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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고난과 부활의 달/ 요20:1-20/ 2010-04-25
4월은 고난과 부활의 달 요20:1-20 만우절로 시작되는 4월의 마지막주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은 \\\"4월은 고난과 부활의 달\\\"이라는 제목입니다. 먼저 4월에 대해서 시인들이 노래한 두가지를 소개할까 합니다. 20세기 최고 시인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금욕과 절제의 신앙생활을 한 T.S엘리어트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이 시인은 \\\'황무지\\\'라는 시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후 쓰여진 이 시는 한겨울을 뚫고 황폐한 환경에서 새싹을 틔워야하는 4월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세계대전 후 정신적 황폐화로 죽은거나 다름없는 사 회를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시대의 윤동주시인과 1960년대의 대표 적 참여시인인 김수영과 신동엽이라는 시인이 있는데, 신동엽 시인은 4월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4월은 갈아엎는 달\\\"이 라고...... \\\'껍데기는 가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와 더불어 대표 적인 이 시는 모내기를 시작하기 전에 농토를 갈아엎는 뜻이 기도 하지만, 4.19혁명에 동참은 했지만 5.16군사쿠데타로 혁 명의 좌절을 맛보면서 세상을 향해 갈아엎는 달이라고 표현 한 것입니다. 앞에서 두명의 시인을 통해서 4월에 대한 표현을 보았는데, 오늘 저는 4월은 고난과 부활의 달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먼저 부활의 뜻부터 볼까요? 국어사전에는 단지 다시 사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교회에서 는 육과 영이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대표적인 특징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저는 그사랑만큼 중요한 것은 부활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에 하나 기독교에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믿는 기독 교는 기독교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60∼80년 길어야 100년을 살다가 죽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살게 될 천국에는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살고, 슬픔과 눈물이 없습니다. 이쁘지 않다고, 돈이 없다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시험과 공부 때문에 힘들어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천국에는 거저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하셨던 것들- 40일간 금식기도 하시고, 가장 믿었던 수제자인 베드로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고,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피뿐만이 아니라 물까지도 흘리고 돌아가셨던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야만이 부활의 기쁨 을 맛볼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부활의 기쁨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지만 이 맛볼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Let’s Change the Bitter Water into the Sweet Water!(쓴 물을 단 물로 바꿉시다!)/ Exodus 15:22-27(출15:22-27)/ 2002-07-23
Let’s Change the Bitter Water into the Sweet Water! Exodus 15:22-27 The event that Israelites crossed the Red Sea with the help of God was a great and unforgettable victory, success, blessing and miracle to Israelites. After they crossed the Red Sea they were overjoyed and praised God ; ”The Lord is my strength and my song ; he has become my salvation. He is my God, and I will praise him, I will exalt him. Who among the gods is like you, O Lord ? Who is like you- majestic in holiness, awesome in glory, working wonders ? In your unfaling love you will lead the people you have redeemed. In your strength you will guide them to your holy dwelling.” (Exodus 15:2,11,13) But after they praised God with this beautiful song they traveled in the desert without finding water for three days. When they came to Marah, they found water but it was bitter so that they could not drink. So the people who had experienced the miracle of the Red Sea became dejected and they grumbled against Moses. Then Moses cried out to God, ”Lord, we don’t have water to drink. Please, give us water !” And God showed him a piece of wood and told him to throw it into the water. As Moses did the water became sweet just like God said. And Israelites praised God again with gladness. Brothers and sisters, we also face the bitter water in our life (business, school, company). What do you do when you face the bitter water ? Just like Israelites who even if they experienced the miracle of the Red Sea, will you be dejected too ? Don’t you think it is the character of humans that they grumble again when they face the bitter water ? But as Christians what do we do in this situation ? What are the lessions we have to learn in this situation ? 1. Don’t have to be dejected due to the problems. When the Israelites moved to the land of Canaan they were always worried about water. The Red Sea worried them about too much water, but they crossed it. And when they faced the bitter water at Marah the water was changed into the sweet water. Some times later they drank water in Elim. Then they reached Rephidim, where Moses struck the rock with his staff that water gushed out. As you know it is not easy to find water in Palestine. Therefore Israelites always faced the water problem. But God always solved their water problem. However when the problems occured again they became dejected again and again. Brothers and sisters, don’t you think we experience not only great victories but also failures in our life ? Especially, why aren’t here some bitter problems in this foreign land ? But don’t be dejected due to the problems like Israelites. But let’s pray like Moses. God will tell us the way to change the bitter water into the sweet water (sigh into joy, despair into hope, curse into blessing) 2. Don’t forget the great victory easily. Isralites have a good memory. They are very clever. 25-30 % of the winners of the Nobel prize is Isralis. They have wisdom superior to other people. But the Israelites forget the victory of the Red Sea. And they became dejected. When we face the bitter problems we are apt to forget easily what God did greatly for us before, and become dejected. But don’t forget what God did for us. Don’t be worried. I also faced many problems like you, but God always helped me, and he gave me victories. However when I face the problems again I sometimes worry again. Why ? It’s because I forget what God did for me. Therefore don’t forget what God did for you. and be thankful always ! 3. We have to believe God prepares Elim, oasis. God not only changed the bitter water into the sweet water but also he prepared the oasis Elim. Elim is only 5 miles away from Marah. God prepared Elim where there were twelve springs and seventy palm trees. Therefore let’s do believe that God always prepares good things for us. Several years ago a plain crashed into the mountain Andes. Some persons were killed, some survived. The survivors ate the flesh of the dead man to survive. Some days later rescue team arrived there and survivors were rescued. But it was a really irony because they realized that there was a nice hotel only 6 miles away from the accident area. The survivors did not know that a nice hotel was there near to accident area so that they ate the flesh of the dead man. Brothers and sisters, we have to know God prepares oasis for us especially when we face the bitter water. We can see some persons who are dejected before the bitter water and they leave the church. Why ? It is because they don’t think that the oasis is before them. Brothers and sisters, don’t forget God prepares oasis Elim for us and he waits for us there. Therefore when you face the bitter water believe firmly that oasis of joy (hope, love, happiness) is before you ! Prayer : God we face a lot of bitter problems in our life. But we never be dejected. We believe God is the almighty God who can change the bitter water into the sweet water. Lord, when we face the bitter water let us be the persons who can change the bitter water into the sweet water. Lord, let us be the persons who lead many persons to oasis that God prepared for us. Amen!
Well-dying(잘 죽는 것)/ 마27:45-50/ 종려주일설교/ 2010-04-02
Well-dying(잘 죽는 것) 마27:45-50 주후 4세기에 마카리우스라는 사람이 이집트에 살았습니다. 그는 사막의 성자라고 불리우는 사람입니다. 한 번은 그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예수님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서 힘들게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카리우스는 예수님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주여! 그 십자가를 제게 주십시오. 제가 그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아니하시고 그저 묵묵히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힘들게 앞을 향해서 계속해서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마카리우스는 계속해서 예수님께 졸랐습니다. \\\"오, 주여! 그 십자가를 제게 주십시오. 제가 지겠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마카리우스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네가 저야 할 십자가는 저기 있느니라. 가서 너의 십자가부터 먼저 지고 내게로 오너라. 그러면 내 십자가를 주겠노라.\\\" 거기에 가니까 그가 져야 할 십자가가 놓여 있었습니다. 마카리우스는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런데 와 보니까 예수님의 어깨에 지어져 있던 십자가가 사라졌습니다. 마카리우스는 깜짝 놀라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오, 주여! 주님의 십자가를 누가 대신 졌습니까?\\\" 그때 예수님은 미소를 띠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네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져야 할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는 것이 곧 나를 위한 길이란다. 나의 십자가를 네가 대신 져 주는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진한 주님의 사랑이 담긴 십자가를 우리는 사랑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십자가는 무서운 극형의 형벌이었습니다.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들이 받아야 할 형벌이 십자가형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형은 가장 무섭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한없는 위로와 평안을 얻습니다. 이유는 거기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피 흘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죽으심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 자체에는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셨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마27장23절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주고 자기 손을 씻었습니다. 군병들은 예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침 뱉고 무릎꿇어 유대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조롱하며 예수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희롱을 다 한 후 다시 홍포를 벗기고 예수의 옷으로 입힌 후에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갔습니다. 해골의 곳이라는 골고다에 십자가를 세우고 거기 예수를 못 박았습니다. 탕!탕!탕! 큰 대 못이 예수님의 손을 뚫고 발을 뚫고 들어가 나무에 박혔습니다. 피가 나무에까지 박혔습니다. 채찍에 맞아 터진 살에서 흐르던 피가 엉겨서 온 몸이 붉게 피로 덥혔고 못 박힌 손과 발에서는 선홍빛 뜨거운 피가 흘러내립니다. 지나가던 자들은 예수를 모욕하여 말하기를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 내려오라’고 조롱합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도 함께 희롱하여 말합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희롱합니다. 심지어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예수님을 조롱하며 욕합니다. 온 세상이 캄캄해졌습니다. 그 어두움은 몇시간 계속되다가 제구시쯤 되어 예수께서 크게 소리를 지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엘리엘리 라마 사막다니” 그리고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 숨을 거두시었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 십자가의 죽으심은 무엇 때문입니까? 누구를 위한 고난입니까? 누구를 위한 십자가의 피 흘리심 입니까? 이사야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4-5) 오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이번 주는 사순절의 가장 중요한 주간입니다.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고난을 당하신 주간이며 죽으심과 무덤의 어두움을 지난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고난주간 동안 더욱 주님의 당하신 고난을 묵상하며 주님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고난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지내는 한 주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보여주신 십자가의 희생과 헌신적인 사랑을 우리도 실천해보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죄의 용서와 사함을 얻는 길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의 삽자가의 길 밖에는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많아도 돈이 많아도 건강해도 존경받는 삶을 살아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구원은 죄의 값을 치르는 속죄의 희생제물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주님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의 희생제물이 되어주셨습니다. 아무 죄도 없고 흠도 없는 그분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생명을 드리는 희생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구원은 한 생명의 고귀한 희생으로 이루어진 선물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으로 족합니다. 심판과 멸망에서 건져 생명을 얻게 해주셨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얻은 것 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내게 없는 것을 보면서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은 것 때문에 속상해 하고 하나님을 불신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세상에 부수적인 것들 때문에 속상해하고 불평 원망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그 사랑과 구원의 은총이 가장 큰 축복임을 다시금 고백하고 더욱 십자가의 사랑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사람들은 웰빙을 위하여 많은 시간과 물질을 투자합니다. 잘 먹고 잘사는 법이 인기리에 방영되면서 사람들은 보다 질 높은 삶을 추구하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웰빙의 바람이 이제는 웰다잉이라는 것으로 불고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웰빙을 넘어서서 웰 다잉을 말하고 있습니다. 참 바람직하고 좋은 현상입니다. 웰빙이 잘사는 것이라면 웰 다잉은 잘 죽는 것입니다. 언젠가 신문을 보다가 사설에 윌빙과 웰다잉에 대한 기사가 쓰여있는 것을 읽었습니다. 내용은 웰다잉이 진정 웰빙을 가능하게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웰 다잉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죽음이 두려워하고 멀리해야할 것이 아니라 친숙하게 받아들이고 가까이 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삶과 죽음은 같이 있는 것입니다. 깊은 영성의 사람 헨리 나우엔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어느 순간이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우리는 또한 어느 순간이고 살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보다 잘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을 때에는 인간적인 모든 조건들 돈 명예 지위 모두 땅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죽음이란 것은 우리에게 부질없는 것과 우리가 진정으로 찾아야 할 것들을 가르쳐주며 우리를 참된 것으로 되돌려 주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아직 그 철저한 죽음의 자리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내세워야 할 것들이 많고, 시시비비를 가려 저울질해야 할 것들이 많고, 아직 교만하여 자기를 꺾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웰 다잉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웰빙이나 웰 다잉은 모두 자기 중심적인 것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들에게 말하려고 하는 웰다잉은 자기 중심적이지 않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웰빙과 웰다잉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세상이 말하는 것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적인 정신을 가지고 웰빙을 말하고 웰다잉을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이 너무 이기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자기만을 생각합니다.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이 세상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문화는 모두 자기중심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세상의 이기주의적인 문화를 극복하고 기독교적인 문화를 세상에 펼쳐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웰다잉의 삶입니다. 잘 죽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참 받아드리기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가? 왜 무거운 짐을 자꾸 지우려는 것인가? 그리고 짜증스러워하고 불평하며 말합니다. 나를 위하지 않는 삶, not for self 이것은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며 삶이었습니다. 돈벌어서 남 주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공부해서 남 주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삼류인생 싸구려 인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지 않는 하나님을 위하는 삶, 교회를 위하는 삶, 이웃을 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웰 다잉입니다. 웰다잉의 구체적인 모델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그분이 걸었던 웰 다잉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죽고자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라.” 기독교적인 웰다잉은 육체적인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것과 믿음의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입니다. 내가 죽지 않아서 가정이 병들과 아내가 절망하고 자녀들이 어둠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아서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목회자의 마음에 못을 박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았기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의 교만이 죽고, 나의 아집이 죽고, 나의 이기심이 죽고, 나의 못난 자아가 죽어서 다른 사람들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잘 죽으면 잘 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웰다잉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도 다 내가 죽으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았기에 분을 품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신 것은 웰 다잉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가장 아름다운 죽음입니다. 자기를 죽임으로 모든 사람을 살리신 웰 다잉인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아직 우리에게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아가야 할 날이 많이 있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이 길게 늘어져 있다고 생각하기에 정작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꼭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거나 간과하고 지내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날이, 그 시간이 이제 며칠 아니 몇 시간 후로 임박했다고 생각했을 때 나에게 남은 이 짧은 시간에 내가 꼭 해야 할 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들입니다.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신 바울은 아예 자기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하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 임박한 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죽음과 함께 하는 그의 삶은 그를 가장 치열하게 살게 만들고 가장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게 만들었습니다. 웰 다잉! 그것은 예수님의 삶이였고 사도 바울과 모든 제자들의 삶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웰다잉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계절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은 웰다잉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거하는 모든 자리에서 웰다잉을 실천하십시오. 웰다잉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웰빙이 이루어지도록 멋있는 예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상칠언 중 제1언(架上七言 中 第一言)/ 눅23:24-/ 2001-11-20
가상칠언 중 제1언(架上七言 中 第一言) 눅23:24- ( 서 론 ) 사순절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일곱 마디의 말씀을 살펴보자. 일명 가상칠언 이라고 하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부활 전 주일까지 말씀의 은혜를 나눌 때 십자가의 뜨거운 영적 체험을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도 맨 처음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였다. 온 몸 뼈 마디마디에 밀려오는 아픔의 통증 가운데서도 기도하시는 주님 모습에 우리는 너무나도 부끄러울 뿐이다. 예수님이 극한 고통 속에서도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평생을 기도의 삶을 살아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짧은 기도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진실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십자가 처형은 가장 잔인하고 포악한 처형 방법이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이었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 주님의 참 모습을 우리는 지금 보고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 우리도 고통 속에서 주님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까 ? 아니면 원망과 불평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까 ? 우리의 삶 속에서 어려움이 오고 고통이 올 때 왜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지 아십니까 ? 평소에 우리가 기도의 삶을 살지 아니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오면 우리는 원망부터 나오고 불평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다. 어려움이 와도 고통이 와도 감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평소의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기도로 말씀으로 가졌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보이신 첫 번째의 모습을 3가지로 살펴볼 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임하길 축원합니다. - 1 - 첫 번째 : 아버지여 부르신 주님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 예수님이 고통을 입고 있는 가운데 주님의 입에서 흘러나온 첫 말씀은 \"아버지여......\" 였다. 우리와 똑같이 육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시다. 안 잡수시면 배고프셨고 ..... 피곤하시면 주무셔야 하셨고..... 못된 일을 보시면 화를 내실 줄도 아셨고 ...... 슬픈 일을 보시면 눈물도 흘리셨고 ....... 매를 맞으시면 피도 흘리시고 아파하셨던 주님이셨다. 십자가 고통 속에서 충분히 고통의 소리가 먼저 나와야 하건만 예수님의 음성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소리였다. 아버지 =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십자가 고통 속에서 선포하고 계신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버지이셨다. 우리는 예수 믿기 전 누구를 아비로 삼고 살았습니까 ?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 고통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 너무나도 끈끈한 정다운 관계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아버지였다. 주님은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알고 계셨다. 예수님이 12살 때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가셨을 때 예수님을 잃어버린 요셉과 마리아가 사흘 후에 부모님을 만났을 때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너를 근심하며 찾았다고 하자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 \" (눅2:49) - 2 -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이러한 아버지 관계를 공생애 기간 동안에도 수없이 나타내셨다. (마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은 이러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우리에게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 우리의 아비는 마귀였다. 그 아비의 손에서 우리를 끄집어내어서 우리의 참 아버지를 만나게 하여 주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시다. (갈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성도 여러분 !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십니까 ? 하나님과 아버지 관계가 이루어 졌습니까 ? 이 관계를 이루게 하여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 이시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그러한 아버지의 관계를 다시 한번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의 관계를 놓치지 아니한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습니까 ? 어려움이 오고 고통이 올수록 더욱 아버지께 나아가는 신앙입니까 ? 아니면 쉽게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뜨려 버리는 자 입니까 ? 성도 여러분 ! 이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떨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에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육적인 아버지와의 관계가 끓어져 버린다면 우리는 그 아버지의 자녀가 되지 못한다. - 3 - 오늘날 청소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다. 여기에는 아버지들의 책임도 있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각 가정에서 자녀들이 아버지를 우습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나온 유행어가 고개 숙인 아버지라는 말이 있다. 얼마 전 아버지와 아들이 화투를 치다가 돈을 안준다고 아들이 아버지를 때린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한 가정의 사건이 아니다 오늘날 이 시대 가정들이 어떤 가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사건이다. 옛날에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은 근엄하고 엄격하고 무서운 아버지 상 이였다 그러나 요즈음 가정에서 아버지들의 목소리는 어머니들 목소리보다 힘이 없다. 늦잠 자는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가서 아무리 일어나라고 해도 안 일어나는데 엄마가 일어나라고 하면 잘 일어난다. 어떤 아버지는 \"엄마가 일어나라고 한다\" 하면 아이들이 잘 일어난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무시한 이러한 일들이 영적인 세계에서도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를 도무지 두려워할지 모른다. 살아 계신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대이다. 인간이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온전히 성립될 때 이 땅에서도 복을 받고 영적인 능력을 받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깊게 가지고 살아가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깊게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아버지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아버지의 권세를 누리며 이 세상에서 힘있게 복되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마23: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이 말씀은 육적인 아버지를 무시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그만큼 하나님 아버지가 세상에 아버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는 예수 처음 믿고 제일 좋은 것이 아버지를 많이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 4 - 저의 육적인 아버지는 저 7살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단어가 제 입에서는 사라졌고 아버지라는 존재를 잃고 살아왔다. 그런데 예수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원없이 불렀다. 지금까지도 원없이 부르고 있다. 성도 여러분 ! 아버지라는 단어 얼마나 친근한 말입니까 ?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믿으십니까 ?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가 온전히 믿을 때 우리에게 있는 어떤 고통 어떤 어려움도 아버지가 해결하여 주신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그 고통 속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 하였기 때문이다. (마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아십니까 ? 독생자 예수까지도 우리에게 주신 아버지의 사랑이시다. 그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외면하고 산다면 그것처럼 불쌍한 인간은 없을 것이다. 그 아버지의 사랑을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다시 들려주고 계신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 아버지여 ! 아버지의 사랑과 축복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 5 - 두 번째 :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 십자가가의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은 우리를 생각하셨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만 성립시키시려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의 문제도 해결하시려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인간에 있어서 아버지는 만날 때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죄의 문제이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자주 나아간다고 할지라도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아니하고서는 아버지와 가까워 질 수가 없다. (사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저희의 =자신을 죽인 유대인들이다. 복음적으로 우리들이다. 사하여 주옵소서 = 죄를 용서해 달라는 주님의 탄원이다. 우리의 죄가 사함 받지 아니하고서는 아버지와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를 보고 무엇을 느끼십니까 ? 십자가의 사랑만 느끼십니까 ? 십자가의 고통도 느끼십니까 ? 우리는 십자가를 보고 사랑도 느껴야 되고 고통도 느껴야 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십자가를 보고 느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싫어하신 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독생자 예수까지도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성도 여러분 ! 십자가가 보여주는 첫 번째 메세지는 사랑이 아니다. - 6 - 십자가가 보여주는 첫 번째 메세지는 죄 사함 받지 못한 자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이다. 십자가에 나타난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지 못한다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달을 수 없다. 죄인이 죄를 깨닫지 못하면 사랑을 받아도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 감옥에 죄를 짖고 들어간 죄수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면 세상이 내린 사랑의 형벌의 매를 깨닫지 못한다.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한 자는 감옥 속에서 더 악해지고 복수심에만 불타 있는 것이다. 그런 자에게는 새로운 삶이 찾아올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오히려 감옥에 들어온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자신에게 내린 형벌을 감사하게 여긴다면 그 사람에게는 새로운 삶이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면 원망과 불평만 있게되고 더 나아가서는 더 큰 죄를 범하고 만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지금 기도하고 계십니다.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가 사함 받을 수 있는 곳은 예수님이 매달려 있는 십자가 아래이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없이는 우리의 더러운 죄가 사함 받을 길이 없다. 우리의 어떤 종교적인 행위를 아무리 거룩하게 한다고 해도 우리의 더럽고 추한 죄가 사함 받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우리가 선한 일을 한다고 해서 울의 더럽고 추하고 악한 죄가 사함 받을 수 있습니까 ? 그 어떤 행위로도 우리의 죄는 사함 받을 길이 없다. 오직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냄새나고 추악한 죄들이 사함 받을 길이 없다.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해 무감각한 삶을 살고 있다. 예수를 믿는 자들 조차도 죄에 대해 무감각하다. 우리는 음식을 맛을 보고 \"아! 맛있다...맛 없다\" 한다. 그런데 이런 맛을 모르고 음식을 먹는다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가 ! - 7 - 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죄에 대해 전혀 무감각하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불쌍한 자인가 ! 성도 여러분 ! 우리는 죄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 동물들도 자신이 공격을 당할 것 같으면 몸의 색깔을 변하고 자신을 보호할 줄 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어떠한가 ? 동물보다 못하다. 죄에 대해 속수무책 당하고만 살고 있다. 오히려 죄악 속으로 일부러 들어가고 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조금도 아량이나 자비를 베풀지 아니 하고 무섭게 심판하고 계신다는 것을 본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조금도 타협이 없다. 무섭게 심판하시고 처벌 하셨다. 그러나 누구든지 십자가 앞에 나아오기만 하면 어떤 죄라도 사함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죄악에 붙잡혀서 살아가지 말고 담대히 십자가 앞에 나아서 나의 죄를 고백하시기를 바란다. -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 죄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런가하면 죄가 무엇인지는 아는데 .........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도 아는데 ........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살아가고 있다. 또 그런가하면 죄를 열심히 회개하고 또 죄를 반복해서 짖는 그런 시대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성도 여러분 !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저희를 사하여 달라고\" 하신 주님의 고통의 기도를 잊지 마시고 날마다 십자가 밑에 나와서 내 죄를 진정으로 고백하고 새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죄 사함 받은 자는 나에게서만 끝나지 않고 나도 내 주위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는 자가 되어 가는 것이다. 내 죄가 사함 받았다는데 아직도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죄가 사함 받은 것입니까 ? - 8 - 사함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남을 미워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 (마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6: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성도 여러분 ! 진정한 죄 사함 받은 자는 죄에서 자유함이 있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함이 없어야 한다. 십자가 밑에서 죄악의 담이 무너지고 십자가 밑에서 온전한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 보혈의 피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흘러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송가 202장)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 - 9 - 세 번째 :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하는 짓이 얼마나 무서운 짓인지 저 유대인들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이 그렇게 기다렸던 메시야를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자신들이 지금 죽이고 있는 자가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사실을 저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저들의 모습이 우리 예수님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하신 것이다. 자기의 하는 것 =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유대인들의 행동이다 알지 못함이니이다 = 우매한 . 미련한 자들의 모습이다.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다.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는 자가 가장 우매한 자이고 미련한 자이다.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동안 얼마나 그들을 깨닫게 하셨는가 ? 그러나 저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믿지 아니하려고 했다. 아니 예수가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아니했다. 조금만 깊은 관심을 가졌다면 예수가 누구이신지 알 수 있었는데 저들은 알려고 하지 아니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자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십니까 ? 여러 가지로 볼 수 있지만 오늘 본문에 의해서 예수를 바라본다면 예수가 누구이십니까 ? 나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내 죄 대신 죽으신 분이시다. 믿으십니까 ? 그러나 저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 아니 듣기는 들었지만 예수님 말씀을 거부했고 그 말씀을 빌미 잡아서 지금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게 하신 것이다. - 10 -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무서운 짓을 범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야를 자신들의 손으로 죽이는 이 무리들의 행동이 얼마나 미련합니까 ? 그러나 이 같은 미련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세상은 지금도 이 귀한 십자가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예수 믿고 천국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뿌리치고 지옥의 길을 스스로 찾아가고 있다. 왜 사람들이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를 거절합니까 ? 왜 자신들의 마음을 찢고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죄 사함 받기를 거부합니까 ? 모두가 무지함 때문이다. 예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성도들이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까 ?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예수가 누구인지 안다면 성도들의 삶이 달라져야만 한다. 사마리아 성에 버림받고 천대 받은 한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자기가 만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에 그의 삶이 달라진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소리쳤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고 ....... 성도 여러분 ! 메시야를 만나셨습니까 ? 메시야와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 \" 라는 같은 말이다. 메시야는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는 헬라어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우리의 삶이 달라져야만 한다. 이제 살아가는 생각과 사고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세리 마태는 예수는 만나고 더러운 세리 직을 팽캐치고 예수를 따랐다. 세리장 삭개오도 예수는 만나고 그 동안 세리직을 하면서 불의한 방법으로 모은 모든 재물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내어놓았다. 창녀의 삶을 살던 막달아 마리아도 예수를 만나고 더러운 삶을 깨끗이 정리하고 예수를 위해 살았다. 예수가 누구인지 모를 때 미련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 제자들도 예수가 누구인지 온전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는 미련함을 보였고 다른 제자들도 다 도망가 버리는 미련함을 보였다. - 11 - 그러나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예수가 누구인지 알게된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명까지 바치는 삶을 살았다. 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수없이 밝혀주었고 표적으로도 예수 자신이 누구인지 밝혔지만 저들은 그러한 모든 것을 부인했고 받아들이지 아니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고.... 죽은자를 살리고... 오병이어로 수만 명을 먹였건만 저들은 예수를 한낱 인간으로만 보았다. 심지어 어떤 무리들은 예수님을 귀신이 들렸다고 까지 했다. (요8:49)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 예수를 모르는 유대인들은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고 말았다. 그 무지한 자들을 위해서 주님은 지금 십자가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있는 것이다.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들을 향해 하는 주님의 소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면 예수님을 진실로 믿을 수 없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면 예수님을 위해 살수 없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면 예수님을 핍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 진리요 ! 생명이니 !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찬송가 94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되시네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예수는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주님은 어느 날 제자들에게 물어 보았다. \"세상 사람들이 나는 누구라 하더냐 \" 제자들은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 - 12 - \"너희는 나를 누구로 보느냐 \"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는 정확히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계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머리로만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인간의 지식적으로만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머리로만 인간의 지식으로 아는 예수는 고통이 뒤따르고 어려움이 올 때 우리는 베드로처럼 우리들도 예수를 부인하게 될 것이다. 예수를 지식적으로 머리로만 안다면 우리는 예수를 위해서 살아갈 수 없다. 성령으로 예수를 알고 깨닫기 되기를 바란다. (요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예수가 누구인지 알게 될 때 우리는 예수를 위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처럼 자신들을 위해 살아가는 우매하고 미련한 자의 삶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십자가에서 나의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를 위해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 결 론 ) 십자가에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잊지 아니하신 주님이 어찌 우리를 잊겠는가. 예수님을 우리를 데리러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요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우리의 죄를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의 권세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힘차게 열심히 신앙생활 해서 주님 재림하실 때 흠없이 주님 만나기를 원하시기 위함이다 - 13 - 우리의 죄가 십자가의 피로 다 씻음 받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자들이다 절대로 우리는 약한 자들이 아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알지 못해서 사단에게 속고 당하고만 살아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 요17장은 십자가에 죽으심을 앞둔 예수님의 기도 내용이 나온다. (요17:9-11)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성도 여러분 ! 지금도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 소리는 계속 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날마다 ....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십자가 밑에 열심히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가상칠언 중 제1언(架上七言 中 第一言)/ 눅23:24-/ 2002-04-03
