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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복 받을 짓(2)/ 엡6:1-3/ 어버이주일설교/ 2015-05-10
100% 복 받을 짓(2) 엡6:1-3 하나님의 말씀 에베소서 6장입니다 신약 성경으로 316면이 되겠습니다. 우리 1절부터 3절 그냥 읽지 마시고, 마음에 새기시고 이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이 저와 여러분들 우리 사회에 가득 차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 다 같이 읽습니다. 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아멘 성경의 부모님: 경외라는 단어는 하나님에게만 쓰는 단어인데 부모에게도 동일하게 씁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반열에 둔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기독교를 근본도 없는 불효자식이라고 말을 하지만은, 그건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레위기 19장 3절에 보면 부모님을 경외하라 이렇게 말합니다. 경외라는 단어는 하나님에게만 쓰는 단어인데 부모에게도 동일하게 씁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모님을 하나님의 반열에 둔다고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십계명 가운데 약속이 있는 두 계명이 있는데요, ‘천대까지 잘 된다.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한다.’라고 하는 주석이 붙어 있는 여러분 계명은 2계명하고 5계명입니다. 2계명은 ‘하나님만 섬기고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땅에서 잘 될 거다. 천 대까지 복을 누린다.’ 그러고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생명이 길리라.’ 이렇게 말한다고요. 1. 성경은 노부모도 공경을 중요시 여긴다.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백성은 아멘 하라. 하나님은 연세 들고 힘없고 병든 부모님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만큼 성경은 부모 공경을 중요시 여기고, 또 우리 하나님은 살아 있는 부모님에게 잘 하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 또 한 가지 우리가 아셔야 되는 것이 부모님은 돈이 많고 힘 있고 건강한 부모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연세가 드시고 돈이 없고 건강이 여의치 못한 부모를 공경하라, 주안에서 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그저 우리가 예수 믿는 것만 부모에게만 공경을 하라는데 주안에서 in Christ 라는 말은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져 있어요. 부모님이 연세가 들고, 돈이 없고 나에게 짐이 될 때에도 그 부모님을 공경하라. 그러면서도 모세오경에 보면 출애굽기 21장 15절에 보면 자기 어머니나 아버지를 치는 자는 반듯이 죽일지니라. 그리고 17절에 보면 ‘ 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듯이 죽일지니라.’ 그래요. 신명기에는 자식이 술을 먹고 방탕하고, 부모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그 부모는 자식을 그 성읍의 장로들에게 데리고 와서 타이르고 그 말을 듣지 아니하면 성읍 사람들이 전부 돌로 쳐 죽여라. 옛날 우리나라도 그랬지요, 마을에서 말 안 듣는 자식은 멍석에 말아서 멍석말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하면 모든 백성이 아멘으로 화답을 하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루트도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부모를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이야기 했다고요. 오늘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 어버이날인데 그저 하루 엄마 아버지 잠깐 생각하고, 눈물 흘리고 돌아가는 시간이 아니고, 우리나라가 지금 굉장히 어렵고 힘들고 여러분들의 삶이 팍팍한데 나라 경제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여러분들의 가정의 삶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지난주 이번 주 이야기 했지요. 어린아이를 귀하게 여길 때 하나님이 복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섬기는 것이 아이를 영접하는 거다 이랬다고요. 오늘 성경 말씀도 우리 하나님은 연세 들고 힘없고, 병든 부모님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믿어서 여러분들이 그 하나님을 잘 섬김으로 우리 대한민국을 다시 경제적으로 일으키는 귀한 교회가 되고, 여러분들 자신이 복 받는 삶의 출발점이 되시는 귀한 주일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 쉬워요. 여러분 정말 좀 그러세요. 무역 잘하고 제도 잘하고 이런다고 해서 나라 사는 것 아닙니다. 2.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되요. 어린이와 어른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복 받는 비결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복을 하나님에게 비는 것이 대제사장이 중요한 직임.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는 것은 구약의 모든 의식이 예수님에서 완성된 것.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되요. 어떻게 복을 주는가? 두 가지입니다. 어린아이 무시하지 않고, 연세 드신 어른과 부모님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복 받는 비결입니다. 이것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오늘 이 말씀은 여러분 설교 했지만 여러분들이 한 번 더 가슴에 좀 담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민수기 6장을 한번 펴 보세요. 204면입니다. 22절부터 204면 다 펴세요, 오늘 설교 핵심만 간단하게 할 텐데 22절에 보세요.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그러면서 27절에 보세요, 그들은 여기에 그들은 누구지요? 그 앞에 보면, 아론과 그의 아들들, 아론은 대제사장이고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입니다. 그러니까 이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은 이같이 23절에서부터 26절의 내용과 같이 “내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을 빌어 줘라.” 곧, 대제사장이 하는 일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복을 하나님에게 비는 것이 대제사장의 중요한 직임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뭐 여러분들이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하나님이니까 “하나님 축복하소서.” 이러는데, 그 말은 참 잘못된 거지요. 하나님보다 더 높은 분에게 “복을 빌어 주소서.” 이런 말로 하는데,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보다 “예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라는 이 말이 가장 정확한 말입니다. 그럼 왜 그런가 하면, 제 이야기가 아니고, 구약신학의 가장 권위자라 하면 칼델리치 주석을 말합니다. 그분이 하는 이야기가 우리 신약에서도 그러거든요. “예수님은 영원한 대제사장이다.” 그래요. 그래서 앞에서 죽인다 이런 말은 이야기했던 대로 시민법이고,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는 것은 구약의 모든 의식이 예수님에서 완성된 것을 말하거든요. 그러면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의미는 무슨 말이냐 하면은 주문이 아니에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의 보좌 앞에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는데, 그 은혜의 보좌 우편에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계신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께 축복을 해 주시는 거예요. 요즘 좀 쉬운 말로 하면, 여러분들이 “우리 아들 서울 대학 가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를 하면, 무엇이든지 기도 되요. 성경에 그래 놨어요. 무엇이든지 기도해도 되는데, 그 기도를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이 받아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방향으로 하나님에게 빌어서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이 빈 대로 우리에게 응답하신다고요. 3. 칼델리치가 말하기를 “예수님이 이 땅의 대제사장의 직임의 축복권을 삼직에게 위임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로, 부모가 자녀를 향하여 축복을 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 두 번째 로 교사, 세 번째 담임 목사님에게 축복권을 위임하셨다.”라고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흔히들 말할 때, 기도 응답은 4가지라 하지요. 하나는 yes라는 응답, no라는 응답, wait라는 응답, 그 다음에 change라는 응답이 있지요. “하나님, 우리 아들 서울대학 가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를 하는데, 예수님이 가만히 보니까 “부모님, 죄송합니다. 얘는 보니까 서울대학보다 백석대학 가는 게 훨씬 낫겠습니다.” 싶을 때, 예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저 사람이 서울대학 보내기를 원하는데, 하나님 쟤는 백석대학 가는 것이 자기에게나 모든 사람에게 좋겠습니다.”라고 간구해 주기 때문에 기도가 뭐로 들어와요? 체인지, 바꾸어서 돌어온다고요. 그것도 응답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성경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은 기도할 때마다 No로 응답 받는 것이 좋습니까, Wait로 응답 받는 것이 좋습니까, Change로 응답 받는 것이 좋습니까? 예스로 응답 받는 것이 좋아요? 물론 예스로 받아야지요. 그러려면 예수님이 우리의 기도를 바꾸지 아니하도록 우리가 제대로 사는 것이 중요한 거거든요.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의 동기까지 아신다고요. 자 그런데 칼델리치가 이야기하기를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대제사장의 직임 축복권을 삼직에게 위임해 놨다는 거예요.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 삼직의 첫 번째가 누구냐 하면 부모라는 거예요. 그래서 부모님이 여러분들 자녀를 향하여 축복을 할 때에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부모님을 거역하거나 무시하면 안 돼요. 아무리 연세가 많아도. 그런데 우리 부모들끼리 비밀 하나 이야기 합시다. 입으로는 자식에게 복을 빌지만 어떤 자식에게는 내가 부모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빕니다. 하나님 이 마음 알아요. ㅎ ㅎ 우리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 성도 여러분, 또 이 땅에 모든 사람들이 부모님이 진심으로 복을 빌 수 있는 그런 자녀로 변화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이잖아요, 부모도.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잖아요. 왜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해야 되는가? 진심으로 부모가 하나님께 복을 빌 수 있도록 그래야 돼요. 또 두 번째로 교사에게 있다는 겁니다. 다음 주에 우리 스승의 주일이지만, 우리나라가 지금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엄마들 회개해야 돼요. 아이들이 선생님을 존경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것 같아요. 정말 여러분 선생님이 자기의 제자들을 향하여 진심으로 복을 빌어 줄 때, 예수님에게서 위임 받은 권세로 복을 빌어 줄 때, 그 자녀가 복 받는 줄 아셔야 됩니다. 선생님이 못난 선생님일수록 잘 해 줘 보세요. 아무리 악하고 못난 선생님이라도, 한 아이 정도는 좋아하고 복 빌어 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요. 선생님 비판하지 마세요. 여러분. 우리 흔히 뭐 그런 것 있잖아요. 연예인들이 대부분 보니까 학교 다닐 때에 좀 문제 아이였더라고요. 그 애들이 제대로 그 길 들어간 것이 뭡니까? “그 사람이 보고 싶다” 이런 데 보면 그 말썽쟁이, 정말 우리 반에 이 아이만 없으면 하는 그 아이를 어떤 선생님이 축복해 주고 쓰다듬어 준 그 아이는 잘 된다고요. 우리가 지금 이것 회복해 내야 됩니다. 세 번째로 담임 목사님에게 했다는 겁니다. 저도 여러분 참 교수 생활도 10년 하고, 목회도 하고 아버지도 되고 했는데 정말 목사는 여러분들이 선생님도 마찬가지라 생각해요. 여러분들의 시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부모의 마음을 주세요.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복을 빌기를 원하지만 그래도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목사님도 인간이기 때문에 진심으로 복 빌어 주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요. 4. 공경은 카베드라는 말인데 무겁게 여긴다는 말, 부모님의 말씀을 경홀히 가볍게 듣지 말고 무겁게 들으세요. 선생님의 말씀을 무겁게 듣도록 하세요. 담임 목사님의 설교를 사회의 통념으로 판단하지 말고 무겁게 들을 때, 하나님께서 네 생명이 길리라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 복 빌어 주고 싶은가? 오늘 보면 공경하는 사람입니다. 공경은 뭐냐 하면은요 공경은 카베드라는 말인데 무겁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부모님의 말씀을 경홀히 가볍게 듣지 마세요. 무겁게 들으세요. 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 돌아가셨습니까, 교회에 어른들의 말을 무겁게 들으세요.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은 선생님의 말을 흩은 말씀도 무겁게 듣도록 하세요. 교회에 와서 여러분들이 설교를 여러분들의 가치관이나 사회의 통념으로 판단하지 말고, 무겁게 들으세요. 그런 사람을 복 주지만, 여러분 우리 부모들 솔직히 이야기 해 봅시다, 어떤 자녀에게 진정으로 마음이 갑니까? 내가 흘려 가는 이야기도 마음에 새기고 무겁게 듣는 사람 아닙니까? 오늘 이 마음 회복해 내야 되요. 선생님도 마음 마찬가지 입니다. 아무리 성질이 더럽고 나쁜 선생님도 자기의 말을 흘려듣지 않는 학생이 아주 귀하게 여겨지거든요. 목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들이 목사님에게 뭐 잘 하는 것, 설교 말씀을 무겁게 듣고, 교회의 광고를 무겁게 들을 때, 하나님께서 네 생명이 길리라 그런 겁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마는 제가 한달 전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우리 이태경 집사님이 오산에 병원을 하는데 이층이 늘 비어 있었는데 건강검진센터를 만들었잖아요. 내가 물어 보니까 거기엔 아직 적자가 많이 납니다. 이래서 제가 아 우리 교인들 가운데 국가에서 주는 건강 검진 받으러 가라고 교회에서 차까지 대절하고, 또 다 가면은 디시도 해 준다고 했는데, 그 말을 무겁게 들은 사람 한 사람 있습니다. 딱 한 명 갔어요, 누가 간줄 아세요? 우재만 장로님이 갔어요. 그런데 장로님이 가서 건강 검진 받았는데 대장에 용정이 여러 개 있는데 하나는 너무나 커서 여기서 안 된다고, 강동경희대 가라고, 갔는데 암이었어요. 그래서 조직 검사 결과 암으로 나왔는데 이틀 전에 저에게 와서 목사님 내일 결과 나오는데 하고, 자신이 무릎을 꿇고 안수 해 달라 하더라고, 그래서 나도 연세도 저보다 많잖아요. 내일 모래 70이잖아요. 기도했는데 그 다음날 참 할렐루야 목사님 전이도 안 되고 깨끗하고 수술 잘 되었답니다. 여러분 저를 주목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여러분들이 부모의 말을 중하게 듣고, 아이들에게 선생님 말을 중하게 듣고, 교회의 설교나 광고를 중하게 들으세요. 그것 어렵지 않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요 쉬운 것은 잘 안 들으려 하고 어려운 것만 주면은 그것 뭐 권위 있는 줄 안다고요, 예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일 맡기는 거예요. 오늘도 여러분 보시면서 제가 참 우리 유치부 얘들이 복 받을게 제가 그랬잖아요. 아이들에게 명찰 달으라고, 왜 저도 이름 다 못 외우겠거든요. 그래서 제가 지난 주일도 그런 이야기 했지 않습니까? 아이들 명찰 달면 뭐 해주라고요? 또 다 잊어버렸나? 한 번 따라 합시다. “와 네가 박지훈 집사 아들이냐?” 왜 안 따라하나?ㅎ ㅎ 여러분 복도에서 그래 보세요. 우리 교회 정말 좋아집니다. 교회 뭐 여러분들이 전 재산 팔아 가지고 이러는 것은 이단이고요. 이것 작은 것 하나 못합니까? 그러면 정말 우리 교회 차고 넘쳐요. 오늘 그래서 제가 엘리베이터 내리는 데 박은세 해 놨더라고. 그 동안에 이름은 알았지만 얼굴은 몰랐거든요. 박지훈 해 놔서 내가 “아, 네가 박지훈 집사 딸이구나.” 하고 내가 손 여기로 줬잖아. 스마일. 5.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면 자기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며 돈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깁니다. 고려장 하려고 어머니 지고 갈 때 나뭇잎 따서 버리는 어머니 마음(아들이 돌아갈 길 잃어버릴까 봐). 고려장 시대 원나라 사신의 숙제, 통나무 밑동과 새끼 말? 어머니의 지식으로 나라의 큰일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이 작은 것 한번 해 보자고요. 그리고 제가 한 대로 그대로 했어요? 내가, “야, 박지훈 집사님, 우리 교회 최고다. 얼마나 좋은데. 너 아빠 좋은 분 두어서 좋겠다.”고. 여러분, 이것이 우리나라 살리는 길이고, 자신이 사는 길임을 아셔야 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해 보세요. 여러분 우리 교회에 다른 것은 몰라도 제가 우리 아이들과 어른들이 참 편하게 하잖아요. 우리 김종대 목사님도 뭐 축도하겠지만, 이성근 장로님, 다른 교회에 일생 동안 해 왔지만 우리 믿음 안에서 한 가족이잖아요. 이성근 장로님 여기에서 다른 데 가보세요. 은퇴하고 가보면 출석할 교인이 없어 눈물 흘린다고. 사람은 돈으로 경제적인 가치로 보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 부모들에게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은, 부모들은 자식에게요 신앙의 유산 물려주려고 해야 돼요. 그 신앙의 유산이라는 게 주일날 교회 가고 십일조 하라는 것만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심어 주세요. 왜 경외함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면 자기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해요. 그것 아세요? 또 하나님을 경외하면 돈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겨요. 정말 그렇게 될 때, 우리나라 살아나는 겁니다. 어떠한 경제정책 쓸모없습니다. 이젠 여러분 수출 대한민국 아닙니다. 건설 대한민국 아닙니다. 이제는 사람을 귀하게 여길 때 우리나라 경제 살아나요. 누가 사람을 귀하게 여깁니까? 하나님 무서운 줄 아는 사람이지요. 뭐 타 종교 이야기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이야기 할게요, 여러분 우리 저도 뭐 요즘 등산 자주 가니까 절에 가보면 뭐 위패들 49제 지낸다고 쫙 해 놓은 것들 이래 보는데요, 여러분 우리나라 고려장이 어느 시대에 생긴 겁니까? 고려 시대입니다. 그 고려 시대는 불교의 가장 중흥 기였어요. 아시지요, 그 고려장 시절에 엄마 지게 지고 산에 어머니 버리러 가는데 엄마는 지게에서 나뭇잎 따서 뚝뚝 버립니다. 엄마 왜 그래요 하니까 너 돌아갈 길 잃어버릴까 봐, 그게 부모에요. 그것이 스승이고 목사의 마음이에요. 여러분 또 고려장 이야기 있잖아요, 중국 원나라에서 우리나라 고려장 힘들게 하려고, 사신이 와서 숙제 낸 것, 아시지요? 나무 한 통을 내놔 놓으면서 똑 같은 나무를 어느 것이 밑동이고 어느 것이 위냐? 사법 고시 수석 한 대신들이 모여서 그 문제 못 풀고 끙끙거릴 때, 어머니 고려장 하는 것 하지 못해서 다락방에 숨겨 놓은 대신이 근심 어린 눈빛 있으니까 엄마는 애들 눈빛만 봐도 알잖아요. “무슨 일이 있냐?” “예, 오늘 원나라 사신이 와서 이 숙제 냈는데 이것 풀지 못하면 나라 큰일 납니다.” 하니까 “뭔데?” “어머니, 보세요. 이 통나무가 어디가 밑이고 어디가 위인 것을 어떻게 알겠어요?” “어허, 뭐 그런 것 걱정하냐? 그 통나무 물에 넣어 봐라. 가라앉는 쪽이 밑동이니라.” 이것은 스마트폰의 지식 가지고 되는 게 아니에요. 요즘은 참 세상이 거꾸로 돼 가지고 오래 산 사람이 짧게 산 사람에게 묻고 사니까 권위가 사라지는 것 같은데, 그 지식은 사용법은 없더라도, 삶의 지혜는 어른들에게 있어요. 그러고 나니까 또 원나라 사신이 말 두 마리를 가지고 왔는데 똑 같이 생긴 말보고 어느 것이 어미고 어느 것이 새끼냐? 사법 고시 수석 한 사람도 모른 거예요. 전전긍긍하니까 또 어머니에게 와 가지고 그렇다고 하니까 “뭐 그런 것 가지고 고민하느냐? 두 마리 앞에 말 여물을 갖다 놔 봐라. 먼저 먹는 말이 새끼니라.” 할렐루야. ㅎ ㅎ ㅎ 여러분, 옛날에 누가 그랬어요. “미안합니다, 이런 말해서. 똥은 먼저 누는 게 깔리지만, 사람은 먼저 나는 게 결코 깔리는 법이 없대요. 요즘은 수세식이라 그렇지도 않겠지만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지금 어려운 것은 정말 모든 사람을 경제적인 논리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서, 여러분 참 젊은 사람들 어린 아이들도 존귀히 여김을 받는 교회, 또 이제 정말 내 한 자리 지키는 것도 힘든 연세 드신 분들 존귀히 여김으로 하나님이 약속한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이 여러분들의 가정과 교회와 나라에 넘쳐 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특별히 어머니들에게 부탁합니다. 그러려면 여러분들 아이들에게 귀찮다고 스마트폰 주고, 텔레비 보게 하지 말고요, 성경을 읽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는 젊은 어머니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봉헌 기도◈ 아버지 하나님 이 땅이 언제부터 머리 좋은 사람들만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습니까? 이 예물 속에 있는 헌금의 정신이 잘 실천이 되어져서 머리는 좋지 못해도 몸 좋은 사람, 손재주 있는 사람 아니면 정말 아무런 능력이 없는 장애우들까지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이 땅이 되도록 드리는 헌금의 정신이 모든 사람들 속에 살아나는 복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축도◈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가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내게 비치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주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그들을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하나님의 말씀과 어버이의 말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중하게 여겨서 순종함으로 자자손손 복을 받기를 원하는 믿음의 권속들과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 땅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항상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김종웅 목사(쉼과회복이있는교회)
3가지 효도/ 눅16:19-31/ 2010-05-08
3가지 효도 눅16:19-31 요절 :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 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 서(눅16:27) 한국가정 ‘ 효’ 아카데미(대표 박재천)가 어버이날을 앞두고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효도 방법 13가지“를 발표했습니다. 한국가정 ‘ 효 ’ 아카데미는 ”진정한 효도란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 이라며 ”일상생활에서 작은 실천으로 부모님께 감동을 선물하자“ 고 밝혔습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효도방법 13가지] •문안 인사를 드린다.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고 외출 할 때에는 행선지를 말씀 드려 부모의 걱정을 덜어드리는 것. •대답을 잘하고 말씀을 잘 들어 드린다. 부모님이 부르면 큰 소리로 대답하고 •표정을 밝게 한다. 항상 환한 표정을 보여 드려야한다. 부모 섬기는데 밝은 얼굴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궁금증을 풀어 드린다. 부모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늘 자신의 평안함과 안부를 전하도록 노력 하고 •건강을 유지한다. 평안하고 자신의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아픔을 부모에게 보여서는 안된다, 자녀의 아픔은 곧 부모님께 마음의 고통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벼운 일감을 드린다. 부모님께 가벼운 일감을 드려 그분들의 존재가 꼭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도록 해드려야한다. •부모님이 힘들거나 괴로울 때 힘이 되어 드린다. 부모님이 힘들거나 괴로울 때 힘이 되어드린 다. 비록 부모님의 배움과 능력이 부족해도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 •맛있는 음식을 해드린다. 자주 맛있는 음식을 해 드린다. •용돈을 절약해 사랑의 선물을 사 드린다. 자신의 생일날에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선물을 드린다. •등을 긁어 드린다. 등을 긁어 드린다. •친구들을 만나게 해 드린다. 친구를 만나게 해 드린다. 서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게 한다. •부모님의 실수를 너그럽게 이해한다. 늙으면 일을 하는데, 잘 안된다. •사랑의 표현을 한다. 사랑을 전하는 방법으로는 편지나 휴대전화 문자메세지를 통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식탁 위나 부모 옷 주머니, 지갑 속에 사랑의 쪽지를 넣어 드려야 한다. •교회출석하게 하여 천국을 소망하게 한다. 영원한 내세 축복을 얻게 하는 것이 최고의 효도이다.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 갑니다. 예수 믿고 죽은 자는 천국에 가서 영광중에 살고 있고, 믿지 않고 죽은 자는 지옥에 가서 불꽃 중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러 종교의 효도관을 보면, 유태교나 이스람교는 죽은 부모에 대하여 제사제도가 없습니다. 기독교도 죽은 후에는 제자제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나, 유교는 죽은 후에 제사가 있습니다. 불교의 효도관으로 살아가는 자는, 부모가 불교를(유교) 믿으니, 교회가지 말라 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 입장에서 볼 때에 부모노릇을 잘못했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를 잘못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부모와 자식관, 형제관, 자매관에 대한 진리교훈을 예수님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2:46-50절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부모 형제관을 인정하셨지만, 거기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형제, 자매, 모친이요, 영원한 천국나라에서도 참 형제 부모라고 하신 것입니다. 진리에서 떠난 부모, 자식의 형제, 자매는 세상에서만 형제라도 죽음후에는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므로,, 참 가족 관계가 되려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타락으로 맺은 관계가 많으니, 타락한 부모자식관계, 사망적 부모자식관계, 영원한 지옥, 저주를 받는 부모자식관계, 죽음선에서 사라질 부모자식관계를 정리하고, 진리적 부모자식관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부모자식관계만이, 참 부모자식관계요, 영원한 축복관계가 되며, 거기에서 바른 효도가 이루어집니다. 기독교 효도에 대하여 성경은 종합적으로 세 가지면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세 가지 효도관을 살려보면,,,,,,,. ①살아 있는 부모에 대한 효도 ②천국 간 부모에 대한 효도 ③지옥 간 부모에 대한 효도. 이상 3가지 효도에 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一. 살아 있는 부모에 대한 효도 지금 살아 있는 부모에게 효도 혹 대접을 하는데, ①일반차원에서의 효도 혹 대접이 있습니다. 육적면으로 물질대접을 하고, 평안케 하여 주고, 관광시켜 드리고, 온천을 시켜 드리고, 건강하게 보약을 잡수시게 하고, 편안한 죽음 을 맞이하게 하는 일반적 효도가 있습니다. ②특수적인 효도 혹 대접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천국 가도록 하는 특수 대접이 있습니다. 복음, 구원, 영생에 대한 영적면으로 특별 대접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 실천이 특수 효도입니다. 믿지 않는 부모 대접은, 어떤 대접이나 효도를 한다 해도, 효과가 없고, 참 효도는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육은 죽음선에서 영원히 지옥 저주로 갑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부모 노릇을 해야 하고, 또 자식 노릇을 해야, 기독교의 참된 효도입니다. 유교나 불교나 이종교에서 말하는 효도는 영원한 불행으로 가는 짓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효도로 부모님께서 예수믿어 금생과 내생까지 복을 받게 하여 드리는 것이 참된 효도입니다. 二. 천국 간 부모에 대한 효도 세상에서 예수 믿고 천국간 부모는, 세상에 살아 있는 자식에 대하여 전혀 관계가 없는 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또 관계가 있어서 부모의 소원, 바램, 격려가 있고, 자식은 부모의 소원대로 살아서 참 효도를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12:1-2절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했습니다. 천국 간 부모는 신앙의 증인되어 부탁하며, 격려 합니다. 세상에서 신앙 성공하라 하나님 아버지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 영광을 얻는자가 되라, 요셉같은 위대한자가 되라, 다니엘같은 신앙성공자가 되라. 아브라함같이 175세 노년까지 범사에 복을 받는자가 되라. 바울같은 신앙성공자가 되라고 부탁하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또 천국에서 큰자 되라, 해와 같이 빛나는자, 별과 같은 영광자 되라고(마5:19,고전15:40-,단12:3) 소원하고, 바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바울, 주기철, 한상동, 양경열, 내 부모는, 나의 뺨에 입을 맞추고, 나를 입히고, 먹이고, 자라게 하여 준 가장 가까운 믿음의 증인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서서 신앙성공하라고 증인 일을 합니다. 천국간 주기철 목사님은 자녀들에게, 성도들에게 어떤 부탁을 하고 있겠습니까? 천국에서 영광자 되기를 격려합니다. 큰 상을 받는 자 되기를 천국에서 바라고 계십니다. 증인되는 부모가 신앙 성공 위하도록 어떤 부탁을 하실까요? 얽매이고 무겁게 눌리는 죄를 벗어나라, 인내로 경주에 경주하라, 예수를 바라보라, 즐거움에 참여하라, 천국에서 큰자 되라는, 소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소원에 맞추어서 사는 것이, 자식으로 참 효도입니다. 부모 노릇 하고, 자식 노릇을 바로 하는 것이 기독교의 참 효도입니다. 우리 모두 신앙성공하여 천국에서 큰자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三. 지옥 간 부모에 대한 효도 불신자들이 죽어서 지옥 가서 고통 중에서, 소원하고 바라고 세상사는 자식에 대한 간절함을 죽음 넘어, 지옥 소식을 하나님이 앞 당겨 와서, 부모의 소원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예언하여 주고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뜻을 받아서 사는 것이 효도요, 대접생활입니다. 누가복음 16:27-28절에 “가라사대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보내요 내 아버지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했습니다. 이 죽음 넘어 지옥에서 들러오는, 소식을 듣는 모든 인생들이여! 예수 믿고 고통 받는 곳에 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지옥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입시철에 보면 세상에서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고, 새벽 밤마다 특별 기도를 하고, 목사님께 기도를 부탁하고, 현금을 드리고, 자식이 큰자 되기를, 영화로운 자 되기를 바라는 것같이, 부모의 간절한 소원을 듣는 자식이, 참 효도하는 자식이요, 진리의 자식입니다. 참된 진리의 효도입니다. 누가복음 9:59-62절에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 하옵소서 할 때에 예수님은 너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라” 너는 부친 장사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누가 먼저 죽을지 모르므로 부친 장사 핑계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하나님나라를 전파를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바르게 밭을 갈수가 없으니, 앞만 보고 가야함같이, 믿는 일을 부모나 세상일로, 핑계하여 망가트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고 죽은 부모의 시신을 금관에 넣어 장사하고, 옥관에 넣어서 장사한들 무슨 소용 있는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이 없는데, 장사에 모든 것을 기울여 한다 해도, 소용이 없다 했습니다. 자식 손으로 지옥 불구덩에 넣는 짓이 됩니다. 먼저 네가 복음을 듣고, 부모에게 복음을 전하여, 참 부모, 참 진리자식이 되라 합니다. 기독교의 효도를 세 가지면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살아계신 부모에게는 예수믿게 하여 영생, 구원, 복음, 내세의 천국에 대한 대접을 해야 합니다. 부모 노릇 하고 자식 노릇을 주안에서 할 때에만, 참 효도입니다. 둘째: 천국 간 증인부모님의 소원은 천국에서 큰자, 열고을 권세, 영광자 상급자 되는 것이니. 큰자 되게, 잘 믿는 성도가 됩시다. 셋째: 지옥간 부모의 소원을 듣는 자식이 참 효도하는 자입니다. 고통 받는 곳에 가지 않는 자 식이 됩시다. 기독교의 효도 되로, 진리대로 살아서 우리 모두 금생과 내생에 영광자 존귀자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3대가 함께 사는 가정/ 히11:3-11/ 어버이주일설교/ 2001-05-08
