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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겔37:15-22, 마5:23-24/ 광복절설교/ 2008-08-15
1+1=1 겔37:15~22, 마5:23~24 이상익(시인/ 성균관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겸임교수) 1. 1945.8.15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민족자주에 의한 해방이 아니었습니다. 2차대전 후 세계질서 재편과정에서 ‘패전국식민지’는‘ 승전국의 전리품’으로 처리되면서 남쪽엔 미군이 북쪽엔 소련군이 들어오게 되었고 따라서 그 후 해방의 벅찬 꿈은 미.소 열강의 신탁통치미명하에 분단으로 깨어지고 결국 동서냉전체제의 희생양 되어버렸습니다. 분단은 6.25의 동족살상의 장으로 되었고 남북체제는 군사문화와 안보 이데올로기 강화로 인권, 자유가 유보, 유린된 채 극단적 적개심만 남북 형제간에 조장되어 이어져 오게 되었습니다. 미.소 주권 하에 대외적으론 종속, 대내적으론 군사독재체제가 형성되고 이것은 구조 악으로 화해 분단의 골은 더욱 심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공산국가의 몰락과 함께 탈냉전시대가 도래, 이 땅에도 국민의 민주주의 의식과 민주화운동, 시민사회의 등장 등으로 분단이 우리민족의 모순의 총체임을 알게 되면서 통일은 필히 실현해야 될 민족사적 과제로 확인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젠 전쟁(물리적 힘) + 외세의존 + 군사독재통치에 의한 남북의 대립이 아니라 상호인정과 평화공존의 길로 가야 됨을 인식하고 우리 기독교에서도 희년선포와 평화선포를 하였던 것입니다. 2. 평화는 전쟁의 반대개념이긴 합니다. 그러나 전쟁이 없다는 것이 평화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전쟁 없는 것이 <소극적 평화>라면, 평화의 실질적 삶의 내용, 즉 충분조건이 갖춰졌을 때의 평화를 <적극적 평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북은 어떻습니까? 말씀드린 평화의 뜻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현실입니다. 즉,<소극적 평화>도 <적극적 평화>도 기대할 수 없는 상태, 잠재적 불안 요소가 항상 상존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금강산 관광객 총기사망사건이 그 일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이와 같은 잠재적 불안을 없애기 위해 평화의 기운이 남과 북에 깃들기를 하나님께 기원하는 것이고 신앙고백 차원에서 평화지킴이로서의 삶을 생활 속에서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병행한다고 봅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평화를 성취하시기 위해 몸을 입으셨는데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쩌면 <통일의 당위성>보다<평화의 실현>을 위한<실천적 삶>이 먼저여야 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실천 속에서 성육신하는 것이지 부르짖는 외침 속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실천>은 폭넓은 삶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3. 전쟁 없는 <소극적 평화상태>도 우리의 실질적 삶의 내용이 평화스러운가의 <적극적 평화상태>도 모두 다 고민되는 상황입니다. 남한의 군사비는 226억불인데 이것은 1년 총예산의 9%에 해당되며 세계6-8위이고 북한은 55억불로서 총 예산의30%인데 세계22위입니다. 오늘날 북쪽이 저렇게 못 사는 이유 중의 하나가 막대한 군사비 때문입니다. 아마 세계에서 군사비 책정이 1위일 겁니다. 만약 북한당국이 군사비의 10%만 줄여도 북한주민 2천만 명에게 매달 생계비를 지급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 남쪽도 20%만 줄여도 380만 중고교생들에게 무료교육을 시킬 수 있으며, 30%만 줄인다면 대학생 100만 명을 전액 무료로 교육을 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1만5천 중소기업에 매년 5억씩을 도와줄 수 있게 됩니다. 무역총액은 남 7천3백억 불, 북 29억불로서 248배 차이가 나며, 수출총액은 남 3천7백억불, 북 9억불로서 411배의 차이가 납니다. 전력발전 용량은 남 6천8백만kw, 북 700만kw인데 남 1일 평균 4천8백만kw이고 지금껏 5천2백만kw 최고소비량입니다. 만약 남이 북에 200만kw만 도와주게 되면 북한주민 400만 명이 집에 불을 켤 수가 있게 됩니다. 남쪽은 평균2천만kw 남고 북은 절대부족으로 최소 2천만 되어야 공장가동이 됩니다. 발전량은 남 4천억kwh이고 북은 불과 237억kwh에 불과합니다. 원유수입량은 남 8억7천4백만 배럴, 북 383만 배럴로서 230배의 차이가 납니다. 남한은 원유수입 세계4위이고 소비량 세계6위의 대단한 나라입니다. 2006년, 남한 2일사용량과 북한 1년 동안 수입량과 동일합니다. 자동차 생산량은 남 410만 대, 북 4천6백 대로서 약 1000배 차이입니다. 남한은 미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에 이어 세계 5번째 핵 강국인데 20개 핵발전소를 소유하고 있으며 마음먹으면 6개월 내 핵 제조가 가능합니다. 강대국의 반대와 비핵화선언으로 핵 처리시설을 가동 않고 있을 뿐입니다. 4. 여러분, 한반도에서 전쟁이 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남쪽이 북쪽보다 아무리 낮게 잡아도 대략 100배의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잘 살고 있지요. 전쟁 일어날 가능은 남북대비로 봐서도 극히 쉬운 일이 아니고, 미-중간의 이해득실 상호견제 측면에서 봐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전쟁 없는 소극적 평화상태 이것마저도 언제 어떻게 깨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 또한 한반도의 정세입니다. 여기 어르신들도 계시지만 6.25의 경험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피해가 막대하여 그 이야기를 밤샘해도 모자라니 접어두더라도 몇 가지만 봅시다. 1999년<연평해전>때 남쪽은 사망자 없이 부상 9명이었고, 북쪽은 사망자 30여명과 부상자 90여명이었습니다. 2002년<서해교전>때는 남쪽 6명 사망, 북쪽 20여명 혹은 그 이상 사망하였고 2008년<금강산관광객>1명이 북한 초병의 총격에 의해 사망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가랑비를 자꾸 맞으면 언제 우리 한반도에 소나기가 덮치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여러분, 1994년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날 뻔 하였습니다. 그랬으면 저도 우리 교우분들도 아마 이 땅의 사람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미국 클린턴 정부의 북한 영변 핵 기지 정밀폭파 계획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모르고 편히 주무셨지만 몸서리치는 시간이었지요. SERCHCAL STRIKE, 외과의사 가 곪은 부위를 타켓으로 살을 도려내듯 영변의 핵 기지를 도려내겠다는 전쟁계획이었습니다. 미군 소계령 계획이 짜여 졌는데 자기나라 미군을 보호하려고 미리 빼놓는거죠. 클린턴이 럭크 대장을 호출 하였을 때 “각하, 남쪽만 100만 명이 바로 사망하고 군비 100조 소요와 경제비용1000조가 듭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때는 공화당이 아닌 비교적 인권을 중시하고 다소 진보적인 민주당의 클린턴 정부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자국의 국익과 관련해서는 공화당이던 민주당이던 큰 차이가 없습니다. 미국이란 나라는 무서운 나라입니다. 전 세계 군사비의 48-50%인 약5200억불을 쓰고 있고 나머지 전 세계국가가 그 반을 쓰고 있습니다. 군비100조는 미국1년 군사비의 5분의1에 해당될 뿐입니다만 우리나라 5년 군사비총액에 해당되며 경제 비용 1000조는 우리나라 총예산 4년에 해당 되는 금액입니다. 이 숨 막히는 순간에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에 가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킴으로서 한반도의 전쟁계획은 유야무야되고 말았습니다만 여러분 얼마나 숨 막히는 순간이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여러분 전쟁나면 “너만 죽고 나는 산다”는 것. 한반도에서 이게 가능 할까요? 극우주의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오늘도 미국이 저들을 초토화 시켜 줬으면 하는 엄청난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이라면 진실로 이들이 이 땅의 형제들이라고 할 수 있을 까요. 예수를 따른다고 할 수 있을까요? 북한이 망하는 길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민란이고 둘째는 전쟁입니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남한도 같이 망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시뮬레이션 결과 만약 만 명의 북쪽 주민이 동시에 내려오면 서울 전체가 마비되고 십만 명이 오면 남한 전체가 마비되어 결국 모두 죽는다는 것입니다. 치안은요, 위생은요, 숙박, 식사는요, 강도 강간 살인은요, 교통은요, 고속도로에 그대로 서서 꼼짝도 못하고 죽습니다. 5. 통일이 우리의 소원이지만 당장 통일은 어렵고, 가능치도 않고 이 시점 에서는 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차이가 심한데 무리수를 두면 다 죽게 될 겁니다. 10년, 20년 뒤에 통일이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공식 비공식으로 북한에 16번 다녀왔습니다. 그 전에는 통일 지상주의자 였습니다. 아이 두 명의 이름도 순 우리말로서 그 의미가 “민족자주통일”입니다. 민주화운동도 군사독재종식을 위한 싸움도 민족통일을 위한 과정이고 궁극적인 것은 통일에 있었습니다. 북한을 다녀 온 후 저는 입장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만약 지금 통일되면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 남북의 경제규모가 너무 크다는 것이고 둘째, 이념적 괴리현상 또한 너무 큽니다. 그러므로 많은 분야에서 상호교류를 통해 서로 더 알고 이질감을 메꿔 나가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됩니다. 문제의 핵심은 국토의통일, 정치체제의 통일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에서의 통일의 의지 즉 평화를 어떻게 실천해 낼 것 인가입니다. 여기에 우리 기독인들은 어떻게 성육신 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남과 북이 화해와 평화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삶의 질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이 대화와 평화로 되어져야함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고 제3국 특히 미국에 “당신들은 철저히 국익차원에서 접근 하지만, 우리는 국익+민족 문제 아니냐.”라고 힘을 모아 설득해야합니다. 여러모로 북쪽 돕는 일을 쉼 없이 해야 합니다. 물론 암초들이 많습니다. 남북 양쪽의 극우강경주의자가 있습니다. 여러분, 극우와 극우가 만나면 전쟁 외는 달리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그리고 “왜 퍼 주느냐”고 기계적 상호주의를 외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서울역의 수많은 노숙자들, 지하도의 구걸인들. 이들도 못 돕는데 무슨 놈의 북한 돕기냐?”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미국도 일본도 영국도 노숙자들 걸인들 다 있습니다. 러시아에 갔더니 손자부터 할아버지 거지까지 떼로 몰려다니는 가족거지들도 있었습니다. 아마 북한에 퍼 준다고 말하는 분들은 평생에 이웃에 단돈 만원의 사랑의 손길도 펼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북보다 적어도 백배는 잘 살고 있습니다. 부자 형님이 밥도 못 먹는 가난한 동생에게 쌀 주고 ‘갚으라’고 한다면 이게 말이나 되는 것일까요? 상호주의란 힘이 비슷할 때, 그러한 여건이 될 때 적용 하는 것 아닙니까? 적극적인 평화는 삶과 생활 속에서 실현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의 이 땅에서의 의미는 “너희들은 생활 속에서 평화실천의 삶을 살아라.” 바로 이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땅에서의 예수 따름이들의 의무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에스겔의 비젼은 “남과 북이 하나 되라”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막대기였으나 이제는 하나가 되라는 것 입니다. 한 왕의 백성이 되어 평화롭게 살라는 것입니다. 서로를 이해하며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안에서 굳게 손을 잡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나에게 예배를 드리려면 먼저 형제와 화해한 후 내게 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1945년 8.15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북이 갈라지면서 반쪽해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남북이 하나 될 때, 이 땅은 완전한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서가 우리에게 주는 참된 해방, 참된 평화의 의미일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 따름이인 우리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통일을 향한 화해와 평화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8.15 광복절 잊지 말아요/ 시146:6-7/ 2004-08-15
8.15 광복절 잊지 말아요 시146:6-7 오늘은 8.15 광복절 기념 주일입니다. 어느 나라 왕이 학자들에게 \\\"인류의 역사\\\"라는 제목을 주며 책을 써오라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연구한 학자들은 상당히 두꺼운 책이된 인류의 역사 책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책을 본 왕은 \\\"너무 부피가 많구나. 좀 줄여서 쓸 수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학자들이 다시 간추려 썼습니다. 그런데도 왕은 너무도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 네 번 줄여서 쓰던 학자들이 나중에는 단 한 장의 글을 써 가지고 와서 그것이 인류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단 한마디 \\\"고 난\\\"이라고 써 있었습니다. 옳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입니다. 고난 없는 인간 생활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가정이나 사회나 나라나 어느 곳에도 이 고난과 불행과 비극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에 많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태도는 그 고난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될 수만 있으면 고난과 시련을 피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고난 속에 파묻혀 있는 보화를 발견해 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사람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 제일 첫 머리에, <나, 너, 아버지 우리 아버지, 어머니 우리 어머니>라는 말이 나온다면서요??? 상당히 가족적이고 평화스럽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옛날 옛날에 우리는 애굽의 노예였었다>라는 말이랍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갈 때부터, 민족교육, 민족의식을 강하게 심어주는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면, 이스라엘 사람(유태인)들은 전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다가도 젊은 사람들이 한 몫 거들려고 다 나라 안으로 몰려든다지 않아요. 한데 그 상대가 되는 아랍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국내에 있던 젊은 사람들이 군대에 끌려 나갈까 봐, 다 나라밖으로 나간대요. 이스라엘이 작은 나라인 거 여러분들이 아시지 않아요. 그래도 유럽하고 아랍의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도 큰 소리하면서 살아가는 이유는 뭐냐???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민족교육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을 잊지 말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신6:12-13). 사람들이 지난날을 잊지 않고 그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역사의 신기원을 교육적인 종교행사로 구별하여 절기로 지키면서 그들의 신앙과 생활의 근간을 삼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건이 있었기에 그들에게는 어느 때나 희망이 있었고 삶의 용기와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망각증처럼 나쁜 병은 없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70년의 유랑생활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민족의 혼을 지키고 제2의 해방을 맞은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구출해 주신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부귀와 영화를 누릴 때도 이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고 교만에 빠지지 않고 율법/성경을 지키며 이웃에게 선을 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일제로부터 해방을 받은 지 58주년이 되는 8.15 광복절을 맞이하였습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6년 동안 삼천리 강산 2천만 민족을 몽땅 통째로 삼킨 지 날짜로 계산해서 12,771일만에 일본은 한국을 토해냈습니다. 그것이 해방이고, 그것이 8.15입니다. 12,771일 동안 그 사람들이 우리 한민족을 얼마나 짓밟았는지 몰라요. 그걸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인들에게 가한 그들의 살인 만행, 착취, 고통을 어찌 여기서 다 말할 수 있겠어요??? 일본을 위해서 바치라니 어린 것들의 먹을 것까지 긁어가며 바쳤고(그 당시 우리 나라 어린이들의 사망률이 세계에서 제 2위에 해당, 한국 사람의 수명은 44살이었다), 한국 사람이 한국말 하다가 학교 선생에게 걸리면 다리가 부러지게 얻어 맞았습니다(1945년에 보면 문맹자가 77%로, 한글을 아는 사람이 23%에 불과했다. 해방된 이듬해에 한글을 읽을 수 있는 분이 더 많아져서 문맹자가 41.3%로 나타나고 1947년에는 29.4%로 급속히 문맹자가 줄어 들었다). 1937년 7월 소위 국민징용령을 공포해서 무력으로 강제 징용된 인원이 480만 명, 전부 젊은 사람들이 징용되어서, 일본 본토와 남양군도 사할린 등지에 강제로 끌려가 노예 노동을 한 사람이 153만 명입니다. 여러분, 숫자를 좀 유념해서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들 중 사망자가 속출하면 군사 기밀이라고 해서 가족들에게 죽었다는 통지도 안했어요. 나가노에 있는 어떤 대본영에서 수백 명 집단 학살당했고, 오끼나와 열도에서는 2,000여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이 밖에도 도처에서 집단 학살당한 유골이 여기저기서 나왔어요. 1943년에 이른바 조선여자 정신대를 만들어서 12살부터 40살까지의 한국 여성들을 징발해서 종군위안부로 적어도 20여만 명이 성적(性的) 노리개로 유린당했습니다. 가슴 아픈 얘기죠. 12살이면 초등학교 5, 6학년입니다. 그런 어린애들을 붙들어 내보낸 거예요.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남태평양 라바울에서 위안부 생활을 한 박옥련씨는 현재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나눔의 집>에서 살고 계십니다. 이분의 얘기속에,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사병을 상대했답니다. 오후 4시부터 7시까지는 하사관을 받았대요. 오후 7시부터 밤 10시까지는 장교들을 받았대요. 그래서 하루에 적은 날에는 20명, 많은 날은 30명 넘게 상대를 해줘야했었답니다. 그러니까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계속! 시간을 따져 보니까 15시간인데요 30명 이상을 상대하려면 30분에 한 사람 꼴, 만일 식사시간을 빼면, 20분이나 15분에 한 사람씩을 상대했어야 됐을 거예요. 12살입니다. 상상할 수 있어요??? 그것이 남입니까??? 우리 누나이고 우리 언니입니다. 이렇게 짓밟힌 거예요. 상상할 수 없는 얘기지요??? 끔찍한 얘기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본래 정조 관념이 세계적으로 이름난 민족입니다. 정조를 생명과 같이 생각했지 않습니까??? 은장도가 왜 생긴 겁니까??? 고려시대, 이조시대에 여성들이 가슴 깊은 곳에 은장도를 품고 다녔습니다. 왜냐하면 욕을 당하게 되면,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자결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은장도를 가슴에 품고 다니는 민족이 한국 여성들입니다. 한국 여성들의 정조는 생명하고 바꾸는 거예요. 춘향이가 왜 유명합니까??? 한국 민족역사에 길이길이 두고 그 사람을 찬양하는 이유가 뭡니까??? 정조를 지켰다는 얘기 아니예요!!!. 1944년 징용제를 실시해서 약 21만 명의 한국 청년들을 강제 징집해서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21만 명 중 살아 돌아온 청년은 약 5만 명, 나머지는 다 죽었어요. 모든 자유와 모든 주권을 뺏긴 채 독재보다 더한 전제정치 밑에서 탄압을 받아왔습니다. 특히 그들은 기독교 말살정책을 썼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탄압과 말살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만행을 용납지 않으시고 역사상 처음으로 원자탄(1945년 8월 6일 아침 9시 15분 일본의 히로시마, 나가사끼 하늘에 B29 미국 비행기가 나타나 폭탄 3개를 투하)의 크고 무서운 채찍으로 징계하사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고야 말았습니다. 누가 이 오만불순하던 일본의 천황의 목소리를 이렇게 낮아지게 만들었으며 떨리게 만들었는가??? 공의의 통치자되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운행하시는 분이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때 온 국민은 한곳에 모여서 눈물 흘리며 애국가를 봉창하지 않았던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닮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에 (시146:6-7)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주신 8.15 광복절이 만물을 지으시고 세계를 공의로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로 알고 이 시간 뜨거운 감사를 하나님께 드려요??? 이 민족이 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신화에 나오는 단군을 국조신으로 섬기려는 배은망덕한 생각과 행동은 대대에 영원히 버려야 합니다. 아 멘.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지나간 역사를 잊지 말자는 거예요??? 그럼요??? 그런데 우리는 과연 우리 역사의 신기원을 이루게 된 이 해방의 사건을 어떻게 재음미하면서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고 미래의 아름다운 나라를 일구어 가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36년 동안 일제의 억압을 잊은 듯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과소비현상에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타락한 오늘의 현실을 우리는 통회하며 새로운 역사의 전기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아 멘.
