를 쥐어 패자니 판사가 폭력을 쓰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고, 그렇다고 이혼할 수도 없고... 며칠을 그렇게 고민하던 중에 아내에게 ‘처갓집에 다녀오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아내는 무슨 연고인줄도 모르고 친정에 간다니 좋아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처갓집에 도착한 후 아내와 아들 그리고 준비한 선물 보따리를 모두 집 안으로 들여보낸 후 사위는 마당에 그냥 서 있었습니다. 장모님이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아니, 우리 판사 사위 왜 안 들어오는가?”하고 묻습니다. 사위가 대답합니다. “촌년 아들이 감히 이런 부잣집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차를 타고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 시골 할머니 집에는 사돈 내외와 며느리가 찾아와 납작 엎드려 ‘죽을 죄를 지었으니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다음 달부터는 ‘촌년 10만원’이란 항목은 없어지고, ‘시어머니 용돈 50만원’이란 항목이 며느리의 가계부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님은 내 존재의 뿌리입니다.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까? 부모님이 자녀를 잉태하면 어떻습니까? 10개월 동안 오직 뱃속에 있는 생명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몸이 아파도 약을 먹지 않습니다. 행동거지 하나라도 태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봐 노심초사합니다. 그리고 뼈가 녹아내리고, 살이 찢어지는 아픔을 감내합니다. 어머니의 생명을 건 사랑의 결과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키우시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전쟁을 겪으시고, 보릿고개의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오직 자식 하나 잘되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키우셨습니다. 당신들은 제대로 잡수시지도 못하셨지만 자식들은 배고프지 않게 살도록 허리끈을 졸라매고 온 정성을 다 쏟으셨습니다. 평생 동안 다 주시고도 더 주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것이 부모님의 심정입니다. 그 은혜를 안다면 우리는 당연히 부모님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부모님이 나이가 드시면 세 가지가 없어진다고 합니다. 힘이 없어집니다. 돈이 없어집니다. 형편이 없어집니다. 그러기에 자녀가 부모의 힘이 되고 돈이 되어야 합니다. 형편을 잘 보살펴 드려야 합니다. 아버지~어머니~ 그 이름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이름입니다. 언제나 우리들의 마음속에 별처럼 살아있는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부모님의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인생의 자선전입니다. 흰 머리카락은 나를 위한 고생의 여정입니다. 갈라진 손과 발은 나를 위한 영광의 흔적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멀리 가는 향기는 바로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의 향기입니다. 그 사랑의 향기를 맡고 우리가 살았다면 이제는 그 향기를 되돌려 드려야 할 때입니다. 진정한 효도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게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주셨던 부모님에 대한 긍지를 찾으십시오. 우리의 부모님이 아무리 늙고 병들고 볼품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치밀하신 섭리에 의해 우리 부모님이 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긍지가 될 충분한 자격을 이미 갖추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모님에 대해 이 긍지를 갖고 있는 한, 설령 남에게 불효처럼 보이는 행동도 그 본질은 실은 효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긍지를 갖지 못한 자식이라면, 그가 부모에게 행하는 것들이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또다른 불효의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 살아온 나이만큼이나 깊게 패인 주름살하며 다시는 펴지지 않는 허리, 그리고 이젠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걸음걸이마져 버거워하시는 우리의 부모님들을 잘 섬겨야하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오늘 성경은 모든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부모를 순종하라고 그리고 공경하라’고 말입니다. 순종이 부모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라면 공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모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입니다. 박은수라는 분이 쓴 어머니라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반주)//어머니//어머니는 좋은 옷이 필요치 않으신줄 알았습니다. /예쁜 그릇도 갖고싶지 않으시고/맛있는 음식에도 마음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빛깔 고운 립스틱이나/꽃무늬 화려한 양산품/눈 여겨 보시지도 않는 줄 알았습니다./그런데 시집와서 마흔 고개에 다다르며/이제사 깨달아 집니다./어머니도 여자이셨음을/어머니의 가슴에도 무지개가 있고 파랑새가 있고/사파이어 같은 꿈이 있음을/이제사 알아 봅니다./어머니/언제나 귀한 이름입니다./언제나 우리맘속에 별처럼 살아있는/아름다운 이름입니다./이날에 어머니를 그리워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가정에 계시는 주님/ 잠22:6, 엡6:4-/ 2001-05-23