3대가 함께 사는 가정 히11:3-11 지난 월요일 무의탁 노인들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여전도 회원들이 모은 구제비를 가지고 임원들과 함께 담양군 용면 추성리 그러니까 담양댐 상류 골짜기에 사는 장씨 할머니와 김씨 할머니 댁이었습니다. 김씨 할머니는 단간 방 뿐인 좁은 집에서 홀로 사는데 아들 하나 있지만 소식이 끊어진지 오래라고 했습니다. 귀가 어두워져서 말도 알아듣지 못하고 돈을 드려도 어떻게 어디다 써야할 줄도 모르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이장에게 봉투를 건네주고 할머니에게 잡수실 것도 대접하고 유익하게 사용해 주시라고 하였습니다. 할머니들은 마을에 또 한 분 어려운 분이 있다면서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들을 보이셔서 가 보았습니다. 할머니들이 도시 변소 칸 보다 못한 집에 산다고 하더니 그런 헛간 같은 곳에 한쪽은 방이고 한 쪽은 부엌이었습니다. 75세라고 하는데 거동이 불편하지만 교회를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마침 어디 나가고 계시지 않아서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을 전하고 왔습니다. 또 4가정을 더 찾아보았습니다. 만나지 못한 분들은 면사무소를 찾아가서 부면장에게 전하고 왔습니다. 잘 찾아왔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우리 여전도 회원들의 작은 정성을 하나님께서 무척 기뻐하시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시골 교회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에게 송금한 금액도 그렇게 유용하게 쓰일 것입니다. 할머니들 나이가 80이라고 하면, 1910년대에 출생한 분들입니다. 구 한말 어려웠던 시대에나서 일제 시대와 해방, 그리고 6·25동란 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배고팠던 날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광야 인생을 살고 늙고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11:10)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3대가 한 가정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비록 저들은 좋은 집이 아니라 장막에 거하고 있었고 큰 어려움도 많았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유대의 왕들이 출생하였고 나중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셨습니다. 육신적으로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 손자 야곱과 3대가 함께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순종하여 나가는 길에 하란에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약 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렀을 때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가야 했고, 그곳에서는 아내를 잃을 위기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언약의 자손을 얻으려고 아내의 몸종 하갈을 맞아 아이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가정에 불화가 컸습니다. 그의 나이 1백세가 되어서야 언약의 자손 이삭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백75세에 죽기까지 가나안 땅에서 살았습니다. 광야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175세에 일생을 마치니 그의 아내가 먼저 묻혔던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늙어서 175세로 세상을 떠날 때, 아들 이삭은 75세의 노인이 되었고, 손자 야곱은 15세 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3대가 함께 살았습니다. 이삭도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창27:1)라고 하였습니다. 그도 늙고 쇠약해졌습니다.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장사 지낸바 됩니다. 그의 나이 1백 8십세 였습니다(창35:29). 야곱도 아들 요셉이 총리가 된 애굽 땅에 가서 살다가 세상을 떠나 조상들이 묻힌 막벨라 굴에 묻혔습니다. 누구나 세상에 사는 동안 항상 평안(平安)하지만 않습니다. 어느 시대 누구라도 인생 광야 길은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야곱이 노년에 애굽에 내려가서 바로 왕을 만나서 한 말이 있습니다.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하였습니다. 내 인생 길이 험악했다는 고백입니다. 자녀들은 일생을 살아오면서 고생 많이 하신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세상을 살다가 갈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가족간에나 일가 친척 간에 어른을 향하여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는 말씀대로 효도해야 합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인륜 가운데 첫째 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섬겨서 효도하는 후손에게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불효하는 자에게는 화가 미친다고 하셨습니다. 험악한 세상을 살아온 부모를 섬겨 효도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했습니다.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21:15) 했습니다. 이런 계명을 주신 하나님이 불효자를 징벌하실 것이요, 효도하는 자에게는 축복하십니다. 부모님이 살면 얼마나 더 삽니까? 힘들고 어렵더라도 효도하십시오. 큰복을 누릴 것입니다. 자녀를 향하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유업을 이을 자로 믿음 안에서 살게 하여야 합니다. 저들도 자라면 어른들과 같이 험악한 인생 광야를 가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2. 아브라함 일가는 언약을 바라면서 소망 중에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 광야 길이 겹겹의 장애물이요 험난한 길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하신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니라\"(창12:2)는 말씀대로 \"육축과 은금이 풍부\"(창13:1)하였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24:1)주셨습니다. 아내 사라는 나이 늙었으나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잉태하여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11:10) 하였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약속을 다 보지 못하였지만,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면서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했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거친 인생 광야를 가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불평이나 불만보다는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회 있는 대로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성경은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5:17) 했습니다. 믿음 안에서 화목하게 살아야 합니다. 야곱도 청년의 때에 욕심도 많고 경건하지 못하여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내가 넷에 12아들을 두었는데 가정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많았습니다. 나중에는 경건한 믿음의 인물이 되었지만 그도 조상들의 가는 길로 갔습니다. 우리의 인생 길이 거칠고 험하여도 아브라함과 같이 인생 나그네 길에 순례의 길임을 알고 불평하지 맙시다. 포기하지도 맙시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이 땅에 보냈으니 내 인생 순례를 다하는 그 순간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소망의 세계를 바라봅시다. 이 세상 소망은 무너져도 하늘에 예비한 하나님의 축복은 영원합니다. 가족의 믿음 안에서 가정 천국을 이룹시다. 조선시대에 백성들의 신분은 양반과 평민이 있었는데 백정은 평민 보다 더 천대를 받았습니다. 백정은 기와집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비단 옷이나 짚신도 신을 수 없었고 담배도 피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 지나갈 때도 길옆으로 비켜서서 허리를 구부리고 있어야 했으며, 길을 걸을 때도 허리를 구부리고 뛰어 가듯이 껑충거리며 다녀야 했답니다. 상투를 틀 수도 없고 아들을 날 때까지 머리를 묶지도 못했으며 망건도 쓰지 못했습니다. 혼인을 할 때도 말 대신에 소를 타야 하는 철저하게 비천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박씨라는 백정이 장티푸스에 걸렸습니다.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아서 죽을 형편이 되었는데 에비슨 의사(선교사)가 집에 찾아가서 치료를 해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집안 식구가 예수를 믿었고 아들은 교육을 받고 세브란스 의학 1회 졸업을 해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박씨는 예수를 믿고 백정들에게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장로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 믿고 장로가 되었으니 복스럽게 변화 받은 분입니다. 교회에서야 평민 양반 구별이 없었습니다. 백정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천하보다 귀한 생명입니다. 양반이라 하여 백정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자랑할 수 없는 것이 교회입니다. 유덕용 목사님은 우리 총회신학교를 나와서 우리 교단 목사가 되었습니다. 내가 3학년일 때에 학교의 특별 초청을 받아서 설교를 했습니다. 청년 시절에 문둥병에 걸려서 짐승처럼 천대를 받으면서 소록도로 끌려갔었다고 합니다. 차라리 죽고 싶어서 얼마 동안 식음을 중단하였는데, 어느 간호원의 격려와 사랑으로 교회를 나갔답니다. 그리고 예수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고 간증합니다. 손가락이 끊어져 나가 버린 몽당 손을 보이면서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께로 나가는 축복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눈물이 핏방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눈물은 다시 감사의 눈물이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인생 절망의 깊은 늪에서 다시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교인들이 목사님의 손을 맞잡고 반기면서 위로합니다. 예수 안에는 건강한 사람이나 흉악한 병에 걸리고 불구가 된 사람이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놀랍게 변화한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직도 거룩하지 못하고 경건하지 못하는 죄와 허물이 많은데도 하나님 앞에서 여러 가지로 신분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대속하시고 죄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혔던 죄의 담을 헐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에 떨어졌던 우리를 하나님 나라 백성 삼아 주시고 모든 믿는 자들과 믿음의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생각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밖에 있어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1-12)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을 이방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언약 백성의 상징으로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이방인에게는 무할례당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불쌍한 인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조상 적부터 하나님의 여러 가지 언약을 소망 삼고 살았는데 이방인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이방인에게도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어느 민족이라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생각하면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허물과 죄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죄인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목자 없는 양같이 인생 길에서 방황하였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 자랑을 좇아 끝없는 욕망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세상 권세를 잡은 마귀의 올무에 걸려서 운명론(運命論)과 사주팔자(四柱八字)에 인생을 포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4:16) 하였는데, 그 예언의 말씀대로 어두움에 살던 우리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은혜를 깊이 생각하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각양 은혜를 주실 것을 소망 중에 인내해야 합니다. 평탄한 길을 갈 때 감사하고 어려움이 있을 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 은혜로 죄로 막힌 담이 무너졌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2:14)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혔던 담을 헐어 버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죄인들은 자신의 공력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갈 길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씻어 정케 하시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가로막혔던 담도 무너졌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이 없이 십자가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민족이나 신분이나 성별의 차이가 없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곳에 들어가면 사형에 처한다는 경고문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방인들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마27:51). 이것은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은혜를 사모하면서 전능하시고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건물을 이어주는 모퉁이 돌이 되셨습니다. 빌레몬서에 보면 빌레몬이 그의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믿음의 형제로 맞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유인이요, 재산이 많은 빌레몬이나 종 신세가 되었던 오네시모가 예수님 안에서 같은 하늘 나라 시민입니다. 예수를 믿는 저들은 세상 제도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주인이었던 빌레몬은 자기의 노예 오네시모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세상 적으로 보면 종의 신분에서 자유를 얻은 자였지만 자원하여 복음을 위해 바울을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나 빌레몬이나 오네시모나 변해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그 지체가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선교사님과 동역 하면서 외국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을 섬깁니다. 장애자들의 영혼을 귀하게 여겨서 위로하고 돕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남과 북의 성도들이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는 하나가 되기가 어려운 장애물이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부부가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가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교회 성도들이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계속하여 지어쪄 가는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공사 중인 사람들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온전하게 되어야 합니다. 이방인들이 유대인 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져 가고 있음을 알고 이해하고 도와야 했습니다. 우리가 성도들을 볼 때에 완전하기를 기대하면 안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의 형상을 닮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공사가 진행 중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소망 중에 바라보고 기대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담을 헐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예배와 기도와 찬양으로 아버지 앞에 나가야 합니다. 또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을 헐어 주었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지역이나 민족 또는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부족함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같은 교회 성도이던지, 부부간이던지, 부모와 자녀간이든지, 친구간이거나 이웃간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변화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갑시다.
가정 공동체/ 잠4:1-4, 골3:18-21/ 2010-05-12
가정 공동체 잠4:1-4, 골3:18-21 5월은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입니다. 또한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가정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전통적인 유교 규범하의 가정의 개념은 점점 그 힘이 상실돼 가고 있다. 부부 중심의 핵가족 제도로서의 오늘날의 가정 형태는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의 가정이 점차 파괴되어 가고, 남녀평등을 부르짖는 여성들의 목소리 또한 만만치 않으며, 직장여성들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가정의 재정 의존도도 달라져 가고 있어 새로운 가정에 대한 가치관 정립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유교문화권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는 가부장제 문화의 영향을 받아 남성지배적 사고 속에 남녀의 관계가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유지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산업화의 발전으로 인해 여성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게 됨에 따라 여성 또한 노동자로 산업현장에 뛰어들게 되지만 가부장적 문화에서 비롯되는 남녀차별의식을 사회에서 여성을 상품화하며 도구화 하게 됩니다. 이런 면을 직시하면서 건강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남녀간의 동반자 관계를 회복하는 길이 급선무입니다. 부부는 평등해야 하고, 사랑의 관계여야 합니다. 부부관계가 주종의 관계로 전통적인 통념에 젖어 가부장적 사고로 남편이 군림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부모가 원하는 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물건하고는 다릅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양육해야 할 청지기적 사명이 있는 위탁자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따라서 부모는 가정 안에서 인격형성의 스승이기도 하고 모범이 되기도 합니다. 부모의 삶, 언행 그 자체는 자녀들에게 소리 없는 강의로 교육되어지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부모의 삶, 신앙생활, 진실성, 부지런한 삶, 봉사생활은 그대로 자녀들이 삶과 가치관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것,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것,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할 것, 부모가 자녀들에게 자비로울 것 등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 교훈들은 상호화합적인 성격 때문에 가정 공동체를 특징짓고 있습니다. 부부간의 윤리에는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적용되고, 그리고 자녀들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순종하는 가운데 사회의 일원으로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함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부부간에는 복종과 사랑이 필요하고 부모와 자녀 간에는 순종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이들 교훈 속에서 흐르는 주제는 인간은 상호책임적인 존재라는 것이고,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하고 서로 책임을 져야 하는 관계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만 역할과 직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합니다. 가정공동체는 인격적인 평등을 전제로, 부부는 복종하고 사랑하며, 친자 간에는 순종하고 이해함으로 성실을 다해 봉사하고 의와 공평으로 베푸는 가정공동체는 건강한 사회를 불러일으킵니다. 과학과 기술의 문명이 최고도에 도달한 오늘날에 있어서 지난날에 인간들을 단합시키던 여러 가지의 유대들은 하나씩 둘씩 없어져가고 인간들은 피차간에 점점 소외되어 그 고독감은 나날이 더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배워야 할 가장 긴급한 교훈은 인간의 지성을 총동원해서 인간들이 하나의 가족으로서 함께 살기를 배우는 길입니다. 우리 기독교 사상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개인과 교회와 흩어진 인간 가족들이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종전처럼 가족이란 것을 좁은 혈연관계로만 보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이 가족 관념을 확대시켜서 온 인류를 포함하는 보편적인 인간 공동체의 개념으로 바꿔야 할 때가 왔습니다. 원래 기독교 공동체는 역사의 종말을 개대하며 세속적인 질서에 대해서 한 작은 집단으로서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성(性)의 진정한 중요성과 가족 관계와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 창조성의 중요성을 발전시킬 과업이 있습니다. 중세기 종교개혁자 루터의 사상과 초기 청교도 중에서 결혼한 사람의 생활을 하나님께 귀의하는 생활로 보며 그 가정생활의 즐거움을 하나님의 선하심을 축하하는 것으로 보는 인생에 대한 적극적인 견해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그의 사랑을 키울 수 있는 집단생활을 제공하는 두 가지의 주요한 후보지의 하나는 가족이요 다른 하나는 교회입니다. 이처럼 가족과 교회 안에서의 생활의 바탕은 공공한 질서의 기능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공동체의 중요성을 회복하여 이것을 인생의 기본적인 질서로서의 정당한 위치에 다시 올려 놓아야 합니다. 결혼과 가족관계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인 동시에 사회적인 발전입니다. 가족은 결혼해서 성립된 인간 공동체의 확장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정은 결혼해서 성립된 그의 소명을 실천하는 장소이며, 기독교 공동체의 핵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정은 조물주 하나님이 인간의 지상적인 생활을 축복하시며, 인간의 가장 심오한 일상적인 요구에 수응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스스로 설계하신 제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정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태어난 가정으로 부모와 형제 자매들이 속한 가정입니다. 둘째는 결혼으로 이룩한 가정으로 아내와 남편 혹은 아들과 딸들로 구성되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육신에 속한 두 종류의 가정 이외에 영적인 가정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집 즉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새로운 가정을 말합니다(고전3:9). 하나님의 가정이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축복 속에 안겨 있는 가정입니다. 내가 태어난 가정도 그리고 결혼으로 성립된 가정도 혹은 교회를 통하여 영적으로 맺어진 가정도 하나님의 사랑의 후광 속에 안겨 있지 않다고 하면, 위기와 어둠이 그림자처럼 찾아들게 됩니다. 기독교 가정이 행복에 미치는 중요성은 참으로 큽니다. 하나님을 그 가정에 모시고 있는 분위기가 부부 사이나 자녀들과의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가정은 그 집안에 들어서면 얼른 예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축복으로서 머물러 있지 않는 가정은 들어서자마자 그 공기를 알게 됩니다. 신앙이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도 좋은 가구나 다른 재산보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는 행복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은 하나의 인격이 성장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학교이며, 그곳의 위대한 교사요 부모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여러 가정의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정의 형태는 첫째로 아이들을 위주로 사는 가정의 형태입니다. 즉 아이들 중심의 가정입니다. 이런 형태의 아이들은 유아독존적 성격이 되어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운 성격으로 생존경쟁에서 도피자가 됩니다. 둘째는 부모 위주의 가정 형태입니다. 유교 규범하의 가정개념으로 부모의 절대적인 주장에 이런 가정의 아이들은 반항적인 인간성을 가지고 타인을 학대 구박하는 성격이 되어 버립니다. 셋째는 여자 위주의 가정형태입니다. 이런 가정은 편견적인 인간이 되기 쉽습니다. 어머니와 자식이 짝하고 아버지는 소외되어 분열적 성격의 소유인간형이 도비니다. 네째는 개인주의적 가정형태입니다. 한 집에 살기는 살지만, 제각기 살고 있는 형태로 일종의 여관과 같은 상태입니다. House는 있어도 Home이 없기 때문에 가정이 긴요함이나 행복감이나 그리워하는 느낌도 모르고 가출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가정형태로 하나님 중심의 가정공동체는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놓이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대인관계로 부모를 공경하며 자녀를 사랑하는 가정공동체가 바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정의 본형입니다. 유명한 여성가정학자인 “버지니아 사타이어”(Virginia Satir)가 말한 가정공동체의 특징을 말하면서 오늘의 설교를 거두기로 합니다. 첫째는 자기의 가치를 인정하고 자기를 존중히 여기는 가정(Self Worth), 둘째는 서로간의 뜻이 통하는 가정(Communication), 셋째는 규칙이 있고 질서가 있는 가정(Rule), 넷째는 사회와 잘 조화되어 연결된 가정(Link to Society)등 이 4가지 요소가 특징을 이룰 때 그 가 정은 행복한 가정공동체가 됩니다.
가정, 아버지, 그리고 남성(1)/ 창1:26-28/ 2011-05-10
가정, 아버지, 그리고 남성(1) 창1:26-28 가정의 달을 맞아 가정에서의 아버지, 가장(家長), 남성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진단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최초의, 그리고 유일의 사회단위인 가정이 무참히도 파괴되는 현장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과 가장, 즉 남자에 대하여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여기에 대한 성경이 교훈을 듣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제가 아버지학교에 나가 강의하는 내용을 참고로 하여 한 달간 네 시간 동안 이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우리시대의 일그러진 우상인 남성상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아버지가 바로 서면 가정이 바로 섭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남성상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남자는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남성입니다. 가정(家庭)을 벗어난 남성이나 아버지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됩니다. [막10:6-9] “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남자 만드신 목적이 가정을 이루는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남성들이 가정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비뚤어진 남성상은 비뚤어진 환경과 생각들로부터 기인합니다. ‘남성’ 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흔히 성을 떠올립니다. 여름이면 아니 요샌 시도 때도 없이 개고기를 먹기 위해 야단입니다. 정력에 좋다고들 그럽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정력에 좋다면 양잿물도 마실 것입니다. 정력=남성? 정말 남성은 성으로 다 말할 수 있는 동물적 존재일 뿐입니까? 물론 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부부의 선물입니다. 성결을 유지할 때만 그렇습니다. [잠5:15-19]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이 말씀은 성의 아름다움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결을 지킬 때만 하나님의 좋은 선물임을 분명히 합니다. 세실 마이어스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의 아들은 존경할 수 있고, 모방할 만한 남자를 필요로 합니다. 딸들도 역시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딸들에게 있어서 미래의 남성을 판단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준입니다. 딸이 선택한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으로부터 남성의 이상형을 잘못 받아들인 결과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아버지가 훌륭하고, 행복하게 생활하는 남자라면 후에 딸도 그런 남성을 고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버지의 건강한 남성됨이란 그 아들과 딸에게 남성으로서 또는 여성으로서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키워나가며 자신의 性을 현실화시키는데 엄청난 발판이 되어줍니다.” 한국 남자는 어떻게 남성으로 성장합니까? 고등학교나 대학 시절부터 생존경쟁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술과 담배 또는 여자로 풀어가라고 선배와 사회는 가르쳤습니다. 특히 결혼의 첫 순간까지 순결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딱지를 뗀다’는 식으로 동정 해방식을 하는 걸 자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누가 여자를 많이 ‘따먹었느냐’에 따라 자신의 남성됨을 드러내려 하며, 누가 여자들과 “관계를 많이 맺었느냐”에 따라 자신의 남성됨을 과시하는 세상 관습과 풍속에 생각 없이 조각되어지고 다듬어진 우리의 남성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남자는 결혼 전에는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결혼 후에는 여자에게서 벗어나려고 노력합니다. 유교가 가져다 준 비뚤어진 남성상 첫째, 남성이 여성보다 신체적으로 강함을 나타낸 말 남자는 죽어도 전장에 가서 죽어라. 남자는 배짱, 여자는 절개 둘째, 남성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말 장닭이 울어야 날이 샌다. 아내 행실은 다홍치마 때부터 버릇을 가르쳐 휘어잡아야 한다. 남아 일언 중천금 셋째, 남성들의 여성적 외모나 행위를 금하는 내용의 말 남자가 빨래를 널면 재수 없다. 사내가 부뚜막 맛을 알면 계집을 못 거느린다. 남자가 바가지로 물을 떠먹으면 수염이 나지 않는다. 넷째, 여자에게 남자의 존귀함을 알리는 말 남자는 떡의 귀를 먹지 않는다. 남자의 옷으로 걸레를 만들지 않는다. 남자가 길을 떠날 때 여자가 앞을 가로질러 가면 재수가 없다. 남자가 밥상 귀퉁이에 앉아서 밥을 먹으면 출세를 못 한다. 남성됨에 대한 그릇된 인식 1) 남자는 키가 크고 힘이 세야 한다. 우리 사회는 람보 콤플렉스가 있어서 키가 작거나 힘이 약하면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사 신드롬’, ‘슈퍼맨 신드롬’, ‘도깨비 신드롬’으로 돈 버는 기계가 되어 삭막한 세상에 내팽겨진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남성은 람보가 아니라 균형 잡힌 성품과 훌륭한 인격을 갖춘 성숙한 이입니다.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내적 성숙함입니다. 2) 남자는 냉정해야하며 울거나 감정을 쉽게 드러내서는 안 된다. 남자 중에도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쉽게 기뻐하고 눈물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런 사람에게 충고를 한마디 합니다. \"남자답지 못해!\" “남자가 뭐 그런 것 가지고 우니?” “남자가 뭐 그렇게 웃음이 헤프니?!” “남자가 좁쌀스럽게 여자처럼 촐랑거리긴...” “남자가 뭐 그리 입이 싸니?” 남성들이 이제 감정을 빼앗겨버린 인간이요, 신분이 위협당한 인간이요, 자격이 무시된 인간이요 위치를 박탈당한 인간이요, 남자로서의 한 존재의 존귀함을 상실한 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남성으로서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감정이 박제된 인간=남성? EX) 화장실, “남자가 흘려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남자들이여! 눈물을 흘려라! 그럼 감정도 없고 눈물 한 번 안 흘리는 남자가 가장 남자다운 남자입니까? 이는 잘못된 남성상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남성은 자신과 다른 이의 감정에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롬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그렇다고 남성이기를 포기할 수도 없고, 이 사회의 그릇된 남성상으로 옥조여오는 현실 앞에서 차라리 여성으로 살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남성들이 자기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모임이 활발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이 잘못된 남성상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남성이 많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마11:17)에서 묘사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처럼,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않는다’는 무감각한 인간이 되어 무감각한 시대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3) 남자는 강해야 하며 부드럽고 친절하고 다정한 것은 남자다운 것이 아니다. 영화나 TV는 \"터프가이\"다, \"열혈남아\"다 하면서 강하고 거친 남자의 상을 이상적인 남자의 상인 양 보여줍니다. 남성은 강해야 한다면 그것은 힘이나 근육이 아니라 남을 사랑하는데 강해야 합니다. 거칠게 행동하는 것이 남자답다고 잘못 생각하고 참 인간의 부드러운 면을 개발시키지 못하는 남성은 균형 잡히지 않은 미성숙한 상태로 머무르게 됩니다. 4) 남자는 여자보다 능력이 있어야 하며 뭐든지 잘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자는 여자보다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은 돈을 벌어오고 아내는 전업주부로서 집에서 가사를 하는 것이 보편적인 모습이어서 그런지, 남자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여자도 자신보다 남자가 더 능력이 있길 바랍니다. 이런 남성 콤플렉스는 그 대표적인 예가 마초(macho) 이미지와 마치스모(machismo) 현상입니다. 마초란 신체적, 성적, 심리적, 또는 지적으로 남성은 우월하다고 여기며 행동하는 남성으로 권위주의적인 남성 또는 남존여비 신봉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나약한 감정이나 불안정한 성 정체감을 감추기 위해 초남성다움(hyper-masculinity)을 더욱 드러내려 합니다. 마초 이미지가 지배적인 사회일수록 남성에게 이 이미지는 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인간의 덕목으로 추구하는 우월성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편견에 힘입어 남성에게 부과된 억압된 가치입니다. 남성과 여성은 경쟁자도 보호자도 아닌 서로의 도움이 필요한 동반자관계라는 것을 서로 명심해야 합니다. 5) 남자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성공해야하며 직장생활을 가정생활보다 우위에 두어야 한다. 물론 남자는 한명의 직장인으로서 더 나아가 가정의 가장으로서 직장생활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성공과 부에 대한 지나친 과대평가 때문에 정작 가장 중요한 가정에 소홀하기 쉽습니다. 안타깝게도 가정의 기능이 점점 더 약화되어가고 있으며 뉴스를 보면 가정이 파괴되고 가정 안의 신뢰와 사랑을 잃어버리는 어두운 사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돈 때문에 가족을 살인하질 않나, 10대들의 탈선과 돌아오지 않는 가출, 원조교제라 하는 10대 성매매, 남자들의 비상식적인 술 문화, 아내의 불륜, 부모학대 등 참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하는 사건들이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가정 파탄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가정의 가장, 남편, 아버지가 가정의 사랑과 화목을 위하여 시간을 투자하고 진정으로 가족들과의 사랑과 일치를 최우선으로 두며 노력한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남성상은 남성 자신에게는 참된 자유를 빼앗고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큰 고통을 주며 사회 속에서 많은 갈등과 억압을 만듭니다. 1) 서로를 이겨야 하는 경쟁자로 생각하며, 어떤 일이든 완벽하게 이루어야 만족을 할 수 있고 항상 지도자나 우두머리가 되려고 합니다. 진정한 벗이 되려하질 않고 나를 이겨서 앞서려고만 하는 경쟁자 옆에 누가 기쁘게 다가가려하겠습니까? 미성숙한 자아상을 만들 뿐입니다. 2) 다른 사람에게, 특히 이성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3) 성의 차이를 이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으로 사용합니다. 4) 남들과 비교했을 때 무능함과 열등의식을 느낍니다. 5)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힘들며, 다른 이의 잘못도 쉽게 용서하지 못합니다. 6) 실수나 실패가 두려워 어떤 일을 시작하기가 두렵습니다. 7) 이성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동성하고만 어울리려 합니다. 아버지의 남성됨은 가정을 세우기 위한 남성됨이지, 윤리와 도덕을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요, 아버지의 남성됨은 가장의 위치를 감당하기 위한 남성됨이지, 사회 속으로 방황하는 자녀들을 쏟아내 놓기 위함이 아닙니다. 당신의 남성됨의 성적 순결은 가정의 순결이요, 교회의 순결이요, 또한 사회의 순결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남성의 순결은 여성의 순결과 함께 영적 성결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마음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남성됨은 모든 인류의 性의 기초요, 하나님이 계획하신 하나 됨의 시초입니다. 아버지의 남성적 가치관과 존엄성을 깨달으십시오! 남성적 性의 순결을 지키십시오! 하와를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듯 당신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깨끗한 신부로 이끌어 나오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과 감격으로 들뜬 마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최초의 사회 가정 : 번성, 정복, 다스림.