8.15 남북평화통일-예수의 길, 평화의 길/ 눅9:51-56/ 광복절설교
8.15 남북평화통일-예수의 길, 평화의 길 눅9:51-56 오늘은 남북그리스도인들이 8.15직전 주일에 함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고 소원하는 공동기도주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누가복음 9장의 남유대인 예수와 북 사마리아사람들의 충돌을 보면서 예수의 길, 평화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해 봅니다. 오늘 말씀 누가 9장을 보면, 유대인 예수 일행과 사마리아사람들 사이의 충돌의 상황이 나타나는데, 첫째, 사마리아인이 유대인 예수와 제자들을 적대시함(53절) 둘째, 발끈한 제자들의 분노로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멸망시키자\\\\\\\"는 제안이 나왔고(54절) 셋째,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을 꾸짖고 사마리아인과의 대결을 피하시고(55절) 이어 평화를 추구하심(10:1-7) 등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첫째,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적대시함 (53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는 가시는 고로 저희(사마리아 사람들)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남유다와 북사마리아는 서로 적개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 일행이 사마리아를 통과하려 하자 사마리아인들이 배척하며 적대감을 그대로 나타냅니다. 사실 사마리아와 유대간의 갈등과 미움의 관계는 꽤 오랜 역사 속에서 심화, 축적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예수님 시대까지 내려왔고, 그래서 요한복음 4:9절에 예수와 사마리아여인과의 만남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상종치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마리아와 유대간의 적개심의 역사는 대개 5단계의 다음과 같습니다. \\\\\\\"제1단계, 다윗의 통일왕국은 솔로몬 왕이 죽은 이후에 남왕국 유대(예루살렘)와 북왕국 이스라엘(사마리아)로 양분된다. 그러다가 주전 721년경에 북왕국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되었다. 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혀갔고 또 많은 앗시리아 이민들이 북왕국에 정착해 문화와 종교를 혼합해 버렸다. 남왕국 유대인들은 그것을 보고 사마리아인들을 불순하게 여겼고 이것이 바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과의 장벽의 시작이 되었다. 제2단계, 주전 587년에 바빌론이 남왕국 유대를 정복하여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유대인들을 70년 동안 바빌론에 포로로 두었다. 그 후 고레스의 칙령에 의하여 돌아온 유대인들은 폐허된 성전을 재건하게 된다. 그러자 사마리아인들이 자기들도 성전 재건에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부정하고 불순한 사람들로 생각하여 거룩한 성전 재건에 참여시킬 수 없다고 고집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성전 재건을 방해하는 책략(스 4:6)을 꾸미고 유대인들을 죽이고 느헤미야의 생명까지도 위협한다. 이 사건으로 유대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성전 재건 작업을 포기하기도 한다. 제3단계, 주전 4세기에 예루살렘에 맞서기 위하여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산에 성전을 지은 것이 유대인들의 증오를 사게 되었다. 제4단계, 마카비 전쟁 이후 유대 지도자 힐카너스(주전 135∼104)가 세겜과 그리심 등 여러 성읍을 정복하던 중, 사마리아성을 포위 공격하여 무자비하게 파괴했는데 이것이 또 상호간의 적개심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마지막 제5단계로, 주전 1세기에 와서 사마리아가 로마 황제 폼페이에 의해서 친로마화되고 친헬라화되자 유대인들의 미움은 더욱 심해졌다.\\\\\\\" 결국 이런 적개심 때문에 서로 증오하기에 이르렀고 그에 대한 기록은 고대 역사가 요세프스의 책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마리아인들이 예수와 그 일행을 배척한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한 형제들이 B.C 926년 솔로몬왕 사후부터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사마리아로 서로 갈라지고 찢겨지더니 1948년 독립할 때까지 남의 나라 식민지로 살고 지금도 전쟁이 한창인 나라 이스라엘! 그 나라의 일은 바로 세계에서 가장 잘 믿는다(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성결교, 하나님의 성회 등 교단별로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는 대한민국에 다 있다!)는 남북이 갈라져 신음하는 우리 대한민국에 그대로 임한 것은 우연의 일치인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적개심을 풀어야 합니다. 남북으로 갈라지는 민족분단과 6.25 전쟁은 많은 이들에게 아픔을 주고 서로 원수가 된 한국역사의 가장 큰 비극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으로서 그리고 목사로서 두 사람의 경우를 특히 기억합니다. * 한사람은 모태신앙으로 장로님이신대 6.25전쟁때 그 아버지 장로님이 공산군에 납치당했고 자신도 따발총부리 앞에서 5시간동안 고문을 당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그 이후 원수갚을 일, 그리고 그 이후 풀리지 않는 인생의 역경 속에서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기독교인이지만 아직도 그 문제를 풀지 못하고 적개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한사람은 역시 비슷한 나이에 해당된 목사님이신대 똑같이 부모들이 공산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기독교인으로서 나중에 북한을 방문하면서 부모 죽인 공산군들을 용서하고 이제는 평화 통일을 위해 사시고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미국 장로교단의 총회장까지 오르는 이승만목사님이십니다. 누가 참 평화의 예수의 길을 가는 기독교인인가?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요한일서 3:14-15)는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발끈한 제자들의 분노 (54절)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누가는 여기서 사마리아와 유대의 적대적인 현실을 비쳐주고 예수와 제자들의 태도를 피력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의 분노 또한 당연합니다. 제자들이 갖는 분노와 증오의 감정은 바로 남북 분단 이래로 왜곡되어 이데올로기화된 역사적인 것이고 그렇게 분단 교육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멸해 버릴까요?\\\\\\\"라고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사랑과 평화의 사도들이 장벽을 허무는 데에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특히 야고보와 요한의 태도는 이른바 무력통일론입니다. 이것은 사마리아와 유대간의 막힌 담을 무력에 의해서 유지하거나 해결하려는 당시의 현실을 반영하는 말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북한교회를 소개하면서 우리가 받아온 \\\\\\\"반북교육\\\\\\\"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어릴 때 우리가 받아온 반북교육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폭력적이고 우스운 것들인가? * 어느 북한 사람이 남한 사람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남반구 사람들이 \\\\\\\'북의 사람들은 머리에 뿔이 달렸다\\\\\\\'고 하는데, 어디 제 머리에 뿔이 달려있습니까?\\\\\\\" 공산주의 북한에도 신자들이 있는가? 북한에도 교회가 있는가? 북한에도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신자들이 있는가? 궁금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있습니다. 정식 교회가 둘이나 있고 가정교회는 500개나 됩니다. 40년 이상된 성경 찬송을 가지고 눈물 흘려 기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봉수교회 이전의 북한의 그리스도인들> \\\\\\\"공화국내에서의 신도수는 약 1만명이라고 한다. 1만명의 신도 중 연맹에 가입하고 있는 수는 약 6,000이다. 연맹에의 가맹은 임의이고, 비가맹 신도도 있다. 연맹에 가맹한 신도는 연맹비가 의무 지워져 있다. 이것은 한 달 수입의 2%를 내야 한다. 연맹은 이 신도들로부터의 연맹비와 임의의 헌금, 그리고 도료공장을 경영하여 그곳으로부터의 수입에 의해 재정을 성립시키고 있다.... 이날 예배처에 들어서면서 순박하고 겸손한 신앙의 수호자들의 손을 잡으면서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감격을 금할 길 없었다. 나는 이 선량하고 용감한 신앙의 수호자들 앞에서 \\\\\\\'나도 기독교신자요\\\\\\\'하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움을 느꼈다.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더욱이 미국과의 전쟁 하에서 그들이 이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고통을 당했을까? 나는 마음속으로 그들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거의 순교자의 험난한 어려움을 극복한 이들 앞에서 나는 기도드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흔히 북의 기독교 신자들 보고 반공에 도취된 해외기독자들이 \\\\\\\'권력과 야합한 기독교인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바 있다. 그렇다면 박근혜를 업고 다니던 소위 목사라는 강신명씨나 독재정권을 비호하려고 북미까지 드나들던 한경직씨는 무엇과 야합했다는 말인가? 전 정권의 자문위원이 된 강원용씨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내가 이날 만난 북의 기독교인들은 너무나 소박하고 순수했으며 또 북의 사회지도층에서 일하는 분들이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의 손은 거칠었으며 그들의 얼굴의 주름살은 지난날의 고난을 말해 주는 듯 하였다. (전충림, <분단을 뛰어 넘어>, 1982. 10) <북에 남은 목사들> 목사는 현재 20명, 전도사와 장로가 300명이다. 이 사람들에 의해 연맹의 선교활동이 행해지고 있다. 목사 및 그 생활은 몇 가지의 유형이 있다. 1) 연맹의 전문직원인 목사(현재 연맹이 전문직원으로서 급료를 지금하고 있는 스탭 진은 20명이고 그 중에 목사 몇 분이 포함되어 있다) 2) 시.도 위원회에 소속하고 거기서 급료를 받는 목사 3) 다른 직업을 가지고 수입을 얻는 목사 4) 고령으로 나라에서 사회보장을 받은 목사 등. 사실 선교활동을 활발히 하기 위해 현재의 진용으로는 어렵다. 따라서 목사 양성을 위해 평양의 연맹 사무실에서 신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1기가 3년으로 1기마다 10명을 양성하고 있다. 매년 10명을 늘려가는 것이 아니라 10명을 3년안에 양성하고, 그것이 끝나면 다시 3년에 걸쳐 10명을 양성한다. 교과서 등은 자신들이 제작하고 있기 때문에 불충분하다. 일본에서도 서적 등의 지원을 해달하는 부탁을 받았다. 간담 중에 고기준 목사는 많은 기독교인이 남하한 가운데 북쪽에 남아서 목사의 사명을 다하는 스스로의 생각을 이야기 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옛날에는 숭미적이고 반공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면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1945-47년경 남하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나에게도 권유가 왔지만 차차 북의 정책이 정당하다고 생각되어졌고 또 종교정책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조선전쟁 중에 숭미사상이 무너져 갔다. 그 무차별할 정도의 공격을 보고 숭미는 잘못된 것이라고 느꼈다. 물론 전쟁 중에도 남하하는 것은 가능했고 때때로 권유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 남아 목사로서 일하고 있는 것에 후회하지 않고 있다. 북에 있는 신자들을 위해 일생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와 같은 생각의 교직자들이나 신도들도 많다고 생각한다.... 남쪽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통일을 하루 빨리 이루어야 하며, 상호방문, 상호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마에지마 무네또시, <북한방문기>, 1987. 5. 16-23) <\\\\\\\"진짜 신자들인가요?\\\\\\\" 봉수교회 이후의 북한의 그리스도인들> \\\\\\\"평양교회는 봉수동이란 곳에 있었고 교회이름은 봉수교회였다. 교회는 백색의 양옥건물로 아담하고 아름다웠다. 시간이 되어 교회에 들어가니 교회에는 이미 150여명의 교인이 질서정연하게 입장해서 준비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아! 그 순간 꿈만 같았다. 정말 그 순간만은 그들이 진짜 교인이든 동원된 사람이든 좋았다. 우리 일행은 교회에 들어오면서부터 벌써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50대로 보이는 키가 커다란 박춘근전도사가 선량한 미소를 띠며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들이 쓰는 성경과 찬송가는 평양인쇄공장에서 찍은 것이었다. 예배순서도 묵도, 성서교독, 기도, 설교, 헌금, 광고, 축도 등 남한의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박춘근 전도사는 루가복음 16장 13절을 가지고 극히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설교를 했다. 그의 설교에는 \\\\\\\'김일성 수령\\\\\\\'이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예배의 마지막 축도는 내가 맡았다. 나는 한국 기독교 역사상 평양교회에 가서 최초로 축도를 해주고 온 남한의 목사가 된 것이다. 예배후 간단한 인사를 하는 기회가 있었다. 나는 남한의 교우들과 해외에 나와 있는 성도들이 북한의 교회를 위하여 얼마나 피눈물나게 기도하고 있는지를 사실대로 전했다. 예배당을 나오면서 나는 박전도사에게 물었다. \\\\\\\'혹시 실례지만 오늘 모인 교인들은 모두 진정한 신자들인가요?\\\\\\\' 박전도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이 교회의 첫 예배부터 지금까지 참석해 왔다는 캐나다에서 온 이희영 장로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성전이 건립되고 첫날 예배때 보니까 교인들 모두가 눈물 바다를 이룹디다.\\\\\\\' 그렇다. 평양에 교회가 섰다.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축도를 받는 교인들이 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교인들이 있다. 이 이상 무엇을 의심한단 말인가. 그들 못지 않게 불신과 아집에 빠져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우리가 교회를 떠날 때 신자들은 모두 나와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우리 다시 만나 볼 동안 하느님이 함께 계셔\\\\\\\'란 찬송을 불러주었다.\\\\\\\" (박요한목사 북한기행, <한국일보>, 1988. 12. 18) 제자들이 천년이상을 받아온 반북교육, 그것이 바로 우리 한국 기독교인에게도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떠하셨는가? 다음 말씀을 보십시오. 셋째, 예수의 꾸지람과 평화의 길 모색 (55-56절) \\\\\\\"예수께서는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돌아)가시니라.\\\\\\\"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의 무력사용 요청에 대해 꾸짖으시고 평화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 두 배의 여정이 드는 다른 마을로 돌아서 가십니다. 예수시대의 1세기 초 팔레스틴은 남쪽의 유대, 북쪽의 갈릴리, 그리고 그 중간의 사마리아 등으로 분할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유대인들이 갈릴리로 갈 경우 또는 갈릴리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갈 경우 사마리아를 거치지 않고 요르단 동편으로 우회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시간적으로 3일 길인데 6일을 가게 됩니다. 이유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적개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했습니다. 제자들이 그 힘을 감춘 예수에게 불평이 있었겠지만,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이 평화의 사도가 되기를 원하였기에(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눅 10:1∼7,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평화를 선언해라\\\\\\\"), 그 먼 길을 택한 것입니다. 예수의 태도는 평화(엡 2:14, \\\\\\\"그리스도는 평화이신지라.\\\\\\\")이십니다. 누가 19장에서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너희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면!\\\\\\\" 하셨고, 누가는 그의 복음서 첫장부터 끝장 전체에서 평화를 누누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눅 첫장 1:79, 2:14, 7:50, 8:48, 10:5∼6, 19:38, 42, 끝장 24:36 등). 우리도 예수의 길, 평화의 길을 가야겠습니다. 그 길이 우회로이고 멀어도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 길을 가야겠습니다.
8.15 해방과 나의 해방/ 눅4:17-19, 사61:1/ 김충기 목사/ 광복절설교/ 2002-08-15
8.15 해방과 나의 해방 눅4:17-19,사61:1 내일 모레가 55번째 되는 8·15입니다. 1939년에 독일과 일본에 의해 6년간 시작된 세계 제 2차 대전 중에 죽은 사람 숫자만 해도 우리 대한민국 인구보다 더 많은 4-5천만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동남아 지역을 식민지화 하고 우리나라는 36년동안 일본에게 통치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 김충기 목사만 하더라도 대동아 전쟁 말에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학교를 나가지 않으면 학교 선생님으로 부터 많은 체벌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사에 가게 되면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는다고 매를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해방의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5년이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번 8·15광복절을 맞아서 남북이산 가족이 만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국가에서는 경제사범을 비롯해서 7,000명이 광복 특사로 풀려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들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들뜰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쁜짓 하고 들어간 사람은 사회로부터 냉대를 받게 되고 또 범죄를 저지르고 또 교도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신문의 칼럼을 보니 우리 대한민국이 이렇게 들떠 있지만 또 다시 IMF가 오고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그 칼럼을 보고 \'옳다\'고 크게 동감을 하였습니다. 이번에 북에서 내려오는 이산가족 상봉단 또한 알고 보면 남한이 싫다고 북으로 전향한 좌익분자들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는 통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임시정부가 한국에 막 들어왔을 때 국민들을 통제하는 제대로 된 헌법이 없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사람을 치는 행동을 하였습니다.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1등인생 2등인생 3등인생이 있습니다. 1등인생은 자기가 자기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2등인생은 자기가 50%를 통제하고 50%는 남의 통제를 받는 것이 2등인생입니다. 3등인생은 자기를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100%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는 인생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교도소에 가보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3등인생 되지 않고 1등인생 되기를 축원합니다. 발람 선지자가 나귀를 타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가는데 누가 발람을 통제했습니까? 바로 발람의 당나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통제를 했습니다. 우리 서울에도 차량을 통제하는 신호등이 없으면 1년에 100만명이 죽습니다. 이러한 통제가 있으니까 모든 것이 질서 있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도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통제했고, 시내산에서 10계명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제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통제를 받고 그 안에서 자유와 해방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一. 영적인 죄에서 해방되자 죄를 지은 사람하고 나하고 걸어간다고 할 때 죄를 지은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떳떳하지만 죄를 지은 사람은 당황하고 억압에 눌리는 것입니다. 지를 짓고는 못삽니다. 그렇다면 이 죄의 원흉은 누구입니까? 요한 1서 3장 8절에 보면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아무리 선하고 신실한 사람도 마귀가 한번 들어가면 악한 사람이 되고 살인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창세때부터 범죄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을 강화하고 죄인을 억압한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죄의 원흉인 마귀를 물리치지 않으면 이 땅에 죄는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8절 끝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땅에 온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떠한 사람도 속일 수 없습니다. 자기를 속일수는 있어도 하나님은 절대 속일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우리들이 죄를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죄를 자백하면…깨긋케 하실 것이요…\"우리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게서는 우리의 죄를 기억도 않는다고 하십니다.(히브리서 10:17)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죄에서 해방된자입니다. 二. 정신적인 불안에서 해방되자 인간에게는 정신적인 불안이 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에 가까왔으니…\"(베드로전서 4:7) 옛말에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국에서 과학자가 3명의 청년을 데려다가 최면을 걸고서 \"너는 힘이 없다\"고 최면을 걸었을 때 3명이 힘을 합쳐 13Kg을 겨우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너는 힘이 있다\"고 다시 최면을 걸었을 때 처음보다 5배의 힘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지금 사회는 의료파업등으로 너무나 어렵습니다. 지금 이산가족 상봉단의 단장이 남한이 싫다고 북으로 간 사랍입니다. 지금 이 나라의 운명은 칼도마 위에 있는 위태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나라는 정신을 차려햐 합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영적무장을 하여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三. 육체적인 질병에 해방되자 우리는 육체의 질병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천국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 영적인 데서 해방되고 둘째 정신적인 것에서 해방되고 세번째는 육체에서 해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영혼을 구원하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병자들도 많이 고치셨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께서 \"당신 천국 가시오\"라고 하였을 때 그들이 굶고 병들어 있다면 그들에게는 복음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복음서에서는 예수님게서 병자들을 고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9장 2절에서 침상에 누운 병자를 고치시고, 18절에 죽은 직원의 딸, 20절에 12해를 혈루증 앓는 여인의 이야기, 32절에 귀먹어 벙어리 된자를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얼마 전에는 우리가 다같이 합심하여 저녁예배 시간에 교회의 환자를 위해서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환자는 매우 위독해서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의료대란이 나서 수술할 병원도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9일동안 지내던 중 어렵게 수술할 병원을 찾아서 수술날짜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수술을 할려고 MRI 사진을 다시 찍어보니 수술할 필요 없이 깨끗이 다 나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치료의 기적을 주신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 요즈음 우리 교회에 기적이 자주 일어납니다. 또 얼마 전에는 어느 권사님의 남편이 지압을 받다가 장이 파열되어서 위험한 지역에 이르렀습니다. 또 교회에서 이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였더니 수술이 너무 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우리 교회에는 여러가지 기적이 매주 마다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영적인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정신적인 불안에서 해방시켜 주시며 육의 질병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8.15 해방과 애국/ 사48:10, 잠14:34/ 광복절기념주일설교/ 2001-08-15
8.15 해방과 애국 사48:10, 잠14:34 오늘은 8.15 해방을 맞이 한지 54번째 되는 날입니다. 36년 동안 나라를 빼앗기고 온갖 고통과 슬픔을 당하다가 하나님의 강권적인 능력으로 나라를 되찾은 날입니다. 그 기쁨도 채 가시기 전에 6.25동란이란 처참한 전쟁을 치르며 이 나라가 폐허가 되고 거지처럼 가난하여 세계에 손벌리고 얻어먹던 나라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 만큼 부강한 나라가 되어 세계를 향하여 선교하는 나라가 된 것을 생각하면 무엇으로 다 감사하고 찬송할지 알 수 없습니다. 36년 동안이나 국토를 빼앗기고 말도 빼앗기고 성도, 이름도 빼앗겼다가 다시 찾게 된 것도 하나님의 깊은 뜻이 계시고 6.25때 부산까지 밀려 내려갔으나 기적적으로 UN 군이 상륙하여 공산군을 몰아내고 이만큼 부강한 나라가 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나라를 말세에 마지막 주자로 선교하는 민족으로 쓰시기 위함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한국의 사명 세계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보면 우연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그때그때 필요한 사람과 민족을 들어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말세지말에 하나님이 예정하신 제사장 나라요, 선교의 사명을 부여받은 나라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봅시다. ① 한국은 고난으로 연단 받은 나라입니다. 이사야 48장 10절에 \\\"보라 내가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은 많은 고난으로 연단 받은 나라를 들어 쓰십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요셉의 생에를 보십시오. 누구보다 고난을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세계 어느 나라 보다 고난을 많이 받은 나라입니다. 한국은 5,000년 동안 수많은 외적의 침략을 받으며 고난을 당하였고 일본에게 36년 동안 온갖 핍박과 고난과 슬픔을 당하면서도 나라가 망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6.25 전쟁은 사상 그 유례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동족상잔의 전쟁이었습니다. 부산까지 밀려 내려갔지만 공산화되지 않은 것은 말세에 하나님이 쓰시려는 섭리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② 한국은 약소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소 민족을 택하여 쓰십니다. 선민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우리 한국의 국토 3분의 1 만큼도 안돼는 약소민족이요 인구 몇백만 밖에 안됩니다. 하나님은 크고 강대한 나라에 영적 사명을 맡기시지 않습니다. 신명기 7장 7절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개인을 선택하시는 것도 멸시받고, 비천하고, 가난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자를 들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 ③ 한국은 신앙이 돈독한 나라입니다. 세계 선교 여행을 다녀보면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힌두교, 모슬렘교, 불교와 짬뽕이 되어서 예수 믿는다는 교회가 참 많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한국교회 만큼 말씀의 기초 위에 서서 제대로 믿고, 제대로 기도하는 나라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게다가 인도는 8억의 인구를 가졌지만 힌두교 국가로, 마귀로 꽉 찬 나라이며, 중국은 12억의 인구를 가졌지만 아직도 공산주의 국가이고 인도네시아는 1억의 인구를 가졌으나 모슬렘 국가나 다름이 없고, 일본도 경제력이 있어 보이지만 800만가지 귀신을 섬기고 기독교인은 영점 몇 퍼센트도 안돼는 귀신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100여년 만에 25% 이상의 신자를 가진 나라입니다. 한국에 신학교가 너무 많고 목사, 신학생이 너무 많다고 비난을 받지만 남북이 통일되고 중국에도 마음놓고 선교할 수 있게 되면, 그 많은 목사, 신학생도 모자르게 될 것입니다. ④ 한국은 순교의 피가 많은 나라입니다. 순교의 피는 교회 부흥의 씨앗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순교의 피가 많은 나라를 들어 쓰십니다. 시편 79편 10절에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주의 종들의 피 흘림 당한 보수를 우리 목전에 열방중에 알리소서\\\"라고 했습니다. 순교의 피가 많은 나라를 열방중에 알리시는 하나님입니다. 대원군 때에도 많은 순교자가 나왔고 왜정 때에도 많은 목사와 신도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많이 순교했습니다. 6.25때에는 535명의 목사와 셀 수 없이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말세에 들어 쓰십니다. ⑤ 한국은 기도를 많이 하는 나라입니다. 세계에서 매일 새벽기도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철야기도, 금식기도를 떡 먹듯이 하는 교회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한국처럼 기도원이 많은 나라는 없습니다. 시편 50편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아무나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도의 영을 부어 주셔야 됩니다. 스가랴 12장 10절에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개인이나, 교회나, 기도하지 않는 나라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귀한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⑥ 한국은 복음의 열매를 잘 맺는 나라입니다. 마태복음 21장 4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탄생한 나라이지만 2,000년 동안 복음을 빼앗기고 복음은 로마를 거쳐 독일과 영국으로 왔고 그 후 미국을 거쳐 아시아 한국으로 넘어오게 된 것입니다. 한국만큼 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영성이 잘 발달한 나라는 없습니다. 따라서 한국만큼 성령 충만한 나라도 없다고 봅니다. 우리교회만 해도 1971년에 100명에 불과 했으나 이제 머지않아 10만 명에 도달할 것입니다. ⑦ 한국은 셈족의 후예입니다. 창세기 9장 26절에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에게 각각 축복과 저주를 내렸는데 셈에게는 영적인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함은 종의 종이 되는 흑인의 조상이 되었고, 야벳은 백인의 조상이 되어 물질의 축복을 받아 창대케 되었습니다. ⑧ 한국은 선천적으로 하나님의 찾는 나라입니다. 신에 대한 명칭 가운데 한국의 \\\"하나님\\\" 처럼 성경 적인 칭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 즉 유일신을 의미하고 \\\"한\\\" 은 \\\"크신 분, 위대하신 분\\\"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범신론적인 이름이지 기독교적인 칭호가 아닙니다. \\\"하늘님\\\" 즉 막연하게 범신론적 의미가 들어있으므로 \\\"하느님\\\" 이라고 하면 안됩니다. 우리 애국가에도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만세\\\"라고 부릅니다. 그 외에 선민 이스라엘의 풍습과 사상과 같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 일찍이 이런 예언적인 시를 읊었습니다. \\\"오! 코리아여! 그대 옛날에 아시아의 황금시절에 밝은 등불의 하나였도다. 이제 그대 등불 다시 밝여라. 그대 온 동방을 비치는 밝은 등불이 되리라\\\" 우리 주위의 여러 나라가 공산화되는데도 지리적으로 가장 취약한 한국은 공산화되지 않았습니다. 2.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으려면 ①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대 로마 제국은 외부적인 조건 때문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망했습니다. 소돔 고모라성은 의인 10명도 없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해 없어 졌습니다. 잠언 14장 34절에 \\\"의는 나라도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역대하 7장 14절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신실하고 정직한 국민이 되어야 합니다. 덴마크 나라는 인구 500만에 작은 돌작밭 땅덩어리를 가진 나라이지만 지상 낙원이라 할만큼 잘 사는 나라입니다. 그 이유는 그 국민은 정직하고 진실하기 때문에 그 나라 제품은 시험해 볼 것도 없이 믿고 잘 사갑니다. 여행하다가 물건을 놓고 와도 틀림없이 찾아줍니다. 우리 나라도 정직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준법정신입니다. 선진국민은 준법 정신이 강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탈세라면 큰 죄로 여깁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신자들도 탈세할 수만 있다면 한다고 놀랍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고의를 행하면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고 했습니다. 공의를 행하고 정직한 사람이 그 많은 사람 중에 하나도 없어서 멸망시켰다는 말씀입니다. ② 책임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위대한 성도들이나 위대한 민족이나 국가는 모두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더욱이 나라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 1-3절에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함이니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이 땅에 6.25와 같은 전쟁이 다시는 발발하지 않기 위해 기도하고 이 민족을 사랑하여 IMF의 채찍으로 징계하심을 깨닫고 온 국민이 각성하도록 기도하고 따라서 무역 흑자가 계속 되어 외채를 갚고 IMF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도하고 따라서 세계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겠고, 또한 부정 부패가 없어지고 공의가 춤을 추고, 진리가 소리 높여 노래하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하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도 없어지는 나라가 되기 위해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③ 구령사업에 힘쓰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상 교회가 부흥하고 국내 복음화와 해외선교에 힘쓰는 나라가 될 때 그 나라는 번영하고 복 받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구라파가 기독교 인구가 그렇게 많으면서도 선교에 힘쓰지 않을 때 바이킹족, 해적들의 침략을 받아 그들에게 끌려간 부녀자들이 전도해서 예수 믿고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이 덴마크, 노르웨이, 스위스 같은 나라들입니다. 재정 러시아에 그렇게 기독교 인구가 많았지만 안일주의에 빠질 때, 공산주의라는 몽둥이로 두드려 부서져 비참한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한 맺힌 소원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 하나라도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조지 화이트필드는 \\\"주여, 나에게 영혼을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 영혼을 가져가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으며, 독일의 진젠도르프 백장은 성령세계를 받고 열심히 선교하여 그 모라비안 교도들이 20년 동안 선교 사업한 것이 큰 교단이 200년 동안 한 일보다 더 컸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제부터 복음이 필요한 나르는 다 내 나라이다\\\"고 했고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 목사님은 \\\"어디서나, 언제나 영혼구원\\\"이라고 표어를 가지고 쉴새없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후예들에게 \\\"당신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 외에 아무 일도 하지 마시오 그러므로 이 일로 시간을 보내고 이 일로 쓰임 받도록 하시오. 보시오 당신이 얼마나 설교했느냐, 또는 얼마나 많은 일에 관심을 가지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최선을 다해 영혼을 구원했느냐가 문제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죄인을 그리스도께 데려와 회개케 하시고\\\" 라고 말했습니다. 그 결과 영국을 무혈혁명으로 구원하기까지 했습니다. 영혼 구원에 힘쓰는 개인, 교회, 국가를 축복하십니다.