가정에 계시는 주님 잠22:6, 엡6:4- 작년 2월에 프랑스에서 유학중인 학생들을 위한 KOSTA(Korean Student Abroad) 집회에 참석했다가 영국에 잠시 들러 볼 기회를 가졌었습니다. 금요일 오전까지 프랑스 집회를 마치고, 금요일 오후 비행기로 런던에 도착해서 영국에서 유학중인 학생들에게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저녁에 설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일날 파리에 있는 친구 목사님 교회에서 설교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일날 새벽 비행기로 다시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결국 영국에는, 2박 3일이라고는 하지만 약 40여 시간 정도 밖에는 머물지 못했었고, 그나마 학생들의 집회 때문에 영국을 관광한 것은 겨우 토요일 낮시간 정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저에게 참으로 좋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제가 참으로 훌륭하게 본 것은 저들의 질서의식이었습니다. 오래된 도시였기 때문에 대로(大路)도 많이 있었지만, 작은 소로(小路)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차들이 좁은 소로를 다니는데도 교통이 물 흐르듯이 소통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갈래길에서 차가 서로 만나게 될 경우, 오른쪽에서 오는 차가 먼저 간다는 원칙이 있는데, 그 작은 원칙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차들이 사고 없이, 그리고 머뭇거림 없이 잘 소통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작은 일이었지만 그것이 곧 영국의 문화수준을 나타내 보여 주었고, 그것은 경제수준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서 우리가 반드시 극복해야만 할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 곳에서 목회하시는 목회자들을 통하여 영국은 아직도 신사도가 살아 있는 훌륭한 나라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 영국은 그러한 나라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영국에서 앞날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느끼기가 어려웠습니다. 훌륭한 문화수준과 교육제도에도 불구하고 저들에게서 희망을 느낄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저들의 가정 때문이었습니다. 영국도 다른 유럽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성적인 개방으로 인하여 가정들이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만 해도 양쪽 부모가 다 자기 친 부모인 경우가 오히려 많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혼과 재혼을 자주 하게 되기 때문에 아빠가 바뀌던지 엄마가 바뀌는 경우가 많고,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까지 바뀐 아이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부모 자신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보다 심각하고 중요한 상처는 어린아이들이 더 많이 받지 않겠습니까? 나라의 희망과 미래는 그 나라의 청소년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와 미래의 희망인 청소년들이 어려서부터 깊은 상처를 받고 마음에 병이 들었으니, 그 나라가 앞으로 어떻게 희망이 있는 나라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문제는 비단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프랑스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나라가 대부분 성적으로 타락하여 가정이 파괴되고 있었으며, 그 결과 많은 청소년들이 올바르게 교육받지 못하고 타락하고 방탕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점을 생각해 볼 때 저들이 지금은 세계를 움직이는 강국이요, 또는 부국일런지 모르나 장차는 그렇게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면에서 세계를 보이지 않게 움직이고 있는 강력한 나라입니다. 인구 수를 감안해 볼 때 가장 많은 비율의 노벨상을 탄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저들이 그렇게 세계를 움직이는 강력한 민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가정을 잘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가정교육은 가히 세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화를 추구하려고 하면, 먼저 가정을 잘 다스려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할 수 있고, 훌륭한 인물과 인재들이 배출될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운명을 생각할 때, 자녀교육처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자녀교육을 생각할 때 반드시 생각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교육을 위하여 가장 좋은 학교는 가정이며, 자녀교육을 위하여 가장 좋은 교사는 부모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세계의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자녀교육에 열심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가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뛰어난 교육열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하고 있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녀를 교육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학교는 가정이며, 가장 좋은 교사는 부모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어린이주일에 하나님의 전에 나아와 예배하는 사랑하는 여러 교우님들 모두가 이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 여러분의 가정이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학교가 되며, 여러분이 가장 훌륭한 교사가 되시어 여러분의 가정학교에서 이 나라와 민족,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훌륭한 인물과 인재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와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아이들을 위한 가장 좋은 교사와 학교라고 할 때, 우리는 또한 자녀들을 위한 가장 좋은 교과서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양성한다고 할 때 가장 좋은 교과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중히 여기는 말씀 중의 하나인 신명기 6:4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에 기록할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바로 가장 중요한 교육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귀담아 들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세상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며 물질과 시간을 아끼지 않습니다. 