가정과 교회/ 엡5:21-33/ 어버이주일설교/ 2002-05-13
가정과 교회 엡5:21-33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어버이날 저녁에는 많은 가정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외식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밤늦게까지 서울의 교통이 혼잡을 이루었다는 뉴스 보도가 있었습니다. 외형상으로 보면 어버이 주일이 발전하는 것 같고 어버이들이 공경을 받고 있는 것 같은 현상입니다. 그렇지만 현대사회는 가정문제가 점점 더 갈등이 깊어가고 사회문제가 곧 가정문제로 직결되는 현상들을 보게 됩니다. 가정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되지만 귀족이나 재벌, 심지어 대통령 가정에게까지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위에 가장 중요한 두 기관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은 가정과 교회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가지고 설명을 했습니다. 즉 가정을 가지고 교회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머리와 몸의 관계입니다. 지체관계로 교회를 설명했습니다. 이 두 가지 설명이 본문 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 관계를 남편과 아내 관계로, 머리와 몸의 관계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교회와 가정을 묶어서 전하고 있는 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원리는 신앙생활의 원리요 가정건설의 원리요 교회건설의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복종의 복식게임 첫번째 원리는 사랑과 복종의 원리입니다. 본문 22절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5절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 말씀을 한번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듭거듭 반복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고 강조를 합니다. 여러분, 사랑이 어렵습니까? 복종이 어렵습니까? 이 두 가지는 둘 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원리를 알면 이 두 가지는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의 첫번째 원리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과 아내가 남편을 복종하는 것으로 규정을 했습니다. 이 두 가지에 있어서 우선적인 질서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이고 아내는 남편을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서열이 먼저냐 순서가 먼저냐 그것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사랑과 복종의 원리에서 주님은 이렇게 전제를 합니다. 21절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두 가지 조건을 앞세웠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것과 피차 복종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복종의 원리는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피차 사랑하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복식게임이다, 가정생활은 복식게임이다, 교회생활은 복식게임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새겨둘 만합니다. 우리는 복식게임을 하는 가정생활과 교회생활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살이가 행복하고 하나님의 축복 안에 풍성한 삶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단식게임을 하는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홀로 잘난 척 하고 홀로 최고인줄 알고 남을 의식하지도 않고 남을 배려하지도 않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지도 않는 오직 자기만의 인생을 살아가는 단식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과 복종의 복식게임 안에서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생활을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 어느 정신건강 상담가의 사례입니다. 한번은 자기 집 아이가 상담가인 엄마에게 와서 ”어머니, 내 친구가 큰일났어요. 공부도 잘하는 아이인데 요즘 며칠동안 공부도 안하고 울기만 하고 나한테 가출을 하겠다고 해요. 어머니, 좀 도와주세요.” 그래서 그 친구를 데리고 오라고 해서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이 아이는 공부를 잘 하는 학생입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한번도 칭찬을 받아보지 못한 아이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성적표를 가지고 가도 칭찬할 줄 모르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였습니다. 한번은 공휴일이 되어 온 가족이 놀러 가기로 했는데 이 아이는 고3생인데다가 도저히 같이 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한다고 혼자 집에 있겠다고 했습니다. 오랜만에 보고 싶었던 비디오테잎을 빌려다가 비디오를 틀었는데 테잎이 감겨서 작동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 고치려다 텔레비전도 안 나오게 됐습니다. 저녁에 아버지가 돌아와 오늘 뭐했냐고 물으시는데 할 말이 없었습니다. ”비디오를 보다가 고장이 났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 때 그 아버지가 그만 폭군으로 변하여 그 아이 보는 앞에서 비디오와 텔레비전을 다 부숴 버렸습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이는 비디오와 텔레비전이 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망가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나는 이제 이 집에 있을 필요가 없다. 나는 아버지 앞에 아무런 존재도 아니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아이를 보고 이 상담가가 이렇게 상담을 했습니다. ”얘야, 너 가출을 하기로 생각한 것은 정당한 거야. 나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가출을 하겠다. 그런 경우에는 가출을 할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한 거야. 너 같은 환경에서 가출할 생각이 없다면 그 얘가 바보지 네가 정상이야” 하고 이 아이의 말을 그대로 따라 가준 것입니다. 몇 시간 동안 이 아이의 아픈 상처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그 부모에게도 칭찬 한 마디 듣지 못하고 자란 아이이기 때문에 친구 어머니 앞에 완전히 마음이 열린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정신적인 개방이 일어났습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부모님에게 하고 싶었던 그 이야기들이 그날 밤에 전부 다 토해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 가출하는 것 좋아, 그런데 내가 좋은 방법을 하나 알고 있단다. 내 방법대로 가출하면 정말 잘 될 거야. 너 내 말에 순종하겠니?” ”예, 하겠습니다.” ”너 지금 고3이 아니냐? 이제 몇 달 있으면 시험을 쳐야 하는데 지금까지 공부를 잘해 왔던 대로 몇 달 동안 열심히 공부를 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을 해라. 그러면 깨끗하게 가출이 된다. 그렇게 해서 가출을 해 보자. 나도 도와줄게” 아이가 이 어머니의 말을 받아들여서 마음을 잡고 공부를 하여 대학에 입학해서 완전히 회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가정이나 교회생활에서 상대방의 어려움과 고통 혹은 내게 대해서 잘못한 것과 섭섭하게 했던 것에 대해 어떤 반응을 일으킵니까? 혼자 단식게임을 해 버리고 끝내버립니다. 아무리 죽을 짓을 했어도 그 고통은 복식게임을 해 주라는 것입니다. 위로를 해 주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복종은 그런 묘미가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복종은 굴종입니다. 사랑이 있는 복종이라야 보람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또 복종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과 복종은 아름다운 복식의 의미입니다. 이 두 가지는 언제나 함께 해야 됩니다.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기적을 행하는 사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조지 워싱턴의 어머니는 기자들에게 많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머니, 어떻게 아들을 대통령으로 키울 수 있었습니까?” 그때마다 그 어머니의 입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내 아들을 하나님께 복종하는 아들로 키운 것뿐입니다.” 노아는 지금 쓸 배가 아닌 120년 후에 쓸 배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했습니다. 바다도 아니고 산에서 지으라는 말씀을 복종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영적 119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과 복종의 원리로 가정을 세우고 교회를 세워가라고 하십니다. 사랑과 복종은 ’영적 119’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과 복종하는 것은 영적 119라는 것입니다. 119차가 지나가면 다 비켜주어야 됩니다. 사랑하는 것과 복종하는 것은 미룰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산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선 119는 가서 긴급상황을 수습해야 되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따지고 분석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고받는 사람이 ”어쩌다 그런 일이 일어났소?” 라고 묻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따지는 일은 뒤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출동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먼저 계산해보고 하지 마십시오. 무조건 사랑해 봅시다. 계산은 다음에 합시다. 복종도 이해하고 복종하려 하지 말고 복종해 놓고 한번 계산 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들에게 사랑은 너무 조건이 많아지고 복종은 너무 이권적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그대로 고착화되어 버린 것이 하나의 위기입니다. 가정의 부부사랑, 부부관계, 식구들끼리는 사랑과 복종의 원리가 살아나야만 하나님이 의도한 가정이 건설되고 주님이 의도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한 가지 우리가 용어를 조심해야 되겠다는 것을 느낍니다. 흔히 우리가 ’결손가정’이라고 표현합니다. 요즘 보도에도 결손가정의 아이들에게 문제가 많다고 보도를 하는데 그런 보도도 해석이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진정한 결손은 사랑의 결손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부모님이 있으면서도 사랑이 병든 가정이 결손가정입니다. 복종이 결여된 가정이 결손가정입니다. 흔히 결손가정은 문자적으로 부부 중에 한 쪽이 없거나 양쪽이 없으면 결손가정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보면 아버지 혹은 어머니만 있는 가정이라도 건강한 가정이 많습니다. 그런 가정에서 아이들이 바로 자라는 가정들이 다수입니다. 양쪽 부모가 없는 가정이라도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나고 있는 소년소녀 가장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자적으로 결손가정 아이들이 문제가 많다고 매도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입니다. 사실 아버지가 계시면서도 아버지답지 못해서 없는 것만 못한 가정이 있고 어머니답지 못해서 차라리 없는 것만도 못한 가정이 우리 주변에 많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결손가정은 사랑의 결손, 복종의 결손입니다. 문제 있는 가정에는 사랑이 계산되고 복종이 이권다툼이 되는 그 가정이 문제가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가족사랑, 우리들의 교우사랑은 영적 119의 사랑과 복종의 원리로 가정과 교회를 세워가기를 바랍니다. 떠나고 만나는 복식게임 두번째 원리는 떠나고 만나는 원리입니다. 32절에 보면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라고 했습니다. 사람이라는 말은 남자를 말합니다.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육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가정의 원리이며 교회의 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떠나서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메시야로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건설했습니다. 자녀들은 결혼을 하면 부모를 떠나는 관계가 정립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 떠난다는 말은 인격적인 성숙을 말합니다.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독립적인 가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영적인 의미는 새로운 관계로 정립된다는 것입니다. 독신으로 있을 때의 아들이 아니고 가정을 이룬 아들로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관계를 설정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홀로 있을 때에 부모관계가 아니고 이제는 아내와 합한 가정으로서 부모관계를 재정립하라는 것입니다. 떠남과 만남은 매우 소중한 관계가 있습니다. 떠나는 것을 분명하게 해야만 만남도 의미가 있습니다. 떠나는 것이 지저분하면 시작이 지저분합니다. 분명하게 떠나야 출발이 깨끗해집니다. 저도 결혼식에 참석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 많은 결혼식 중에 딱 한번 황당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여자 하나에 남자 둘이 나타난 것입니다. 드라마에서는 가끔 있는 일인데 실재로 보니까 남의 일이지만 정말 황당했습니다. 깨끗하게 떠나고 깨끗하게 만나는 인간관계가 안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떠남과 만남은 가정과 교회 건설에 중요한 원리입니다. 우리들 가정에는 떠나 보내야 될 것들이 자리를 잡으면 안 됩니다. 남편의 마음에 다른 여자가 있고, 아내의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다면 그 가정은 불행한 것입니다. 깨끗이 떠날 것들은 깨끗이 떠나야 됩니다. 그리고 합해져야 됩니다. 우리들의 생활양식 속에도 떠나 보낼 것을 분명하게 떠나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새로운 일과 새로운 축복과의 만남이 이루어질 줄을 믿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술, 담배, 노름, 심지어 사기치는 버릇, 악덕 채무버릇 등 온갖 버릇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 믿으러 옵니다. 예수 믿으러 오는 사람들은 온갖 버릇들이 없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때 내가 예수 믿고 술을 끊겠다, 담배를 끊겠다 자신하고 끊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염려를 다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고 보면 하나씩 서서히 다 떠나 보내게 됩니다. 예수 믿고 은혜를 받고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 앞에 청산해야 될 것들이 하나 둘씩 청산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성숙이 우리 앞에 있기 때문에 새로운 은혜의 자리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을 믿습니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그 비밀이 크도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떠나고 깨끗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살면 그것은 비밀입니다. 비밀은 깨닫고 나면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비밀을 깨닫는 감동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닮아 가는 하나되는 원리 세번째 원리는 예수님을 닮아 가는 하나되는 원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머리이고 우리는 몸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하나되는 사랑의 공동체 이것이 교회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해석이 없습니다. 사랑은 그 본질의 의미만 가지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랑의 의미는 자기희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희생하여 세상을 사랑한 것이 사랑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희생이 있는 거기에서 사랑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는 자기희생이 없는 거짓사랑을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희생이 있는 사랑, 그리고 자기자신을 낮추는 복종이 바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하나됨의 원리입니다. 가가와 도요히꼬는 ’교회는 온갖 쓰레기를 모아 둔 쓰레기통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공동체는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입니다. 실패로 인한 상처를 안고 교회를 떠난 한 성도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하고 그 후유증으로 많은 성도들 앞에 피해를 끼쳤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영적으로 시험이 들어서 교회를 등지고 예수님과 담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럴수록 주님께 매달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품에 안겨야 되는데 그만 이 사람은 교인들을 볼 면목이 없기 때문에 교회를 등지고 산촌 변두리에 묻혀서 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야인처럼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산나물을 삶으려고 아궁이에 불을 땠습니다. 장작을 가지고 불을 지피는데 산나물은 적당하게 데쳐야 되니까 장작을 몇 개 꺼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장작개비는 저절로 불이 꺼져 버렸습니다. 이 사람이 일을 한참 하다가 불이 꺼진 장작개비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이 사람이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아궁이의 장작개비가 활활 불이 탔지만 바깥에 끄집어내어 놓으니까 그대로 꺼져버린 이 장작개비가 내 모습이구나, 교회를 등진 내 모습이 타다가 꺼져버린 장작개비와 같은 모습이구나’ 그 장작개비를 보고 교회로 나아갔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정이요.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소중합니다. 가정도 소중합니다. 주님이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복종으로 우리 가정과 교회를 인테리어 하고 떠남과 만남의 원리로 우리 가정과 교회를 아웃테리어 해서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 가는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함께 우리 부모님들에게도 한번 새겨두고 싶은 말씀을 한마디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하고 우리 자식들에게 좋은 영향을 물려주는 부모로 살고 가야 됩니다. 오늘 젊은 세대들이 저지르는 그 악의 대부분은 어른들에게 배운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들이 부모가 되어 또 다른 악을 저지르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결손가정의 약점을 교회가 보완해 주어야 되고, 사랑이 병든 가정, 복종이 결여된 가정이 교회를 통하여 채워지고 은혜를 받고 그런 가정들이 묶어져서 하나님의 교회가 또한 사랑과 복종의 공동체가 되어가야 할 줄을 믿습니다. 어느 유명한 인사의 간증을 말씀드립니다. 이 분은 한국 교회의 지도자 중 한 분입니다. 그 분이 칠십 평생을 살면서 부모님께 너무나 귀한 유산을 받은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집에 돌아와 보면 어머니가 자주 집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어디 가셨습니까?” ”교회에 갔는가 보더라” ”왜요?” ”뭐 먹을 게 생겼는지 챙겨서 목사에게 가지고 가더라” 그러면서 이 아버지가 이 아들에게 꼭 토를 달아주는 것이 ”얘, 네 어미가 목사에게 하는 거 나한테 반만 하면 열녀문을 세워줄 거다” 그러면서도 그 아이에게 어머니를 한번도 비방하지 않았습니다. 이 분이 그 부모 밑에 살면서 교회가 첫째고 목사님이 첫째라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이 사람도 칠십 평생동안 그 부모님이 물려준 그대로 신앙생활을 하니까 놀라운 축복을 받고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혼자는 무슨 소리든 하십시오. 부부는 안방에서 무슨 소리를 하든 괜찮습니다. 동경대학 총장을 지내신 그 어른은 사랑과 행복의 미학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부관계는 천사의 말과 악마의 말을 동시에 듣는다’는 것입니다. 악마가 부르짖는 소리를 부부끼리는 하십시오. 그러나 자식들이 듣는 앞에서 해서는 안됩니다. 못난 부모들은 서로를 비방합니다. 이놈아, 네 애비처럼 살지 말아라, 이놈아 네 애미처럼 살지 말아라, 그런 소리를 자식들 듣는 자리에서 일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현장교육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부모를 따라서 꼭 그렇게 하게 됩니다. 저는 이 명사의 간증 속에 큰 교훈이 있다고 봅니다. 자기들이 듣는데서 교회를 그렇게 사랑하고 목사를 사랑하는 그 부모의 믿음대로 하니까 복을 받더라는 것입니다.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맺는 말 영국의 정치가 처칠이 왜 위대한 줄 아십니까? 효자 중에 효자입니다. 처칠 수상이 전성기에 있을 때 신문사에서 몰래 취재를 했습니다. 처칠의 유치원 선생님부터 대학 스승까지 처칠과 관계된 스승들을 전부 기획취재를 해서 이런 처칠을 키워낸 스승들을 찬양하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때 이 처칠이 그 기사를 보고는 신문사에 당장 편지를 썼습니다. ”귀 신문사의 보도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빠졌습니다. 내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스승은 나의 어머니입니다. 내 어머니가 빠졌습니다.” 여러분, 처칠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더 위대합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를 향하여 깊은 효행으로 우리 앞에 또 다른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정치적인 영향이너무 위대하니까 그의 효심은 감춰져 있지만 그분의 글 속에는 놀라운 효도의 흔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버이주일을 맞이해서 우리 가정과 교회가 오늘 가르쳐 주시는 사랑과 복종의 원리, 떠남과 만남의 원리, 예수님을 닮아 가는 이 세 가지 원리 안에서 행복한 가정과 교회를 세워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정과 교회의 축복/ 엡6:1-4/ 2010-05-25
가정과 교회의 축복 엡6:1-4 유대인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탈무드에 보면 사람에게는 3단계의 시기가 있다 하였습니다. 첫째는 소년기, 둘째는 청년기, 그리고 셋째는 장년기를 살면서 그 단계마다 역할이 다르다 하였습니다. 소년기는 부모를 위해 살고 청년기에는 자신을 위해 살다가 장년기가 되면 자식을 위해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소년기에 “부모를 위해 산다”는 말이 쉽게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보세요. 자녀들의 의지나 생각이나 원하는 것은 무시를 당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부모의 의사대로 자녀들을 이끌어 갑니다. 하루의 일과를 보세요. 요즘은 아이들이 놀이터에는 없다질 않습니까 학교에서 돌아오면 적게는 3군데 많게는 5군데를 돌고 집에 오면 학교 숙제하고 그러면 밤 11시가 넘으니 자야되지요. 우리 초등학교 때 정문 앞에서 번데기를 팔던 분이 계셨죠. 아이스크림도 했고. 그분들이 뺑뺑이라는 걸 돌려요. 주택복권을 작게 축소한 모양이죠. 그리고 아저씨가 그 원반을 손으로 돌리면 우리는 깃털이 달린 그 앞에는 날카로운 침이 꽂힌 그땐 그걸 찍기라고 그걸 가지고 찍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돈을 내고도 1봉지 찍히면 번데기 1봉지 10봉지 찍히면 10봉지 그런데 10봉지 잘 찍으려면 아저씨가 그 원반을 돌리기가 무섭게 딱- 찍어야 10봉지가 찍히는데 그걸 잘 찍는 애가 있어요. 그럼 돈은 다른 애가 내고 찍기는 그 애가 찍는데 그 애가 하도 잘 찍으니까 나중엔 아저씨가 자기 돈 안내면 못 찍는다 그래서 반에서 아예 돈을 미리 주고 계약 아닌 계약을 맺죠. 10봉지 찍으면 반은 네 꺼다. 아니다 3봉지만 가져가라. 나중엔 10봉지가 자꾸 줄어들어서 말만 10봉지 자리지 실제로는 3-4봉지 정도밖에는 안되게 만들던 아저씨도 생각나십니까? 길거리 리어카에다 멍게, 해삼 팔던 아저씨. 옷 핀을 길게 펴서 꼭 찍어서는 너도 찍고 나도 찍고 먹고 나면 사과에 푹 찔러 놓고 가고. 입술에 뻘건 고추장 물 묻히고는 좀더 큰 거 고르려고 하던 그 때 그 시절을 아십니까? 이제 그런 추억은 박물관에나 있죠. 요즘은 그렇게 자녀 교육을 하였다가는 아마 아동학대죄로 걸릴 줄로 모를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분들이 우리 나라를 살려낸 분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보고, 공주님, 왕자님처럼 양육을 하지마는 막상 “자녀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하는 문제에 부딪히면 할 말이 막히고 맙니다. 그러나 진짜 더 불행한 것은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 되시며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는 하나님! 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세상적인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5월! 이 가정의 달에 자녀다운 자녀, 부모로서 부모다운 모습 그래서 우리의 가정을 이 지상의 천국으로 만들어 갈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을 보세요! 그들은 너무나도 많은 환난을 겪었습니다. '잔인'이라는 단어가 제일 어울릴 정도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인 비극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녀들을 얼마나 얼마나 훌륭하게 키웠는지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모든 분야에서 세계적인 인물들을 배출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는 이스라엘을 가리켜서 “저들의 뒤 속에는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무서운 피가 흐르고 있다. 그 피는 바로 정열의 피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잔혹한 역사 속에서도 위대한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을까요? 이 역사가는 이스라엘을 두 개의 수레바퀴로 비유하면서 이스라엘이라는 수레의 한 바퀴는 교육이요 또 다른 한쪽의 바퀴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심장에서 흐르고 있는 그 열정의 피를 분석해 보면 신 6:4-9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4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절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절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절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9절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 찌니라”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 이것이 바로 그 엄청난 박해와 역경 속에서도 이스라엘을 위대한 민족으로 만든 근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공적인 교육으로 우리의 자녀들이 승리하기를 원하시면 아멘! 그러면 이렇게 교육해 보세요. 첫째> 교육을 시킬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둘째> 상징적 도구를 사용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상상의 나래를 펼쳐 주어야 합니다. 독일의 발도르프라는 교육을 보니까 아이들을 고정관념에서 상상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도구들을 많이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인형 하나를 만들어도 얼굴엔 눈, 코, 입, 귀를 만들지 않아요 왜냐하면 아이들이 스스로 그 얼굴을 그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웃는 인형, 우는 인형, 미운 인형, 예쁘게 만든 인형을 보면 아이들은 더 이상의 상상을 그릴 수 없기에 vision이 없는 아이가 된다는 거예요. 셋째> 일관성 있게 반복적인 교육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세 가지를 다 교육의 장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명절이 되어보세요! 늦잠도 자고, 아니면 여행을 떠나고 그도 안되면 방콕하고 방에 콕 박히는 것을 방콕이라 하죠.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명절을 자녀 교육을 위한 기회로 삼았습니다. 가령 장막절이 되면 자녀들을 데리고 나가 들판에 천막을 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1주일 동안이나 지나게 합니다. 이것도 하루 이틀이나 1주일 이상 계속되면 얼마나 힘이 들고 귀찮겠어요. 아이! 아버지! 우리 T.V봐야 되는데 아이! 아빠! 나 컴퓨터 해야 하는데 아이! 아빠! 나 샤워하고 싶어 아이! 아빠! 나 갈래 왜? 비데 해야 되는데 그러면 그때 아빠가 얘들아! 옛날에 우리 조상님들이 이런 천막을 치고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사셨단다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드셨겠니 너희는 고작 1주일도 힘들다고 하는데 그분들은 40년이야 40년. 그런데 그런 천막 생활 속에서 고생을 하면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단다. 편안한 것만 좋아하면 사람이 나태해지고 교만해져서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을 뿐 아니라 아예!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는거야. 너희들은 살면서 어려울 때면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하면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반에는 불기둥이 되셔서 우리를 지켜 주시는 거야! 이번엔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한밤중에 한참 곤하게 자는데 아이들을 깨웁니다. 깨울 때 어떻게 깨울까요? 일어나! 일어나! 어떻게 깨우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아! 곤하게 잠든 사람을 깨우니 얼마나 짜증이 납니까. 자녀들이 온 몸을 비틀면서 우~~~~~아아아아 아이고 아빠! 왜 깨우고 그러세요. 지금 몇 신데 이 정도일까요? 아빠! 지금이 몇 시야. 왜 그래 아버지가 대답을 합니다. 얘들아 옛날에 우리 조상들께서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시다가 하나님의 인도로 이집트 땅을 떠나실 때 한 밤중에 이스라엘 민족을 깨우시고는 허리띠를 띠게 하시고 자유를 주셨단다. 이 유월절은 해외로 놀러 가는 주간이 아니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이야! 졸리고 피곤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크신 복을 내리시는 거란다. 이렇게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와 축복을 기억하게 하고 옛날의 일을 명절과 무교병과 텐트라는 도구로서 상상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수 4:1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갈라진 요단강을 다 건넌 후에 그 강바닥에 있는 돌을 12개 골라서 강 언덕에 쌓아둔 다음. 여호수아가 이런 말을 합니다. 후대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와서 이 강 언덕에 쌓여 있는 이 돌들이 무엇이냐고 묻거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요단 강물에서도 하나님께서 발바닥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서도 구원해 주신 징표라고 가르치라. 하나의 돌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하나님의 축복을 상상할 수 있고 기억할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집에는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생각하고, 그려낼 수 있는 물건이 얼마나 있습니까? 물건이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가르치고 있으십니까? 아니면 T.V 화면만 점점 커진 채 T.V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까? 금요일 저녁 10:30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매일 새벽 5시에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주일날이 놀러 가는 날로 가르치고 계시지 않습니까? 왜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달아 주는지 가르치십니까?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는 이유는 1910년경 미국의 한 여성이 어머니를 추모하면서 교인들에게 하얀 카네이션을 나누어 드린 것이 기화가 되어서 어머니에 대한 사람을 나타내는 상징의 꽃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1925년도에 이 카네이션이 도입되어서 어버이날이나 스승의 날이 되면 자녀들과 학생들이 부모님과 스승님에게 붉은 카네이션을 내 심장에서 흐르는 피처럼 사랑합니다. 라는 의미로 달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런 일들은 반복적으로 계속되어질 때 그것이 교육인 것입니다. 어버이에게 효도하라. 입이 마르도록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바로 5월 8일에 이런 의미를 가르쳐 준 후에 어머니 가슴에 꽃을 달아 드린다면 우리의 후손들이 이것을 보고 우리가 늙어서도 성문에서 원수와 말할 때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줄을 믿습니다. 이제부터라도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상징적 도구를 잘 사용하세요. 그리고 실망하지 말고 반복적으로, 일관성 있게 가르치면 그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게 임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버이 주일이 되면 전 어버이 주일이 아니더라고 참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8남매를 모두 공부시켜주신 어머니,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지금 무엇이 되었을까? 매일 매일 쓰시던 일기장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이 목사 아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글을 쓰셨던 어머니. 손마디가 굵어지셔서 손가락 안에서는 빙글빙글 돌지만 손가락 밖으로는 빠지지 않던 반지를 비눗물까지 바르시면서 너 결혼하거든 네 아내에게 주어라. 하시던 가슴에 뼈만 남으셨던 어머니. 지금도 어머니 보고 싶은 내 어머니. 어머니 그러면 제 아내에게 좀 미안해요. 왜냐하면 아직 장모님께선 생존해 계시니까요. 그래서 여보 폰뱅킹으로 용돈이라도 보내드려. 그리고 전화해서 장모님 죄송합니다 찾아 뵙지도 못하고요. 괜찮아! 박 목사님 장모님께선 저에게 꼭 목사님이라고 부르셔요. 이젠 83세시라 정말 많이 늙으셨는데도 오히려 건강 조심하라고 하시면서 역으로 위로하시던 어머니. 이번 어버이날을 교육의 기회로 삼지 못했다면 스승의 날에는 그날을 기회로 꽃 한송이 속에 있는 사랑의 모습으로 나의 자녀들에게는 교육의 기회로 활용하시기를 바랍니다. 필요하다면 어버지 날도 우리 만드십시다. 더 필요하다면 고모의 날. 이모의 날, 권사님의 날, 집사님의 날 그래서 내 모든 삶의 자리에서 교육의 기회가 되고 내 집안에 놓여지는 장식물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상상할 수 있도록 놓여지고 살아 있는 동안 꾸준히 반복해서 가르치면 내 삶 속에서 부모님을 공경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모습을 남편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지내면 우리 후손 대에는 이 땅에서 천국을 가꾸어 가는 복된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가정과 교회의 축복 중에 가정의 축복에 대해서 말씀을 선포할 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우리 가운데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정과 부모 공경/ 엡6:1-3/ 차용철 목사/ 2007-05-08
가정과 부모 공경 엡6:1-3 “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엡6:1-3) <序言> 옛날 젊은 부부가 홀로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 부부에게는 어린 아기가 있었는데, 농사 일이 바쁘다 보니 부부가 함께 밭에 나가 일을 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어느날 밭에서 돌아온 부인은 기절 초풍할 장면을 보았습니다. 시아버지가 낮잠을 자다가 아기를 깔고 자는 바람에 아기가 죽고 만 것입니다. 부인은 그 아기를 안고 얼른 바깥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혹시라도 시아버님께서 ‘자신이 아기를 깔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괴로워 하실까?’ 하고 , 이 사실을 비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부인은 울면서 아기를 안고 밭에서 일하는 남편에게 달려가 자초지정을 말했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말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어린 아기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이런 불효 막심한 자식, 왜 하필이면 할아버지한테 깔려 죽어서 할아버지의 심기를 괴롭게 하느냐 이놈! 너 같은 불효 자식이 천하에 어디 있겠느냐 이놈!” 하며 뺨따귀를 세차게 내려 쳤습니다. 그랬더니 죽었던 아기가 깜짝 놀라 깨어 나더랍니다. 이 사연이 널리 퍼지면서 그 지역에 효자와 효부가 산다 하여 ‘효자동’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독재시대에서 자유시대로,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탈시대로 바뀌면서 부모의 세대와 자녀 세대의 가치관과 인생관과 세계관의 갭이 좁힐 수 없을 만큼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만큼 갈등과 분열과 충격은 커지고 있습니다. 요즘같이 경제적으로 힘들 때는 갈등이 더 많이 나타나게 됩니다. 조사결과를 보면 부모 문제가 얼마나 가정을 황폐하게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까리따스 노인학대상담센터와 한국재가노인복지협의회가 2001.3.~2002.3.까지 노인학대상담전화(1588―9222)를 통해 접수된 498건을 중심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가해자로는 아들이 189명(44.1%)으로 가장 많았고, 며느리(112명,26.1%)가 두 번째였고, 그 다음으로 딸(58명,13.5%) 배우자(18명,4.2%) 사위(13명,3.0%) 손자(8명,1.9%) 순이었습니다. 행복은 가정 안에서 부모와의 세계관을 좁히는 만큼 회복됩니다. <本論> 1.부모의 세계관을 이해해야 합니다. 제가 대구에서 목회를 할 때 일입니다. 교회 앞에 고급 아파트가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우리 교회에 등록되지는 않은 상태였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우리 교회를 지속적으로 나왔습니다. 그 시어머니는 권사이고 며느리는 목사 딸입니다. 그 며느리에게는 어린아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두 분이 모두 신앙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어머니는 새벽예배만 나오고 며느리는 주일 오전예배만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두 분이 예배를 각기 다른 시간에 나오는 것은 서로 보기 싫어서였습니다. 그 집은 고부 갈등이 심한 가정이었던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제게 한 말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자신은 아들이 선볼 때 며느리 될 사람이 목사 딸이라고 해서 믿음이 좋을 것으로 생각해서 묻지도 않고 결혼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살다가 보니 믿음이 형편 없더라는 것입니다. 손자가 아프면 자기는 기도를 하는데 며느리는 감기만 걸려도 약을 먹이고 병원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 가정의 예를 보면 시어머니가 나쁜 사람이거나 며느리가 신앙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아서입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순전히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물로 허기를 채우고 초근목피로 연명을 했습니다. 극동방송에서 김삼환 목사님 얘기를 들으니까 소나무 껍질을 먹어서 변을 보면 안 나와서 손가락으로 잡아 뺐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속담과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 속담이 생겼겠습니까? 그들의 소원은 오직 배부르게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인사가 “진지 드셨습니까?”입니다. 라디오만 틀면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하는 노래가 나왔습니다. 오직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밥그릇 싸움이라면 피튀기는 싸움을 합니다. 정치적으로 공포 속에서 살았습니다. 일제의 식민 통치와 6.25 동란과 무장 공비의 활동과 군부 독재를 지내 오면서 생사의 갈림길에서 갈등했습니다. 나름대로의 생존법칙을 가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에 대한 배신 속에서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반전될 때마다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어떤 일에도 앞서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소극적인 삶을 살수 밖에 없었습니다. 강한 자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합니다. 문화적으로 속박되어 살아왔습니다. 사회 전반에 걸친 유교적 관습 속에서 억눌려 살아왔습니다.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결혼할 수 없었고 아들을 낳지 못하면 쫒겨 나기도 했고 갖은 구타를 핍박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그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참아야 했고 아부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 지에 표준을 맞춥니다. 신앙적으로 편협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기독교 선교의 초기에는 신학자와 선교사들이 교리에 집중했습니다. 그들에게 배운 목회자들은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다양한 은혜를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옳다고 생각하는 진리를 지키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에게 신앙적 배려와 포용과 협력과 연합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조금만 변화를 주려 하면 두려워 합니다. 부모의 신앙관과 우리의 신앙관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신앙관은 바뀌기 힘듭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신앙관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분들의 신앙관을 이해하고 인정해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을 오늘날 우리의 환경과 우리의 관념에서 판단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모독이요 폭력인 것입니다. 2.부모의 소외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시골 출신이라 고등학교 때 도시로 나오면서 자취를 했습니다. 그 집은 주인 가정의 방들이 가운데 있고 양 옆으로 자취방이 대문까지 있는 집이었습니다. 제 방 맞은 편에 한 가정이 살았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와 딸은 직장 아들은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그 아버지는 연세가 많았는데 매일 노인정에 나갔습니다. 어느 날 저 혼자 집에 있을 때 방문을 열어 보니 할아버지가 약을 먹고 신음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를 업고 도립병원으로 갔습니다. 제 등에 있을 때는 숨을 쉬었는데 병원에 도착하니 멎었습니다. 바로 영안실로 안치되었습니다. 그 자녀는 뒤에 아버지가 죽은 사실을 알고 죽을만한 이유가 없는데 왜 죽었는지 모르겠다며 울었습니다. 제게 말하길 “매일 노인정에 가시길래 다른 할아버지들과 내기 장기도 두고 하라고 얼마씩 주었는데...”했습니다.여러분 생각엔 이 할아버지가 왜 음독 자살한 것 같습니까? 지난 3월 부산대 사회복지과 서정화씨가 제출한 ‘노인 자살 예방을 위한 사회 사업 개입 전략’이라는 주제의 박사 학위 논문에 실은 설문조사를 보면, 부산 울산 경남에 거주하는 60살 이상 남녀 512명 가운데 86.5%(443명)가 자살을 고려해 보았다고 응답했습니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이유로는 전체의 26.8%(137명)가 ‘건강악화’로 꼽았고, 25.2%(129명)가 ‘가족 갈등’으로, 21.3%(109명)가 ‘심한 고독’이었습니다. 가족 갈등과 심한 고독은 심리적으로 비슷한 문제입니다. 응답자 중 72.0%가 ‘매사에 의욕이 없고 우울하거나 슬플 때가 있다’ 대답해 초기 우울증세를 보였습니다. 그 만큼 외롭고 고독합니다. 아버지들은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가지고 살았고 가정에서도 가부장적 권위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어머니들은 불합리한 문화 구조 속에서도 자녀 양육권은 있었고 오로지 자녀 양육만이 유일한 낙이었고 소망이었습니다. 이젠 나이가 많아지면서 사회로부터도 냉대를 당하고 심지어 가정에서도 가장으로 인정해 주지 않고 자녀도 남의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가족의 구성원들 중 누구도 과거의 지위를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거기에다가 말 상대도 해주지 않습니다. 손자들도 대화가 안 됩니다.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오로지 며느리 간섭하고 며느리와 싸울 때입니다. 심한 배반감과 허탈감과 고독함을 가집니다. 부모를 공경하려면 육체적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합니다. 아픈 곳이 있을 때 진료와 치료에 힘써야 합니다. 먹는 문제, 입는 문제, 잠자는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 용돈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부분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노인들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 하는 것이 모멸감과 소외감과 고독함입니다. 실은 며느리를 간섭하는 것도 그런 문제입니다. 부모의 자존감을 세워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위치를 확인시켜 드려야 합니다. 부모의 의사와 결정을 존중해야 합니다. 말을 많이 들어 드려야 합니다. 무엇이든 설명을 해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잠언23:25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했습니다 (잠15:20). 3.부모를 공경하는 데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러시아 혁명이 있을 때 공산당들은 집들을 모두 태워 버리고 곡식들을 모조리 없애 버렸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모두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때 모스크바로 여행을 갔던 어떤 사람이 들판에 주저 앉아 어린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어머니를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풀뿌리를 캐다가 어린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여행하는 사람은 그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고 기운이 없어 보이기에 어린 아이를 품에서 떼어 냈더니 그 어머니의 젖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젖꼭지를 칼로 잘라서 피를 빨리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먹지 못해서 젖이 나지 않고 아기가 젖을 달라고 울 때 그 어머니는 젖꼭지를 잘라 피를 마시우게 했던 것입니다. 부모는 우리를 위해 희생했습니다. 부모는 우리를 낳아 주신 분들입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 피를 서말 서되를 흘린다고 했고 기를 때 젖을 여덞섬 너말로 키운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먹지 못할 때에도 우리는 먹였고 입지 못하면서도 우리는 입혔고 자지 못하면서도 우리는 재웠습니다. 그들은 공부를 하지 못했으나 허리 띠를 졸라 매가며 우리에게 공부를 시켰습니다. 만일 우리 생각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부모에게 그럴만한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죽어 마땅합니다 (레20:9, 신기21:18-21, 잠30:17). 우리는 그에 비하면 너무 잔인할 정도로 부모에게 희생하지 않습니다. 지금 학생들은 공부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말하지만 부모는 직장에서 서류로 머리를 맞아 가고 몸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한 달 백만원 대를 벌어오면 수십만원짜리 핸드폰 디카 엠피쓰리 쌉니다. 신발 하나를 사도 싼 것은 챙피해서 못 신는다고 비싼 메이커 삽니다. 그래도 부모는 사줍니다. 아이가 왕따 당할까 봐... 우리는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싼 신발 신으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왕따 당하는 것이 두렵습니까? 이제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이어야 하고 구체적인 실천을 하려면 희생해야 합니다. 부모가 희생없이 자녀 기를 수 없는 것처럼 자녀도 희생없이 보답할 수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종교적으로 희생해야 합니다. 부모 희생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내가 양보하기 싫어도 부모를 위해 일정부분 양보해야 합니다. 내가 싫어하더라도 부모가 기뻐하는 것이라면 일정부분 희생해야 합니다. <結言> 부모공경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출애굽기20:12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했습니다 (신5:16). 부모공경은 하나님께서 복을 약속하신 첫 계명입니다. 에베소서6:2-3에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조건없이 공경해야 합니다. 이젠 부모를 이해해야 합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희생해야 합니다.