가상칠언 중 제1언(架上七言 中 第一言) 눅23:24- ( 서 론 ) 사순절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일곱 마디의 말씀을 살펴보자. 일명 가상칠언 이라고 하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부활 전 주일까지 말씀의 은혜를 나눌 때 십자가의 뜨거운 영적 체험을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도 맨 처음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였다. 온 몸 뼈 마디마디에 밀려오는 아픔의 통증 가운데서도 기도하시는 주님 모습에 우리는 너무나도 부끄러울 뿐이다. 예수님이 극한 고통 속에서도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평생을 기도의 삶을 살아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짧은 기도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진실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십자가 처형은 가장 잔인하고 포악한 처형 방법이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이었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 주님의 참 모습을 우리는 지금 보고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 우리도 고통 속에서 주님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까 ? 아니면 원망과 불평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까 ? 우리의 삶 속에서 어려움이 오고 고통이 올 때 왜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지 아십니까 ? 평소에 우리가 기도의 삶을 살지 아니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오면 우리는 원망부터 나오고 불평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다. 어려움이 와도 고통이 와도 감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평소의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기도로 말씀으로 가졌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보이신 첫 번째의 모습을 3가지로 살펴볼 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임하길 축원합니다. - 1 - 첫 번째 : 아버지여 부르신 주님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 예수님이 고통을 입고 있는 가운데 주님의 입에서 흘러나온 첫 말씀은 \"아버지여......\" 였다. 우리와 똑같이 육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시다. 안 잡수시면 배고프셨고 ..... 피곤하시면 주무셔야 하셨고..... 못된 일을 보시면 화를 내실 줄도 아셨고 ...... 슬픈 일을 보시면 눈물도 흘리셨고 ....... 매를 맞으시면 피도 흘리시고 아파하셨던 주님이셨다. 십자가 고통 속에서 충분히 고통의 소리가 먼저 나와야 하건만 예수님의 음성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소리였다. 아버지 =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십자가 고통 속에서 선포하고 계신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버지이셨다. 우리는 예수 믿기 전 누구를 아비로 삼고 살았습니까 ?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 고통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 너무나도 끈끈한 정다운 관계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아버지였다. 주님은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알고 계셨다. 예수님이 12살 때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가셨을 때 예수님을 잃어버린 요셉과 마리아가 사흘 후에 부모님을 만났을 때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너를 근심하며 찾았다고 하자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 \" (눅2:49) - 2 -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이러한 아버지 관계를 공생애 기간 동안에도 수없이 나타내셨다. (마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은 이러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우리에게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 우리의 아비는 마귀였다. 그 아비의 손에서 우리를 끄집어내어서 우리의 참 아버지를 만나게 하여 주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시다. (갈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성도 여러분 !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십니까 ? 하나님과 아버지 관계가 이루어 졌습니까 ? 이 관계를 이루게 하여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 이시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그러한 아버지의 관계를 다시 한번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의 관계를 놓치지 아니한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습니까 ? 어려움이 오고 고통이 올수록 더욱 아버지께 나아가는 신앙입니까 ? 아니면 쉽게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뜨려 버리는 자 입니까 ? 성도 여러분 ! 이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떨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에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육적인 아버지와의 관계가 끓어져 버린다면 우리는 그 아버지의 자녀가 되지 못한다. - 3 - 오늘날 청소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다. 여기에는 아버지들의 책임도 있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각 가정에서 자녀들이 아버지를 우습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나온 유행어가 고개 숙인 아버지라는 말이 있다. 얼마 전 아버지와 아들이 화투를 치다가 돈을 안준다고 아들이 아버지를 때린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한 가정의 사건이 아니다 오늘날 이 시대 가정들이 어떤 가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사건이다. 옛날에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은 근엄하고 엄격하고 무서운 아버지 상 이였다 그러나 요즈음 가정에서 아버지들의 목소리는 어머니들 목소리보다 힘이 없다. 늦잠 자는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가서 아무리 일어나라고 해도 안 일어나는데 엄마가 일어나라고 하면 잘 일어난다. 어떤 아버지는 \"엄마가 일어나라고 한다\" 하면 아이들이 잘 일어난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무시한 이러한 일들이 영적인 세계에서도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를 도무지 두려워할지 모른다. 살아 계신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대이다. 인간이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온전히 성립될 때 이 땅에서도 복을 받고 영적인 능력을 받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깊게 가지고 살아가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깊게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아버지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아버지의 권세를 누리며 이 세상에서 힘있게 복되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마23: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이 말씀은 육적인 아버지를 무시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그만큼 하나님 아버지가 세상에 아버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는 예수 처음 믿고 제일 좋은 것이 아버지를 많이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저의 육적인 아버지는 저 7살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단어가 제 입에서는 사라졌고 아버지라는 존재를 잃고 살아왔다. 그런데 예수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원없이 불렀다. 지금까지도 원없이 부르고 있다. 성도 여러분 ! 아버지라는 단어 얼마나 친근한 말입니까 ?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믿으십니까 ?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가 온전히 믿을 때 우리에게 있는 어떤 고통 어떤 어려움도 아버지가 해결하여 주신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그 고통 속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 하였기 때문이다. (마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아십니까 ? 독생자 예수까지도 우리에게 주신 아버지의 사랑이시다. 그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외면하고 산다면 그것처럼 불쌍한 인간은 없을 것이다. 그 아버지의 사랑을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다시 들려주고 계신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 아버지여 ! 아버지의 사랑과 축복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 십자가가의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은 우리를 생각하셨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만 성립시키시려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의 문제도 해결하시려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인간에 있어서 아버지는 만날 때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죄의 문제이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자주 나아간다고 할지라도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아니하고서는 아버지와 가까워 질 수가 없다. (사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저희의 =자신을 죽인 유대인들이다. 복음적으로 우리들이다. 사하여 주옵소서 = 죄를 용서해 달라는 주님의 탄원이다. 우리의 죄가 사함 받지 아니하고서는 아버지와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를 보고 무엇을 느끼십니까 ? 십자가의 사랑만 느끼십니까 ? 십자가의 고통도 느끼십니까 ? 우리는 십자가를 보고 사랑도 느껴야 되고 고통도 느껴야 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십자가를 보고 느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싫어하신 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독생자 예수까지도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성도 여러분 ! 십자가가 보여주는 첫 번째 메세지는 사랑이 아니다. 십자가가 보여주는 첫 번째 메세지는 죄 사함 받지 못한 자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이다. 십자가에 나타난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지 못한다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달을 수 없다. 죄인이 죄를 깨닫지 못하면 사랑을 받아도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 감옥에 죄를 짖고 들어간 죄수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면 세상이 내린 사랑의 형벌의 매를 깨닫지 못한다.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한 자는 감옥 속에서 더 악해지고 복수심에만 불타 있는 것이다. 그런 자에게는 새로운 삶이 찾아올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오히려 감옥에 들어온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자신에게 내린 형벌을 감사하게 여긴다면 그 사람에게는 새로운 삶이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면 원망과 불평만 있게되고 더 나아가서는 더 큰 죄를 범하고 만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지금 기도하고 계십니다.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가 사함 받을 수 있는 곳은 예수님이 매달려 있는 십자가 아래이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없이는 우리의 더러운 죄가 사함 받을 길이 없다. 우리의 어떤 종교적인 행위를 아무리 거룩하게 한다고 해도 우리의 더럽고 추한 죄가 사함 받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우리가 선한 일을 한다고 해서 울의 더럽고 추하고 악한 죄가 사함 받을 수 있습니까 ? 그 어떤 행위로도 우리의 죄는 사함 받을 길이 없다. 오직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냄새나고 추악한 죄들이 사함 받을 길이 없다.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해 무감각한 삶을 살고 있다. 예수를 믿는 자들 조차도 죄에 대해 무감각하다. 우리는 음식을 맛을 보고 \"아! 맛있다...맛 없다\" 한다. 그런데 이런 맛을 모르고 음식을 먹는다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가 ! 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죄에 대해 전혀 무감각하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불쌍한 자인가 ! 성도 여러분 ! 우리는 죄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 동물들도 자신이 공격을 당할 것 같으면 몸의 색깔을 변하고 자신을 보호할 줄 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어떠한가 ? 동물보다 못하다. 죄에 대해 속수무책 당하고만 살고 있다. 오히려 죄악 속으로 일부러 들어가고 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조금도 아량이나 자비를 베풀지 아니 하고 무섭게 심판하고 계신다는 것을 본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조금도 타협이 없다. 무섭게 심판하시고 처벌 하셨다. 그러나 누구든지 십자가 앞에 나아오기만 하면 어떤 죄라도 사함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죄악에 붙잡혀서 살아가지 말고 담대히 십자가 앞에 나아서 나의 죄를 고백하시기를 바란다. -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 죄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런가하면 죄가 무엇인지는 아는데 .........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도 아는데 ........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살아가고 있다. 또 그런가하면 죄를 열심히 회개하고 또 죄를 반복해서 짖는 그런 시대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성도 여러분 !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저희를 사하여 달라고\" 하신 주님의 고통의 기도를 잊지 마시고 날마다 십자가 밑에 나와서 내 죄를 진정으로 고백하고 새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죄 사함 받은 자는 나에게서만 끝나지 않고 나도 내 주위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는 자가 되어 가는 것이다. 내 죄가 사함 받았다는데 아직도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죄가 사함 받은 것입니까 ? - 8 - 사함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남을 미워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 (마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6: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성도 여러분 ! 진정한 죄 사함 받은 자는 죄에서 자유함이 있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함이 없어야 한다. 십자가 밑에서 죄악의 담이 무너지고 십자가 밑에서 온전한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 보혈의 피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흘러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송가 202장)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 세 번째 :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하는 짓이 얼마나 무서운 짓인지 저 유대인들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이 그렇게 기다렸던 메시야를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자신들이 지금 죽이고 있는 자가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사실을 저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저들의 모습이 우리 예수님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하신 것이다. 자기의 하는 것 =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유대인들의 행동이다 알지 못함이니이다 = 우매한 . 미련한 자들의 모습이다.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다.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는 자가 가장 우매한 자이고 미련한 자이다.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동안 얼마나 그들을 깨닫게 하셨는가 ? 그러나 저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믿지 아니하려고 했다. 아니 예수가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아니했다. 조금만 깊은 관심을 가졌다면 예수가 누구이신지 알 수 있었는데 저들은 알려고 하지 아니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자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십니까 ? 여러 가지로 볼 수 있지만 오늘 본문에 의해서 예수를 바라본다면 예수가 누구이십니까 ? 나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내 죄 대신 죽으신 분이시다. 믿으십니까 ? 그러나 저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 아니 듣기는 들었지만 예수님 말씀을 거부했고 그 말씀을 빌미 잡아서 지금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게 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무서운 짓을 범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야를 자신들의 손으로 죽이는 이 무리들의 행동이 얼마나 미련합니까 ? 그러나 이 같은 미련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세상은 지금도 이 귀한 십자가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예수 믿고 천국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뿌리치고 지옥의 길을 스스로 찾아가고 있다. 왜 사람들이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를 거절합니까 ? 왜 자신들의 마음을 찢고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죄 사함 받기를 거부합니까 ? 모두가 무지함 때문이다. 예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성도들이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까 ?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예수가 누구인지 안다면 성도들의 삶이 달라져야만 한다. 사마리아 성에 버림받고 천대 받은 한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자기가 만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에 그의 삶이 달라진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소리쳤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고 ....... 성도 여러분 ! 메시야를 만나셨습니까 ? 메시야와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 \" 라는 같은 말이다. 메시야는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는 헬라어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우리의 삶이 달라져야만 한다. 이제 살아가는 생각과 사고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세리 마태는 예수는 만나고 더러운 세리 직을 팽캐치고 예수를 따랐다. 세리장 삭개오도 예수는 만나고 그 동안 세리직을 하면서 불의한 방법으로 모은 모든 재물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내어놓았다. 창녀의 삶을 살던 막달아 마리아도 예수를 만나고 더러운 삶을 깨끗이 정리하고 예수를 위해 살았다. 예수가 누구인지 모를 때 미련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 제자들도 예수가 누구인지 온전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는 미련함을 보였고 다른 제자들도 다 도망가 버리는 미련함을 보였다. 그러나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예수가 누구인지 알게된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명까지 바치는 삶을 살았다. 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수없이 밝혀주었고 표적으로도 예수 자신이 누구인지 밝혔지만 저들은 그러한 모든 것을 부인했고 받아들이지 아니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고.... 죽은자를 살리고... 오병이어로 수만 명을 먹였건만 저들은 예수를 한낱 인간으로만 보았다. 심지어 어떤 무리들은 예수님을 귀신이 들렸다고 까지 했다. (요8:49)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 예수를 모르는 유대인들은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고 말았다. 그 무지한 자들을 위해서 주님은 지금 십자가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있는 것이다.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들을 향해 하는 주님의 소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면 예수님을 진실로 믿을 수 없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면 예수님을 위해 살수 없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면 예수님을 핍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 진리요 ! 생명이니 !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찬송가 94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되시네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예수는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주님은 어느 날 제자들에게 물어 보았다. \"세상 사람들이 나는 누구라 하더냐 \" 제자들은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 \"너희는 나를 누구로 보느냐 \"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는 정확히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계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머리로만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인간의 지식적으로만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머리로만 인간의 지식으로 아는 예수는 고통이 뒤따르고 어려움이 올 때 우리는 베드로처럼 우리들도 예수를 부인하게 될 것이다. 예수를 지식적으로 머리로만 안다면 우리는 예수를 위해서 살아갈 수 없다. 성령으로 예수를 알고 깨닫기 되기를 바란다. (요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예수가 누구인지 알게 될 때 우리는 예수를 위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처럼 자신들을 위해 살아가는 우매하고 미련한 자의 삶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십자가에서 나의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를 위해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 결 론 ) 십자가에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잊지 아니하신 주님이 어찌 우리를 잊겠는가. 예수님을 우리를 데리러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요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우리의 죄를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의 권세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힘차게 열심히 신앙생활 해서 주님 재림하실 때 흠없이 주님 만나기를 원하시기 위함이다 우리의 죄가 십자가의 피로 다 씻음 받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자들이다 절대로 우리는 약한 자들이 아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알지 못해서 사단에게 속고 당하고만 살아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 요17장은 십자가에 죽으심을 앞둔 예수님의 기도 내용이 나온다. (요17:9-11)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성도 여러분 ! 지금도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 소리는 계속 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날마다 ....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십자가 밑에 열심히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가상칠언 중 제1언(架上七言中 第一言)/ 눅23:24-/ 2005-04-03
가상칠언 중 제1언(架上七言中 第一言) 눅23:24- ( 서 론 ) 사순절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일곱 마디의 말씀을 살펴보자. 일명 가상칠언 이라고 하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부활 전 주일까지 말씀의 은혜를 나눌 때 십자가의 뜨거운 영적 체험을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도 맨 처음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였다. 온 몸 뼈 마디마디에 밀려오는 아픔의 통증 가운데서도 기도하시는 주님 모습에 우리는 너무나도 부끄러울 뿐이다. 예수님이 극한 고통 속에서도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평생을 기도의 삶을 살아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짧은 기도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진실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십자가 처형은 가장 잔인하고 포악한 처형 방법이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이었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 주님의 참 모습을 우리는 지금 보고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 우리도 고통 속에서 주님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까 ? 아니면 원망과 불평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까 ? 우리의 삶 속에서 어려움이 오고 고통이 올 때 왜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지 아십니까 ? 평소에 우리가 기도의 삶을 살지 아니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오면 우리는 원망부터 나오고 불평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다. 어려움이 와도 고통이 와도 감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평소의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기도로 말씀으로 가졌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보이신 첫 번째의 모습을 3가지로 살펴볼 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임하길 축원합니다. - 1 - 첫 번째 : 아버지여 부르신 주님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 예수님이 고통을 입고 있는 가운데 주님의 입에서 흘러나온 첫 말씀은 \"아버지여......\" 였다. 우리와 똑같이 육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시다. 안 잡수시면 배고프셨고 ..... 피곤하시면 주무셔야 하셨고..... 못된 일을 보시면 화를 내실 줄도 아셨고 ...... 슬픈 일을 보시면 눈물도 흘리셨고 ....... 매를 맞으시면 피도 흘리시고 아파하셨던 주님이셨다. 십자가 고통 속에서 충분히 고통의 소리가 먼저 나와야 하건만 예수님의 음성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소리였다. 아버지 =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십자가 고통 속에서 선포하고 계신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버지이셨다. 우리는 예수 믿기 전 누구를 아비로 삼고 살았습니까 ?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 고통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 너무나도 끈끈한 정다운 관계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아버지였다. 주님은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알고 계셨다. 예수님이 12살 때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가셨을 때 예수님을 잃어버린 요셉과 마리아가 사흘 후에 부모님을 만났을 때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너를 근심하며 찾았다고 하자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 \" (눅2:49) - 2 -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이러한 아버지 관계를 공생애 기간 동안에도 수없이 나타내셨다. (마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은 이러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우리에게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 우리의 아비는 마귀였다. 그 아비의 손에서 우리를 끄집어내어서 우리의 참 아버지를 만나게 하여 주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시다. (갈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성도 여러분 !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십니까 ? 하나님과 아버지 관계가 이루어 졌습니까 ? 이 관계를 이루게 하여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 이시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그러한 아버지의 관계를 다시 한번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의 관계를 놓치지 아니한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습니까 ? 어려움이 오고 고통이 올수록 더욱 아버지께 나아가는 신앙입니까 ? 아니면 쉽게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뜨려 버리는 자 입니까 ? 성도 여러분 ! 이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떨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에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육적인 아버지와의 관계가 끓어져 버린다면 우리는 그 아버지의 자녀가 되지 못한다. - 3 - 오늘날 청소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다. 여기에는 아버지들의 책임도 있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각 가정에서 자녀들이 아버지를 우습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나온 유행어가 고개 숙인 아버지라는 말이 있다. 얼마 전 아버지와 아들이 화투를 치다가 돈을 안준다고 아들이 아버지를 때린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한 가정의 사건이 아니다 오늘날 이 시대 가정들이 어떤 가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사건이다. 옛날에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은 근엄하고 엄격하고 무서운 아버지 상 이였다 그러나 요즈음 가정에서 아버지들의 목소리는 어머니들 목소리보다 힘이 없다. 늦잠 자는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가서 아무리 일어나라고 해도 안 일어나는데 엄마가 일어나라고 하면 잘 일어난다. 어떤 아버지는 \"엄마가 일어나라고 한다\" 하면 아이들이 잘 일어난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무시한 이러한 일들이 영적인 세계에서도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를 도무지 두려워할지 모른다. 살아 계신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대이다. 인간이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온전히 성립될 때 이 땅에서도 복을 받고 영적인 능력을 받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깊게 가지고 살아가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깊게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아버지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아버지의 권세를 누리며 이 세상에서 힘있게 복되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마23: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이 말씀은 육적인 아버지를 무시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그만큼 하나님 아버지가 세상에 아버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는 예수 처음 믿고 제일 좋은 것이 아버지를 많이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 4 - 저의 육적인 아버지는 저 7살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단어가 제 입에서는 사라졌고 아버지라는 존재를 잃고 살아왔다. 그런데 예수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원없이 불렀다. 지금까지도 원없이 부르고 있다. 성도 여러분 ! 아버지라는 단어 얼마나 친근한 말입니까 ?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믿으십니까 ?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가 온전히 믿을 때 우리에게 있는 어떤 고통 어떤 어려움도 아버지가 해결하여 주신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그 고통 속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 하였기 때문이다. (마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아십니까 ? 독생자 예수까지도 우리에게 주신 아버지의 사랑이시다. 그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외면하고 산다면 그것처럼 불쌍한 인간은 없을 것이다. 그 아버지의 사랑을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다시 들려주고 계신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 아버지여 ! 아버지의 사랑과 축복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 5 - 두 번째 :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 십자가가의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은 우리를 생각하셨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만 성립시키시려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의 문제도 해결하시려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인간에 있어서 아버지는 만날 때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죄의 문제이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자주 나아간다고 할지라도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아니하고서는 아버지와 가까워 질 수가 없다. (사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저희의 =자신을 죽인 유대인들이다. 복음적으로 우리들이다. 사하여 주옵소서 = 죄를 용서해 달라는 주님의 탄원이다. 우리의 죄가 사함 받지 아니하고서는 아버지와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를 보고 무엇을 느끼십니까 ? 십자가의 사랑만 느끼십니까 ? 십자가의 고통도 느끼십니까 ? 우리는 십자가를 보고 사랑도 느껴야 되고 고통도 느껴야 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십자가를 보고 느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싫어하신 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독생자 예수까지도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성도 여러분 ! 십자가가 보여주는 첫 번째 메세지는 사랑이 아니다. - 6 - 십자가가 보여주는 첫 번째 메세지는 죄 사함 받지 못한 자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이다. 십자가에 나타난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지 못한다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달을 수 없다. 죄인이 죄를 깨닫지 못하면 사랑을 받아도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 감옥에 죄를 짖고 들어간 죄수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면 세상이 내린 사랑의 형벌의 매를 깨닫지 못한다.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한 자는 감옥 속에서 더 악해지고 복수심에만 불타 있는 것이다. 그런 자에게는 새로운 삶이 찾아올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오히려 감옥에 들어온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자신에게 내린 형벌을 감사하게 여긴다면 그 사람에게는 새로운 삶이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면 원망과 불평만 있게되고 더 나아가서는 더 큰 죄를 범하고 만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지금 기도하고 계십니다.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가 사함 받을 수 있는 곳은 예수님이 매달려 있는 십자가 아래이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없이는 우리의 더러운 죄가 사함 받을 길이 없다. 우리의 어떤 종교적인 행위를 아무리 거룩하게 한다고 해도 우리의 더럽고 추한 죄가 사함 받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우리가 선한 일을 한다고 해서 울의 더럽고 추하고 악한 죄가 사함 받을 수 있습니까 ? 그 어떤 행위로도 우리의 죄는 사함 받을 길이 없다. 오직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냄새나고 추악한 죄들이 사함 받을 길이 없다.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해 무감각한 삶을 살고 있다. 예수를 믿는 자들 조차도 죄에 대해 무감각하다. 우리는 음식을 맛을 보고 \"아! 맛있다...맛 없다\" 한다. 그런데 이런 맛을 모르고 음식을 먹는다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가 ! - 7 - 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죄에 대해 전혀 무감각하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불쌍한 자인가 ! 성도 여러분 ! 우리는 죄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 동물들도 자신이 공격을 당할 것 같으면 몸의 색깔을 변하고 자신을 보호할 줄 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어떠한가 ? 동물보다 못하다. 죄에 대해 속수무책 당하고만 살고 있다. 오히려 죄악 속으로 일부러 들어가고 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조금도 아량이나 자비를 베풀지 아니 하고 무섭게 심판하고 계신다는 것을 본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조금도 타협이 없다. 무섭게 심판하시고 처벌 하셨다. 그러나 누구든지 십자가 앞에 나아오기만 하면 어떤 죄라도 사함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죄악에 붙잡혀서 살아가지 말고 담대히 십자가 앞에 나아서 나의 죄를 고백하시기를 바란다. -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 죄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런가하면 죄가 무엇인지는 아는데 .........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도 아는데 ........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살아가고 있다. 또 그런가하면 죄를 열심히 회개하고 또 죄를 반복해서 짖는 그런 시대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성도 여러분 !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저희를 사하여 달라고\" 하신 주님의 고통의 기도를 잊지 마시고 날마다 십자가 밑에 나와서 내 죄를 진정으로 고백하고 새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죄 사함 받은 자는 나에게서만 끝나지 않고 나도 내 주위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는 자가 되어 가는 것이다. 내 죄가 사함 받았다는데 아직도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죄가 사함 받은 것입니까 ? - 8 - 사함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남을 미워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 (마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6: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성도 여러분 ! 진정한 죄 사함 받은 자는 죄에서 자유함이 있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함이 없어야 한다. 십자가 밑에서 죄악의 담이 무너지고 십자가 밑에서 온전한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 보혈의 피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흘러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송가 202장)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 - 9 - 세 번째 :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하는 짓이 얼마나 무서운 짓인지 저 유대인들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이 그렇게 기다렸던 메시야를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자신들이 지금 죽이고 있는 자가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사실을 저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저들의 모습이 우리 예수님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하신 것이다. 자기의 하는 것 =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유대인들의 행동이다 알지 못함이니이다 = 우매한 . 미련한 자들의 모습이다.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다.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는 자가 가장 우매한 자이고 미련한 자이다.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동안 얼마나 그들을 깨닫게 하셨는가 ? 그러나 저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믿지 아니하려고 했다. 아니 예수가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아니했다. 조금만 깊은 관심을 가졌다면 예수가 누구이신지 알 수 있었는데 저들은 알려고 하지 아니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자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십니까 ? 여러 가지로 볼 수 있지만 오늘 본문에 의해서 예수를 바라본다면 예수가 누구이십니까 ? 나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내 죄 대신 죽으신 분이시다. 믿으십니까 ? 그러나 저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 아니 듣기는 들었지만 예수님 말씀을 거부했고 그 말씀을 빌미 잡아서 지금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게 하신 것이다. - 10 -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무서운 짓을 범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야를 자신들의 손으로 죽이는 이 무리들의 행동이 얼마나 미련합니까 ? 그러나 이 같은 미련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세상은 지금도 이 귀한 십자가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예수 믿고 천국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뿌리치고 지옥의 길을 스스로 찾아가고 있다. 왜 사람들이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를 거절합니까 ? 왜 자신들의 마음을 찢고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죄 사함 받기를 거부합니까 ? 모두가 무지함 때문이다. 예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성도들이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까 ?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예수가 누구인지 안다면 성도들의 삶이 달라져야만 한다. 사마리아 성에 버림받고 천대 받은 한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자기가 만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에 그의 삶이 달라진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소리쳤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고 ....... 성도 여러분 ! 메시야를 만나셨습니까 ? 메시야와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 \" 라는 같은 말이다. 메시야는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는 헬라어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우리의 삶이 달라져야만 한다. 이제 살아가는 생각과 사고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세리 마태는 예수는 만나고 더러운 세리 직을 팽캐치고 예수를 따랐다. 세리장 삭개오도 예수는 만나고 그 동안 세리직을 하면서 불의한 방법으로 모은 모든 재물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내어놓았다. 창녀의 삶을 살던 막달아 마리아도 예수를 만나고 더러운 삶을 깨끗이 정리하고 예수를 위해 살았다. 예수가 누구인지 모를 때 미련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 제자들도 예수가 누구인지 온전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는 미련함을 보였고 다른 제자들도 다 도망가 버리는 미련함을 보였다. - 11 - 그러나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예수가 누구인지 알게된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명까지 바치는 삶을 살았다. 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수없이 밝혀주었고 표적으로도 예수 자신이 누구인지 밝혔지만 저들은 그러한 모든 것을 부인했고 받아들이지 아니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고.... 죽은자를 살리고... 오병이어로 수만 명을 먹였건만 저들은 예수를 한낱 인간으로만 보았다. 심지어 어떤 무리들은 예수님을 귀신이 들렸다고 까지 했다. (요8:49)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 예수를 모르는 유대인들은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고 말았다. 그 무지한 자들을 위해서 주님은 지금 십자가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있는 것이다.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들을 향해 하는 주님의 소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면 예수님을 진실로 믿을 수 없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면 예수님을 위해 살수 없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면 예수님을 핍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 진리요 ! 생명이니 !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찬송가 94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되시네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예수는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주님은 어느 날 제자들에게 물어 보았다. \"세상 사람들이 나는 누구라 하더냐 \" 제자들은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 - 12 - \"너희는 나를 누구로 보느냐 \"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는 정확히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계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머리로만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인간의 지식적으로만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머리로만 인간의 지식으로 아는 예수는 고통이 뒤따르고 어려움이 올 때 우리는 베드로처럼 우리들도 예수를 부인하게 될 것이다. 예수를 지식적으로 머리로만 안다면 우리는 예수를 위해서 살아갈 수 없다. 성령으로 예수를 알고 깨닫기 되기를 바란다. (요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예수가 누구인지 알게 될 때 우리는 예수를 위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처럼 자신들을 위해 살아가는 우매하고 미련한 자의 삶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십자가에서 나의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를 위해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 결 론 ) 십자가에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잊지 아니하신 주님이 어찌 우리를 잊겠는가. 예수님을 우리를 데리러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요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우리의 죄를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의 권세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힘차게 열심히 신앙생활 해서 주님 재림하실 때 흠없이 주님 만나기를 원하시기 위함이다 - 13 - 우리의 죄가 십자가의 피로 다 씻음 받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자들이다 절대로 우리는 약한 자들이 아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알지 못해서 사단에게 속고 당하고만 살아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 요17장은 십자가에 죽으심을 앞둔 예수님의 기도 내용이 나온다. (요17:9-11)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성도 여러분 ! 지금도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 소리는 계속 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날마다 ....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십자가 밑에 열심히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 오 직 예 수 ==
가상칠언 중 제3언(架上七言 中 第三言)/ 요19:25-27/ 2002-04-03