8.15 해방이 주는 교훈/ 갈5:1
8.15 해방이 주는 교훈 갈5:1 1945년 8월 15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이스라엘의 출애구과 같은 기적을 보여주신 축복의 날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었던 해방이었기에 그것은 하나니의 선물이요 은총이었습니다. 금년에도 이 뜻 깊은 날을 맞아 그 날의 감격을 되새기며 해방의 은총을 감사하는 동 시에 오늘 우리의 신앙을 위한 새로운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8.15 해방에는 크게 세가지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로, 8.15 는 정치적인 해방이었습니다. 36년간의 식민지 통치 하에서 우리나라는 정치적 자유를 완전히 상실하였 던 것입니다. 언론,출판, 집회, 결사, 신앙등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를 완전 히 박탈당했습니다. 또한 우리 민족 고유의 역사와 전통 언어 및 심지어 우 리의 이름까지 빼앗기는 노예 상태였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국외로 망명을 하여 안 창호, 서재필, 이승만, 김구, 신익희 등이 미국과 중국 등 각지에서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일생을 바쳤습니다. 국내에서 도 3.1운동 광주 학생운동 5.10만세 사건 등등의 대 소 반일 운동이 일어나 서 조국 광복절 위해 투쟁하였으나 끝내 일본의 패전으로 인하여 우리는 영 광스러운 해방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아직까지도 완전한 해방을 얻지 못하고 있으니 북한에 있는 동포들은 공산당에 의하여 정치적인 자유와 해방을 빼앗겼으며 38선의 높은 담벽을 30년이 지나도록 허물어질 줄을 모르고 지금도 민족의 비극이 연출되고 있으니 이 해방의 날을 맞이하여 남북 통일을 위한 피나는 도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8.15는 경제적인 행방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 강압 정책에 의해 수탈당한 과거는 실로 잊을 수 없는 비극이었습니다. 더구나 일제 말엽 전쟁 물자 공급을 위해 우리나 라에 대한 경제 수탈은 가장 악질적인 만행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재산과 농토를 뺏기고 북간도로 피난을 갔으며 남아 있던 사람들 도 영양실조에 걸려 죽어갔습니다. 가장 단적인 예로 일제 말엽 우리 나라 의 국민 학교 학생들의 3분의 2가 영양 실조에 걸려 누렇게 부은 얼굴을 하 고서 비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인 착취와 수탈로 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해방 이후 우리나 라는 착실한 경제 건설을 이룩하여 오늘날 우리나라의 경제는 날로 비약적 인 발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세계 경제의 수준에서 볼 때 만족할 만한 한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여지만 우리나라의 앞날은 결코 어 둡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더구나 남북 통일이라는 민족적인 대 과업의 성취 를 단축시키기 위해서라도 더욱 더 경제 발전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입니 다. 셋째로, 우리 민족의 심령의 해방이었습니다. 이는 온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이 마음대로 말하고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잇으며 그리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이 자 유야말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가장 필수적인 근본 요소요 최고의 자유인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사람 을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Iiving soul) 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함으로 인간은 타락하였고 죄인 이 되었으며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가 섬기는 것이 종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 그것을 벗어버리지 못하 면 죄의 종이요 배를 하나님처럼 섬기면 물질의 종이요 하나님을 섬기면 하 나님의 종이 됩니다. 해방은 우리에게 심령의 자유를 주었습니다.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얻게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껏 신앙생활하고 복음을 믿고 전도할 수가 있게 되었 습니다. 이제 우리 나라는 정치적 자유 경제적 해방은 얻었을지 몰라도 그 러나 더욱더 중요한 영원의 해방과 자유는 아직도 요원합니다. 온 천하 보 다 더욱 귀한 영혼을 죄에서부터 해방시키는 이 일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잘 살기 위하여 반드시 성취해야 할 과업입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광복절을 맞이하여 아직도 북 한에서 신음하는 우리 동족의 정치적으로 경제적인 해방과 구원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서 이 민족이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와서 죄의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고 영혼의 구원과 해방을 받은 영적인 광복절이 속히 오도록 더욱더 기도하고 이 일을 위하여 힘쓰고 애써야 하겠습니다.
8.15, 하나님이 하셨다/ 시126:1-6/ 2001-11-09
8.15, 하나님이 하셨다 시126:1-6 오늘 이 시간에는 \"눈물과 기쁨\", 이런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한 번 따라 하시겠습니다. \"눈물과 기쁨\". 여러분 다 기쁘게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쁘게 살기를 원치 아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쁨을 원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 기쁨은 누가 맛볼 수 있느냐? 진정한 기쁨은 누가 가질 수 있느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그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쁨은 원하면서도 눈물은 싫어합니다. 눈물과 기쁨은 정비례합니다. 눈물 없이는 기쁨도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눈에 눈물이 없어요. 죄를 짓고 회개하는 눈물이 없어요. 자식이 잘 되기를 원하고 또 자식들을 과외도 많이 시키고 공부도 많이 시키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그 자식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가 적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걱정은 하지만 그러나 정말로 나라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눈물의 애국자가, 애국의 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제자를 위해서 우는 스승의 눈물도 없고, 남편을 위해서 우는 아내의 눈물이 많지 않고, 그뿐이 아닙니다. 영혼을 위해서 우는 전도자의 눈물이 너무나 많이 식어졌다 그 말이에요. 시편 126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게 됨을 감격해서 노래한 시인 것입니다. 우리 나라 역시도 8 15 이전 일제의 강제 징용으로 끌려갔던 청년이나, 또 만주나 일본 땅에서 8 15 해방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얼마나 감격스러워 했었던가 가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저도 그때 5살이었습니다. 모든 동네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서 \"만세! 만세!\", 기뻐하고 감격하고 울면서 \"만세! 만세!\". 왜 그렇게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만세! 만세!\" 기쁨의 소리를 외쳤을까? 35년 동안 나라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너무나 너무나 많은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눈물을 흘린 후에 오는 그 해방의 기쁨과 해방의 감격을 크게 느끼고 있는 거예요. 이러한 감동이 오늘 본문 시편 126편 1-2절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우리 나라가 일본 사람들에게 35년동안 나라를 빼앗기고 난 후에도 그렇게 기뻤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에 자그마치 70년 동안 나라를 빼앗겼으니, 70년 동안 나라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이 그 바벨론에 끌려가서 포로가 되어서 고통을 당하는 눈물을 흘리다가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어서 이스라엘로 돌아오면서 부른 노래, 그 노래가 시편 126편인 것입니다. 이런 감격과 기쁨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는 수고와 아픔이 있어야 더 기쁨은 더 큰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IMF라는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눈물과 땀을 흘리지 아니하고 가만히 기다리기만 한다면, 우리에게 감격적인 기쁨은 절대로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IMF를 통과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더 좋은 일이 온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그 기쁨과 감격이 올 수가 없다고요. 우리가 지금 어려운 때에 우리가 눈물 흘리고 땀 흘리고 이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 애를 쓰고 나가는 사람, 그때는 우리가 정말로 고통과 아픔의 터널을 통과한 후에 그때는 진짜 감격할 것입니다. 진짜 기쁨이 오고, 진짜 눈물이 있는 그런 삶을 우리가 맛보고 살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감격의 기쁨을 맞이할 날은 그렇게 눈물 흘리고 정말로 땀흘린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울수록 더 열심히 눈물 흘리며 시를 뿌려야 될 것을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과 같은 눈물의 때를 어떻게 지혜롭게 보내야 할까? 어떤 씨앗을 뿌려야 할까? 그리고 어떤 미래를 꿈꾸면서 살아가야 할까? 함께 생각해보면서 힘을 얻는 우리 모두 되십시다. 첫째로, 수고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행운과 행복을 착각합니다. 그러나 행운과 행복은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행운은 아무런 수고함이 없이 우연히 거져 얻어질 때가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그 행운이 절대로 행복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절대로 그런 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행운처 럼 오는 게 아닙니다. 행복은 많이 애쓰고 또 많이 수고하고 때로는 눈물도 많이 흘리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에게 행복이 오는 거예요. 마태 복음 5장 4절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일하는 수고가 있어야 됩니다. 날마다 수고의 땀을 흘리는, 수고의 눈물 흘리는 그런 삶이 있어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일할 수 있는 건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을 찾지 아니한다면, 신세타령만 한다면, 그는 결코 내일의 기쁨을 맛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실직할 수 있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일손을 놓을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애쓰고 수고하는 땀흘릴 때 그의 삶이 지금 물질은 혹 부족할지라도, 그의 삶 자체는 건강한 삶이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할 때도 필요합니다. 좋은 직장 다닐 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 중요한 것은 뭐냐? 우리가 돈을 많이 벌고 명예와 권세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뭐냐? 그의 삶 자체가 건강해야 된다 그 말이에요. 건강하게 살아가야 된다 그 말이에요. 건강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땀을 흘려야지요. 수고의 땀을 흘려야지요. 수고의 눈물을 흘려야지요. 그것이 대가가 오던 안 오던 건강한 일, 정직한 일, 선한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일,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을 위해서 우리가 땀흘리고 애쓴다면, 그 자체가 건강한 삶인 것입니다. 행복한 변화를 바라며 또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인은 회개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면 용서와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여러분 잘 아시잖아요?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20살 전까지는 망나니였어요. 술주정뱅이였어요. 방탕도 했었어요. 그런데 그 어머니가 눈물을 흘렸어요. 방탕한 아들을 보지 아니하고 이제 변화된 아들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어요. 끊임없이 기도했어요. 수고의 눈물을 수도 없이 흘렸어요. 하나님이 성 어거스틴을 바꾸어 주셨어요. 어거스틴을 변화시켰어요. 구원받게 했어요. 변화된 삶을 살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그는 성자 어거스틴으로 바꾸어 질 수가 있었어요. 이 사회는 지금 청소년이 잘못되었다 말들을 많이 합니다. 학교가 잘못되었다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꾸어서 스승은 제자를 위해서 얼마만큼 눈물을 흘렸는지, 그뿐이 아닙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은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돼요. 부자가 된 사람이 여유가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불쌍히 봐 줄줄 알고,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눈물 흘릴 줄 알고, 지나가다가 장애자가, 불구자가 어렵게 구하고 있으면, 돈 한푼 던져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를 위해서 울 수 있는 눈물이 있다면, 누가 유익하냐? 돈을 주고 우는 사람이 돈 몇 푼 받는 사람보다 유익할 줄 믿습니다. 메마른 심령이 울 수 있었다. 메마른 심령에 눈물이 날 수 있었다. 눈물은 치료 에요. 마음의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눈물은 육신의 병도 치료받을 수 있어요. 눈물은 생활의 치료를 받을 수 있어요.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도와주는 마음. 또 눈물을 흘리며 수고한 사람만이 결실을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일에 수고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시편 65편 9-10절입니다.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울면서도 새 방안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그런 말인 것입니다. 자기 행위를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태도는 울며 씨를 뿌리는 사람이 성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눈물과 땀의 수고가 있을 때만이 풍성한 추수의 결실을 기대한다 그 말인 것입니다. 둘째로, 믿음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우리는 땀흘려 수고하고 일하면서 될수록 많은 씨앗을 뿌려야 됩니다. 그 하나하나를 믿음으로 심을 때, 장차 기쁨을 거둘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정직한 삶의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라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우리는 분명히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있다고요. 성경 속에서만 하나님을 만나는 게 아닙니다. 자연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납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고, 안 심으면 안 나고, 그렇잖아요.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나고, 안 심으면 안 나고,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로 기쁨으로 거두기 위해서는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힘들어도, 우리가 고통을 당할지라도, 우리는 씨를 심어야 돼요. 씨를 심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그래도 참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우리 나라에 뭐 지하자원이 있어요 뭐가 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에 우리의 부모님들이,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어머니들이 잡수실 것 못 잡수시면서 허리 졸라매고, 못 입으시면서 못 생활하시면서 쓰실 것 못 쓰시면서 눈물 흘리면서 자식을 위해서 자식을 가르치기 위해서, 자식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아는 것이 힘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그래서 얼마나 얼마나 눈물 흘렸는지 몰라요.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들이 그 어려운 때에 그렇게 자식을 위해서,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심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만큼 잘 살게 된 줄 믿습니다.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래서 우리는 가치 있는 일에 투자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농부가 땀흘려 일하는 것을 행인들이 보고 칭찬했습니다. \"야, 저렇게 부지런할 수가 없어.\" 그것을 가만히 나무 위에서 보고 있던 원숭이가 \"아, 저렇게 땀흘리고 일하면 칭찬하는구나.\" 그래서 원숭이가 나뭇가지를 꺾어 가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다가 다 던졌어요. 다 던지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원숭이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쳐다보면서 원숭이를 다 욕하고 가더라는 거예요. 땀흘린다고 다 칭찬 받는 게 아니에요. 누구를 위해서 땀흘렸느냐? 무엇을 위해서 땀흘렸느냐? 이것이 너무나 중요해요. 그래서 우리는 땀흘려 일하되 무익한 수고를 해서는 안 된다 그 말입니다.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가치 있는 일에 투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뢰와 정직의 씨앗을 뿌려야 되는 것입니다. 정직한 일에는 정직한 보상이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나 요행을 바라고 한탕주의로 벌이는 일은 위험과 낭패와 실망과 불명예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당장은 그것이 소득이 적을지라도, 정직한 사람이 오래 갈 수 있으며, 또 신뢰의 바탕 위에 살아가는 사람이, 그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복받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서 11장 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특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케 하느니라}. 내가 하는 일은 생산자나 소비자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확신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또 거짓으로 속여서 만든 상품은 나도 망하게 하고 남도 망하게 하지만, 믿음의 상품은 모두를 살리는 것입니다. 또 뿐만 아니라 점점 번창할 수 있습니다. 정직한 것에 성실하게 살아가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물로 전도의 씨를 뿌리면, 영광과 기쁨으로 거두게 됩니다. 시편 37편 26절에 말씀하십니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주님 말씀했어요. 열심히 전도하면 많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보십니까? 하나님이 보시고 그의 믿음을 성장시켜 주시고, 그의 삶에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고, 그뿐만 아니라 하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얻게 하시고 땅에서 그 자손이 잘 되는 축복을 받게 만들어 주신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의 길은 때로는 힘들고 종종 막히는 일도 있지만, 그 눈물의 수고는 영원한 보상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믿음의 씨앗을 우리가 더 많이 심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분명코 거두게 하시되 30배, 60배, 100배, 하늘의 면류관으로, 이 땅에서 행복하고 형통한 것으로, 더더군다나 자녀가 잘 되는 것으로 거두게 만들어 주셔서 날마다 기쁨이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셋째로, 희망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눈물로 뿌린 씨앗이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거름을 충분히 주어야 됩니다. 또 잡초를 제거해야 됩니다. 또 날마다 애써 가꾸어 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씨앗을 심은 후에는 그것이 악의 침해받지 않고 잘 자라도록 잘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초와 잡초를 다 뽑아 주어야 됩니다. 그렇습니다. 곡식을 심으면 이어서 많은 잡초가 나서 어우러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이러한 잡초나 독초를 부지런히 제거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요. 왜요? 그 잡초가 더 잘 자라니까 그 잡초에 기운이 눌려서 자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믿음과 시기와 열등감의 독초가 있습니다. 실패와 좌절과 무기력의 잡초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들어올 때마다 우리는 부지런히 뽑아야 돼요. 이런 것들을 뽑아내지 아니하면 우리는 일어날 수가 없어요. 그 마귀가 자꾸 우리를 억눌러요. 좌절하게 하고 낙심하게 하고 낭패하고 이삭을 포기하게 하고, 다 뽑아주어야 돼요. 그렇게 뽑아 주었으면 그 다음에 다시 거름을 주어야 돼요. 우리가 농사를 지을 때 그랬잖아요. 농사지을 때 풀이 막 잡초가 우거져 있는데 거기에다가 거름을 주는 사람, 비료를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것을 다 뽑아야지. 그래서 곡식만 있을 때 거기에다가 거름을 주는 거예요.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 속에서 내 마음에 이 잘못된 것을 다 뽑아 버렸다면, 잡초를 다 뽑아버렸다면 뭘 해야 됩니까? 이제 희망의 거름을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식물도 주인이 얼마나 사랑하며 정성으로 가꾸어 가느냐에 따라서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고 더 잘 성장할 수 있습니다. 시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꿈과 비전이 없는 일은 마치 다람쥐의 쳇바퀴 돌아가는 것처럼 모두가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희망의 거름을 주어야 돼요. 우리는 날마다 희망의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도 할 수 있다. 잘 된다. 나도 잘 살 수 있다. 나도 행복할 수 있다. 나는 건강하다. 우리 집은 정말로 행복하다. 내가 하는 말이 형통하게 된다. 잘 된다. 우리 나라는 정말로 경제의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만 이 IMF 극복할 수가 있다. 이제는 세계의 모든 경제대국들과 어깨를 겨루어서 당당하게 이길 수가 있다.\" 이런 언어들 모두가 다 희망의 거름인 것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희망의 거름을 자기가 막 주어야 돼요. 자기 가정에도 희망의 거름을 막 주어야 돼요. 자기 기업에도 희망의 거름을 막 주어야 돼요. 자기 나라에도 희망의 거름을 막 주어야 돼요. 우리 교회에도 모든 성도가, 모든 제직이, 한 마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모아서 희망의 거름을 막 주어야 돼요. 저는 지금도 생각합니다. 20대 초반이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이제 민정 이양하는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가지고 취임사에서 나는 다른 말은 다 잊어버렸지만, 이 두 말은 안 잊어버렸어요. \"우리도 잘 살 수 있습니다. 우리 한번 잘 살아 봅시다.\" 직장 생활하면서 야간대학 다니는 그 가난하고 못 먹고 찌들고 고생할 때 저는 그 말을 듣고 나서, 라디오에서 중계방송을 듣는 순간 나는 일손을 딱 놓았어요. 가슴이 막 떨려서, 감격한 거예요. 두 손을 들었어요. 말을 못했어요. 그리고 나서는 나도 모르게 너무 감격하니까 눈물이 팍 쏟아지더라구요. 그리고 얼마나 얼마나 제가 소리를 질렀는데요. \"그래, 나도 잘 살 수 있다고, 우리도 잘 살 수 있다고!\" 나는 여지껏 그때까지 우리 부모님이나, 우리 주위의 친척들이나, 선배들이나, 초등학교에서나, 중학교에서나, 고등학교에서나, 야간대학에서나 누구도 우리 나라가 잘 살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어요. 어떠한 정치인들도 한 사람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분이 대통령 취임사에서 그렇게 말씀했어요. \"우리도 잘 살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봅시다.\" 이것이 그때 당시에 최성규 청년에게 부어진 희망의 거름입니다. 희망의 거름. 그 말 한 마디가 나에게 희망의 거름이 되었다고요. 인생을 바라볼 때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눈이 더 넓어졌어요. 커졌어요. 희망이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 제가 이 많은 간증이라도 하는 지 몰라요. 우리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우리는 우 리의 삶에,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인생에 희망의 거름을 막 주어야 돼요. 성경 66권의 모든 말씀은, 모든 약속은 우리 모두가 다 영혼이 잘 되게 하고 범사가 형통하게 하고 강건하게 하는 희망의 거름이라구요. 성경은 들고 다니는 책이 아니라고 요. 각자에게 부어주는 거예요. 들려주는 거예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넷째로, 기쁨의 결실을 거둘 수 있습니다. 영국의 저명한 수필가 찰스 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단 한번의 웃음은 수백 가지의 신음과 거래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한 번의 웃음, 우리가 수고하며 흘린 눈물은 단 한번의 기쁨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 말인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35년 동안 일본 나라에게 나라를 잃어버리고 다 잃어버리고 나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만났을 때 그 날의 그 기쁨은, 그날의 감격은 35년 동안 우리가 나라를 빼앗긴 슬픔과 고통을 다 일시에 잊어버렸다 그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게 70년 포로 생활할 때에 얼마나 고통 당했냐 그 말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그들을 해방시켜서 다시 이스라엘로 회복시켜줄 때 그들이 기뻐하며 불렀던 노래가 오늘 본문의 말씀이다 그 말인 것입니다. 기쁨은 눈물에 비례해서 커지는 법인 것입니다. 시편 126편 5-6절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더 높은 산에 오르는 사람이 땀을 더 많이 흘릴 뿐만 아니라, 정상에 오른 기쁨도 그만큼 더 크게, 더 많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최종의 결실을 바라보며 내내 인내하며 수고한 사람은 그것을 얻었을 때, 최후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땀흘린 농부가 밥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수고한 결과와 잘 된 것을 볼 때의 기쁨은 단순한 구경꾼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 나라에도 구경꾼이 많아요. 직장에도 구경꾼이 많아요. 가정에도 구경꾼이 많아요. 교회에도 구경꾼이 많아요. 구경꾼은 기쁨이 없습니다. 참여한 사람, 땀흘린 사람, 눈물 흘린 사람, 수고한 사람에게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기쁨이 넘치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눈물 뒤의 기쁨은 우리의 행복의 원천인 것입니다. 수고하고 노동하면서 흘리는 눈물은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모든 수고를 잊고도 남을 만한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인이 자식을 해산하면서 흘리는 고통의 눈물은 해산 직후에 그 자기가 낳은 새 생명을 보는 순간 수고와 아픔은 일시에 끝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면서 흘리는 눈물은 용서와 은혜를 얻은 뒤에 감사와 기쁨으로 변할 수가 있습니다. 제자가 잘 되기 위해서 애타하며 흘리는 스승의 눈물은 졸업과 함께 그 잘 성장한 제자를 바라보면서 감격과 기쁨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얻는 행복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 65편 11-13절입니다. {주의 은택으로 연사에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초장에는 양 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였으매 저희가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우리는 날마다 수고의 눈물을 흘리고, 믿음의 씨앗을 뿌리고, 희망의 거름을 주고, 더 큰 결실을 얻는, 더 큰 기쁨을 얻는 행복의 참 맛을 아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 기 도 -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 하나님은 지금 우리 민족에게, 우리 나라에게 눈물을 흘릴 때를 주셨습니다. 이 눈물이 기쁨으로 바뀌어지게 해 주옵소서. 이 눈물이 탄식이 되지 않게 하시고, 이 눈물이 기쁨이 되어 행복이 되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8.15, 하나님이 하셨다/ 시126:1-6/ 광복절설교
8.15, 하나님이 하셨다 시126:1-6 성도와 불신자는 역사를 보는 눈이 다릅니다. 불신자의 눈으로 볼 때 역사는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성 도의 눈으로 볼 때 역사의 주관자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강한 나라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작정하시 면 역사에서 사라지지만, 아무리 약한 나라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시면 역사의 주도국이 됩니다. 우리나라의 지난 5천 년 역사를 되돌아보면, 주님께서 이 민족을 지키시고 보호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올해로 55주년을 맞는 광복과 이산가족 상봉 역시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해야 할 지,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우리 모두 감격하고 감사하자 올해로 광복 55주년을 맞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나라의 \\\'빛을 되찾게 됨\\\'(光復)을 감사하며, 그 날의 감격을 되새겨야 합니다. 일제 35년의 지배는 빛을 잃고 어두움 가운데 살던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가족들이 징용으로, 학 도병으로, 정신대로 끌려가고, 재산을 공출 당했을 뿐만 아니라, 창씨개명과 신사참배까지 강요당했습니다. 저주와 죽음이 이 땅을 뒤덮었습니다. 그러나 이 민족을 사랑하시고 들어 쓰시려는 주님은 때가 차매 저주와 죽음을 빛과 생명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이 민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생명의 빛, 구원의 빛을 비춰주셔서, 선교하는 나라 로, 성경적 효를 세계 만방에 전하는 나라로 세워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신 것입니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 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시 44:3). 그런데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처럼, 우리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목숨을 걸고 독 립운동을 한 이들의 희생을 잊고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배우지 못하는 국민은 다시 고난의 역사를 되풀이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고, 그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 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빛되신 예수님을 자유롭게 믿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가족의 핍박 속에서 신앙생 활을 해 본 성도는 자유롭게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잘 압니다. 광복은 \\\'나라의 자유\\\' 뿐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은 어렵게 찾은 신앙의 자유에 감사하고 책임을 다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유를 넘어서 방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빛되신 예수 안에서 감사하면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 아담과 하와처럼 감사하지 않고 교만하면 죄와 저주의 속박 아래 놓이게 됩니다. 둘째, 우리 모두 눈물을 흘리자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입니다. 성경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 다』(시 126:5)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광복은 미완의 광복입니다. 아직도 북쪽에는 공산주의라는 저주와 죽음에 눌 린 영혼들이 있고, 남쪽에는 복음을 거부하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의 시편 기자처럼 어둠의 세 력에 포로로 사로잡혀 있는 동족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느헤미야와 에스더가 되어 민족의 아픔 과 죄악을 내 것처럼 여기고 금식하며 기도의 눈물을 흘리면 이 나라와 민족은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눈물은 우리의 영혼을 살립니다. 모든 것이 풍요로워지고 있는 현실과는 반대로 사랑은 점점 빈곤해지고 있습니다. 가정, 교회, 학교, 사회에서 영혼을 향한 안타까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과 정이 메말라 가 고 있으며,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영혼이 강팍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향한 사랑의 눈물이 있는 곳에는 생명과 평안과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다.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자로 받아들인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은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영혼을 살렸습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 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눈물입니다. 셋째, 우리 모두 땀을 흘리자 이 나라의 진정한 광복과 해방은 남과 북이 복음으로 하나될 때입니다. 복음으로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수고와 헌신의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출애굽 당시 육체의 만족을 위해 애굽으로 돌아가려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출 16:3), 평화통 일보다는 현재의 배부름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기 위해 한 손으 로는 일을 하고, 다른 한 손에는 무기를 잡았습니다(느 4:17). 우리 역시 북한의 공산주의는 단호히 거부해야 하지 만, 고통 당하는 북한 동포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물질은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를 세우기 위해서 땀 흘려야 합니다. 이 시대의 특징 중 하나는 부정부패를 고 발하는 것이 죄악시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조차 진리를 주장하지 않으며, 바른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말에 꼭 버려야 할 중의 하나가 \\\"좋은 게 좋은 거야.\\\"라는 말입니다. 이 경우 하나님께서는 잘못한 사 람뿐만 아니라, 그 잘못을 보고도 침묵한 사람에게까지도 책임을 물으십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 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겔 3:18).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다윗 앞에 선 나단처럼, 아합 왕 앞에 선 엘리야처럼,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처럼, 하 나님의 진리를 세상에 보여주는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 우리 조국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우리 조국,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복음을 듣고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밖으로는 공산주의와 힌두교, 이슬람과 불교, 그리고 온갖 잡신을 숭배하는 나라들에 둘러싸여 있을 뿐만 아니라, 안으로는 뿌리 깊은 샤머니즘과 불교 전통, 그리고 철저한 유교적 사고가 사람들의 의 식과 사회구조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작고 약한 이 민족을 택하시고, 고난의 풀무를 지나게 하 시면서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추수꾼으로 부르셨습니다(사 48:10). 성경적 효를 세계에 전하는 민족적 사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와 성도가 있는 우리 조국, 희망이 있습니다. 칼라일은 \\\"믿음을 가진 민족은 위대한 국가 를 건설한다\\\"고 했습니다. 역사의 비극은 하나님의 성전이 \\\"강도의 굴혈\\\"(마 21:13)이 될 때였습니다. 주님은 성도 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빛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빛과 생명을 지체된 우리를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세상에 비추 기를 원하십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면, 이 나라와 민족을 해방시키실 뿐만 아니라, 성령 의 능력으로 평화를 주시고, 장차 복음으로 평화통일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 민족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잃어버린 감사와 기쁨과 눈물과 땀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리하여 평화통일을 이루고, 세계 만방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8.15. 55주년을 맞으며/ 시126:1-6/ 2001-11-09