가정과 부모 공경/ 엡6:1-3/ 차용철 목사/ 2007-05-13
가정과 부모 공경 엡6:1-3 <本文> “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序言> 옛날 젊은 부부가 홀로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 부부에게는 어린 아기가 있었는데, 농사 일이 바쁘다 보니 부부가 함께 밭에 나가 일을 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밭에서 돌아온 부인은 기절초풍할 장면을 보았습니다. 시아버지가 낮잠을 자다가 아기를 깔고 자는 바람에 아기가 죽고 만 것입니다. 부인은 그 아기를 안고 얼른 바깥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혹시라도 시아버님께서 '자신이 아기를 깔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괴로워하실까?' 하고 , 이 사실을 비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부인은 울면서 아기를 안고 밭에서 일하는 남편에게 달려가 자초지정을 말했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말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어린 아기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이런 불효막심한 자식, 왜 하필이면 할아버지한테 깔려 죽어서 할아버지의 심기를 괴롭게 하느냐 이놈! 너 같은 불효자식이 천하에 어디 있겠느냐 이놈!” 하며 뺨따귀를 세차게 내려 쳤습니다. 그랬더니 죽었던 아기가 깜짝 놀라 깨어나더랍니다. 이 사연이 널리 퍼지면서 그 지역에 효자와 효부가 산다 하여 '효자동'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독재시대에서 자유시대로,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시대로 바뀌면서 부모의 세대와 자녀 세대의 가치관과 인생관과 세계관의 갭이 좁힐 수 없을 만큼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만큼 갈등과 분열과 충격은 커지고 있습니다. 요즘같이 경제적으로 힘들 때는 갈등이 더 많이 나타나게 됩니다. 조사결과를 보면 부모 문제가 얼마나 가정을 황폐하게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까리따스 노인학대상담센터와 한국재가노인복지협의회가 2001.3.~2002.3.까지 노인학대상담전화(1588―9222)를 통해 접수된 498건을 중심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가해자로는 아들이 189명(44.1%)으로 가장 많았고, 며느리(112명,26.1%)가 두 번째였고, 그 다음으로 딸(58명,13.5%) 배우자(18명,4.2%) 사위(13명,3.0%) 손자(8명,1.9%) 순이었습니다. 행복은 가정 안에서 부모와의 세계관을 좁히는 만큼 회복됩니다. <本論> 1.부모의 세계관을 이해해야 합니다. 제가 대구에서 목회를 할 때 일입니다. 교회 앞에 고급 아파트가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우리 교회에 등록되지는 않은 상태였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우리 교회를 지속적으로 나왔습니다. 그 시어머니는 권사이고 며느리는 목사 딸입니다. 그 며느리에게는 어린아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두 분이 모두 신앙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어머니는 새벽예배만 나오고 며느리는 주일 오전예배만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두 분이 예배를 각기 다른 시간에 나오는 것은 서로 보기 싫어서였습니다. 그 집은 고부 갈등이 심한 가정이었던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제게 한 말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자신은 아들이 선볼 때 며느리 될 사람이 목사 딸이라고 해서 믿음이 좋을 것으로 생각해서 묻지도 않고 결혼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살다가 보니 믿음이 형편 없더라는 것입니다. 손자가 아프면 자기는 기도를 하는데 며느리는 감기만 걸려도 약을 먹이고 병원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 가정의 예를 보면 시어머니가 나쁜 사람이거나 며느리가 신앙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아서입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순전히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물로 허기를 채우고 초근목피로 연명을 했습니다. 극동방송에서 김삼환 목사님 얘기를 들으니까 소나무 껍질을 먹어서 변을 보면 안 나와서 손가락으로 잡아 뺐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속담과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 속담이 생겼겠습니까? 그들의 소원은 오직 배부르게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인사가 “진지 드셨습니까?”입니다. 라디오만 틀면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하는 노래가 나왔습니다. 오직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밥그릇 싸움이라면 피 튀기는 싸움을 합니다. 정치적으로 공포 속에서 살았습니다. 일제의 식민 통치와 6.25 동란과 무장 공비의 활동과 군부 독재를 지내 오면서 생사의 갈림길에서 갈등했습니다. 나름대로의 생존법칙을 가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에 대한 배신 속에서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반전될 때마다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어떤 일에도 앞서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소극적인 삶을 살수 밖에 없었습니다. 강한 자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합니다. 문화적으로 속박되어 살아왔습니다. 사회 전반에 걸친 유교적 관습 속에서 억눌려 살아왔습니다.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결혼할 수 없었고 아들을 낳지 못하면 쫓겨나기도 했고 갖은 구타를 핍박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참아야 했고 아부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 지에 표준을 맞춥니다. 신앙적으로 편협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기독교 선교의 초기에는 신학자와 선교사들이 교리에 집중했습니다. 그들에게 배운 목회자들은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다양한 은혜를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옳다고 생각하는 진리를 지키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에게 신앙적 배려와 포용과 협력과 연합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조금만 변화를 주려 하면 두려워합니다. 부모의 신앙관과 우리의 신앙관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신앙관은 바뀌기 힘듭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신앙관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분들의 신앙관을 이해하고 인정해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을 오늘날 우리의 환경과 우리의 관념에서 판단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모독이요 폭력인 것입니다. 2.부모의 소외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시골 출신이라 고등학교 때 도시로 나오면서 자취를 했습니다. 그 집은 주인 가정의 방들이 가운데 있고 양 옆으로 자취방이 대문까지 있는 집이었습니다. 제 방 맞은편에 한 가정이 살았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와 딸은 직장 아들은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그 아버지는 연세가 많았는데 매일 노인정에 나갔습니다. 어느 날 저 혼자 집에 있을 때 방문을 열어 보니 할아버지가 약을 먹고 신음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를 업고 도립병원으로 갔습니다. 제 등에 있을 때는 숨을 쉬었는데 병원에 도착하니 멎었습니다. 바로 영안실로 안치되었습니다. 그 자녀는 뒤에 아버지가 죽은 사실을 알고 죽을만한 이유가 없는데 왜 죽었는지 모르겠다며 울었습니다. 제게 말하길 “매일 노인정에 가시기에 다른 할아버지들과 내기 장기도 두고 하라고 얼마씩 주었는데...”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엔 이 할아버지가 왜 음독자살한 것 같습니까? 지난 3월 부산대 사회복지과 서정화씨가 제출한 '노인 자살 예방을 위한 사회사업 개입 전략'이라는 주제의 박사 학위 논문에 실은 설문조사를 보면, 부산 울산 경남에 거주하는 60살 이상 남녀 512명 가운데 86.5%(443명)가 자살을 고려해 보았다고 응답했습니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이유로는 전체의 26.8%(137명)가 '건강악화'로 꼽았고, 25.2%(129명)가 '가족 갈등'으로, 21.3%(109명)가 '심한 고독'이었습니다. 가족 갈등과 심한 고독은 심리적으로 비슷한 문제입니다. 응답자 중 72.0%가 '매사에 의욕이 없고 우울하거나 슬플 때가 있다' 대답해 초기 우울증 증세를 보였습니다. 그 만큼 외롭고 고독합니다. 아버지들은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가지고 살았고 가정에서도 가부장적 권위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어머니들은 불합리한 문화 구조 속에서도 자녀 양육권은 있었고 오로지 자녀 양육만이 유일한 낙이었고 소망이었습니다. 이젠 나이가 많아지면서 사회로부터도 냉대를 당하고 심지어 가정에서도 가장으로 인정해 주지 않고 자녀도 남의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가족의 구성원들 중 누구도 과거의 지위를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거기에다가 말 상대도 해주지 않습니다. 손자들도 대화가 안 됩니다.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오로지 며느리 간섭하고 며느리와 싸울 때입니다. 심한 배반감과 허탈감과 고독함을 가집니다. 부모를 공경하려면 육체적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합니다. 아픈 곳이 있을 때 진료와 치료에 힘써야 합니다. 먹는 문제, 입는 문제, 잠자는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 용돈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부분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노인들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 하는 것이 모멸감과 소외감과 고독함입니다. 실은 며느리를 간섭하는 것도 그런 문제입니다. 부모의 자존감을 세워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위치를 확인시켜 드려야 합니다. 부모의 의사와 결정을 존중해야 합니다. 말을 많이 들어 드려야 합니다. 무엇이든 설명을 해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잠언23:25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했습니다(잠15:20). 3.부모를 공경하는 데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러시아 혁명이 있을 때 공산당들은 집들을 모두 태워 버리고 곡식들을 모조리 없애 버렸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모두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때 모스크바로 여행을 갔던 어떤 사람이 들판에 주저앉아 어린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어머니를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풀뿌리를 캐다가 어린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여행하는 사람은 그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고 기운이 없어 보이기에 어린 아이를 품에서 떼어 냈더니 그 어머니의 젖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젖꼭지를 칼로 잘라서 피를 빨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먹지 못해서 젖이 나지 않고 아기가 젖을 달라고 울 때 그 어머니는 젖꼭지를 잘라 피를 마시우게 했던 것입니다. 부모는 우리를 위해 희생했습니다. 부모는 우리를 낳아 주신 분들입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 피를 서 말 서 되를 흘린다고 했고 기를 때 젖을 여덞 섬 너 말로 키운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먹지 못할 때에도 우리는 먹였고 입지 못하면서도 우리는 입혔고 자지 못하면서도 우리는 재웠습니다. 그들은 공부를 하지 못했으나 허리띠를 졸라 매가며 우리에게 공부를 시켰습니다. 만일 우리 생각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부모에게 그럴만한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죽어 마땅합니다(레20:9, 신21:18-21, 잠30:17). 우리는 그에 비하면 너무 잔인할 정도로 부모에게 희생하지 않습니다. 지금 학생들은 공부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말하지만 부모는 직장에서 서류로 머리를 맞아 가고 몸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한 달 백만 원대를 벌어오면 수십만 원짜리 핸드폰, 디카, 엠피쓰리 쌉니다. 신발 하나를 사도 싼 것은 창피해서 못 신는다고 비싼 메이커 삽니다. 그래도 부모는 사줍니다. 아이가 왕따 당할까 봐... 우리는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싼 신발 신으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왕따 당하는 것이 두렵습니까? 이제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이어야 하고 구체적인 실천을 하려면 희생해야 합니다. 부모가 희생 없이 자녀 기를 수 없는 것처럼 자녀도 희생 없이 보답할 수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종교적으로 희생해야 합니다. 부모 희생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내가 양보하기 싫어도 부모를 위해 일정부분 양보해야 합니다. 내가 싫어하더라도 부모가 기뻐하는 것이라면 일정부분 희생해야 합니다. <結言> 부모공경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출애굽기20:12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했습니다(신5:16). 부모공경은 하나님께서 복을 약속하신 첫 계명입니다. 에베소서6:2-3에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조건 없이 공경해야 합니다. 이젠 부모를 이해해야 합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희생해야 합니다.
가정과 천국의 신비/ 엡5:31-33/ 2004-05-25
가정과 천국의 신비 엡5:31-33 왜 부모를 떠나는가? 그것은 부모를 떠나서 또 하나의 새로운 관계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는 세상을 떠나서 예수를 만나는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이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서 관계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만 믿으면 나는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그래서 주인과 종의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으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시면 내가 그의 신부가 됩니다. 그래서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종의 관계, 아들의 관계, 신부의 관계가 있는데 이 세 관계는 다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내가 종이 되어서 일하게 됩니다. 이 관계는 일의 관계입니다. 충성하고, 섬기는 관계며,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도 듣고 충성된 종으로서 상도 받고, 면류관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면 내가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또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녀됨의 권세를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권세를 받아서 천국에 가는 유업을 받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시고 사랑을 나누면서 교제하고, 행복을 얻는 관계입니다. 종으로 일할 때는 삯을 받고 칭찬을 받으며 아들로 믿게 될 때는 거기에서 유업을 받고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신랑 신부의 관계가 되면 사랑의 관계를 형성해서 행복하고, 교제하면서 인격적인 만남을 이룹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인격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다만 명령의 관계고, 순종의 관계며, 일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인격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보호의 관계이며, 돌봄의 관계이며, 유업을 받는 관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신랑 신부의 관계는 일대일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이 관계는 철저하게 서로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여기에서만 진정한 행복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성장의 단계를 보면 처음에 하나님을 만날 때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만나서 주인에게서 무엇을 얻습니다. 또 도움을 받습니다. 조금 더 은혜를 받으면 내가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는 위대한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고 마음에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성숙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전부가 되어서 마치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고 교제하듯이 하나님과 교제하므로 행복을 얻고 만족을 얻으며 기쁘게 살아가는 관계가 됩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연합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은 주인과 종의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종이고, 모세도 종이며, 여호수아, 이사야 모두 종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렇게 부르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연합하듯이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격적으로 성숙하면 신랑 신부의 관계로 일생을 살 듯이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 때 우리의 심령속에 하늘의 천국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31-33절) 먼저, 둘이 한 몸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비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남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연합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연합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연합은 인격적이고 영적인 교통을 상징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형상을 따라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고 창세기 1장 27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자 혼자만의 형상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함께 만날 때 하나님의 형상이 내게 온전히 나타나게 됩니다. 남녀의 연합은 결국 신비한 비밀인데 천국의 즐거움, 기쁨을 땅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 남녀의 연합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신비하게 봐야 합니다. 부부의 만남은 남녀의 성적인 만남이며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지으시고 우리의 성이 그 인격을 표현하는 도구라면 부부는 인격적으로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일대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우리가 회사에 가서 사장과 일대일이 안됩니다. 이것은 권위상 차이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일대일이 안됩니다. 이것은 보호자의 입장에서 자녀는 약한 존재로 섭니다. 이 세상 어디에 가도 일대일의 존재는 안됩니다. 빈부, 학력, 인물, 모든 것에서 비교되는 차등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부부는 일대일 인격적으로 만나는 유일한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대일의 인격으로 만나는 것은 부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남편 앞에 있는 아내는 일대일의 인격적 존재의 존엄성을 다 받고 있습니다. 남편도 그 아내 앞에서 일대일의 인격적 존재의 존엄성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존엄성이 깨질 때는 그 가정은 이름만 남게 됩니다. 마이크 메이슨이라는 사람이 쓴「결혼의 신비」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가정생활의 고전적인 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듯 진정한 남녀의 교제만이 하나됨의 신비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내가 하나됨의 신비에 이르듯이 남녀의 교제만이 하나님과 하나됨의 신비를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이런 해석을 내렸습니다. ’부부의 관계로 경험으로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고귀한 성취가 있다면 그것은 진실과 헌신으로 하나되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24-25절에 보면 부부가 연합하기 위해서 옷을 벗었다고 했습니다. 옷을 벗는다는 것은 자기 전 존재를 진실하게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또 연합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최상의 헌신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의 만남은 진실과 헌신입니다. 이 이상의 헌신이 없습니다. 이 이상의 진실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자기 존재를 벌거벗은 존재로 진실하게 내놓아야 되며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듯 헌신하는 것은 이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고전 7:3-4절에 보면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남편은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는 남편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연합을 위해서 자기 존재를 내어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함께 잠을 자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엄마는 아이들과 함께 자고 남편은 건너방에서 따로 자는 것, 이것은 성서적인 것이 아닙니다. 남자가 집안에 서재를 꾸며놓고 혼자 거기에서 연구하고 잠자는 것도 올바르지 못합니다. 연구했으면 잘 때는 같이 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건강상의 이유나 특별한 기도를 위해서라면 허락을 받고 하라고 성서가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우리 교회 여 집사님이 12시에 철야하러 왔어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오셨느냐고 했더니 아이 대학 진학을 위해서 백일기도를 시작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어서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백일기도는 새벽에 해도 됩니다. 자식 대학가는 것 가는대로 내버려두어야지 백일기도 한다고 떨어질 것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격을 세워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실력없는 것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가서 주무시죠.” 자야 할 자리에 가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라고 제가 집으로 보내드린 일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부부는 서로 존경과 사랑으로 연합해야 됩니다.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33절) 인생이 육체가 연합되었다고 그것으로 일생을 다 사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도 쇠합니다. 정욕도 갑니다. 육체의 연합도 식어집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견고한 연합만이 일생을 강한 끈으로 연합시킬 수 있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이런 글을 읽고 혼자 웃었습니다. ”아내가 예뻐보일 때...” 이런 제목의 글인데 20대 후반은 남편을 위해서 예쁜 아기 낳아줄 때 아내가 예뻐보이고, 30대 후반은 좋은 집에 못산다고 불평하지 않고 잘 참아주는 아내를 볼 때 예뻐보이고, 40대 후반은 ”당신 건강해요. 건강해야 되요” 하면서 보약 다려줄 때 예뻐보이고, 50대 후반은 ”당신은 참 훌륭한 사람이야”라고 칭찬해 줄 때 아주 예뻐보이고, 60대 후반은 ’당신과 살아온 생은 참 행복한 삶이었다’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싱긋이 웃어줄 때 예뻐보이고, 70대 후반은 조용히 ”우리가 죽거든 양지바른 곳에 함께 묻힙시다.” 하면서 주름잡힌 얼굴로 쳐다볼 때 아주 예뻐보이더랍니다. 그런데 여기에 공통점이 있었는데 남자는 늙어서까지 여자에게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달라는 당부를 잃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남편을 존경해달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자존감을 지켜줄 때 남자들은 아내가 가장 예뻐보인다고 합니다. 아무리 예쁜 여자도 남편을 무시하면 정이 뚝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 날로 미워지기 시작합니다. 남편을 자꾸 세워주면 어떤 여자도 포근한 가운데 예뻐보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남편도 훌륭한 가문의 남자였고 부인도 명문대학을 나온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남편은 그 부인에게서 포근함도 느끼지 못하고 항상 지적만 당하면서 기죽어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지지리도 못난 여자와 눈이 맞아가지고 도망을 쳤습니다. 이 부인이 목사님에게 상담하기를 ”목사님, 정말로 자존심이 상합니다. 잘난 여자와 도망갔으면 이렇게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겠습니다. 천하에 못생기고, 배운 것도 없고, 가문도 형편없는 여자와 도망갔으니 너무 창피합니다.” 할 때 목사님이 ”나라도 도망가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부인이 너무 똑똑하고 완벽해서 남편이 거기 붙어있을 수가 없어서 도망갔습니다. 남편을 존경한다고 하는 것은 아내가 순종해 준다는 얘기입니다. 순종한다는 말은 헬라어 원어를 보면 ’아래에서 받들어 준다, 잘 들어준다’는 말입니다. 잘나고 똑똑한 것이 있어도 남편 앞에서만은 감추어야 됩니다. 다른 곳에 가서는 똑똑한 것을 아무리 나타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만은 ’똑’ 소리가 싹 사라지고 ’덕’ 소리만 나야 됩니다. 여자가 너무 똑똑해서 남편에게서 ’똑’ 소리가 나면 남편이 그때부터 기가 죽습니다. 하늘은 높고 넓어서 땅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땅을 품어야 되는데 하늘이 좁아지면 땅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늘은 품어야만 되기 때문에 품을 곳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 친구 목사가 있는데 친구 목사는 외모가 외소하고 부인은 헤비급입니다. 그래서 밤에 잘 때 부인은 쑥 올라오고 남편은 쑥 내려갑니다. 그 친구가 나한테 와서 하는 말이”우리 식구는 얼마나 태산처럼 헤비급인지 안을 수가 없어” 그래요. 그래서 제가 ”자네가 하늘인데 하늘이 안아야지 땅이 안아서야 되겠어 땅이 안으면 거꾸로 되어서 뒤집어지겠네.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언제나 여자는 땅처럼 남편은 하늘처럼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의 신비입니다. 혹시 이 가운데 똑똑한 부인 있습니까 너무 똑똑한 척 하지 마십시오. 똑똑한 척은 세상에 나가서 하십시오. 가정에서는 똑 소리를 죽이십시오. 우리는 다윗과 미갈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됩니다. 다윗은 서민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미갈은 사울 왕의 딸로 왕가의 공주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차이가 너무 많습니다. 가문, 교육, 배경, 인생관, 취미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정략적으로 다윗과 미갈을 결혼시켰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난 후에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너무 너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추고 기뻐 뛰노느라고 옷이 벗어지는 줄도 몰랐습니다. 삼하 6장 16절에 보면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라고 했습니다. 미갈이 이것을 보고 남편을 업신여겼습니다. ’저 사람은 원래 출신이 그런 사람이야 왕 이 체통도 없이 벌거벗고 춤을 춰’ 하면서 아니꼬운 눈초리로 멸시하면서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집에 들어올 때 멸시하는 투로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정색을 하고 입을 엽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삼하 6:21-22) 이 말이 떨어지면서부터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별거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남남이 되어버린 것이죠. 다윗이 아내 미갈로부터 자존심이 상처를 받은 후로는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별거를 하게 되었고 다윗은 후에 밧세바를 만나게 됩니다. 다윗 왕가의 비극이 뭡니까? 바로 아내가 남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는데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여자가 20년 길러놓은 남자를 다른 남자가 20분만에 망칠 수 있다. 그러므로 남편을 세워주어야 한다.” 아내에게 순종을 명령하신 것은 남편을 세워주기 위한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것은 자기 존재가 주님을 만난 천사같이 되라는 말입니다. 한문으로 지아비 부(夫)자는 하늘 천(天)에서 조금 솟은 것입니다. 이 말은 남편을 하늘보다 높이 받들라는 말입니다.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면 자기도 하늘처럼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자는 순종함으로 행복합니다. 순종함으로 자기 존재가 올라갑니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왕노릇 하고 싶어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만은 왕으로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회사에 가서는 멸시 당하고, 무시 당해도 가정에서만은 높은 자리에 세워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는 자기 아내를 사랑하므로 연합하라고 말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8) 자기를 희생한다는 말은 자기 이기심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살면서 날마다 자기를 별세시켜야 합니다. 자기 희생이란 어렵고 하기 싫은 일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했을 때 여자가 잘못했을지라도 남자가 먼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머리됨의 원리입니다. ”그래도 내가 남자인데...” 하면서 목에 힘주고 있으면 머리됨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교인들과 함께 기도원에 가는데 우리 식구와 무슨 얘기를 하다가 제 자존심에 상처가 와서 마구 화를 냈습니다. 원래 제가 제 집 식구를 사랑하다가 존경하는 단계까지 갔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한신교회를 개척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제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가 저를 설득해서 개척하자고 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위대하고 또 나를 복되게 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단계를 넘어서 존경하는 단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으로 존경스럽게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추켜 세워주어서 그랬는지 자기도 모르게 우쭐거리면서 매사에 집에서도 무슨 얘기가 나오면 잘못한 것은 다 나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어떤 때는 속이 아려도 너무 존경해서 제가 참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기도원에 가면서 무슨 얘기가 나왔는데 내가 안했는데 잘못을 돌려요. 그래서 제가 화를 냈더니 운전하는데 마구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논두렁 길을 가는데 사고 나겠어요. 그렇다고 내가 자존심이 있지 잘못했다는 말은 못하겠어요. 그래도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자동차를 세우라고 하고는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사랑하는 여종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이 종을 용서하소서. 제가 오래 참지 못하고 화낸 것을 용서하여 주소서.” 먼저 기도를 하고 나니까 잘못했다고 말하기가 쉬워요. 그래서 ”여보, 내가 잘못했소” 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랬더니 자동차가 제대로 가요. 그렇게 하고 기도원에 가서 설교를 하니까 설교가 잘되요. 아내는 연약한 그릇인데 괴롭혀놓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면 내가 어떻게 설교하겠습니까 제가 그때 느낀 것은 남자는 자존심상 잘못했다는 말을 하기가 참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잘못한 것 없이 자기가 잘못했다고 죽지 않습니까 잘못은 다 우리들이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내가 잘못했다.” 그럽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을 보면서 격에 맞지 않는 말을 해도 남편이 옆에서 참고 들어주면서 같이 가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정생활은 모든 것을 다 수용하고 사는 것입니다. 미국의 컬럼비아 바이블 컬러지 학장이었던 맥컬리킨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의 부인이 침해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곁에 있으면 안정감을 가지고 편안히 있고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집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불안해서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학장직을 여러해 더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장직을 사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이제 나는 아내의 곁으로 돌아간다. 42년전 결혼서약을 할 때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 아내를 돌볼 것을 이미 약속한 것이기에 나는 그 서약을 지키고 싶다. 내 아내가 40년동안 나를 돌보아 주었기에 이제는 내가 그 사람의 빚을 갚기 위해 아내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아내에 대한 사랑과 기쁨 때문에 나는 그의 곁으로 간다.” 그가 학장직을 사임하고 이 선언을 하면서 가정으로 돌아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학장으로 있을 때보다 더 그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학장직을 몇 년동안 수행하는 것보다 자기 아내의 침해를 곁에서 돕기 위해서 가정으로 돌아간 위대함이 전 세계 남편들에게 더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만남이며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신비를 몸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될 때 남편은 예수님처럼 위대하게 되며 아내는 예수와 함께 사는 위대한 천사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사도 바울이 결혼을 말하다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게 된 것은 부부의 연합은 결국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목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천국의 모형이며, 가정생활은 천국 생활을 연습하는 것이 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종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라고 천국가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가는 문턱까지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땅에서 충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들어가서는 아들도, 종도 없고 신부만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날 때 주님의 영광이 내 영광이며, 주님의 영화로운 인격이 내 인격이며, 주님의 찬란한 빛이 내 빛이 되어 일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곳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되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듯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부부를 머리와 몸으로 비유한 것은 나눌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머리와 몸은 생명의 관계입니다. 신랑이 머리요, 신부가 몸이 되는 것은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나, 어떤 위험이라도 갈라놓을 수 없는 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해 준 것입니다. 부부의 연합은 참으로 천국을 이루는 신비이며, 이것은 행복을 얻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실 때 내가 그 품속에서 안식을 얻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종을 거느리고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삼고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신부를 만날 때만 하나님은 행복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므로 하나님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종노릇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이 외롭습니다. 내가 아들 노릇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이 외롭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전부로 삼고 하나님이 나의 신랑이 될 때 하나님은 행복해 하십니다. 하나님의 행복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내가 행복해지는 것으로 끝나지 마십시오. 주님을 신랑으로 모시게 되면 주님이 나 때문에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오 주님이시여, 나를 신부 삼아 행복하소서.” 이것이 바로 신앙의 극치입니다. 우리가 가정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신비의 경지에 이르러서 천국을 끌어 땅으로 안고 땅의 삶이 천국으로 이어가는 위대한 신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정에 계시는 주님/ 잠22:6, 엡6:4-/ 2001-05-23
가정에 계시는 주님 잠22:6, 엡6:4- 작년 2월에 프랑스에서 유학중인 학생들을 위한 KOSTA(Korean Student Abroad) 집회에 참석했다가 영국에 잠시 들러 볼 기회를 가졌었습니다. 금요일 오전까지 프랑스 집회를 마치고, 금요일 오후 비행기로 런던에 도착해서 영국에서 유학중인 학생들에게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저녁에 설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일날 파리에 있는 친구 목사님 교회에서 설교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일날 새벽 비행기로 다시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결국 영국에는, 2박 3일이라고는 하지만 약 40여 시간 정도 밖에는 머물지 못했었고, 그나마 학생들의 집회 때문에 영국을 관광한 것은 겨우 토요일 낮시간 정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저에게 참으로 좋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제가 참으로 훌륭하게 본 것은 저들의 질서의식이었습니다. 오래된 도시였기 때문에 대로(大路)도 많이 있었지만, 작은 소로(小路)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차들이 좁은 소로를 다니는데도 교통이 물 흐르듯이 소통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갈래길에서 차가 서로 만나게 될 경우, 오른쪽에서 오는 차가 먼저 간다는 원칙이 있는데, 그 작은 원칙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차들이 사고 없이, 그리고 머뭇거림 없이 잘 소통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작은 일이었지만 그것이 곧 영국의 문화수준을 나타내 보여 주었고, 그것은 경제수준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서 우리가 반드시 극복해야만 할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 곳에서 목회하시는 목회자들을 통하여 영국은 아직도 신사도가 살아 있는 훌륭한 나라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 영국은 그러한 나라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영국에서 앞날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느끼기가 어려웠습니다. 훌륭한 문화수준과 교육제도에도 불구하고 저들에게서 희망을 느낄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저들의 가정 때문이었습니다. 영국도 다른 유럽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성적인 개방으로 인하여 가정들이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만 해도 양쪽 부모가 다 자기 친 부모인 경우가 오히려 많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혼과 재혼을 자주 하게 되기 때문에 아빠가 바뀌던지 엄마가 바뀌는 경우가 많고,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까지 바뀐 아이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부모 자신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보다 심각하고 중요한 상처는 어린아이들이 더 많이 받지 않겠습니까? 나라의 희망과 미래는 그 나라의 청소년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와 미래의 희망인 청소년들이 어려서부터 깊은 상처를 받고 마음에 병이 들었으니, 그 나라가 앞으로 어떻게 희망이 있는 나라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문제는 비단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프랑스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나라가 대부분 성적으로 타락하여 가정이 파괴되고 있었으며, 그 결과 많은 청소년들이 올바르게 교육받지 못하고 타락하고 방탕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점을 생각해 볼 때 저들이 지금은 세계를 움직이는 강국이요, 또는 부국일런지 모르나 장차는 그렇게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면에서 세계를 보이지 않게 움직이고 있는 강력한 나라입니다. 인구 수를 감안해 볼 때 가장 많은 비율의 노벨상을 탄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저들이 그렇게 세계를 움직이는 강력한 민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가정을 잘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가정교육은 가히 세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화를 추구하려고 하면, 먼저 가정을 잘 다스려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할 수 있고, 훌륭한 인물과 인재들이 배출될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운명을 생각할 때, 자녀교육처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자녀교육을 생각할 때 반드시 생각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교육을 위하여 가장 좋은 학교는 가정이며, 자녀교육을 위하여 가장 좋은 교사는 부모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세계의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자녀교육에 열심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가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뛰어난 교육열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하고 있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녀를 교육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학교는 가정이며, 가장 좋은 교사는 부모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어린이주일에 하나님의 전에 나아와 예배하는 사랑하는 여러 교우님들 모두가 이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 여러분의 가정이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학교가 되며, 여러분이 가장 훌륭한 교사가 되시어 여러분의 가정학교에서 이 나라와 민족,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훌륭한 인물과 인재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와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아이들을 위한 가장 좋은 교사와 학교라고 할 때, 우리는 또한 자녀들을 위한 가장 좋은 교과서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양성한다고 할 때 가장 좋은 교과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중히 여기는 말씀 중의 하나인 신명기 6:4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에 기록할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바로 가장 중요한 교육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귀담아 들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세상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며 물질과 시간을 아끼지 않습니다. 영어와 수학을 더 잘하게 하기 위하여 학원을 보내며, 많은 비용을 감당하면서 과외를 시키기도 합니다. 또 악기나 미술과 같은 재능교육을 위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투자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에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더 잘 배우게 하기 위하여 학원을 보내고, 과외를 시켜 보신 분이 계십니까? 저희 교회의 집사님 중에는 전도사님을 가정교사로 모시고 아이들에게 성경을 공부시키는 분이 계십니다. 만일 우리 모두가 그러한 정신을 가지고 자녀들을 교육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자녀들을 훌륭한 인물과 인재로 양육하게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가정이 가장 중요한 학교요,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부모가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스승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한 교과서라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교회에서만 만나려고 하였고, 아이들의 교육도 학교와 교회의 선생님들을 통해서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가정은 학교와 교회가 되지 못하였고, 부모는 아이들의 진정한 스승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가장 좋은 교회는 가정 같은 교회이고, 가장 좋은 가정은 교회 같은 가정입니다. 가정에 주님을 모시고 교회 같은 가정을 꾸미실 수 있기를 바라며, 여러분들이 자녀의 스승이 되셔서 좋은 학교 같은 가정을 꾸미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의 소중함/ 시128:1-6/ 어버이주일설교/ 2010-05-08