가상칠언 중 제3언(架上七言 中 第三言) 요19:25-27 ( 서 론 ) 십자가에서 하신 예수님의 일곱 말씀 중 우리는 두 가지를 살펴보았다. 첫 번째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대속적인 중보기도를 하시는 주님의 모습이다. 두 번째 :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오늘 세 번째 예수님의 말씀은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하신 말씀이다. 육신의 어머니에게는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한 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 \" 세 번째 말씀 속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시는 말씀은 십자가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계신다. 마리아와 요한 두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다.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향하여 \"여자여 보소서\" 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십자가 밑에서 아들의 고통을 보면서 슬피 울고있는 어머니를 보고 오히려 마리아를 위로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모습이다. 영적인 깊은 세계를 보지 못하고 육적인 면만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살아가라는 것이다. 제 일언이 기도 였다면 제 이언은 구원이었고 제 삼언은 사랑이었다. 십자가 사랑 ! 제 삼언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깊은 십자가 사랑을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 1 - 첫 번째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19: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 십자가 고통 속에서 강도에게 구원을 약속하고 십자가 밑을 내려다 보신 주님은 자신의 고통을 보고 하염없이 슬피 울고있는 어머니를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도망간줄 알았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언제 왔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있는 요한을 보고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사도 요한을 소개시켰다. 십자가에서 십자가 사랑으로 맺어주시기 위하여 어머니 마리아를 부르셨다. 이것은 마리아와 요한에게만 주어진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보고 슬피 우는 모든 자들에게 십자가 사랑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행동이었다. 여자여 = (헬) 귀네 ( Guvnai, ) 최대의 존칭어이다. 아들이니이다 = 마리아와 요한의 관계가 십자가에서 새롭게 맺어지는 순간이다. 이것은 성도들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십자가 사랑으로 새롭게 맺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은 마리아의 조카였다. 요한의 어머니는 마리아와 자매 관계였다. 오늘 분문 25절에 나오는 이모라는 여자가 바로 요한의 어머니였다. 마27:56절 = 똑같은 장면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로 기록되어 있고 막15:40 = 살로매로 기록되고 있다. 세베대의 아들을 야고보와 요한이었고 요한의 어머니는 살로메 였다. 그러므로 본문 25절에 나오는 이모는 바로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 였으므로 마리아와 요한은 이모와 조카 사이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지금 십자가 밑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무리는 세 부류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을 죽인 무리들....... 예수님이 어떻게 처형 당하나 구경하는 무리들 ...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서 슬피 우는 무리들이다. - 2 - (눅23: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 많은 여자들이 울고 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자들이 더 믿음이 뜨겁고 분명하다. 3년6개월 동안 예수님과 동거동락을 했던 제자들을 요한만 빼놓고 어디론가 다 도망쳐 버렸다. 지금도 옛날과 다름없이 예수님 십자가 주위에는 세 부류의 무리들이 있기 마련이다. 첫째 : 구경하는 무리들...... 교회를 마치 구경하러 오는 자들이 있다. 예배를 구경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자들이 있다. 둘째 : 예수를 죽이는 무리들이다. 예수를 핍박하고 비방하고..... 교회를 핍박하고 비방하고 ......... 예배를 방해하고 비방하는 무리들이다. 셋째 : 예수를 위해 우는 자들이다. 예수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나 ? 고민하는 자들이다. 예수를 희생하려는 자들의 모습이다.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내가 해야할까 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러한 세 부류들을 바라보고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기도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구원자라는 것을 보이시고 이어서 십자가 사랑을 모든 자들에게 깨닫게 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육신의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고 마리아는 슬피 울고 있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죽기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의 사랑을 이제 십자가의 사랑으로 주님은 바꾸어 주고자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보이는 육적인 것에 너무 슬퍼하지 말고 이제 새로운 십자가 사랑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 밑에서 새로운 관계를 마리아에게 맺어주므로 마리아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 3 - 십자가 사랑이 아니고서는 마리아의 마음과 예수를 위해서 우는 자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가 없다는 것을 주님은 잘 알고 계셨다 이러한 주님의 위로는 마리아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슬피 우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지는 십자가 사랑이었다. 이 십자가 사랑을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육신의 어머니 사랑도 큰사랑이지만 그보다 더 큰사랑은 예수의 사랑이다. 마리아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모르고 있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그 사랑을 전하셨다. 인간의 사랑이 아무리 진실 되고 뜨겁다 할지라도 우리의 영혼의 상처는 치료받을 수 없다. 십자가 사랑으로만이 우리의 상한 심령과 영혼이 치료받을 수 있다. 십자가 사랑만이 우리에게 참 위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십자가 사랑을 경험해야만 한다. 이 십자가 사랑을 경험한자 들만이 예수를 위해 살아갈 수 있고 이 세상에 진정한 그리스도 사랑을 전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십자가 밑에서 예수를 위해 연약하게 울고있는 자들에게 주님은 위로와 용기와 담대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셨던 것이다. 그들에게 주님은 십자가 사랑을 주신 것이다. 예수 믿는 자들이 십자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면 그 어떤 십자가의 능력도 나타나지 아니할 것이다. 우리는 고린도 교회를 성경에서 보았다. 고린도 교회가 십자가에서 떠났을 때 당파가 갈라졌고 서로 분쟁했고 서로 미워했다. 그렇게 훌륭했던 에베소 교회가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린 교회가 된 것은 십자가 사랑을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 (계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 초대교회가 예수 십자가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로마를 무너뜨렸고 세계 복음화의 전초기지가 된 것이다.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고 떠났던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가 나타나서 베드로에게 확인한 것은 십자가 사랑이었다. - 4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 주님은 세 번이나 사랑을 확인 한 후에 베드로에게 다시 사명을 주었던 것이다. 예수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넣고 죽였던 사울에게 예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만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 \" \"주여 뉘시오니이까 \" \"나는 네가 핍박하느 예수라 \" 예수님은 사울에게 십자가 사랑을 깨닫게 하여 주었던 것이다. 십자가 사랑을 깨달은 사울은 바울로 변하여 예수를 위해 살았다. 십자가 사랑으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었고 십자가 사랑으로 죄인이 예수와 하나가 되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다 하나요 한 형제요 한 자매요 한 지체들인 것이다. (마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롬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성도 여러분 !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에서 우리가 하나가 되었음을 제 삼언에서 선포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란다 왜 교회가 힘이 약한가 ? 십자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게 때문이다. 왜 초대교회가 그 심한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로마를 굴복시킬 수 있었는가 ? 모든 성도들이 십자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십자가 밑에서 연약하게 울고있는 무리들을 보신 예수님은 그들을 십자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해 주셨다. 세상 속에서 자꾸만 연약해져 가는 우리들이 강한 자들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 5 - 십자가 사랑으로 하나가 될 때 교회는 힘을 얻을 것이고 성도들은 능력을 받아서 예수를 위해 사는 자들이 될 것이다. 십자가 사랑은 곧 능력이다. 십자가 사랑은 우리를 하나가 묶어주는 사랑의 줄이다. 이 십자가 사랑이 이 시간 우리의 심령에 충만하게 거하기를 축원합니다. 한국교회가 교회는 많고 성도는 많은데 십자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 속에서 힘이 없는 것이다. 성도들이 왜 힘이 없는가 ? 십자가 사랑을 뜨겁게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를 사랑함이 미지근 하고 .... 교회를 사랑함이 내 가정보다 못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과연 이 십자가 사랑이 있는가 ? 생각 해보자 이 십자가 사랑을 내가 뜨겁게 체험했는가 ? 생각 해보자 이제 우리도 십자가 밑에서 울고만 있지 말고 ...... 십자가 밑에서 육적인 세계만 바라보고 있지 말고 .... 주님의 십자가 사랑의 능력을 받아 영안이 열리고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며 힘있게 예수를 전하며 예수를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6 - 두 번째 : 보라 네 어머니라 (요19: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 사도 요한에게 주님은 얼굴을 돌려 요한에게도 마리아와 새로운 관계를 맺어 주셨다. 요한도 다른 제자들과 다름없이 예수가 붙잡힐때 도망쳤던 자다. 그러나 요한은 십자가 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고 계신 예수를 보고 울고 있었다. 그 눈물은 자신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간 죄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요한의 마음을 주님을 아시고 요한에게 마리아와 새로운 관계를 맺어 주셨다. 네 어머니라 = 육신의 어머니를 부탁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효성 지극한 인간적인 모습이다. 복음적으로 무엇을 의미한가 ? 사도 요한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신 것을 의미한다. 마리아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한 마리 양이다. 그 양을 이제 제자에게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새로운 사명감으로 불타올라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사도 요한은 어느 제자보다도 예수께 사랑을 많이 받은 자이다. 예수 품에 안겨 예수의 심장 박동 소리도 들었고 예수를 가장 가까이 모셨던 자이다. 그러나 이 요한도 예수가 붙잡히자... 자신에게 해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도망쳤던 자이다. 그러나 도망쳤던 요한은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고 골고다 십자가 언덕으로 와서 비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온 몸에 피를 흘리시고 고통 당하신 주님을 보고 가슴을 치며 울고 있었다. 십자가에 돌아 왔는데도 주님은 요한에게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침묵만 지키고 계셨다. 주님의 그 침묵은 요한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 7 -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요한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 침묵 속에서 요한은 자신의 죄를 회개했고 예수에 대한 모습을 새롭게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주님의 침묵도 바로 십자가 사랑이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꾸짖지 아니했다. \"요한아 네가 나를 버리고 도망갈 수 있느냐 ? \" 추궁하지 아니했다. \"베드로가 죽기까지 나를 따르겠다고 할 때 너도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지 아니 했느냐 ? \" 죄를 지적하며 추궁하지 아니했다. 요한에게 아무런 말씀도 없이 침묵만 지키시던 예수님은 요한에게 입을 열어 \"보라 네 어머니라 ! \"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효성이 지극한 예수님의 모습으로도 해석 될 수 있다. 교훈적인 해석으로도 할 수 있지만 성경의 모든 해석은 복음으로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은 다시 십자가로 돌아온 제자에게 새로운 사명감을 주는 것이다. 우리가 본문에게 놓쳐서는 안될 말씀이 바로 제자라는 단어다. 26-27절까지 제자라는 단어가 3번 나오고 있다는 것은 제자의 사명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마리아의 노후의 생계를 걱정해서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이 아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 예수님이 육신의 어머니 노후를 걱정해서 요한에게 부탁했겠는가 ? 그리고 예수님은 공생애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인간의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활동하신 것이다. 더구나 예수가 붙잡힌 순간부터 이제 예수는 인류의 구원자로 공개적으로 자신을 선포 하셨다. 대제사장들 앞에서 종교 재판 받을 때 예수는 (막14: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 이제 예수님은 한 여인의 아들이 아니다. 육신의 어머니 노후를 걱정해서 주님이 사도 요한에게 부탁 했겠는가 ? 아니다. 마리아의 한 영혼을 제자에게 부탁 한 것이다. - 8 - 마리아뿐만 아니라. 지금 십자가 밑에서 울고 있는 자들을 사도 요한에게 부탁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가 다락방에 120명이 모였다는 것은 우연히 모인게 아니다.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부터 예수를 따르는 무리는 이미 정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에 분위기는 공포의 분위기였을 것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일 정도였다면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에게도 그러한 공포의 분위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 밑에 우는 자들은 그런 공포를 두려워하지 아니했다. 제자들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하나도 없었다. 주님의 마음은 한없이 아프셨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 왔는지 요한이 십자가 아래서 울고 있었다. 예수님은 울고 있는 요한에게 \"요한아 ! 네 어머니다 \" 하시며 요한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한 마디가 요한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습니까 ? 낙심하고 좌절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있는 요한에게 주님은 꾸짖지 아니하시고 양을 맡기는 사명을 주셨다. 요한이 어디에서 새로운 사명을 받았습니까 ? 십자가 아래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요한은 예수를 버리고 도망간 자였지만 다시 십자가에 돌아와서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회복한 요한에게 주님은 새로운 사명을 주었던 것이다. 우리도 요한처럼 신앙생활에서 실패와 낙심과 좌절이 올 수 있다. 그러나 실패에서 끝나서는 안된다. 우리가 낙심과 좌절에서 주저앉아 있어서는 안된다. 요한처럼 우리도 십자가 밑으로 나아와야만 한다. 십자가 밑에 나아와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면 주님은 꾸짖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힘과 사명을 주님은 주실 것이다. 자동차가 기름이 떨어지면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은다. 자동차 기름을 가득 넣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기름이 없으면 자동차는 아무런 기능도 할 수 없다. 우리의 신앙도 이 기름이 필요 하는데 어떤 기름입니까 ? 성령의 기름이다. - 9 - 그런데 이 성령의 기름은 반드시 십자가 밑에서 기름을 받아야만 된다. 십자가 밑에서만이 우리 죄가 십자가의 피로 사함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새 힘을 얻을 수 있다. 죄가 있으면 우리는 힘을 쓸 수가 없다. 그 죄는 십자가 피로 만이 씻음 받을 수 있다. 십자가 밑에서만이 새로운 사명을 받을 수 있다. 성도 여러분 ! 지금 우리가 서있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 십자가 밑입니까 ? 주님께로 받았던 사명을..... 직분들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 교회 직분의 사명감이 떨어졌습니까 ? 주님의 사명이 식어가고 있습니까 ? 십자가와 내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지 살펴보고 십자가로 가까이 다가오기를 바란다. 십자가에 가까이 올 때 주님은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실 것이고 다시 사명감으로 불타오르게 할 것이다. (찬송가 496)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 하옵소서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너 후 무한 영광일세\" ( 결 론 ) 십자가의 제 삼언은 십자가 사랑의 소리였다. 기독교가 이 십자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면 기독교가 아니다 십자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면 예수 안에서 진정한 형제 자매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는 이러한 십자가 사랑이 식어지고 불법이 성행할 것이라고 주님은 예언 하셨다 (마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 인간의 사랑도 매말라 가고 있지만 십자가의 사랑도 식어가고 있다. 사랑의 특징은 뜨거움은 가지고 있다. 사랑이 뜨거움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의 의미를 잃은 것이다. - 10 - 우리가 음식도 뜨거운 음식을 먹을 때 맛이 있고 그 맛을 느낄 수 있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십자가 사랑은 식어지면 안된다. 인간의 사랑도 식어지면 문제가 생기듯이 십자가 사랑도 식어지면 문제가 생기는데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내 영혼이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십자가 사랑이 식어지면 형식과 외식적인 자가 되고 만다 즉 종교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종교로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다. 기독교 종교로 우리가 구원 받는게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로 구원받는다. 기독교는 십자가에서 죄 사함 받은 자들이 모인 공동체다. 십자가 사랑을 잃어버린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님은 강하게 책망 하셨다. (계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 우리 인체가 항상 36-38도의 체온을 유지하고 있다. 이 체온이 항상 우리에게 유지되어야 우리는 건강한 몸이다. 체온이 떨어지면 우리는 죽는 것이다. 또 너무 체온이 올라가도 죽는다. 우리의 신앙이 너무 떨어지면 우리의 영혼은 죽는다. 너무 올라가도 광신자가 되어 버린다. 우리는 매일 십자가 밑에서 십자가 사랑으로... 성령으로 충만 받고 매일 십자가의 피로 죄 씻음 받고 나아간다면 우리는 마가 다락방에 모인 무리들처럼 뜨거운 신앙 생활을 하면서 예수를 위해 살게 될 것이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 십자가로 인해서 이제 우리 안에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 져야 한다 이제껏 우리는 육적인 관계에만 매여서 살아왔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육적인 혈육 관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혈육 관계란 사실을 깨닫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 11 - 십자가의 제 삼언은 어떤 관계가 더 중요한 것인지 주님이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육의 관계를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가 구원받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라면 영적인 관계를 더 중요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십자가의 제 삼언을 통해서 우리를 깨닫게 하고 계신다. 오늘날 이 시대 성도들의 관계를 보자 이웃 교회 성도와는 말도 안하고 사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가 ? 서로가 이단시하고 살아가고 있다. 절대로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할 때 십자가의 사랑의 능력이 이 민족을 구원시키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질 것이다. (딤전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십자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기 원하시는 제 삼언의 예수님 말씀을 절대로 잊지 말기를 축원합니다.
가상칠언 중 제4언(架上七言 中 第四言)/ 마27:45-49/ 2001-11-20
가상칠언 중 제4언(架上七言 中 第四言) 마27:45-49 ( 서 론 )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님의 고통은 이제 극도로 찾아왔다. 아침 9시에 십자가에 예수님이 매달렸는데 3시간이 지난 낮 12시가 되자 온 땅이 어두어졌다. 이 어두움은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까지 계속 되었다. 4번째 말씀을 하실 때는 십자가에 매달리신지 6시간이 지난 오후3시 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오후 3시에 운명하셨으므로 4언 서부터 7언 까지는 연속적으로 예수님이 계속하시는 말씀이었다. 온 땅이 어두웠다는 것은 ... 어두움은 죄의 세계이다. 운명하실 때까지 온 세상이 어두웠다는 것은 철저히 인류의 죄를 대속 하시고 죽으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외면이셨다. 그 처절한 하나님의 외면 속에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마틴 루터는 너무나 이 말씀 해석이 어려워 오랫동안 먹지도 쉬지도 않고 명상에 잠겼다고 한다. 참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이 무슨 힘이 남았겠는가 ! 말을 한다해도 모기소리만큼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 크게 소리 지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님은 마지막 온 몸의 힘을 모아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신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분명한 뜻이 있는 외침이셨다. 많은 사람들의 귀에 들리도록 해야 한다는 주님의 뜻이 있었다. 주님의 뜻대로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리를 들었다. \\\"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 사람들은 듣기는 들었지만 예수님의 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예수님이 왜 일부러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 받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했을까요 ? 가상사언은 죄에 대한 무지한 자들에게 죄에 대해 분명히 깨달으라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외침이다. -1- 첫 번째 : 나의 하나님 ! 나의 하나님 ! (마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하는 뜻이라 \\\" 이제껏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관계가 깨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관계인가 ? 예수님이 하나님과 죄인의 관계의 모습이 되고 있다. 엘리 = 히브리어로서 나의 하나님 뜻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이시며 심판자이시다. 하나님 자녀에게는 사랑의 아버지이지만 죄에 대해서는 무서운 심판자이시다. 왜 \\\"엘리엘리\\\" 즉 \\\"나의 하나님\\\" 만 히브리어를 사용 했을까 ? \\\"라마 사박다니\\\" 는 아람어이다. 히브리어는 유대인들의 고유 언어이다. \\\"엘리 엘리\\\" 만 히브리어를 사용하신 것은 잊어버린 하나님의 존재를 히브리어 민족에게 깨닫게 하시기 위한 주님의 의도였을 것이다. 이것은 또 이 시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만 깨닫도록 외치는 주님의 음성이다. 또 다른 주님의 뜻은 죄에 대한 무서운 하나님을 모습을 인류는 똑똑히 보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예수님은 창세 이래로 하나님과 떨어진 적이 없으셨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아버지이셨다. 그런데 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사라지고 죄인과 심판자의 관계가 되신 것이다. 죄인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지금 예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부르시고 계시는 것이다. 50%만 인류의 죄를 대속하실 수 없다. 철저히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야 만이 구세주이시고 메시야이신 것이다 - 2 - 두 강도는 자신들의 개인의 죄의 댓가로 심판을 당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창세 이래로 모든 인류의 죄를 지금 십자가에서 철저하게 몸소 당하고 계신 것이다. 이 길이 아니고서는 인류가 구원받을 길이 없는 것이다. 지금 예수는 그 구원의 길을 열어놓고 계신 것이다. 무지한 자들은 이런 예수를 알지 못하고 비웃고 있었다. (마27:42)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 저 비웃는 무리들이 이 다음에라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지금 부르짖고 계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렇게 죄를 짊어지고 죽어가고 있다 너희는 이 후에라도 깨달아라 \\\" \\\"하나님이 얼마나 죄를 싫어하시고 무섭게 심판 하신지 너희는 깨달아라 \\\" 예수님은 이런 의도로 지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부르짖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사랑의 아버지이시지만 아버지가 빠진 하나님 존재는 무서운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저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자신들의 하나님으로만 알고 살아왔다. 자신들만 도와주는 하나님으로만 알고 살아왔다. 자신들이 하나님에게 한 행동은 생각지 않고 하나님을 자신들의 육을 위해 살아가는데 도와주는 신으로만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존재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지금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 \\\" 외치신 것은 저 유대인들에게 잊어버린 하나님 존재를 알려주고자 하신 것이다. 그래서 \\\"엘리 엘리 \\\" 히브리어만 사용하셨을 것이다. 그렇게도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동안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주시고 수없이 말씀으로 증거 하셨건만 저 미련한 유대인들은 믿지 아니했고 결국 지금 그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있는 것이다. \\\"엘리 엘리 \\\"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주님의 외침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만 깨닫도록 외치는 주님의 호소였다. 하나님의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고 무시하고 살아가는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먼저 깨닫도록 부르짖은 것이다. - 3 -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산다면 누가 하나님을 믿겠는가 ?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죄를 밥먹듯이 짖고 살면 누가 죄 짖는 것을 두려워하겠는가 ? 부모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데 자식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겠는가?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자들에게 \\\"엘리 엘리\\\" 부르짖으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하여주고 계신다. 성도 여러분 ! 하나님의 존재가 여러분 속에 얼마나 자리하고 있습니까 ?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얼마나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죄를 두려워하고 죄만 짖으면 가슴을 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지금 깨닫도록 외치고 계신 것이다 이 시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잃어버리고 더러운 죄악 속에서 온갖 짖을 저지르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지금 주님은 외치고 있는 것이다. \\\"엘리 엘리 ...\\\"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고 살아가는 자들처럼 무지하고 미련한자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가 여러분의 삶 속에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4- 두 번째 : 어찌하여 ......... (마27:46)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하는 뜻이라 \\\" \\\"어찌하여\\\" 죄인의 처절한 심판의 소리를 지금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큰소리 로 외치고 계신다. \\\"어찌하여\\\" 은 아람어로 주님은 외치고 있다. 이것은 이제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듣도록 소리치신 것이다. 아람어는 당시에 공통어로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왜 내가 십자가에서 이렇게 죽은지 너희를 알아야 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짖음이다. \\\"어찌하여\\\" = 라마 (아람어) 직역하면 \\\"어떤 목적을 두시고\\\" 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자신을 버리신 목적에 대해서 묻고 계신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예수께서 하나님께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밑에 모인 무리들에게 ......... 후에 복음을 들은 자들에게 묻고 있는 말씀이다. \\\"어떤 목적으로 내가 이렇게 버림을 당하는지 아느냐 ? \\\" 주님은 지금 큰 소리로 우리의 귀에 묻고 계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지금 주님은 온 힘을 모아서 마지막으로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 여기에는 분명한 주님의 숨은 뜻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 소리친 주님의 외침이 아니었다. 혹자는 예수님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을 원망하여 부르짖는 소리였다고 하는데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해석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 아신 분이셨다. 33년 동안 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서 살으셨고 이 날을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증거 하시면서 살아 오셨다. 그런 분이 십자가에 고통에 못 이겨 하나님을 원망하겠는가 ? 인간이시라면 또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인간이시면서 하나님 아들이셨다. - 5 - 십자가에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죽인 무리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하셨고 강도의 구원을 약속하시고 십자가 아래에서 연약하게 울고만 있는 자들에게 십자가 사랑으로 강하게 연결시켜 주고 있는 주님이 고통이 심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겠는가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면서도 인류에게 복음의 메세지를 계속해서 들려주고 계신다. 성도 여러분 \\\"어찌하여\\\" 예수가 이렇게 버림받고 계십니까 ? 예수님이 죄를 지어져 이렇게 고통 당하고 계십니까 ? 어찌하여 이렇게 고통 당하고 계십니까 ? 3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성경을 이루려 하시기 위해서 ...... 2. 인류의 죄를 사함 받게 하기 위해서 ....... 3. 이 땅에 다시 오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1. 성경을 이루려 하시기 위해서이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 (시22: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 (시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 \\\" (사53:4-7)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 - 6 - 성경을 이루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지금 똑똑히 보라고 예수님은 \\\"어찌하여\\\" 부르짖고 계신 것이다. 2. 인류의 죄를 사함 받게 하기 위하여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마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갈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 (엡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 (골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 인류를 위해 죄사함 받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똑똑히 보라고 예수님은 \\\"어찌하여\\\" 부르짖고 계신 것이다. 3. 이 땅에 다시 오시기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다.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 (요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신 예수는 이 땅에 오실 때 영광의 주로..... 심판자로 오실 것이다. 아담이 사단에게 빼앗긴 이 땅의 다스리는 권세를 예수님은 다시 되찾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실 것이다. 잃어버린 에덴 동산 실락원을 복락원 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으라고 예수님은 지금 \\\"어찌하여\\\" 부르짖고 계신 것이다. - 7 - 성도 여러분 ! 십자가 위에서 \\\"어찌하여\\\" 부르짖는 예수님의 목소리는 원망이나 한탄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십자가 밑에 모인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큰 소리로 깨닫도록 부르짖었다. 성도 여러분 ! \\\"어찌하여...\\\" 이 부르짖는 예수님의 음성이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드려져야 할 것이다. 어찌하여 예수가 지금 십자가에서 이렇게 죽어가고 계십니까 ? 십자가 밑에서 무지한 백성들처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주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엘리야를 부르는 줄로 아는 무지한 자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남은 구원하고 자신은 버림을 받는다고 놀리는 무지한 자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어찌하여 ....\\\" 의 부르짖음은 오히려 우리들을 깨닫도록 부르짖는 주님의 사랑의 음성이었다는 것을 깊이 깨닫기를 바란다 -8- 세 번째 :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7:46)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하는 뜻이라 \\\"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신을 지금 예수님은 큰소리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다. 이렇게 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한 뜻을 저 무지한자들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온 몸의 힘을 다 내어 소리치신 것이다. 단순히 예수님 자신의 고통이 너무 참기 힘들어서 하나님께 따지듯 소리치시고 계신 것이 아니다. 나를 버리셨나이까 = 하나님께 예수 자신이 완전히 버림 받았다 창세 이래로 하나님 아버지와 떨어져 본 적이 없는 예수님 이셨다. 그런데 지금 그 아버지에게 예수님은 철저히 버림을 당하셨다. 왜? 무엇 때문에 ......... 그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주님은 아람어로 크게 부르짖은 것이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왜 예수가 버림 받은지 아십니까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지 무지한 무리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 무지한 자들을 예수님은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지금은 저들이 예수를 비웃고 놀려대고 있지만 언제인가는 깨달을 날이 올 것을 주님은 기대하신 것이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다시 말한다면 \\\"어찌해서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는지 아느냐 ?\\\" 외치고 계신 것이다. 왜 이렇게 버림을 당하고 계십니까 ?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고 은혜를 받았다 할지라도 감사할 줄 모를 것이다. - 9 -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 때문에 지금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한다. 예수가 하나님께 버림받을 이유가 없다.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의 삼위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런데 그 관계가 지금 떨어진 것이다. 누구 때문에 ? 바로 나의 죄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확실하게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십자가에서 담당하시고 죽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마음 속 깊이 깨달아야 한다. 성도 여러분 ! 예수님이 하나님께 버림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 아시죠? 예수님이 무슨 죄를 지어서 지금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있지 않다는 것 아시죠 ? 그러나 지금 십자가 밑에 있는 많은 무리들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성경은 그 사람들의 마음을 증거하고 있다.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 예수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있다고 아는 무지한자 들에게 예수님은 지금 \\\"내가 왜 이렇게 버림을 당하는지 아느냐 ? \\\" 외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아니 믿는 자들조차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성도 여러분 ! 너의 죄 때문에 예수가 지금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예수가 버림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죄가 없으신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무지한 자들이 될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는지 깨달을 때 비로소 인간은 죄에 대한 무지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인간이 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삽니까 ? 죄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죄가 얼마나 무섭고 더러운 것인지 모르고 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을 때 인간은 죄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10 - 죄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날때 우리는 죄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죄에 대해서 더럽고 추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인 무리들도 이 무지함 때문에 엄청난 죄를 짖고 만 것이다. (시94:8)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이 무지한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죄에 대한 것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지 깨닫도록 십자가에서 외치고 계신 것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짖음 속에서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 시대 죄에 대한 경각심이 무너져 가고 있다. 이 시대 죄에 대한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서슴없이 죄를 저지르고 있다. 보험료를 타기 위해서 자식의 손가락을 자르고 자신의 다리까지도 서슴없이 자르고 있다. 부모를 죽이고 자식을 죽이고 형제를 죽이고 남편을 죽이고 아내를 죽이고 그야말로 죄악이 온통 인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10대 들의 범죄가 전체 범죄 중 54%을 차지하고 있다. 얼마나 이 나라에 죄악이 가득 찼는지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그러니 더욱 큰 일은 이러한 죄에 대한 무지가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에게도 동일시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예언하기를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이 죄에 사로잡힐 것을 말씀하고 있다. (딤후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 십자가에서 들리는 주님의 부르짖음 속에서 우리는 죄에 대한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 11 - 인류에 죄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하나님은 모르고 죄로 인해 하나님께 외면 당하는 인간들의 고통을 지금 예수님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예 화 ) 위대한 복음전도자요, 신학자요, 찬송가의 작시자로 알려진 존 뉴턴은 영국 태생으로 7살때 어머니를 잃고 비뚤게 자라다 3년후에는 학교 공부마저 그만두고 지중해를 항해하던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타기 시작 했다. 그는 배를 타고 다니면서 뱃사람들의 좋지 않은 습성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비정한 사람이 되어 온갖 나쁜 짓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그는 아프리카 선단에 가입하여 그 배의 선장이 되었고 그가 하는 일은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잡아다 노예 상인들에게 팔아 넘기는 일을 했다. 그는 인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아주 흉악한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노예들을 상어에게 먹이로 주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생전에 아들의 신앙을 위해 끊임없이 눈물로 기도했던 기도의 사람이었다. 살아 생전에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는 헛된 기도가 되지 아니었다. 어느 날 뉴턴이 대서양을 항해하는 데 큰 폭풍우가 몰아닥쳤다. 순식간에 배는 파선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배 안은 온통 수라장이 되었다. 그때 뉴턴은 어릴 적 어머니의 기도를 떠올리게 되었고 항상 호주머니 속에 만 넣어 두었던 성경을 꺼내들고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내 어머니의 하나님이시여,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저에게 단 한번만 기회를 주시옵소서. 저를 이 죽음에서 구해주시면 내 일생을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 이런 기도를 드리는 순간 그 무섭던 바다는 잠잠해졌고 존 뉴턴은 변화되었다. 그는 이제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죤 뉴턴은 죄에 대한 무지에서 깨어났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나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는 변화 된 것이다 그는 위대한 복음전도자, 신학자가 되었고 찬송가 작시자로 새롭게 거듭난 사람이 된 것이다. 그가 작시한 찬송가 405장 \\\"나같은 죄인 살리신\\\" 곡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곡이다. - 12 - ( 결 론 ) 성도 여러분 ! 고난 주간을 기다리면서 오늘 우리는 가상 칠언의 말씀 중 제 4언의 말씀을 들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외침은 죄에 대한 무지한 자들에게 죄가 무엇인지 .... 죄에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죄의 무지함에서 깨어나야 할 것이다.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주님의 고통을 보고도 하나님이 죄에 대해 얼마나 단호하고 무섭게 심판하는지 모른다면 짐승보다도 못한 자들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고\\\"(롬6:23)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죄의 결과는 하나님께 당하는 심판뿐이다. 그 심판을 지금 주님이 십자가에서 모두 다 당하고 계신다. 죄에 대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 주님이 지금 몸소 보여주고 계신다. 죄를 얼마나 하나님이 싫어하는지 주님은 지금 마지막 순간까지 인류에게 알리고자 하신 것이다. 죄에 대한 징계를 얼마나 하나님이 무섭게 하는지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신 것이다. 성도 여러분 ! 십자가에서 부르짖는 예수님의 7마디 중 오늘 우리가 들은 4번째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는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부르짖으며 믿는 자들이 지금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깨닫도록 하시는 외침이다. 성도 여러분 ! 하나님과 지금 어떤 관계입니까 ? 주님처럼 \\\"나의 하나님이십니까 ?\\\"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죄를 사함 받기 원하고 계십니까 ? 아니면 매일 회개의 신앙을 살면서 하나님께 용서함 빌면서 살아가는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입니까 ? 이 땅에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극히 적다. - 13 -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이러니한 일들이 이 시대 만연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이제 하나님을 믿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시간 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 생각 해보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세지 였다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는 믿는 자와 불신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세지다. 죄에 대한 무지 때문에 지금도 죄악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주님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 때문에 .... 아니 너의 죄 때문에 지금 내가 이렇게 버림을 당하고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주님은 외치고 계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죽으시러 오셨다. 고통이 심해서 부르짖는 소리가 아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징벌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고 외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이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느냐 \\\" 주님은 외치고 계신 것이다. 우리의 더러운 죄를 사해 주기 위해서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시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너희를 알아야 한다고 주님은 지금 외치고 계신 것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소리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매일 들려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가상칠언 중 제4언(架上七言 中 第四言)/ 마27:45-49/ 2009-04-03
