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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왜 공동체를 요구하나
21세기는 왜 공동체를 요구하나 2002-01-30 09:42:22 read : 43 21세기는 왜 공동체를 요구하나 하용조목사 8세기 사회 사상의 핵심이 ‘사회 계약’이었다면, 19세기 사회학 창건기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공동체’였다. 이 시기에 콩트, 퇴니스, 베버 등이 공동체 연구에 앞장섰다. 20세기 전반에는 두 차례의 전쟁에 휘말려 인류의 내일을 조망할 여유가 없었고, 1950년대 이후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극도로 첨예화 됨에 따라 소외된 집단이 늘어가면서 공동체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교회는 공동체 운동의 핵심 역량 공동체의 사상적 맥락은 전통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커다란 역사적 흐름에서 보아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한 가지는 공동체주의적 전통으로, 산업 혁명과 민족 혁명이 일어나고 도시화, 조직화, 전문화 등이 진행되어 이전의 전통 사회에서 찾을 수 있었던 안정감과 공동체 이해, 박애와 공동체 정신이 파괴되어 버렸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헤르더, 쉴러, 헤겔, 루소, 마르크스, 퇴니스를 거쳐 니스벳을 비롯한 많은 사회학자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른 한 가지는 개인주의적 전통으로, 근대화를 전통 사회로부터의 개인의 해방 과정으로 파악하여 인간의 자유와 이성 및 자유로운 의지를 주장하는 흐름이다. 홉즈, 흄, 벤담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의 이론 가운데 퇴니스의 공동체 개념의 유형론적 분석은 공동체적 중세 유럽이 산업화된 근대적 형태로 역사를 이행하는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탁월한 이론이다. 그는 유럽 사회의 발전은 ‘합일적 공동 사회’로부터 ‘결합적 공동 사회’로, 그 다음에는 ‘결합적 이익 사회’로부터 ‘합일적 이익 사회’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합일적 공동 사회는 혈연, 지연, 친족을 중심으로 한 사회를 말한다. 결합적 공동 사회는 공통된 일과 소명, 신념에 따라 모인 길드, 동업 조합, 교회, 성직 등을 말한다. 결합적 이익 사회에 이르면 비인격적 경쟁인 이기주의가 점점 지배하는 현상과 함께 인간 관계의 개인화가 심화된다. 그러나 마지막 합일적 이익 사회가 되면 이익 사회적인 맥락 안에서 과거 사회의 공동체적 안전성을 어느 정도 회복하려는 사회적인 노력이 사회보장제도 등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다소 흔들리는 감은 있지만 사회적 안전망이 잘 짜여진 유럽 사회를 보면 퇴니스의 사회적 전망 네 단계를 이미 거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에 비해 미국적 신자유주의 노선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합일적 이익 사회로의 전망이 불투명한 것처럼 보인다. 19세기 사회 사상가들은 시민 혁명과 산업 혁명을 통하여 얻은 것은 개인 자유와 기계 생산이었고, 잃은 것은 공동체적 삶과 형제애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공동체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한국 사회 역시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공동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21세기 사회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우리는 공동체적 삶이야말로 억압적(공동체주의가 아닌)현대인과 인류가 절실하게 추구하는 미래 사회의 이상적 삶이라는 가치를 재발견하고 있다. 그러나 퇴니스가 결합적 공동 사회로 분류한 교회마저 경쟁과 이기심이 난무하는 이익 사회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회복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 이상향을 이 땅에 심어 가야 할 인류 공동체의 유일한 핵심 역량인 교회가 본분을 잊어버리고 휘청거리고 있는 것이다. 시대가 요구하는 공동체 운동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철저한 물질 문명의 사회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철저한 경쟁의 원리가 적용되는 사회이다. 경쟁에서 뒤처지는 개인은 늘 희생될 수밖에 없는 사회이다. 여기서 인간의 소외가 발생하고 이로 인한 병리 현상이 나타난다. 전세계적으로 최강국인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강성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그와 동일한 정책 기조에 편승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앞날이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소수의 자본주의 승리자들 뒤에는 다수의 땀, 눈물, 고통이 그늘진 채로 고착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쟁의 원리를 협동의 원리로 대체하고, 나눔과 연대의 사회 질서를 만들어 나가는 일, 이것만이 사회 전체의 행복을 만들어 가는 길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와 같은 인식 아래 공동체 운동을 펼쳐가는 다양한 그룹들이 있다. 공동체의 성격과 관련해 가드너라는 학자는 1960년대 이후 미국 공동체 운동을 예로 들어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무정부주의적이고 자유분방하며 구조화되지 않은 공동체이다. 히피운동이 그 예이다. 둘째는 종교적 지향이 강하며 질서가 잡혀 있고 권위주의적이며 위계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공동체이다. 부르도프나 후터 공동체가 그 예이다. 캔터라는 학자는 이를 다른 표현으로 은둔 공동체와 봉사 공동체로 표현한다. 