가정의 소중함 시128:1-6 오늘은 여러분에게 세 가지의 질문을 드리면서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각 자가 세 가지의 질문에 정성껏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시 한 번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꼭 해보고 싶고, 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두 번째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시면서 현재 나의 삶속에서 버리고 가고 싶은 한 가지를 선택하라며 무엇을 버리겠습니까? 세 번째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서 다시 태어나도 이것만은 꼭 그대로 가지고 가고 싶은 것을 한 가지 선택하라면 무엇을 선택 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을 중심으로 우리들의 생각을 서로 나누어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서로의 아픔과 기쁨이 무엇인지, 그리고 각 자가 소망하고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고 각 자가 질문에 대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세 가지의 질문에는 각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인 나에게 다시 한 번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해 보고 싶은가? 라는 질문에는 나의 삶의 열정과 자기실현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질문입니다. 두 번째 질문인 내가 다시 한 번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현재 삶속에서 절대로 가져가고 싶지 않는 한 가지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는 지금 나의 삶을 가장 지치게 하고, 삶의 에너지를 빼앗아 가는 것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것은 내가 개선해 나가야 하고 치유되어야 할 아픔입니다. 세 번째 질문인 내가 다시 한 번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현재 삶속에서 그대로 가져가고 싶은 한 가지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는 현재에 나의 삶의 에너지와 기쁨을 공급하는 것에 대한 질문입니다. 내가 감사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말씀드린 세 개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셨습니까? 한 번 나의 삶의 자리를 점검해 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우리의 대답이 바람직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을 하나님 안에서 다시 한 번 정리하며 새롭게 세울 수 있기 바랍니다. 저도 집단 상담 강의를 들으면서 이 세 가지 질문을 받았을 때 나름대로 대답을 찾아봤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태어난다면 버리고 싶은 것과 다시 그대로 가지고 가고 싶은 것에 대한 답으로 저의 가정을 말했습니다. 저의 가정 안에는 제가 다시는 짊어지고 싶지 않은 아픔이 있습니다. 반면에 저는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가정을 그대로 가지고 가고 싶은 감사와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은 가정과 관련된 설교를 하면서 저의 가정사에 대해 조금 말씀을 드리며 말씀을 나눠 보려고 합니다. 저의 가정사에는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이북 분이시고, 이북에 가정을 이루고 계셨던 분이셨습니다. 남한에 일을 보러 오셨다가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고향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가족과 헤어졌습니다. 저희 어머님은 김 씨 성을 가진 어른신과 결혼을 하셨고 삼남매를 두시고는 사별하셨습니다. 저의 아버님과 어머니는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재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분 사이에 삼 형제를 두셨습니다. 그래서 저희 형제는 김 씨 성을 가진 삼남매와 서 씨 성을 가신 삼형제를 합쳐 육남매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왜 우리 형제들이 성이 다른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저희 어머니 세대는 전쟁으로 인해 아픈 가정사를 가지고 있는 가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장하는 저희들에게는 그 아픔과 갈등이 커다란 상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희 육남매는 함께 추모예배를 드리다가 어느 순간부터 형님들 간의 협의 아래 따로 추모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명절에 대전에 내려가면 두 가정을 방문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어렸을 때는 영문도 모르고 두 가정을 방문하며 \'왜 큰 아버지들은 같이 추모예배를 드리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아픈 가정사를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말귀를 알아들을 정도로 자랐을 때 아이들과 함께 2박 3일간 지리산을 종주하며 저희 가정사의 아픔을 설명했습니다. 그제야 아이들이 명절에 큰 아버지들이 따로 추모예배를 드리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저는 집사람을 사귀다 프로포즈를 하면서 저희 가정사의 아픔을 다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수용한 후에 결혼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함께 생활하다 보면 기쁨도 있겠지만 아픔과 갈등이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저희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시면 상가에 가족들의 이름이 기록될 때 성이 다른 가족들의 이름이 기록될 것입니다. 그것도 가족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아픔입니다. 한 가족을 이루면서 이런 아픔이 만들어 내는 상처와 아픔은 삶에 있어서 커다란 짐이었고 아픔이었습니다. 아마 저희 아이들이 성장해서 결혼을 한다면 가족들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큰 아버지들의 성이 다른 이유를 자부에게 설명하는 아픔을 갖게 될 것입니다. 저는 아픈 가정사를 가지고 살아가면서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가정사의 아픔은 최소한 3대를 간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아픔, 그리고 그 자녀의 아픔, 그리고 그 손자의 아픔입니다. 최소한 3대입니다. 그것도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 아픔의 가정사를 잘 정리하고 바르게 세울 때 최소한 3대입니다. 아픔의 가정사를 바르게 세우지 못하고 회복시키지 못하면 그것은 대를 이어 아픔은 이어집니다. 아픔의 가정사를 바르게 세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픈 가정사 안에서 성장하면서 가정에 대한 잘못 사고와 행동의 유전자들이 그대로 자녀들에게 전수되어 자녀들도 아픈 가정사를 만들어갈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의 가정사의 아픔을 나름대로 다시 세우며 회복시키기 위해 참으로 힘든 시간들을 많이 가졌습니다. 아픔의 상처도 있었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다시 한 번 태어난다면 가지고 가고 싶지 않은 것이 바로 아픈 가정사라고 말할 만큼 힘든 짐이었습니다. 그것은 전쟁이라는 민족의 아픔 속에서 만들어진 아픈 가정사이지만 그것은 저의 성장과정에 있어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멸시켰던 아픔이었습니다. 그 아픔을 극복하고 회복시키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 생활은 저에게 힘이었고 삶의 원동력이었습니다. 반면에 다시 한 번 태어난다면 현재 그대로 가지고 가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저는 머뭇거림 없이 지금의 가정이라고 대답합니다. 저의 생각에 저희 아내과 아이들이 동의할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저의 큰 아이를 낳고 아내와 아이와 함께 식탁에 앉아 식사 기도를 할 때 저는 가끔 나에게도 이런 가족이 있다라는 생각에 너무 감사해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새벽 제단에 앉아 기도를 들릴 때마다 성도 여러분과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나라와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서 기도한 후에 마지막으로 우리 가정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어머니에서부터 아이들까지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 가정을 이루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제가 가정과 관련 된 말씀 가운데 한 폭의 그림처럼 마음에 그리고 있는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그런 가정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만들기를 원합니다. 제가 성도님들의 가정을 심방하면서 종종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가장 귀한 유산 가운데 하나는 ‘나도 나중에 결혼해서 우리 부모님처럼 살고 싶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부의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부모님처럼 살고 싶지 않다’ 가 아니라 ‘나도 나중에 우리 부모님처럼 살고 싶다’ 고 말할 수 있는 가정의 모습을 만들어 가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면 가정에 소홀해 진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어느 어른들은 가정을 내팽개치고 교회에만 다닌다고 욕을 합니다. 그것은 믿는 우리들이 잘못한 것입니다. 바른 신앙생활은 가정을 더 잘 돌보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항상 강조합니다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가장 마지막에 만드신 것이 가정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시고 혼자 있는 것이 보시기 좋지 않아 그의 몸의 일부를 가지고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두 사람이 연합해 하나가 되어 가정을 이루게 하시면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축복하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최초의 축복은 가정을 향한 축복이었고, 가정을 통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구약의 천지 창조에 있어서 가정은 모든 창조의 마침표였습니다. 신약은 예수님을 통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세우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후에 세우신 유일하신 기관이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시면서 다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을 중심으로 세우신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의미를 성경을 중심으로 묵상해 보면 교회는 가정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룬 가정이 혈육을 중심으로 한 가정이라면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영을 중심으로 한 가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노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며 누가 내 형제냐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너희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가 아니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하나가 되는 가족이며 가정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가정을 통해서, 신약에서는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가정과 교회의 중심에는 공통적으로 하나님이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들이 자녀를 키울 때 자녀들에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어리석은 질문을 합니다. 그 질문은 모두에게 갈등과 상처를 만드는 질문입니다. 질문을 받은 아이들은 갈등을 합니다. 잘못 말하면 자신에게 불이익이 닥치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들의 대답은 엄마, 아빠 중에 한 사람에게는 아픔이 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지혜롭게 대답합니다. ‘엄마, 아빠 둘 다 좋아’ 아이들이 생존하기 위한 본능적인 대답입니다. 그런 아이에게 얄궂게 다시 묻습니다. ‘그래도 엄마, 아빠 가운데 누가 더 좋아’ 이는 선택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신앙 생활하는 가운데서도 합니다. ‘가정이 더 중요한가. 교회가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똑같이 중요합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교회가 평안할 때 가정이 평안할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가정이 평안할 때 교회가 평안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신의 역할에 있어서 어느 영역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하는 상황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기관의 소중함이 아니라 역할에 있어서의 소중함입니다. 저는 그런 고민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교회 보다는 가정에서의 역할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목사가 무슨 말이냐 하실지 모르지만 교회의 역할보다는 가족에서의 역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시오. 절대로 교회의 역할에서 벗어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만약 가정과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역을 하는 가운데 역할을 선택해야 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교회에서의 역할은 내가 못하면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목사의 역할을 못하면 다른 목회자가 부임해서 그 역할을 할 수 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에서 남편의 역할과 아버지의 역할, 아들의 역할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장로의 역할, 권사, 안수집사의 역할, 교회 일꾼으로서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러나 그 역할을 내가 못하면 다른 사역자들을 통해서 그 역할을 대신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의 역할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역할을 내가 제대로 하지 않으면 가정에는 치유되기 힘든 깊은 상처가 대를 이어 만들어집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림과 같은 가정의 모습이 나옵니다. 특히 1절에서 진정한 행복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가정의 행복은 세상의 부와 명예,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시작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이 행복하기를 그 무엇보다도 원하고 계십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부모로서 자녀들을 돌아봅시다. 또 한 자녀로서 부모님들을 돌아봅시다.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가장 소중한 것임을 고백할 수 있는 가정으로 세워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을 시편 128편에 나오는 말씀처럼 천국의 모형으로 만들어 가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족/ 엡6:1-4/ 김학현 목사/ 어버이주일설교/ 2003-05-08
가족 엡6:1-4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대부분 어버이주일의 주제는 정하여져 있습니다. “효도”지요. 오늘은 효도라는 주제에 국한하지 않고 가족 전체를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가정의 행복은 어떤 한 두 사람이 잘함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위치에서 충실할 때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잘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자녀들에게 부모를 주 안에서 사랑하고 공경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땅히 그런 자녀에게는 형통하는 복과 장수를 선물하시겠다 하십니다. 이어 부모는 자녀를 화나게 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자녀에게 복을 주시겠다 하신 것 같이, 부모에게도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없습니다. 부모의 내리사랑은 당연하다는 말일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행복한 가정의 부모와 자녀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칩니다. 행복한 가정에는 좋은 부모와 좋은 자녀가 있습니다. 그들을 일컬어 「가족」이라 합니다. 성경에서 가족의 몫을 잘 감당한 분들을 살피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효도- 나오미의 며느리 룻 가정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덕목은 바로 효도입니다. ‘효도’라는 말은 동양의 덕목입니다. 서양에서는 ‘효도’라는 말이 따로 없고 그냥 ‘사랑’이나, ‘공경’, ‘순종’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다 보니 서양에서 들어 온 기독교를 불효의 종교라고 하는 말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일 뿐입니다. 성경은 그 어느 동양의 고전 못지않게 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가르칩니다. [1-3절]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첫 계명은 바로 효도입니다. [출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성경의 위인들은 대부분 효도한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그 중 한 사람, 룻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모압으로 엘리멜렉 집안이 이사를 와서 맞은 두 며느리가 룻과 오르바였습니다. 엘리멜렉과 두 아들이 죽고,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앉혀놓고 자신은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테니 며느리들은 친정으로 가라고 합니다. 오르바는 그 말대로 갔고, 룻은 시어머니를 좇아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룻1:16,17]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이후에 이삭을 주워 어머니를 공양합니다. 나중에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고 오벳을 낳았습니다. [마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그는 다윗 왕의 할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내조-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나, 이삭의 아내 리브가, 야곱의 아내 라헬, 아굴라의 아내 브리스길라 등 모두 훌륭한 내조자들입니다. 그러나 나발의 아내이었던 아비가일의 내조는 그 중 백미입니다. [삼상25장]에 보면, 다윗의 득세하면서 광야에서 굶주린 자신의 병사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나발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그 때 나발은 갈멜에서 아주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한 마디로 거절합니다. 어디에서 온 자들인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자신의 재물을 낭비할 수 없다는 게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세를 읽지 못하는 아둔함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다윗은 화가 나 400명의 용사를 이끌고 나발에게 갑니다. 이 때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이 나와 다윗 일행을 맞으며, 자신의 양떼를 지켜준 울타리가 바로 다윗의 군인들이었음을 고백하면서 잘못을 빌고 먹을 것을 준비하여 주고 선대합니다. [삼상25:31]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그녀는 나발과는 달리 시대와 주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지혜로운 대처로 남편과 재물이 무사하였습니다. 외조- 마리아의 남편 요셉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을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인 요셉의 도움 때문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요셉이 이 사건을 소문내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하나님은 요셉의 성품을 알기에 그와 정혼한 여인이지만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로 택하셨을 것입니다. 요셉이 마리아가 잉태한 것을 알았을 때 반응은 어떻습니까? [마1: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예, 비록 부정한 여인으로 알았지만 소문내지 않고 파혼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지금과는 다른 그 때의 상황을 감안할 때 참으로 놀라운 생각입니다. 그러나 천사가 그에게 마리아 데려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 아이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임을 알렸을 때, 그는 최고의 내조자가 됩니다. [마1:24,25]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사자가 전해준 대로 합니다. 또한 마리아가 순결성을 지키도록 배려합니다. 이름도 예수라고 가르쳐준 대로 부릅니다. 우애- 야곱의 아들 요셉 요셉은 형들에게는 악한 감정을 가질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하다가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종살이와 무고한 옥살이를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득세하고 난 후 형들을 만났을 때 형들에게 앙갚음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형제애를 발휘합니다. 형제간에 우애하는 것은 우리네 미덕이기도 하지만, 성경의 원리입니다. [롬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또, [벧후1: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신앙인은 경건한 삶과 더불어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런 모범을 보인 사람입니다. 야곱이 죽자 형들은 요셉이 자신들과 가족을 해할 것이라 생각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창50:19,20]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요셉은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형제들을 용서하고 우애를 돈독히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형제간 불화한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순종- 고넬료의 가족들 [행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비록 이방군대의 백부장이지만 온 가족이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온 집으로 더불어”라는 말에 유념해야 합니다. 물론 고넬료가 좋은 사람이어서 모든 가족이 그를 따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아버지의 말을 안 듣는 자식이 얼마나 많습니까? 고넬료의 가족은 모두 고넬료가 하자는 대로 기독교 신앙을 소유하였습니다. 나중에 베드로를 초청할 때도 이견을 제기하는 가족이 없습니다. 행복한 가족의 전형적인 모습을 이 가정에서 발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한 가정의 덕목은 효도, 공경, 순종, 형제우애, 아내 사랑, 남편 사랑 등입니다. 여러분의 위치가 어떻든 이런 덕목들을 갖추시기 바랍니다. 가족은 혼자 잘한다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가족 성원이 각자의 위치에서 이런 덕목들을 각각 갖출 때 행복합니다. ‘가족’이란 숭고한 이름으로 여러분을 한 식구 되게 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한 시도 잊지 맙시다. 잘났든 못났든 한 가족으로 엮어주신 하나님의 숭고한 섭리가 있음을 아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가정의 창시자는 하나님입니다. 가족 성원의 구성도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아담에게 하와를 가족으로 준 분은 하나님입니다. 가족의 거룩한 사명을 잘 감당함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거절해서는 안 될 사랑/ 마22:1-14/ 어버이주일설교/ 2010-05-08
거절해서는 안 될 사랑 마22:1-14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좋은 부모라면 자녀를 위한 좋은 계획들을 여러가지로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언제 자녀를 가지면 좋을까 하는 계획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기를까를 생각합니다. 어떻게 교육을 시키면 좋겠다. 결혼을 언제쯤 시켰으면 좋겠다 괜찮은 젊은이를 보면, 내 며느리나 사위 감이 아닐지 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이 부모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여러분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진정 우리를 이 세상에 지으시고 영혼의 부모이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어떨까요? 우리를 위한 일들을 계획하고 인도하고 계심을 믿습니까?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장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 아름다운 계획 가운데 가장 큰 대사는 혼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혼인이 이루어지면, 잔치를 베풉니다. 잔치가 돌잔치가 있고, 회갑잔치가 있고, 칠순 잔치가 있지만, 결혼잔치가 제일 흥겨운 까닭이 바로 대사라 이루어진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아들의 혼인 잔치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분의 감동적인 초대 소식을 듣습니다. 오늘 말씀 안에서 이 비밀스런 혼인 잔치 초대 사건을 바로 이해함으로 부모님과 사랑,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이해하는 주일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혼인잔치에 초대하시는 사랑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우리는 잔치에 초대받은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상 깊은 초대를 잊지 못합니다. 우리를 잔치에 초대하는 사람은 귀하게 생각할 때 초대합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초대합니다. 잔칫집을 빛낼 것으로 생각하여 초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잔치에 초대받을 때 기쁩니다. 특히 귀한 분이 초대할 때 더욱 기쁩니다. \\\'아, 이 귀한 분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초대하였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기쁨이 있습니다. 그에 걸맞는 옷을 차려입고 잔치집에 나아갑니다. 잔치 중 가장 큰 잔치는 자녀 혼인 잔치입니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사랑이 절정을 이루는 곳입니다. 그래서 자녀 혼인에 부모가 물질을 아끼지 않습니다.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어제(2004,5,8)은 김상률 군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김영해 목사님께서 좋은 카드를 보내주시고 다시 전화를 주시고 그렇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인 줄 압니다. 예수님께서 증거하시는 천국은 이런 잔치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어떤 임금\\\'은 잔치를 베푸시는 주체자,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잔치에 시중 들고 있는 종들은 선지자와 사도와 같은 주의 종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고 그 왕국의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님의 가족에게 주신 가장 큰사랑은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인정하시고 아들의 잔치에 초대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잔치에 초대되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기쁨이요 감격입니다.. 온 우주의 주인께서 에덴을 허락하시기 위해 우리를 초대하시는 이런 큰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말씀하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이렇게 초대받은 자의 마음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면 생동력이 있습니다. 똑같은 지역을 하루에 5-6번 운전하는 흑인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 흑인기사하고 얘기를 하게 되어서 똑같은 지역을 5-6번 운전합니다.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지루하지 않습니까? 왜요? 오히려 그는 되물었습니다 처음에 운전할 때는 바하마 군도를 여행하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는 것과 같은 생각으로 운전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멕시코 연안 카리브 해의 \\\'캔쿤\\\'이라는 지역을 여행한다고 생각하고 운전한다고 합니다. 지금은 몇 번째입니까? \\\"지금은 파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인사할 때도 마치 파도를 타고 있는 것처럼 인사를 한다고 합니다. 천국 잔치에 초대받은 사실을 알고 그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자에게는 생활에 이런 감격이 있습니다. 폐결핵으로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는 20대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극도의 절망감에 몸부림치다가 예수는 나의 소망이시다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남은 시간을 주께 맡기고 헌신하자 라고 생각을 바꾼 다음에 빈민굴에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생활하였습니다. 이 청년에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로부터 50년을 더 살게 되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사선을 넘어서』를 써 지구상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고귀함과 희망을 깨우쳐준 일본의 성자 가가와 도요히코입니다. 우리가 잔치에 나아오기를 기다리시고, 모든 좋은 음식으로 준비하셨습니다. 외아들을 주시면서 까지 우리의 모든 장애 되는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초청에 적극적으로 임하여 그 잔치를 기뻐하며 누리는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합니다.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하옵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날마다 넘치옵니다.(543) 2. 초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하나님의 뜻과 다릅니다.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마 22:3). 예수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잔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혼인 잔치는 예비 되었으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초대가 전달되지 않았거나 잘못 전달되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무한한 기쁨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신랑되신 그 임금의 아들에게도 애착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왕자의 고귀한 결혼식에 대해서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혼식을 아예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관심 밖의 일로 여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일 때문에 거절하였습니다. 자기가 새로 산 밭에 가야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상업차 가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어떤 사람은 장가들었다는 이유로 왕의 잔치 초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거절은 이 정도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초대를 전하는 종들에게 잔인한 행동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왕에 대한 적대심을 가지고 왕이 보낸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했습니다(마 22:4-6). 핍박하고, 능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였다는 말씀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서부터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고난을 당한 선지자들을 말할 뿐 아니라, 장차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제자들인 사도들을 핍박하고, 능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할 그날의 예언적인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스데반과 야고보가 사도행전에 보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남은 사도들이 이런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게릴라 콘서트란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여기저기 하루 동안 콘서트의 장소와 내용을 돌아다니면서 홍보한 후, 5000명 정도가 모이면 콘서트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만사를 제껴두고 그곳에 모인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에 모여 온다는 것입니다. 5천 명이 아니라 일만 명도 모인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게릴라 콘서트\\\'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콘서트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몇년 전,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에 우리 고국의 저명한 정치인들이 초대받아 갔습니다. 그들 가운데 거절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도 어떻게도 초대받을 길을 열기 위해서 힘을 쓴 사람도 있는 줄 압니다. 하물며 만왕의 왕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준비를 하고 우리를 너무 존귀한 자로 생각하여 초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초대를 사람들이 거절하였습니다. 나는 이 초대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감격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이 놀라운 초대를 나를 위한 잔치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3. 택함을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제 혼인 잔치는 왕의 기준에 드는 사람에 한정하지 않습니다. 선하지 못한 악인이어도 됩니다. 농사지을 밭도 없고, 장사할 돈도 없어 사거리에서 얼쩡거리는 좀 한심한 사람이어도 좋습니다. 종교적인 지위도 없고 내놓을 선행도 없어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치는 세리나 창기여도 좋습니다. 유대인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우상을 평생 섬겨온 이방인이어도 좋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사마리아에서 땅 끝까지로 확산되는 왕의 초청입니다. 예비 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이 유대인 중에서 응하지 않았을 때, 천국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청함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주인이 보낸 종의 부름에 \\\'나 이제 왔으니\\\' 나아오면 됩니다. 파격적인 초청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 13:46). 동서남북으로 전파되는 우주적 복음 운동의 확산을 가리킵니다. 무차별적 천국 복음운동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러한 신약 복음운동 시대를 가리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고후 6:2). 지금도 이러한 왕의 초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잔칫집 혼인 자리에는 손님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22:10). 노예선 선장이었다가 구원받아 변화된 뉴톤의 말을 생각해 보십시다. 천국에 갔을 때 세가지 사실을 보고 놀랄 것이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당연히 올 줄 알았던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어떻게 저 사람이 왔을까하며 놀랄 것이요, 셋째는 자신이 천국에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만 한가지 예복만은 입고 있어야 했습니다. 임금은 자기 잔칫집에 들어온 손님을 보러 들어왔습니다. 거기서 임금은 뜻밖에도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잔칫집에 초청 받은 자가 예복을 입는 것은 아주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올 경우에는 주인의 잔치를 경멸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그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유구무언이었습니다. 그는 큰 실례를 하였던 것입니다. 옷은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 줍니다. 그래서 군인은 군복을 입습니다. 경찰관은 경찰복을 입습니다. 남자는 남자 옷을 입습니다. 여성은 여성의 옷을 입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든 예복을 입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두 사람이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여행에 지쳐 있었습니다.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마침 집 한 채를 발견했습니다. 들어가보니 아무도 없는 빈집이었습니다. 다행히 천장에 과일이 가득 들어 있는 바구니가 결려 있었습니다.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높은 천장에 매놓은 과일바구니에서 과일을 내어 먹을 길이 없었습니다.뛰어도 안되고 한 사람이 엎드려도 안닿는 지점이었습니다. 배는 고픈데 과일을 보고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화가 잔뜩 난 한 나그네는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렇지. 저렇게 높은 곳에 걸려 있지만, 분명히 누군가 매달아 놓았기 때문에 있는 것 아닌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집 안팎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리고 그 바구니에 미칠 수 있는 사다리를 발견했습니다.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어떤 형편에서 그 집에 들어갔는지 모르지만 그 집의 좋은 것을 누리려면 갖추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번거롭지만 사닥다리가 필요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집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예복이 필요합니다. 와서 자리채워 준 것만도 감사한데 무슨 예복이 필요하냐고 말하면 안됩니다. 어떤 형편에 있다가 왔든지 그것은 본인의 형편이고, 혼인 예식이 행하여지는 잔치에는 예복이 필요합니다. 임금의 명령이 사환들에게 떨어졌습니다. 예복 입지 않은 자의 수족을 결박하라고 하였습니다.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바깥 어두움\\\'은 어디겠습니까? 그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마 22:13). 이렇게 보면,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영적으로 보면, 예복문제는 단순한 옷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의 옷을 의미합니다. 예복을 안 입으면 단순히 쫓겨나는 게 아니라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이 씻음을 받지 못한 자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자입니다(요 3:3, 5-6). 어린 양 예수의 피에 세마포 옷을 희게 하지 못한 자였습니다(계 7:14, 벧전 1:18-19). 이는 AD70년에 역사적으로도 증명되었습니다. 로마는 예루살렘을 불태우고 백만이 넘은 유대인들을 죽였습니다.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유대인들이 받은 하나님의 진노는 예수님께서 가신지 40년이 안되어 성취되었습니다. 천국잔치에 초청을 받은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주인이 베푼 잔치의 풍요함을 누린 택한 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4) 마무리하는 말 1930년대 대공황이 아메리카 전대륙을 휩쓸고 지나가던 때의 일입니다. 