가상칠언 중 제4언(架上七言 中 第四言) 마27:45-49 서 론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님의 고통은 이제 극도로 찾아왔다. 아침 9시에 십자가에 예수님이 매달렸는데 3시간이 지난 낮 12시가 되자 온 땅이 어두어졌다. 이 어두움은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까지 계속 되었다. 4번째 말씀을 하실 때는 십자가에 매달리신지 6시간이 지난 오후3시 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오후 3시에 운명하셨으므로 4언 서부터 7언 까지는 연속적으로 예수님이 계속하시는 말씀이었다. 온 땅이 어두웠다는 것은 ... 어두움은 죄의 세계이다. 운명하실 때까지 온 세상이 어두웠다는 것은 철저히 인류의 죄를 대속 하시고 죽으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외면이셨다. 그 처절한 하나님의 외면 속에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마틴 루터는 너무나 이 말씀 해석이 어려워 오랫동안 먹지도 쉬지도 않고 명상에 잠겼다고 한다. 참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이 무슨 힘이 남았겠는가 ! 말을 한다해도 모기소리만큼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 크게 소리 지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님은 마지막 온 몸의 힘을 모아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신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분명한 뜻이 있는 외침이셨다. 많은 사람들의 귀에 들리도록 해야 한다는 주님의 뜻이 있었다. 주님의 뜻대로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리를 들었다. \\\\\\\"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 사람들은 듣기는 들었지만 예수님의 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예수님이 왜 일부러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 받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했을까요 ? 가상사언은 죄에 대한 무지한 자들에게 죄에 대해 분명히 깨달으라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외침이다. 첫 번째 : 나의 하나님 ! 나의 하나님 ! (마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하는 뜻이라 \\\\\\\" 이제껏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관계가 깨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관계인가 ? 예수님이 하나님과 죄인의 관계의 모습이 되고 있다. 엘리 = 히브리어로서 나의 하나님 뜻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이시며 심판자이시다. 하나님 자녀에게는 사랑의 아버지이지만 죄에 대해서는 무서운 심판자이시다. 왜 \\\\\\\"엘리엘리\\\\\\\" 즉 \\\\\\\"나의 하나님\\\\\\\" 만 히브리어를 사용 했을까 ? \\\\\\\"라마 사박다니\\\\\\\" 는 아람어이다. 히브리어는 유대인들의 고유 언어이다. \\\\\\\"엘리 엘리\\\\\\\" 만 히브리어를 사용하신 것은 잊어버린 하나님의 존재를 히브리어 민족에게 깨닫게 하시기 위한 주님의 의도였을 것이다. 이것은 또 이 시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만 깨닫도록 외치는 주님의 음성이다. 또 다른 주님의 뜻은 죄에 대한 무서운 하나님을 모습을 인류는 똑똑히 보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예수님은 창세 이래로 하나님과 떨어진 적이 없으셨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아버지이셨다. 그런데 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사라지고 죄인과 심판자의 관계가 되신 것이다. 죄인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지금 예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부르시고 계시는 것이다. 50%만 인류의 죄를 대속하실 수 없다. 철저히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야 만이 구세주이시고 메시야이신 것이다 두 강도는 자신들의 개인의 죄의 댓가로 심판을 당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창세 이래로 모든 인류의 죄를 지금 십자가에서 철저하게 몸소 당하고 계신 것이다. 이 길이 아니고서는 인류가 구원받을 길이 없는 것이다. 지금 예수는 그 구원의 길을 열어놓고 계신 것이다. 무지한 자들은 이런 예수를 알지 못하고 비웃고 있었다. (마27:42)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 저 비웃는 무리들이 이 다음에라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지금 부르짖고 계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렇게 죄를 짊어지고 죽어가고 있다 너희는 이 후에라도 깨달아라 \\\\\\\" \\\\\\\"하나님이 얼마나 죄를 싫어하시고 무섭게 심판 하신지 너희는 깨달아라 \\\\\\\" 예수님은 이런 의도로 지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부르짖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사랑의 아버지이시지만 아버지가 빠진 하나님 존재는 무서운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저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자신들의 하나님으로만 알고 살아왔다. 자신들만 도와주는 하나님으로만 알고 살아왔다. 자신들이 하나님에게 한 행동은 생각지 않고 하나님을 자신들의 육을 위해 살아가는데 도와주는 신으로만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존재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지금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 \\\\\\\" 외치신 것은 저 유대인들에게 잊어버린 하나님 존재를 알려주고자 하신 것이다. 그래서 \\\\\\\"엘리 엘리 \\\\\\\" 히브리어만 사용하셨을 것이다. 그렇게도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동안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주시고 수없이 말씀으로 증거 하셨건만 저 미련한 유대인들은 믿지 아니했고 결국 지금 그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있는 것이다. \\\\\\\"엘리 엘리 \\\\\\\"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주님의 외침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만 깨닫도록 외치는 주님의 호소였다. 하나님의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고 무시하고 살아가는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먼저 깨닫도록 부르짖은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산다면 누가 하나님을 믿겠는가 ?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죄를 밥먹듯이 짖고 살면 누가 죄 짖는 것을 두려워하겠는가 ? 부모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데 자식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겠는가?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자들에게 \\\\\\\"엘리 엘리\\\\\\\" 부르짖으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하여주고 계신다. 성도 여러분 ! 하나님의 존재가 여러분 속에 얼마나 자리하고 있습니까 ?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얼마나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죄를 두려워하고 죄만 짖으면 가슴을 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지금 깨닫도록 외치고 계신 것이다 이 시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잃어버리고 더러운 죄악 속에서 온갖 짖을 저지르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지금 주님은 외치고 있는 것이다. \\\\\\\"엘리 엘리 ...\\\\\\\"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고 살아가는 자들처럼 무지하고 미련한자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가 여러분의 삶 속에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 어찌하여 ......... (마27:46)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하는 뜻이라 \\\\\\\" \\\\\\\"어찌하여\\\\\\\" 죄인의 처절한 심판의 소리를 지금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큰소리 로 외치고 계신다. \\\\\\\"어찌하여\\\\\\\" 은 아람어로 주님은 외치고 있다. 이것은 이제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듣도록 소리치신 것이다. 아람어는 당시에 공통어로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왜 내가 십자가에서 이렇게 죽은지 너희를 알아야 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짖음이다. \\\\\\\"어찌하여\\\\\\\" = 라마 (아람어) 직역하면 \\\\\\\"어떤 목적을 두시고\\\\\\\" 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자신을 버리신 목적에 대해서 묻고 계신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예수께서 하나님께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밑에 모인 무리들에게 ......... 후에 복음을 들은 자들에게 묻고 있는 말씀이다. \\\\\\\"어떤 목적으로 내가 이렇게 버림을 당하는지 아느냐 ? \\\\\\\" 주님은 지금 큰 소리로 우리의 귀에 묻고 계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지금 주님은 온 힘을 모아서 마지막으로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 여기에는 분명한 주님의 숨은 뜻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 소리친 주님의 외침이 아니었다. 혹자는 예수님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을 원망하여 부르짖는 소리였다고 하는데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해석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 아신 분이셨다. 33년 동안 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서 살으셨고 이 날을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증거 하시면서 살아 오셨다. 그런 분이 십자가에 고통에 못 이겨 하나님을 원망하겠는가 ? 인간이시라면 또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인간이시면서 하나님 아들이셨다. 십자가에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죽인 무리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하셨고 강도의 구원을 약속하시고 십자가 아래에서 연약하게 울고만 있는 자들에게 십자가 사랑으로 강하게 연결시켜 주고 있는 주님이 고통이 심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겠는가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면서도 인류에게 복음의 메세지를 계속해서 들려주고 계신다. 성도 여러분 \\\\\\\"어찌하여\\\\\\\" 예수가 이렇게 버림받고 계십니까 ? 예수님이 죄를 지어져 이렇게 고통 당하고 계십니까 ? 어찌하여 이렇게 고통 당하고 계십니까 ? 3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성경을 이루려 하시기 위해서 ...... 2. 인류의 죄를 사함 받게 하기 위해서 ....... 3. 이 땅에 다시 오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1. 성경을 이루려 하시기 위해서이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 (시22: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 (시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 \\\\\\\" (사53:4-7)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 성경을 이루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지금 똑똑히 보라고 예수님은 \\\\\\\"어찌하여\\\\\\\" 부르짖고 계신 것이다. 2. 인류의 죄를 사함 받게 하기 위하여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마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갈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 (엡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 (골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 인류를 위해 죄사함 받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똑똑히 보라고 예수님은 \\\\\\\"어찌하여\\\\\\\" 부르짖고 계신 것이다. 3. 이 땅에 다시 오시기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다.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 (요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신 예수는 이 땅에 오실 때 영광의 주로..... 심판자로 오실 것이다. 아담이 사단에게 빼앗긴 이 땅의 다스리는 권세를 예수님은 다시 되찾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실 것이다. 잃어버린 에덴 동산 실락원을 복락원 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으라고 예수님은 지금 \\\\\\\"어찌하여\\\\\\\" 부르짖고 계신 것이다. 성도 여러분 ! 십자가 위에서 \\\\\\\"어찌하여\\\\\\\" 부르짖는 예수님의 목소리는 원망이나 한탄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십자가 밑에 모인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큰 소리로 깨닫도록 부르짖었다. 성도 여러분 ! \\\\\\\"어찌하여...\\\\\\\" 이 부르짖는 예수님의 음성이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드려져야 할 것이다. 어찌하여 예수가 지금 십자가에서 이렇게 죽어가고 계십니까 ? 십자가 밑에서 무지한 백성들처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주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엘리야를 부르는 줄로 아는 무지한 자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남은 구원하고 자신은 버림을 받는다고 놀리는 무지한 자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어찌하여 ....\\\\\\\" 의 부르짖음은 오히려 우리들을 깨닫도록 부르짖는 주님의 사랑의 음성이었다는 것을 깊이 깨닫기를 바란다 세 번째 :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7:46)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하는 뜻이라 \\\\\\\"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신을 지금 예수님은 큰소리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다. 이렇게 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한 뜻을 저 무지한자들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온 몸의 힘을 다 내어 소리치신 것이다. 단순히 예수님 자신의 고통이 너무 참기 힘들어서 하나님께 따지듯 소리치시고 계신 것이 아니다. 나를 버리셨나이까 = 하나님께 예수 자신이 완전히 버림 받았다 창세 이래로 하나님 아버지와 떨어져 본 적이 없는 예수님 이셨다. 그런데 지금 그 아버지에게 예수님은 철저히 버림을 당하셨다. 왜? 무엇 때문에 ......... 그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주님은 아람어로 크게 부르짖은 것이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왜 예수가 버림 받은지 아십니까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지 무지한 무리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 무지한 자들을 예수님은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지금은 저들이 예수를 비웃고 놀려대고 있지만 언제인가는 깨달을 날이 올 것을 주님은 기대하신 것이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다시 말한다면 \\\\\\\"어찌해서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는지 아느냐 ?\\\\\\\" 외치고 계신 것이다. 왜 이렇게 버림을 당하고 계십니까 ?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고 은혜를 받았다 할지라도 감사할 줄 모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 때문에 지금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한다. 예수가 하나님께 버림받을 이유가 없다.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의 삼위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런데 그 관계가 지금 떨어진 것이다. 누구 때문에 ? 바로 나의 죄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확실하게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십자가에서 담당하시고 죽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마음 속 깊이 깨달아야 한다. 성도 여러분 ! 예수님이 하나님께 버림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 아시죠? 예수님이 무슨 죄를 지어서 지금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있지 않다는 것 아시죠 ? 그러나 지금 십자가 밑에 있는 많은 무리들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성경은 그 사람들의 마음을 증거하고 있다.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 예수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있다고 아는 무지한자 들에게 예수님은 지금 \\\\\\\"내가 왜 이렇게 버림을 당하는지 아느냐 ? \\\\\\\" 외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아니 믿는 자들조차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성도 여러분 ! 너의 죄 때문에 예수가 지금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예수가 버림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죄가 없으신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무지한 자들이 될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는지 깨달을 때 비로소 인간은 죄에 대한 무지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인간이 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삽니까 ? 죄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죄가 얼마나 무섭고 더러운 것인지 모르고 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을 때 인간은 죄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죄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날때 우리는 죄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죄에 대해서 더럽고 추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인 무리들도 이 무지함 때문에 엄청난 죄를 짖고 만 것이다. (시94:8)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이 무지한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죄에 대한 것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지 깨닫도록 십자가에서 외치고 계신 것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짖음 속에서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 시대 죄에 대한 경각심이 무너져 가고 있다. 이 시대 죄에 대한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서슴없이 죄를 저지르고 있다. 보험료를 타기 위해서 자식의 손가락을 자르고 자신의 다리까지도 서슴없이 자르고 있다. 부모를 죽이고 자식을 죽이고 형제를 죽이고 남편을 죽이고 아내를 죽이고 그야말로 죄악이 온통 인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10대 들의 범죄가 전체 범죄 중 54%을 차지하고 있다. 얼마나 이 나라에 죄악이 가득 찼는지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그러니 더욱 큰 일은 이러한 죄에 대한 무지가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에게도 동일시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예언하기를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이 죄에 사로잡힐 것을 말씀하고 있다. (딤후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 십자가에서 들리는 주님의 부르짖음 속에서 우리는 죄에 대한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인류에 죄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하나님은 모르고 죄로 인해 하나님께 외면 당하는 인간들의 고통을 지금 예수님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예 화 ) 위대한 복음전도자요, 신학자요, 찬송가의 작시자로 알려진 존 뉴턴은 영국 태생으로 7살때 어머니를 잃고 비뚤게 자라다 3년후에는 학교 공부마저 그만두고 지중해를 항해하던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타기 시작 했다. 그는 배를 타고 다니면서 뱃사람들의 좋지 않은 습성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비정한 사람이 되어 온갖 나쁜 짓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그는 아프리카 선단에 가입하여 그 배의 선장이 되었고 그가 하는 일은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잡아다 노예 상인들에게 팔아 넘기는 일을 했다. 그는 인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아주 흉악한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노예들을 상어에게 먹이로 주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생전에 아들의 신앙을 위해 끊임없이 눈물로 기도했던 기도의 사람이었다. 살아 생전에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는 헛된 기도가 되지 아니었다. 어느 날 뉴턴이 대서양을 항해하는 데 큰 폭풍우가 몰아닥쳤다. 순식간에 배는 파선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배 안은 온통 수라장이 되었다. 그때 뉴턴은 어릴 적 어머니의 기도를 떠올리게 되었고 항상 호주머니 속에 만 넣어 두었던 성경을 꺼내들고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내 어머니의 하나님이시여,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저에게 단 한번만 기회를 주시옵소서. 저를 이 죽음에서 구해주시면 내 일생을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 이런 기도를 드리는 순간 그 무섭던 바다는 잠잠해졌고 존 뉴턴은 변화되었다. 그는 이제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죤 뉴턴은 죄에 대한 무지에서 깨어났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나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는 변화 된 것이다 그는 위대한 복음전도자, 신학자가 되었고 찬송가 작시자로 새롭게 거듭난 사람이 된 것이다. 그가 작시한 찬송가 405장 \\\\\\\"나같은 죄인 살리신\\\\\\\" 곡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곡이다. ( 결 론 ) 성도 여러분 ! 고난 주간을 기다리면서 오늘 우리는 가상 칠언의 말씀 중 제 4언의 말씀을 들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외침은 죄에 대한 무지한 자들에게 죄가 무엇인지 .... 죄에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죄의 무지함에서 깨어나야 할 것이다.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주님의 고통을 보고도 하나님이 죄에 대해 얼마나 단호하고 무섭게 심판하는지 모른다면 짐승보다도 못한 자들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고\\\\\\\"(롬6:23)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죄의 결과는 하나님께 당하는 심판뿐이다. 그 심판을 지금 주님이 십자가에서 모두 다 당하고 계신다. 죄에 대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 주님이 지금 몸소 보여주고 계신다. 죄를 얼마나 하나님이 싫어하는지 주님은 지금 마지막 순간까지 인류에게 알리고자 하신 것이다. 죄에 대한 징계를 얼마나 하나님이 무섭게 하는지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신 것이다. 성도 여러분 ! 십자가에서 부르짖는 예수님의 7마디 중 오늘 우리가 들은 4번째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는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부르짖으며 믿는 자들이 지금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깨닫도록 하시는 외침이다. 성도 여러분 ! 하나님과 지금 어떤 관계입니까 ? 주님처럼 \\\\\\\"나의 하나님이십니까 ?\\\\\\\"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죄를 사함 받기 원하고 계십니까 ? 아니면 매일 회개의 신앙을 살면서 하나님께 용서함 빌면서 살아가는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입니까 ? 이 땅에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극히 적다.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이러니한 일들이 이 시대 만연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이제 하나님을 믿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시간 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 생각 해보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세지 였다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는 믿는 자와 불신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세지다. 죄에 대한 무지 때문에 지금도 죄악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주님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 때문에 .... 아니 너의 죄 때문에 지금 내가 이렇게 버림을 당하고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주님은 외치고 계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죽으시러 오셨다. 고통이 심해서 부르짖는 소리가 아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징벌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고 외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이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느냐 \\\\\\\" 주님은 외치고 계신 것이다. 우리의 더러운 죄를 사해 주기 위해서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시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너희를 알아야 한다고 주님은 지금 외치고 계신 것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소리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매일 들려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직 예수=
가상칠언 중 제5언(架上七言 中 第五言)/ 요19:28-/ 2002-04-03
가상칠언 중 제5언(架上七言 中 第五言) 요19:28- ( 서 론 ) 예수님은 제 9시에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다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이다. 그런데 제 4언을 크게 소리 치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외치신 시간이 제 9시 였다. 그렇다면 제 4언부터 7언 까지의 예수님의 말씀은 연속적으로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는 것을 보게된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가장 고통이 극심한 가운데 나오신 주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의 몸에서는 땀과 피로 온통 얼룩진 모습이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육적으로 목이 말라서 정말 목이 타서 물이 필요했다면 그 전에 물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이 물을 달라고 하신 것은 자신의 목을 축이기 위해서 물을 달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제1언 = 기도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제2언 = 구원에 대한 `` 했다. 제3언 = 사랑에 `` `` `` 제4언 = 무지함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 주님은 제 5언 에서 무엇을 알리고자 하신 것일까? 제 5언은 죄에 대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 알리고자 하신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모르고 산다면 그 삶은 아무리 부유한 삶을 산다 할지라도 목마른 인생이 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인간의 사랑을 많이 받고 산다 할지라도 인간의 영혼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그 인생은 목마른 인생이다. 인간이 아무리 세상적으로 지식이 있고 똑똑하다 할지라도 죄에 대한 무지함과 하나님에 대한 무지함으로 산다면 그 인생은 사막 같은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목마르다\" 죄에 대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 보라는 예수님의 메세지이다. 극한 고통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세상을 사랑하셔서 십자가 위에서 보내신 주님의 메세지를 깊이 생각해야 될 것이다. 첫 번째 : 내가 목마르다 (요19: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 사람의 몸 속에 피가 쏟아지면 사람은 극도로 갈증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주님은 그 갈증을 못 참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은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내가 목마르다 하셨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결코 육적으로 목이 말라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시69:19-21)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 이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주님은 내가 목마르다 하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목마르다\" 이 말씀 속에서 주님이 세상에 전하고자 하시는 뜻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내가 목마르다라는 말씀은 육적인 목마름을 뜻하는 게 아니다. 죄에 저주로 말미암아 찾아온 영혼의 목마름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영혼의 목마름이 어떤 것인지 주님은 지금 알리고 있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 영혼의 목마름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 이 목마름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의 모습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육적인 목마름에 고통 당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 이 고통을 당해 본 사람은 물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안다. 물이 꿀맛 같다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은 물이 귀할 때 물을 맛보고 하는 자들이 하는 말이다. 이러한 물은 육적 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세계에게도 이러한 물이 있다. 그러나 영적 세계에도 이러한 물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영적 물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 온 천하에 알리고 계신 것이다. 영적 물에 대해 주님은 공생애 기간동안에도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저 무지한 자들은 깨닫지 못했다. 유대인의 관원이였던 니고데모는 어느 날 밤 예수님을 조용히 찾아왔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요3: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육에 세계에서도 물이 없으면 살수 없듯이 영에 세계에도 물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에서 살수가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밝히셨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예수님은 물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7:37-38)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 이렇게 주님이 물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이 물이 우리가 먹는 물을 말하는 것일까요 ? 이것은 바로 영적 물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육에 먹는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듯이 우리의 영에도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는데 바로 그 물이 바로 말씀이다. 엡5:26 물은 곧 말씀이다고 했다. 인간은 하나님 말씀을 떠나서 살 때 삭막한 삶을 살수 밖에 없다. 하나님 말씀을 떠나 사는 영혼은 목이 마른 삶을 살수 밖에 없다. 그러한 사실을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에서 인류에게 알리고 계신 것이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셨다. 하나님과 멀어진 예수님은 그 영혼이 너무나 목마른 것이다. 그 영혼의 목마름을 모든 사람들에게 깨달으라고 주님은 지금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성도 여러분 ! 육적인 목마름을 느껴 보았죠 ? 그러면 영혼의 목마름은 느껴 보았습니까 ? 육적인 목마름은 시원한 물로 해결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영혼의 목마름은 그렇게 쉽게 해결 할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혼의 목마름을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이 영혼의 목마름은 인간 스스로는 해결할 수가 없다. 아무리 부귀와 영화를 누리면서 풍족한 삶을 산다 할지라도 영혼의 목마름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술을 먹고 쾌락으로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해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하면 할수록 더욱 깊은 수렁 속에 빠져들고 만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이 목마른지 어떤 상태인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육적인 목마름은 잘 느낄수 있지만 영혼의 목마름은 내 영혼에 관심이 없다면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왕 솔로몬을 잘 안다. 솔로몬처럼 부귀 영화를 누리며 권세를 누렸던 왕도 없을 것이다. 다윗의 아들로서 아버지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 왕이 된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도 받았다. 그러나 그 솔로몬 왕이 부귀와 영화와 권세에 마음이 빼앗기고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고 말었다. 그의 인생은 그 부귀와 영화와 권세만 있으면 모든 인생이 다 될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자신의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솔로몬은 생애 마지막에 깨닫게 되었다. 그러한 솔로몬의 고백이 전도서에 기록되어 있다. (전1:2) \"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전2:11)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 성도 여러분 ! 우리의 영혼의 목마름은 하나님 말씀으로만이 해결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시기 바란다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인생은 그 어떤 방법과 수단으로도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다. 그 사실을 인간들에게 깨달으라고 주님은 지금 십자가에서 부르짖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아갈 때 그 영혼은 비로소 영적인 물을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물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만이 마실 수 있는 물이다. 예수를 믿지 않고서는 절대로 영적인 물을 마실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에 영혼의 갈급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그 영혼의 갈급함을 육적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들인가 ? 그러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은 지금 \"내가 목마르다\" 부르짖고 계신 것이다. 교회를 다니고 있는 성도들조차도 영적인 목마름에 갈급함을 느끼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왜 그러한가 ?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이 그 성도 영혼 속에 생수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도 그 갈급함을 해결해보려고 여기저기 쫓아다니다가 이단들에게 걸려들어 더 심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이 시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내 심령이 답답하고 갈급하다면 우리는 십자가에서 외치신 주님의 음성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내가 목마르다\" 영혼의 목마름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멀어질 때 찾아온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믿어야 할 것이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의 영혼의 목마름은 해결할 수 없다는 깊이 깨달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이 사실을 지금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신다. 두 번째 : 영적인 생수의 귀중함을 알자 (암8:11-12)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 사람들은 육적인 먹는 물만 귀중하게 여길 줄 알지 영적인 물에 대한 귀중함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육적인 물보다 영적인 물이 더 귀중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 때에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할 것이다. 그 말씀을 들으려고 몸부림쳐 보지만 얻지 못한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다. 어두움의 세력이 세상을 덮을 때 진리를 찾기 힘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부터 영적 생수인 하나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풍성하게 준비해 두어야 할 것이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라고 하셨다. 어떤 날인가? 세상의 끝날 즉 종말을 뜻하는 날이다. 마지막 때에는 기근과 가뭄으로 양식이 없고 먹는 물이 귀한 날이 올 것이라는 날이다. 육적인 양식이 없어서 먹는 물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한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이다.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 즉 말씀을 듣지 못해서 영적으로 허덕이며 죽어가는 모습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영혼의 목마름이 얼마나 중요한지 지금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다. 이 영혼의 생수가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지금은 말씀의 홍수 시대라고들 한다. 정말 말씀의 홍수 시대이다. 텔레비로도 말씀을 안방에서 24시간 들을 수 있고 인터넷을 통해서 말씀들을 마음껏 골라 볼 수 있고 서점마다 교회의 신문마다 말씀들이 들려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홍수 때 먹은 물이 귀한 것처럼 이 시대 정작 영적인 생수를 먹기란 그렇게 쉽지가 않는 것 같다. 영혼을 깨우는 설교들이 흔하지 않다.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교훈적이고 도덕적인 설교가 흔하다. 성도들 감정을 즐겁게 하려는 설교가 흔하다. 죄를 지적하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강한 설교는 드물다. 말씀을 깊은 생수를 퍼서 나누어주는 설교는 귀하다. 강한 설교를 하면 때리는 설교를 한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목사들은 사랑의 설교를 하는 쪽을 택하고 있다. 물론 사랑의 설교도 해야한다. 그러나 자식들은 사랑으로만 키운다면 올바른 자녀가 되겠는가 ! 오늘날 청소년들의 버릇없는 행동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 하나만 잘 낳아서 잘 기르자면 된다는 운동 때문에 자식들을 너무 귀하게만 여긴 나머지 사랑으로만 키운 탓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들이 자랄 때 얼마나 부모님들로부터 또는 학교 선생으로부터 호되게 꾸지람 들어가면서 때로는 매를 맞아 가면서 자랐는가 오늘날 학교에서 체벌이 사라진지 이미 오래되었다. 선생님들의 말을 동네 개소리보다도 우습게 아는 시대이다. 선생님들 입에서도 이제 교육자의 보람을 못 느끼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시대이다. 교회에서 사랑의 설교가 멎어서도 안되겠지만 죄를 강하게 지적해주고 지금 성도들이 어떤 상태인지 진단해 주는 설교가 필요한 시대이다. 병원에 온 환자가 수술해야 하는 환자라면 휼륭한 의사는 환자의 아픔을 생각지 않고 메스를 들고 수술을 할 것이다. 이 시대 메스를 들고 외치는 설교자들이 필요한 시대이다. 이사야 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하나도 없는 상태라는 것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강하게 선포하였다. 이 민족이 그래도 아직 소망이 있는 것은 그래도 곳곳에 영적인 생수를 나누어주는 교회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가까워질수록 영적인 생수는 찾기 힘들 것이다. 아모스 선지자는 그러한 사실을 지금 예언하고 계신다. 마지막 때에는 세상에 기근이 임할 것이다. 기근 때문에 농사를 짖지 못하니까 양식은 귀할 것이다. 또 기근이 심하니까 자연히 물도 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육적인 고통보다도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 바로 영적 생수를 구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사실을 지금도 우리가 느끼고 있다. 하나님 말씀은 60-70년 대에 비해서 말씀이 더욱 좋고 얼마든지 말씀을 듣고 보고 할 수 있건만 우리의 신앙은 60-70년 대에 신앙인들 보다 너무 못하다 것을 보게 된다. 무엇이든지 너무나 풍부하면 사람들은 귀한 줄을 모른다. 우리가 먹는 물도 지금은 어느 정도 걱정 없이 먹을 수 있으니까 물이 귀한 줄을 모른다. 지금 곳곳에서 퍼올린 생수 때문에 지하수가 고갈 상태라고 한다. 지금은 사람들이 물이 귀한 줄 모른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지하수 물이 서서히 썩어져 가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생수를 팔아먹는 사람들이 전국을 다니면서 생수가 나올 만 한 곳은 모두 시추공을 박아서 물을 뽑아내다가 물이 안 나오면 그대로 시추 구멍을 안 막고 방치해두니까 더러운 물들이 그 시추공으로 들어가서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있다. 서울 같은 경우는 지하수 95%가 식수로 부적합하다는 통계까지 서울시가 밝힌 적이 있다. 물이 없으면 자연히 농사는 짖지 못한다. 오염된 물로 농사를 짖지 못한다. 이러한 육적 물의 사건이 영적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물이 없으면 농사는 짖지 못하듯이 영적 세계에도 영의 생수인 말씀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의 농사는 짖지 못한다. 오염된 물로 농사를 짖으면 농작물이 다 죽어 버린 것처럼 영적 세계에도 하나님 말씀이 더럽게 오염된 말씀을 우리가 듣고 먹는다면 우리의 신앙도 죽고 말 것이다. 성도 여러분 !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 말씀을 소중하게 귀하게 여겨야 할 때이다. 육적인 물의 귀중함을 안다면 영적인 생수도 귀중한지 알아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들려지는 하나님 말씀이 너무 풍부하고 귀중함을 모르고 있는데 언제인가는 이 말씀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게되는 날이 올 것이다.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하나님 말씀을 귀중하게 여겨야 한다 우리의 생명을 걸고 말씀을 지켜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그 고통 속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신 것은 성경을 응하게 하게 하시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으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시면서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기도 하셨다. 하나님 말씀에 귀중함을 아는 자는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간다. 그 누구의 말보다도 하나님 말씀을 최우선으로 알고 살아간다 예수님은 이 영적인 생수 말씀의 소중함을 공생애 때와 십자가 위에서 만 하신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사망 권세 이기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한번 영적인 생수인 말씀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부활 승천 하셨다.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하시니라 \" 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 하리라는 말씀만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예수님과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 예수님이 함께 하길 원하신다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켜야 만이 함께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말씀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예수님도 우리와 세상 끝까지 할 수 없다 (신6:6-9)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 성도 여러분 ! 하나님 말씀이 여러분 마음에 새기어 있습니까 ? 가정에 말씀하나 이상 걸어놓고 보고 계십니까 ?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있습니까 ? 어디서나 말씀을 전하고 있으십니까 ? 내 모든 행동이 말씀을 생각하며 생활하고 있으십니까 ? 성도 여러분 !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할 날이 올 것이다.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할 날이 올 곳이다. 육적인 목마름 고통 때문에 지금 예수님이 \"내가 목마르다\" 부르짖고 계신 것이 아니다. 죄악으로 인해 영혼들이 하나님 말씀을 귀중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목마른 고통을 당할 것을 지금 예수님은 부르짖고 계신 것이다.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 영혼들의 목마름을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신다. 영적의 생수가 얼마나 귀중한지 지금 우리에게 주님은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으로 알려주고 계신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예언하고 있다. 그날에 영적인 생수를 얻기 위해서 동서 사방을 헤매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성도 여러분 ! 지금이 그 생수를 준비할 때이다. (요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 세 번째 : 물을 조심하자 ! (계8:11)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 육적인 물도 잘못 먹으면 배탈이 나고 죽기까지 할 수 있다. 영적인 물도 잘못 먹으면 우리의 영혼이 죽고 만다. 마지막 때에는 이 타락의 쑥물이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죽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물을 잘 분별해서 먹어야 말 것이다. \"별\"은 계1:20절에서 교회의 사자라고 했다. 그런데 이 별의 이름이 쑥이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다. \"쑥\"은 곧 타락한 말씀을 의미한다. 물은 말씀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 물로 인해 삼분의 일이 쑥이 되고 이 쑥물로 인하여 삼분의 일이 죽을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 이것은 곧 타락한 말씀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는 예언이다. 물은 이처럼 영의 세계나 육의 세계에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므로 물이라고 해서 다 물이 아니다. 즉 말씀이라고 해서 다 말씀이 아닌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본문에 나오는 쑥 물은 타락한 말씀이다. 주님도 이 타락한 말씀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마24:11-12)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 (마24:23-24)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 거짓 선지자들이 표적과 기사로 미혹하지만 결정적인 미혹은 그들이 전하는 말로 사람을 미혹하게 될 것이다. 이 시대 언제부터인지 하나님 말씀이 이상하게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전하면서 모두 이 땅에서 누리는 축복에 말씀의 초점이 맞추어 지고 있다. 물론 구약의 복은 물질의 복을 강조하고 있는 것 사실이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그 복의 개념을 주님의 첫 설교이자 산상설교에서 주님은 완전히 바꾸어 주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복의 개념을 이 땅에서 받는 복의 개념으로 말씀을 해석하고 있고 전하고 있다. 신약에 와서 어디에 육적인 복을 강조하고 있는가 ? 아직도 물질의 복만 추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구약시대에 살고 있는 자 일 것이다. 지금은 은혜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은혜시대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인 자가 되어 영적인 복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인지 이 땅에는 예수를 믿는 것이 마치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으려고 하고 있다. 참으로 위험스러운 가르침이고 신앙인 것이다. 이 땅에서 기복주의의 신앙 가르침이 떠나야 할 것이다. 성도 여러분 ! 우리가 원하는 복은 육적인 복이 아니다. 먼저 영적인 복을 받아야 할 것이다. 영적인 복이 이루어지지 않고 육적인 복만 받는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고 저주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주님의 산상 설교 팔복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그 어디에도 육적인 물질의 복을 찾아 볼 수 가 없다. 물론 우리가 물질의 복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다. 물질의 복도 우리가 하나님으로 받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의 중심이 물질의 복을 추구하기 위해 가르치고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은 쑥의 물을 주고 있고 쑥의 물을 먹고 있는 것이다. 기복주의도 문제이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신비주의다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다. 사람으로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적인 사건이 성경에도 많고 개인의 신앙에도 많이 있다. 이러한 신비적인 것만을 쫓는 신앙이 신비주의자들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고칠 수 없는 병 고칠 수 있다. 저도 폐병 말기에서 고침 받은 자이다. 그러나 신앙의 모든 면을 그런 신비적으로만 해석하고 쫓는 다면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전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고 그 말씀만 받아먹는 자는 영적인 생수를 잘못 먹고있는 것이다. 즉 쑥 물을 전하고 있고 쑥 물을 먹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분명히 여기에 대해 말씀하셨다. (마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불법을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가르치지 아니한 것이 불법이다. 마지막 때에 이러한 쑥 물이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을 죽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을 분별해서 먹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은사 중에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가 있다. 마지막 때에 그 어떤 은사보다도 중요한 은사가 될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분별하는 은사를 받아야 할 것이다. 요즈음 약수터를 가면 그 물의 수질에 대한 검사를 기록한 글을 보게된다. 그 검사를 보고 사람들은 안심하고 물을 떠와서 먹는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 말씀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분별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무조건 말씀이라고 해서 아멘 하고 다 받아먹어서는 안된다. 마지막 때에 거짓 무리들과 적 그리스도는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한다고 (단7:25) 말씀 하셨다. 마지막 때에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 판을 칠 것이다. (고후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말씀을 분별 못하는 자들은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다 믿고 따를 것이다. (갈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 다른 복음으로 우리가 믿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고 믿는 자들의 심령을 요란케 할 것이다. 말씀에 굳건히 붙잡히지 않으면 모두 미혹 받고 말 것이다. (갈1:8)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 우리 지역에 요상한 이단들이 판을 치고 있다. 일명 박무수 집단들이다. 이들은 회개를 4단계로 나누어서 하도록 가르치면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죄를 사함 받지 못하고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해야만이 죄가 사함 받고 구원받는 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들은 다른 이단들의 특성처럼 기성 교회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가장 많이 미혹된 교회 성도들이 있는 교회에 전화를 걸어 목사에게 알려주었지만 그 교회 담임 목사는 박무수가 누구이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박무수 집단들의 모습은 마치 중세 시대에 예수님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논쟁을 벌였던 단일론을 주장하는 자들이다. - 13 - 단일론은 예수의 인성은 인정하지 않고 신성만 인정하는 신학인데 단일론 주장은 A.D451년 칼케돈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박무수 집단에 빠진 자들은 빌립보서 말씀을 잘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빌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 성경 어디에 그리스도만이 고백해야 구원이 있다고 하는 데가 어디 있는가? 오히려 예수라는 이름을 더 증거하고 있다. 이 시대 다른 복음이 믿는 자들을 미혹하고 있다. 이 땅에 기복주의 설교가 판을 치고 있고 신비주의 설교와 신앙이 판을 치고 있고 거짓 선지자들이 판을 치고 있다. 물을 조심하자 ! 물이라고 해서 다 물이 아니다. 말씀이라고 해서 다 말씀이 아니다.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시는 주님의 부르짖음은 영적인 생수를 마지막 때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전하고 계신다. ( 결 론 ) 운명하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하신 제5언의 \"내가 목마르다\" 하신 주님의 음성은 단순한 육적인 목마름을 우리에게 전해주신 말씀이 아니다. 죄의 결과 나타나는 영적 목마름에 대해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지금 가르쳐주고 계신 것이다. 얼마나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이 영적 목마름에 고통 당하고 있는지 모른다.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조차도 이 영적 목마름에 시달리고 있다. 목마름 때문에 헤매이다가 이단들에게 미혹되는 것 목사들의 책임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주님께 엎드리고 연구해서 생수를 먹여서 하나님의 양들을 잘 양육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는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영적인 생수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 14 - 육적인 먹는 물 생수도 이제 오염되어서 생수도 맘놓고 못 사먹는 시대가 되었다. 영적인 세계에도 이제 우리가 마음놓고 먹을 수 있는 영적 생수가 그렇게 흔하지 않은 시대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 육적 목마름에 대한 고통은 우리가 쉽게 해결할 수 있지만 영적 목마름은 우리 스스로 해결 할 수가 없다. 왜 영적 목마름이 우리를 찾아오는가 ? 죄 때문이다. 죄의 결과가 우리의 영혼을 목마르게 한다.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 하고 죽으신 예수는 그 죄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지금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영혼의 목마름 해결은 이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께 나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생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에 채워야 할 것이다. (요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성도 여러분 ! 오직 예수 안에서 주님의 주신 생수를 매일 매일 여러분의 영혼에 공급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신 주님의 제5언의 부르짖음을 잊지 말기를 축원합니다.