은둔 공동체는 외부 사회의 압력에서 벗어나기를 추구하며 성원들 사이에 가족 같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는 통제 방법을 발전시키기 어렵고 구성원의 헌신도 얻어내기 어렵기 때문에 지속하지 못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나 봉사 공동체는 특정한 범위의 인구에 봉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물론 이 두 가지가 혼합된 경우도 많기에 이 분류 방법은 한계를 갖지만, 공동체의 주요 기조를 분류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우리 나라에서 최근에 부각되고 있는 공동체 운동은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연친화적인 삶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시골로 이주하여 생태 마을을 만들어 가는 생태 공동체 운동이다. 또한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인 삶의 형태로서 공동 소유, 공동 생산, 공동 소비를 추구하는 소공동체 운동들이 농촌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한편 도시에서는 지역 현안에 대응하는 지역 공동체 운동과 아파트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주거지 중심의 공동체 운동도 크게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역 현안에 대응하는 공동체 운동으로는 댐 건설 반대 운동과 공해 공장 이전 운동 등 지역 주민이 공동의 이해 관계를 갖고 있는 사안들에 대해 함께 대응해 나가는 운동이다.동강댐의 경우는 운동 초기부터 교회가 참여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지역 이기주의가 스며들 위험이 있고 일시적 목표를 위해 모이기 때문에 지역 공동체로서의 미래상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협동조합운동으로서의 공동체 운동은 현대 산업 사회의 문제점들을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소비하는 공동체를 통해서 해결하려는 운동이다. 유기농산물을 소비자에게 직거래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 운동은 도시와 농촌간에 상부상조하는 새로운 관계 설정과 농촌 지역의 자립성 강화 등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많은 교회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강한 의식성을 바탕으로 좁은 지역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자급 자족적인 공동체 운동들이 있다. 기독교 운동인 두레마을과 비종교 운동인 무주 생태마을 등이 그 예이다. 이들은 현대 자본주의 체제와 생산 관계에서 인간 소외 그리고 자연 소외의 문제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대안을 찾고자 하는 운동들이다. 그러나 폐쇄적이기 때문에 보편성을 갖기 힘들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교회가 아파트 공동체 운동을 일으키자 한편 우리 시대의 주된 주거지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아파트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운동도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다. 우리 사회에 아파트가 들어선 지는 35년이 지났고, 그 동안 정부의 주택 공급 정책에 의해 도시 지역에서의 아파트 주거는 50%를 넘고 있으며 대도시의 경우는 70%를 넘고 있다. 지금까지의 아파트 공동체 운동은 주로 건축 하자 문제에 대한 대응이나 관리비 부정 문제와 절감 방법 등에 대한 감시와 관리 차원의 운동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1998년 2월 참여연대 아파트공동체연구소가 창립된 것을 비롯하여, 경실련, 녹색 소비자 연대, 녹색연합, 여성 민우회, YMCA 등 시민 단체들은 ‘녹색아파트 만들기’ 등의 명칭으로 아파트 관련 운동들을 펼치면서 이웃 알기, 공동체 마을 만들기, 환경 교육 등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정부도 ’99년 3월에 제2건국위원회에서 지역 공동체 운동의 일환으로 자원봉사자 운동과 함께 아파트 공동체 운동을 선정하여 아파트 공동체 운동 관련 사업에 정부 예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시작된 운동이 동아일보와 주거문화21이 펼치고 있는 공동체네트웍국민운동이다. 이 운동의 의의에 대해 양주모 사무처장은 “아파트는 주거 생활의 편리성이라는 큰 혜택을 입주민에게 제공하고 있지만 고밀도 집합형, 폐쇄성의 특성으로 인해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게다가 관심도 없어 공동체 문화 해체라는 중대한 문제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운동의 목적은 아파트 단지마다 홈페이지를 통해 서로를 알고 도움을 주고 받음으로써 이웃과 함께하는 따뜻한 마을 문화를 회복하자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 이 운동에는 250개의 홈페이지가 운영되고 있고 운영도 주민의 자원봉사로 이루어지고 있다. 올해에는 6개 광역시를 대상으로 하여 1,000개의 홈페이지가 제작, 운영될 예정이다. 이 운동은 아파트를 비리 감시의 대상이 아니라 격려와 축복의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공동체 이념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가 새로 조성되면 인근의 교회들은 경쟁적으로 전도에 열을 올린다. 한 집에 여러 교회의 안내지와 선물이 전달된다. 이같은 전도의 열정도 귀한 것이지만 아파트 주민의 가장 약점인 서로를 알게 해주는 다리의 역할과 소원한 관계에 따뜻한 사랑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이 절실히 필요하다. 공동체네트웍국민운동에 이같은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대거 참여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교회 안으로 사람을 데려올 생각에만 매몰되어 있지 말고 세상에 나아가 자신이 사는 지역 주민을 돕는 네트웍 봉사자로 나선다면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 사도로서의 한 역할을 하는 것이리라. 21세기 문턱에서 1세기를 되돌아 보는 까닭 지금까지 살펴 본 것은 교회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동체 운동의 흐름이다. 이처럼 경쟁과 효율을 시대의 중심축으로 하여 몰아치는 자본주의 격류 속에서도 하나됨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원공동체로의 구심력은 계속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통해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공동체 소명은 무엇인가? 