일터를 잃은 수많은 사람들은 삶의 의욕을 잃고 절망의 늪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붉은 색 머리로 인하여 레드로 불리는 제니, 그는 어릴 때 승마를 배울 만큼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1930년대의 경기 공황으로 생계조차 이어갈 힘이 없게된 부모님이 경마장에 맡기고 떠나버려 고아처럼 외롭게 자란 승마사입니다. 승마사라지만, 제대로 훈련을 받은 적도 없어서 몇 차례밖에 대회에 나가본 적이 없습니다. \\\'비스킷\\\', 이는 경주용 말 이름입니다. 그러나 태생은 좋았을지라도 체구가 경주용으로는 너무 작고 버릇도 야생마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이 두 존재가 좋은 주인(하워드 챨스)과 조련사를 만나 그들의 초대를 받습니다. 감격한 마음으로 주인의 상에 앉게 되고 따뜻한 주인의 배려 가운데 결국 미국 승마계를 제패하는 개가를 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기쁨은 잠깐, 레드란 승마사는 사고로 다리가 부스러지고, 비스킷이란 말은 인대가 상하여 안락사를 시킬 수밖에 없는 처지에 떨어집니다. 기우는 달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처럼 그들의 잘나가던 인생도 마침표를 찍어야 할 형편입니다 인대가 상한 말, 그래서 안락사를 시켜주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되는 그 절망, 사고로 다리를 바삭바삭 부서진 상태에서 겨우 걷게 된 레드란 승마사 이 둘이 치열한 경마세계에서 살아날 길은 없어 보입니다. 아무도 그들에게서 다시 우승이란 행운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서로의 아픔을 이해합니다. 주인의 따뜻한 배려와 보살핌을 받습니다. 그 동안 쉴 틈 없이 달려왔던 경마장을 떠나, 푸른 초장을 절룩거리며 걷기도 하고 그 잔디밭에서 쉼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대가 상했던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던 그 말이 회복되어 초원을 달리게 되고 그 곁에서 절뚝거리며 걷던 승마사 레드는 받침대를 발에 붙이고 말 위에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합니다. 종국에는 자기들과 같이 절망과 좌절의 늪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몸부림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응원 속에 경마장에 다시 섭니다. 그리고 그들의 재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친구 경마사의 격려를 받으며 당당히 우승의 감격을 누립니다. \\\'씨 비스킷\\\'이란 영화 마지막 장면은 이런 문장으로 끝납니다. 우리가 녀석을 치료했던 것이 아니다. 사실은 그가 우리 모두를 치료해준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를 치료해준 것이다 주인에게 택함을 받았다는 것은 이토록 복된 일입니다. 청함을 받은 것만 해도 감사한데 나를 청하신 분의 사역자로 택함을 받았다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 수요일의 설교 제목: 자녀들의 신앙 유형 둘 삼상3장 1.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삽니다. 하나님께서 왜 어린 사무엘을 찾아와 말씀하십니까? 엘리와 그 가문이 망가져 가는데 말씀하셔도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말씀하셨지만 듣지 않으니 어린 사무엘에게라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발람이 망가져 갈 때, 하나님께서 너무 급하니까 나귀를 통해서 말씀하셨던 일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니 내어버려 두십니다. 우리와 자녀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무엇이 이토록 엘리 자녀들을 망가뜨린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그들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 그 안에 생명이 있는 말씀 지으신 모든 것이 이를 통해서 있는 그 말씀 참 빛 곧 사람들에게 와서 각 사람을 살리는 말씀 이 말씀이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들 안에 생명의 말씀이 없으니 공허하고 그래서 제물로 바친 고기라도 갈고리로 찍어 배를 채우려는 영적인 기갈에 빠진 것입니다. 그 안에 말씀이 없으니 육신의 정욕에 빠져 성전에 수종들기 위해 나아온 여인을 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그 고독한 상황 가운데서도 망가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 그 안에 생명이 있는 말씀 지으신 모든 것이 이를 통해서 있는 그 말씀 참 빛 곧 사람들에게 와서 각 사람을 살리는 말씀 이 말씀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찾아오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이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19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나타나실 때 말씀으로 나타나주셨습니다. 21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 우리가 감명깊게 본 영화 가운데 포레스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의 아이큐는 75입니다 양다리에 척추 보조물을 달고 그것을 의지해서 걸어다니는 아이입니다. 그에게는 친구가 없습니다. 항상 놀림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를 사랑하는 어머니로부터 평범하지만 귀한 한 마디의 말씀을 듣습니다. “너는 남과 다르지 않다. 저능아란 단지 다른 사람보다 지능이 좀 모자라는 것 뿐이다.” 그의 학창시절은 불우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제니란 여자애가 있습니다. 그날도 그는 다른 아이들로부터 놀림과 심한 구타를 받습니다. 그때 그는 그를 사랑하는 제니가 외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포레스트, 달려! 무조건 달리란 말야!” 무거운 척추 보조물을 달고 있는 그가 그 아이들로부터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는 제니의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있는 힘을 다해 달립니다. 그러나 온전한 아이들이 더 빠르게 따라잡습니다. 그때, 제니로부터 다시 한번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포레스트, 뛰어 더 빨리 뛰란 말야!” 그 감동어린 사랑의 음성을 듣는 순간 그는 더 힘차게 뛰기 시작합니다. 운명처럼 달려있던 척추 보조물도 떨쳐버리고 번개처럼 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는 어려운 순간마다 뛰게 됩니다. 미식 축구 운동 선수로 뜁니다. 월남 파병 군인으로 뜁니다. 새우잡이 선장으로 뜁니다. 뜀으로 칙칙한 모든 과거를 떨쳐버립니다. 사랑하는 이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이렇게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록펠러 - 9세에 점원노릇을 했던 사람인데 세계 제일의 재벌이 되었습니다. 철저한 십일조 성수주일은 그 어머니가 10가지 유언을 했습니다. 1. 하나님을 친 아버지로 섬겨라 2.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잘 섬겨라 3. 주일 예배를 꼭 본 교회 와서 드려라 4. 오른 쪽 주머니는 항상 1/10주머니로 하아치라 5. 아무도 원수를 만들지 마라 6. 아침에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7. 저녁 잠자리에 들 때는 반성하며 기도해라 8. 아침에는 하나님 말씀을 읽어라 9.남을 도울 수 있을 때는 힘껏 도와라 10. 예배 시간에는 늘 맨 앞자리에 앉아라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듣는 자에게는 삶이 있습니다. 하물며 사랑에 있어 풍성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살리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 는 말씀을 들었을 때, 베드로는 얼마나 복된 인생을 살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음성을 들은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을 듣고 아프리카로 갔던 리빙스턴이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늘 고백하는 나는 어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2. 자녀들은 하나님을 알아야 삽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성막에서 어릴 때부터 봉사하면서 자랐지만 하나님을 알지 않았습니다. 성소 생활에는 익숙하지만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아들에게서 하나님과 전인격적인 교제가 있는 삶과 봉사를 원하셨지만 그들은 그런 하나님의 마음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날고기가 먹고 싶다고 어떻게 갈고리로 여호와의 제물을 멸시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회막문에서 시중 드는 여인과 동침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니까 그렇지요. 어떻게 하나님의 종인 제사장의 말을 듣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 모르니까 하나님의 종의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누구나 자녀들이 잘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왜 말씀을 듣지 않을까요? 부모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습니까? 자기 아버지가 하나님의 종일지라도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수종들겠다 하는 저들을 여호와께서는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스폰지로 이루어진 덩어리가 아무리 돌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의 눈을 속이는 것일 뿐입니다. 어려서부터 사무엘이 하나님을 아는 일은 하나님의 힘으로 자라게 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알지 않은 일은 하나님의 능력이 없는 공허한 스폰지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큰 힘입니다. 큰 가뭄이 왔습니다. 큰 저수지에 담긴 물들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열길되던 물이 다 빠져가고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바닥에서 살고 있는 많은 고기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지를 걷어붙이고 뛰어들어 잡는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속옷 바람으로 고기를 잡는 사람, 굉장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모습을 보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오래된 그물을 꺼내어 손질합니다. 한 나절이 다가도록 손질합니다. 그 부인이 용도를 묻습니다. 사정을 얘기합니다. 그렇게 꾸물거리다가는 다른 사람이 고기를 다 잡아가겠다고 합니다. 해가 질 무렵, 그는 그물을 들고 저수지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직 너무 깊어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곳에 그물을 내렸습니다. 엄청나게 큰 고기들이 그물에 담겨 올라 왔습니다. 저수지 하나도 아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알고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받겠습니까?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6:3) 이 놀라운 하나님은 빨리 알수록 좋습니다. 어떤 부모가 헬라 교사에게 물었습니다. 언제부터 교육을 시켜야 합니까? 몇 살입니까? 두 살입니다. 2년이 늦었네요. 어릴 때부터 하나님 말슴을 듣도록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돌에 어린 새의 발자국이 있는 것을 볼 때 신기합니다. 돌이 굳어지기 전에 앉았던 작은 새들의 발자국이겠지요. 지금은 망치로 때려도 끄덕 없는 돌인데 말입니다. 교육이란 효과가 있을 어릴 때부터 해야 효과가 있습니다. 사비에르는 7세의 어린이를 맡기라 모두 천주교인을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도 어린아이들을 부모에게서 빼앗아 유치원부터 공산주의 훈련을 시킵니다. 토로시가 23명의 성자들을 연구했더니 1명 이외에는 18세 이전에 벌써 은혜를 받아 하나님과 사람 앞에 헌신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26세에 완성했습니다. 모차르트 16살 황제 앞에서 연주했습니다. 헨델 10세에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리빙스턴 23세 아프리카에 들어갔습니다 어떤 영국 기관에서 조사했습니다 548/1000 20세 이전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50세 이후에는 5/1000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체험한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 잘 자라게 되었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적극적인 수용과 순종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들을 자세를 갖춘 사무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위대한 선지가 되어 그 백성을 위험에서 구했습니다. 아이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어여 합니다. 3. 성령을 모독 대신 존중하는 언행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엘리 가문의 죄악은 영영히 사함 받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도 회개치 아니하며 고의적이고 계속적인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제물이나 제사를 무시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일이 됩니다. 그 결과는 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존중하는 사무엘과 하나님께서는 함께 계셔서 말씀하시고 사무엘의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하나님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엘리 제사장의 가정은 영적 암흑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 말씀이 희귀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기가 무척 힘이 들다는 말씀입니다. 이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 장래 일 등에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주신 신적 인도하심이 그들의 삶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무관심했습니다. 성령을 모독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 눈은 어두워졌습니다. 판단력이 흐려졌습니다. 그 백성들의 삶에 웅덩이와 올무를 분별할 수 없는 영적인 소경 인도자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아직 어립니다. 직분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알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겼으므로 하나님의 배려는 크십니다.
건강한 가정을 위하여!/ 골3:12-21/ 어버이주일설교
건강한 가정을 위하여! 골3:12-2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 모든 어버이들에게 평안과 건강과 후대의 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날까지 출입하시고 총기도 있으시고, 치매도 걸리시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젊은 사람들은 부모 공경을 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을 잘 돌보지 못하거나 불효한 사람은 큰일을 못할 사람입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계실 때 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부간에도 서로 있을 때 잘 하시기 바랍니다. 후회하지 마시고! 아내들의 마음을 자주 아프게 하면 여러분의 노년이 편치 않습니다. 어쩌면 아무도 없는 곳에 내다 버릴지도 모릅니다. 피차간에 잘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건강한 가정들을 세우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무튼 저는 오늘 골 3장 말씀을 가지고 어버이 주일에 우리의 가정들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주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1. 좋은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파스칼은 우리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생각들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은 자유이지만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달라진다고 하는 사실을 아십니까? 어제 제자훈련 교재를 보았더니 그런 글이 있었습니다. \"생각을 심으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으면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심으면 인격을 거두고, 인격을 심으면 인생을 거둔다.\" 그 사람의 생각 여부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 내지는 인생을 좌우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말은 참으로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듣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야말로 적어두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고로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느냐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항상 좋은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은 좋은 환경과 조건, 그리고 소유유무가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한 좋은 생각들을 많이 하며 사는 가정이 곧 건강한 가정, 행복한 가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가운데는 아주 좋지 않는 습관이 있습니다. 좋은 기억들은 잘 잊어버리고 반면에 안 좋은 기억들과 생각들 즉 과거에 나를 마음 아프게 했던 슬픈 기억들과 생각들은 좀처럼 잘 잊어버리지를 않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나 봅니다. 여러분이 가정의 행복을 원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아내는 남편에 대한 장점들 즉 좋은 기억들을 오래 오래 간직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부부지간뿐만 아니라 부모 자식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은 부모님에 대한 좋은 생각을 가져야 하고 부모님 역시 자식에 대한 좋은 생각을 가져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럴 때 부모님들도 자녀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자녀들 역시 부모님들을 더욱 사랑하며 마음에 우러나오는 효도를 하게 될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행복한 사람은 행복해 질 수밖에 없는 생각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행복한 생각에 몰두하다 보면 불행해질 겨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금만 생각을 바꾸시면 행복이 보이고 행복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옆에 분에게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생각을 좋게 합시다. 좋은 생각을 합시다.\" 2. 사랑과 존경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가정의 가장 큰 비극은 무엇보다 이 사랑과 존경이 갈수록 땅에 떨어져가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애정과 존경! 이것은 좋은 가정을 세우는데 필수조건입니다. 사랑은 영어로 Love입니다. 이 단어에는 사랑이라는 말과 함께 \"만족케 하다, 배부르게 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이란 상대방을 만족시키며 배부르게 해 주는 것입니다. 남편을 만족케 해주고 아내를 만족케 해 주며 부모님을 만족케 해 주며 자녀들을 만족케 해 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몇 가지로 해석을 했습니다. 첫째는 웃음(Laugh)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이란 함께 많이 웃는 것입니다. 한번 옆에 분을 쳐다보면서 웃어 주시기 바랍니다. 상담학적으로 볼 때 웃음은 만병통치약이라고 합니다. 그런고로 건강한 가정, 행복한 가정이란 온 집안 식구들이 주님의 은혜 안에서 활짝 웃으면서 살아가는 것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삶이나 신앙 생활 속에서 웃으며 산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옛말에도 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지고 한번 화를 내면 한번 늙어진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 주위에 보면 웃어야 할 때 웃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이 사람은 분명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오늘 말씀에 나오는 주님의 평강과 말씀의 은혜 안에서 마음껏 찬양하며 웃을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 마음의 맺힌 모든 아픔과 상처들이 깨끗하게 치유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또 사랑이란 \"O. K\"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사랑이란 서로 서로 O. K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실로 우리가 부부간에 그리고 부모 자식간에 \"아니요\"가 아니라 항상 오케이하며 살아갈 때 거기에 사랑과 행복이 꽃이 피지 않겠습니까? 또한 그렇게 살 때 부모 공경과 효도 역시 오케이하며 더욱 잘 하게 될 줄 믿습니다. 또 사랑이란 승리(Victory)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피차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보통 싸움을 하면 한 사람은 이기고 다른 한 사람은 집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싸움으로 부부나 부모 자식 사이에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부탁을 드립니다. 부부 싸움을 하십시오! 그러나 남편 여러분! 가정건강을 위하여 절대로 이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내 여러분! 가정 건강을 위하여 절대로 이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이기면 나중이 더 좋지 않습니다. 서로 져 주십시오! 그것이 서로 이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참된 사랑이란 서로 양보하고 져 주는 것을 말합니다. 둘 다 져 준다는 것은 사실 둘 다 이기는 윈윈((win-win)입니다. 다시 말해서 서로 져 주는 여기에 진정한 승리! 즉 사랑이 무르익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주안에서 서로 낮아져서 양보함으로 이런 사랑의 역사, 승리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 사랑이란 즐기는 것(Enjoy)입니다. 물론 주안에서 엔조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이란 주안에서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함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 일하는 것, 가정 생활을 하고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 이는 주님 주신 은혜와 축복을 즐기고 누리며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웃고, 오케이하고, 함께 승리하고, 함께 주안에서 즐기는 이것이 바로 사랑이며 행복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정이 이런 분위기로 바뀌게 될 때 부모님을 공경하며 효도를 다하는 것이 결코 부담이 아니라 기쁨으로 잘 감당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존경함으로 건강한 가정을 세울 수 있습니다. 사랑과 존경 이것이 가정에서 사라지면 가정은 붕괴됩니다. 사랑과 존경은 가정이라고 하는 건물을 떠받들고 있는 양 기둥과 같습니다. 그러면 존경이 무엇입니까? 서로 세워주고 높여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권위를 인정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남편과 아내사이, 그리고 부모와 자식사이에 차별은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구별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내는 남편을 존경해야 하고 자식은 그 부모를 존경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반드시 남편이 존경받을 만하고 부모가 존경받을 만하기 때문만은 아닌 줄로 압니다. 잘났든지 못났든지 하나님께서 가정에 남편으로 세워주셨고 그리고 부모님으로 세워 주셨기 때문에 무조건 존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무시하면 그것은 곧 들어 누어서 침을 뱉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 침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부디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가져서 우리 가정을 건강한 가정으로,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가정으로 만들어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칭찬과 격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다 칭찬을 먹고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남자들은 자존심과 칭찬을 먹고삽니다. 우리 아내들은 이 점을 잘 기억하셔서 적극적으로 활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은 칭찬을 하고 격려하려고 해도 그 사람의 약점과 섭섭한 감정이 되살아나서 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을 합니다. 아마도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피차 좋지 않은 삶의 태도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한다고 그 사람이 쉽게 그 잘못을 고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로 인하여 먼저는 내 마음이 상해야 하고 그 사람의 마음에 상처로 남게 될 터이니 이중으로 고통을 가져오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정말 조심해야 하고 기도 준비를 많이 해서 해야 할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칭찬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장로님들은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하시는 분들입니다. 참 좋은 성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책망과 칭찬을 할 때에 어느 경우가 더 효과적인가 하면 칭찬 쪽이라는 것은 말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욕을 하고 때려도 고쳐지지 않던 버릇이 칭찬을 하니 저절로 고쳐지는 예는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서로 장점을 찾아 칭찬하며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심리학자는 칭찬은 사랑의 기술 가운데 가장 으뜸이라고도 합니다. 칭찬은 사람을 만드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칭찬 한 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달라지게 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돈은 사람을 잠깐 기쁘게 하지만 칭찬은 사람을 평생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칭찬은 귀로 먹는 보약이요 우리에게 행복한 삶과 건강한 가정을 세우는 비결입니다. 건강한 가정을 위하여 남편을 칭찬하시고 아내를 칭찬하시고 자녀들을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칭찬보다 더 귀한 것은 격려라고 하는 것입니다. 칭찬 중에 칭찬이 격려입니다. 왜냐하면 칭찬은 잘한 것을 중심으로 하는 말이라고 한다면 격려는 잘 못한 것에 대해, 실패한 것에 대해 위로해 주며 용기를 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고 자란 자녀는 결코 잘못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칭찬보다 격려가 우리 개인과 가정 속에 더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고로 우리 주변에 어려움을 만난 가족이나 성도들이 계시거든 한번 찾아가셔서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내가 사는 길이며,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말할 수 없는 격려로 용기와 힘을 북돋우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이 더욱 건강하고 행복해 지고, 우리 교회도 가정 같은 교회가 되어 행복을 주는 교회로 발전해 나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수용과 감사입니다. 수용이라는 말은 내가 현실적으로 고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여러 병원에서 의사로부터 똑같이 아주 중요한 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면 마음 아픈 일이지만 이럴 때에 이 사람이 행복해 질 수 있는 비결은 어서 빨리 자신이 그 병을 앓고 있는 자라는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가르쳐 \"수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변화들에 대해서 쉽게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원망이 나오고 불평이 나오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이 수용의 자세를 가질 때에 우리 마음에는 말할 수 없는 평안이 찾아오고 또한 거기에서 문제 해결의 방법을 얻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모든 삶의 부분 특별히 인간관계의 부분에서 이 수용의 자세를 배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남편이 아내를 결단코 고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물론 아내 역시 남편의 나쁜 면들을 고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또한 자식이 부모의 성격을 고칠 수 없고 부모 역시 자식을 고칠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곧 수용인 것입니다. 왜 집안이 시끄럽고 싸우고 다툽니까? 고칠 수 없는 것을 고치려고 쓸데없는 에너지를 쏟아 붓기 때문에 탈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불필요한 일입니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수용의 자세를 가지게 될 때! 우리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평안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여기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불평하는 마음이 바뀌어 감사로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용이 잘 이루어지는 곳에 감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수용과 감사가 이루어지는 가정이 건강한 가정이요 행복한 가정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건강하기 위해서 이제부터라도 서로 수용하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처음부터 행복한 가정은 없습니다. 좋은 가정도 없습니다. 행복이 좋은 환경과 조건과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만들어야 합니다. 건강한 가정을 위하여 노력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왕이면 좋은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꿈보다 해몽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과 존경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칭찬과 격려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쓸데없이 고치려고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시고 주님께 맡기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여러분의 가정이 건강한 가정! 행복한 가정이 될 줄 믿습니다. 그리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견고한 울타리 /시128:1-4, 엡6:1-4
견고한 울타리 /시128:1-4, 엡6:1-4 2009-08-18 15:12:59 read : 199 옛날 어느 부자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아주 값비싼 구슬 하나를 그의 옷 속에 넣고 꿰어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꼭 네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또 가졌던 돈이 떨어졌을 때 이 구슬을 꺼내서 팔면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거야.”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 아들이 성장해서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러 나라를 둘러보니까 계획에 없는 곳까지 가게 되었고 많은 노잣돈이 들었습니다. 결국 주머니에 돈이 다 떨어지게 되고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지꼴이 되어서 구걸하며 연명하여 겨우겨우 집까지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 돌아오자 아버지가 이 아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네 옷 속에는 이렇게 귀한 구슬이 있는데 왜 이걸 모르고 고생하고 돌아왔느냐?” 그리고 옷 속에 있는 구슬을 꺼내 보여주었을 때 그 아들은 그 구슬을 보고서야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주 가치 있고 존귀한 것이지만 그것을 잊고 살아갈 때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잊어버리는 것 중의 하나가 가정의 소중함입니다.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 줄 모릅니다. 가정이 얼마나 가치 있고 존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 가정이 소중하고 존귀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설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만들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가정을 세워주셨습니다. 가정이 건강하게 설 때, 교회도 건강하게 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정만큼 귀한 것은 없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자녀들을 낳고, 그 자녀들은 성장하면서 가정을 통해서 인격을 배우고 삶을 배우고 하나님을 배우고 신앙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한 아버지들은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가정에 돌아왔을 때 진정한 쉼과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모두가 가정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재충전을 갖게 되고 활력을 가지고 내일을 준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소중한 것입니다. 어느 화가가 세상의 가장 평화로운 모습을 화폭에 담기 위해서 이곳저곳을 다 가봤지만 진정한 평화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몇 달 후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빠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이 뛰어나와서 “아빠!” 부르며 품에 안깁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들어와서 정성껏 준비한 식탁에 마주 앉아서 음식을 먹을 때 화가는 깨달았습니다. ‘이게 진정한 평화구나!’ 하면서 그 가정이 식사하는 모습을 화폭에 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가정을 울타리와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울타리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풀이나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서 그 가정의 경계를 정해놓은 것이 바로 울타리입니다. 예전에 시골에 가면 벽돌담 보다는 이런 울타리가 많이 있었습니다. 울타리 안은 그 가족만을 위한 공간인 것입니다. 세상에 나가 공부도 하고 학교도 가고 직장 생활도 하지만 그 가정의 울타리 안으로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울타리 안에서 쉼을 경험하고 행복은 경험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격려하며 용서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그 가정의 울타리 속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 가정이란 울타리가 자꾸 금이 가고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너지기 시작한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가정이란 울타리가 무너질 때에 우리 자녀들은 보호받을 수가 없습니다. 가정의 울타리가 없다면 동네의 지저분한 개들이 다 몰려들어서 집 정원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정이란 울타리가 너무 소중한 것입니다. 이 가정이란 울타리를 잘 지키고, 무너지지 않는 울타리를 세우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가정의 울타리가 무너지지 않으려면 첫째, 하나님 잘 섬기는 가정이 되어야합니다. 오늘 성경본문 시편 128편 1-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가정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 길을 따르는 가정은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 잘 섬기는 민족이 복을 받듯이 여호와를 높이고 그를 예배하고 경외하는 가정이 복을 받습니다. 복되고 무엇을 하든지 형통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잘 섬기는 가정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정의 주인이라면 그분이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은 결코 무너지거나 허물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의 가정은 바로 그런 가정입니다.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이웃을 잘 구제하는 가정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모셔 와서 말씀을 들을 때, 온 가족과 종들까지 그 사도 앞에 앉아서 말씀을 청종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 그 가정의 울타리는 견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수아 23장을 보면 여호수아는 백성을 향해서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오늘 너희 섬길 자를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그 자신과 그의 가정은 하나님만을 섬기겠노라고 담대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가정은 오직 하나님만을 선택하고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가정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민족은 무너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잘 예배하는 가정은 허물어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가정을 존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가정을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 링컨』이라는 유명한 책이 한국에서도 번역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습니다. 그 책을 기록한 링컨의 전기 작가는 이런 말을 합니다. 링컨은 위로 보나 아래로 보나 어디로 봐도 대통령이 될 조건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될 재목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가정배경도 좋지 않았고, 모든 것에 그리 능통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었던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링컨이 10살 때 어머니 낸시가 세상을 떠납니다. 세상을 떠나면서 어린 링컨에게 유산을 주는데 그것이 바로 손에 익은 성경책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성경인데 이것을 너에게 준다. 링컨아! 이 성경을 잘 읽고 이 성경 말씀대로 네가 산다면 넌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단다.” 이렇게 어머니는 링컨에게 유언을 남겨 주었습니다. 링컨이 그 성경을 열심히 읽고 실천할 때에, 미국에서 최고의 대통령으로 꼽히는 대통령, 세계인의 존경받는 미국의 16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그것이 가정이 견고해지는 조건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하나님을 잘 섬김으로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울타리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무너지지 않는 울타리가 되려면 화목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시편 128편 3절에 보니까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포도열매가 가을에 탐스럽게 맺히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남편의 눈에는 아내가 탐스럽게 맺힌 포도열매처럼 너무 사랑스럽다는 말입니다. 금술도 좋고 화목한 부부라 할 수 있으며 이런 가정이 견고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네 식탁에 둘러앉은 어린 자식들은 마치 감람나무처럼 사랑스럽다고 말합니다. 감람나무는 올리브나무인데 그것은 관상용으로도 보기 좋고 그늘도 되고 기름으로도 쓸 수 있어서 가정에 유익을 줍니다. 그 어린 자녀들이 식탁에 둘러앉았는데 너무너무 사랑스럽습니다. 이것이 바로 화목한 가정입니다. 여러분 우리 가정이 화목한 가정이 되고 행복한 가정이 될 때에 그 가정은 견고한 울타리가 될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선입니다. 시편 133편에 보니까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의좋게 지냅니다. 가정에 웃음이 있습니다. 가정에 찬송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가정입니까? 여러분! 많은 물질이나 세상적인 어떤 출세가 가정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언 15장 17절에서는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찐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채소를 먹고 가난해도 화목한 가정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잠언 17장을 보니까 “마른 떡 한 조각만 놓고도 화목하는 것이 고기가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른 외적인 조건이 부족하더라도 여러분의 가정에 행복이 있고 화목이 있다면 여러분의 가정은 최고의 가정이라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화목하는 조건은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만 잘하면 되는 것입니다. 저를 한번 따라해 보십시오. “내 잘못입니다 내 탓입니다.” 이러면 됩니다. 어느 가정 거실에서 누가 물을 먹다가 컵을 바닥에 두었습니다. 다섯 살 된 손자가 그것을 모르고 뛰어가다가 컵을 발로 차서 온 거실이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가정은 정말 화목한 가정입니다. 그것을 보고는 할머니가 나오더니 “아이고 큰일 났다 어떡하냐? 내가 할 일도 없는데 이것 좀 치워 놓을걸. 이건 내 잘못이야. 애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라.”하고 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랬더니 며느리가 나와서 “어머니 아니에요! 제가 보살펴야 했는데 이것은 제 잘못이 커요.” 또 물을 먹었던 장본인인 아들이 나와서 “아니에요 어머니, 제가 물을 먹고 텔레비전을 본다고 옆에 놓았는데 제가 치워야 하는 것을 치우지 않아서 그러니 이것은 제 잘못이에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손자가 “아니에요 할머니, 그것은 제 잘못이에요 제가 뛰어다니지 않고 걸어 다녀야 했는데 뛰어가다가 발로 찼잖아요. 제가 잘못했어요.” 이 가정은 화목하지 않을래야 화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 자기의 잘못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러한 일들이 또 다른 가정에 일어난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세상에, 며느리는 뭐하느라고 자식새끼하나 살피지 않고 애가 발로 차서 이 난리를 만드냐, 여기가 무슨 축구장이냐! 애새끼는 눈도 없느냐 그것을 왜 발로 차느냐” 이렇게 난리가 나고 그 일 때문에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한 판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들은 이편도 못 들고 저편도 못 들고 가정 분위기가 험악해질 수도 있습니다. 잘못한 원인이 내게 있다고 할 때에 가정은 화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마음으로 가정을 섬겨서 여러분의 가정이 화목한 가정이 되고, 견고한 울타리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 무너지지 않는 울타리는 부모 공경하는 가정입니다. 