가상칠언 중 제6언(架上七言 中 第六言)/ 요19:30-/ 2002-04-03
가상칠언 중 제6언(架上七言 中 第六言) 요19:30- ( 서 론 ) 모든 성경의 기초는 창세기 1:1 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그리고 성경의 결론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계22:20)이다. 이러한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말씀은 무엇입니까 ?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성경의 핵심이 되시고 주인공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고 소리치고 계신 것이다. \"다 이루었다\" 가 외치신 곳이 어디입니까 ? 십자가 위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란다.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고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할 일을 다 마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죽어가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그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소리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 어느 때에도 \"이루었다\" 라고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고치고 기적을 나타내실 때에도 주님은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십자가 위에서 가장 비참한 가운데서 주님은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신 것이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 라고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까 ? 1. 인류의 구원이 십자가에서 온전히 다 이루어 졌다는 것을 예수님은 지금 온 세상에 선포하고 계신 것이다. 2. 사탄의 머리가 깨뜨려 지고 영적 싸움이 끝나는 것을 알리고 계신다. 3.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수 있는 길이 이루어 진 것을 알리고 계신다. 우리의 신앙에 이 3가지의 놀라운 구원의 복음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첫 번째 : 인류의 구원의 길이 이루어졌다. (사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성경 중에서 예수께서 인류를 위해 죽으실 것을 가장 세밀하게 예언한 곳이 바로 이사야 53장 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너무나도 자세히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정확하게 예언하였다. 700년 후에 일어날 메시야의 죽으심을 이렇게 정확하게 기록하였는데도 사람들이 믿지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무지하고 미련한가 ? 이러한 말씀을 믿지 못하고 구원의 길로 들어서지 않는다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이 지금 십자가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면서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렸는데도 구원의 문으로 들어서지 않는다면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찔림은\"이라는 말씀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못에 찔리시고 창에 찔리신 것을 예언 한 것이다.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이라는 말씀도 우리의 잘못.실수를 주님이 십자가에서 감당하실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그가 상함은\"이란 말씀도 예수님이 채찍으로 가시로 못으로 창으로 몸이 찢기고 만신창이가 될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이라는 말씀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실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이라는 말씀도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저주를 당하실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이라는 말씀도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저주를 감당 하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라는 말씀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아픔이 있었기에 우리가 영혼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구약에 수많은 제사에서 짐승의 피를 번제단에 지성소에 뿌려야만 죄가 사함 받고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셨는데 그것이 모두 무엇을 예표한 것이었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예표한 것이었다. 창3:15의 말씀도 누구를 두고... 어떤 사건을 두고 말씀인가?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단의 머리가 깨뜨려 졌다. 이 말씀이 지금 십자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선지자들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들이 지금 십자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예수님은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모든 예언들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 동안 죄로 인해 하나님과 가로막혀 있던 담이 이제 예수님의 죄의 대속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 진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더러운 허물이 지금 십자가에서 온전히 다 씻어져 버렸다. 인간의 허물이 아무리 인간이 도를 닦고 선을 행한다 할지라도 씻음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인간의 더러운 허물이 십자가의 피로 깨끗하게 이루어 진것이다. 인간들의 죄가 얼마나 악하고 많은 죄를 저지르고 살고 있는가 태어나서부터 무수한 죄를 지어온 인간들의 죄를 인간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다. 인간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그 죄를 해결해 보려고 했지만 더욱 죄만 가증 시킬 뿐 죄를 해결 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 죄악의 사슬이 십자가에서 주님이 몸 찢고 상하심으로 끓어졌다. 이제 누구든지 십자가 앞에 나와서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어떤 죄악도 용서함 받고 하나님 자녀로서 구원받은 자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놀라운 일이 지금 십자가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죄악 속에서 죄의 포로가 되어 참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주님은 지금 참 평안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서 일을 이루고 계신 것이다. 참 평안이 이루어 졌음을 지금 주님은 선포하신 것이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세상 어느 곳에서 참 평안을 얻겠는가 ! 세상의 어느 것으로 참 평안을 얻을 수 있겠는가 ! 십자가에서만이 참 평안이 있고 소망이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 우리의 허물이... 우리의 죄악이..... 우리의 불안 공포가... 우리의 아픔과 질병이 ..... 우리의 영혼이 ..... 십자가에서 사해졌고 치료가 되었고 구원이 이루어 진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 \" 하시고 운명하시자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버렸다. 십자가에 매달릴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지 아니했다. 십자가에서 온 몸의 물과 피를 다 흘리시고 모든 것을 다 이루신 후에 \"다 이루었다\" 소리치신 후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구원의 사역을 다 이루었다는 증거다. 지성소는 죄인이 볼 수 없었다. 일년에 한번 들어가는 대제사장도 속죄제를 드리지 아니하고 지성소에 들어간 자는 죽임을 당했다. 구약에 하나님께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에 짐승의 피흘림이 없는 제사는 하나님은 받지 아니했다. 가난한 자가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짐승의 피를 흘려야만 했다 산 비들기라도 잡아서 피를 흘려야만 죄가 사함 받았다. 죄에 대한 용서에는 반드시 피 흘림이 있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그 하나님의 깊은 듯이 지금 십자가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수많은 짐승들이 피를 흘리며 비명을 지르고 짐슴들의 내장을 파헤치고 쏟아지는 그 피가 바로 십자가에서 인류를 위해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 모든 예표적으로 행해졌던 것들이 십자가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인류의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조건도 없다. 구약 때처럼 짐승을 바쳐야 하는 것도 없다. 구약 때처럼 어떤 절차가 필요 없다. 누구든지 십자가 앞에 나와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가 사함 받고 구원받는 것이다. 이 놀라운 역사적 사건이 지금 십자가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오직 예수 한 분으로 인해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오직 예수 한 분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다.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이 구원의 길이 이제 예수로 말미암아 이루어 졌다. 그 어느 누구도 이 구원의 길을 이룰 자는 없다. 오직 예수만이 이 길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었던 죄의 문제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해결되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지금 \"다 이루었다\" 고 외치신 것이다. 구약의 모든 예언이 이 한 순간을 기다리며 기다려 왔다. 사단의 머리가 천갈래 만갈래로 박살나는 순간이 바로 이 순간이다. 우리는 이제 자신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죄의 종이 되어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를 위해서 \"다 이루었다\" 라고 소리치신 예수님의 음성을 잊지 말고 세상 속에서 담대히 죄와 싸워야 할 것이다. 우리의 어떠한 죄라도 예수의 피로써 다 사함 받았다. 우리는 이제 죄의 포로가 아니다. 예수의 포로다.. 성령의 포로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이 믿음의 역사가 여러분의 믿음 위에 심령 위에 항상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 영적 싸움이 끝난 것을 알리고 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 모든 인간은 남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났지만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났다. (마1:20-21)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땅에 오셨다. 여자의 후손만이 사단의 세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 와야만 영적 전쟁은 끝나는 것이다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라는 자는 곧 사단이다.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라는 여자는 예수를 잉태한 자를 의미한다. \"너의 후손\"은 곧 사단의 자식들을 의미하고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은 사단의 권세가 무너질 것을 의미하고 있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말씀은 십자가에서 사단이 예수를 찌르고 온 몸을 갈기갈기 찢고 몸의 물과 피를 다 쏟게 했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에 불과했다. 창세 때 이미 예수로 인한 구원의 사역을 하나님은 계획하고 계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사단의 세력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반대로 사단의 머리가 깨뜨려지는 순간이었다. 창3:15 절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성경은 유다에게서 메시야가 태어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창49: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 (창49: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 이러한 메시아는 또 다윗의 혈통을 이어 받어야만 되었다. 성경은 그렇게 예언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다윗의 혈통을 이어야만 되었다. (사22:22) \"내가 또 다윗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 (렘23: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 이러한 성경의 예언된 족보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셨다. 마1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의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시면서 족보는 유다의 족보를 가지고 이 땅에 성경의 예언대로 오셨다. 성경의 예언대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비록 비참하게 죽으셨지만 그것은 곧 정해진 주님의 죽으심이었다. 아담 이후 얼마나 사단이 인간들을 가지고 놀았는가 ! 메시아가 이 땅에 태어나지 못하기 위해서 얼마나 방해를 하고 사람을 죽였는가 ? 메시아는 유다의 혈통과 다윗의 혈통을 이어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다. 야곱이 죽으면서 12아들 들에게 예언을 하였는데 유참하게 죽으셨지만 바로 그것은 사단의 머리가 깨뜨려지고 사단의 권세가 끝나 버리는 것이다. 사단이 아무리 무섭게 날뛴다 할지라도 이제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할 때 사단의 힘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지 아직도 예수 밖에 있는 자들을 사단은 미혹하고 아직도 조금 남은 악의 권세를 사용하고 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예수님은 지금 사단의 머리가 십자가에서 박살 났다는 사실을 알리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의 세력을 두려워하지 말고 싸워야 할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하나님이시다.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 우리의 영적 싸움은 이미 결판이 난 싸움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사단에게 무장해제를 시켜 버렸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멋대로 살아도 되는가 ? 아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사단의 권세가 다 꺽이고 무너졌지만 우리가 죄를 짖고 십자가 예수를 떠난 삶을 산다면 사단의 다스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육을 입고 있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사단과 싸워야만 한다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 영적 싸움에서 패배한 사단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는 한 우리의 영은 건들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육은 계속해서 공격하고 미혹한다. 이 육의 공격에 우리가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하면 이러한 육의 공격이 아무것도 아니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성령 충만 할 때 사단의 어떤 강한 공격도 종이 칼에 불과하고 솜 방망이에 불과 한다. 종이 칼이 진짜 칼처럼 아무리 무섭게 만들어 졌다 할지라도 그 칼이 종이 칼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하나도 안 무섭고 오히려 웃음만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 신앙을 가진 자는 종이 칼만 보아도 무서워 울 것이다. 솜 방망이도 아무리 강하게 무섭게 보이게 만들었다 할지라도 솜 방망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아이 신앙을 가진 자는 솜 방망이을 보고 질겁을 하고 벌벌 떨게 된다. 성도 여러분 !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 아니면 하나님보다 마귀를 더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 성도 여러분 ! 우리는 오직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을 때 사단의 세력이 맥을 쓰지 못하는 것이지 예수를 떠나면 우리는 사단의 이빨 빠진 세력에도 넘어질 수밖에 없고 종이 칼만 보아도 무서워 떨고 솜 방망이만 보아도 무서워 떠는 자가 될 것이다. 성도 여러분 ! 사단의 머리가 박살 났다고 지금 주님이 외치고 계신다. 왜 외치고 계십니까 ? 이제 기쁨을 가지고 소망을 가지고 평안을 가지고 복되게 살으라는 것이다. 사단에 잡혀서..... 죄악에 잡혀서 이제 살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다 이기었다\" 고 주님은 외치고 계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뒤만 따라가면 된다. 예수님만 놓치지 말고 따라 가기만 하면 된다. 세상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이미 싸움은 끝났다. 마귀와의 전쟁은 이미 끝난 전쟁이다. 예수님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날마다 성령 충만하여 우리의 육을 공격하는 사단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내가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치신 주님의 음성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한 메시아의 음성이었다. 사단의 패배를 알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다. 사단의 머리가 박살났다는 것을 알리는 음성이다. 인류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시는 주님의 음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예수 안에서 마땅히 승리하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세 번째 :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을 알리는 말씀이다 (요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모든 인류를 구속하시고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시기 위함이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제자들에게만 10번 정도 나타나셔서 제자들의 믿음을 강하게 하여 주셨다. 그리고 500명의 무리가 보는 가운데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셨다. (고전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500명의 무리들은 정신을 잃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때 천사들이 (행1:11)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 하였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이 말씀은 곧 우리의 처소가 이 땅이 아니라는 것을 주님이 말씀하고 있다.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이 말씀은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실 것을 의미하고 있다.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을 뜻하는 말씀이다.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으십니까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신 분이시다. 그러신 분이 무엇을 만들어놓고 또 말씀을 하여놓고 이루지 못했다면 전능하신 분이 아니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영혼도 구원하시기 위함도 있었지만 또 하나도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되찾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한 말씀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누구든지 예수만 믿기만 하면 이제 그들의 영혼은 이제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 하므로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에덴동산에서 쫓김을 당하고 말았다. 그 에덴 동산을 하나님은 천사들과 화염검으로 지키시고 인간들에게 감추어 버렸다. 그 에덴 동산이 다시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은 두 번째 아담 되신 예수가 다시 오셔야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실낙원이 복낙원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가 오셔야만 된다. 바로 그 복낙원이 우리가 휴거받고 예수임과 천년동안 왕 노릇할 천년왕국이다. 천년왕국은 절대 영적인 일이 아니다. 계시록은 장차 될 일이라고 약 8번 거듭 거듭 밝히고 있다. (계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 (계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 요한 계시록에 모든 사건은 영적 사건이 아니다 반드시 마지막 때에 될 사건들이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은 잃어버린 에덴동산이 다시 복원되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그 역사적 사건을 \"다 이루었다\" 라고 예수님은 지금 외치고 계신 것이다. 그 천년왕국에서 아담에게 주었던 다스리는 권세와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이 실현될 것이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아담에게 권세를 주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아담이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사단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 권세를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시 찾아야 되는데 바로 그 날이 천년왕국에서 우리들이 왕노릇하는 날이다. (롬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그러나 이 왕노릇은 그냥 되는게 아니다. 아담이 사단의 유혹에 빠져서 권세를 빼앗겼듯이 우리도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 져버리는 자는 왕의 권세를 가질 수 없다. 왕의 권세가 무엇인가 ?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권세다. 그 권세를 우리가 믿음으로 싸워서 이길 때 천녀왕국에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권세를 받게되는 것이다. (딤후2: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계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 믿음으로 싸워 이겨야만 왕노릇 할 수 있다. \"그것이 알고싶다\" T.V 프로에서 J.M.S (정명석) 이단 단체가 폭로된 것을 본적이 있었다. 정명석에게 많은 여성들이 미혹되었는데 특히 어떻게 여대생들이 소위 대학을 다니는 엘리트들이 저렇게 미혹 될 수 있을까 ? 생각할 수 있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정명석의 성적 도구가 되어서 정명석을 재림 예수로 알고 따르는 저들이 너무 불쌍할 뿐이다. 어떻게 저럴 수 있겠는가 ? 사단의 권세를 받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미혹된게 아니다. 정명석의 배후에 있는 사단의 세력에 그 많은 여자들이 미혹된 것이다. 예수님이 40일 금식이 끝나자 사단은 조용히 예수를 찾아와 유혹했다. (눅4:5-6)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단이 아담에게 이 권세를 넘겨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권세를 예수께 주겠다고 유혹한 것이다. 그 동안 예수를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지 모른다. 모든 이단들의 교주들이..... 자칭 재림 예수라는 자들이 모두 한 때는 예수를 위해서 충성하고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버린 것이다. 한국에 가장 자칭 재림 예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다고 한다. 36명이나 자칭 예수라는 자들이 있다고 한다. 성도 여러분 !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외치고 계신다. 이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우리에게 왕의 권세를 주실 수 있는 길이 이루어졌다고 예수님은 지금 외치고 계신다. 세상이 주는 권세 참 권세가 아니다. 세상이 주는 명예 참 명예가 아니다. 세상이 주는 부귀 영화 다 헛것들이다. 이제 주님이 곧 오실 것이다. \"다 이루었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이제 실현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 질 것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 모두 그 날에 그 영광스러운 날에 모두 주님과 함께 이 땅에서 왕 노릇하는 권세를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속히 오십니다 \" ( 결 론 )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일을 다 마치고 죽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화려한 욕망과 꿈을 이루지 못한채 인간들은 지금도 죽어간다 자신의 인생의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간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온전히 다 이루시고 죽으셨다.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말씀을 하지 못하고 죽으셨다면 구세주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다 이루었다\" 는 것은 어떤 것 하나라도 못 이룬 것이 없다는 말씀이다. \"다 마쳤다.. 다 끝냈다\" 라는 말씀이다. 진정코 주님은 다 이루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주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오셨다\" 고 하셨다. 그 율법이 지금 십자가에서 온전히 다 이루어 진 것이다. 인간들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렇게 애타시던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이 지금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이루어 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 구원을 이제 방해 할 자가 없는 것이다. 완전 무결하게 이루어 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완전한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란다. 우리가 예수를 뜨겁게 믿고 예수 안에만 거하면 어떤 사단의 공격도 두렵지 않다. \"다 이루었다\" 라는 말씀이 믿어지면 사단의 세력 앞에 우리는 두려워 떨지 아니 할 것이다. 영적 전쟁은 이미 예수님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제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서 천년왕국에서 왕노릇 권세를 받기 위해서 믿음을 더욱 키우고 그리스도의 신부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야 할 것이다. \"다 이루었다\" 라고 온 우주에 선포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주님 오시는 그 순간까지 잊지 마시고 예수님만 의지하고 예수 안에서 매일 매일 승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가상칠언 중 제7언(架上七言 中 第7言)/ 눅23:46-/ 2001-11-20
가상칠언 중 제7언(架上七言 中 第7言) 눅23:46- ( 서 론 ) 십자가 7언 중 3번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였는데 첫 번째 하신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기도였고 네 번째 하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기도와 이제 마지막으로 하신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기도하셨던 것이다. 주님의 생애는 기도하는 생애였다. 주님은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치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직접 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셨다 기독교 신앙 생활 가운데 없어서는 안될 것이 기도 생활이다. 기도는 아무 강조해도 부족함이 있는게 기도다. 기도처럼 어려운 것도 없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까지 .... 우리의 숨이 끓어지는 순간까지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멈추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러한 기도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다시 한번 가르쳐 주고 계신다.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가 ?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만 한다. 예수님의 이 짧은 기도 내용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영혼이 중요한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인류에게 영혼의 중요성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지금 알려주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고 계신다. 우리는 짧은 주님의 기도 속에서 3가지로 살펴보자. 1. 영혼의 중요성을 깨닫고 살아가야 한다 2. 우리의 영혼이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버지 관계가 되어야 한다. 3. 나 개인의 영혼을 위해서 우리는 끝까지 기도를 잃지 말아야 한다 첫 번째 : 아버지여 내 영혼을 ........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고 있다. 우리의 육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온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 온 것도 우리 마음대로 못 왔듯이 돌아갈 때도 우리 마음대로 갈 수도 없고 돌아가야 할 곳도 마음대로 우리가 정할 수 없다 그러한 사실을 지금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다. 예수님도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했는데 우리는 어떠하겠는가 ? 우리도 마땅히 우리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여야 할 것이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증거하고 계신 것이다. 인간의 방법과 수단으로 아무리 선한 행위를 한다 할지라도 인간 스스로는 영혼을 구원받을 수 없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육이 구원받습니까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 우리의 육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돌아가는 곳이 따로 있는데 예수 믿는 자는 천국으로 갈 것이지만 예수를 믿지 않은 자는 지옥으로 갈 것이다. 그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 아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 믿고 살아 갈 것이지만 영혼이 중요한지 모르는 자는 육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구약에 육적인 복의 개념을 영적인 복의 개념으로 바꾸시는데 중점을 두셨다. 그 대표적 인게 산상 복음에서 팔복에 대한 복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셨다. 구약에서의 복의 개념은 육적인 복이 개념이었다. 그러나 신약에서의 복의 개념은 영을 위한 즉 영혼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구약적인 육의 복의 개념을 버리지 못하고 신앙 생활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리의 육적인 생활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생활... 영혼을 위한 삶이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깨닫고 알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왜 삽니까 ? 흔희들 이런 말을 한다.. 먹기 위해서 사는 건지 ....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인지 ........ 그러나 결국 두 말은 똑같은 의미다. 먹는다는 것은 육을 위해 사는 자들의 모습이다. 물론 우리가 안 먹고는 못 산다. 그러나 육적인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영혼을 위해 사는 것이다. 이 시대 영혼의 중요성을 너무나도 모르고 살아가고들 있다. 전도하면 지옥가도 좋다고 서슴없이 떠든다. 영혼이 어디 있냐고 까지 떠든다 예수를 믿는 자 들조차도 영혼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 그것은 영혼보다는 육을 위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 내용을 잘 살펴보면 더욱 알 수 있다. 우리의 기도 내용이 대부분 육을 위한 기도가 되고 있다는게 그 사실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하셨는데도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주님의 가르친 기도와는 반대로 하고 있지 않은가 ! 성경 그 어디에도 영보다 육을 더 중요시 한 곳이 없다. 성경은 철저히 영혼을 위해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 반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요삼1:2) \"사랑하는 자여 !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 하노라 \" (롬8:6-8)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 육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지금 주님은 영혼의 중요성을 다시 십자가에서 재인식 시키시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10:28) 에서도 육보다 영혼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도 하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 \" 그런데도 우리는 육을 죽이는 것에 더 무서워하고 있고 영혼에 대한 것은 무관심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 고난 주간에 다시 한번 영혼에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내 영혼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그 어떤 것보다 귀하다 천하보다도 우리의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이시다. 성도 여러분 !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사는 것이 참되고 귀한 것인지 깨달아야만 한다. 육을 위해 사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될 뿐만 아니라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느끼고 소망 삼고 살아가는 것은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중요하게 여기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다. ( 예 화 ) 한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 되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자 그의 어머니는 이것들을 최대한으로 설명하여 그 아이를 이해 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안과 수술로 명성이 있는 어느 의사의 소식을 듣고 아들을 데리고 가서 의사에게 수술을 받도록 했다. 수술이 성공리에 끝나서 드디어 그 아이는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그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게 되었고, 그 다음으로는 창가에 가서 아름다운 꽃들과 풀밭과 공중의 새들과 나무들을 보고는 엄마의 품속에 달려가 말했다. \"어머니,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 내가 살고 있다고 왜 진작 말씀 해주시지 않았어요?\" 라고 하자 그의 어머니는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얘야, 너에게 그것에 대해 수없이 이야기 해주었지만 네가 느끼지 못했단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성도 여러분 ! 아름다운 천국을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어서 천국에 대한 것을 들어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혼을 중요시하고 귀하게 여기며 사는 자는 영혼의 눈으로 믿음의 눈으로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 이렇게 멋있는 천국을 왜 진작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성도 여러분 ! 영혼의 귀함을 깊이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 아버지 손에 ..... 우리의 영혼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 손에 달려 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영혼을 붙잡아 주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너희들의 공로로 너희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고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신다. \"아버지 손\" 이 손은 구원의 손이다. 이 구원 손이 이제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은 반드시 십자가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손을 뻗치신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지금 인류에게 알리고 계신 것이다. 인간의 어떤 손도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수는 없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저는 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지금 어렴풋이 그 아버지의 손을 기억해보면 손이 굉장히 큰 손이었다는 것이 생각난다. 육신의 아버지의 손은 항상 따듯하고 너무나 커서 잡기만 해도 두려울 것이 없게 느껴지는 그런 손이다. 하나님 손은 그 어떤 손보다도 안전한 손이다. 우리가 하나님 손만 붙잡고 살면 무서울 것이 없다. 우리 육체에 사망의 어둠이 덥친다 할지라도 하나님 손에만 붙잡혀 있다면 우리는 무서울 것이 없다. 시편 기자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하나님 손에 우리가 붙잡혀 있다면 그 어떤 세력도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 (요10: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 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 아버지의 손은 전능하신 능력의 손이다. 그 손으로 우리를 흙으로 만드셨고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서 사람이 되게 하신 분이시다. 지금 예수님은 그 하나님 아버지의 손이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실 것을 나타내 보이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은 반드시 십자가를 통해서만 역사 하신다. 십자가를 떠나서 아버지의 손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으신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손길을 느끼고 싶으십니까 ? 십자가 밑으로 나오시기 바란다. 십자가 밑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은 우리의 찢겨진 몸과 마음을 쓰다듬어 주시고 치료하여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신 예수의 몸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다. 마귀의 자녀들로써 지옥 갈 수 없던 우리를 사랑의 손길로 붙잡아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아버지의 손을 여러분은 붙잡고 계십니까 ? 그 아버지의 손을 날마다 의지하고 살고 계십니까 ? 미국의 흑인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힘든 흑인 자유 운동을 하면서 이 찬양을 자주 불렀다고 한다 ( 찬 양 )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악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퐁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단 한시도 아니 일초라도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잡아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악의 무리에 빠져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 예 화 ) 한 무리의 단체 관광객들이 산 정상을 향해 등반을 하던 중 문제의 지점에 도착했다. 안내자가 제일 먼저 벌어진 틈을 훌쩍 뛰어넘어 갔지만 다음 사람은 겁에 질려 주저하고 있었다. 안내자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겁에 질린 그는 걱정스럽게 그 손을 쳐다보며 망설였다. 그러자 안내자는 검게 그을린 자신의 손을 흔들며 \"선생님은 아무 걱정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손은 이제 것 그 누구도 떨어뜨려 본 적이 없습니다 ! \" 라고 외쳤다. 예수님과 함께한 우리의 인생도 역시 산마루 등정과 다를 바 없다. 예수님과 나 사이에 등산용 밧줄로 서로를 꽁꽁 묶고 난 후, 때때로 가파르고 위험한 길을 지나가지만 주저한다. 낙심한 심정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 성도 여러분 !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전적으로 믿고 살고 있으십니까 ?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 위에서 그 능력의 손 .. 구원의 손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신다. 그 손을 붙잡고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 : 부탁하나이다 !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주님의 음성이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고 계신 것이다.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가 ?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 지금 부탁하고 계신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 \"부탁하나이다\" 한 영혼이 구원받고 못 받고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뜻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인류에게 지금 가르쳐 주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사신 분이 누가 있겠는가 ? 그런 예수님도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고 계신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겠는가 ?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드린 삶을 살고 계십니까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는 세상에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부탁을 하면서 살아간다 돈을 좀 빌려 달라.... 잘 좀 봐 달라..... 세상에서뿐만 아니다 .... 신앙 생활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부탁을 하며 살아간다. 문제를 해결 해달라고도 하고 ....... 병을 고쳐 달라고도 하고..... 자녀 문제... 남편 문제..... 가족 형제 문제.... 사업 문제....등등 수 없이 하나님께 부탁을 드리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부탁은 우리가 드리고 신앙생활 하는지 생각해 보자. 여러분의 영혼 하나님께 얼마나 부탁 드려 보았습니까 ?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실 것이라고 믿고 계십니까 ? 물론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에서 그 고통 가운데서도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는 모습을 왜 보이셨을까요 ?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드리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할 것이라는 신앙과 ...... 하나님께 내 영혼을 부탁 드리며 사는 신앙 ..... 어떤 신앙이 바른 신앙이 되겠습니까 ? 우리들의 문제만 부탁 드리는 그런 신앙인들이 되지 말고 내 영혼을 한번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께 부탁 드리는 신앙을 가지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죽을 때 예수님처럼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아무나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온 자만이 떳떳하게 하나님께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하게 될 것이다. 스데반 집사도 순교 직전에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고 순교하였다. 예수님의 생애처럼 우리가 거룩하게 살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진실 되게 참되게 살아갈 때 이 땅을 떠나는 마지막에 내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할 수 있는 자가 될 것이다. 내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 할 수 있다는 것은 영혼을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의 영혼이 죽어서 어느 곳으로 가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이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에는 관심도 없을 것이고 또 하나님께 영혼을 부탁하는 것도 하지 안 할 것이다. 성도 여러 분 !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 아는 자들이다. 알고 계십니까 ?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을 믿으십니까 ? 죽으면 천국에 갈 영혼과 지옥에 갈 영혼으로 갈리지는 것 아십니까 ? 어디로 가는 영혼이 되길 원하십니까 ? 지옥에 가고 싶을 영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옥에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영혼들도 많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 전도하면 지옥에 가도 좋다는 자들은 가끔 만나는데 몰라서 그러는 건지 미련해서 그러는 건지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많이 있다. 성도 여러분 ! 왜 주님이 영혼을 부탁하는 마지막 외침을 우리에게 왜 들려주고 계신지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영혼 진실로 우리는 부탁드리고 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내 영혼을 매일 매일 하나님께 부탁 드리며 살아야 할 것이다. 요즈음 얼마나 불식간에 사고가 많이 일어납니까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 10분 후에 ..... 1시간 후에 죽을지도 모르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제 매제는 5년 전 대 낮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삼각지 로타리에서 자동차와 3중 충돌을 일으키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날이 수요일이었는데 죽기 전 3시간 전에 나랑 전화 통화했는데 그 전화가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도 그날 통화 한 대화가 떠오른다. 성도 여러분 ! 우리의 영혼 언제 이 땅을 떠날지 모르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병원에 가 보세요... 교통 사고로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특히 우리나라의 교통 사고 사망률은 세계 제1순위라고 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죽음을 알았겠습니까 ? 가족들이 알았겠습니까 ? 내 영혼 내가 하나님께 부탁하며 살아가야 할 때이다. 십자가에 고통 속에서도 우리에게 영혼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주신 예수님을 기억하시고 하루 하루 내 영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 결 론 ) 고난 주간에 십자가의 칠언의 대단원을 마치게 됨을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우리는 고난 주간에만 듣고 끝나는 주님의 고난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다. 고난이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이 시대 성도들이 너무나 고난을 싫어하고 있고 무서워하고 있다. 영광의 자리에 서기는 원하면서 고난을 싫어한다면 그 사람은 영광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믿음의 선진들 중 어느 누구 한 사람이라도 고난 안 당한 자가 있는가 ? 고난은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라면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이다. 성경 그 어디에도 고난은 저주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는다. 고난을 당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 시대 고난 당하면 마치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처럼 생각하고 있고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살후1:5)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 (딤후1:8)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 (딤후2: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십자가 위에서 그 참혹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우리에게 메세지를 전하여 주신 예수님의 깊은 뜻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 일언 :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 제 이언 :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제 삼언 : 여자여 보소서 ! 아들이니이다 ! 제 사언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제 오언 : 내가 목마르다 ! 제 육언 : 다 이루었다 ! 제 칠언 : 내 영혼은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 성도 여러분 ! 가상칠언의 주님의 소리가 항상 우리의 귓가에 우리의 마음에 울리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가상칠언 중 제7언(架上七言 中 第七言)/ 눅23:46/ 2001-11-20