영어와 수학을 더 잘하게 하기 위하여 학원을 보내며, 많은 비용을 감당하면서 과외를 시키기도 합니다. 또 악기나 미술과 같은 재능교육을 위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투자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에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더 잘 배우게 하기 위하여 학원을 보내고, 과외를 시켜 보신 분이 계십니까? 저희 교회의 집사님 중에는 전도사님을 가정교사로 모시고 아이들에게 성경을 공부시키는 분이 계십니다. 만일 우리 모두가 그러한 정신을 가지고 자녀들을 교육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자녀들을 훌륭한 인물과 인재로 양육하게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가정이 가장 중요한 학교요,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부모가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스승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한 교과서라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교회에서만 만나려고 하였고, 아이들의 교육도 학교와 교회의 선생님들을 통해서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가정은 학교와 교회가 되지 못하였고, 부모는 아이들의 진정한 스승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가장 좋은 교회는 가정 같은 교회이고, 가장 좋은 가정은 교회 같은 가정입니다. 가정에 주님을 모시고 교회 같은 가정을 꾸미실 수 있기를 바라며, 여러분들이 자녀의 스승이 되셔서 좋은 학교 같은 가정을 꾸미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에 계시는 주님/잠22:6,엡6:4- 2001-11-21 14:07:26 read : 3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작년 2월에 프랑스에서 유학중인 학생들을 위한 KOSTA(Korean Student Abroad) 집회에 참석했다가 영국에 잠시 들러 볼 기회를 가졌었습니다. 금요일 오전까지 프랑스 집회를 마치고, 금요일 오후 비행기로 런던에 도착해서 영국에서 유학중인 학생들에게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저녁에 설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저
가정에 계시는 주님/잠22:6,엡6:4- 2001-11-21 14:07:26 read : 3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작년 2월에 프랑스에서 유학중인 학생들을 위한 KOSTA(Korean Student Abroad) 집회에 참석했다가 영국에 잠시 들러 볼 기회를 가졌었습니다. 금요일 오전까지 프랑스 집회를 마치고, 금요일 오후 비행기로 런던에 도착해서 영국에서 유학중인 학생들에게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저녁에 설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일날 파리에 있는 친구 목사님 교회에서 설교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일날 새벽 비행기로 다시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결국 영국에는, 2박 3일이라고는 하지만 약 40여 시간 정도 밖에는 머물지 못했었고, 그나마 학생들의 집회 때문에 영국을 관광한 것은 겨우 토요일 낮시간 정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저에게 참으로 좋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제가 참으로 훌륭하게 본 것은 저들의 질서의식이었습니다. 오래된 도시였기 때문에 대로(大路)도 많이 있었지만, 작은 소로(小路)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차들이 좁은 소로를 다니는데도 교통이 물 흐르듯이 소통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갈래길에서 차가 서로 만나게 될 경우, 오른쪽에서 오는 차가 먼저 간다는 원칙이 있는데, 그 작은 원칙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차들이 사고 없이, 그리고 머뭇거림 없이 잘 소통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작은 일이었지만 그것이 곧 영국의 문화수준을 나타내 보여 주었고, 그것은 경제수준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서 우리가 반드시 극복해야만 할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 곳에서 목회하시는 목회자들을 통하여 영국은 아직도 신사도가 살아 있는 훌륭한 나라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 영국은 그러한 나라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영국에서 앞날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느끼기가 어려웠습니다. 훌륭한 문화수준과 교육제도에도 불구하고 저들에게서 희망을 느낄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저들의 가정 때문이었습니다. 영국도 다른 유럽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성적인 개방으로 인하여 가정들이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만 해도 양쪽 부모가 다 자기 친 부모인 경우가 오히려 많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혼과 재혼을 자주 하게 되기 때문에 아빠가 바뀌던지 엄마가 바뀌는 경우가 많고,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까지 바뀐 아이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부모 자신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보다 심각하고 중요한 상처는 어린아이들이 더 많이 받지 않겠습니까? 