8.15. 55주년을 맞으며 시126:1-6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 속에서 쓰는 여러 말들 가운데 축제(祝祭)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경축(慶祝)을 뜻합니다. 기쁜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을 감사하고 축하는 잔치를 말합니다. 물론 개인적인 축제, 가정적인 축제, 사회적, 국가적, 민족적 성격의 축제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전세계적인 성격의 축제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 성탄의 축제, 예수 부활의 축제,예수 재림의 축제 같은 것들입니다. 사실상 그리스도인의 축제란 그 자체가 하나님이 베푸신 무한한 은사와 선물에 대한 보은적 감사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마음의 감사와 입술의 고백과 노래로 그리고 육체적 여러 행동과 물질적 감사로 고백하는 감사행위입니다. Ⅰ. 먼저 이스라엘 민족의 축제를 생각합니다.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여러 종류의 축제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애굽에서의 구원을 기념하는 유월절 잔치(축제)가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받은 맥추절은 여름의 축제였습니다. 그리고 추수의 마지막 절기는 사실상 가을의 축제였습니다. 성경은 ‘그 절기’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슥 14:16, 민 29: ). 또한 유대인의 대적 아각 사람 하만의 계교에서 극적인 구원을 받은 왕후 에스더와 모르드개 그리고 전 유대인들이 잔치를 벌인 이른바 부림의 축제가 있습니다. 더욱이 오늘 우리가 받은 본문에서는 바벨론 70년 포로생활에서 해방을 받아 시온의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를 회상하는 환희의 축제를 보게 됩니다. 말하자면 해방의 축제입니다. 하나님은 세계적인 권력자로 새롭게 등장한 고레스로 하여금 선민 이스라엘에게 해방령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귀국령을 내리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까지 명하고, 심지어 백성들에게 은과 금과 기타 물건까지 도와주며, 저들의 신변의 안전과 교통수단까지도 도와주라고 하였습니다(스 1:1-4). 저들은 1차, 2차, 3차에 걸쳐 그렇게도 그리던 조국 이스라엘의 땅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일은 하나님께서 이미 100여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해 놓았던 일의 성취였습니다. 또 포로지 바벨론에서 에스겔이 받은 환상을 통하여 저들에게 예언했던 일들의 성취였습니다. 이때 저들의 마음은 감동이 충만하여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라고 노래하며, 믿기 어려운 기사(奇事) 같은 현실을 토로하고 있습니다(시 126:1). 저들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저들의 혀에는 찬양이 가득 차 버렸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방 여러 나라들도 이스라엘의 해방을 보고 감탄하기를 이는 여호와께서 저들을 위하여 행하신 ‘대사(大事)’라고 하였습니다(시 126:2). 이것은 과거를 회상하는 축제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라고 하였습니다(시 126:3). 저들은 다시 미래적 축제를 기원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아직까지 여러 포로지에 남아 있는 자들의 완전 귀국을 기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저들은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리소서」라고 하였습니다(시 126:4). 여기 ‘남방 시내’란 남방 네게브 지역의 시내로서 평소에 이곳은 말라서 물이 없으나, 가을 우기철에는 물이 가득하게 흐르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노래한 말입니다. 이제 포로지에 남은 동족들이 마치 하나님께서 남방 시내에 물을 채워 돌림같이 그렇게 돌아오게 하시기를 확신하고 기원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랜 포로생활 중에서 눈물을 흘리며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고생하는 때가 얼른 지나가고, 필경은 고국에서 함께 만나는 기쁨이 있게 해달라고 기원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한 미래적 소원을 노래한 축제였습니다(시 126:5).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의 축제는 하나님께 올리는 감사와 보은의 축제였습니다. 그 축제의 내용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대사(大事)였습니다. 곧 해방과 자유의 축제였습니다. 그 축제의 방법들은 마음의 감사와 기쁨, 입술의 웃음과 혀의 찬양들이었습니다. 소고치고 북치며 춤추는 축제였습니다. 전 이스라엘의 민족적 축제였습니다. Ⅱ. 우리가 맞은 2000년 8.15의 축제가 있습니다. 1. 기억하는 축제, 과거를 생각하는 축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1945년 8월 15일이라고 하는 역사 속에 묻혀 있는 날과 사건을 기억하고 되새기면서, 기뻐하고 춤추는 축제입니다. 적어도 이날은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만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우리나라와 민족이 일본의 통치 아래서 받아오던 36년 간의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민족과 역사가 존재할 동안에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우리의 현재가 잘 되고 부강해지면 부강해질수록 역사 속에 묻혀 있는 1945년 8월 15일을 기억하고, 되찾아 감격하고, 감사하는 축제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날입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의 날인 삼일절이나 민족해방의 날인 8.15 광복절을 국경일로 정하고, 이날을 기념하며 기쁨으로 경축하는 것입니다. (1) 8. 15 해방은 민족사적으로 정치적 해방과 자유를 경축하는 축제일입니다. ① 빼앗긴 땅(국토)을 도로 찾은 기쁨, ② 빼앗겨버린 인권(국민)을 도로 찾은 기쁨, ③ 그리고 우리의 주권(통치)을 도로 찾은 기쁨입니다. (2) 더욱이 종교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되찾은 일을 감사해야 할 날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민족적인 수난과 함께 기독교인이므로 받아야 하는 신앙적 수난을 겸하여 받았습니다. 빼앗긴 나라와 민족과 역사를 되찾아야 된다고 하는 애국과 애족심뿐 아니라, 일본의 이른바 천조대신(태양신의 아들) 숭배와 신사참배를 반대함으로 인해 신앙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 결과 1938년 당시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을 하는 교회사적 치욕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 주기철 목사를 위시한 많은 진리의 종들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정면으로 부딪혀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200여 교회가 폐문이 되고, 2000여 신도가 투옥이 되고, 50여 명의 교직자들은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된 것입니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일제의 교회 탄압은 극에 달하여, 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투옥되었습니다. 1942년에는 일제의 강요로 각 교파가 모두 고유한 명칭을 버리고 소위 교단(敎團)이라고 하는 일본 교파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일에는 신교 교파를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시켜 명실공히 일본 기독교 교단에 완전히 소속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법적, 비신앙적 강요에 응하지 않는 인물들은 투옥을 하거나 강단에서 추방하고 금족령, 함구령을 내려 실제적 신앙활동이나 포교활동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다수의 교회를 폐합시키고, 예배시간의 제한, 주일 교인 근로 동원, 주일 선(先) 신사참배, 후(後) 교회 예배를 실시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뜻있는 신도들은 암혈과 토굴 그리고 산속으로 피하여 흩어져 은둔하며 은밀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한때 70만을 헤아리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의 수는 그 반으로 줄어들고 말았습니다. 로마 천주교는 이러한 신사참배를 무조건 수락하고 일본 정책에 순응하였기 때문에 박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교, 특히 장로교는 그것이 성경과 신조와 교리와 신앙양심에 위배된다고 결사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핍박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은 이에 그치지 않고 1945년 8월 17일 밤을 기하여, 전 한국에 산재하는 신사참배를 반대한 교회 지도자와 거기에 동조하는 책임자들을 모두 함께 몰살시키라는 무서운 지령을 내려, 이것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위하여 그 환난의 날을 사흘 감하고, 원자탄을 이용하여 일본을 불로 심판하시고야 만 것입니다. 이렇게 받은 8.15 해방이고 보면 우리 민족 전체는 물론이고, 특별히 기독 신자들에게 찾아온 8.15는 더욱 감격스러운 날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S.F.C. 20년사」를 쓰면서 1945년 8월 15일이야말로 정치적으로 우리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 통치에서 자유와 해방을 받은 날이요, 특별히 기독교에 있어서 종교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20세기 극동 아시아의 새 출애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금년, 2000년 8월 15일도 예외없이 우리 민족에게는 과거를 회상하는 기억의 축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기억의 축제란 바로 해방의 축제, 자유의 축제입니다. 2. 오늘의 축제, 곧 현재의 축제가 있습니다. 새 천년을 시작하는 첫해인 금년 2000년은 우리에게 실로 기록적인 해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흥분하고 있는 평화적인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이었습니다. 이 땅에 6.25 동란이 일어난지 꼭 50년만이고, 해방된 지 55년이 되는 해의 경사입니다. 이 남북한 정상회담을 현실로 나타내기 위해 바로 지난 7월 29일부터 31일까지 장관급으로 구성된 제1차 실무회담을 이미 서울에서 개최하고, 6개 사항의 합의문을 발표한 바가 있습니다. ① 남북 장관급 회담 정례화 ② 8.15를 계기로 96년 11월에 중단된 판문점 연락 사무소의 기능 재개 ③ 8.15를 즈음하여 남북한 화해주간 설정 및 축하행사 ④ 경의선 철도 복구 ⑤ 일본 조총련 동포 고향방문 추진 ⑥ 8월 29일부터 31일까지 평양에서 장관급 회담 개최 등을 결정하여 공동 보도문으로 발표하였습니다(2000. 7. 31). 정말 작년 8.15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아닙니까? 바야흐로 민족 대화합과 통일의 꿈이 이제 현실처럼 우리 앞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태산 같은 문제가 남아 있지만 시작이 반이요,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실로 2000년 6월은 6.25 동란이 일어났던 동족상잔의 달일 뿐만 아니라 6.15평화선언이 발표된 달이었습니다. 2000년 8월은 해방의 감격만 되새기는 달이 아니라, 남북간에 화해의 잔치가 벌어지는 달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8.15를 전후하여 남북한 이산가족들이 만날 수 있도록 만남을 위한 일이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실로 꿈 같은 일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축제, 현재의 축제, 2000년 8월의 축제는 평화로 가는 축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저 시편 성도가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리소서…」(시 126:4)라고 하며 남은 백성들의 귀국을 생각하며 기원의 축제를 올리듯이, 앞으로 계 속하여 남북한의 화해축제, 평화로 가는 축제, 통일로 가는 축제가 일어나기를 기원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2000년 8월은 해방 감격의 축제 위에 남북평화의 축제가 더해진 달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축제란 사실상 기쁨 극치의 돌파구입니다. 축제의 정신적 요소는 기적 같이 일어난 사건 앞에 감사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축제란 가장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사건을 전인을 동원하여 밖으로 노출시키는 기쁨의 최대 발로입니다. 우리가 받은 2000년 8월의 축제는 결코 우연에 돌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이 8월의 축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에 아무런 좋은 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큰 이유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이기 때문입니다(시 127:1). 하나님이 축복하시지 않는 온갖 인간의 경제 수단도 결국은 헛것이 되고,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가정의 행복이란 생각조차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시 127:2-5, 128: ). 국가와 민족의 흥망이 절대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와 민족의 문제들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딤전 2:2).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의 마지막 성사는 하나님 자신의 결재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통치주요, 섭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허락이 없는 기쁨이나 슬픔이나 축복이 우리에게 올 수가 없습니다. 무의미의 반복이나 역사적 진화론이나 맹목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2000년 8월은 우리에게 축제의 달이 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우리는 이 달을 1945년 8월 15일을 회상하고, 기억하고, 감격하고, 되새기는 해방의 축제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또한 2000년의 8월은 현재를 감사하는 축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50년만의 남북이산가족이 만나기 시작하는 감격과 기쁨의 잔치가 이루어지는 만남의 축제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북정상회담을 통한 6.15 선언을 실천하기 위하여 남북한의 장관급 회담이 서울에서 이미 이루어졌고, 또 8월 말에 평양에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평화로 가는 축제, 화해로 가는 축제입니다. 이 아름다운 평화로 가는 축제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평화시대로 가는 길을 걷는 자들은 평화시대를 사는 값을 해야 합니다. 결코 하나님이 주신 이 축복의 때를 주객(酒客)으로 더불어 먹고 마시면서, 주인이 더디 온다고 착각하고 방종해서는 안됩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교회가 받은 종말 세계 선교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자기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아는 교회 그리고 자기의 존재적 사명이 확실한 교회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받고야 말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 교회, 그 신자들을 붙잡고 하나님 자신의 마지막 일을 해야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축제를 세계선교의 수단으로 선용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8.15가 주는 교훈/ 왕상12:25-32/ 광복절설교
8.15가 주는 교훈 왕상12:25-32 금년은 광복 56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56년 전의 조국 광복의 그 감격을 우리 민족은 지금 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8.15의 의미가 퇴색되어지는 것 같아서 이 시간에는 8.15가 주는 교훈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8.15는 우리 민족에게 일제의 36년간의 노예 생활에서 풀려난 해방의 날이면서 세계 제2차 대전을 종결시킨 연합군의 승리의 날로 인식되어 집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 성에게도 8.15가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원래 유다 왕조는 통일 왕조였으나 솔로몬 이후 르 호보암의 실정으로 나라가 32도를 중심 하여 남쪽은 유대나라, 북쪽은 이스라엘로 분열되었 습니다. 그러니까 8.15는 이스라엘의 건국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떠나는 날이며 죄악의 날이고 저주받는 날이었습니다. 이날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의 눈물로 땅을 치며 앙천 대곡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8.15가 해방의 날인 동시에 자유의 날이며 남북 분열의 날로 이날부터 38 도 이북에는 하나님 대신 유물주의로 팽창해 왔고 고통의 삶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렇다 면 8.15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⑴,민족 분열을 막아야 합니다. 북왕국 여로보암은 갑자기 얻어진 주권이 마치 자기의 것인양 자기의 왕국을 구축하고자 하 였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정권을 잡기는 했지만 북쪽에 있는 사람들이 신앙의 중심지를 찾아 남쪽으로 갈 것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에 대한 반역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 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북쪽의 백성들이 남쪽 유다로 못 가게 가로막았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가로 먹고 못 가게 한다고 하나님을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분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사람들의 뜻에 따라 마음대로 행동함으로 남북이 분열되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8.15일이 건국의 기쁜 날이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같은 민족이 그때로부터 남북이 분열되는 상처의 날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간 에는 요단강을 건너서 살던 지파들과 건너지 않고 살던 지파들 간에 오랜 세월을 지나서 32 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북으로 분열되어 300년간을 분쟁하게 되었습니다. 한 민족은 한데 뭉쳐서 살아야 합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는 일찍이 우 리 나라를 건지려고 애쓰던 애국 선열들의 표어였으며 생의 지표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갈라지기 쉬운 사람들의 마음을 이미 갈파하시고서 \\\\\\\\\\\\\\\"항상 기도하라, 하나가 되라\\\\\\\\\\\\\\\"고(엡 4:1-8)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도 8.15가 일제의 36년 압박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날이면서 그 날이 바로 남북이 분열되는 비극의 날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해방의 기쁨 과 감격은 잠시뿐이고 외세에 의해 조국은 남북으로 갈라지고 말았으며, 그후로 한 민족은 같은 민족이면서도 남북으로 나눠져 살고 있으며, 지금은 또 동서로 나눠져서 매사에 대립 을 하며 사는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는 기쁨이면 만족할 것인데 정권 싸 움으로 분열의 추태를 보였으며 우리 기독교인들은 죄에서 해방 받은 그것 하나면 될 터인 데 교회가 분열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8.15는 민족 분 열의 날이었던 것처럼 우리 민족도 8.15는 민족 분열의 뼈아픈 날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해방 된 지 56주년을 맞으면서 어떻든지 민족 분열을 막는 지혜를 모아야 하겠습니다. ⑵,배금주의 사상을 버려야 합니다. 여로보암은 북 왕국 이스라엘을 건국한 후 8.15를 건국 기념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민심을 수습하고 국론을 통일시키기 위해 금송아지를 세워 놓고 하나님으로 경배하게 했습니다. 그 런데 여로보암의 이런 행위는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려는 잘못된 행위입니다. 우리 가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고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신적인 분입시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며, 거룩 하시며, 전지 전능하시며, 무소 부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그 분을 오늘날도 말씀을 통해서 만날 수 있고 교제할 수 있으며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행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피조물의 형상 곧 비인격적인 형상으로 바꾸 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로보암이 금 신상을 만든 것은 일종의 배금주의 행동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 다. 금송아지는 곧 배금주의를 상징합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최근 들어 배금주의 사상으로 팽배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가치판단을 인격 여하에 두지 않고 월급 봉투가 얼마나 두틈 하느냐에 따르며,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판단하지 않고 얼마나 수입이 많으냐에 따라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진정한 사람되 게 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고 졸업 후 어떻게 해야 좋은 학교에 가느냐에 두고 있으며, 좋은 학교에 갈려고 하는 것은 그래야 졸업 후 취직이 잘되고 그래서 돈을 잘 벌어들 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인명은 돈보다 더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돈이 생기는 일이면 사람을 죽 이면서 까지라도 목적을 달성하는 세상이니 오늘의 세상이야말로 배금주의가 팽배한 세상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북에는 하나님은 없고 유물주의가 판을 치고 있으며 남한에는 하나 님보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금송아지 사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오늘의 현상을 보면 돈 때문에 신앙을 팔고 돈 때문에 형제간의 의리도 끊고 부자간에도 원 수가 되고 교우간에도 원수를 맺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 모든 일들은 금송아지를 하나 님으로 섬기던 여로보암 시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온 천하보다 사람 의 생명이 귀중한 것이니 우리는 8.15 56주년을 맞으면서 배금주의 사상의 팽창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⑶,신앙 안에서 자유와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절기 제도는 이스라엘의 신앙에 중요한 규례였으며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 권과 하나님의 형상이 바꿔지자 이제는 하나님의 준염하신 명령이 인간의 명령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철저하게 자기 중심, 물질 중심,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현대인들 도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인간의 명령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서게 된 것이며 동족끼리 피를 흘리는 전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전쟁은 피차간에 피를 흘리는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서 어쩌든지 전쟁을 하지 말아 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제2차 대전의 목적은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군국주의에게 정복당한 약소민족들에게 자 유와 해방과 평화를 주기 위하여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들이 전쟁을 한 것입니다. 1945년 초 에 독일과 이탈리아가 패하고 동년 8,9월에는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로 36여만 명의 희 생을 치른 후 일본이 항복했습니다. 이제 우리 민족은 자유와 평화를 얻은 줄로 알았는데 세게는 다시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휩 싸이게 되었습니다. 과학과 지식의 발달은 인간에게 평안과 행복을 주기도 했으나 오히려 불안과 공포를 더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역사 해설 가인 피즈 교수는 \\\\\\\\\\\\\\\"인간은 결국 자 기를 파멸시키는 괴물을 만들고 그 앞에서 떨고 있다\\\\\\\\\\\\\\\"고 했습니다. 8.15의 기쁨을 만끽하던 우리 민족에게는 시대의 절망적인 고뇌와 쓴잔이 계속 찾아 왔습니다. 6.25를 통해서 조국은 초토화되었고 천만 이산가족이 생겨서 망향의 설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정치가나 역사가 들은 오늘의 현실을 불안으로 보고 있으며, 종교가들은 말세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우리 이간이 누릴 수 있는 참 자유와 평안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참 평화를 누리며 참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요14:27 \\\\\\\\\\\\\\\" 내가 너희에게 참 평안을 주노니 내가 주는 평안함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너희 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즉 세상 방법으로는 평안이나 자유 를 누릴 수 없으나 주님이 주신 신앙을 가질 때만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참된 신앙을 통하여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썩어질 금신으로 대치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하겠습니다.
8.15가 주는 교훈/ 왕상12:25-32/ 광복절설교/ 2001-08-15
8.15가 주는 교훈 왕상12:25-32 금년은 광복 56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56년 전의 조국 광복의 그 감격을 우리 민족은 지금 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8.15의 의미가 퇴색되어지는 것 같아서 이 시간에는 8.15가 주는 교훈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8.15는 우리 민족에게 일제의 36년간의 노예 생활에서 풀려난 해방의 날이면서 세계 제2차 대전을 종결시킨 연합군의 승리의 날로 인식되어 집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 성에게도 8.15가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원래 유다 왕조는 통일 왕조였으나 솔로몬 이후 르 호보암의 실정으로 나라가 32도를 중심 하여 남쪽은 유대나라, 북쪽은 이스라엘로 분열되었 습니다. 그러니까 8.15는 이스라엘의 건국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떠나는 날이며 죄악의 날이고 저주받는 날이었습니다. 이날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의 눈물로 땅을 치며 앙천 대곡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8.15가 해방의 날인 동시에 자유의 날이며 남북 분열의 날로 이날부터 38 도 이북에는 하나님 대신 유물주의로 팽창해 왔고 고통의 삶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렇다 면 8.15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⑴,민족 분열을 막아야 합니다. 북왕국 여로보암은 갑자기 얻어진 주권이 마치 자기의 것인양 자기의 왕국을 구축하고자 하 였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정권을 잡기는 했지만 북쪽에 있는 사람들이 신앙의 중심지를 찾아 남쪽으로 갈 것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에 대한 반역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 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북쪽의 백성들이 남쪽 유다로 못 가게 가로막았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가로 먹고 못 가게 한다고 하나님을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분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사람들의 뜻에 따라 마음대로 행동함으로 남북이 분열되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8.15일이 건국의 기쁜 날이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같은 민족이 그때로부터 남북이 분열되는 상처의 날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간 에는 요단강을 건너서 살던 지파들과 건너지 않고 살던 지파들 간에 오랜 세월을 지나서 32 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북으로 분열되어 300년간을 분쟁하게 되었습니다. 한 민족은 한데 뭉쳐서 살아야 합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는 일찍이 우 리 나라를 건지려고 애쓰던 애국 선열들의 표어였으며 생의 지표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갈라지기 쉬운 사람들의 마음을 이미 갈파하시고서 \"항상 기도하라, 하나가 되라\"고(엡 4:1-8)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도 8.15가 일제의 36년 압박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날이면서 그 날이 바로 남북이 분열되는 비극의 날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해방의 기쁨 과 감격은 잠시뿐이고 외세에 의해 조국은 남북으로 갈라지고 말았으며, 그후로 한 민족은 같은 민족이면서도 남북으로 나눠져 살고 있으며, 지금은 또 동서로 나눠져서 매사에 대립 을 하며 사는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는 기쁨이면 만족할 것인데 정권 싸 움으로 분열의 추태를 보였으며 우리 기독교인들은 죄에서 해방 받은 그것 하나면 될 터인 데 교회가 분열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8.15는 민족 분 열의 날이었던 것처럼 우리 민족도 8.15는 민족 분열의 뼈아픈 날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해방 된 지 56주년을 맞으면서 어떻든지 민족 분열을 막는 지혜를 모아야 하겠습니다. ⑵,배금주의 사상을 버려야 합니다. 여로보암은 북 왕국 이스라엘을 건국한 후 8.15를 건국 기념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민심을 수습하고 국론을 통일시키기 위해 금송아지를 세워 놓고 하나님으로 경배하게 했습니다. 그 런데 여로보암의 이런 행위는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려는 잘못된 행위입니다. 우리 가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고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신적인 분입시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며, 거룩 하시며, 전지 전능하시며, 무소 부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그 분을 오늘날도 말씀을 통해서 만날 수 있고 교제할 수 있으며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행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피조물의 형상 곧 비인격적인 형상으로 바꾸 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로보암이 금 신상을 만든 것은 일종의 배금주의 행동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 다. 금송아지는 곧 배금주의를 상징합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최근 들어 배금주의 사상으로 팽배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가치판단을 인격 여하에 두지 않고 월급 봉투가 얼마나 두틈 하느냐에 따르며,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판단하지 않고 얼마나 수입이 많으냐에 따라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진정한 사람되 게 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고 졸업 후 어떻게 해야 좋은 학교에 가느냐에 두고 있으며, 좋은 학교에 갈려고 하는 것은 그래야 졸업 후 취직이 잘되고 그래서 돈을 잘 벌어들 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인명은 돈보다 더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돈이 생기는 일이면 사람을 죽 이면서 까지라도 목적을 달성하는 세상이니 오늘의 세상이야말로 배금주의가 팽배한 세상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북에는 하나님은 없고 유물주의가 판을 치고 있으며 남한에는 하나 님보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금송아지 사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오늘의 현상을 보면 돈 때문에 신앙을 팔고 돈 때문에 형제간의 의리도 끊고 부자간에도 원 수가 되고 교우간에도 원수를 맺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 모든 일들은 금송아지를 하나 님으로 섬기던 여로보암 시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온 천하보다 사람 의 생명이 귀중한 것이니 우리는 8.15 56주년을 맞으면서 배금주의 사상의 팽창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⑶,신앙 안에서 자유와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절기 제도는 이스라엘의 신앙에 중요한 규례였으며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 권과 하나님의 형상이 바꿔지자 이제는 하나님의 준염하신 명령이 인간의 명령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철저하게 자기 중심, 물질 중심,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현대인들 도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인간의 명령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서게 된 것이며 동족끼리 피를 흘리는 전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전쟁은 피차간에 피를 흘리는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서 어쩌든지 전쟁을 하지 말아 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제2차 대전의 목적은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군국주의에게 정복당한 약소민족들에게 자 유와 해방과 평화를 주기 위하여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들이 전쟁을 한 것입니다. 1945년 초 에 독일과 이탈리아가 패하고 동년 8,9월에는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로 36여만 명의 희 생을 치른 후 일본이 항복했습니다. 이제 우리 민족은 자유와 평화를 얻은 줄로 알았는데 세게는 다시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휩 싸이게 되었습니다. 과학과 지식의 발달은 인간에게 평안과 행복을 주기도 했으나 오히려 불안과 공포를 더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역사 해설 가인 피즈 교수는 \"인간은 결국 자 기를 파멸시키는 괴물을 만들고 그 앞에서 떨고 있다\"고 했습니다. 8.15의 기쁨을 만끽하던 우리 민족에게는 시대의 절망적인 고뇌와 쓴잔이 계속 찾아 왔습니다. 6.25를 통해서 조국은 초토화되었고 천만 이산가족이 생겨서 망향의 설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정치가나 역사가 들은 오늘의 현실을 불안으로 보고 있으며, 종교가들은 말세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우리 이간이 누릴 수 있는 참 자유와 평안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참 평화를 누리며 참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요14:27 \" 내가 너희에게 참 평안을 주노니 내가 주는 평안함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너희 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즉 세상 방법으로는 평안이나 자유 를 누릴 수 없으나 주님이 주신 신앙을 가질 때만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참된 신앙을 통하여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썩어질 금신으로 대치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하겠습니다.