우선 첫 번째는 회개일 것이다. 공동체성서연구원장 김영운 목사는 오늘날 제도 교회의 현실을 이렇게 표현한다. “콘스탄틴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제도화된 교회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면서부터는 특히 힘의 우위와 물질적 풍요만이 미덕이요, 축복인양 여기며 살아왔다. 더욱이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물질적 자기 이익과 물질적 생존에 관심이 쏠리면서 세상의 가치관이 여과되지 않은 채 교회의 가치관을 압도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성공의 신화’와 ‘성장의 모형’과 ‘힘의 논리’와 더불어 ‘물질적 축복’이 교회 안에서조차 공동체성의 의미와 의의를 거의 퇴색시키고 말았다.” 성공과 돈과 교인 숫자의 위력 앞에서 일시적으로 위축되기는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순결한 신앙 양심과 내면의 신앙 논리마저, 세상적인 성공 논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크리스천 리더십들의 힘 앞에서 굴복한다면 한국 교회의 희망은 없다. 경쟁보다는 협력과 연대, 섬김과 하나됨을 강조해야 할 리더십들이 경쟁을 부추기는 성공, 고지 점령, 파워 크리스천 등의 구호를 앞세우며 열등감을 자극하는 것은, 연약한 자를 위로하고 기다려 부축하고 나가야 할 목자의 마음을 저버린 논리가 아닐까? 세상은 남을 밟고 앞서가는 논리로 앞서가더라도, 우리는 세상에서 넘어진 자를 일으켜 더디 가더라도 함께가는 하나됨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야 할 거꾸로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과 똑같은 논리로 경쟁하는 교회를 세상은 구원의 방주로 생각할 것인가? 지금은 세상의 원리를 따라 우리의 탐욕을 한껏 부풀려온 종교적 껍데기를 벗어놓고 회개의 무릎을 꿇어야 할 때이다. 두 번째는 교회 구조를 ‘목사의 교회’에서 ‘공동체 모두의 교회’로 바꾸어야 한다. 현대 교회의 목회는 전체 그리스도인의 사역이라기보다 안수 받은 목사나 교육받은 전문인이 절대 다수의 그리스도인을 돌보는 사역으로 고착되어가고 있다. 교회는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서로 돌아보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살아있는 유기체적 공동체이다. 이러한 구조는 네트워크 시대인 21세기가 요구하는 구조이기도 하다. 세 번째는 공동체를 수단화하지 말고 목적화해야 한다. 대형 교회를 관리하는 수단으로서 셀 그룹이나 공동체를 일시 도용하는 것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이다. 제자 훈련도 지상명령의 성취 이전에 공동체의 완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도시 공동체 쉴터 대표 석금호 목사는 “예수님이 의도한 작은 제자 공동체의 본질은 제자 훈련이 아니라 ‘관계성’이었다. 이것이 예수님 공동체의 본질이었다. 예수님의 바람은 스스로 택한 방식인 공동체를 통해서 영원히 희석되거나 약화되지 않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21세기의 문턱에서 1세기의 사도적 공동체를 되살피고 또 살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에 다니는 이들은 많아도 정말 교회가 무엇인지, 참 예수 공동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 아닐까? 유종성/ 「소금과빛」 기자.
21세기는 왜 공동체를 요구하나?
21세기는 왜 공동체를 요구하나 하용조 목사 8세기 사회 사상의 핵심이 ‘사회 계약’이었다면, 19세기 사회학 창건기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공동체’였다. 이 시기에 콩트, 퇴니스, 베버 등이 공동체 연구에 앞장섰다. 20세기 전반에는 두 차례의 전쟁에 휘말려 인류의 내일을 조망할 여유가 없었고, 1950년대 이후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극도로 첨예화 됨에 따라 소외된 집단이 늘어가면서 공동체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교회는 공동체 운동의 핵심 역량 공동체의 사상적 맥락은 전통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커다란 역사적 흐름에서 보아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한 가지는 공동체주의적 전통으로, 산업 혁명과 민족 혁명이 일어나고 도시화, 조직화, 전문화 등이 진행되어 이전의 전통 사회에서 찾을 수 있었던 안정감과 공동체 이해, 박애와 공동체 정신이 파괴되어 버렸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헤르더, 쉴러, 헤겔, 루소, 마르크스, 퇴니스를 거쳐 니스벳을 비롯한 많은 사회학자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른 한 가지는 개인주의적 전통으로, 근대화를 전통 사회로부터의 개인의 해방 과정으로 파악하여 인간의 자유와 이성 및 자유로운 의지를 주장하는 흐름이다. 홉즈, 흄, 벤담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의 이론 가운데 퇴니스의 공동체 개념의 유형론적 분석은 공동체적 중세 유럽이 산업화된 근대적 형태로 역사를 이행하는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탁월한 이론이다. 그는 유럽 사회의 발전은 ‘합일적 공동 사회’로부터 ‘결합적 공동 사회’로, 그 다음에는 ‘결합적 이익 사회’로부터 ‘합일적 이익 사회’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합일적 공동 사회는 혈연, 지연, 친족을 중심으로 한 사회를 말한다. 결합적 공동 사회는 공통된 일과 소명, 신념에 따라 모인 길드, 동업 조합, 교회, 성직 등을 말한다. 결합적 이익 사회에 이르면 비인격적 경쟁인 이기주의가 점점 지배하는 현상과 함께 인간 관계의 개인화가 심화된다. 그러나 마지막 합일적 이익 사회가 되면 이익 사회적인 맥락 안에서 과거 사회의 공동체적 안전성을 어느 정도 회복하려는 사회적인 노력이 사회보장제도 등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다소 흔들리는 감은 있지만 사회적 안전망이 잘 짜여진 유럽 사회를 보면 퇴니스의 사회적 전망 네 단계를 이미 거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에 비해 미국적 신자유주의 노선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합일적 이익 사회로의 전망이 불투명한 것처럼 보인다. 19세기 사회 사상가들은 시민 혁명과 산업 혁명을 통하여 얻은 것은 개인 자유와 기계 생산이었고, 잃은 것은 공동체적 삶과 형제애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공동체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한국 사회 역시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공동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21세기 사회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우리는 공동체적 삶이야말로 억압적(공동체주의가 아닌)현대인과 인류가 절실하게 추구하는 미래 사회의 이상적 삶이라는 가치를 재발견하고 있다. 