육신의 부모를 잘 공경하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 우리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명령입니다.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여기에서 순종이란 말은 부모님의 말씀을 잘 귀담아 잘 청종하는 것입니다. 요즘 부모님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섭섭하게 생각하는 말 중에 첫번째가 어떤 말이냐 하면 “엄마는 몰라도 돼요!”이런 말입니다. 컴퓨터에 대해 아빠가 무엇을 하다가 “이것이 뭐니? 이것 좀 알고 있니?” “아빠는 그런 것도 모르세요?” 하고 핀잔을 주는 것입니다. 또 어느 아빠가 가정의 주간도 되고 해서 아이들과 대화를 하려고 하는데 아이의 입에서 한마디가 툭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언제는 우리에게 관심도 없더니?” 이것은 부모에게 참 상처가 되는 말입니다. 순종하는 것은 부모님의 말씀을 잘 귀담아 잘 듣는 것입니다. 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공경이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다음으로 부모를 높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부모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고 즐거움을 드리고 물질로 부모님을 봉양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 부모님들께 정기적으로 용돈을 드리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부모님이 밖에 나가서 자장면 한 그릇을 먹으면 “오늘 점심 내가 내지!” 이렇게 큰 소리를 내야지. 점심 드시면 조마조마해서 “아이구, 내가 돈이 없는데 어떡하나?” 이러면 부모에게 잘못을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되, 용돈도 충분히 드려서 어디 가서 남에게 대접할 수 있는 그런 자격이 되게 할 때에 자녀로서 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를 공경하는 가정에 하나님은 복을 부어주신다고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화가 없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약속의 말씀은 신실하셔서 어김이 없습니다. 또 한 가지로 자녀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 또한 변함이 없습니다. 자식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는 어머니의 희생, 아버지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유명한 소설가운데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 나라가 온통 혼란스럽고 모두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고통당할 때 한 부대가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가에 한 중년 여인이 세 명의 아이들과 함께 버려져있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너무 굶주려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상사가 그것을 보고 빵 한 덩어리를 꺼내서 여인에게 건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나 지켜봤더니 그 여인이 빵을 세 조각으로 똑같이 나누어서 세 아이에게 하나씩 주어서 먹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는 사병이 상사에게 묻습니다. “상사님! 그런데 저 여자는 누구일까요? 자기는 먹지도 않고 아이들에게만 빵을 나누어 주네요.” 그래서 상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넨 그걸 모르나? 보나마나 저분은 아이들의 어머니라네” 자기는 먹을 것이 없어도 아이들에게 먼저 나누어 주는 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가끔 저의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을 때가 있습니다. 삼겹살을 보면 부위에 따라서 조금 딱딱한 뼈가 들어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대개 가족이 먹으면 집사람이 아이들에게는 부드러운 부위나 살을 먹이고 자기는 뼈가 들어있는 딱딱한 부위를 주로 골라 먹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오도독 씹는 이 부위가 더 좋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그렇게 해왔는데 아이들이 다 커서 엄마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진짜로 엄마는 살코기는 별로 싫어하고 뼈가 있는 부분만 좋아하는 줄 알았답니다. 그것이 자식들입니다. 또한 그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정말 자녀들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의 마음을 알아드리고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생활 능력이 없을 때 그 부모님의 생활을 보살펴드리는 것이 자녀들의 당연한 도리입니다. 또한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부모에게 효를 다할 때에 내가 네게 복을 줄 것이고 네가 땅에서 장수하고 네가 잘 될 것이라”고 축복의 약속을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효도했던 인물들은 모두 다 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팔 형제 중에 막내이지만 늘 들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일을 누가 하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부모의 말씀에 순종해서 형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감당해 냈습니다. 양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늑대가 찾아오기도 하고 맹수들이 달려올 때마다 그는 무섭지만 도망가지 않고 물맷돌을 던지는 연습을 해서 돌맹이를 가지고 맹수들을 내쫒으면서 양들을 잘 보살폈습니다. 부모에게 효를 다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를 들어서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만이 아닙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지만, 그가 후에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에 그의 아버지 야곱을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제대로 드시기나 하는 걸까?’ 걱정이 되어 바로에게 요청을 했습니다. 좋은 수레를 보내어 아버지와 그의 일가족을 모두 모셔 와서 가까이 모셔두고 아버지께 효도를 다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요셉의 마음을 아시고 그를 축복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며느리 중에 가장 훌륭한 며느리는 역시 룻기서의 룻입니다. 이 여인은 이방여인이었지만 베들레헴에서 이주해온 나오미와 엘리멜렉 가정에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자신의 남편과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이제 두 며느리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데 큰 며느리 오르바는 모압 지역에 남습니다. 그러나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갑니다. 연로한 시어머니를 공경해드립니다. 그 뜨거운 태양빛이 내리쬐는 밖에 나가서 남자들이 추수하고 나면 떨어진 이삭들을 주어 그것으로 양식을 만들어서 어머니를 대접했습니다. 친어머니도 아닌 시어머니를 정성스레 대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룻을 축복 안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룻은 그의 친족 보아스와의 관계에서 낳은 아들이 바로 다윗왕의 할아버지가 되는 축복을 입은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복의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마지막 고통스러운 순간에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그 어머니 마리아를 보고,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합니다. “요한아! 네 어머니라” 그 순간부터 요한이 마리아를 자기 어머니로 모셨습니다. 성경에 소개된 인물들이 하나같이 부모공경, 효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진정한 효도란 부모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모가 나쁜 부모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모님께 효도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모라고해서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부모도 허물이 있을 수 있고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내 생명의 근원인 것입니다. 부모가 있기에 내가 이 땅에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손에 의해서 성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받은 은혜에 대한 그 감사가 인간의 도리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부모의 도리를 모르면 까마귀보다 못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까마귀를 보면 어미 새와 새끼 새가 있는데 나무에 앉아도 어미 새는 늘 위에 앉고 새끼 새는 늘 아래에 앉아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질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다가 새끼 새에게 먹이를 먹여주지만 한참 후에는 이것이 바뀐다고 합니다. 어미 새가 나이가 들어 날지 못하면 새끼 새가 날아가서 먹이를 물어다가 엄마와 아빠의 입에 물어다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반포보은(反哺報恩)’이라고 말합니다. 까마귀도 부모의 은혜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나아주고 길러준 부모의 은혜를 모르면 까마귀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부모의 허물도 덮어줄 수 있습니다. 창세기 9장을 보면 노아는 경건한 인물이지만 하루는 포도농사를 짓고 나서 포도주를 짰는데, 그것을 과하게 많이 먹어서 취하여 대낮에 벌거벗고 누워있었습니다. 둘째 아들 함이 그것을 보고 동네방네 다니며 소문을 내고 자기 형제들에게 가서 흉을 보며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아들 셈과 야벳과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치며 들어가서 아버지의 겉옷을 덮어드렸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노아는 함에 대해서 축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임해서 그 민족을 더 부강하고 번성한 민족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부모의 허물을 덮어주는 그것이야말로 큰 효도 중에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잠언 19장 26절에 보면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쫒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잠언 23장 22절에 보면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특별히 우리 청년들도 같이 예배드리지만 부모님을 잘 모시고 부모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인 것을 여러분이 믿으시기 바랍니다. 2부 예배에서는 교회학교 어린이들과 함께 예배드렸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엄마가 어느 날 철수와 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철수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철수야 너 크면 장가 갈 꺼지?” 철수가 “당연히 가야죠.”라고 대답합니다. 엄마가 “철수야 네가 장가가면 엄마하고 같이 살면 안되겠니?”라고 물었더니 철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하다가 문제가 있다는 듯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한참 후에 철수가 들어와서 하는 말이 “엄마! 아무래도 안되겠어요.” “왜 안되겠니? 왜?” “옆집 영희가요, 안된대요.” 요즘 아이들이 이렇게 영특하답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 교회 젊은이들은 내 육신의 부모에게 효도하고 그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입니다. 공동번역 집회서에는 아주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부모 공경은 자기 죄를 벗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내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부모 공경은 보화를 쌓아 올리는 것 즉 재물을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말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 아비가 늙었을 때에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말아라 그가 설령 노망을 부린다해도 잘 참아내고 네가 젊고 힘 있다고해서 그를 업신여기지 말라 자기 아비를 저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요 어미를 노하게 하는 것은 주님의 저주를 부르는 것이니라”
경건한 어머니 한나 (삼상1:26-28)
경건한 어머니 한나 (삼상1:26-28) http://mission.bz/5143어버이주일경건한 어머니 한나 (삼상1:26-28)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한나가 가로되 나의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제가 어떤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글 속에 나오는 "당신"이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내가 유치원 다니던 시절 밤에 고열로 아파할 때, 그 높은 산동네에서 나를 들쳐 엎고 택시가 다니는 곳까지 쉬지 않고 뛰어 내려와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던 당신…그때 난 보았습니다. 당신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내가 초등학교 시절 반장이 되었을 때, 다음날 빵과 우유를 각각 50개씩 싸와서 반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던 당신, 난 당신에게 짜증을 부렸습니다. 창피하게 학교까지 왜 왔냐고. 그때 난 보았습니다. 나의 그러한 태도에도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당신의 미소를….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보이스카웃 여행을 갔을 때, 당신도 따라 왔습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저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내는 당신. 유난히도 사진 찍는 것을 싫어했던 나는 그런 당신에게 또 짜증을 내었습니다. 그때 난 보았습니다. 당신의 민망해 하는 어색한 웃음을…. 우리 집이 그리 잘 살지 않았던 시절, 내가 그렇게 갈비를 먹고 싶다고 졸라도 사줄 돈이 없으셨던 당신, 하루는 그동안 모으고 모은 돈으로 나에게 갈비를 2인분이나 사주셨던 당신, 그때 난 보았습니다. 집에 돌아와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찬밥을 드시던 당신을…. 내가 삼류 대학에 입학했을 때, 당신은 마음 속으로 실망이 대단히 크셨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기죽을까봐 나보고 잘했다고, 수고했다고 다독거려 준 당신, 그때 난 보았습니다. 당신의 미소 뒤에 숨어있는 서글픈 미소를…. 내가 군대 훈련소에서 병원을 갔을 때, 조교 눈을 피해 몰래 당신에게 전화를 했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에서 뛸 듯이 기뻐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조교의 눈에 들킬까봐 채 1분도 통화하지 못하고 끊어야 했습니다. 그때 난 들었습니다. 전화를 끊으면서 얼른 들리는 당신의 흐느낌을…. 내가 군대에서 고참에게 매일 워커발로 정강이를 채이고 나서 휴가를 나왔을 때, 당신은 내가 잠들어 있는 방에 들어와 내 모습을 바라보시다가 우연히 나의 피고름이 흐르고 퉁퉁 부어 있는 정강이를 보았습니다. 난 자는 척을 하고 있었지만, 그때 난 들었습니다. 당신의 소리 죽여 우시던 그 소리를…. 내가 불혹의 나이가 지나고 당신이 70 먹은 노인네가 되었을 때, 그때도 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 걱정에 항상 마음 조릴 당신의 모습을… 그런 당신을 난 ○○○라 부릅니다." 그런 당신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참으로 위대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뜻깊은 어버이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는 성경 속에 나오는 한 위대하고 경건했던 어머니 한나의 모습을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옛말에 "범이 범을 낳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언제나 위대한 부모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쓰러져 가던 이스라엘을 바로잡았던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사무엘의 배후에는 한나라는 경건하고도 위대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우선 우리가 그 시대의 역사적인 배경을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삼상1:1을 봅니다.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때는 사사시대 말기였습니다. 사사 삼손이 죽고 난 뒤에 이스라엘에는 이렇다할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틈을 타서 이스라엘의 대적이었던 블레셋은 점점 강성해져 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점점 쇠퇴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1절 말씀에 나오는 엘가나는 사무엘의 아버지입니다. 역대기서에 나오는 족보를 추적해 보면 엘가나는 레위의 후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서 레위지파는 바로 제사장 지파였습니다. 특별하게 하나님께 헌신해야 될 사람이 바로 레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엘가나의 가정이 어떠했습니까? 2절 말씀입니다.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엘가나는 두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한나가 본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엘가나는 첩으로 브닌나를 두게 되었습니다. 엘가나는 레위 사람으로서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한 남자 아담과 한 여자 하와를 만드시고 짝지어서 가정을 이룩하셨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가나는 레위 사람으로서 두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 한 가지만 보더라도 그 당시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얼마나 어두웠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홉니와 비느하스는 당시에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름만 여호와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실제는 그들이 어떠했습니까? 넘어가서 2:12을 보시기 바랍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중간에서 제물을 가로챘던 사람들입니다. 더 나아가서 2:22을 보십시다.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짓밟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로 잡기 위해서 한 특별한 인물이 필요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한 특별한 어머니가 필요했습니다. 바로 그 여성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한나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렸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하나님을 진실로 아는 여성이었습니다. 경건한 여성이었습니다. 2:1∼2을 보십시다.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계속해서 한나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기도에서 그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저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진실로 아는 여성이었습니다. 경건한 여성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나의 경건했던 모습을 세 가지 면으로 나누어서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그와 남편 엘가나와의 관계입니다. 둘째,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셋째, 그와 아들 사무엘과의 관계입니다. 한나는 이 모든 면에서 우리에게 참으로 아름다운 경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한나처럼 옆으로는 우리의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또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밑으로는 우리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아름답고 올바른 관계가 맺어지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한나와 남편 엘가나와의 관계를 살펴봅니다. 삼상1:3을 봅니다.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그 당시 실로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였지만 그래도 엘가나는 매년 자기들의 가족을 데리고 실로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경배하며 거기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한나는 믿는 남편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믿는 남편을 가장으로 두었다는 사실은 한나에게 있어서 대단히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는 남편이 믿지 않아서, 또는 아내가 믿지 않아서 이 시간 혼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아픈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계실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자녀들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경건하게 양육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 그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믿는 남편을 가장으로 두었습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뿐만 아니고 7절 말씀을 보십시다.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엘가나가 실로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그 자리에 언제나 한나도 함께 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엘가나가 어떤 남편이었습니까? 시앗을 둔 남편이었습니다. "시앗을 보면 길가에 돌부처도 돌아앉는다." 이러한 옛 속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는 자기 남편 엘가나에게 앙탈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위선자, 당신 같은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당신이 실로로 간다면 나는 벧엘로 갈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앙탈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 남편이 부족하고 허물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한나는 자기 남편 엘가나와 예배드리는 일에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신문에 보면 대통령의 아들들에 관한 좋지 않은 기사들이 계속해서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듣건대 대통령은 천주교 신자라고 합니다. 영부인은 개신교 신자라고 합니다. 신앙이 서로 틀립니다. 그들은 주일이 되어도 함께 한 자리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 아들들을 신앙적으로 바르게 양육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남편에게도 우리의 아내에게도 부족이 있고 허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 만큼은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일이 되면 하나님의 성전에 손에 손잡고 다함께 올라와서 한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는 아름다운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고 엘가나와 한나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일에도 역시 하나가 되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엘가나는 남편으로서 또 아버지로서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들의 필요에 의해서 제물의 분깃을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런데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비록 한나는 아들을 낳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가나는 한나에게 갑절의 분깃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엘가나가 자기 아내 한나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나에게는 남편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한나는 자식을 낳지 못해서 괴로웠지만 또 그 이상으로 더 괴로운 일도 있었습니다. 6∼7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브닌나는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한나에게 심한 멸시와 천대를 보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한나는 브닌나와 다투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아브라함의 첫 하갈을 어떻게 했습니까? 쫓아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마음의 고통을 혼자서 속으로 삭였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8절 말씀입니다.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한나에게는 남편 엘가나의 위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우리 가정에 이런저런 어려운 문제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하나가 되고, 가족들 안에 서로 사랑함과 위로함이 있으면 어떠한 문제라도 우리는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언제나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가족들 상호간에 위로함이 있고 사랑이 있는 복된 모습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한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펴봅니다. 한나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큰 아픔이 있었습니다. 한나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갔습니까? 그는 스스로를 자학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 엘가나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브닌나와 다투지도 않았습니다. 브닌나의 자녀들도 구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있는 문제를 누구에게로 가지고 나갔습니까? 그는 하나님에게로 나아가서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털어놓으면서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다.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제사장 엘리는 성전 기둥 곁에 의자를 놓고서 늘 그 위에 앉아서 지냈습니다. 그의 몸이 너무 비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늘 의자에 앉아서만 지냈습니다.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아들들이 자신의 코앞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했지만 그 사실조차도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그는 늘 의자에서만 앉아 지내야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서 죽었습니다. 아무튼 엘리는 성전기둥 곁에 의자를 두고 앉아있었기 때문에 성전 안의 모습은 환하게 바라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한나가 기도하는 것을 잘 지켜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한나는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와서 기도했습니다. 어떠한 모습으로 기도했습니까? 12절 말씀입니다.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오랫동안 기도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않게 기도했습니다. 소리내지 않고 기도했다고 해서 대충대충 기도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15절 끝부분을 봅니다.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오니." 그는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했습니까? 11절 말씀입니다.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주여,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옵소서. 주여, 나를 생각하시옵소서. 주여, 주의 여종을 잊지 마시옵소서." 무슨 뜻입니까? 결국은 "하나님, 저에게 아들을 주시옵소서. 아들을 주시옵소서. 아들을 주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는 아들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왜 한나가 하나님께 아들을 달라고 간구했습니까? 시127:3의 말씀처럼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상급이요, 축복이라는 사실을 한나는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까? "어쩌다 보니까 나았지요. 다른 사람도 다 낳는데요 뭐." 그런 식으로 우리의 자녀에 대해서 생각하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자녀로 인해서 감격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바라볼 때마다 이러한 감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이다. 너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축복이다. 너야말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상급이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의 자녀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한나가 하나님께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습니까? 브닌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한나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아들을 구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그 아들을 바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는 아들을 구했습니다. 11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자녀를 기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이 그 자녀를 내게 주셨다는 사실을 아직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 자녀는 내가 낳은 자식이기에 앞서서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도 언제나 기꺼이 우리의 자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한나는 하나님 앞에서 정숙한 여인이었습니다. 15∼16절 말씀입니다.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그는 속이 상한다고, 마음이 슬프다고 해서 술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엘리 제사장이 한나가 술 취한 줄 알고 책망했을 때, 한나는 엘리 제사장에게 항변하지도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제사장을 하나님의 종으로 공경했습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자기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아뢸 뿐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정숙하고 덕망있는 여성이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나는 자기가 기도한 그대로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그의 얼굴에 다시는 슬픈 기색이 없었습니다.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이 기도한 그대로 응답해 주실 것을 분명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첫째,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한나는 그에게 아들을 주실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셋째, 한나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 아들을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 아들을 구했습니다. 넷째, 한나는 정결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섯째, 한나는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임을 믿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19∼20절 말씀을 보십시다. "그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한나가 사무엘을 안고서 그의 얼굴을 쳐다볼 때마다, 또 아들 사무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이 아들을 내게 주셨구나!"라는 마음으로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자녀를 바라볼 때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상급이구나!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축복이구나!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한나와 그 아들 사무엘과의 관계를 살펴봅니다. 하나님이 드디어 한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엘가나는 사무엘을 낳고 난 뒤에도 관례대로 매년 그의 가족을 데리고 실로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한나가 어떻게 했습니까? 22절입니다.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한나는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한나는 사무엘을 돌보기 위해서 실로로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물로 귀한 아들을 주셨는데 그렇다면 더더욱 하나님께 나아가서 예배드리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선물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사무엘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 사무엘을 잘 양육하는 것이 자기가 하나님께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역이요, 봉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나는 자기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 보다도 아들 사무엘을 잘 양육하는 것이 훨씬 더 귀한 봉사요, 소중한 사역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남편 엘가나는 어떠한 태도를 보였습니까? 23절 말씀입니다.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 남편 엘가나는 아내 한나의 말에 동조했습니다. 엘가나는 이해심이 많은 남편이었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드디어 사무엘이 젖을 떼었습니다. 아마 사무엘의 나이 약 3세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24절 이후에 보면 한나는 자기가 하나님께 서원한 그대로 아들 사무엘을 데리고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서원대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혈육의 정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께 서원했던 일을 저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던 일이 위대한 신앙이었다면, 한나가 갓 젓뗀 그 아들 세 살밖에 안된 어린 아들을 하나님께 바친 것도 역시 위대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한나와 엘가나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여호와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한나가 자기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해서 아들에 대한 관심이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2:18의 말씀입니다. "사무엘이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더라."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종사했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그 어미가 매년제를 드리러 그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한나와 엘가나는 그의 아들 사무엘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잘 뒷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가 해야될 일입니다. 한나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하나님은 한나에게서 사무엘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받기만 하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한나에게 더 풍성한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무엘 이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해서 괴로워했던 한나였습니다. 그런데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얻게 되었으니까 이것은 기적과 같은 축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랐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돌보아주셔서 잘 자라게 하셨습니다. 2:26의 말씀입니다.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넘어가서 3:19의 말씀을 봅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하나님은 사무엘을 책임지시고 잘 돌보셔서 쓰러져 가는 이스라엘을 바로 잡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의 싸움이 벌어졌을 때 법궤를 들고서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그들은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그들 자신도 전쟁터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비극적인 소식을 듣고서 엘리 제사장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앉아있던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온 가족이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홉니와 비느하스의 어머니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자기도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지 못하고 자기의 아들들을 바르게 키우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수원의 과일이 잘 되고 못 되고 하는 것은 과원지기의 속에 달려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녀가 잘 되고 못 되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책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열 자녀를 키웠다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 속에 믿음을 심어주지 못하면 부모는 헛수고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학·박사 갖추게 만들어 주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심어주지 못한다면 부모로서 책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뜻깊은 어버이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는 경건한 어버이의 본이 되는 한나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모든 부모들도 한나처럼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또 사랑하는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늘 아름다운 본을 보일 수 있는 귀한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쓰러져 가는 이스라엘을 바로 잡았던 것처럼 우리의 자녀들은 경건하게 믿음으로 잘 자라서 부정과 부패와 타락으로 얼룩져 가는 이 사회를 바로 잡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 지도자적인 인물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경건한 어머니 한나(삼상1:26-28)