8.15가 주는 교훈/왕상12:25-32
8.15가 주는 교훈/왕상12:25-32 2001-11-21 21:51:02 read : 304 금년은 광복 56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56년 전의 조국 광복의 그 감격을 우리 민족은 지금 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8.15의 의미가 퇴색되어지는 것 같아서 이 시간에는 8.15가 주는 교훈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8.15는 우리 민족에게 일제의 36년간의 노예 생활에서 풀려난 해방의 날이면서 세계 제2차 대전을 종결시킨 연합군의 승리의 날로 인식되어 집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 성에게도 8.15가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원래 유다 왕조는 통일 왕조였으나 솔로몬 이후 르 호보암의 실정으로 나라가 32도를 중심 하여 남쪽은 유대나라, 북쪽은 이스라엘로 분열되었 습니다. 그러니까 8.15는 이스라엘의 건국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떠나는 날이며 죄악의 날이고 저주받는 날이었습니다. 이날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의 눈물로 땅을 치며 앙천 대곡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8.15가 해방의 날인 동시에 자유의 날이며 남북 분열의 날로 이날부터 38 도 이북에는 하나님 대신 유물주의로 팽창해 왔고 고통의 삶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렇다 면 8.15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⑴,민족 분열을 막아야 합니다. 북왕국 여로보암은 갑자기 얻어진 주권이 마치 자기의 것인양 자기의 왕국을 구축하고자 하 였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정권을 잡기는 했지만 북쪽에 있는 사람들이 신앙의 중심지를 찾아 남쪽으로 갈 것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에 대한 반역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 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북쪽의 백성들이 남쪽 유다로 못 가게 가로막았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가로 먹고 못 가게 한다고 하나님을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분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사람들의 뜻에 따라 마음대로 행동함으로 남북이 분열되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8.15일이 건국의 기쁜 날이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같은 민족이 그때로부터 남북이 분열되는 상처의 날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간 에는 요단강을 건너서 살던 지파들과 건너지 않고 살던 지파들 간에 오랜 세월을 지나서 32 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북으로 분열되어 300년간을 분쟁하게 되었습니다. 한 민족은 한데 뭉쳐서 살아야 합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는 일찍이 우 리 나라를 건지려고 애쓰던 애국 선열들의 표어였으며 생의 지표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갈라지기 쉬운 사람들의 마음을 이미 갈파하시고서 "항상 기도하라, 하나가 되라"고(엡 4:1-8)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도 8.15가 일제의 36년 압박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날이면서 그 날이 바로 남북이 분열되는 비극의 날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해방의 기쁨 과 감격은 잠시뿐이고 외세에 의해 조국은 남북으로 갈라지고 말았으며, 그후로 한 민족은 같은 민족이면서도 남북으로 나눠져 살고 있으며, 지금은 또 동서로 나눠져서 매사에 대립 을 하며 사는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는 기쁨이면 만족할 것인데 정권 싸 움으로 분열의 추태를 보였으며 우리 기독교인들은 죄에서 해방 받은 그것 하나면 될 터인 데 교회가 분열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8.15는 민족 분 열의 날이었던 것처럼 우리 민족도 8.15는 민족 분열의 뼈아픈 날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해방 된 지 56주년을 맞으면서 어떻든지 민족 분열을 막는 지혜를 모아야 하겠습니다. ⑵,배금주의 사상을 버려야 합니다. 여로보암은 북 왕국 이스라엘을 건국한 후 8.15를 건국 기념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민심을 수습하고 국론을 통일시키기 위해 금송아지를 세워 놓고 하나님으로 경배하게 했습니다. 그 런데 여로보암의 이런 행위는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려는 잘못된 행위입니다. 우리 가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고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신적인 분입시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며, 거룩 하시며, 전지 전능하시며, 무소 부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그 분을 오늘날도 말씀을 통해서 만날 수 있고 교제할 수 있으며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행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피조물의 형상 곧 비인격적인 형상으로 바꾸 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로보암이 금 신상을 만든 것은 일종의 배금주의 행동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 다. 금송아지는 곧 배금주의를 상징합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최근 들어 배금주의 사상으로 팽배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가치판단을 인격 여하에 두지 않고 월급 봉투가 얼마나 두틈 하느냐에 따르며,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판단하지 않고 얼마나 수입이 많으냐에 따라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진정한 사람되 게 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고 졸업 후 어떻게 해야 좋은 학교에 가느냐에 두고 있으며, 좋은 학교에 갈려고 하는 것은 그래야 졸업 후 취직이 잘되고 그래서 돈을 잘 벌어들 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인명은 돈보다 더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돈이 생기는 일이면 사람을 죽 이면서 까지라도 목적을 달성하는 세상이니 오늘의 세상이야말로 배금주의가 팽배한 세상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북에는 하나님은 없고 유물주의가 판을 치고 있으며 남한에는 하나 님보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금송아지 사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오늘의 현상을 보면 돈 때문에 신앙을 팔고 돈 때문에 형제간의 의리도 끊고 부자간에도 원 수가 되고 교우간에도 원수를 맺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 모든 일들은 금송아지를 하나 님으로 섬기던 여로보암 시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온 천하보다 사람 의 생명이 귀중한 것이니 우리는 8.15 56주년을 맞으면서 배금주의 사상의 팽창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⑶,신앙 안에서 자유와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절기 제도는 이스라엘의 신앙에 중요한 규례였으며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 권과 하나님의 형상이 바꿔지자 이제는 하나님의 준염하신 명령이 인간의 명령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철저하게 자기 중심, 물질 중심,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현대인들 도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인간의 명령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서게 된 것이며 동족끼리 피를 흘리는 전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전쟁은 피차간에 피를 흘리는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서 어쩌든지 전쟁을 하지 말아 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제2차 대전의 목적은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군국주의에게 정복당한 약소민족들에게 자 유와 해방과 평화를 주기 위하여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들이 전쟁을 한 것입니다. 1945년 초 에 독일과 이탈리아가 패하고 동년 8,9월에는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로 36여만 명의 희 생을 치른 후 일본이 항복했습니다. 이제 우리 민족은 자유와 평화를 얻은 줄로 알았는데 세게는 다시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휩 싸이게 되었습니다. 과학과 지식의 발달은 인간에게 평안과 행복을 주기도 했으나 오히려 불안과 공포를 더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역사 해설 가인 피즈 교수는 "인간은 결국 자 기를 파멸시키는 괴물을 만들고 그 앞에서 떨고 있다"고 했습니다. 8.15의 기쁨을 만끽하던 우리 민족에게는 시대의 절망적인 고뇌와 쓴잔이 계속 찾아 왔습니다. 6.25를 통해서 조국은 초토화되었고 천만 이산가족이 생겨서 망향의 설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정치가나 역사가 들은 오늘의 현실을 불안으로 보고 있으며, 종교가들은 말세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우리 이간이 누릴 수 있는 참 자유와 평안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참 평화를 누리며 참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요14:27 " 내가 너희에게 참 평안을 주노니 내가 주는 평안함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너희 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즉 세상 방법으로는 평안이나 자유 를 누릴 수 없으나 주님이 주신 신앙을 가질 때만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참된 신앙을 통하여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썩어질 금신으로 대치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하겠습니다.
8.15와 해방/롬6:1-23
8.15와 해방/롬6:1-23 2004-03-11 12:20:25 read : 73 지금으로부터 49년전인 1945년 8월 15일, 우리 대한민국은 일제 식민지의 가혹한 통치에서 벗어나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전국의 일장기가 사라지고 집지마다 태극기가 펄럭이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그렇게도 서슬이 퍼렇던 일본 순사들과 헌병들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일본신사가 파괴되었으며 곳곳에 서 임아던 일본의 간판들이 길거리에서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생명의 위협을 받아 피신해 있던 애국지사들은 만인의 추앙 속에 모습을 드러내고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갔던 우리 동포들이 하나 둘씩 귀환동포란 이름으로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한되어 함박 웃음을 웃었고 길거리고 쏟아져 나와 손에 손을 잡고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불렀습니다. 참으로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해방과 자유가 가져다 준 기쁨과 감격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광복 49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영혼의 해방과 자유에 관하여 함께 생각하면서 주님께서 2천년 전에 어떤 속박에서 우리의 해방을 선언해 주셨는지 여러분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마귀의 종이 되어 기나긴 세월동안 마귀의 발 끝에 짓밟히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2천년 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해 골고자 언덕 갈보리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시고 그 찢긴 몸과 흘린 피로서 우리들에게 해방을 선언해 주셨습니다. 1.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자손입니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칸이 난다\'는 속담처럼 아담으로 시어서 아담으로 태어난 것이 인간의 생존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범죄해 쫓겨난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손들은 태에서부터 이미 죄악의 씨를 받아 죄인으로서 잉태되고 죄인으로 자라서 탄생했습니다. 또한 죄의 사슬에 묶여서 이 세상에 사련서 일생동안 죄와 불의와 추악의 종노릇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아무도 죄에 대하여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라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1-24)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수양을 닦고 도덕을 쌓고 교육을 시켜도 그 지체 속에 있는 죄악의 법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마음으로 아무리 의롭게 살고 거룩하게 깨끗하게 살려고 노력해도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이 일어니사 그 마음의 법과 싸워 우리를 포로로 잡아서 계속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은 우리를 원죄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우리의 모든 자범죄를 일생동안 다 씻어 주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의 생명의 법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죄의 사슬에서 해방된 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 죄에 대해서 단호하게 저항할 때 죄는 다시 우리를 포로로 잡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인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죄의 종으로 자신을 내어 주기 전에는 죄가 우리를 이끌고 갈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보혈의 능력, 성령의 권세로 말미암아 죄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2. 우리는 율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시내사에서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진 법입니다. 율법을 주신 이유는 인간들이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노력과 수양과 도덕으로 하나님처럼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깨뜨리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를 계명에 비추어 보면 우리의 행위가 얼마나 계명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 네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우상에 절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을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을 탐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십계명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비춰볼 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계명에 모자라는 죄인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또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 죄성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십니다. 인간 히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죄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 함으로 죄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도록 하기 위해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또한 십계명은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두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법대로 행하지 않는 모든 사라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십계명은 인간의 교만을 깨뜨리고 인간에게 죄악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며 하나님의 법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대 아래 거하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 받을 수 없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늘로 나오도록 해줍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올 때 보혈의 피로 우리 일생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죄악을 도말하십니다. 성경은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골 2:1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율법을 이기셨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용서받고 성령과 더불어 살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으므로 죄와 사망의 법을 들추어 낼 율법이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율법은 우리를 도와주는 선생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일 뿐이지 율법 자체가 우리를 묶어서 심판하고 정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육신의 정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인간 속에 있는 타락하고 부패한 성품입니다. 수양과 도덕,노력과 교육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육신의 정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롬 7:18-2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선하게 살려고 해도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악의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이겨서 포로로 잡아 언제나 죄와 악을 범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인격적이고 교육을 시키고 윤리와 도덕을 가르쳐도 이 세상은 부정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부패와 죄악의 홍수가 사람들을 휘감아 타락한 길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육신 안에 거하는 정욕과 죄악의 법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힘으로도 능력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친히 육체의 고난을 받으시고 육신 안에 있는 정욕과 죄악을 다 멸하셨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사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쫓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쫓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벧전 4:1-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육체 속에 있는 음란과 정욕, 술취함과 방탕함과 연락, 그리고 무범한 우상숭배들이 육체에 나타나는 것을 정복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우리 마음 속에 영접할 때 육체를 이기신 그리스도의영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육체의 정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의 정욕을 완전히 이기셨습니다. 로마서 8장 3절로 4절에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율법을 주어도 육신이 죄악에 묶여 있기 때문에 율법이 도저히 사람들을 의롭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 육신의 모든 죄를 다 책임지시고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법이 이루어지고 육신의 정욕을 이기도록 역사해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해방자로 오셨습니다. 성경으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시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하고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면 성령님께서 육체의 일을 다 멸하시고 의를 이루도록 해주십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죄악의 몸은 죽고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우리 영이 의롭게 되어 살아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0절에는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몬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5장16절에서는 \"내가 이르노니 너하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시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 우리는 마귀에게서 해방되었습니다.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마귀의 종으로 태어났습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자입니다. 마귀는 인생을 꾀여서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고 이 세상 종교를 따라가게 만듭니다. 마귀의 제1목표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어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석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과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18-2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능히 알 수 있습니다. 저 높은 하늘과 수 많은 별들과 태양, 아름다운 자연과 생명체들이 우연히 생겨날 수는 없습니다. 창조자는 분명히 계십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의 형상이나 금수나 버러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 놓고 잡신과 우상을 섬기도록 유혹합니다. 또한 마귀는 사람들이 세속을 좇아 살도록 미혹합니다. 에베소서2장2절로3절에는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람들이 세상 풍속과 육신의 욕심을 따라서 제 마음대로 살면서 하나니을 저버리도록 유혹합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은 젊은시절 마약중독자였습니다. 그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는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회개의 간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더니 더럽고 악한 영들이 튀어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고 그순간 마약에서 자유함을 얻었다는 간증을 들어 보았습니다. 성경은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게 되면 악한 마귀는 한 길로 왔다가 일곱길로 도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마귀의 권세는 십자가에서 무너졌고 우리는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을 얻게 되었습니다. 5. 우리는 사망의 공포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인간의 최대 공포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이 사망의 공포를 사람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의 공포를 잔잔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경은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4-1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공포 속에서 마귀의 종이 되어 죽기를 두려워하며 떨고 있는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자유와 해방을 선물로 주셨고 영생과 소망의 빛을 비춰 주셨습니다. 성경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여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아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0-22). 아담 안에서 죽은 우리가 예수안에서 이제 사망을 이기고 살아나서 사망의 공포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죽은 자와 살아서 부활을 얻는 자, 모두 사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1절에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우리는 죽음 앞에 두려워 할 필요와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살아남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51절로 55절에는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망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영원히 철폐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주시는 참된 해방과 자유를 통해 속박하는 원수를 물리치고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8·15의 은혜/ 렘29:11/ 조용기 목사/ 2010. 8·15 대성회 설교문/ 2010-08-15
8·15의 은혜 렘29:11 1945년 8월15일 우리는 일제 36년간의 압박과 설움의 노예생활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었습니다. 사람들은 벅차오르는 감격으로 태극기를 손에 들고 거리로 뛰어나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이제 해방된 지 65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과거 일제의 무력 앞에서 국권을 잃고 겪어야 했던 그 고통과 불행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광복 65주년을 맞은 우리 신앙인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첫째,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본은 신사 참배와 아미데라스 오미가미(일본 신화 속 해의 여신)를 강요하며 정신적·종교적 지배를 꾀했습니다. 한민족은 말과 글을 빼앗기고 일본 말과 글을 써야 했습니다. 젊은 청년들은 총알받이로 군대에 동원됐으며, 젊은 여성은 정신대로 끌려가 일본 군경의 위안부가 됐습니다. 성씨를 빼앗기고 중년은 광산과 공장 노동자로 끌려갔습니다. 이런 암울한 현실 속에서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큰 자비와 긍휼로 한민족은 해방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65년 동안 남북이 분단되어 공산주의의 위협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북한의 공산화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50년 6월25일 북한은 남한을 침략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국토를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68년에는 김신조와 30명의 무장공비를 청와대에 침투시켰고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83년 미얀마 아웅산 폭탄테러, 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등 북한은 지금까지 수십 차례의 도발을 저질렀으나 한 번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3월26일엔 백령도 해상에서 천안함이 침몰되면서 남북한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고 말씀하십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시 91:14)”는 말씀처럼 5만 교회, 1200만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위험에서 건지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신 28:12~13)고 말씀하셨습니다. 역사를 통해, 개인이나 국가가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면 하나님이 그를 높이십니다. 남한은 놀라운 경제성장으로 경제에 관한 세계 최고 협의체인 G20 정상회의 의장국으로 회의를 주최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2009년 아랍에미리트와 47조원 규모의 원전사업개발을 수주했으며 2010년부터 OECD 개발원조위원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선진국가로부터 원조를 받던 원조수혜국이 이제는 원조를 하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있게 된 것입니까. 바로 한국교회의 새벽·철야기도와 기도원에서 간절히 매달렸던 기도에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는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처럼 우리나라에 큰 은혜와 복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는 시편 말씀처럼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국가와 민족에게 장수의 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오늘 8·15 65주년을 맞아 100만 성도가 한 자리에 모여 한국 기독교의 저력을 남한과 북한, 온 나라에 나타냈습니다. 앞으로도 한국교회는 오늘처럼 하나님 앞에서 항상 기도하고 힘을 모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가서 화해하라/ 미4:1-5, 마5:21-26/ 광복절설교
가서 화해하라 미4:1-5, 마5:21-26 지금으로부터 48년전 8월15일. 그날 우리는 해방의 기쁨으로 서로를 얼싸 안았습니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가 막을 내리던 그날, 온 강토는 만세소리와 환희의 외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날의 해방을 맞이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민족의 열사들이 생명을 바쳤습니까? 독립투사들의 뜨거운 열정과 자기희생은 한반도 뿐만 아 니라 중국에서, 만주에서, 그리고 멀리 미주에서까지 뿌려졌습니다. 나이어린 학생으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독립과 만세를 외치면서 가 죽채찍의 아픔을 이겨내지 않았습니까? 비록 한편에서는 일본의 앞잡 이가 되어 민족을 배반한 사람도 많았지만, 우리 민족이 저 깊이에서 부터 키워 온 독립의 열망은 마침내 해방의 새 역사를 이루어 내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해방은 바로 민족의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강토와 민족은 해방 반세기가 다 되도록 휴전선으로 반동강이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념의 갈등보다도 조국이 먼저 있었습니다. 정치적 대립보다도 민족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념과 정치에 사로잡혀 조국도 민족도 저버리고 말았 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분단과 대결이라는 수치스러운 역사의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같은 형제의 가슴에 총뿌리를 들이대지 않았 습니까? 우리는 강대국의 대결 사이에서 우리의 갈길을 가지 못하고, 무력의 대결이 곧 평화의 길인 줄 잘못 알고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이제 돌이켜 회개해야 합니다. 역사의 죄인으로서 재를 뒤집어 써야 합니다. 이 비극 속으로 민족과 조국을 밀어 넣은 우리의 잘못을 눈물 로 통회하여야 합니다. 미가가 오늘 우리에게 큰 소리로 외치고 있습 니다. "하나님께서 민족 사이의 분쟁을 판가름해 주시고 강대국 사이 의 시비를 가려 주시리라." 그렇습니다. 미가는 바로 우리가 저질러 온 분쟁이 얼마나 잘못된 것 이었으며, 강대국들이 이 땅에서 벌여 온 전쟁이 얼마나 어긋난 것인 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제 북의 교회들도, 남의 교회들도, 그리고 해외에 있는 동포들의 교회들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역사의 시비를 판 가름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손에 든 총칼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모든 군사훈련을 중지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돌 아가야 할 평화의 나라에서 삶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 우리를 하나되게 하시는 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남과 북의 곳곳에서, 그리고 세계 평화를 바라는 곳마다 함께 모여 이 예배를 드리는 것은 과거를 돌이켜 탓하려는 것이 아닙 니다. 우리들 가운데서, 그리고 우리들 앞에서 조국과 민족을 돌이켜 통일과 희년의 새 역사를 열어가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 외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부터 한 민족이었으며 한 조국이었고, 그 리고 한 교회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길에 함께 섰습니다. 북과 남의 교회대표들이 1986년 9월 5일 스위스의 글리온에서 감격적 인 첫 상봉을 가진 이래, 1988년 11월 23일 두번째 만남에서 1995년을 "통일의 희년"으로 선포하였습니다. "희년"은 우리 민족의 통일을 위 한 "은혜의 해" 를 1995년에 선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결단은 뜨거운 기도와 사랑의 성찬을 나누면서 이룩한 믿음의 결실이었습니 다. 이것은 이제 더이상 분단의 비극속에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려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결연한 응답이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이것은 분단 50주년이 되는 1995년에 북과 남에 있는 교회가 희년의 횃불을 들고 거듭나서 평화와 통일의 새 역사를 열어가 자는 하나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러한 결의에 따라 우리는 8월15일에 민족의 해방을 기리면서 그 직 전주일을 북과 남이 채택한 공동기도문을 가지고 함께 희년을 위한 기 도일로 지켜왔습니다. 이미 여기에서 희년의 새 역사와 하나님의 나라 의 축제는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 주시는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희년의 새역사, 즉 통일의 희년 을 어떻게 맞이할 것입니까? 레위기에 의하면, 희년은 백성들의 통회로 시작됩니다. 그 뉘우침은 둠과 억압에 빠진 역사에 대한 절실한 고백입니다. 그것은 자유를 잃 어버린 백성들에게, 땅을 빼앗긴 백성들에게, 집이 없는 백성들에게, 그리고 노예로 전락해 버린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명령이며 축복입니다.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서, 땅을 되찾기 위해서,집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진실로 해방을 맞이하기 위해서 모든 백성들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 가슴으로부터 과거를 뉘우처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어 놓았습니까?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그 것은 바로 우리가 야웨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념이라 는 신기루를 쫓아 가는 동양 그리스도는 우리에게서 떠나게 버렸습니 다. 우리가 갈라져 싸우는 동안 하나님은 이 땅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희년의 새 역사의 시작입니다. 희년의 나팔이 울리면, 모든 백성들은 본래 자기 자리를 찾게 됩니 다. 잊어버렸거나.잃어버렸던 자신의 삶의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사 가은 사람대로, 땅은 땅대로,자연의 자연대로 제 힘을 다시 얻어서 마 침내 모든 것을 원상회복시키고 제 모습을 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것은 인간도 사회도 나라도 모두 새 출발을 하게 되는 은혜입니다. 그 러므로 희년은 백성이 역사의 주인이 되는 새역사의 도래를 의미합니 다. 그것은 바로 모든 백성들이 본래 가지고 태어난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실현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사 업이 아닙니다.그것은 개인의 욕심을 채워주거나, 그 억울함을 들어 주거나, 막연한 희망을 약속해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50년미 다 이루어지는 역사의 관습도 아닙니다. 오히려 희년은 과거의 역사로 부터 단절이며 미래의 새 역사에 돌입하는 하나의 혁명입니다. 하지 만 그것은 별안간에 우리들손에 쥐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눈물 을 흘리며, 온 힘을 다해서 자신을 돌이킬 때에만 희년의 기쁨을 맛보 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희년은 바로 지금 우리가 시작해야 할 새 역사의 과정입니다. 이제 우리의 부끄러움을 텅러 놓읍시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 왔 습니까. 분단의 역사에서 우리는 서로를 죽이며 살아 왔습니다. 