그러나 퇴니스가 결합적 공동 사회로 분류한 교회마저 경쟁과 이기심이 난무하는 이익 사회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회복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 이상향을 이 땅에 심어 가야 할 인류 공동체의 유일한 핵심 역량인 교회가 본분을 잊어버리고 휘청거리고 있는 것이다. 시대가 요구하는 공동체 운동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철저한 물질 문명의 사회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철저한 경쟁의 원리가 적용되는 사회이다. 경쟁에서 뒤처지는 개인은 늘 희생될 수밖에 없는 사회이다. 여기서 인간의 소외가 발생하고 이로 인한 병리 현상이 나타난다. 전세계적으로 최강국인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강성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그와 동일한 정책 기조에 편승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앞날이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소수의 자본주의 승리자들 뒤에는 다수의 땀, 눈물, 고통이 그늘진 채로 고착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쟁의 원리를 협동의 원리로 대체하고, 나눔과 연대의 사회 질서를 만들어 나가는 일, 이것만이 사회 전체의 행복을 만들어 가는 길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와 같은 인식 아래 공동체 운동을 펼쳐가는 다양한 그룹들이 있다. 공동체의 성격과 관련해 가드너라는 학자는 1960년대 이후 미국 공동체 운동을 예로 들어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무정부주의적이고 자유분방하며 구조화되지 않은 공동체이다. 히피운동이 그 예이다. 둘째는 종교적 지향이 강하며 질서가 잡혀 있고 권위주의적이며 위계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공동체이다. 부르도프나 후터 공동체가 그 예이다. 캔터라는 학자는 이를 다른 표현으로 은둔 공동체와 봉사 공동체로 표현한다. 은둔 공동체는 외부 사회의 압력에서 벗어나기를 추구하며 성원들 사이에 가족 같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는 통제 방법을 발전시키기 어렵고 구성원의 헌신도 얻어내기 어렵기 때문에 지속하지 못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나 봉사 공동체는 특정한 범위의 인구에 봉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물론 이 두 가지가 혼합된 경우도 많기에 이 분류 방법은 한계를 갖지만, 공동체의 주요 기조를 분류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우리 나라에서 최근에 부각되고 있는 공동체 운동은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연친화적인 삶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시골로 이주하여 생태 마을을 만들어 가는 생태 공동체 운동이다. 또한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인 삶의 형태로서 공동 소유, 공동 생산, 공동 소비를 추구하는 소공동체 운동들이 농촌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한편 도시에서는 지역 현안에 대응하는 지역 공동체 운동과 아파트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주거지 중심의 공동체 운동도 크게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역 현안에 대응하는 공동체 운동으로는 댐 건설 반대 운동과 공해 공장 이전 운동 등 지역 주민이 공동의 이해 관계를 갖고 있는 사안들에 대해 함께 대응해 나가는 운동이다.동강댐의 경우는 운동 초기부터 교회가 참여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지역 이기주의가 스며들 위험이 있고 일시적 목표를 위해 모이기 때문에 지역 공동체로서의 미래상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협동조합운동으로서의 공동체 운동은 현대 산업 사회의 문제점들을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소비하는 공동체를 통해서 해결하려는 운동이다. 유기농산물을 소비자에게 직거래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 운동은 도시와 농촌간에 상부상조하는 새로운 관계 설정과 농촌 지역의 자립성 강화 등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많은 교회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강한 의식성을 바탕으로 좁은 지역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자급 자족적인 공동체 운동들이 있다. 기독교 운동인 두레마을과 비종교 운동인 무주 생태마을 등이 그 예이다. 이들은 현대 자본주의 체제와 생산 관계에서 인간 소외 그리고 자연 소외의 문제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대안을 찾고자 하는 운동들이다. 그러나 폐쇄적이기 때문에 보편성을 갖기 힘들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교회가 아파트 공동체 운동을 일으키자 한편 우리 시대의 주된 주거지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아파트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운동도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다. 우리 사회에 아파트가 들어선 지는 35년이 지났고, 그 동안 정부의 주택 공급 정책에 의해 도시 지역에서의 아파트 주거는 50%를 넘고 있으며 대도시의 경우는 70%를 넘고 있다. 