나라의 희망과 미래는 그 나라의 청소년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와 미래의 희망인 청소년들이 어려서부터 깊은 상처를 받고 마음에 병이 들었으니, 그 나라가 앞으로 어떻게 희망이 있는 나라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문제는 비단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프랑스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나라가 대부분 성적으로 타락하여 가정이 파괴되고 있었으며, 그 결과 많은 청소년들이 올바르게 교육받지 못하고 타락하고 방탕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점을 생각해 볼 때 저들이 지금은 세계를 움직이는 강국이요, 또는 부국일런지 모르나 장차는 그렇게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면에서 세계를 보이지 않게 움직이고 있는 강력한 나라입니다. 인구 수를 감안해 볼 때 가장 많은 비율의 노벨상을 탄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저들이 그렇게 세계를 움직이는 강력한 민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가정을 잘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가정교육은 가히 세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화를 추구하려고 하면, 먼저 가정을 잘 다스려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할 수 있고, 훌륭한 인물과 인재들이 배출될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운명을 생각할 때, 자녀교육처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자녀교육을 생각할 때 반드시 생각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교육을 위하여 가장 좋은 학교는 가정이며, 자녀교육을 위하여 가장 좋은 교사는 부모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세계의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자녀교육에 열심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가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뛰어난 교육열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하고 있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녀를 교육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학교는 가정이며, 가장 좋은 교사는 부모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어린이주일에 하나님의 전에 나아와 예배하는 사랑하는 여러 교우님들 모두가 이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 여러분의 가정이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학교가 되며, 여러분이 가장 훌륭한 교사가 되시어 여러분의 가정학교에서 이 나라와 민족,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훌륭한 인물과 인재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와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아이들을 위한 가장 좋은 교사와 학교라고 할 때, 우리는 또한 자녀들을 위한 가장 좋은 교과서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양성한다고 할 때 가장 좋은 교과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중히 여기는 말씀 중의 하나인 신명기 6:4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에 기록할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바로 가장 중요한 교육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귀담아 들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세상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며 물질과 시간을 아끼지 않습니다. 영어와 수학을 더 잘하게 하기 위하여 학원을 보내며, 많은 비용을 감당하면서 과외를 시키기도 합니다. 또 악기나 미술과 같은 재능교육을 위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투자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에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더 잘 배우게 하기 위하여 학원을 보내고, 과외를 시켜 보신 분이 계십니까? 저희 교회의 집사님 중에는 전도사님을 가정교사로 모시고 아이들에게 성경을 공부시키는 분이 계십니다. 만일 우리 모두가 그러한 정신을 가지고 자녀들을 교육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자녀들을 훌륭한 인물과 인재로 양육하게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가정이 가장 중요한 학교요,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부모가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스승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한 교과서라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교회에서만 만나려고 하였고, 아이들의 교육도 학교와 교회의 선생님들을 통해서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가정은 학교와 교회가 되지 못하였고, 부모는 아이들의 진정한 스승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가장 좋은 교회는 가정 같은 교회이고, 가장 좋은 가정은 교회 같은 가정입니다. 가정에 주님을 모시고 교회 같은 가정을 꾸미실 수 있기를 바라며, 여러분들이 자녀의 스승이 되셔서 좋은 학교 같은 가정을 꾸미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