상대 방의 피흘림을 보면서 그것이 승리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 왔습니다. 상대방은 적이었습니다. 상대방이 쓰러질 때 승리의 환호성을 질렀고, 상대방이 무너질때 축배를 들었습니다. 과연 그것이 누구의 승리였으 며 누구의 기쁨이었습니까?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 야 한다." 그러기에 분단의 역사는 복역기간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형제를 죽이고 어찌 평화를 노래할 수 있으며 형제를 죽이고 어찌 하 나님 앞에 나설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과거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비방과 비판만을 일삼지 않았습니까? 상대방의 잘못만을 들추어 내고, 형제의 약점만을 골라 욕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벌려 온 대결의 역사는 단순히 힘의 대립 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이유없는 증오와 저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외치고 있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 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 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대 결의 역사는 지옥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빼앗 겨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헤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 이 감옥에서 피눈물을 뿌려야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온 강토가 감 옥이나 지옥과 같은 것이었스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평화도 정의 도, 자유도 기쁨도 없지 않았습니까? 우리들이 원한을 품은채 어찌 참 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으며, 어찌 온전한 은혜를 바랄 수 있었겠습니 까? 이제 예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희년을 맞이할 수 있는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 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 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제단을 세우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예물을 제 단에 바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실로 먼저 해야 하는 일은 화해 의 제단을 쌓는 일입니다. 우리가 세우는 제단은 화해를 위한 것이어 야 합니다. 북에 세워진 제단도, 남에 세워진 제단도 진실로 하나님께 돌아가고, 민족에게도 돌아가서 화해를 하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 다. 아무리 수많은 제단이 세워지고 아무리 웅대한 제단이 세워진다 하더라도,우리가 형제를 죽이고 비방하는 상황에서 그것은 올바른 제 단의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수많은 희생제물을 바친다 하더 라도, 우리가 형제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은 올바른 예 물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제단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그런 예물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분단의 역사는 감옥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다른 감옥 에 가두어 놓고 서로를 감시하고 증오해 왔습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 로가 만들어 놓은 감옥이었습니다. 서로를 얽어매기 위한 감옥이었습 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아니었 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오늘 이렇게 준엄한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네가 마지막 한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풀려 나오지 못 할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면,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가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거듭 나려 한다면,우리는 이 명령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여기에는 누가 먼 저이고 누가 나중일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오히려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한푼까지라도 갚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희년의 횃불을 들어 야 합니다. 더이상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북과 남에 흩어져 있는 하나 님의 백성들이 희년의 횃불을 높이 들고 지나온 암흑의 역사에 빛을비 춰야 합니다. 이 지구상 또 어디에 분단의 땅이 있습니까? 이 세상 또 어디에 분단의 민족이 있습니까?북과 남이 갈라져 있는 한 그 땅은 우 리의 땅이 아니며, 그 조국은 우리의 조국이 아닙니다. 우리의 땅은 만주벌판까지였으며,우리의 조국은 하나의 조국이었습니다. 이제 1995년 통일의 희년을 향한 횃불을 들어 올립시다. 이 희년의 새 역사에 모두 다 나설 수 있도록 조국 곳곳에서 빛을 발합시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백성들이, 해외의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의 자매형제들이 함께 맛볼 수 있는 희년의 은혜를 나눕시다.그리하여 1995년이 마침내 희년의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도록 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잡은 손을 통하여 한 교회의 뜨거운 사랑과 한 민족의 굳건한 희망을 확인합시다. 새 역사가 지금 우리들 앞에 열리고 있습니다. 그 것은 바로 북과 남에게 울려 퍼지는 기도소리와 찬송 속에서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갇힌 자, 학대 받는 자/히13:1-3/광복절기념주일설교/2007-08-15
광복절/ 갇힌 자, 학대받는 자 히13:1-3 영어 속담에 '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혈육 관계이고 각별한 친분이 있는 사이라 할지라도, 직접 만나보는 일이 적어지면 절로 서로 잊고 살 수밖에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까닭에, 비록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결코 마음마저 멀어지지 않아야 할 사람들은, 우리가 부지런히 전화도 하고 편지도 쓰고 또 그 사람이 사는 동네나 국가로 여행할 기회가 생기면 꼭 얼굴이라도 잠시 보려고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서로 나누는 우리 기독신자들의 교제에도 그처럼 공간적인 거리가 멀면 멀수록 마음도 멀어지기 쉬운 관계들이 있음을 바로 오늘 본문이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1절에 나오는 "형제"는 물론 같은 하나님의 자녀 된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이 새 계명은 누구보다도 먼저 주 안에서 한 성도, 한 교인 된 자들 간의 사랑을 명령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영적 형제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은 그래도 기본이 되어 있는 기독신자라면 다 기억은 할 것이고 대부분이 다 노력도 하고 있을 것입니다. 2절에 나오는 사랑의 대상은 그 1절의 "형제"보다는 우리가 간과하고 넘어가기 쉬운 대상입니다. "손님"이라는 단어는 원어로는 '초청한 사람'(guest)이 아니라 '나그네'(stranger) 즉 길가는 행인으로서 아무 안면도 없던 사람을 가리킵니다. 물론 이 '손님'이라는 말에는 그 당시 초대교회를 순방하던 복음 전도자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기독신자의 형제사랑은 거기에 제한되지 아니하고 전혀 알지 못하는 이웃에게까지도 그 대상이 넓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를 들고 있는 아브라함이나 롯 같은 사람들도 "부지중에" 즉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던 지나가는 객을 환대하던 가운데 뜻밖에도 천사를 대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3절에 보면 우리 기독교인들의 형제사랑의 세 번째 대상이 나오는데, 바로 "갇힌 자"와 "학대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복음 때문에 실제로 투옥되거나 핍박을 당하고 있는 성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사람들이야말로 위에서 나왔던 두 부류의 형제들, 즉 교회 안의 교우들이나 지나가는 손님들보다도 훨씬 더 마음을 쏟고 사랑을 베풀어야 할 대상입니다. 하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바로 이런 형제들이 잊히기 쉬운 것입니다. 처음에 투옥되었을 때, 처음에 박해를 당할 때에는 열심히 기도하고 도우려고 애를 쓰다가도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면 그만 잊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자들은 자기 곁에 가까이 있어서 자주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형제들은 주일마다 만나니까 자연히 사랑하게 되고, 손님들은 내 집으로 찾아왔으니까 당연히 대접할 마음이 생길 수 있지만, 감옥에 갇힌 성도나 내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환난을 당하는 성도의 형편은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지 못하는 것인 까닭에 조금만 시간이 흐르고 방심에 빠지면 아주 간단하게 잊어버리고 말게 됩니다. 가장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형제, 그 어떤 형편에 있는 형제들보다 최고의 사랑을 같은 성도로써 마땅히 베풀어 주어야 할 형제들을, 우리는 그런 식을 무심하게 잊어버리기가 십상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그처럼 '갇힌 자와 학대 받는 자들을 생각하라' 즉 '기억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금주 화요일에 '8.15 해방' 제61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비록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 해방의 결과로 자주독립을 지금까지 누리고 있지만, 북한의 동포들은 그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제보다 훨씬 더 무서운 독재와 압제에 사로잡히는 몸이 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런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지 않고서 8.15 해방의 날을 보낸다는 것은 너무나 몰염치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주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이런 때에 더욱 깊이 상기해내고 또 남북통일의 그날이 올 때까지 항상 잊지 말고 생각해야 할 우리의 형제들에 대하여 오늘과 다음 주일에 걸쳐서 두 대지로 나누어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북한 공산 독재에 의하여 자유와 생존권을 박탈당하고 '갇혀 있는' 북한 동포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3상반절에 "자기도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히브리서는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인들에 대한 탄압이 이미 시작된 시대에 씌어졌습니다. 로마제국의 기독교에 대한 초기의 정책은 좀 이상한 것으로서, 그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무조건 체포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에, 어떤 기독교인이 무슨 이유에서든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발을 당해서 재판정에 서게 되면 그로 하여금 로마 황제 흉상 앞에 절하고 분향하게 한다든지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기독교인 피고가 그것을 거부하면 국가에 대한 반역자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기독교인들은 이웃으로부터 고발당하지만 않으면 괜찮았고, 만약 무슨 사소한 문제 때문이든지 간에 고발을 당하게 되면 그 법정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하든지 아니면 배교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할 처지였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었던 까닭에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 중에는 같은 동네에 살고 같은 교회를 다녀도 그 중에서 옥에 갇힌 자들도 있었고 화를 면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경우에 갇히지 않는 성도들은 "자기도 갇힌 것 같이" 즉 자기가 그런 처지가 된 것처럼 그 갇힌 성도들을 생각해주어야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갇힌 성도들에게 있어서 도움을 기대할 희망은 갇히지 않은 성도들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당시의 감옥생활은 면회 오는 사람들이 식량과 의복을 위시하여 때로는 약까지 제공해주어야 했고, 그런 도움이 없으면 옥에서 굶어죽거나 병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투옥의 기간이 길어지면 같은 성도들끼리도 점점 더 면회 오는 것이 뜸해지고 잊혀져갔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그런 일을 뼈저리게 경험했던 까닭에 디모데후서 4장 16상반절에서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라고 가슴 아픈 간증을 한 것입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라는 말은 바울이 제1차 투옥되었을 때를 가리킬 수도 있고 혹은 로마에서 두 번째 투옥된 직후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마는, 어느 쪽이든지 간에 요점은 바울의 투옥 초기에는 그를 기억해주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하나 그를 잊기 시작하더니 이제 그 디모데후서를 쓸 당시에는 그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떠나버렸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비록 신자라 하더라도, 자기를 찾아오는 손님은 대접할 줄 알아도, 갇혀 있는 형제들은 보지 못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지금 북한의 동포들이 공산독재정권에 의하여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고 '갇힌 자'들이 된지 어언 반세기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56년의 세월은 이 대한민국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이천만 명의 동포들이 도대체 어떤 끔찍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를 까마득히 잊게 만들고 있습니다. 북한 동포들의 실정을 몰라도 너무도 몰라주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큰 실망을 느끼면서 차라리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싶어 하는 탈북자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남한 사람들은 자유에 흠뻑 취해서 정신을 잃은 것 같다."고 합니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태어나서 마음껏 자유롭게 말하고 마음껏 자유롭게 행동하는 데에만 익숙하다보니, 그런 자유가 없는 북한이라는 곳이 도대체 어떤 사회인지를 아무리 말해주어도 알아듣지도, 믿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대한민국의 어느 교과 과정에서도 가르쳐주지 않고 있는 사실, 하지만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 게다가 북한에서 도저히 살 길이 없어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해온 수많은 탈북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증거하는 사실, 그리고 국제적인 조사기관들이 확인하는 엄연한 사실을 제가 다시 한 번 말씀해드립니다. 8.15 해방 직후에 당시 공산제국주의를 꿈꾸던 소련은 김일성을 내세워서 북한에 공산주의 정부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북한은 김일성과 김정일로 이어지는 세습독재정권 하에서 모든 인민들로부터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비롯하여 종교 및 거주이전의 자유 등, 사람이 마땅히 누려할 모든 기본적인 자유들을 다 빼앗아버렸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북한 사람들과 편지 한 통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없고, 평양을 제외한 북한의 다른 지역에 대한 사진 한 장 제대로 뉴스 미디어에서 찾을 수 없고, 금강산 관광을 가도 북한 사람들이 혼자서나 친구끼리나 가족과 함께 여행 오는 경우는 한 사람도 발견할 수 없는 것만 보아도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처럼 육체적인 자유는 두말할 것도 없고 '김일성과 김정일의 우상화'를 통하여 사람의 생각하는 자유마저 완전히 박탈해버렸습니다. 이것은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로서는 더욱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사람이 자기 머릿속으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까지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라는 반문이 당연히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것이야말로 '자유에 너무 취해서 자유 없는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는' 생각입니다. 우리 기독신자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수령님의 은덕'을 수시로 찬양하고, 우리들이 성경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열심히 '정치학습'을 밤낮으로 받기를 50년 넘도록 하고나면, 그런 사람의 머릿속에는 '자유로운 생각'이라는 것이 남아 있을 여지가 전무하게 됩니다. 그래서 탈북자 교육을 하는 공무원들은 '탈북자들의 생각이 너무 굳어져 있는 바람에' 자유민주사회에서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무척 어렵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처럼 개인의 자유가 완전히 박탈당한 사회인 까닭에 북한은 개인의 생존권마저 철저하게 유린당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북한 인민에게는 자기가 노력해서 사유재산을 늘인다는 것은 곧 국가에 대한 반역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 같이 일하고 꼭 같이 나누어먹자'는 것이 공산주의의 철칙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그런 공산주의 사회를 표현하기를 "(1) 아무도 일하지 않는다. (2) 아무도 일하지 않지만 모두가 월급을 받는다. (3) 모두가 월급을 받지만 아무 것도 그 돈으로 살 수 없다. (4) 아무 것도 살 수 없지만 인민들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5) 인민들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지만 아무도 만족하는 사람이 없다. (6) 아무도 만족하는 사람이 없지만, 선거만 하면 모두가 공산당에게 100퍼센트의 찬성표를 던진다."라고 했습니다. 구구절절 공산주의 사회의 허구성을 예리하고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농부가 열심히 일해도 쌀 한 톨도 자기에게 직접 돌아오지 아니하고, 아무리 어부가 많은 고기를 잡아도 단 한 마리도 자기 집에 가져올 수 없으니, 누가 열심히 일할 마음이 들겠습니까? 자연히 생산성은 최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고, 그런 까닭에 북한에서는 정치범 수용소에서 죄수들이 경작하는 밭의 수확량이 일반 인민들의 협동농장에서의 수확량보다 몇 배나 더 높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북한 전체의 총생산량(GNP)은 우리나라 제주도의 총생산량보다도 못합니다. 하지만 그나마 김정일의 호의호식과 김일성 시체 유지비에 엄청난 액수를 다 쏟아 붓고 있으니 인민들에게 돌아올 것이 무엇이 남겠습니까? 각종 조사단체들이 최근 북한에서는 아무리 최소한으로 잡아도 300만 명 이상이 굶주림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세계식량농업기구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2년에 북한 인구의 절반이 넘는 1,300만 명이 영양실조 상태에 있었으며, 특히 그 중에서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만성적인 영양실조로 인하여 심신의 성장에 심각한 장애를 입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북한 정부는 대한민국을 위시하여 세계 각국에서 지원하는 식량을 군수품으로 빼돌리기에 바쁘고, 그 식량분배가 제대로 인민에게 돌아가는지를 직접 감독하려는 구호기관의 요원들은 아예 추방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미사일을 발사해 놓고서는 "김정일 위원장의 선군정책으로 남한이 득을 보았으니 쌀 50만 톤을 내놓아라."라고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생떼를 쓰는가 하면, 얼마 전 한나라당에서 북한 수해 피해 발표한 것에 대해서는 악질적인 거짓선전이라고 욕을 해대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서 '이번 수해로 인하여 4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고 북한 언론 사상 처음으로 피해를 공식 발표함으로써 구호금을 받아먹으려는 속셈을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북한 공산독재정권은 자국의 이천 만의 생명을 인질로 삼고 국제사회를 협박하는 깡패 짓을 하고 있는, 실로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집단인 것입니다. 아직도 이런 말이 과장이고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왜 탈북자가 줄을 잇고 북한의 '식량난민'이 떼거리로 두만강을 넘나드는지 제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중국에 있는 탈북자는 최소한 5만 명, 많으면 30만까지 될 것이라고 추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탈남자'라는 말이 있습니까? 아니 이 대한민국에서 그토록 친북활동에 열을 내는 사람들 중에서 제발 북한에 가서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 단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왜 그렇겠습니까? 북한이 못 살아도 너무너무 못 사는 것, 아니 못 산다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 비참하게 사는 것은 친공분자들까지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탈북자가 자기가 남한이 잘 산다는 것을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는지를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그 사람도 물론 북한정부가 선전하는 대로 남한이 자기네보다 훨씬 더 못 산다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바닷가에서 남한 쪽에서 떠내려 온 라면 봉지를 하나 줍게 되었습니다. 그 봉지도 예뻤지만, 그 봉지에 씌어있는 글귀 하나가 그 사람을 놀라게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기호에 따라 계란이나 파 등을 곁들여 드셔도 좋습니다.'라는 문구였습니다. '라면에 달걀을 넣어서 먹고 싶으면 넣어서 먹고 먹기 싫으면 안 넣으면 된다.'라는 말은 우리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그 북한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에서는 달걀이 있어도 먹기 싫어서 먹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라면 봉지의 글귀 하나 때문에 그 탈북자는 '남한에서는 달걀을 구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잘 사는구나.'하고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인민들을 압제하면서도 또 제대로 먹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는데 도대체 그런 나라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북한 인민들이 너무 순진해서 조금도 불평할 줄을 몰라서, 혹은 그들이 아침저녁으로 앵무새처럼 외는 대로 정말 '수령님의 은덕에 감사'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겠습니까?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그런 북한이 한 국가로 유지되고 그런 정권이 50년 넘도록 장기독재집권할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 극단적인 공포정치, 이것밖에 없습니다. 인민 하나하나를 감시하는 자, 그렇게 감시하는 자를 또 감시하는 자, 바로 그 감시자를 또 한 단계 위에서 감시하는 자 - 이것이 북한의 정치체계의 전부입니다. 그러니 북한에서는 무슨 반동분자다 싶으면 자기 부모라 할지라도 서슴지 않고 고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정말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김정일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감시 체계와 조직을 통하여 체포된 사람은 아무 제대로 된 재판조차 받지 못하고 그저 구금, 고문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요 공개처형이나 비밀살해되기 일쑤입니다. 특히 요덕정치범 수용소에는 약 3만 5천 명에서 최대 5만 명까지의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는데, 그 끔찍한 실상은 정말이지 어떻게 말로 옮겨놓을 길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북한의 비참한 실상을 말하면, '그것은 미국이 북한을 제재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좀 말이 되는 말을 가지고 말을 해야지요. 아니 그런 사람들의 주장에 따른다면 '미국의 노예가 되었다'는 대한민국도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어떻게 '미국의 제재 좀 받았다'는 북한은 그 때문에 그렇게 지지리도 못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북한의 경제 실패는 바로 '자기가 일한 만큼 먹게 된다.'는 자본주의의 원칙을 반대한 데서부터 필연적인 기정사실로 되어졌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지금 북한을 돕고자 하는 세계의 모든 경제전문가들이 '아무리 온 세계가 북한을 원조해주어도 북한 자체 내의 경제 개혁과 개방 없이는 이 비극을 끝낼 길이 없다.'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주 간단히 말해서 지금 협동농장으로 되어 있는 모든 땅들을 북한의 각 인민들에게 사유경작지로 나누어주기만 하면 적어도 식량자급의 문제는 당장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반공을 주제로 하는 이런 설교를 하면 "한물 간 반공주의가 서울의 모 교회에서 되살아났다."라고 비난하는 글이 인터넷 언론에 뜹니다. 정말이지 공산주의야말로 한물가도 한참 간 것 아닙니까? 전 세계의 모든 공산국가들이 소련을 비롯하여 다 실패했고, 중국만 정치는 공산주의지만 경제는 자본주의를 도입함으로써 명맥을 유지했으며, 북한은 지금 최악의 공산주의 국가로 그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기 일보직전입니다. 도대체 어느 쪽이 진짜로 한물간 사상이라는 말입니까? 저의 그런 설교가 방송으로 나가게 되는 밤이면 교회 전화기에 불이 나고 숙직하는 교역자들이 잠을 못 자게 됩니다. 시원한 설교를 들었다고 감사하는 분들이 다수이지만 온갖 항의와 욕설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이 대한민국 안에 진짜 공산주의자들이 정말 많이 득실거리고 있구나.'하는 생각에 더욱 목소리를 높여 외치게 됩니다. 하지만 소위 기독교인이라 하면서도 '반공은 목사가 할 수 없는 소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 논리와 사상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반공하면 안 된다는 것은 바로 친공하자는 이야기인데, 도대체 그 저의가 무엇입니까? 지금 북한 공산정권의 노예가 되어 있는 2천만 동포들을 그대로 버려두고 그저 김정일하고만 친구로 지내자는 뜻입니까? 아니면 우리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까지도 다 포기하고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우리 식으로 살자'고, 남북이 같이 김정일을 통일 대통령으로 받들고 '주체적 민족'을 만들자는 것입니까? 우리, 제발 "자기도 갇힌 것 같이" 이 북한 동포들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천만 명의 우리 형제들이 24시간 내내 자기 손발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마음대로 말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일자리 구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이사나 여행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데, 그 기분이 과연 어떠할지 한번 좀 상상해보십시오. 그처럼 몸과 마음까지 묶여 있는 판에 강냉이 죽 한 그릇도 제대로 못 먹고 문자 그대로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으면서 연명하는 그들의 뱃속이 어떤 느낌일지 한번 좀 상상해보십시오. 아니 어린 자식들이 굶어 죽어가는 꼴을 자기 눈앞에서 보아야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심정이란 것이 과연 자기만이라도 조금 더 오래 살아남고 싶을지 한번 여러분의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북한 인권법안 제정을 주도한 수잔 솔티 여사가 대한민국을 향하여 "왜 한국인들은 이 악독한 인간(김정일)과의 거짓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 침묵을 지키겠다는 것입니까?"라고, 북한 인권문제에 대하여 외면하고 대북 인권 결의안에 기권이나 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정책을 각성하라는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제가 그 편지의 일부만 소개해드립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한국인들에게 드립니다.(중략) 요즈음 우리는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너무 걱정되어 이 편지를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신들과 우리는 오랜 세월 한 배를 타고 운명을 같이 해왔는데, 요즈음 여러분들이 택한 항로의 앞날을 보면서 우리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중략) 이 세상에는, 여러분들이나 우리가 믿고 있는 모든 것을 어떻게든 파괴하려는 악의 세력이 도처에 준동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믿는 자유와 관용, 진실과 정직을 앗아가려는 것입니다. 이들은, 여러분들을 지금까지 이처럼 튼튼하고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게 한, 바로 그 자유를 파괴하려는 세력들입니다.(중략) 우리는 당신들이 당신들의 새 친구라고 사귀는 자 때문에 얼마나 여러분들이 걱정되는지, 당신들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그토록 비위를 맞추려고 공을 들이는 이 자(김정일)는 참으로 끔찍한 악몽입니다. 한 마디로, 그 자는 악마입니다. 당신들에게 이런 끔찍한 표현을 해서 안됐지만, 이것은 사실이고 여러분들은 이 사실을 직시해야만 합니다.(중략) 당신들은 이 악독한 인간과의 우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침묵을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을 파괴하려는 이 인간, 우리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이 인간과의 우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는 당신들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 자는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전부 빼앗고, 당신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무릎을 꿇도록 강요할 것입니다. 눈을 좀 뜨고 보세요. 당신들이 우리들의 말을 듣지 않겠다면, 이곳 형제자매들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최소한 그 자에게 이것만은 따져야 할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의 (북쪽)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여러분들이 살던 마을의 이웃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를 따져 물어야 할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을 살리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세요.(중략) 최소한 8만 6천 명이란 사람들의 생사를 모릅니다. 그 자는 이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자에게 행방불명된 이 사람들에 관하여 물어보세요. 그 자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들을 어떻게 했는지 물어보세요. 여러분들에게는, 최소한 그 자로 인하여 고난을 겪은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질러 따져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중략)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미국의 형제자매들로부터. 2004년 7월 6일, 디펜스 포럼 파운데이션 대표, 수잔 숄티 드림." 저는 이 편지를 보고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사실상 이런 편지는 우리들이 써서 온 세계를 향하여 보내어야 할 것인데, 어쩌다가 이것이 거꾸로 되었습니까? 온 세계의 양식 있는, 아니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김정일 공산독재의 악함을 어떻게 대한민국이 모른 채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어떻게 2천만 명의 형제를 한 피로 나누고 있는 대한민국 사람이 이 불쌍한 진짜 내 민족은 조금도 안중에 두지 않고, 오히려 민족공조라는 미명으로 독재자와 친구가 되면서 그와 함께 세계적인 왕따가 되려 하고 있는 것입니까? 더욱이 같은 동족 중에서 '간힘을 면한 자'가 '갇힌 자'를 '생각해주지' 않는다면 이것이말로 진짜 매국노이며 반민족적인 범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제의 압제로부터 자유하는 8.15해방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또 하나의 해방일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공산 독재에 의하여 자유와 생존권을 박탈당하고 갇혀 있는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면서, 이 이천만의 내 형제들이 해방되는 그 날을 하루라도 빨리 이 조국이 맞이할 수 있도록 늘 기억하며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갇힌 자, 학대받는 자/ 히13:1-3/ 광복절설교/ 2008-03-20