지금까지의 아파트 공동체 운동은 주로 건축 하자 문제에 대한 대응이나 관리비 부정 문제와 절감 방법 등에 대한 감시와 관리 차원의 운동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1998년 2월 참여연대 아파트공동체연구소가 창립된 것을 비롯하여, 경실련, 녹색 소비자 연대, 녹색연합, 여성 민우회, YMCA 등 시민 단체들은 ‘녹색아파트 만들기’ 등의 명칭으로 아파트 관련 운동들을 펼치면서 이웃 알기, 공동체 마을 만들기, 환경 교육 등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정부도 ’99년 3월에 제2건국위원회에서 지역 공동체 운동의 일환으로 자원봉사자 운동과 함께 아파트 공동체 운동을 선정하여 아파트 공동체 운동 관련 사업에 정부 예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시작된 운동이 동아일보와 주거문화21이 펼치고 있는 공동체네트웍국민운동이다. 이 운동의 의의에 대해 양주모 사무처장은 “아파트는 주거 생활의 편리성이라는 큰 혜택을 입주민에게 제공하고 있지만 고밀도 집합형, 폐쇄성의 특성으로 인해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게다가 관심도 없어 공동체 문화 해체라는 중대한 문제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운동의 목적은 아파트 단지마다 홈페이지를 통해 서로를 알고 도움을 주고 받음으로써 이웃과 함께하는 따뜻한 마을 문화를 회복하자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 이 운동에는 250개의 홈페이지가 운영되고 있고 운영도 주민의 자원봉사로 이루어지고 있다. 올해에는 6개 광역시를 대상으로 하여 1,000개의 홈페이지가 제작, 운영될 예정이다. 이 운동은 아파트를 비리 감시의 대상이 아니라 격려와 축복의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공동체 이념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가 새로 조성되면 인근의 교회들은 경쟁적으로 전도에 열을 올린다. 한 집에 여러 교회의 안내지와 선물이 전달된다. 이같은 전도의 열정도 귀한 것이지만 아파트 주민의 가장 약점인 서로를 알게 해주는 다리의 역할과 소원한 관계에 따뜻한 사랑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이 절실히 필요하다. 공동체네트웍국민운동에 이같은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대거 참여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교회 안으로 사람을 데려올 생각에만 매몰되어 있지 말고 세상에 나아가 자신이 사는 지역 주민을 돕는 네트웍 봉사자로 나선다면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 사도로서의 한 역할을 하는 것이리라. 21세기 문턱에서 1세기를 되돌아 보는 까닭 지금까지 살펴 본 것은 교회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동체 운동의 흐름이다. 이처럼 경쟁과 효율을 시대의 중심축으로 하여 몰아치는 자본주의 격류 속에서도 하나됨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원공동체로의 구심력은 계속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통해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공동체 소명은 무엇인가? 우선 첫 번째는 회개일 것이다. 공동체성서연구원장 김영운 목사는 오늘날 제도 교회의 현실을 이렇게 표현한다. “콘스탄틴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제도화된 교회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면서부터는 특히 힘의 우위와 물질적 풍요만이 미덕이요, 축복인양 여기며 살아왔다. 더욱이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물질적 자기 이익과 물질적 생존에 관심이 쏠리면서 세상의 가치관이 여과되지 않은 채 교회의 가치관을 압도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성공의 신화’와 ‘성장의 모형’과 ‘힘의 논리’와 더불어 ‘물질적 축복’이 교회 안에서조차 공동체성의 의미와 의의를 거의 퇴색시키고 말았다.” 성공과 돈과 교인 숫자의 위력 앞에서 일시적으로 위축되기는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순결한 신앙 양심과 내면의 신앙 논리마저, 세상적인 성공 논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크리스천 리더십들의 힘 앞에서 굴복한다면 한국 교회의 희망은 없다. 경쟁보다는 협력과 연대, 섬김과 하나됨을 강조해야 할 리더십들이 경쟁을 부추기는 성공, 고지 점령, 파워 크리스천 등의 구호를 앞세우며 열등감을 자극하는 것은, 연약한 자를 위로하고 기다려 부축하고 나가야 할 목자의 마음을 저버린 논리가 아닐까? 세상은 남을 밟고 앞서가는 논리로 앞서가더라도, 우리는 세상에서 넘어진 자를 일으켜 더디 가더라도 함께가는 하나됨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야 할 거꾸로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과 똑같은 논리로 경쟁하는 교회를 세상은 구원의 방주로 생각할 것인가? 지금은 세상의 원리를 따라 우리의 탐욕을 한껏 부풀려온 종교적 껍데기를 벗어놓고 회개의 무릎을 꿇어야 할 때이다. 두 번째는 교회 구조를 ‘목사의 교회’에서 ‘공동체 모두의 교회’로 바꾸어야 한다. 현대 교회의 목회는 전체 그리스도인의 사역이라기보다 안수 받은 목사나 교육받은 전문인이 절대 다수의 그리스도인을 돌보는 사역으로 고착되어가고 있다. 교회는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서로 돌아보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살아있는 유기체적 공동체이다. 이러한 구조는 네트워크 시대인 21세기가 요구하는 구조이기도 하다. 세 번째는 공동체를 수단화하지 말고 목적화해야 한다. 대형 교회를 관리하는 수단으로서 셀 그룹이나 공동체를 일시 도용하는 것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이다. 제자 훈련도 지상명령의 성취 이전에 공동체의 완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도시 공동체 쉴터 대표 석금호 목사는 “예수님이 의도한 작은 제자 공동체의 본질은 제자 훈련이 아니라 ‘관계성’이었다. 이것이 예수님 공동체의 본질이었다. 예수님의 바람은 스스로 택한 방식인 공동체를 통해서 영원히 희석되거나 약화되지 않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21세기의 문턱에서 1세기의 사도적 공동체를 되살피고 또 살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에 다니는 이들은 많아도 정말 교회가 무엇인지, 참 예수 공동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 아닐까? 유종성/ 「소금과빛」 기자.