가상칠언 중 제7언(架上七言 中 第七言) 눅23:46 ( 서 론 ) 십자가 7언 중 3번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였는데 첫 번째 하신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기도였고 네 번째 하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기도와 이제 마지막으로 하신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기도하셨던 것이다. 주님의 생애는 기도하는 생애였다. 주님은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치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직접 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셨다 기독교 신앙 생활 가운데 없어서는 안될 것이 기도 생활이다. 기도는 아무 강조해도 부족함이 있는게 기도다. 기도처럼 어려운 것도 없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까지 .... 우리의 숨이 끓어지는 순간까지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멈추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러한 기도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다시 한번 가르쳐 주고 계신다.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가 ?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만 한다. 예수님의 이 짧은 기도 내용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영혼이 중요한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인류에게 영혼의 중요성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지금 알려주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고 계신다. 우리는 짧은 주님의 기도 속에서 3가지로 살펴보자. 1. 영혼의 중요성을 깨닫고 살아가야 한다 2. 우리의 영혼이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버지 관계가 되어야 한다. 3. 나 개인의 영혼을 위해서 우리는 끝까지 기도를 잃지 말아야 한다 첫 번째 : 아버지여 내 영혼을 ........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고 있다. 우리의 육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온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 온 것도 우리 마음대로 못 왔듯이 돌아갈 때도 우리 마음대로 갈 수도 없고 돌아가야 할 곳도 마음대로 우리가 정할 수 없다 그러한 사실을 지금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다. 예수님도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했는데 우리는 어떠하겠는가 ? 우리도 마땅히 우리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여야 할 것이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증거하고 계신 것이다. 인간의 방법과 수단으로 아무리 선한 행위를 한다 할지라도 인간 스스로는 영혼을 구원받을 수 없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육이 구원받습니까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 우리의 육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돌아가는 곳이 따로 있는데 예수 믿는 자는 천국으로 갈 것이지만 예수를 믿지 않은 자는 지옥으로 갈 것이다. 그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 아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 믿고 살아 갈 것이지만 영혼이 중요한지 모르는 자는 육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구약에 육적인 복의 개념을 영적인 복의 개념으로 바꾸시는데 중점을 두셨다. 그 대표적 인게 산상 복음에서 팔복에 대한 복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셨다. 구약에서의 복의 개념은 육적인 복이 개념이었다. 그러나 신약에서의 복의 개념은 영을 위한 즉 영혼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구약적인 육의 복의 개념을 버리지 못하고 신앙 생활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리의 육적인 생활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생활... 영혼을 위한 삶이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깨닫고 알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왜 삽니까 ? 흔희들 이런 말을 한다.. 먹기 위해서 사는 건지 ....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인지 ........ 그러나 결국 두 말은 똑같은 의미다. 먹는다는 것은 육을 위해 사는 자들의 모습이다. 물론 우리가 안 먹고는 못 산다. 그러나 육적인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영혼을 위해 사는 것이다. 이 시대 영혼의 중요성을 너무나도 모르고 살아가고들 있다. 전도하면 지옥가도 좋다고 서슴없이 떠든다. 영혼이 어디 있냐고 까지 떠든다 예수를 믿는 자 들조차도 영혼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 그것은 영혼보다는 육을 위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 내용을 잘 살펴보면 더욱 알 수 있다. 우리의 기도 내용이 대부분 육을 위한 기도가 되고 있다는게 그 사실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하셨는데도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주님의 가르친 기도와는 반대로 하고 있지 않은가 ! 성경 그 어디에도 영보다 육을 더 중요시 한 곳이 없다. 성경은 철저히 영혼을 위해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 반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요삼1:2) \"사랑하는 자여 !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 하노라 \" (롬8:6-8)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 육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지금 주님은 영혼의 중요성을 다시 십자가에서 재인식 시키시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10:28) 에서도 육보다 영혼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도 하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 \" 그런데도 우리는 육을 죽이는 것에 더 무서워하고 있고 영혼에 대한 것은 무관심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 고난 주간에 다시 한번 영혼에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내 영혼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그 어떤 것보다 귀하다 천하보다도 우리의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이시다. 성도 여러분 !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사는 것이 참되고 귀한 것인지 깨달아야만 한다. 육을 위해 사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될 뿐만 아니라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느끼고 소망 삼고 살아가는 것은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중요하게 여기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다. ( 예 화 ) 한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 되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자 그의 어머니는 이것들을 최대한으로 설명하여 그 아이를 이해 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안과 수술로 명성이 있는 어느 의사의 소식을 듣고 아들을 데리고 가서 의사에게 수술을 받도록 했다. 수술이 성공리에 끝나서 드디어 그 아이는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그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게 되었고, 그 다음으로는 창가에 가서 아름다운 꽃들과 풀밭과 공중의 새들과 나무들을 보고는 엄마의 품속에 달려가 말했다. \"어머니,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 내가 살고 있다고 왜 진작 말씀 해주시지 않았어요?\" 라고 하자 그의 어머니는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얘야, 너에게 그것에 대해 수없이 이야기 해주었지만 네가 느끼지 못했단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성도 여러분 ! 아름다운 천국을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어서 천국에 대한 것을 들어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혼을 중요시하고 귀하게 여기며 사는 자는 영혼의 눈으로 믿음의 눈으로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 이렇게 멋있는 천국을 왜 진작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성도 여러분 ! 영혼의 귀함을 깊이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 아버지 손에 ..... 우리의 영혼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 손에 달려 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영혼을 붙잡아 주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너희들의 공로로 너희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고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신다. \"아버지 손\" 이 손은 구원의 손이다. 이 구원 손이 이제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은 반드시 십자가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손을 뻗치신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지금 인류에게 알리고 계신 것이다. 인간의 어떤 손도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수는 없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저는 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지금 어렴풋이 그 아버지의 손을 기억해보면 손이 굉장히 큰 손이었다는 것이 생각난다. 육신의 아버지의 손은 항상 따듯하고 너무나 커서 잡기만 해도 두려울 것이 없게 느껴지는 그런 손이다. 하나님 손은 그 어떤 손보다도 안전한 손이다. 우리가 하나님 손만 붙잡고 살면 무서울 것이 없다. 우리 육체에 사망의 어둠이 덥친다 할지라도 하나님 손에만 붙잡혀 있다면 우리는 무서울 것이 없다. 시편 기자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하나님 손에 우리가 붙잡혀 있다면 그 어떤 세력도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 (요10: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 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 아버지의 손은 전능하신 능력의 손이다. 그 손으로 우리를 흙으로 만드셨고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서 사람이 되게 하신 분이시다. 지금 예수님은 그 하나님 아버지의 손이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실 것을 나타내 보이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은 반드시 십자가를 통해서만 역사 하신다. 십자가를 떠나서 아버지의 손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으신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손길을 느끼고 싶으십니까 ? 십자가 밑으로 나오시기 바란다. 십자가 밑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은 우리의 찢겨진 몸과 마음을 쓰다듬어 주시고 치료하여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신 예수의 몸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다. 마귀의 자녀들로써 지옥 갈 수 없던 우리를 사랑의 손길로 붙잡아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아버지의 손을 여러분은 붙잡고 계십니까 ? 그 아버지의 손을 날마다 의지하고 살고 계십니까 ? 미국의 흑인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힘든 흑인 자유 운동을 하면서 이 찬양을 자주 불렀다고 한다 ( 찬 양 )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악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퐁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단 한시도 아니 일초라도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잡아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악의 무리에 빠져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 예 화 ) 한 무리의 단체 관광객들이 산 정상을 향해 등반을 하던 중 문제의 지점에 도착했다. 안내자가 제일 먼저 벌어진 틈을 훌쩍 뛰어넘어 갔지만 다음 사람은 겁에 질려 주저하고 있었다. 안내자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겁에 질린 그는 걱정스럽게 그 손을 쳐다보며 망설였다. 그러자 안내자는 검게 그을린 자신의 손을 흔들며 \"선생님은 아무 걱정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손은 이제 것 그 누구도 떨어뜨려 본 적이 없습니다 ! \" 라고 외쳤다. 예수님과 함께한 우리의 인생도 역시 산마루 등정과 다를 바 없다. 예수님과 나 사이에 등산용 밧줄로 서로를 꽁꽁 묶고 난 후, 때때로 가파르고 위험한 길을 지나가지만 주저한다. 낙심한 심정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 성도 여러분 !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전적으로 믿고 살고 있으십니까 ?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 위에서 그 능력의 손 .. 구원의 손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신다. 그 손을 붙잡고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 : 부탁하나이다 !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주님의 음성이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고 계신 것이다.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가 ?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 지금 부탁하고 계신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 \"부탁하나이다\" 한 영혼이 구원받고 못 받고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뜻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인류에게 지금 가르쳐 주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사신 분이 누가 있겠는가 ? 그런 예수님도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고 계신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겠는가 ?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드린 삶을 살고 계십니까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는 세상에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부탁을 하면서 살아간다 돈을 좀 빌려 달라.... 잘 좀 봐 달라..... 세상에서뿐만 아니다 .... 신앙 생활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부탁을 하며 살아간다. 문제를 해결 해달라고도 하고 ....... 병을 고쳐 달라고도 하고..... 자녀 문제... 남편 문제..... 가족 형제 문제.... 사업 문제....등등 수 없이 하나님께 부탁을 드리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부탁은 우리가 드리고 신앙생활 하는지 생각해 보자. 여러분의 영혼 하나님께 얼마나 부탁 드려 보았습니까 ?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실 것이라고 믿고 계십니까 ? 물론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에서 그 고통 가운데서도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는 모습을 왜 보이셨을까요 ?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드리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할 것이라는 신앙과 ...... 하나님께 내 영혼을 부탁 드리며 사는 신앙 ..... 어떤 신앙이 바른 신앙이 되겠습니까 ? 우리들의 문제만 부탁 드리는 그런 신앙인들이 되지 말고 내 영혼을 한번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께 부탁 드리는 신앙을 가지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죽을 때 예수님처럼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아무나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온 자만이 떳떳하게 하나님께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하게 될 것이다. 스데반 집사도 순교 직전에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고 순교하였다. 예수님의 생애처럼 우리가 거룩하게 살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진실 되게 참되게 살아갈 때 이 땅을 떠나는 마지막에 내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할 수 있는 자가 될 것이다. 내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 할 수 있다는 것은 영혼을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의 영혼이 죽어서 어느 곳으로 가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이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에는 관심도 없을 것이고 또 하나님께 영혼을 부탁하는 것도 하지 안 할 것이다. 성도 여러 분 !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 아는 자들이다. 알고 계십니까 ?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을 믿으십니까 ? 죽으면 천국에 갈 영혼과 지옥에 갈 영혼으로 갈리지는 것 아십니까 ? 어디로 가는 영혼이 되길 원하십니까 ? 지옥에 가고 싶을 영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옥에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영혼들도 많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 전도하면 지옥에 가도 좋다는 자들은 가끔 만나는데 몰라서 그러는 건지 미련해서 그러는 건지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많이 있다. 성도 여러분 ! 왜 주님이 영혼을 부탁하는 마지막 외침을 우리에게 왜 들려주고 계신지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영혼 진실로 우리는 부탁드리고 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내 영혼을 매일 매일 하나님께 부탁 드리며 살아야 할 것이다. 요즈음 얼마나 불식간에 사고가 많이 일어납니까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 10분 후에 ..... 1시간 후에 죽을지도 모르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제 매제는 5년 전 대 낮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삼각지 로타리에서 자동차와 3중 충돌을 일으키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날이 수요일이었는데 죽기 전 3시간 전에 나랑 전화 통화했는데 그 전화가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도 그날 통화 한 대화가 떠오른다. 성도 여러분 ! 우리의 영혼 언제 이 땅을 떠날지 모르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병원에 가 보세요... 교통 사고로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특히 우리나라의 교통 사고 사망률은 세계 제1순위라고 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죽음을 알았겠습니까 ? 가족들이 알았겠습니까 ? 내 영혼 내가 하나님께 부탁하며 살아가야 할 때이다. 십자가에 고통 속에서도 우리에게 영혼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주신 예수님을 기억하시고 하루 하루 내 영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 결 론 ) 고난 주간에 십자가의 칠언의 대단원을 마치게 됨을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우리는 고난 주간에만 듣고 끝나는 주님의 고난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다. 고난이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이 시대 성도들이 너무나 고난을 싫어하고 있고 무서워하고 있다. 영광의 자리에 서기는 원하면서 고난을 싫어한다면 그 사람은 영광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믿음의 선진들 중 어느 누구 한 사람이라도 고난 안 당한 자가 있는가 ? 고난은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라면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이다. 성경 그 어디에도 고난은 저주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는다. 고난을 당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 시대 고난 당하면 마치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처럼 생각하고 있고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살후1:5)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 (딤후1:8)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 (딤후2: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십자가 위에서 그 참혹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우리에게 메세지를 전하여 주신 예수님의 깊은 뜻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 일언 :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 제 이언 :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제 삼언 : 여자여 보소서 ! 아들이니이다 ! 제 사언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제 오언 : 내가 목마르다 ! 제 육언 : 다 이루었다 ! 제 칠언 : 내 영혼은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 성도 여러분 ! 가상칠언의 주님의 소리가 항상 우리의 귓가에 우리의 마음에 울리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가상칠언 중 제7언(架上七言中 第七言)/ 눅23:46-/ 2005-04-03
가상칠언 중 제7언(架上七言中 第七言) 눅23:46- ( 서 론 ) 십자가 7언 중 3번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였는데 첫 번째 하신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기도였고 네 번째 하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기도와 이제 마지막으로 하신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기도하셨던 것이다. 주님의 생애는 기도하는 생애였다. 주님은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치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직접 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셨다 기독교 신앙 생활 가운데 없어서는 안될 것이 기도 생활이다. 기도는 아무 강조해도 부족함이 있는게 기도다. 기도처럼 어려운 것도 없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까지 .... 우리의 숨이 끓어지는 순간까지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멈추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러한 기도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다시 한번 가르쳐 주고 계신다.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가 ?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만 한다. 예수님의 이 짧은 기도 내용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영혼이 중요한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인류에게 영혼의 중요성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지금 알려주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고 계신다. 우리는 짧은 주님의 기도 속에서 3가지로 살펴보자. 1. 영혼의 중요성을 깨닫고 살아가야 한다 2. 우리의 영혼이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버지 관계가 되어야 한다. 3. 나 개인의 영혼을 위해서 우리는 끝까지 기도를 잃지 말아야 한다 첫 번째 : 아버지여 내 영혼을 ........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고 있다. 우리의 육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온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 온 것도 우리 마음대로 못 왔듯이 돌아갈 때도 우리 마음대로 갈 수도 없고 돌아가야 할 곳도 마음대로 우리가 정할 수 없다 그러한 사실을 지금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다. 예수님도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했는데 우리는 어떠하겠는가 ? 우리도 마땅히 우리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여야 할 것이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증거하고 계신 것이다. 인간의 방법과 수단으로 아무리 선한 행위를 한다 할지라도 인간 스스로는 영혼을 구원받을 수 없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육이 구원받습니까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 우리의 육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돌아가는 곳이 따로 있는데 예수 믿는 자는 천국으로 갈 것이지만 예수를 믿지 않은 자는 지옥으로 갈 것이다. 그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 아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 믿고 살아 갈 것이지만 영혼이 중요한지 모르는 자는 육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구약에 육적인 복의 개념을 영적인 복의 개념으로 바꾸시는데 중점을 두셨다. 그 대표적 인게 산상 복음에서 팔복에 대한 복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셨다. 구약에서의 복의 개념은 육적인 복이 개념이었다. 그러나 신약에서의 복의 개념은 영을 위한 즉 영혼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구약적인 육의 복의 개념을 버리지 못하고 신앙 생활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리의 육적인 생활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생활... 영혼을 위한 삶이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깨닫고 알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왜 삽니까 ? 흔희들 이런 말을 한다.. 먹기 위해서 사는 건지 ....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인지 ........ 그러나 결국 두 말은 똑같은 의미다. 먹는다는 것은 육을 위해 사는 자들의 모습이다. 물론 우리가 안 먹고는 못 산다. 그러나 육적인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영혼을 위해 사는 것이다. 이 시대 영혼의 중요성을 너무나도 모르고 살아가고들 있다. 전도하면 지옥가도 좋다고 서슴없이 떠든다. 영혼이 어디 있냐고 까지 떠든다 예수를 믿는 자 들조차도 영혼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 그것은 영혼보다는 육을 위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 내용을 잘 살펴보면 더욱 알 수 있다. 우리의 기도 내용이 대부분 육을 위한 기도가 되고 있다는게 그 사실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하셨는데도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주님의 가르친 기도와는 반대로 하고 있지 않은가 ! 성경 그 어디에도 영보다 육을 더 중요시 한 곳이 없다. 성경은 철저히 영혼을 위해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 반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요삼1:2) \\\"사랑하는 자여 !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 하노라 \\\" (롬8:6-8)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 육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지금 주님은 영혼의 중요성을 다시 십자가에서 재인식 시키시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10:28) 에서도 육보다 영혼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도 하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 \\\" 그런데도 우리는 육을 죽이는 것에 더 무서워하고 있고 영혼에 대한 것은 무관심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 고난 주간에 다시 한번 영혼에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내 영혼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그 어떤 것보다 귀하다 천하보다도 우리의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이시다. 성도 여러분 !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사는 것이 참되고 귀한 것인지 깨달아야만 한다. 육을 위해 사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될 뿐만 아니라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느끼고 소망 삼고 살아가는 것은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중요하게 여기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다. ( 예 화 ) 한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 되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자 그의 어머니는 이것들을 최대한으로 설명하여 그 아이를 이해 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안과 수술로 명성이 있는 어느 의사의 소식을 듣고 아들을 데리고 가서 의사에게 수술을 받도록 했다. 수술이 성공리에 끝나서 드디어 그 아이는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그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게 되었고, 그 다음으로는 창가에 가서 아름다운 꽃들과 풀밭과 공중의 새들과 나무들을 보고는 엄마의 품속에 달려가 말했다. \\\"어머니,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 내가 살고 있다고 왜 진작 말씀 해주시지 않았어요?\\\" 라고 하자 그의 어머니는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얘야, 너에게 그것에 대해 수없이 이야기 해주었지만 네가 느끼지 못했단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성도 여러분 ! 아름다운 천국을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어서 천국에 대한 것을 들어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혼을 중요시하고 귀하게 여기며 사는 자는 영혼의 눈으로 믿음의 눈으로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 이렇게 멋있는 천국을 왜 진작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성도 여러분 ! 영혼의 귀함을 깊이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 아버지 손에 ..... 우리의 영혼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 손에 달려 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영혼을 붙잡아 주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너희들의 공로로 너희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고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신다. \\\"아버지 손\\\" 이 손은 구원의 손이다. 이 구원 손이 이제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은 반드시 십자가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손을 뻗치신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지금 인류에게 알리고 계신 것이다. 인간의 어떤 손도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수는 없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저는 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지금 어렴풋이 그 아버지의 손을 기억해보면 손이 굉장히 큰 손이었다는 것이 생각난다. 육신의 아버지의 손은 항상 따듯하고 너무나 커서 잡기만 해도 두려울 것이 없게 느껴지는 그런 손이다. 하나님 손은 그 어떤 손보다도 안전한 손이다. 우리가 하나님 손만 붙잡고 살면 무서울 것이 없다. 우리 육체에 사망의 어둠이 덥친다 할지라도 하나님 손에만 붙잡혀 있다면 우리는 무서울 것이 없다. 시편 기자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하나님 손에 우리가 붙잡혀 있다면 그 어떤 세력도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 (요10: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 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 아버지의 손은 전능하신 능력의 손이다. 그 손으로 우리를 흙으로 만드셨고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서 사람이 되게 하신 분이시다. 지금 예수님은 그 하나님 아버지의 손이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실 것을 나타내 보이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은 반드시 십자가를 통해서만 역사 하신다. 십자가를 떠나서 아버지의 손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으신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손길을 느끼고 싶으십니까 ? 십자가 밑으로 나오시기 바란다. 십자가 밑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은 우리의 찢겨진 몸과 마음을 쓰다듬어 주시고 치료하여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신 예수의 몸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다. 마귀의 자녀들로써 지옥 갈 수 없던 우리를 사랑의 손길로 붙잡아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아버지의 손을 여러분은 붙잡고 계십니까 ? 그 아버지의 손을 날마다 의지하고 살고 계십니까 ? 미국의 흑인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힘든 흑인 자유 운동을 하면서 이 찬양을 자주 불렀다고 한다 ( 찬 양 )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악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퐁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단 한시도 아니 일초라도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잡아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악의 무리에 빠져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 예 화 ) 한 무리의 단체 관광객들이 산 정상을 향해 등반을 하던 중 문제의 지점에 도착했다. 안내자가 제일 먼저 벌어진 틈을 훌쩍 뛰어넘어 갔지만 다음 사람은 겁에 질려 주저하고 있었다. 안내자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겁에 질린 그는 걱정스럽게 그 손을 쳐다보며 망설였다. 그러자 안내자는 검게 그을린 자신의 손을 흔들며 \\\"선생님은 아무 걱정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손은 이제 것 그 누구도 떨어뜨려 본 적이 없습니다 ! \\\" 라고 외쳤다. 예수님과 함께한 우리의 인생도 역시 산마루 등정과 다를 바 없다. 예수님과 나 사이에 등산용 밧줄로 서로를 꽁꽁 묶고 난 후, 때때로 가파르고 위험한 길을 지나가지만 주저한다. 낙심한 심정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 성도 여러분 !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전적으로 믿고 살고 있으십니까 ?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 위에서 그 능력의 손 .. 구원의 손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신다. 그 손을 붙잡고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 : 부탁하나이다 !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주님의 음성이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고 계신 것이다.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가 ?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 지금 부탁하고 계신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 \\\"부탁하나이다\\\" 한 영혼이 구원받고 못 받고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뜻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인류에게 지금 가르쳐 주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사신 분이 누가 있겠는가 ? 그런 예수님도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고 계신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겠는가 ?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드린 삶을 살고 계십니까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는 세상에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부탁을 하면서 살아간다 돈을 좀 빌려 달라.... 잘 좀 봐 달라..... 세상에서뿐만 아니다 .... 신앙 생활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부탁을 하며 살아간다. 문제를 해결 해달라고도 하고 ....... 병을 고쳐 달라고도 하고..... 자녀 문제... 남편 문제..... 가족 형제 문제.... 사업 문제....등등 수 없이 하나님께 부탁을 드리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부탁은 우리가 드리고 신앙생활 하는지 생각해 보자. 여러분의 영혼 하나님께 얼마나 부탁 드려 보았습니까 ?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실 것이라고 믿고 계십니까 ? 물론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에서 그 고통 가운데서도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는 모습을 왜 보이셨을까요 ?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드리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할 것이라는 신앙과 ...... 하나님께 내 영혼을 부탁 드리며 사는 신앙 ..... 어떤 신앙이 바른 신앙이 되겠습니까 ? 우리들의 문제만 부탁 드리는 그런 신앙인들이 되지 말고 내 영혼을 한번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께 부탁 드리는 신앙을 가지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죽을 때 예수님처럼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아무나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온 자만이 떳떳하게 하나님께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하게 될 것이다. 스데반 집사도 순교 직전에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고 순교하였다. 예수님의 생애처럼 우리가 거룩하게 살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진실 되게 참되게 살아갈 때 이 땅을 떠나는 마지막에 내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할 수 있는 자가 될 것이다. 내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 할 수 있다는 것은 영혼을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의 영혼이 죽어서 어느 곳으로 가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이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에는 관심도 없을 것이고 또 하나님께 영혼을 부탁하는 것도 하지 안 할 것이다. 성도 여러 분 !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 아는 자들이다. 알고 계십니까 ?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을 믿으십니까 ? 죽으면 천국에 갈 영혼과 지옥에 갈 영혼으로 갈리지는 것 아십니까 ? 어디로 가는 영혼이 되길 원하십니까 ? 지옥에 가고 싶을 영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옥에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영혼들도 많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 전도하면 지옥에 가도 좋다는 자들은 가끔 만나는데 몰라서 그러는 건지 미련해서 그러는 건지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많이 있다. 성도 여러분 ! 왜 주님이 영혼을 부탁하는 마지막 외침을 우리에게 왜 들려주고 계신지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영혼 진실로 우리는 부탁드리고 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내 영혼을 매일 매일 하나님께 부탁 드리며 살아야 할 것이다. 요즈음 얼마나 불식간에 사고가 많이 일어납니까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 10분 후에 ..... 1시간 후에 죽을지도 모르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제 매제는 5년 전 대 낮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삼각지 로타리에서 자동차와 3중 충돌을 일으키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날이 수요일이었는데 죽기 전 3시간 전에 나랑 전화 통화했는데 그 전화가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도 그날 통화 한 대화가 떠오른다. 성도 여러분 ! 우리의 영혼 언제 이 땅을 떠날지 모르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병원에 가 보세요... 교통 사고로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특히 우리나라의 교통 사고 사망률은 세계 제1순위라고 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죽음을 알았겠습니까 ? 가족들이 알았겠습니까 ? 내 영혼 내가 하나님께 부탁하며 살아가야 할 때이다. 십자가에 고통 속에서도 우리에게 영혼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주신 예수님을 기억하시고 하루 하루 내 영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 결 론 ) 고난 주간에 십자가의 칠언의 대단원을 마치게 됨을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우리는 고난 주간에만 듣고 끝나는 주님의 고난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다. 고난이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이 시대 성도들이 너무나 고난을 싫어하고 있고 무서워하고 있다. 영광의 자리에 서기는 원하면서 고난을 싫어한다면 그 사람은 영광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믿음의 선진들 중 어느 누구 한 사람이라도 고난 안 당한 자가 있는가 ? 고난은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라면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이다. 성경 그 어디에도 고난은 저주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는다. 고난을 당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 시대 고난 당하면 마치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처럼 생각하고 있고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살후1:5)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 (딤후1:8)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 (딤후2: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십자가 위에서 그 참혹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우리에게 메세지를 전하여 주신 예수님의 깊은 뜻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 일언 :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 제 이언 :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제 삼언 : 여자여 보소서 ! 아들이니이다 ! 제 사언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제 오언 : 내가 목마르다 ! 제 육언 : 다 이루었다 ! 제 칠언 : 내 영혼은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 성도 여러분 ! 가상칠언의 주님의 소리가 항상 우리의 귓가에 우리의 마음에 울리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오 직 예 수 ===
가상칠언(1)/ 눅23:26-38/
가상칠언(1) 눅23:26-38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십자가상에서 7마디의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을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이번 한 주간동안 한 마디 한 마디 그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십자가상에서 제일 첫 번째 하신 말씀은 눅23:34에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살펴봅시다. 1. 예수님에게는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속죄 권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① 죄 많은 여인의 죄를 속죄하여 주실 때 그는 구원을 받고 평안히 돌아갔습니다. 눅7:36-50에 보면 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부을 때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하시더니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했습니다. ②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의 죄를 사죄하여 주셨습니다(마9:1-8). 마9:2에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요5:14에는 38년된 병자가 고침을 받았는데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했습니다. ③ 예수님은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마26:28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했습니다. 2. 예수님은 원수들의 죄까지도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눅23:34에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셨는데 이는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의 사주에 의해서 빌라도가 불의한 재판을 하게되고 예수를 잡아다가 때리고 욕을 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도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② 베드로를 비롯한 배신자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배신자였습니다. 괘씸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용서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전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사53:4-6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고 했습니다. 3. 우리에게도 용서하라고 친히 말씀 하셨습니다. ①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골3:13-14에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② 주기도문에서 명령 하셨습니다.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③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마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스데반 집사는 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용서했습니다. 행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서로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서로 고소하면서 교회를 소란케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행위를 불의하다고 규정했습니다. 고전6:6-9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 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 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입니다.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피차 용서합시다. 절대로 용서가 안 되는 사람, 괘씸한 사람을 그려봅시다. 십자가 앞에서 용서하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성도입니다.