갇힌 자, 학대받는 자 히13:1-3 영어 속담에 \'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혈육 관계이고 각별한 친분이 있는 사이라 할지라도, 직접 만나보는 일이 적어지면 절로 서로 잊고 살 수밖에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까닭에, 비록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결코 마음마저 멀어지지 않아야 할 사람들은, 우리가 부지런히 전화도 하고 편지도 쓰고 또 그 사람이 사는 동네나 국가로 여행할 기회가 생기면 꼭 얼굴이라도 잠시 보려고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서로 나누는 우리 기독신자들의 교제에도 그처럼 공간적인 거리가 멀면 멀수록 마음도 멀어지기 쉬운 관계들이 있음을 바로 오늘 본문이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1절에 나오는 \"형제\"는 물론 같은 하나님의 자녀 된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이 새 계명은 누구보다도 먼저 주 안에서 한 성도, 한 교인 된 자들 간의 사랑을 명령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영적 형제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은 그래도 기본이 되어 있는 기독신자라면 다 기억은 할 것이고 대부분이 다 노력도 하고 있을 것입니다. 2절에 나오는 사랑의 대상은 그 1절의 \"형제\"보다는 우리가 간과하고 넘어가기 쉬운 대상입니다. \"손님\"이라는 단어는 원어로는 \'초청한 사람\'(guest)이 아니라 \'나그네\'(stranger) 즉 길가는 행인으로서 아무 안면도 없던 사람을 가리킵니다. 물론 이 \'손님\'이라는 말에는 그 당시 초대교회를 순방하던 복음 전도자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기독신자의 형제사랑은 거기에 제한되지 아니하고 전혀 알지 못하는 이웃에게까지도 그 대상이 넓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를 들고 있는 아브라함이나 롯 같은 사람들도 \"부지중에\" 즉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던 지나가는 객을 환대하던 가운데 뜻밖에도 천사를 대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3절에 보면 우리 기독교인들의 형제사랑의 세 번째 대상이 나오는데, 바로 \"갇힌 자\"와 \"학대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복음 때문에 실제로 투옥되거나 핍박을 당하고 있는 성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사람들이야말로 위에서 나왔던 두 부류의 형제들, 즉 교회 안의 교우들이나 지나가는 손님들보다도 훨씬 더 마음을 쏟고 사랑을 베풀어야 할 대상입니다. 하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바로 이런 형제들이 잊히기 쉬운 것입니다. 처음에 투옥되었을 때, 처음에 박해를 당할 때에는 열심히 기도하고 도우려고 애를 쓰다가도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면 그만 잊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자들은 자기 곁에 가까이 있어서 자주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형제들은 주일마다 만나니까 자연히 사랑하게 되고, 손님들은 내 집으로 찾아왔으니까 당연히 대접할 마음이 생길 수 있지만, 감옥에 갇힌 성도나 내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환난을 당하는 성도의 형편은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지 못하는 것인 까닭에 조금만 시간이 흐르고 방심에 빠지면 아주 간단하게 잊어버리고 말게 됩니다. 가장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형제, 그 어떤 형편에 있는 형제들보다 최고의 사랑을 같은 성도로써 마땅히 베풀어 주어야 할 형제들을, 우리는 그런 식을 무심하게 잊어버리기가 십상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그처럼 \'갇힌 자와 학대 받는 자들을 생각하라\' 즉 \'기억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금주 화요일에 \'8.15 해방\' 제61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비록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 해방의 결과로 자주독립을 지금까지 누리고 있지만, 북한의 동포들은 그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제보다 훨씬 더 무서운 독재와 압제에 사로잡히는 몸이 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런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지 않고서 8.15 해방의 날을 보낸다는 것은 너무나 몰염치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주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이런 때에 더욱 깊이 상기해내고 또 남북통일의 그날이 올 때까지 항상 잊지 말고 생각해야 할 우리의 형제들에 대하여 오늘과 다음 주일에 걸쳐서 두 대지로 나누어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북한 공산 독재에 의하여 자유와 생존권을 박탈당하고 \'갇혀 있는\' 북한 동포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3상반절에 \"자기도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히브리서는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인들에 대한 탄압이 이미 시작된 시대에 씌어졌습니다. 로마제국의 기독교에 대한 초기의 정책은 좀 이상한 것으로서, 그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무조건 체포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에, 어떤 기독교인이 무슨 이유에서든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발을 당해서 재판정에 서게 되면 그로 하여금 로마 황제 흉상 앞에 절하고 분향하게 한다든지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기독교인 피고가 그것을 거부하면 국가에 대한 반역자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기독교인들은 이웃으로부터 고발당하지만 않으면 괜찮았고, 만약 무슨 사소한 문제 때문이든지 간에 고발을 당하게 되면 그 법정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하든지 아니면 배교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할 처지였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었던 까닭에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 중에는 같은 동네에 살고 같은 교회를 다녀도 그 중에서 옥에 갇힌 자들도 있었고 화를 면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경우에 갇히지 않는 성도들은 \"자기도 갇힌 것 같이\" 즉 자기가 그런 처지가 된 것처럼 그 갇힌 성도들을 생각해주어야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갇힌 성도들에게 있어서 도움을 기대할 희망은 갇히지 않은 성도들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당시의 감옥생활은 면회 오는 사람들이 식량과 의복을 위시하여 때로는 약까지 제공해주어야 했고, 그런 도움이 없으면 옥에서 굶어죽거나 병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투옥의 기간이 길어지면 같은 성도들끼리도 점점 더 면회 오는 것이 뜸해지고 잊혀져갔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그런 일을 뼈저리게 경험했던 까닭에 디모데후서 4장 16상반절에서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라고 가슴 아픈 간증을 한 것입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라는 말은 바울이 제1차 투옥되었을 때를 가리킬 수도 있고 혹은 로마에서 두 번째 투옥된 직후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마는, 어느 쪽이든지 간에 요점은 바울의 투옥 초기에는 그를 기억해주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하나 그를 잊기 시작하더니 이제 그 디모데후서를 쓸 당시에는 그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떠나버렸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비록 신자라 하더라도, 자기를 찾아오는 손님은 대접할 줄 알아도, 갇혀 있는 형제들은 보지 못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지금 북한의 동포들이 공산독재정권에 의하여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고 \'갇힌 자\'들이 된지 어언 반세기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56년의 세월은 이 대한민국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이천만 명의 동포들이 도대체 어떤 끔찍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를 까마득히 잊게 만들고 있습니다. 북한 동포들의 실정을 몰라도 너무도 몰라주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큰 실망을 느끼면서 차라리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싶어 하는 탈북자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남한 사람들은 자유에 흠뻑 취해서 정신을 잃은 것 같다.\"고 합니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태어나서 마음껏 자유롭게 말하고 마음껏 자유롭게 행동하는 데에만 익숙하다보니, 그런 자유가 없는 북한이라는 곳이 도대체 어떤 사회인지를 아무리 말해주어도 알아듣지도, 믿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대한민국의 어느 교과 과정에서도 가르쳐주지 않고 있는 사실, 하지만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 게다가 북한에서 도저히 살 길이 없어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해온 수많은 탈북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증거하는 사실, 그리고 국제적인 조사기관들이 확인하는 엄연한 사실을 제가 다시 한 번 말씀해드립니다. 8.15 해방 직후에 당시 공산제국주의를 꿈꾸던 소련은 김일성을 내세워서 북한에 공산주의 정부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북한은 김일성과 김정일로 이어지는 세습독재정권 하에서 모든 인민들로부터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비롯하여 종교 및 거주이전의 자유 등, 사람이 마땅히 누려할 모든 기본적인 자유들을 다 빼앗아버렸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북한 사람들과 편지 한 통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없고, 평양을 제외한 북한의 다른 지역에 대한 사진 한 장 제대로 뉴스 미디어에서 찾을 수 없고, 금강산 관광을 가도 북한 사람들이 혼자서나 친구끼리나 가족과 함께 여행 오는 경우는 한 사람도 발견할 수 없는 것만 보아도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처럼 육체적인 자유는 두말할 것도 없고 \'김일성과 김정일의 우상화\'를 통하여 사람의 생각하는 자유마저 완전히 박탈해버렸습니다. 이것은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로서는 더욱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사람이 자기 머릿속으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까지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라는 반문이 당연히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것이야말로 \'자유에 너무 취해서 자유 없는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는\' 생각입니다. 우리 기독신자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수령님의 은덕\'을 수시로 찬양하고, 우리들이 성경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열심히 \'정치학습\'을 밤낮으로 받기를 50년 넘도록 하고나면, 그런 사람의 머릿속에는 \'자유로운 생각\'이라는 것이 남아 있을 여지가 전무하게 됩니다. 그래서 탈북자 교육을 하는 공무원들은 \'탈북자들의 생각이 너무 굳어져 있는 바람에\' 자유민주사회에서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무척 어렵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처럼 개인의 자유가 완전히 박탈당한 사회인 까닭에 북한은 개인의 생존권마저 철저하게 유린당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북한 인민에게는 자기가 노력해서 사유재산을 늘인다는 것은 곧 국가에 대한 반역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 같이 일하고 꼭 같이 나누어먹자\'는 것이 공산주의의 철칙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그런 공산주의 사회를 표현하기를 \"(1) 아무도 일하지 않는다. (2) 아무도 일하지 않지만 모두가 월급을 받는다. (3) 모두가 월급을 받지만 아무 것도 그 돈으로 살 수 없다. (4) 아무 것도 살 수 없지만 인민들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5) 인민들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지만 아무도 만족하는 사람이 없다. (6) 아무도 만족하는 사람이 없지만, 선거만 하면 모두가 공산당에게 100퍼센트의 찬성표를 던진다.\"라고 했습니다. 구구절절 공산주의 사회의 허구성을 예리하고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농부가 열심히 일해도 쌀 한 톨도 자기에게 직접 돌아오지 아니하고, 아무리 어부가 많은 고기를 잡아도 단 한 마리도 자기 집에 가져올 수 없으니, 누가 열심히 일할 마음이 들겠습니까? 자연히 생산성은 최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고, 그런 까닭에 북한에서는 정치범 수용소에서 죄수들이 경작하는 밭의 수확량이 일반 인민들의 협동농장에서의 수확량보다 몇 배나 더 높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북한 전체의 총생산량(GNP)은 우리나라 제주도의 총생산량보다도 못합니다. 하지만 그나마 김정일의 호의호식과 김일성 시체 유지비에 엄청난 액수를 다 쏟아 붓고 있으니 인민들에게 돌아올 것이 무엇이 남겠습니까? 각종 조사단체들이 최근 북한에서는 아무리 최소한으로 잡아도 300만 명 이상이 굶주림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세계식량농업기구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2년에 북한 인구의 절반이 넘는 1,300만 명이 영양실조 상태에 있었으며, 특히 그 중에서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만성적인 영양실조로 인하여 심신의 성장에 심각한 장애를 입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북한 정부는 대한민국을 위시하여 세계 각국에서 지원하는 식량을 군수품으로 빼돌리기에 바쁘고, 그 식량분배가 제대로 인민에게 돌아가는지를 직접 감독하려는 구호기관의 요원들은 아예 추방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미사일을 발사해 놓고서는 \"김정일 위원장의 선군정책으로 남한이 득을 보았으니 쌀 50만 톤을 내놓아라.\"라고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생떼를 쓰는가 하면, 얼마 전 한나라당에서 북한 수해 피해 발표한 것에 대해서는 악질적인 거짓선전이라고 욕을 해대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서 \'이번 수해로 인하여 4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고 북한 언론 사상 처음으로 피해를 공식 발표함으로써 구호금을 받아먹으려는 속셈을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북한 공산독재정권은 자국의 이천 만의 생명을 인질로 삼고 국제사회를 협박하는 깡패 짓을 하고 있는, 실로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집단인 것입니다. 아직도 이런 말이 과장이고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왜 탈북자가 줄을 잇고 북한의 \'식량난민\'이 떼거리로 두만강을 넘나드는지 제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중국에 있는 탈북자는 최소한 5만 명, 많으면 30만까지 될 것이라고 추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탈남자\'라는 말이 있습니까? 아니 이 대한민국에서 그토록 친북활동에 열을 내는 사람들 중에서 제발 북한에 가서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 단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왜 그렇겠습니까? 북한이 못 살아도 너무너무 못 사는 것, 아니 못 산다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 비참하게 사는 것은 친공분자들까지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탈북자가 자기가 남한이 잘 산다는 것을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는지를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그 사람도 물론 북한정부가 선전하는 대로 남한이 자기네보다 훨씬 더 못 산다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바닷가에서 남한 쪽에서 떠내려 온 라면 봉지를 하나 줍게 되었습니다. 그 봉지도 예뻤지만, 그 봉지에 씌어있는 글귀 하나가 그 사람을 놀라게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기호에 따라 계란이나 파 등을 곁들여 드셔도 좋습니다.\'라는 문구였습니다. \'라면에 달걀을 넣어서 먹고 싶으면 넣어서 먹고 먹기 싫으면 안 넣으면 된다.\'라는 말은 우리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그 북한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에서는 달걀이 있어도 먹기 싫어서 먹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라면 봉지의 글귀 하나 때문에 그 탈북자는 \'남한에서는 달걀을 구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잘 사는구나.\'하고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인민들을 압제하면서도 또 제대로 먹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는데 도대체 그런 나라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북한 인민들이 너무 순진해서 조금도 불평할 줄을 몰라서, 혹은 그들이 아침저녁으로 앵무새처럼 외는 대로 정말 \'수령님의 은덕에 감사\'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겠습니까?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그런 북한이 한 국가로 유지되고 그런 정권이 50년 넘도록 장기독재집권할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 극단적인 공포정치, 이것밖에 없습니다. 인민 하나하나를 감시하는 자, 그렇게 감시하는 자를 또 감시하는 자, 바로 그 감시자를 또 한 단계 위에서 감시하는 자 - 이것이 북한의 정치체계의 전부입니다. 그러니 북한에서는 무슨 반동분자다 싶으면 자기 부모라 할지라도 서슴지 않고 고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정말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김정일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감시 체계와 조직을 통하여 체포된 사람은 아무 제대로 된 재판조차 받지 못하고 그저 구금, 고문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요 공개처형이나 비밀살해되기 일쑤입니다. 특히 요덕정치범 수용소에는 약 3만 5천 명에서 최대 5만 명까지의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는데, 그 끔찍한 실상은 정말이지 어떻게 말로 옮겨놓을 길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북한의 비참한 실상을 말하면, \'그것은 미국이 북한을 제재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좀 말이 되는 말을 가지고 말을 해야지요. 아니 그런 사람들의 주장에 따른다면 \'미국의 노예가 되었다\'는 대한민국도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어떻게 \'미국의 제재 좀 받았다\'는 북한은 그 때문에 그렇게 지지리도 못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북한의 경제 실패는 바로 \'자기가 일한 만큼 먹게 된다.\'는 자본주의의 원칙을 반대한 데서부터 필연적인 기정사실로 되어졌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지금 북한을 돕고자 하는 세계의 모든 경제전문가들이 \'아무리 온 세계가 북한을 원조해주어도 북한 자체 내의 경제 개혁과 개방 없이는 이 비극을 끝낼 길이 없다.\'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주 간단히 말해서 지금 협동농장으로 되어 있는 모든 땅들을 북한의 각 인민들에게 사유경작지로 나누어주기만 하면 적어도 식량자급의 문제는 당장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반공을 주제로 하는 이런 설교를 하면 \"한물 간 반공주의가 서울의 모 교회에서 되살아났다.\"라고 비난하는 글이 인터넷 언론에 뜹니다. 정말이지 공산주의야말로 한물가도 한참 간 것 아닙니까? 전 세계의 모든 공산국가들이 소련을 비롯하여 다 실패했고, 중국만 정치는 공산주의지만 경제는 자본주의를 도입함으로써 명맥을 유지했으며, 북한은 지금 최악의 공산주의 국가로 그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기 일보직전입니다. 도대체 어느 쪽이 진짜로 한물간 사상이라는 말입니까? 저의 그런 설교가 방송으로 나가게 되는 밤이면 교회 전화기에 불이 나고 숙직하는 교역자들이 잠을 못 자게 됩니다. 시원한 설교를 들었다고 감사하는 분들이 다수이지만 온갖 항의와 욕설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이 대한민국 안에 진짜 공산주의자들이 정말 많이 득실거리고 있구나.\'하는 생각에 더욱 목소리를 높여 외치게 됩니다. 하지만 소위 기독교인이라 하면서도 \'반공은 목사가 할 수 없는 소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 논리와 사상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반공하면 안 된다는 것은 바로 친공하자는 이야기인데, 도대체 그 저의가 무엇입니까? 지금 북한 공산정권의 노예가 되어 있는 2천만 동포들을 그대로 버려두고 그저 김정일하고만 친구로 지내자는 뜻입니까? 아니면 우리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까지도 다 포기하고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우리 식으로 살자\'고, 남북이 같이 김정일을 통일 대통령으로 받들고 \'주체적 민족\'을 만들자는 것입니까? 우리, 제발 \"자기도 갇힌 것 같이\" 이 북한 동포들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천만 명의 우리 형제들이 24시간 내내 자기 손발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마음대로 말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일자리 구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이사나 여행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데, 그 기분이 과연 어떠할지 한번 좀 상상해보십시오. 그처럼 몸과 마음까지 묶여 있는 판에 강냉이 죽 한 그릇도 제대로 못 먹고 문자 그대로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으면서 연명하는 그들의 뱃속이 어떤 느낌일지 한번 좀 상상해보십시오. 아니 어린 자식들이 굶어 죽어가는 꼴을 자기 눈앞에서 보아야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심정이란 것이 과연 자기만이라도 조금 더 오래 살아남고 싶을지 한번 여러분의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북한 인권법안 제정을 주도한 수잔 솔티 여사가 대한민국을 향하여 \"왜 한국인들은 이 악독한 인간(김정일)과의 거짓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 침묵을 지키겠다는 것입니까?\"라고, 북한 인권문제에 대하여 외면하고 대북 인권 결의안에 기권이나 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정책을 각성하라는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제가 그 편지의 일부만 소개해드립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한국인들에게 드립니다.(중략) 요즈음 우리는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너무 걱정되어 이 편지를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신들과 우리는 오랜 세월 한 배를 타고 운명을 같이 해왔는데, 요즈음 여러분들이 택한 항로의 앞날을 보면서 우리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중략) 이 세상에는, 여러분들이나 우리가 믿고 있는 모든 것을 어떻게든 파괴하려는 악의 세력이 도처에 준동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믿는 자유와 관용, 진실과 정직을 앗아가려는 것입니다. 이들은, 여러분들을 지금까지 이처럼 튼튼하고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게 한, 바로 그 자유를 파괴하려는 세력들입니다.(중략) 우리는 당신들이 당신들의 새 친구라고 사귀는 자 때문에 얼마나 여러분들이 걱정되는지, 당신들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그토록 비위를 맞추려고 공을 들이는 이 자(김정일)는 참으로 끔찍한 악몽입니다. 한 마디로, 그 자는 악마입니다. 당신들에게 이런 끔찍한 표현을 해서 안됐지만, 이것은 사실이고 여러분들은 이 사실을 직시해야만 합니다.(중략) 당신들은 이 악독한 인간과의 우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침묵을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을 파괴하려는 이 인간, 우리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이 인간과의 우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는 당신들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 자는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전부 빼앗고, 당신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무릎을 꿇도록 강요할 것입니다. 눈을 좀 뜨고 보세요. 당신들이 우리들의 말을 듣지 않겠다면, 이곳 형제자매들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최소한 그 자에게 이것만은 따져야 할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의 (북쪽)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여러분들이 살던 마을의 이웃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를 따져 물어야 할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을 살리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세요.(중략) 최소한 8만 6천 명이란 사람들의 생사를 모릅니다. 그 자는 이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자에게 행방불명된 이 사람들에 관하여 물어보세요. 그 자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들을 어떻게 했는지 물어보세요. 여러분들에게는, 최소한 그 자로 인하여 고난을 겪은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질러 따져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중략)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미국의 형제자매들로부터. 2004년 7월 6일, 디펜스 포럼 파운데이션 대표, 수잔 숄티 드림.\" 저는 이 편지를 보고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사실상 이런 편지는 우리들이 써서 온 세계를 향하여 보내어야 할 것인데, 어쩌다가 이것이 거꾸로 되었습니까? 온 세계의 양식 있는, 아니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김정일 공산독재의 악함을 어떻게 대한민국이 모른 채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어떻게 2천만 명의 형제를 한 피로 나누고 있는 대한민국 사람이 이 불쌍한 진짜 내 민족은 조금도 안중에 두지 않고, 오히려 민족공조라는 미명으로 독재자와 친구가 되면서 그와 함께 세계적인 왕따가 되려 하고 있는 것입니까? 더욱이 같은 동족 중에서 \'간힘을 면한 자\'가 \'갇힌 자\'를 \'생각해주지\' 않는다면 이것이말로 진짜 매국노이며 반민족적인 범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제의 압제로부터 자유하는 8.15해방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또 하나의 해방일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공산 독재에 의하여 자유와 생존권을 박탈당하고 갇혀 있는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면서, 이 이천만의 내 형제들이 해방되는 그 날을 하루라도 빨리 이 조국이 맞이할 수 있도록 늘 기억하며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고난과 환희/ 시126:1-6/ 광복절설교
고난과 환희 시126:1-6 금년 우리는 또 다시 마흔 아홉 번째 8,15 광복절을 맞이했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역사 가운데서 광복절만큼 고난과 환희를 함께 맛보는 기념일도 없을 것입니다. 일제의 36년간의 압제의 생활이 너무나 고되고 아팠기 때문에 이 광복절의 기쁨도 그만큼 컷습니다. 우리나라는 반만년 역사 가운데서 7백여회의 크고 작은 외침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볼 때 큰 나라들의 틈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늘 가슴 졸이고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나라입니다. 동쪽에는 일본이 위치해 있고, 북쪽에는 중국이 위치해 있고, 서쪽에는 러시아가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남쪽에는 누구나 배를 몰고 쳐들 어 올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그런 나라입니다. 지난 7월에 발표한 구한말 개화기 우리나라 경제사회상을 나타낸 통계를 보니까 지금부터 80년전인 1910년에 우리 나라에 와 있던 외국인이 자그마치 18만 4천 2백 37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와서 상주하고 있는 외국인이 6만 6천 6백 88명이라고 하니까 지금 보다 이미 80여년 전에 3배나 더 많은 외국인들이 와 있었다는 이야 기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우리나라가 외국인들에게 유약하게 보였고, 만만하게 보였던 나라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 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그 어떤 나라에 비해서도 외침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그런 나라였습니다. 나라가 힘이 없고, 실력이 없고, 유약하면 다른 나라에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옛날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보면 약소국들은 군사적으로는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모두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지배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가 오늘날에 와서 경제력이 어느 정도 향상되고 국가가 안정되고 하니까 그렇지 국력이 약하면 오늘도 힘이 있는 나라들에게 지배를 받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시편 126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부터 압제를 받아오다가 해방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나타낸 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난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민족 같이 생각되는 그런 민족입니다. 이 민족은 참 고난 을 많이 받은 민족입니다. 우리의 36년은 그들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애굽으로부터는 430년간의 압제를 받다가 출애굽을 해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으로부터는 70년간의 압제를 받다가 해방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그 고난이 얼마입니까. 이 백성들이 자기 나라에서만 압제를 받았어도 덜 할텐데 쓸만한 사람들은 모두 바 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서 남의 나라에서 압제를 받고 살아갔습니다. 그러니 그 압박이 우리와 비교나 되겠습니까.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해방을 받아서 고국으로 70년만에 돌아옵니다. 그러니 그 기쁨이나 환희가 얼마나 컷겠습니 까.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을 \"고난과 환희\"라고 정했습니다. 본 시편 126편은 그때 그 심정을 노래한 시입니다. 환희 속에서 해방을 맞아 기뻐하는 그들의 모습을 표현한 시입 니다. 이 시편의 내용을 보면 우리들이 그날 그렇게 기뻐하던 그 모습과 다를 것이 하나 없습니다. 이 시편을 통해 서 그날의 그 기뻐하던 모습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해방의 소식을 듣자 그들은 어떻게 하였는가. 첫째 반응은 \"꿈꾸는 것 같았다\" 고 했습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고 했습니다. 70년간을 이 사람 들이 남의 나라에서 포로로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고, 조롱을 당하며, 암담한 채, 낙심하면서 살았 습니다. 내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미래가 없습니다. 해방을 쟁취하기에는 당시 바벨론이 너무나 강한 나라였습니다. 그 어디에도 해방을 받아서 고국으로 돌아갈 희망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전혀 기대도 못했는데 해방령이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선물이었습 니다. 느브갓네살왕조가 무너지고 바사 왕조가 시작되면서 새 왕이된 고레스왕이 집권하자 마자 이 백성들을 해방시 키는 해방령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날 이 백성들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나온 고백이 \"꿈꾸는 것 같았도다\" 입니다. 얼마나 꿈 같았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은 내일을 모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암담한 현실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내일이 캄캄하고, 암담하고, 망망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낙심을 하고, 절망을 하고, 그래 서 자살해서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느 날 갑자기, 생각도 못하던 어느 날, 길을 훤히 뚫어 놓습 니다. 그래서 한없이 어두운 터널을 지날 줄 알았는데 갑자기 터널이 끝나고 밝은 햇빛이 나타나는 것처럼 우리 의 앞 길이 그렇게 열립니다. 6,25가 그랬고, 8,15가 그랬지 않습니까. 누가 생각이나 했습니까. 특히 8,15 광복 절이 그렇게 갑자기 올 줄 누가 상상이나 했습니까. 어디를 보아도 그날 광복절이 주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 다. 누가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을 알았겠습니까. 그럴 줄 알았으면 누가 친일파가 되고, 민족을 배 반하고, 나라를 등지고 했겠습니까. 내일이 보이지 않고 암담하니까 동족에게 못된 짓을 하고, 나라를 팔고 친일파 도 되고, 이완용 같은 사람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은 갑자기 이 땅에 광복절을 주셨습니다. 광복이 그렇게 쉽게 오리라고는 누구도 상상을 못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그렇게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모두 꿈꾸는 것 같은 기쁨을 맛보지 않았습니까.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찬양을 했다고 했습니다. 2절을 보면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 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고 했습니다. 압박을 받고 남의 나라에 끌려 와서 온갖 설움과 압박을 다 받고 살다가 어느 날 생각지도 않은 날에 광복이 되고 해방에 되고 나니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입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찬양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광복절의 기쁨입니다. 압제를 받고 고난을 당하다가 해방이 되면 모두 기뻐하는 것은 어느 민족이나 마찬가 지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남으로부터 압제를 받고 살면 않됩니다. 사람이 방종을 하거나, 실력이 없어서 남으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살고, 압제를 당하고 살고, 지배를 받고 살면 않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책임 있게 살아야 합니다. 그 리고 사람은 자유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이방인들이 놀랐다\" 고 했습니다.. 2절을 보면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백성들이 바벨론으 로부터 압제를 70년씩이나 받는 동안 누가 보아도 그들 스스로 해방을 받아서 고국으로 돌아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 습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전혀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이들이 해방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기적이었습니다. 이것은 분 명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인 것을 이방인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이 해방은 자신들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 이 주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고백이 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 를 행하셨도다\". 오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되 승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 만만하게 살아야 합 니다. 삶의 마디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뭔가를 보고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최상의 전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자신 있게 살고, 살다가 혹시 넘어진 다고 할지라도 그곳에 하나님의 또 다른 섭리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 있게 대처해 나가는 모습을 지녀야 합 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서 남의 집에 들어가 종노릇을 할 때 얼마나 그 앞날이 암담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적 어도 겉으로는 개의치 않고 그날 그날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늘 마음에 인식하 고는 할 일을 다 했습니다. 신앙인에게는 바로 그 믿음과 정신만 있으면 됩니다. 신앙인에게는 그것만 있으면 어떤 환경에서건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런 요셉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강하게 함께 하셨겠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실감나게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이 눈 에 보였으면 이방인이었던 그 주인의 눈에까지도 보였겠습니까. 그래서 창세기 39장 2절을 보면 \"그 주인이 여호와 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더라\"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주인이 요셉을 비록 종이기는 했지만 그를 함 부로 대하고 무시했겠습니까. 오히려 요셉의 존재에 대해서 속으로는 두려워했는지도 모를 일 입니다. 이스라엘이 해방을 받는 모습을 보고서 이방 사람들이 더 놀랐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사를 행하 셨도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 번째는 이 백성들이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고 했습니다. 5절을 보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이 고백은 참 눈물겨운 회한의 의미가 들어 있는 그런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이 짤 막한 귀절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이해해야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백성들이 바벨론으로부터 침략을 받고 나라가 풍비 박산 되었습니다. 그리고 쓸만한 사람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남의 나라에 끌려 간 사람들이 남의 나라에 쉽게 마음을 붙이고 정착을 했겠습니까. 아마 모르긴 해 도 매일 같이 눈물로 지샜을 것입니다. 그런데 해가 바뀌면서 이 포로생활을 하는 백성들이 자연스럽게 두 부류의 패로 갈라졌습니다. 하나는 현실에 적 응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고 또 하나는 미래 고국으로 돌아갈 그날만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나뉘었습 니다. 현실적인 사람들은 미래를 포기하고 현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현지에서 현지인을 얻어 서 결혼을 했습니다. 장사를 해서 돈을 열심히 벌었습니다. 그리고 집을 짓고, 땅을 사고, 아이를 낳고, 본격적으로 정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바벨론 정부에서는 이들을 정착시키기 위해서 온갖 혜택을 다 주었습니다. 정착하 는 사람들에게는 특혜를 많이 줘서 귀화시키고 그랬습니다. 