가상 현실과 교회의 대응
가상 현실과 교회의 대응 Ⅰ. 들어가는 말 어떤 건장한 남자가 문앞에 서서 카드키( card key)를 가지고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간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 본 다음 책상 위에 놓인 헬멧과 특이하게 생긴 장갑을 낀다. 그리고 잠시후 그는 발차기를 비롯해 찌르기를 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한다. 그는 마치 실제로 싸움을 하는 듯 하다. 미친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가상 현실 프로그램을 이용해 무술을 수련중 이었다. 이런 내용은 어느 영화에서 상영되었다. 요즈음 들어 부쩍 컴퓨터의 관심이 높아지고 생활이 고도의 정보를 통한 세계화 추세에 들다보니 컴퓨터를 모르는 사람은 '컴맹'으로 불리우며 무시 당하는 세태이다. 특히 컴퓨터의 발달이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이제 컴퓨터는 기계를 떠나 생활이 되지 않을까 우려도 된다. 요즘들어 가장 관심을 끄는 컴퓨터 프로그램 가장 널리 쓰이는 게임등은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만도 대기업에서 조차 가상 현실 게임산업에 손을 댔다고 하니 가상 현실이 우리 생활에 얼마큼 영향을 주며 얼마나 널리 쓰이게 될지 환하게 알 일이다. 가상 현실이 각광 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가상 현실은 구성이 복잡한 만큼 광범위한 응용 분야를 창출할 수 있고 기술적인 면에서도 커다란 변혁과 전환을 몰고 올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러분야의 관련 기술을 하나로 집약시키는 한편 그 결과를 실생활에 접목 시킬수 있다는 점이 단지 컴퓨터 기술의 하나로 보기에는 너무나 큰 파급 효과를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이다. Ⅱ가상현실과 미래 1. 가상 현실(Virtual Reality) 란 무엇인가 요즘 신문에서 "가상 현실을 이용한 xx 개발" 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가상'과 '현실' 이라는 이질적 의미를 담고 있는 두 단어가 하나로 합쳐진 새로운 기술의 이름은 이미 그 실체 보다도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물론 이미 실제로도 군사분야와 교육, 인텔리어, 분야에서는 초보적인 실용화를 이루고 있기는 하다 수년 전 나온 '토탈리콜' 이나 '론머맨' 같은 미국의 공상 영화에[ 등장해 흥미를 끌었던 이 기술은 사람들에게 "머리로 떠올릴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실현이 가능한" 놀라운 기술로 이해되고 있다. 실제로 가상 현실이란 개념은 정의 자체부터 매우 모호하다. 단어 자체가 가상(Virtual)과 현실(Reality) 이라는 상반된 의미를 하난로 묶었을 뿐 아니라 가상 현실을 구현하는 기술도 하드웨어와 소프트 웨어를 포함하는 컴퓨터 기술 뿐 아니라 심리학 생리학 인간공학등의 다양한 분야가 망라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상 현실이란 "컴퓨터를 이용하여 가상적인 환경을 만들어 그 환경내에서 3차원의 의사체험(擬似體驗)을 가능하게 하는 첨단 기술"로 정의될 수 있다. 즉 가상 현실은 실제 물체는 없지만 이를 시뮬레이션해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느낌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2. 가상 현실의 역사 가상현실이라는 말이 일반인에게 거부감없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이 용어가 정착되기 전에는 가상 환경(Virtual environment) 인공현실(Artficial reality) 인공 두되공간(Cyber space) 등으로 이름이 불리웠는데 이 같은 용어의 흔재는 그 개념을 확실히 설정하는데 적 잖은 장애 요소로 작용했다. 가상 현실에 대한 연구는 60년대 중반 CAD의 원조로 불리우는 MIT의 이반 서덜랜드 교수에 의해 시작 된다. 넓은 의미의 컴퓨터 그래픽 기술인 CAD가 가상 현실(Virtual Reality)의 모태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컴퓨터 그래픽은 대상물을 수치화시켜 실시간 내에 표현하고자 하는데 3차원의 실세계를 평면으로 표현하는 데는 어딘지 답답하기 때문이다. 컴퓨터 그래픽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가상 현실은 3차원 공간을 표현하는데데이타를 컴퓨터에 기억시켜 그 가상공간에서 인간의 눈에 들어오는 장면을 디스플레이에 기억시키고 표시하는 것이다. 이 때 가상 공간에 있는 인간의 위치는 마우스 등의 입력기에 의해 이동 시킬수 있고 그에 따라 보이는 장면의 변화를 계산해 낸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에 인공 지능이나 산업공학, 등의 연관 과학 학문이 어우러지면서 가상 현실(Virtual Reality)기술이 본격화 된 것은 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였다. 특히 멀티 미디어의 발달에 따른 음성 인식과 화상처리 기술의 진보는 이를 통합한 기술의 하나로 가상현실의 출현을 예고 하고 있었다.85년 미항공 우주국(NASA)은 좁은 우주선의 복잡한 작업을 단순화 하기 위하여 3차원 데이터 공간을 비행하며 몇 개의 컴퓨터 조작 패널로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며 우주선 외부에서도 우주복을 입은채 조작할 수 있는 VIEW(Vitual Intreface Environment Workstation)을 만들었다. 사진이 최초로 발명된 것은 19세기 중반이었고 텔베비젼이나 영화관이 등장한 것도 20세기 초에 불과하다. 이들 매체는 모두 사물을 2차원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발명 당시 사람들에게 준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2차원의 한계를 넘어서 3차원의 표현방법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이들 발명품보다 앞서 일어났다는 것이다.그리고 그 동안 좀더 현실감 있는 입체 이미지에 접근하고자 수 많은 입체경에 발명되어 왔으며 그 맥은 오늘날 가상현실시스템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입체화 발견에 대한 연구는 1백 50년 전에 휘트스톤 이란 인물이 프리즘과 거울을 사용한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최초의 입체경을 발명해 명성을 얻은바 있는 그는 사람의 양쪽 눈이 보는 이미지 차이가 입체적인 깊이를 지각 시킨다는 사실을 영국학술원에 보고했다. 