가상칠언(1)/ 요19:28-35/ 박기완 목사/ 산본성광교회/ 2010-04-03
가상칠언(1)(架上七言) 요19:28-35 제 1언의 말씀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 제 2언의 말씀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제 3언의 말씀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27) 제 4언의 말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제 5언의 말씀 : \\\"내가 목마르다!\\\"(요19:28) 제 6언의 말씀 : \\\"다 이루었다!\\\"(요19:30) 제 7언의 말씀 :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가상칠언 중에 5언의 말씀부터 7언의 말씀까지 살펴봄으로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가죽 채찍으로 서른 아홉 대의 매를 맞으셨습니다. 당시의 채찍은 보통 채찍이 아니라, 가죽으로 만들어진 채찍의 끝에는 다섯 갈래의 가지가 있었고 그 가지마다 낚시와 같은 쇠고리가 달려 있는 것도 있고, 납이 달려 있는 것이 있었 습니다. 그래서 그 채찍으로 내려치면 납이 달린 채찍은 사람의 몸을 휘감아 몸에 박히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그 채찍을 잡아당기면 살이 갈갈이 찢어지고 피가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 몸은 바로 이런 피들이 엉켜 붙었습니다. 또한 가시관을 쓰신 머리와 대못에 박힌 양손과 양발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옷은 군병들이 제비뽑아서 나누어 가졌고, 옷이 모두 벗기운 채로 주님은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계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했습니까?....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우리 인간은 모두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를 지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위하여 누군가가 죄값을 갚지 않으면 안되었습 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으로 이런 죄값을 담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신 분이 계셨으니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죄도 없으시면서 가장 죄 많은 자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마치 털 깎는 자 앞에 나간 어린양처럼 묵묵히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길 을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십자가에 달려... 그 고통중에서 남기신 일곱마디의 말씀이 가상칠언입니다. 지난 주에는 1언부터 4언까지 살펴 보았고, 오늘은 5언부터 7언까지 살펴보겠습니다. 제 5언의 말씀 : \\\"내가 목마르다!\\\"(요19:28) 5언의 말씀은 요19:28절에 기록된 말씀 \\\"내가 목마르다!\\\" 라는 말씀입니다. 1. 목마른 인생을 위하여 주님이 대신 목말라 주셨습니다. 이는 목마른 인생을 위하여 주님이 대신 목말라 주셨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인생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다 목마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마 다의 갈증을 이기지 못해서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며... 자신의 갈증을 해결할 샘을 파고 있 습니다. 어떤 이는 돈의 샘을 파고, 어떤 사람은 권력의 샘을 파고, 어떤 이는 지식과 명성의 샘을 팝니다. 또 어떤 이는 쾌락의 샘을 파고, 어떤 이는 유행의 샘을 파고 있지만.... 그러나 세상에서 주 는 물은 그 어떤 것으로도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맛보았던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하면서 인생의 목마름을 단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렘2:13절에서 \\\"내 백성이 두 가지를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 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하고 말씀 함으로 인생의 갈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떠난 것이 절대적인 갈증의 원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렇게 갈증을 느끼고 있는 인간에게 근본적인 갈증의 해소를 위하여.... 대신 목말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목마르다!\\\" 하고 외치신 이 순간은 참 생명의 물줄기를 터뜨려 놓으 시는 순간입니다. 자기의 몸을 터뜨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줄기를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55:1절 말씀에서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말씀했습니다. 2. 목마른 인생은 예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마른 인생은 예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와야만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떠난 인생은 어디를 가도 목마른 인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유에 목이 말라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을 행하여 나갔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광야에서 처음으로 맞은 어려움은 물이 없어 목이 마르는 고통이었습니다. 갈증을 참지 못한 그들은 살인자의 모습으로 돌변하여 돌을 들어 모세를 칠 듯이 대들었습 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반석을 쳐서 물이 흘러나오게 함으로 갈증을 면하게 하였습니다. 갈증에 시달리던 저들은 마음껏 물을 마셨지만, 그러나 몇 날이 못되어 그들은 또다시 목말 라야 하는 갈증에 시달렸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몹시도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다섯명의 남자와 살아봤지만 참 만족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인생의 목마름으로 가득했습니다. 이 여인은 죄가 많은지라...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아무도 다니지 않는 뜨거운 한낮 에 물을 기르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우물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명의 샘을 발견하였 습니다.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기쁨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주님만이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수가 되심을 성경은 증거하 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사람들은 의식주에 목마르고, 물질과 명예에 목마르고, 자유에 목마르고, 사랑과 애정에 목마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한 목마름, 더 강한 갈증은 영적인 목마름입니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는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 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 갈이라\\\"(암 8 : 11)고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방법은 교회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와 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55:1-2절 말씀에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아닌 것을 위하여 은 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로 우리 주님은 우리의 갈한 인생을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친히 목마른 고통을 받으 셨습니다. 이는 우리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하시고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습 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 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이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이 자리에 함께하신 모든 권속들에게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 6언의 말씀 : \\\"다 이루었다!\\\"(요19:30) 계속해서 제 6언의 말씀은 요19:30절에 기록된 말씀 \\\"다 이루었다!\\\"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목말라 하실 때, 사람들은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주님의 입 에 대주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복음서들은 조금씩 달리 기록하고 있는데, 요19:30절에서는 \\\"예수께서 신포도주 를 받으신후\\\" 라고 기록하고 있고, 막15:23절에서는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마27:34절에서는 \\\"쓸개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 시고자 아니하시더라\\\" 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세 가지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주님은 심히 목마르신 가운데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주 었지만 마시기를 거절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의 포도주는 쓸개와 몰약을 탄 포도주였는데, 당시에 쓸개와 몰약을 탄 포도주는 고통 을 잊게 하는 일종의 마취제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 포도주 같은 마취제로 십자가의 고통이 경감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타는 갈증과 목마름이 극도에 달했지만 임시 방편으로 해결하지 않으시고... 세상에서 위로 받기를 거부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을까요?.... 1. 예수님은 완성자 이십니다. 첫째로 주님은 다 이루시는 완성자이심을 알게 됩니다. 우리네 인생은 100년을 살아도... \\\"다 이루었다\\\" 는 완성자가 없지만... 예수님은 짧은 생애를 사시면서 다 이루셨습니다. 33년 중에서 30년간은 준비의 기간이었고, 공생활 3년으로... 주님은 하늘의 사명과 땅의 사 명을 다 이루시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므로 \\\'구속의 사역\\\' 을 완성하셨습니다. 빌2:6-8절 말씀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 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 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확증하는 \\\'사랑의 완성\\\' 이었습니다. 요일4:10-11절 말씀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 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 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했습니 다. 2. 다 이루신 주님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이루신 주님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부족하고 연약한 인 생인지라 다 이루고 갈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들은 그 어느 누구도 자기의 계획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 습니다. 얼마 전에 현대 그룹 정주영씨도 150세까지 살고 싶다고 했는데... 많은 뜻을 남겨두고... 그 것을 이루지 못한 채 죽고 말았습니다. 명예와 권세를 가진 자도...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도... 자신의 꿈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 습니다. 자녀나 부부가 가진 꿈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교회나 국가의 꿈을 다 이루고 가 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신 주님을 모시어 들이면 우리도 다 이룰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즉. 승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은 백살은 살다가 간다고 해도... 자신의 일을 다 못하고 간다고 했습니다. 요즘도 많은 사람들은 할 일을 다 못하고 가는 사람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다 이루고 가신 주님을 나의 생명의 구세주로 영접할 때 우리도 다 이룰 수 있습니 다. 요16:33절 말씀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함이라 세상에 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골2:15절 말씀에서는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요일5:4절에서도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우 리의 믿음이니라\\\" 했습니다. 나는 할 수 없고, 나는 다 이룰 수 없어도... 주님의 은혜 안에서는 완성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는 축복을 채워 주시고, 병든 사람에게는 건강으로 채워 주시고, 실패한 사람 에게는 성공으로 채워 주십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로 채워 주시고, 무능한 사람에게는 능력으로 채워 주시며, 절망한 자 에게는 소망으로 채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4:13절에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 느니라!\\\" 하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마4장에 보면 마귀는 어찌하든지 우리의 완성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의 권세 를 이기고 다 이루셨습니다. 그리고는 요16:33절 말씀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 기었노라\\\"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하신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가 되고 격려와 확신의 말씀이 아 닐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능력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 7언의 말씀 :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마지막으로... 제 7언의 말씀은 눅23:46절에 기록된 말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 다!\\\"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 신 후에 운명하셨습니다. 로마의 군대 장교 백부장은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정말 의인이었다\\\" 하고 말하였고, 구경하러 모인 많은 사람들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가상칠언(架上七言)중에 세 마디가 기도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마지막 7언의 말씀... \\\"아 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는 말씀은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부르짖는 기도요, 만족과 믿음의 행동이요, 신뢰와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크게 세 가지의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로, 우리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다른 피조물과 완전히 구분되어지는 내용입니다. 인간만이 영혼이 있는 것입니다. 영 혼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그 속에 부어 주신 생기인데, 이 영혼이 있음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연결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창2:7, 슥12:1, 전12:7). 둘째로, 내 영혼의 주인은 내가 아니요, 하나님이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듯이 지금도 영의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고 하나님이 가져가신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한 부자는 말하기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 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 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르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 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18-21)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생명, 내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알수가 있습니다. 세째로, 사람이 죽은 후에는 영과 육이 분리되어 영은 하나님의 나라로 가고, 육은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복음은 제자들에게 맡기시고, 옷은 군사들에게 맡기시고, 모친은 요한에게, 육신은 아리마대 요셉에게... 그리고 영혼은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그러면 제 7언의 말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는 이 말씀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입니까?... 1.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동시에(눅23:46)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고전 1:3절 말씀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 노라\\\" 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실까요?... 이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이 우리의 아바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4:6절 말씀에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롬8:15절 말씀에서도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 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아버지\\\'란 말씀을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산상설교 가운데서 17번이나 사용하셨고, 유월절 다락방에서 45번(요14, 16장) 요한복음 17 장에서 6번이나 기록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시면서 세상에서의 마지막 말씀 을 아버지로 끝맺으셨습니다. 이 아버지란 명칭은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자신을 갖게 하는 이름이 아닐 수 없습 니다. 아무리 값지고 고귀한 것이라 해도... 아버지의 손이라면 안심하며... 맡기고, 부탁할 수가 있 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체로부터 분리되려는 찰나에... 그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의 아버지가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시요,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를 깨달으며.. 우리는 한없는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부탁할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셔들이지 못한 사람들.... 세상 사람들은 부탁할 대상을 찾지 못하 여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사람의 기술과 방법을 동원하여 멋있게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을 하며 부귀영화를 빌고 있습니다. 말도 하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그 우상을 향하여 사람들은 자식들의 장래를 부탁합니다. 사업을 부탁하고, 미래를 부탁하고, 자신의 사후 장래까지도 부탁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저와 여러분은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온 천하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부탁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 하나님께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부탁합니다. 우리의 가정을 부탁하고, 우리의 사업이나 장래를 부탁하고.... 무슨 문제를 만나든지 부탁하 고 맡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같이 우리의 영혼을 부탁하고 맡길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2.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내 영혼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내 영혼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마16:26절 말씀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 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했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것이 인간의 생명이요 영혼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신 사람은 그 영혼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간다는 사실입니 다. 요1:12절 말씀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께 인도하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요14:6절 말씀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 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계신 모든 권속들은 한 사람도 낙오됨이 없이 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서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상칠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가상칠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 님의 은혜, 하나님의 한없는 축복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나만 알고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아직도 주를 알지 못하는 사랑하는 가족들, 그리고 이웃과 친척들에게 주의 복음을 널리 전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가상칠언의 말씀 속에 담겨진 깊은 진리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서... 확실한 믿음 위에 굳게 서고, 더욱 더 깊은 감사와 영광으로 주를 위해 쓰임받는 복된 권속들이 되시기 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상칠언(1)/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23:34/ 2002-04-01
가상칠언(1)/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23:34 인생의 마지막 말 최근에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이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평상시 건강하셨던 분이셨는데, 워낙 급작스럽게 운명하셔서 가족들에게 아무런 말 한마디도 남기지 못하셨습니다. 아들 되시는 분의 말씀이 눈 한번 마주치지 못하고, 손 한번 잡아 주지 못하고 말씀 한 마디라도 듣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고 하시더군요. 그렇지요. 운명하시는 분의 마지막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기려는 것은 자식된 도리로서 당연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음성을 듣지 못했으니 마음이 아픈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죽기 직전에 십자가에서 유언 같은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한편으로 그분의 생애를 잘 요약해 주는 말씀들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 살 것인지를 잘 보여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유언을 가슴에 꼭 간직하듯이 우리 또한 주님의 유언같은 십자가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새겨야 합니다. 어머니의 말을 그렇게 불순종하던 청개구리가 돌아가시면서 한 어머니의 말을 지켰다는 옛날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일곱 번을 말씀하셨다고 해서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일곱 말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⑵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⑶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 ⑷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막15:34) ⑸ \"내가 목마르다\"(요19:28) ⑹ \"다 이루었다\"(요19:30) ⑺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십자가에서 처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입니다. 이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중보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 용서함을 구하는 이 기도를 통해서 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환경을 뛰어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환경을 뛰어넘는 기도입니다. 기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도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편안하게 기도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조건에서 기도가 아니라, 전혀 기도할 수 없는 곳에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기도할 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역사적 보고에 의하면 십자가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온갖 저주와 욕설이 튀어나왔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데다가 수치와 고통의 십자가 죽음이니 당연히 욕이나 저주가 나오겠지요. 아이를 낳는 부인들이 힘들면 남편도 욕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죽는 상황이니 그럴 수 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도리어 용서와 사랑의 기도를 하십니다. 불평과 원망, 짜증으로 화내고 소리쳐야 마땅한 상황인데도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기도가 나오기는커녕 고통과 괴로움으로 악다구니를 쓰며 몸부림쳐야 할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기도하기에 적합한 곳이 아닙니다. 십자가형은 로마인들이 찾아낸 가장 악랄한 수법의 사형 방법입니다. 인간에게 최대한 고통을 주면서도 빨리 죽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고안해 낸 것이 바로 십자가 형입니다. 그래서 십자가형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고 극악무도한 죄를 범했거나, 정치범들에게 내린 사형방법이었습니다. 양 팔목과 두 발을 겹쳐서 대못을 박습니다. 그리고 높이 하늘에 매달아 둡니다. 그러면 팔레스타인의 뜨거운 태양으로 피가 서서히 말라갑니다. 그리고 독충들이 \'이 땔세\'하고 달려들어 피를 빨아먹습니다. 그렇게 피와 물을 다 쏟으면서 온 몸과 사지를 비틀다가 대개 4시간이 지나면서 죽는다고 합니다. 심한 사람은 며칠씩을 달려서 고통받다가 죽습니다. 완전히 혼수 상태에 빠져서 소리지르다가 처참하게 죽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기도를 할 만한 곳이 전혀 아닙니다. 혼수 상태에서 중얼거리거나,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 발광하다시피 소리지르는 곳이지, 기도할 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십자가에서 기도하십니다. 기도할 수 없는 곳에서, 기도를 방해하는 상황에서도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새벽도 되기 전에 이른 아침에 기도하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밤늦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중간에도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을 봅니다. 항상 기도하셨던 주님이 십자가와 같은 상황에서도 기도합니다. 우리 주님처럼 기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쉬지 않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한번의 기도가 아니라 계속적인 기도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한번쯤은 십자가에서 남을 용서하는 멋있는 기도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일리 있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번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계속 기도하셨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단 한번 기도하신 것으로 되어 있지만, 헬라어 시제상으로 보면 계속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저희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를 한번하고 그만 두신 것이 아니라, 계속 하셨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해골의 곳이라 하는 골고다 언덕에 도착하셔서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이 그를 땅에 때려눕히고 팔에 못을 박을 때에도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리한 못들이 떨리는 양손과 양발을 뚫고 지나갈 때에도 주님은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군중들이 저주하고 욕할 때에도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창자가 뒤틀리고 온 몸에서 피가 역류하는 그 고통, 처절한 아픔의 절정에서 그분은 또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 늘 기도하셨던 주님은 지금도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바울이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실 때에 그분의 마음 속에는 십자가에서도 쉬지 않고 기도하셨던 주님의 영상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늘 기도하시던 주님이 십자가에서도 기도하셨으니, 나 사도 바울도 주님을 따라 쉬지 말고 기도하리라. 그러니 모든 성도들도 주님을 닮아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죄 용서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십자가상에서 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은 우리의 죄 용서를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분이 기도할 수 없는 죽음의 상황에서도 기도하신 이유는, 그리고 그 잔인한 아픔의 시간에도 쉬지 않고 기도하신 것은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죽이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못된 행동을 심판하고 정죄해야 할 텐데, 오히려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골고다에서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시고, 우리 인간은 최악의 행동을 합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사랑과 용서를 하시지만, 십자가에서 우리 인간은 무지한 채 비난과 모욕을 합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셨지만, 우리 인간은 거절합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품어주시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반역을 행합니다. 예수님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는 용서받을 수 있기에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청원의 기도입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서 용서함을 받고 죄의 사슬에서 자유함을 얻고, 해방된 영혼이 부르는 노래가 바로 찬송가 404장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3.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그런데, 사하여 달라는 단어를 한글 성경은 \'용서\', 영어 성경은 \'forgive\'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헬라어로는 용서라기보다는 \'용납하다\' 또는 \'내버려두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사하여 달라는 것은 우리를 용납하여 그대로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내버려두셔서 심판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무지하여 하나님께 반역하여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데, 내버려두라는 것은 더 큰 심판 받기 위해서 지금은 잠시 그냥 두라는 것으로 들립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의도와 완전히 상반되는 해석입니다. 예수님이 내버려두라고 기도하신 것은 우리들의 무지로 인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반역과 죄의 책임과 대가를 예수님 당신이 현재 지불하고 있으니, 심판하지 말고 용납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댓가를 예수님이 대신 감당하고 있으니 우리를 공의로 심판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신 책임지겠다는 결단의 기도입니다. 용서하는 대신에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는 기도입니다. 스데반은 죽어 가는 순간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60)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는 기도는 그 죄를 누구에게 돌리라는 것입니까? 사람을 돌로 쳐죽이는 나쁜 죄의 책임을 누가 지겠다는 겁니까?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겁니다. 용서하겠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것은 그 죄의 댓가를 자신이 십자가에서 지불하오니 용서하여 달라는 청원입니다. 우리가 불렀던 찬송가 404장 가사처럼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눈같이, 양털같이 깨끗해 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용서의 기도이고,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기도였습니다. 내가 아프지 않아도 되는 남의 아픔,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다른 사람의 죄를 자신의 아픔인양, 자신의 죄인양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기도가 용서의 기도로 넘쳐나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내 문제로 생각하고 기도하여 하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용서의 기도, 책임지는 기도를 하는 하나님의 자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환경을 변화시키는 기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기도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기도였습니다. 십자가의 한 강도는 예수님을 군인들과 군중들과 더불어 조롱하였지만, 그는 예수님이 조롱받으실 만한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강도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과 마가복음 15장 32절에서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가 예수님을 조롱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과 상치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 비난했던 이 강도가 어떤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도리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를 변화시키게 했을까요? 무엇이 예수님은 무죄한 자라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게 했을까요? 이 강도가 보고들은 것은 기도하시는 예수님, 용서의 중보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님 외에는 본 것이 없습니다. 전에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정보를 갖고 있었거나, 호의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중간에 바뀌었거든요. 그가 빌라도처럼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조사한 것도 아닙니다. 누가처럼 처음부터 이루어진 일을 자세히 연구하고 보니 예수가 무죄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도 아닙니다. 그럴 시간도 없으며 논리적으로 비약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를 변하게 했을까요?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기도를 듣고서 예수님이 무죄한 자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중보 기도가 십자가의 한 강도를 변화시켰다면, 스데반의 중보 기도는 바울을 변화시킵니다. 이 위대한 기도를 그대로 본받아서 기도했던 하나님의 사람 스데반이 돌무더기 속에서 묻혀 죽어가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처럼 기도했습니다. 그는 무참하게 죽었습니다만 그 기도는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던 한 청년, 죽은 스데반의 옷을 들고 통쾌하게 생각했던 사울이라는 청년은 스데반 뿐 아니라 스데반과 같이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 다메섹 도상으로 가던 도중에 용서로 찾아오신 주님을 만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 큰 용서의 발로 찾아오신 주님 앞에 그 생애가 드려졌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중국 통역관으로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변에 왔다가 붙잡혔습니다. 망나니들이 칼을 휘두를 때 그는 집행관에게 말합니다. \"잠깐 내가 기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조선 민족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 조선 민족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내 생명을 받으시고 수많은 생명을 이 땅에 주시옵소서.\" 기도 마친 다음,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중국어 성경을 집행관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참수형을 당해서 목이 떨어졌습니다. 그 기도는 의미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순교가 헛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죽을 때 도무지 죽음 앞에서 초연하게 평화를 잃지 않는 이 서양인의 표정에 감동한 한 사람이 성경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조선 땅에 첫 번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도의 사람이 되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용서하는 중보 기도는 저주를 축복으로 바꿉니다. 이 기도는 악을 선으로 바꿉니다. 이 기도는 미움을 사랑으로 바꿉니다. 이 기도는 치욕을 영광으로 바꿉니다. 이 기도를 내 기도로 붙잡으십시오. 남편 때문에 고통받는 아내들이여, 이 기도 드려주십시오. 사랑하는 자녀들을 놓고 눈물로 기도하는 부모님들이여, 낙심하지 않고 이 기도 드려주십시오. 그것뿐만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 드리십시오. 내 마음의 미움이 박살나는 것을 경험할 줄로 믿습니다. 내 마음의 저주에 꽁꽁 묶어두었던 사슬이 풀리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오. 그처럼 만나기 싫던 사람이 만나지게 됩니다. 듣기 싫었던 목소리가 들려지게 됩니다. 내 마음속에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기 시작합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 또한 용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는 기도하고 용서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역사상 가장 능력 있는 기도입니다. 이 보다 더 위대한 기도는 없습니다. 이 기도 보다 확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기도가 없습니다. 이 기도보다 내 삶에 평화와 능력과 위로를 주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기도하심으로 승리하시는 하나님의 자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상칠언(1)/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23:34/ 2002-04-01
가상칠언(1)/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23:34 인생의 마지막 말 최근에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이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평상시 건강하셨던 분이셨는데, 워낙 급작스럽게 운명하셔서 가족들에게 아무런 말 한마디도 남기지 못하셨습니다. 아들 되시는 분의 말씀이 눈 한번 마주치지 못하고, 손 한번 잡아 주지 못하고 말씀 한 마디라도 듣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고 하시더군요. 그렇지요. 운명하시는 분의 마지막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기려는 것은 자식된 도리로서 당연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음성을 듣지 못했으니 마음이 아픈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죽기 직전에 십자가에서 유언 같은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한편으로 그분의 생애를 잘 요약해 주는 말씀들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 살 것인지를 잘 보여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유언을 가슴에 꼭 간직하듯이 우리 또한 주님의 유언같은 십자가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새겨야 합니다. 어머니의 말을 그렇게 불순종하던 청개구리가 돌아가시면서 한 어머니의 말을 지켰다는 옛날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일곱 번을 말씀하셨다고 해서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일곱 말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⑵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⑶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 ⑷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막15:34) ⑸ \"내가 목마르다\"(요19:28) ⑹ \"다 이루었다\"(요19:30) ⑺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십자가에서 처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입니다. 이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중보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 용서함을 구하는 이 기도를 통해서 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환경을 뛰어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환경을 뛰어넘는 기도입니다. 기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도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편안하게 기도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조건에서 기도가 아니라, 전혀 기도할 수 없는 곳에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기도할 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역사적 보고에 의하면 십자가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온갖 저주와 욕설이 튀어나왔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데다가 수치와 고통의 십자가 죽음이니 당연히 욕이나 저주가 나오겠지요. 아이를 낳는 부인들이 힘들면 남편도 욕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죽는 상황이니 그럴 수 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도리어 용서와 사랑의 기도를 하십니다. 불평과 원망, 짜증으로 화내고 소리쳐야 마땅한 상황인데도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기도가 나오기는커녕 고통과 괴로움으로 악다구니를 쓰며 몸부림쳐야 할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기도하기에 적합한 곳이 아닙니다. 십자가형은 로마인들이 찾아낸 가장 악랄한 수법의 사형 방법입니다. 인간에게 최대한 고통을 주면서도 빨리 죽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고안해 낸 것이 바로 십자가 형입니다. 그래서 십자가형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고 극악무도한 죄를 범했거나, 정치범들에게 내린 사형방법이었습니다. 양 팔목과 두 발을 겹쳐서 대못을 박습니다. 그리고 높이 하늘에 매달아 둡니다. 그러면 팔레스타인의 뜨거운 태양으로 피가 서서히 말라갑니다. 그리고 독충들이 \'이 땔세\'하고 달려들어 피를 빨아먹습니다. 그렇게 피와 물을 다 쏟으면서 온 몸과 사지를 비틀다가 대개 4시간이 지나면서 죽는다고 합니다. 심한 사람은 며칠씩을 달려서 고통받다가 죽습니다. 완전히 혼수 상태에 빠져서 소리지르다가 처참하게 죽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기도를 할 만한 곳이 전혀 아닙니다. 혼수 상태에서 중얼거리거나,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 발광하다시피 소리지르는 곳이지, 기도할 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십자가에서 기도하십니다. 기도할 수 없는 곳에서, 기도를 방해하는 상황에서도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새벽도 되기 전에 이른 아침에 기도하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밤늦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중간에도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을 봅니다. 항상 기도하셨던 주님이 십자가와 같은 상황에서도 기도합니다. 우리 주님처럼 기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쉬지 않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한번의 기도가 아니라 계속적인 기도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한번쯤은 십자가에서 남을 용서하는 멋있는 기도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일리 있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번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계속 기도하셨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단 한번 기도하신 것으로 되어 있지만, 헬라어 시제상으로 보면 계속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저희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를 한번하고 그만 두신 것이 아니라, 계속 하셨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해골의 곳이라 하는 골고다 언덕에 도착하셔서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이 그를 땅에 때려눕히고 팔에 못을 박을 때에도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리한 못들이 떨리는 양손과 양발을 뚫고 지나갈 때에도 주님은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군중들이 저주하고 욕할 때에도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창자가 뒤틀리고 온 몸에서 피가 역류하는 그 고통, 처절한 아픔의 절정에서 그분은 또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 늘 기도하셨던 주님은 지금도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바울이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실 때에 그분의 마음 속에는 십자가에서도 쉬지 않고 기도하셨던 주님의 영상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늘 기도하시던 주님이 십자가에서도 기도하셨으니, 나 사도 바울도 주님을 따라 쉬지 말고 기도하리라. 그러니 모든 성도들도 주님을 닮아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죄 용서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십자가상에서 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은 우리의 죄 용서를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분이 기도할 수 없는 죽음의 상황에서도 기도하신 이유는, 그리고 그 잔인한 아픔의 시간에도 쉬지 않고 기도하신 것은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죽이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못된 행동을 심판하고 정죄해야 할 텐데, 오히려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골고다에서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시고, 우리 인간은 최악의 행동을 합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사랑과 용서를 하시지만, 십자가에서 우리 인간은 무지한 채 비난과 모욕을 합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셨지만, 우리 인간은 거절합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품어주시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반역을 행합니다. 예수님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는 용서받을 수 있기에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청원의 기도입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서 용서함을 받고 죄의 사슬에서 자유함을 얻고, 해방된 영혼이 부르는 노래가 바로 찬송가 404장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3.