그때 현실적인 사람들은 많이 귀화해 서 정착을 했습니 다. 이들이 생각해 볼 때는 고국으로 돌아갈 날이 올 것 같지는 않고, 더구나 해방이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었고, 그럴만한 가능성이라고는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영구히 그곳에서 살 생각으로 귀화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국에 돌아갈 그날을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문제 였습니다. 이들은 온갖 회유 를 물리치고 끝까지 독신으로 살면서 그날을 기다리면서 살아갑니다. 굶을 지라도 지조를 지켜서 자신들의 신앙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고생은 될지라도 귀화유혹을 뿌리치고 끝까지 그날만을 기다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러자니까 이 들이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그 나라에서 영원히 살 것 같이 정착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살고, 자국민이 누 리는 특전을 다 받아서 고생 없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가정도 없고, 재산을 모을 수 도 없고, 특혜를 받을 수도 없고, 그렇게 살자니 고생이 얼마나 컷겠습니까. 그렇다고 언제 해방이 되어서 고국으 로 돌아간다는 기약도 없고, 전망도 없고, 가능성도 보이질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모처럼 용기를 가지고 지조를 지켜 살아 가려다가도 어느 정도 고생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가능성이 보 이질 않을 때, 그때 사람들은 모두 도중에서 꺾이고 마는 것입니다. 보통 인내 가지고는 어려운 일 입니다. 그래도 이 사람들은 그날 그날을 살면서 언젠가 해방이 될 날만을 위해서 정착을 포기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지도 않했는데 그만 해방령이 떨어 졌습니다. 이제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 동안 고생을 하면서도 그날을 기다리면서 살았는데 바로 그 날이 온 것입니다. 드디어 해방을 받 은 것입니다. 이제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들은 모두 감격했습니다. 그래서 외치기를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하고 감격을 합니다. 마침내 이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보따리를 싸들고 고국으로 돌아 갑니다. 그때 이 사람들이 줄을 이어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그 길에 노래한 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눈물을 흘리 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 로다\". 그 동안 온갖 수모와 고난과 유혹을 물리치고 그날을 위해서 참아온것을 그들은 울며 씨를 뿌린 것에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참고 인내하면서 오늘까지 참아왔는데 마침내 이렇게 기쁨으로 고향에 돌아가게 되었다는 말입니 다. 얼마나 가볍고 행복한 발걸음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동안 행복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현지인과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 낳 고, 집을 짓고, 땅을 사고, 사업을 크게 이룩해서 잘 살고 있던 사람들, 해방이 되고, 고국으로 돌아가리라고는 꿈 에도 생각을 못했던 사람들, 그래서 현실에 충실해서 돈을 많이 벌었던 사람들, 이들이 문제 였습니다. 이제 해방령 은 떨어졌는데,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은 떨어졌는데,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이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이 사 람들은 도무지 기쁘지가 않습니다. 선뜻 나서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앉아 있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날을 위해서 평소에 눈물을 흘리며 고생을 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은 지금 얼마나 한가로운 마음으로, 가 벼운 발걸음으로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습니까. 그래서 외친 말이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하고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이 되던 날 불렀던 환희의 노래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만 있었던 이야기만이 아닙 니다. 우리나라도 해방을 받던 날 똑같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6, 25때 뜻하지 않게 피난을 가 게 되어서 홀혈단신 남하하는 일행 속에 묻혀서 피난을 가면서 하는 말이 \"나는 무일푼의 생활이 이렇게 마음을 한 가롭게 할 줄을 미쳐 몰랐습니다\" 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피난은 가야겠는데, 그 좋은 집 때문에, 집에 쌓아 놓은 그 많은 먹을 것 때문에, 그 값비싼 가구며, 짐승 떼며, 재산 때문에, 가기는 가야겠는데 그것들 때문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서 피난을 못 가서 화를 당한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입니까. 갑자기 어느 날 해방은 되었는데 일본으로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남아 있을 수도 없는 입장 이고, 그래서 망설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그 입장을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러니 \"눈물을 흘리며 씨 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라\"는 그 환희의 고백이 얼마나 힘이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언제가 이 땅에 주님이 오실 때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질 것입니다. 저는 그날에도 이 같은 환희의 노래와 함께 또 한쪽에서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어서 심각하게 망설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허둥대는 사태가 벌 어질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적당히 결탁해서 살아간 사람들, 세상에 너무 집착을 해서 쾌락에 푹 빠져 산 사람들, 현실에 너무 집착해서 재물을 모으느라고 정신없이 산 사람들, 허탄한 곳에 빠지고, 놀이에 빠져서 영적인 생활을 등한히 했던 사람들, 이들은 모두 그날 그렇게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히브리인들의 고집스런 신앙의식을 본 받아야 합니다. 고생스러워도 그 날을 위해서 타향에서 깊이 침륜하지 않고 언제나 그날을 기다리면서 경건하게 살았던 것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오시는 그 해방의 날에 주저함 없이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광복절 마흔 아홉 번째를 맞이하는 날에 이 같은 신앙적인 교훈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고난으로부터 해방/ 요18:1-11/ 광복절주일설교/ 2007-05-23
고난으로부터 해방 요18:1-11 내일이 바로 광복 60주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지금으로부터 60년전 우리 민족은 만세, 만세!를 부르며 광복의 기쁨을 두팔로 맞이했습니다. 서울 종로통에서도, 평안도 산골 마을에서도 전라도 어느 5일 장터에서도 경상도 어느 섬마을에서 모든 백성들이 튀쳐나와 만세를 불러댔습니다. 감히 끝날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제의 강압 36년의 세월이 어느날 각자의 삶이 자리에서 갑자기 느닷없이 끝나버린 것입니다. 그 이후 우리 민족은 60년의 삶을 꾸려왔습니다. 식민체제의 갑작스러운 붕괴로 기술과 시설을 독점하고 있던 일본인이 빠져나간 자리에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와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민족의 허리를 끈는 38선이 민족의 희망을 여지없이 짓밟아 버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6.25전쟁의 폐허 위에서 다시 희망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광복의 그날 한라산에서 백두산에 이르는 마을마을마다 골목골목마다 울려 퍼지던 만세소리는 다시 온 국민의 재기의 함성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함성으로 다시 30여년에 걸친 군사독재의 어두운 그늘을 걷어냈습니다. 그리고 88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 경기장에서의 함성은 다시 우리 민족의 저력을 과시하는 거대한 외침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시련의 한 고비 고비를 넘을 때마다 광복의 만세소리는 우리 역사의 증인으로서 살아 숨쉬는 맥박이되었습니다. 1953년대 1인당 국민소득 67달러에 불과하던 최빈국이었던 우리가 지금은 1인당 국민소득 14,162달러로 무려 211배로 증가했습니다. 국내총생산은 13억달러에서 6800억달러로 520배 증가했으며 수출은 2,770만달러에서 지난해 2,538억달러로 무려 9,200배로 증가했습니다. 그만큼 옛날에 비해 살기가 좋아졌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맞는 광복의 기쁨이란 것이 진정한 기쁨의 자리를 마련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맞은 해방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보장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민족 간에 갈등과 반목이 있고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 남북간의 갈등이 있고 동서간의 갈등이 있으며 서울과 지방과의 갈등이 있습니다. 노사간의 갈등이 있고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에 갈등이 있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갈등이 있고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통계적으로는 분명히 더 부유해졌는데 실질적으로는 더 못살겠다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옛날에는 노숙자는 라는 말이 없었엇습니다. 옛날에는 실업자라는 말도 익숙한 단어가 아닙니다. 옛날에는 지하방이라는 말도 거의 없었습니다. 옛날에는 자살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옛날에는 정신병이니 스트레스니 암이니 하는 것들도 거의 없었습니다. 낫익은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맞는 광복의 자유라는 것이 진짜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자유와 해방이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해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며 사회적인 동물이지만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정치적 해방과 경제적 풍요로움만으로는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오는 저는 여러분과 함께 광복 60주년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고난을 주제로하여 진정한 의미의 해방과 자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진정한 자유와 해방은 고난을 향하여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은 깊은 <고뇌>가운데 잠겨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를 지는 과정부터 이 세상 모든 죄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죄인 취급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인이 된다는 것은 무섭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죄를 지으면 육체적 정신적으로 크게 상처를 입습니다. 죄인들이 형통하게 사는 것 같지만 사실 죄를 지으면 육체와 정신과 마음에 황폐해 집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지은 죄가 자기의 몸을 공격하고 정신을 괴롭히고 영혼을 아프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많이 지으면 지을수록 몸과 마음과 영혼이 악한 세력의 지배를 많이 받기 때문에 점점 악하게 됩니다. 거칠어 집니다. 공격적이 됩니다. 자비와 사랑이 없습니다. 관용과 인내가 없습니다. 무겁고 힘든 죄악의 짐이 그를 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죄의 짐을 벗어야만 합니다. 예화1) 반세기만의 보은(한국 2005.8.10) 1953년 어느날 20대의 젊은 청년은 갑자기 배가 끊어질듯이 아팠습니다. 그는 서울역 근처의 한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의사는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악화되어 당장 수술을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하니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국 전쟁 직후로 끼니도 때우기 어려워 수술은 커녕 당장의 진료비도 지불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젊은이와 그의 형은 수술비는 나중에 지불할테니 수술부터 받게 해 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담당의사로부터 거절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발을 의사에게 울며불며 동동 구르고 있자 “젊은 총각이 딱하다며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 ”서대문에 가면 나라에서 경영하는 적십자병원이 있으니 거시 가서 사정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병원에 찾아가서 통사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이었습니다. 그러나 두형제는 울며 불며 사정을 했습니다. 이 때 담당의사 옆에 있던 여의사가 이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내가 책임을 질테니 수술을 하자고 병원측을 설득했습니다. 마침내 그 여의사 덕분에 수술을 하게 되었고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10일간의 입원치료를 끝내고 퇴원날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불할 돈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병원 뒷문을 통해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후 병원을 나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돈도 벌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50년이나 지난 오늘 까지도 이 마음의 짐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72세가 된 지금 당뇨와 고혈압과 동맥경화에 합병증까지 두루 겹쳐 힘든 투병을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병보다 더 큰 고통은 그가 지은 죄짐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도저히 이 짐을 지고 무덤까지 갈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서울 서대문구 적십자병원 원장 앞으로 편지를 썹습니다. “ 원장님 용서를 빕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라고 시작된 사연은 “ 저는 50년전 이 병원에서 맹장염 수술을 받고 병원비가 없어 수술만 받고 도망쳤는데 죽기전에 50년간 짊어지고 있던 마음과 짐과 가책을 털어버리고 싶다” 며 500만원권 수표와 함께 눈물겨운 편지를 담았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가 자기 자신의 죄값에 대해 고통스러워 합니다. 하물며 예수님은 온 인류가 당할 모든 죄값을 다 걸머지셔야 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만큼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종 결론은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셨을 때에 담대하게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잡으러 온 병정들이 누가 <나사렛 예수>인지를 묻자, \\\\\\\\\\\\\\\\\\\\\\\\\\\\\\\"내가 예수라!\\\\\\\\\\\\\\\\\\\\\\\\\\\\\\\"고 분명하고 담대하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예수님과 같이 고난 앞에서 담대해야 하겠습니다. 고난을 두려워 하거나 겁내지 말아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자! 그러면 이 <담대함>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기도생활>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리는 간절한 기도가 있은 후에 담대해지셨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고난과 역경이 넘실거리는 이 세상은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위축시키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과 같은 깊고 간절한 기도가 있는 한 우리는 <담대함>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소년 다윗이 적장 골리앗을 향하여 담대하게 나갔던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그 담대함과 확신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그것은 다윗이 광활한 들판에서 목동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했고,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했기 때문에 거장 골리앗 앞에서도 <당당하고 담대>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시시각각 몰려오는 <환란과 고난> 때문에 여러분들의 삶이 고달프십니까?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마음을 졸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던 예수님처럼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고난앞에 <담대하고 당당>하게 대처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 모두는 고난과 역경으로부터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2. 둘째, 진정한 자유와 해방은 자신의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7-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체포되면서 제자들은 다 놓아 주라고 병사들에게 말합니다. 그것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스런 배려이기도 하지만, 십자가는 예수님 자신이 혼자 질 수밖에 없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계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들은 <고난>을 잘 극복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고난의 노예가 되어 구속된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요? 왜 거기로부터 빠져나와 해방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피>할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으로부터 <도망>할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에게 <전가>시키려고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과 어려움>은 점점 더 커지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고난과 어려움을 결코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악마가 악마가 아닙니다. 그것을 잘만 받아들이고 소화하면 축복의 도구요, 기회의 여신이 됩니다. 여기 그러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화 2) 관현악 지휘자로서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렸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이탈리아 출신의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원래 첼로를 공부한 첼로 연주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남다른 <고난과 불행>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아주 심한 근시안이었기 때문에 잘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관현악단의 일원으로 연주를 할 때마다 앞에 놓인 악보를 잘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악보를 미리 머리 속에다 암기해 놓고 연주회에 나가곤 했던 것입니다. 한 번은 갑자기 연주회 직전에 지휘자가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많은 오케스트라의 단원중에 곡을 전부 암기하고 있던 사람은 오직 당시에 19세밖에 안된 <토스카니니>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그가 임시 지휘자로 단 위에 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건이 세계적인 명 지휘자 <토스카니니>가 탄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는 그의 지휘 일생동안 최소한 교향곡 250곡 이상, 오페라 100곡 이상을 쉼표하나 빠뜨리지 않고 외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암기 능력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이상 언급하고 싶은 마음을 없애버린다. 이런 놀라운 그의 암기 능력은 그의 시력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악보를 외울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만약에 <토스카니니>에게 잘 볼 수 없다는 치명적이고 남다른 역경과 고난이 없었다고 하면, 지휘자는커녕 구라파의 한 첼로 연주자로 이름 없이 살다가 이름 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고난중에는 우리를 괴롭게만 하는 고난도 있으나, <토스카니니>에게처럼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 <성공>을 가져다 주는 고난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붙들리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피하지 않으시고 순순히 겟세마네로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유익과 성공>을 주시기 위해서 고난을 허락하실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역사>와 <부활의 승리>를 앞두고 십자가의 고난이 있어야 했던 것처럼, 우리가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하면 <아픔>과 <핍박>과 <멸시의 고난>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 각자에게 맡겨진 <책임과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책임과 사명이 무엇입니까? 직장인은 직장에 충실해야 합니다. 가장은 가정을 잘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주부는 가정을 포근한 보금자리로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학생은 최선을 다해 자기개발에 혼신의 힘을 쏟아야 합니다. 모르는 것은 질문하고 아는 것은 친구들과 나누며 그것을 통해 자기 개발을 지속해 나가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순종하며 집안 일도 돕고 심부름도 하고 청소도 하는 일입니다. 인터넷과 게임에 너무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대신 좋은 문학서적이나 소설책을 읽든지, 좋은 음악을 감상하든지 좋아하는 운동을 하십시오. 몸이 건강해야 공부도 잘하고 신앙생활도 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일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 모두는 <고난과 위기>으로 해방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이러한 해방의 축복을 받기를 기원합니다. 3. 셋째, 진정한 자유와 해방은 성령 충만해야 가능합니다. 오늘 본문 10-11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병사들에게 붙잡히는 모습을 보고는 흥분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지키고 고난에서 구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칼을 휘둘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책망하시면서, \\\\\\\\\\\\\\\\\\\\\\\\\\\\\\\"네 검을 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칼을 쓰는 것은 예수님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하는 행동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왜 자기를 막으시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몹시 답답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째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받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받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감정적인 열정은 있었으나 <성령충만한 체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받지 못한 상태에서 인간적인 힘이나 경험으로 교회를 봉사하게 되면 <베드로>처럼 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르는 채 덤벙거리기 쉽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방해가 되거나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있기 직전에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기도>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졸음을 이기지 못해서 잠이 들었던 것입니다. 물론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마 26:33절에 보면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아무리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을 뿐만아니라, 그럴수록 더욱 더 실수와 좌절을 많이 겪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아직도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언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바로 이것이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받지 못한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은근히 화도나고 오기가 생겼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다짐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절대로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호언장담>을 하면서 죽을 각오까지 했던 <베드로>는 죽음은커녕 우습게도 졸음에 지고 만 것입니다. <졸음> 때문에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지 못했던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성도들의 실제 모습인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고난이 닥쳐왔을 때에 <비참한 패배자>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절대로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의 삶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후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충만>을 받았고, 그 이후 하루에 3천명, 5천명씩 구원시키는 <능력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는 자기 인생의 최대의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대 역사를 이루어 냈습니다. 그는 고난으로부터 해방을 성령충만함으로 감당했던 것입니다. 4. 나가면서 예화 3) 영국 북쪽의 북해에서는 청어가 많이 잡힌다고 합니다. 그러나 북해에서 잡힌 청어를 산 채로 영국시장까지 가져오기란 불가능했는데 유독 한 선장만큼은 청어를 영국까지 산채로 가져와 큰 돈을 벌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배의 선장들이 그 비결이 있는 줄 알고 알아 보았더니 그 비결이란 청어가 담긴 탱크에 메기를 한 마리 집어 넣는 것이었습니다. 메기는 청어의 천적입니다. 그런데 청어들이 메기 때문에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는 중에 영국에 도착 할 때까지 살아 있더라는 것입니다 결국적으로 말하면 고난관 환난과 어려움은 우리가 잘만 대응하면 우리를 살리는 약이요, 잘만 극복하면 우리를 강하고 담대하게 만들어 주는 영양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고난이 올때 그것을 피할려고 하지말고 그것과 정면으로 대적하여 이기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십시오.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그 고난으로부터 진정한 해방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8.15 60주년 기념 주일을 맞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러한 해방의 기쁨이 함께 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건열 목사(충남아산 도고중앙교회)
광복 50주년과 통일희년의 염원/ 레25:8-13/ 광복절주일설교/ 1995-08-15
광복 50주년과 통일희년의 염원 레25:8-13 오늘 우리는 광복 50주년기념 평화 통일 희년대회로 여기에 모였습니다. 이 자리에 참여하신 여러분과 남북에 있는 우리 동포와 그리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있는 우리 민족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축 원합니다. 우리는 광복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먼저 감사하는 동시에, 지난 50년 동 안 통일을 이루지 못한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조국의 평화통일과 참된 희년이 오기를 위하여, 함께 기도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민족에게 광복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합방이 되어, 그들 식민지 노예와 같이 36년간의 압 박과 설움은 형언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 강토는 물론 주권도 빼앗기고,말 도,글도, 성도 빼앗겼으며 정신대라는 허울좋은 이름아래 정조까지도 빼앗 겼던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교회들은 신사참배라는 강압 아래 신앙의 정조 까지도 유린당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50년전에 해방과 자유와 광복을 얻은 것은 오직 하나 님의 은혜와 축복이였던 것입니다. 이제 해방된지 50년이 지나는 동안에 잘 살게 되니,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잊지나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되어,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에 들어 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 유월절을 지킨것 같이 우리 민족도 광복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고는 앞으로의 더 큰 축복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 다. 그러므로 우리 다같이 두손을 들어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할렐루야! 둘째는 광복을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통일조국을 이룩하지 못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물론 강대국에 의해서 남북이 분단되었지만, 그러나 광복의 기회를 선용해 서, 통일을 이루어야 할 터인데 지난 50년동안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동 족간에 총칼을 맞대고 싸워왔습니다. 이북에서는 주체사상이니 반동이니 운 운하면서 적화통일에 급급하였고, 남한에서도 반공이니 빨갱이니 운운하면 서 통일보다는 정권유지의 방편으로 삼아왔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초기에는 통일에 대한 기도가 끊이지 않았었는데, 화펴에 하는 사명수행은 커녕 분열과 분파로 교권싸움에 50년을 허송해 버렸습니 다. 이는 우리 교회 지도자들의 큰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옛날부터 제사장들의 잘못은 위정자들에게 이어졌고, 위정자들의 잘못은 모 든 공무원들에게, 공무원들의 잘못은 모든 국민에게 이어졌던 것입니다. 많 은 경제인들이나 기업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된다는 식으로 치부해왔습니다. 지난날의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부실합니다. 전직 대통령이 관련되었다는 사천억원의 가차명계좌 의 돈이 은닉되었다고 현정부의 총무처 장관이 기자들 앞에서 발설을 한 것 이 요즘음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실명제가 실시된지가 2년이 됐는데 적은 돈은 실명이고 큰 돈은 가차명이니 그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공 무원을 믿을 수 있습니까 금융계를 믿을 수 있습니까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닌줄 압니다. 최근 남해에서 씨 프린스호가 좌초로 청저유해역이 오염이 되었습니다. 바 다만 오염된 것이 아니라,공기도 물론 채소도 오염이 되어서 안심하고 무엇 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이것은 우리 국민의 심령이 오염되었다는 증거입니 다. 이것이 누구의 탓입니까 그것은 먼저 우리 성직자들이 바로 지도하지 못한 책임이 큽니다. 다음에 위정자들의 책임인 것입링니다. 나아가 빛과 소금 노릇을 못한 1,200만 성도들의 책임도 있습니다. 그런고로 성직자들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또 대통령 이하 모든 공무원도 회개해야 합니다. 또 대통령 이하 모든 공무원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1,200만 성도들도 회 개해야 합니다. 회개합시다. 셋째는 조국이 참된 통일 희년이 되도록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레위기 25장에 의하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해방되어 땅을 분배받은 지 매 7년마다 안식년이 되고, 안식년이 일곱번 지난 다음에 곧 50년째를 희년이라고 했습니다. (1) 전 국민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종들이 자유 해방을 받아 가족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2) 모든 토지는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고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3) 모든 부채는 탕감을 받고 (4) 땅이 쉼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희년이라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1) 36년 동안 일본에게 종 되었다가 50년 전에 자유해방을 받았고 (2) 우리의 강토를 돌려 받았으며 (3) 부채는 물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로부터 50년이 되었으니 희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 정한 희년은 오지 않았습니다. 남북이 통일이 되어야 진정한 통일 희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희년의 상징적인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라 할 수 있 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큰 빛을 주시 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마4:16). 예수님의 사역은 \\\"포로된 자를 해방 시키시고, 눈먼 자를 보게 하시며, 눌 린 자를 자유케 하시고 은혜의 해를 전파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통일의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이루어져야 합 니다. 첫째는 사랑으로 통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일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이북에 있는 동포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그들을 아량으로 끌어 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에는 군 사적인 힘이나 경제적인 힘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으로 화 개하고 포용해야 합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통일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복음을 받아 회개하고 구원받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리 외적으로 희년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 심령이 복음을 받지 않는다면 온전한 희년이 이 루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1,200만 성도 여러분! 복음으로 희년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전도합시다.... 세째는 하나님의 신으로 통일을 해야 합니다. 스가랴서 4:6\\\"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지 가나의 신 으로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정치나 경제적인 힘으로도 되지 아 니하고, 군자적인 능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통일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권한에 있습니 다. 그런고로 우리는 통일을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따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기도합시다. 기도합시다. 이이복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