그는 마주 향하는 이미지들을 반사시키기 위해 45°각도의 거울을 사용해 두 개의 사진이 보는 사람의 눈을 향해 반사되도록 측면에 배치했다. 이 거울 입체경은 비교적 간단한 장치로 눈에 하나씩 2개의 2차원 그림을 제공함으로써 기술적으로 망막의 불일치를 만들었다. 렌즈없이 보는 유일한 입체경인 이 발명품은 이 후 관찰자의 눈 사이 거리와 이미지의 크기를 조절하는 렌즈가 부착돼 정교함을 더했다. 한편 무작위 점 입체화(random - dot stereogram)라 불리우는 입체 기술에 대한 최초의 아이디어는 베라 유레즈라는 사람에 의해 고안된 것이다. 얼마전 관심을 끌었던 '매직아이(magic eye)'라는 것은 바로 이 무작위 점 입체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난수표에서 힌트를 얻어 흑백의 점으로 그려낸 두장의 그림을 일정한 방법을 통해 보면 입체적인 도형이 떠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인간의 두눈이 양안 시각을 갖는 다는 것과 대상인식은 항상 입체시 (立體視) 이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레즈의 발견 이전까지 사람들은 한눈의 대상물 인식은 입체시전에 일어나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는 두눈의 영상은 두뇌의 중간 지점에서 합쳐지고 깊이가 인식되기 때문에 편시야 시각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시초로 그 후 입체 환경을 통해 보는 입체 영화와 3-D 영상기법이 발전하게 되었다. 데이비드 부르스터라는 인물은 양쪽 눈이 정확히 다른 그림을 보는데 도움이 되는 렌즈를 사용한 입체경을 발명했는데 오늘 날에도 사용되고 있는 이 발명품은 두눈이 같은 광경을 보는 것을 막기위해 두 개의 렌즈 사이에 경계 분리기가 동시에 놓여 있다. 이것은 후에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뷰마스터(View Master) 라는 간단한 입체 그림을 보는 도구로 발전하게 된다. 3. 인간과 가상 현실 1)생활속에 파고드는 가상현실 우리 주변에도 가상 현실 기술을 응용한 예가 적지 않다. 가장 구체적으로 가까운 예가 가상 현실 게임관인 어뮤즈21관이다(이 곳은 HMD를 착용하고 바깥 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채 게임하는 곳이다.) 가상 현실의 응용 분야는 비단 흥미 위주의 오락만은 아니다. 산업용으로도 큰 호응을 얻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한새퍼시스가 시도한 가상 부엌 시스템이 있다. 부엌용 가구를 일일이 설치하지 않아도 입체 영상을 통해 위치를 바꿀 수 있으며 냉장고나 싱크대 등을 가상 세계안에서 사용할 수 있다. 동아 건설도 가상 모델 하우스 계획을 발표해 주위의 관심을 끌었다. 아파트를 구하기 위해 모델 하우스를 찾아다닐 필요없이 아파트 데이터 베이스를 통해 원하는 스타일의 아파트를 고를 수 있는 시스템이다, 특히 아파트 실내에 들어가 걸어다닌다거나 베란다에서 바깥 풍경을 감상하는 것은 물론 벽제나 바닥제의 촉감을 느낄수 있다. 2)컴퓨터 문화를 새롭게 정의 가상 현실이 컴퓨터 관련업계에 일으키는 파장은 단순히 활용 분야가 많다는 이유외에 하나가 더 있다. 바로 가상현실의 인터페이스이다. 실제로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장비를 사용해야 한다. 가상 현실을 대표하는 장비로 알려져 있는 HMD(Head Mounted Display)를 단순히 영상을 입체로 보여주는 장치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HMD는 출력 장치로서 역할외에 사용자의 머리 움직임이나 이동을 컴퓨터 시스템에 전달하는 입력장치로서의 역할도 겸한다. 이런 면에서는 촉각 디스플레이 장치인 데이터 글러브(장갑형태)와 바디 슈트( 옷과 같은 형태)도 마찬가지 이다. 특수 장비를 통해 감지된 인간의 동적은 컴퓨터가 처리하고 결과는 디스 플레이 장치로 보내진다. 보내진 결과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다시 컴퓨터로 보내지는 일련의 과정이 계속 반복된다. HMD는 인간의 동작을 감지함은 물론 그 동작에 대한 처리 결과를 나타내 주기 때문에 입력장치와 출력 장치의 기능을 모두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과 컴퓨터 간 상호작용의 연결 고리인 셈이다. 이런 일련의 개발과정은 키보드로 시작해서 마우스로 이어져 온 컴퓨터와 인간간의 인터페이스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우선은 인간이 컴퓨터가 할 일을 하나 하나 지시해야 하는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 말이나 손짓 등 일상적인 행동만으로 원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게 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컴퓨터를 단순한 작업도구가 아닌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하나의 개체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3)인간 연구가 기초 가상 현실을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은 매우 광범위하다. 컴퓨터와 관련된 하드웨아 소프트웨어 외에도 인간의 감각 기관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심리학 생리학 인간공학 등의 바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중 가장 비중이 큰 것은 역시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 웨어이다. 3차원 영상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는 시각 장치로는 HMD외에도 레이저 광선을 이용한 홀로그래피 등이 있다. 또 이를 뒷받침하는 소프트 웨어는 일반 3차원 그래픽보다 빠른 속도로 랜더링해야 함은 물론 사용자의 시점(view point) 변화에 따라 물체의 모든 면을 연출해 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컴퓨터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 자체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면 가상 현실 시스템은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감각이 어디에서 어떻게 감지되어 대뇌에 전달되는 지 알아야 인간 감각 기관의 어디를 어떻게 자극해서 전달할 것인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여주는 주체인 가상 현실 시스템과 그것을 즐기는 인간을 연결하는 인터페이스 또한 이에 걸맞게 진보된 것이어야 한다. 4) 가상 현실과 오감 가상 현실의 작용을 살펴보면 가상 현실을 이루는 요소들을 알 수 있다. 