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그런데, 사하여 달라는 단어를 한글 성경은 \'용서\', 영어 성경은 \'forgive\'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헬라어로는 용서라기보다는 \'용납하다\' 또는 \'내버려두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사하여 달라는 것은 우리를 용납하여 그대로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내버려두셔서 심판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무지하여 하나님께 반역하여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데, 내버려두라는 것은 더 큰 심판 받기 위해서 지금은 잠시 그냥 두라는 것으로 들립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의도와 완전히 상반되는 해석입니다. 예수님이 내버려두라고 기도하신 것은 우리들의 무지로 인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반역과 죄의 책임과 대가를 예수님 당신이 현재 지불하고 있으니, 심판하지 말고 용납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댓가를 예수님이 대신 감당하고 있으니 우리를 공의로 심판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신 책임지겠다는 결단의 기도입니다. 용서하는 대신에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는 기도입니다. 스데반은 죽어 가는 순간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60)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는 기도는 그 죄를 누구에게 돌리라는 것입니까? 사람을 돌로 쳐죽이는 나쁜 죄의 책임을 누가 지겠다는 겁니까?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겁니다. 용서하겠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것은 그 죄의 댓가를 자신이 십자가에서 지불하오니 용서하여 달라는 청원입니다. 우리가 불렀던 찬송가 404장 가사처럼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눈같이, 양털같이 깨끗해 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용서의 기도이고,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기도였습니다. 내가 아프지 않아도 되는 남의 아픔,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다른 사람의 죄를 자신의 아픔인양, 자신의 죄인양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기도가 용서의 기도로 넘쳐나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내 문제로 생각하고 기도하여 하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용서의 기도, 책임지는 기도를 하는 하나님의 자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환경을 변화시키는 기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기도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기도였습니다. 십자가의 한 강도는 예수님을 군인들과 군중들과 더불어 조롱하였지만, 그는 예수님이 조롱받으실 만한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강도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과 마가복음 15장 32절에서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가 예수님을 조롱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과 상치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 비난했던 이 강도가 어떤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도리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를 변화시키게 했을까요? 무엇이 예수님은 무죄한 자라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게 했을까요? 이 강도가 보고들은 것은 기도하시는 예수님, 용서의 중보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님 외에는 본 것이 없습니다. 전에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정보를 갖고 있었거나, 호의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중간에 바뀌었거든요. 그가 빌라도처럼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조사한 것도 아닙니다. 누가처럼 처음부터 이루어진 일을 자세히 연구하고 보니 예수가 무죄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도 아닙니다. 그럴 시간도 없으며 논리적으로 비약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를 변하게 했을까요?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기도를 듣고서 예수님이 무죄한 자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중보 기도가 십자가의 한 강도를 변화시켰다면, 스데반의 중보 기도는 바울을 변화시킵니다. 이 위대한 기도를 그대로 본받아서 기도했던 하나님의 사람 스데반이 돌무더기 속에서 묻혀 죽어가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처럼 기도했습니다. 그는 무참하게 죽었습니다만 그 기도는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던 한 청년, 죽은 스데반의 옷을 들고 통쾌하게 생각했던 사울이라는 청년은 스데반 뿐 아니라 스데반과 같이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 다메섹 도상으로 가던 도중에 용서로 찾아오신 주님을 만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 큰 용서의 발로 찾아오신 주님 앞에 그 생애가 드려졌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중국 통역관으로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변에 왔다가 붙잡혔습니다. 망나니들이 칼을 휘두를 때 그는 집행관에게 말합니다. \"잠깐 내가 기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조선 민족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 조선 민족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내 생명을 받으시고 수많은 생명을 이 땅에 주시옵소서.\" 기도 마친 다음,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중국어 성경을 집행관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참수형을 당해서 목이 떨어졌습니다. 그 기도는 의미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순교가 헛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죽을 때 도무지 죽음 앞에서 초연하게 평화를 잃지 않는 이 서양인의 표정에 감동한 한 사람이 성경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조선 땅에 첫 번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도의 사람이 되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용서하는 중보 기도는 저주를 축복으로 바꿉니다. 이 기도는 악을 선으로 바꿉니다. 이 기도는 미움을 사랑으로 바꿉니다. 이 기도는 치욕을 영광으로 바꿉니다. 이 기도를 내 기도로 붙잡으십시오. 남편 때문에 고통받는 아내들이여, 이 기도 드려주십시오. 사랑하는 자녀들을 놓고 눈물로 기도하는 부모님들이여, 낙심하지 않고 이 기도 드려주십시오. 그것뿐만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 드리십시오. 내 마음의 미움이 박살나는 것을 경험할 줄로 믿습니다. 내 마음의 저주에 꽁꽁 묶어두었던 사슬이 풀리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오. 그처럼 만나기 싫던 사람이 만나지게 됩니다. 듣기 싫었던 목소리가 들려지게 됩니다. 내 마음속에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기 시작합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 또한 용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는 기도하고 용서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역사상 가장 능력 있는 기도입니다. 이 보다 더 위대한 기도는 없습니다. 이 기도 보다 확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기도가 없습니다. 이 기도보다 내 삶에 평화와 능력과 위로를 주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기도하심으로 승리하시는 하나님의 자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상칠언(1)/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23:34/ 2002-04-05
가상칠언(1)/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23:34 인생의 마지막 말 최근에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이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평상시 건강하셨던 분이셨는데, 워낙 급작스럽게 운명하셔서 가족들에게 아무런 말 한마디도 남기지 못하셨습니다. 아들 되시는 분의 말씀이 눈 한번 마주치지 못하고, 손 한번 잡아 주지 못하고 말씀 한 마디라도 듣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고 하시더군요. 그렇지요. 운명하시는 분의 마지막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기려는 것은 자식된 도리로서 당연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음성을 듣지 못했으니 마음이 아픈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죽기 직전에 십자가에서 유언 같은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한편으로 그분의 생애를 잘 요약해 주는 말씀들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 살 것인지를 잘 보여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유언을 가슴에 꼭 간직하듯이 우리 또한 주님의 유언같은 십자가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새겨야 합니다. 어머니의 말을 그렇게 불순종하던 청개구리가 돌아가시면서 한 어머니의 말을 지켰다는 옛날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일곱 번을 말씀하셨다고 해서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일곱 말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⑵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⑶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 ⑷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막15:34) ⑸ \"내가 목마르다\"(요19:28) ⑹ \"다 이루었다\"(요19:30) ⑺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십자가에서 처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입니다. 이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중보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 용서함을 구하는 이 기도를 통해서 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환경을 뛰어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환경을 뛰어넘는 기도입니다. 기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도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편안하게 기도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조건에서 기도가 아니라, 전혀 기도할 수 없는 곳에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기도할 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역사적 보고에 의하면 십자가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온갖 저주와 욕설이 튀어나왔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데다가 수치와 고통의 십자가 죽음이니 당연히 욕이나 저주가 나오겠지요. 아이를 낳는 부인들이 힘들면 남편도 욕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죽는 상황이니 그럴 수 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도리어 용서와 사랑의 기도를 하십니다. 불평과 원망, 짜증으로 화내고 소리쳐야 마땅한 상황인데도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기도가 나오기는커녕 고통과 괴로움으로 악다구니를 쓰며 몸부림쳐야 할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기도하기에 적합한 곳이 아닙니다. 십자가형은 로마인들이 찾아낸 가장 악랄한 수법의 사형 방법입니다. 인간에게 최대한 고통을 주면서도 빨리 죽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고안해 낸 것이 바로 십자가 형입니다. 그래서 십자가형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고 극악무도한 죄를 범했거나, 정치범들에게 내린 사형방법이었습니다. 양 팔목과 두 발을 겹쳐서 대못을 박습니다. 그리고 높이 하늘에 매달아 둡니다. 그러면 팔레스타인의 뜨거운 태양으로 피가 서서히 말라갑니다. 그리고 독충들이 \'이 땔세\'하고 달려들어 피를 빨아먹습니다. 그렇게 피와 물을 다 쏟으면서 온 몸과 사지를 비틀다가 대개 4시간이 지나면서 죽는다고 합니다. 심한 사람은 며칠씩을 달려서 고통받다가 죽습니다. 완전히 혼수 상태에 빠져서 소리지르다가 처참하게 죽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기도를 할 만한 곳이 전혀 아닙니다. 혼수 상태에서 중얼거리거나,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 발광하다시피 소리지르는 곳이지, 기도할 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십자가에서 기도하십니다. 기도할 수 없는 곳에서, 기도를 방해하는 상황에서도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새벽도 되기 전에 이른 아침에 기도하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밤늦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중간에도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을 봅니다. 항상 기도하셨던 주님이 십자가와 같은 상황에서도 기도합니다. 우리 주님처럼 기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쉬지 않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한번의 기도가 아니라 계속적인 기도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한번쯤은 십자가에서 남을 용서하는 멋있는 기도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일리 있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번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계속 기도하셨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단 한번 기도하신 것으로 되어 있지만, 헬라어 시제상으로 보면 계속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저희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를 한번하고 그만 두신 것이 아니라, 계속 하셨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해골의 곳이라 하는 골고다 언덕에 도착하셔서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이 그를 땅에 때려눕히고 팔에 못을 박을 때에도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리한 못들이 떨리는 양손과 양발을 뚫고 지나갈 때에도 주님은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군중들이 저주하고 욕할 때에도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창자가 뒤틀리고 온 몸에서 피가 역류하는 그 고통, 처절한 아픔의 절정에서 그분은 또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 늘 기도하셨던 주님은 지금도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바울이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실 때에 그분의 마음 속에는 십자가에서도 쉬지 않고 기도하셨던 주님의 영상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늘 기도하시던 주님이 십자가에서도 기도하셨으니, 나 사도 바울도 주님을 따라 쉬지 말고 기도하리라. 그러니 모든 성도들도 주님을 닮아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죄 용서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십자가상에서 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은 우리의 죄 용서를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분이 기도할 수 없는 죽음의 상황에서도 기도하신 이유는, 그리고 그 잔인한 아픔의 시간에도 쉬지 않고 기도하신 것은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죽이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못된 행동을 심판하고 정죄해야 할 텐데, 오히려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골고다에서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시고, 우리 인간은 최악의 행동을 합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사랑과 용서를 하시지만, 십자가에서 우리 인간은 무지한 채 비난과 모욕을 합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셨지만, 우리 인간은 거절합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품어주시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반역을 행합니다. 예수님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는 용서받을 수 있기에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청원의 기도입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서 용서함을 받고 죄의 사슬에서 자유함을 얻고, 해방된 영혼이 부르는 노래가 바로 찬송가 404장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3.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그런데, 사하여 달라는 단어를 한글 성경은 \'용서\', 영어 성경은 \'forgive\'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헬라어로는 용서라기보다는 \'용납하다\' 또는 \'내버려두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사하여 달라는 것은 우리를 용납하여 그대로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내버려두셔서 심판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무지하여 하나님께 반역하여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데, 내버려두라는 것은 더 큰 심판 받기 위해서 지금은 잠시 그냥 두라는 것으로 들립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의도와 완전히 상반되는 해석입니다. 예수님이 내버려두라고 기도하신 것은 우리들의 무지로 인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반역과 죄의 책임과 대가를 예수님 당신이 현재 지불하고 있으니, 심판하지 말고 용납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댓가를 예수님이 대신 감당하고 있으니 우리를 공의로 심판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신 책임지겠다는 결단의 기도입니다. 용서하는 대신에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는 기도입니다. 스데반은 죽어 가는 순간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60)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는 기도는 그 죄를 누구에게 돌리라는 것입니까? 사람을 돌로 쳐죽이는 나쁜 죄의 책임을 누가 지겠다는 겁니까?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겁니다. 용서하겠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것은 그 죄의 댓가를 자신이 십자가에서 지불하오니 용서하여 달라는 청원입니다. 우리가 불렀던 찬송가 404장 가사처럼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눈같이, 양털같이 깨끗해 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용서의 기도이고,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기도였습니다. 내가 아프지 않아도 되는 남의 아픔,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다른 사람의 죄를 자신의 아픔인양, 자신의 죄인양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기도가 용서의 기도로 넘쳐나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내 문제로 생각하고 기도하여 하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용서의 기도, 책임지는 기도를 하는 하나님의 자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환경을 변화시키는 기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기도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기도였습니다. 십자가의 한 강도는 예수님을 군인들과 군중들과 더불어 조롱하였지만, 그는 예수님이 조롱받으실 만한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강도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과 마가복음 15장 32절에서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가 예수님을 조롱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과 상치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 비난했던 이 강도가 어떤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도리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를 변화시키게 했을까요? 무엇이 예수님은 무죄한 자라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게 했을까요? 이 강도가 보고들은 것은 기도하시는 예수님, 용서의 중보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님 외에는 본 것이 없습니다. 전에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정보를 갖고 있었거나, 호의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중간에 바뀌었거든요. 그가 빌라도처럼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조사한 것도 아닙니다. 누가처럼 처음부터 이루어진 일을 자세히 연구하고 보니 예수가 무죄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도 아닙니다. 그럴 시간도 없으며 논리적으로 비약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를 변하게 했을까요?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기도를 듣고서 예수님이 무죄한 자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중보 기도가 십자가의 한 강도를 변화시켰다면, 스데반의 중보 기도는 바울을 변화시킵니다. 이 위대한 기도를 그대로 본받아서 기도했던 하나님의 사람 스데반이 돌무더기 속에서 묻혀 죽어가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처럼 기도했습니다. 그는 무참하게 죽었습니다만 그 기도는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던 한 청년, 죽은 스데반의 옷을 들고 통쾌하게 생각했던 사울이라는 청년은 스데반 뿐 아니라 스데반과 같이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 다메섹 도상으로 가던 도중에 용서로 찾아오신 주님을 만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 큰 용서의 발로 찾아오신 주님 앞에 그 생애가 드려졌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중국 통역관으로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변에 왔다가 붙잡혔습니다. 망나니들이 칼을 휘두를 때 그는 집행관에게 말합니다. \"잠깐 내가 기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조선 민족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 조선 민족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내 생명을 받으시고 수많은 생명을 이 땅에 주시옵소서.\" 기도 마친 다음,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중국어 성경을 집행관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참수형을 당해서 목이 떨어졌습니다. 그 기도는 의미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순교가 헛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죽을 때 도무지 죽음 앞에서 초연하게 평화를 잃지 않는 이 서양인의 표정에 감동한 한 사람이 성경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조선 땅에 첫 번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도의 사람이 되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용서하는 중보 기도는 저주를 축복으로 바꿉니다. 이 기도는 악을 선으로 바꿉니다. 이 기도는 미움을 사랑으로 바꿉니다. 이 기도는 치욕을 영광으로 바꿉니다. 이 기도를 내 기도로 붙잡으십시오. 남편 때문에 고통받는 아내들이여, 이 기도 드려주십시오. 사랑하는 자녀들을 놓고 눈물로 기도하는 부모님들이여, 낙심하지 않고 이 기도 드려주십시오. 그것뿐만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 드리십시오. 내 마음의 미움이 박살나는 것을 경험할 줄로 믿습니다. 내 마음의 저주에 꽁꽁 묶어두었던 사슬이 풀리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오. 그처럼 만나기 싫던 사람이 만나지게 됩니다. 듣기 싫었던 목소리가 들려지게 됩니다. 내 마음속에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기 시작합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 또한 용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는 기도하고 용서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역사상 가장 능력 있는 기도입니다. 이 보다 더 위대한 기도는 없습니다. 이 기도 보다 확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기도가 없습니다. 이 기도보다 내 삶에 평화와 능력과 위로를 주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기도하심으로 승리하시는 하나님의 자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상칠언(2)/ 눅23:26-34/ 2001-04-02
가상칠언(架上七言)(1) 눅23:26-34 오늘날 교회의 표시와 사랑을 나타내는 표식으로서 사람들은 누구나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기독교하면 십자가요, 십자가 하면 기독교를 말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십자가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다니기도 합니다. 특별히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장 교회가 많은 나라요, 도시마다 거리마다 십자가 탑이 높이 서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본래 사형 도구의 하나였습니다. 로마에서는 주로 탈주한 노예, 내란 선동자, 살인자, 반역자 등의 죄인들을 괴롭혀 죽이기 위해 고안해 낸 것이 십자가형입니다. 그래서 사형수들은 나무형틀 위에서 갖은 고통을 당하며 며칠씩 신음한 끝에 메말라 죽는.... 그런 잔인 무도한 처형법입니다. 특히 팔레스틴에서는 십자가형이 정치적인 폭도들의 소요억제책으로 집행되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인들의 잦은 반란과 항거가 일어나 정치적 소요를 일으켰던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따라서 반역죄로 기소된 예수님은 십자가형에 처해졌던 것입니다. 그러한 십자가가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이후로는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도록 만든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인들에게는 보통 사람들이 모르는 깊은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다른 사형법도 많은데 왜 저들은 하필이면 십자가에 못박아 죽도록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신명기에 기록된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신명기 21:23절 말씀에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더 이상 메시야로 추앙하며 따르지 않게 될 것이라는 계산을 한 것입니다. 저들의 계획은 지극히 인간적이요, 악의적이요, 사탄적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건을 통하여 온 인류를 구속하신 대속의 사역을 완성시켜 주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담의 범죄이후 그 죄의 값으로 사망, 곧 죽음을 지불해야만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므로... 누가 이 사망의 값을 대신 지불해줄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로마서 5:8절 말씀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죄가 없으시며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를 대신 갚아주실 수 있는 유일한 대속의 주가 되시므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그의 죽음을 대신하여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인간의 몸을 입으신 사람이시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중에서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돌아가시기까지.... 마지막 일곱마디의 소중한 말씀을 남기셨는데, 이것을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우리가 가상칠언의 말씀을 되새기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두 주일에 걸쳐서 오늘은 1언∼4언까지, 다음 주는 5언∼7언까지... 한마디 한마디 그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며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 먼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제일 첫 번째 말씀하신 제 1언의 말씀은 누가복음 23:34절에 기록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는 말씀입니다. 아주 옛날에는 돈 많은 사람이나 세도가 당당한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자기가 맞을 매를 종이나 매품팔이를 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신 맞게 하고 그 삯을 주었다고 합니다. 주로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선비들이 대신 매를 맞아주고 돈푼이나 얻어다가 가족들의 끼니를 이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그 죄의 삯은 곤장이었는데, 죄는 자기가 짓고 곤장은 가난하고 낮은 백성들로 맞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죄는 보잘것없는 우리 인간이 지어... 그 죄로 사형에 해당하는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아무런 죄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그의 보배로운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가상칠언 가운데서도 제 1언의 말씀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는 말씀이니 이 얼마나 엄청난 사랑인지....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인 것입니다. 1) 예수님에게는 속죄권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에게는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속죄권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7:48절에서 죄 많은 여인에게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그 여인은 구원을 받고 평안히 돌아갔습니다. 마태복음 9:2절에서는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에게 명하시기를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즉시 나음을 받고 돌아간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만 속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6:28절 말씀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했습니다. 2) 원수들의 죄까지도 용서하신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원수들의 죄까지도 용서하신 사랑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 그런데 바로 그 밑에서는 예수님께서 입으셨던 옷을 벗기고 그 옷을 누가 가질 것인가 서로 다투며... 네 군데의 깃을 잡고 서로 빼앗듯 하나씩 나눠 가지며 속옷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 중에 한 군병이 말하기를 속옷은 통으로 된 것이니 나누지 말고 제비를 뽑아 갖자고 제안했고, 그들은 제비를 뽑아 속옷을 취하였습니다. 이는 시편 22:18절에 예언된 말씀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한 사람은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맞고 있는 현실 속에서... 그 밑에서는 벗긴 옷을 누가 가질 것인가에 혈안이 된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디까지 인간이 잔악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며 저들을 용서하셨습니다(눅23:34). 주님의 이 용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판결을 내린 빌라도와 허물과 죄로 얼룩진 당시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요19:6-23), 그리고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와 은 30에 스승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의 죄까지도... 다 용서 하신 것입니다(마26:15-69). 다시 말씀드려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모든 인간들을 위한 죽음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3:4절 이하에서 이미 예수님이 오시기전 700년 전에 밝히 예언하기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했습니다. 3) 우리들도 서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뿐만아니라, 제 1언의 말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신 말씀은 우리들도 서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한번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고 물었을 때, 주님은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마18:21-22).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3:13-14절에서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고 가르쳤습니다. 오늘 우리는 1언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달아야 할 줄 믿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가상칠언의 두 번째 말씀은 누가복음 23:43절에 기록된 말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좌편과 우편에는 각각 한사람씩의 강도가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들은 큰 죄를 범하여 당시에 최고형인 십자가형을 받은 것입니다. 그때 달린 행악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비방하여 말하기를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이 정말 구원자라면 당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요!\" 하면서 비꼬듯 말했습니다. 그때에 한편 강도는 그 사람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당연한 값을 당하는 것이지만 이 분이 행하시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면서 다시 예수님을 향하여 간구하기를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고 요청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고 말씀하시니... 이것이 십자가상의 두 번째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1) 예수님은 낙원의 주인이심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4:2-3절 말씀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즉, 주님이 부활 승천하실 때 남기신 말씀은 낙원을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계시록 22:3-4절에도 보면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낙원의 주인도, 영원한 천국의 주인도 예수님이심을 증거한 것입니다. 낙원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서 만드신 에덴동산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주겠다\" 고 말씀하였습니다(계2:7).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낙원에 제일 먼저 간 사람은 한편 강도였습니다. 누가복음 23:40절 말씀에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했습니다. 그는 큰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달린 사형수가 되었지만 예수님을 만나.... 회개와 기도함으로 낙원에 가게 되는 놀라운 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죽음의 순간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고 간구하므로... 불과 유황으로 타는 지옥의 끝자락에서 극적으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눅23:42). 그는 예수님만이 참된 의인이요, 진정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함으로 낙원에 갔습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처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 했으니.... 지난 날, 과거에는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간에... 주님을 만나 그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자마다 그 죄에서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요1:12, 요5:24). 2) 주님이 가시고 우리가 갈 낙원입니다. 둘째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2언의 말씀은... 주님이 가시고 우리들이 가야할 낙원임을 의미합니다. 계시록 22:5절 말씀에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 했습니다. 요한복음 14:3절에서는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는 거기서 세세토록 왕노릇 할 것이며,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을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 천국의 본향에 이르도록... 믿음으로 믿음으로 승리하는 귀한 권속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27) 이제 예수님의 가상칠언중에 세 번째 말씀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3:27절에 보면 \"또 다른 백성과 및 그를 위해 슬피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했습니다. 여기서 백성은 구경하려고 따라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언덕을 오르는 많은 무리의 여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가슴을 치며 울며 따라왔습니다. 이 여인들은 주님의 고통을 자신들의 아픔처럼 여기고 가슴을 쳤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일을 마치자 백성들도 돌아갔고 여인들도 대부분 돌아갔다. 그러나 끝까지 돌아가지 아니하고 남아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9:26절에 의하면 예수의 모친 마리아, 그리고 이모는 살로메로서 세베데의 아내(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그리고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또 막달라 마리아... 도합 4명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그 옆에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친과 사랑하는 제자들이 곁에 선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시니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자여!\" 라는 말씀을 통해서 흔히 우리는 왜 예수님은 그의 어머니를 존칭어를 쓰지 않고 \"여자여!\" 라고 했는지 이상하게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여자여!\" 라고 부르는 말은 비하하는 칭호같지만 사실 헬라어에서는 비하의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1) 슬픔을 위로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왜 \"어머니\" 라고 부르지 않으셨을까?... 예수님은 슬픔에 가득찬 보통의 여인 마리아에게 \'어머니\' 하고 부름으로... 그의 마음을 더이상 격동케 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슬픔을 위로하시는 모습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이러한 마리아의 마음을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은 또한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이 솟았을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엎드려 있는 나다나엘의 마음을 들여다보신 주님,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여인의 마음을 들여다보신 주님. 어느 물고기 뱃속에 돈이 얼마나 있는가 하는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 가룟 유다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이신데....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을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라고 부르심으로... 자신이 구속의 주가 되심을 상기시키시고 어머니의 슬픔을 위로하며 자제시키시는 배려의 모습인 것입니다. 2) 효도의 계명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지 않는 불효 막심한 자들이라고 비난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모르는 말씀입니다. 돌아가신 분에게 진수성찬을 차려서 드리고,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으므로... 살아계실 때 잘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처럼 실질적인 효도를 강조하는 종교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십계명 중에 인간에게 주신 가장 첫 번째 계명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하신 말씀입니다(출20:12). 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장수의 복을 약속하신 복된 계명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하고 효도하는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3:31절 말씀을 보면.... 스승의 어머니도 내 어머니요, 성도는 주 안에서 한 형제요, 부모인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가복음 3:35절 말씀에서도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주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가 되고 가족이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한 가족과 같이 윗사람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예수님께서 4번째로 남기신 말씀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때가 육시 우리의 시간으로 12시, 정오가 될 때,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 즉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는데,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를 지르시기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외치셨습니다. 이를 해석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이 남기신 이 네 번째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1) 죄의 삯(값)은 사망인 것을 가르쳐 줍니다. 고통이 극심한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절규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돌이키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돌아보지 아니하셨습니다. 로마서 6:23절 말씀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 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죄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죄의 댓가를 철저히 물으신 것입니다. 한치의 오차도 없고, 한 홀의 감함도 없이... 처절히 그 죄의 댓가를 지불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가 당해야 할 죄와 사망... 온갖 저주와 고통, 질고와 슬픔, 멸시와 천대, 허물과 죄악, 병듦과 상함을 다 담당하신 것입니다. 2) 죄악의 담을 허무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 순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은 죄악의 담을 허무시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이 숨을 거두는 순간 마태복음 27:51절 말씀에 보면,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소의 휘장\'이란 무엇입니까? 이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구분하는 휘장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소 안의 지성소는 일년에 단 한차례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대제사장 외에 누구든지 이 지성소에 들어가면 죽음을 면할 수 없고 설령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잘못된 의식을 행하거나 부정하면 죽음을 당하였던 곳입니다. 이 휘장은 얼마나 튼튼한지 아주 두꺼운 가죽으로 되어 있어서 양쪽에서 소가 당긴다고 해도 찢어지지 않을 매우 튼튼한 휘장으로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숨을 거두는 순간, 이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좍- 찢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찢어질 수 없는 일로서, 이는 곧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완전히 허물어 버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지성소 안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또한 들어가도 되었습니다. 정말로 아무도 죽음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활짝 열려진 것을 의미합니다. 제사장을 통해서만 속죄하던 구약시대는 이제 지나가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고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14-16절 말씀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3) 끝까지 순종하시는 모습입니다. 또한 \"엘리, 엘리\"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라는 말씀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끝까지 순종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이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사무엘상 2:6절에 보면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했습니다. 전폭을 하나님께 맡기시는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도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께 전폭을 맡기는 신뢰와 신앙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우리 인간과 똑같은 성정을 가지신 예수님, 아픔을 알고 고통을 알고, 저주와 모욕을 아시지만... 주님의 이 모습은 십자가의 대속의 사명을 끝까지 순종하시는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마치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잠잠히 순종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3:7절 말씀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했습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남기신 가상칠언의 말씀중에 4언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음미해 보면 우주 최대의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있었던 러브스토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예수님은 사랑의 화신이며, 성령은 사랑의 영이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의 삼일성 속에 특별히 선택되어 빨려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기도란 사랑의 밀어요 복음 전도는 사랑의 전달, 혹은 사랑의 중매이며, 찬송은 사랑의 노래인 것입니다. 갈보리 십자가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나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다가 죽으신 곳이요,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고, 한 손으로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사랑의 심장이 파열된 곳입니다. 그 고귀한 갈보리 십자가상에서 주님이 남기신 마지막 일곱마디가 가상칠언인 것입니다. 주님이 남기신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인식하고... 더욱 더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귀한 자녀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