경건한 어머니 한나(삼상1:26-28) http://mission.bz/5264어버이주일 경건한 어머니 한나(삼상1:26-28)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한나가 가로되 나의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제가 어떤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글 속에 나오는 "당신"이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내가 유치원 다니던 시절 밤에 고열로 아파할 때, 그 높은 산동네에서 나를 들쳐 엎고 택시가 다니는 곳까지 쉬지 않고 뛰어 내려와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던 당신…그때 난 보았습니다. 당신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내가 초등학교 시절 반장이 되었을 때, 다음날 빵과 우유를 각각 50개씩 싸와서 반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던 당신, 난 당신에게 짜증을 부렸습니다. 창피하게 학교까지 왜 왔냐고. 그때 난 보았습니다. 나의 그러한 태도에도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당신의 미소를….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보이스카웃 여행을 갔을 때, 당신도 따라 왔습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저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내는 당신. 유난히도 사진 찍는 것을 싫어했던 나는 그런 당신에게 또 짜증을 내었습니다. 그때 난 보았습니다. 당신의 민망해 하는 어색한 웃음을…. 우리 집이 그리 잘 살지 않았던 시절, 내가 그렇게 갈비를 먹고 싶다고 졸라도 사줄 돈이 없으셨던 당신, 하루는 그동안 모으고 모은 돈으로 나에게 갈비를 2인분이나 사주셨던 당신, 그때 난 보았습니다. 집에 돌아와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찬밥을 드시던 당신을…. 내가 삼류 대학에 입학했을 때, 당신은 마음 속으로 실망이 대단히 크셨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기죽을까봐 나보고 잘했다고, 수고했다고 다독거려 준 당신, 그때 난 보았습니다. 당신의 미소 뒤에 숨어있는 서글픈 미소를…. 내가 군대 훈련소에서 병원을 갔을 때, 조교 눈을 피해 몰래 당신에게 전화를 했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에서 뛸 듯이 기뻐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조교의 눈에 들킬까봐 채 1분도 통화하지 못하고 끊어야 했습니다. 그때 난 들었습니다. 전화를 끊으면서 얼른 들리는 당신의 흐느낌을…. 내가 군대에서 고참에게 매일 워커발로 정강이를 채이고 나서 휴가를 나왔을 때, 당신은 내가 잠들어 있는 방에 들어와 내 모습을 바라보시다가 우연히 나의 피고름이 흐르고 퉁퉁 부어 있는 정강이를 보았습니다. 난 자는 척을 하고 있었지만, 그때 난 들었습니다. 당신의 소리 죽여 우시던 그 소리를…. 내가 불혹의 나이가 지나고 당신이 70 먹은 노인네가 되었을 때, 그때도 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 걱정에 항상 마음 조릴 당신의 모습을… 그런 당신을 난 ○○○라 부릅니다." 그런 당신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참으로 위대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뜻깊은 어버이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는 성경 속에 나오는 한 위대하고 경건했던 어머니 한나의 모습을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옛말에 "범이 범을 낳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언제나 위대한 부모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쓰러져 가던 이스라엘을 바로잡았던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사무엘의 배후에는 한나라는 경건하고도 위대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우선 우리가 그 시대의 역사적인 배경을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삼상1:1을 봅니다.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때는 사사시대 말기였습니다. 사사 삼손이 죽고 난 뒤에 이스라엘에는 이렇다할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틈을 타서 이스라엘의 대적이었던 블레셋은 점점 강성해져 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점점 쇠퇴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1절 말씀에 나오는 엘가나는 사무엘의 아버지입니다. 역대기서에 나오는 족보를 추적해 보면 엘가나는 레위의 후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서 레위지파는 바로 제사장 지파였습니다. 특별하게 하나님께 헌신해야 될 사람이 바로 레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엘가나의 가정이 어떠했습니까? 2절 말씀입니다.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엘가나는 두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한나가 본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엘가나는 첩으로 브닌나를 두게 되었습니다. 엘가나는 레위 사람으로서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한 남자 아담과 한 여자 하와를 만드시고 짝지어서 가정을 이룩하셨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가나는 레위 사람으로서 두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 한 가지만 보더라도 그 당시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얼마나 어두웠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홉니와 비느하스는 당시에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름만 여호와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실제는 그들이 어떠했습니까? 넘어가서 2:12을 보시기 바랍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중간에서 제물을 가로챘던 사람들입니다. 더 나아가서 2:22을 보십시다.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짓밟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로 잡기 위해서 한 특별한 인물이 필요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한 특별한 어머니가 필요했습니다. 바로 그 여성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한나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렸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하나님을 진실로 아는 여성이었습니다. 경건한 여성이었습니다. 2:1∼2을 보십시다.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계속해서 한나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기도에서 그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저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진실로 아는 여성이었습니다. 경건한 여성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나의 경건했던 모습을 세 가지 면으로 나누어서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그와 남편 엘가나와의 관계입니다. 둘째,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셋째, 그와 아들 사무엘과의 관계입니다. 한나는 이 모든 면에서 우리에게 참으로 아름다운 경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한나처럼 옆으로는 우리의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또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밑으로는 우리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아름답고 올바른 관계가 맺어지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한나와 남편 엘가나와의 관계를 살펴봅니다. 삼상1:3을 봅니다.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그 당시 실로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였지만 그래도 엘가나는 매년 자기들의 가족을 데리고 실로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경배하며 거기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한나는 믿는 남편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믿는 남편을 가장으로 두었다는 사실은 한나에게 있어서 대단히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는 남편이 믿지 않아서, 또는 아내가 믿지 않아서 이 시간 혼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아픈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계실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자녀들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경건하게 양육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 그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믿는 남편을 가장으로 두었습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뿐만 아니고 7절 말씀을 보십시다.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엘가나가 실로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그 자리에 언제나 한나도 함께 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엘가나가 어떤 남편이었습니까? 시앗을 둔 남편이었습니다. "시앗을 보면 길가에 돌부처도 돌아앉는다." 이러한 옛 속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는 자기 남편 엘가나에게 앙탈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위선자, 당신 같은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당신이 실로로 간다면 나는 벧엘로 갈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앙탈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 남편이 부족하고 허물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한나는 자기 남편 엘가나와 예배드리는 일에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신문에 보면 대통령의 아들들에 관한 좋지 않은 기사들이 계속해서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듣건대 대통령은 천주교 신자라고 합니다. 영부인은 개신교 신자라고 합니다. 신앙이 서로 틀립니다. 그들은 주일이 되어도 함께 한 자리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 아들들을 신앙적으로 바르게 양육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남편에게도 우리의 아내에게도 부족이 있고 허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 만큼은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일이 되면 하나님의 성전에 손에 손잡고 다함께 올라와서 한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는 아름다운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고 엘가나와 한나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일에도 역시 하나가 되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엘가나는 남편으로서 또 아버지로서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들의 필요에 의해서 제물의 분깃을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런데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비록 한나는 아들을 낳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가나는 한나에게 갑절의 분깃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엘가나가 자기 아내 한나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나에게는 남편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한나는 자식을 낳지 못해서 괴로웠지만 또 그 이상으로 더 괴로운 일도 있었습니다. 6∼7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브닌나는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한나에게 심한 멸시와 천대를 보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한나는 브닌나와 다투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아브라함의 첫 하갈을 어떻게 했습니까? 쫓아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마음의 고통을 혼자서 속으로 삭였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8절 말씀입니다.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한나에게는 남편 엘가나의 위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우리 가정에 이런저런 어려운 문제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하나가 되고, 가족들 안에 서로 사랑함과 위로함이 있으면 어떠한 문제라도 우리는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언제나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가족들 상호간에 위로함이 있고 사랑이 있는 복된 모습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한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펴봅니다. 한나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큰 아픔이 있었습니다. 한나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갔습니까? 그는 스스로를 자학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 엘가나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브닌나와 다투지도 않았습니다. 브닌나의 자녀들도 구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있는 문제를 누구에게로 가지고 나갔습니까? 그는 하나님에게로 나아가서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털어놓으면서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다.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제사장 엘리는 성전 기둥 곁에 의자를 놓고서 늘 그 위에 앉아서 지냈습니다. 그의 몸이 너무 비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늘 의자에 앉아서만 지냈습니다.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아들들이 자신의 코앞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했지만 그 사실조차도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그는 늘 의자에서만 앉아 지내야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서 죽었습니다. 아무튼 엘리는 성전기둥 곁에 의자를 두고 앉아있었기 때문에 성전 안의 모습은 환하게 바라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한나가 기도하는 것을 잘 지켜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한나는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와서 기도했습니다. 어떠한 모습으로 기도했습니까? 12절 말씀입니다.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오랫동안 기도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않게 기도했습니다. 소리내지 않고 기도했다고 해서 대충대충 기도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15절 끝부분을 봅니다.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오니." 그는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했습니까? 11절 말씀입니다.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주여,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옵소서. 주여, 나를 생각하시옵소서. 주여, 주의 여종을 잊지 마시옵소서." 무슨 뜻입니까? 결국은 "하나님, 저에게 아들을 주시옵소서. 아들을 주시옵소서. 아들을 주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는 아들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왜 한나가 하나님께 아들을 달라고 간구했습니까? 시127:3의 말씀처럼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상급이요, 축복이라는 사실을 한나는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까? "어쩌다 보니까 나았지요. 다른 사람도 다 낳는데요 뭐." 그런 식으로 우리의 자녀에 대해서 생각하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자녀로 인해서 감격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바라볼 때마다 이러한 감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이다. 너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축복이다. 너야말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상급이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의 자녀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한나가 하나님께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습니까? 브닌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한나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아들을 구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그 아들을 바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는 아들을 구했습니다. 11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자녀를 기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이 그 자녀를 내게 주셨다는 사실을 아직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 자녀는 내가 낳은 자식이기에 앞서서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도 언제나 기꺼이 우리의 자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한나는 하나님 앞에서 정숙한 여인이었습니다. 15∼16절 말씀입니다.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그는 속이 상한다고, 마음이 슬프다고 해서 술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엘리 제사장이 한나가 술 취한 줄 알고 책망했을 때, 한나는 엘리 제사장에게 항변하지도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제사장을 하나님의 종으로 공경했습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자기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아뢸 뿐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정숙하고 덕망있는 여성이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나는 자기가 기도한 그대로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그의 얼굴에 다시는 슬픈 기색이 없었습니다.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이 기도한 그대로 응답해 주실 것을 분명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첫째,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한나는 그에게 아들을 주실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셋째, 한나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 아들을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 아들을 구했습니다. 넷째, 한나는 정결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섯째, 한나는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임을 믿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19∼20절 말씀을 보십시다. "그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한나가 사무엘을 안고서 그의 얼굴을 쳐다볼 때마다, 또 아들 사무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이 아들을 내게 주셨구나!"라는 마음으로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자녀를 바라볼 때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상급이구나!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축복이구나!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한나와 그 아들 사무엘과의 관계를 살펴봅니다. 하나님이 드디어 한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엘가나는 사무엘을 낳고 난 뒤에도 관례대로 매년 그의 가족을 데리고 실로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한나가 어떻게 했습니까? 22절입니다.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한나는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한나는 사무엘을 돌보기 위해서 실로로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물로 귀한 아들을 주셨는데 그렇다면 더더욱 하나님께 나아가서 예배드리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선물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사무엘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 사무엘을 잘 양육하는 것이 자기가 하나님께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역이요, 봉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나는 자기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 보다도 아들 사무엘을 잘 양육하는 것이 훨씬 더 귀한 봉사요, 소중한 사역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남편 엘가나는 어떠한 태도를 보였습니까? 23절 말씀입니다.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 남편 엘가나는 아내 한나의 말에 동조했습니다. 엘가나는 이해심이 많은 남편이었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드디어 사무엘이 젖을 떼었습니다. 아마 사무엘의 나이 약 3세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24절 이후에 보면 한나는 자기가 하나님께 서원한 그대로 아들 사무엘을 데리고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서원대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혈육의 정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께 서원했던 일을 저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던 일이 위대한 신앙이었다면, 한나가 갓 젓뗀 그 아들 세 살밖에 안된 어린 아들을 하나님께 바친 것도 역시 위대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한나와 엘가나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여호와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한나가 자기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해서 아들에 대한 관심이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2:18의 말씀입니다. "사무엘이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더라."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종사했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그 어미가 매년제를 드리러 그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한나와 엘가나는 그의 아들 사무엘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잘 뒷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가 해야될 일입니다. 한나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하나님은 한나에게서 사무엘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받기만 하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한나에게 더 풍성한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무엘 이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해서 괴로워했던 한나였습니다. 그런데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얻게 되었으니까 이것은 기적과 같은 축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랐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돌보아주셔서 잘 자라게 하셨습니다. 2:26의 말씀입니다.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넘어가서 3:19의 말씀을 봅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하나님은 사무엘을 책임지시고 잘 돌보셔서 쓰러져 가는 이스라엘을 바로 잡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의 싸움이 벌어졌을 때 법궤를 들고서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그들은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그들 자신도 전쟁터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비극적인 소식을 듣고서 엘리 제사장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앉아있던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온 가족이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홉니와 비느하스의 어머니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자기도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지 못하고 자기의 아들들을 바르게 키우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수원의 과일이 잘 되고 못 되고 하는 것은 과원지기의 속에 달려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녀가 잘 되고 못 되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책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열 자녀를 키웠다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 속에 믿음을 심어주지 못하면 부모는 헛수고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학·박사 갖추게 만들어 주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심어주지 못한다면 부모로서 책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뜻깊은 어버이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는 경건한 어버이의 본이 되는 한나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모든 부모들도 한나처럼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또 사랑하는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늘 아름다운 본을 보일 수 있는 귀한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쓰러져 가는 이스라엘을 바로 잡았던 것처럼 우리의 자녀들은 경건하게 믿음으로 잘 자라서 부정과 부패와 타락으로 얼룩져 가는 이 사회를 바로 잡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 지도자적인 인물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이 게시물을...
경로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레19:32
경로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레19:32 중심내용: 경로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설교목적: 어버이 주일을 맞아 경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기 위함. 서론 1. 미국의 웨스트버지니아주의 웹스터라는 곳에 안나 자비스라는 여인이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으로 흰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어느 파티에 참석하였다. 그녀는 모든 자식들이 일 년에 하루만이라도 어머니를 기억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10만 달러의 유산을 기금으로 어머니날 제정을 탄원하기 시작하였다. 2. 그로부터 7년 후 윌슨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때 어머니날 제정을 선포했고 미국 의회는 1914년 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날로 처음 정하였다. 그 때부터 사람들은 살아계신 어머니의 가슴에는 붉은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서는 흰 카네이션을 자기의 가슴에 달았다. 우리나라는 1956년 국무회의에서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정하였고 1973년부터는 아저씨들도 끼워달라고 해서 어버이날로 개정하여 지키고 있다. 3. 아무리 경제가 좋아져도 출세를 하여도 효행을 모르는 자식들이라면 그리고, 어른들이 존대를 받는 사회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미래도 없고 희망도 없는 나라가 되고 말 것이다. I. 어른들을 공경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v32). A. 본문 1. 오늘 말씀에 의하면 센머리 앞에 일어서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어른들을 공경하라는 것이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부모님의 은혜를 모른다면 너의 친구가 되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다. 2. 다시 말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이 좋은 친구도 생기고, 세상에서도 존경받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친구를 사귀고 중요한 일을 맡기려고 할 때 어떤 사람을 써야 할까? 절대적인 법칙이 있다. 3. 어른을 알아보는 사람, 한 걸음 더 나가서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을 친구로 사귀고 그런 사람들을 중요한 자리에 일을 시키면 틀림없다는 말이다. 마틴 루터는 그의 대요리 문답에서 우리의 부모란 네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4. 낳아준 부모, 나를 가르쳐준 선생님 부모,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내 영적인 생활을 지도하는 목사 부모이다. 이들 네 종류의 부모는 모두가 다 오늘 본문 성경이 말하는 센머리 곧 공경하여야 할 어른들을 말하고 있다. B.적용 1.例)일본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집수리를 하기 위해 벽을 뜯었다. 일본 집벽은 \"오가베\"라고 해서 흙을 바르긴 하지만 그 안에 얼기설기 나무를 대어 만들기 때문에 벽 안에 공간이 있는데, 그런데 뜯다보니 벽 틈에 도마뱀 한 마리가 대못에 꼬리 윗부분이 찍힌 채 살아 있더라는 것이다. 2. 주인이 깜짝 놀라 살펴보니 그 대못은 10년 전에 그가 집을 지을 때 박았던 것이었다. \"도대체 옴짝달싹 못하는 공간 속에서 10년 동안이나 어떻게 살아 왔나\"싶어 넋을 놓고 바라만 보는데, 때마침 도마뱀 한 마리가 먹이를 물고 기어 들어와 움직이지 못하는 도마뱀을 먹이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벽 속에 갇혀버린 도마뱀을 위하여 또 한 마리의 도마뱀이 10년이란 긴 세월동안 먹이를 물어 나른 것이다. 3. 세상에는 불가사의한 일이 적지 않다만 도대체 정이라고는 있을 법도 하지 않은 냉혈동물인 도마뱀이 일이년도 아닌 십여 년을 갇힌 도마뱀을 위해 희생한 이것을 사람인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여러분 이 두 마리의 도마뱀은 어떤 관계일까? 연인일까? 부부일까? 그것도 아니면 친구 사이일까? 십년이란 긴 세월로 미루어 생각해 볼 연인이나 부부라기보다는 어미와 새끼의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4. 갇힌 도마뱀이 어미였는지 새끼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동물일지라도 엄연히 어미와 자식 간에는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 이 사랑을 모른다면 사람이랄 수 있겠는가? II. 효자가 되어야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는 성도가 된다(v32). A. 본문 1.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어른만 공경하라고 하지 않고 이어서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어르신을 공경하는 것과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똑같은 원리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2. 눈에 보이는 부모나 어르신들을 공경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섬기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이는 부모님을 잘 섬기고 어르신들을 잘 공경하는 것을 보면 그 성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또한 잘 섬기는가 아닌가를 알 수 있다. 3.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분들은 다들 효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백세에 난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이삭은 나이가 대략 17세였다. 17세의 혈기 왕성한 아들 이삭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바칠 각오를 하였다. 4.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부모님께 순종하는 이삭을 죽이시지 아니하시고 숫양을 미리 예비해 두셨다가 이삭대신 번제로 드리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이런 여호와이레의 축복으로 인하여 이삭은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형통한 축복을 받았다. 5. 그런 반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항상 아버지 다윗의 근심이었고, 슬픔이었고, 결국 아버지를 반역하고 왕이 되려 하였다가 끝내는 비참하게 죽었다. 눈에 보이는 부모와 어르신을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임을 꼭 명심하자. B. 적용 1. 옛날에는 조손겸상(祖孫兼床)으로 경로의 덕을 밥상머리에서 가르쳤었다. 할아버지가 숟가락을 들기 전에 들어서는 안 되고, 찬에 손을 대기 전에 대서도 안 되고 맛있는 별식은 떠주기 전에 손을 대선 안 되고..하는 것들을 식사자리에서 먹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배웠다. 2. 이렇게 하고 나면 노인이 얼마나 지엄한가를 뼈에 스미도록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밥상에서 뿐 아니라 만사를 자기 위주로 자라 놓으니, 노인 앞에서 겸양해야 하는 기본이 정신적인 자질 속에 생겨날 리가 없다. 3. 그런 아이들 앞에서 노인은 그저 육체적으로 무력한 존재로만 보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노약자석에 앉지 말라는 가르침을 수용하지 못할 뿐 아니라 기분이 상했다는 이유로 노인을 층계 아래로 떠밀어 절명하게 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제 방향으로 가고 있지를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4. 우리가 노인들을 생각하면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나도 언젠가는 노인이 된 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10년이란 세월이 강산도 변하는 긴 세월이라고 하지만 지나놓고 보면 눈 깜짝할 시간일 뿐이다. 5. 그렇게 20년만 지나면 30대가 50대가 되고 40대가 60대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후에 내 아이들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내 부모님께 효를 다해야 하는 것이 자식 된 도리이다. 젊음을 다 바쳐 키워 놓은 후에 늙었다는 이유로 소외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서러움이다. 6. 자식에게보다 부모에게 최선을 다하자. 돌아가신 후에 흘리는 눈물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위, 아래를 분명하게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성경적이요 신앙적이며 사람이 갖추어야 할 기본이다. 7. 냉수 한 모금 마시는 데에도 위아래가 (장유유서가)있는 것이다. 이 우선 순위는 노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런 질서가 지켜지는 사회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미래가 행복한 것이다. 모두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말씀이다. 결론 1. 어버이 주일이다. 부모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어버이를 생각해 볼 수 있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란다. 2. 효를 통한 축복이 여러분의 것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경로사상과 신앙/레19:32/어버이주일설교/2006-06-21
경로사상과 신앙 레19:32 (레19:32)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 나는 여호와니라!” 18세기의 영국의 유명한 문필가 사무엘 존슨(Sammuel Johnson)이 어느 여름날, 비가 막 쏟아지는데도 복잡한 장터에서 홀로 몇 시간이고 서 있었습니다. 사람이 지나가면서 인사를 해도 인사도 받지 않고, 말을 걸어도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서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비를 맞고 서 있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내가 어렸을 때에 바로 이 근방에서 아버지께서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님이 몸이 아주 좋지 않으셔서 저에게 하루만 시장을 나가 주기를 바라셨지만, 어릴 적 헌책 장사를 하시는 아버지의 일을 부끄럽게 여겨 간절한 청을 거절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아버지께서 아픈 몸을 이끌고 장터에 나가신 것이 무리를 했던 탓인지, 몸이 약해져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불효한 일이 생각 나서 무덤 앞에 꿇어 엎드려 통곡해도 시원치 않아 그 옛날 불효를 범했던 이 자리에 와 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효도는 반드시 때가 있습니다. 효도와 불조심은 때가 늦으면 후회막심입니다. 돌아가신 뒤에 황소를 잡아 제사지내는 것은 살아 계실 때 닭 한 마리 잡아 드리는 것만 못합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에 그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잠 23:25, 골 3:20). 옛날 어르신들이 역사적으로 아픔과 어려움을 당하시면서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상급을 노래하시면서 인생이 순례자임을 고백한 노래가 있습니다. 어르신들이 많이 부르셨던 찬송을 통해 우리들도 이 땅에서 인내할 수 있는 믿음과 나는 순례자임을 알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볼 수 있는 소망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찬미예수 496장(나는 순례자), 491장(노래하는 순례자)를 같이 부르시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자연스러운 열매는 이웃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의 기본은 부모의 존경인데 본문은 부모에 대한 공경의 보다 넓은 의미인 노인 공경에 대한 언급입니다.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할 열매가 노인을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 사회는 노인들을 정성껏 모시기보다는 하나의 부담스러운 부류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비 생산적인 부류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경로의 사상에는 많은 가르침이 있어왔고, 많은 노인들이 존경을 받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중에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담긴 깊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기를 바랍니다. 1. 경로사상과 신앙의 관계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본문의 말씀속에서 우리는 먼저 경로 사상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사이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경로사상은 신앙의 일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많은 사람들이 경로사상과 효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당신의 어머님을 제자들에게 돌봐달라는 부탁의 말씀은 지금도 마음을 진하게 합니다. 특별히 구약 성경에서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하는 모습을 보면 더욱 효도와 경로사상이 신앙의 일부임을 알게 됩니다. 성경에는 많은 부분에서 경로사상과 효에대한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육신의 부모에게 잘하지 않고는 보이지 않는 천상의 부모에게 잘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십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노인을 공경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서술형과 명령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서술형은 설명형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잘 이해하고 깨달으면 마음의 평안을 얻고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명령형은 명령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행하면 반드시 복을 받고, 불순종하고 거역하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하는 말씀은 타협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인 것입니다. 노인과 부모님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죽을때까지 자식을 위하여 몸을 희생하며 소진하다가 떠나는 것입니다. 마치 가시고기처럼 자신의 몸을 희생시켜 자식에게 주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까기 자식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나이가 70대 이상인 사람들은 세계대전을 두 차례 경험한 분이며, 경제공황과 실업과 가난과 많은 암울한 남들과 어려운 시절을 보내신 분들이십니다. 지금의 어르신들은 절대적인 환경적 어려움가운데서도 넉넉히 이겨나가셨던 세월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수고와 그분들의 노력이 과거에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들의 현제의 모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넓게 어르신들의 노고를 기억해야 하며, 그 분들의 수고를 보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폭넓게는 노인들의 수고이며, 좁게는 부모님들이 땀흘임이기도 합니다. 부모님과 노인들은 그 자체로서 존경을 받아야 하며, 공경을 받을만 합니다. 특히 나를 나아주시고, 나를 길러주신 부모님은 효도받을 자격이 넉넉히 있기 때문입니다. 한 어머니가 자식을 낳아 기른다고 하는 것은 오만간장 일천뼈골이 다 늘어나고 녹아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붉은 피를 먹고 살았고 세상에 나와서는 흰 피를 먹고 살았습니다. 지금 내혈관에서 뛰고 있는 피는 내 피가 아니라 우리 부모님이 주신 피인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내 생명의 제2창조자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특별히 신앙인들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며 노인들을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2. 효도를 하고 경로사상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의 본분입니다. 길가다 냉수 한그릇 떠주는 이에게도 감사하는데 모든 것을 다 주신 부모님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짐승과 다를게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가시나무고시처럼 되어 버린 부모님을 위해 우리는 효도와 더불어 봉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봉양이람 받들어 모신다는 말입니다. 자식들을 위해 수고하다가 기력이 없어진 부모들과 노인들을 위해 자녀들이 최선을 다해 봉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성장과정에 많은 사랑을 쏟다 부워주신 부모님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힘이 약해졌을 때 그 공로를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의 힘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적인 일로 보지 말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옛말에 `백유읍장\'이란 말이 있습니다. 효성이 지극한 `백유\'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가끔 종아리 때리며 교훈, 하루는 종아리를 맞는데도 아프지 않아 아버님 기력이 쇠함을 느껴 백유는 아버님 기력이 쇠해진 걸 서러워 하며 그 매를 들고서 하루종일 울었습니다. <백유읍장>, 부모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은혜를 감사할 줄 알면 이런 행동이 가능한 것입니다. 3. 효도하면 반드시 복을 받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첫째 윤리로 효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효는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기본적인 질서라고 강조합니다. 이 질서를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출애굽기 20:12절에서 나타나 있듯이 효도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님의 좋은 유산을 받을 줄 알면 반드시 복을 받습니다. 1930-50년, 만 30년간 세계 최고의 부를 누린사람이 록펠러입니다. 그는 돈을 많이 번 사람으로도 유명하지만 정승처럼 좋은 곳에 많이 쓴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젊은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대학만해도 12개를 지었습니다. 그중에 시카고대학은 유명한 학교입니다. 그 대학출신의 사람들중에 52명을 노벨상을 받게 한 학교입니다. 지금도 그 학교는 29명의 노벨상을 받은 교수들이 학생들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는 시카코대학을 세우고, 또 부인과 더불어 대학교내에 교회를 지어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신문기자가 “20여년동안 세계의 부를 누리고 있는데 비결이 무엇입니까?” 록펠러는 말하기를 “나는 부모님께서 가장 큰 유산을 물려주었소. 내 나이 여섯 살이 되었을 때 부모는 나에게 바른 경제관을 주었소. 십일조를 가르쳐 주셨던 것이 내가 부를 쌓을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라고 하면서 그는 부모의 신앙적 유산 때문에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하였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는 자는 이 땅에서도 잘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미국의 7대 대통령 안드류 잭슨은 어머니의 가르침에 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날마다 성경을 읽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잭슨은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백화점 왕 와나메이커 역시 부모님의 교훈을 따른 사람이었습니다. 와나메이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사랑을 제일 먼저 가르쳐 주신 분이 어머니였고, 나에게 기도를 제일 먼저 가르쳐 주신 분도 어머니였으며, 내 영혼에 밝은 등불을 켜 주신 분도 어머니였고, 행복을 가르쳐 주신 분도 어머니였습니다.” 신앙과 부모님을 공경하고 봉양하는 것, 신앙과 경로사상은 필수적입니다. 이것은 신앙인들에게는 더욱 간절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 주일을 통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센 머리 앞에서 일어나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는 말씀을 기억하셔서 나를 낳으신 부모님뿐 아니라 우리 나라를 낳으신 노인들에게 부모님을 공경하듯 공경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