우선 가상 현실 시스템은 실체 세계에 있는 인간의 동작을 측정하고 입력할 수 있는 기기를 사용한다. 그 다음 입력받은 동작을 컴퓨터가 관장하는 가상 공간에 전달해 작용과 반응을 일으킨다. 이때 가상공간은 인간의 동작에 대응해 영상과 소리 체감등 다양한 감각 정보를 합성한 후 이를 특수한 하드웨어를 통해 인간에게 전달한다. 이런 일련이 과정들을 통해서 사용자는 실제 세계에서 컴퓨터가 만들어 낸 가상의 공간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가상 현실 시스템의 주요 임무는 인간의 오감을 통한 체험의 전달이기 때문에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에 대한 정확한 감성공학을 필요로 한다. 가상 현실의 공학적인 명제는 다름아닌 경험의 전달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또한 가상 현실의 효과를 충분히 나타내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각에 대한 이해와 새로운 감각 전달 방법의 개발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가상 현실은 기술적 차원의 진보뿐 아니라 인간적 요소에 대한 고려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1) 시각 디스플레이 (Display)장치 인간이 감각을 받아들이는 상당 부분은 시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가상 현실 시스템에서 각각 디스플레이 장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눈앞에 소형 컬러 액정 디스플레이를 고정시켜 3차원 영상을 보게 하는 HMD는 시각 디스플레이 장치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머리에 착용하는 헬멧 형식으로 머리의 움직임을 측정한는 센서를 함께 장착하고 있다. 또한 헬멧의 각도와 높이를 실시간으로 측정해 CGI(Computer Generated Imagery)시스템을 관리하며 약 135°의 넓은 시야에 걸친 화상을 비춰준다. HMD의 성능중 하나 중요한 것은 넓은 시야를 확보해 가상 세계에 몰입과 존재의 감각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인데 실재로 인간은 수평으로 155°의 시야를 갖기 때문에 넓은 시야를 제공하는 HMD일수록 보다 사실감 있는 가상 활경을 즐기는데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 HMD에도 문제점이 있다. HMD는 형태나 외양 및 기능에 있어서 다양하지만 모두 불편하다는 공통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며 시야의 크기와 직결되는 액정의 크기, 해상도, 새로운 이미지를 그리기 위해 걸리는 시간(Frame refresh rate), 머리에 장착함으로 해서 야기되는 위생상의 문제, 중량, 누의 피로감, 화면과 동작의 불일치로 인한 감각 기관의 혼란등이다. 또한 많은 케이블로 인해 이동에 제한이 있다는 결점도 가상 현실 시스템의 사용에 가장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첫 번째 난제는 낮은 해상도롤 인해 눈의 피로와 현실감 감쇄의 원인이 된다. 두 번째 문제점은 아직 그래픽 처리속도가 사람의 반응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점은 아직 그래픽 처리속도가 사람의 반응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시점 이동에 대한 실시간 화상처리가 약간 높다. 센서에서의 시간 자체는 시스템과 그래픽 시스템에서 비롯되는 시간 지체와 함쳐져 시스템이 반응하기 ¼-⅓초 이전의 위치가 HMD에 의해 전달된다. 따라서 사용자가 고개를 돌릴 때 가상의 그래픽 세계가 시야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현저한 시간 지연이 생기게 된다. 이런 현상은 사용자에게 방향감각의 혼란을 야기하는 등 후유증을 남기기도한다. 세 번째 머리에 장착함으로써 야기되는 위생상은 문제, 중량, 피로감, 장시간 착용시의 멀미 증상 등이다. 현재 발표된 상업용 HMD의 경우 무게가 보통 2㎏인데 현실감을 충족시키기에는 너무 무겁다. 그리고 HMD의 특성상 눈앞의 무게 비중이 커서 HMD가 앞으로 처지지 않게 손으로 잡고 머리를 회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초당 프레임수인데 TV정도의 화면에서는 매초 30프레임 이하면 보이는 것이 불안정해 눈이 피로해 진다. 현제의 가상 현실 기술은 10-20프레임 정도가 한계이다. 이 종도의 화상을 10분이상 계속 사용한다면 모니터를 10시간 사용한 것과 같다는 보고 결과도 있다. 다섯째로 HMD를 착용한고 있는 동안은 오직 한 장소로 활동이 제한도며 가상 세곙 이외의 환경에서 작업이 필요할 때마다 장치를 벗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HMD의 문제점은 현실재적응이라는 문제로 집중된다. 감각궤한의 지연 실세계의 경험과 가속 운동으로 인한 시각 및 전정기관 체성감각기관에서 대뇌로 전달되는 감각 사이에 불일치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대뇌가 혼란을 일으키게 되고 어지럼증 피로감 구토 땀흘림 방향감각의 상실 복부팽만감 등의 증세가 나타난다. 이를 전문 용어로 사이버 병(Cybersickness) 이라고 부르는 데 보통 가상현실을 체험한 후 장시간 쉬었다가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청각디스플레이 장치 가상 현실에 사용되는 음향은 HMD에 연결돼 시각과 동시에 작동한다. 현재 사용되는 이 분야의 기술수준은 스테레오로 입체음향을 재생하는 정도지만 홀로포닉스라는 신기술의 접목이 시도하고 있다. 홀로포닉스는 3차원 공간내에서 눈을 감고도 소리가 나는 곳을 감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움직임에 따라 그 감지도가 변화해 생생한 소리를 제공하는 음향기술이다. 귀는 눈과 마찬가지로 입체적인 음향을 들을 수 있는 데 사물의 위치와 얼마나 먼곳에 있는지를 뇌가 판단하도록 해준다. 중이(中耳)에는 서로 연결된 세 개의 뼈가 있어 소리 에너지를 고막으로부터 액체가 차 있는 내이 (內耳)로 보낸다. 갑자기 큰 소리가 나면 이 뼈를 고정하는 근육이 음향반사작용을 일으켜 조여지고 이 때문에 내이에 도달하는 에너지의 양을 최고 100분의 1정도로 감소시켜 준다. 이 근육은 지속적인 큰소리에 대해 10분이상 버틸수 없다. 귀는 또 어떤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주파수를 여과함으로써 주의를 집중할 수 있다. 연구에 의하면 맹인이나 눈을 가린 어른이 반사되어 돌아오는 휘파람 소리로 최고 3미터 까지 떨어진 곳에 물체가 있는 지 없는 지를 알수 있다. 강한 오디오 이미지는 사물에 대한 공간적 정보를 제공하며 체험자에게 가려진 가상존재를 알려줄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공간적 단서는 귀와 귀사이에 이르는 소리의 세기와 귀에 도달하는 소리의 시간 지연에 차이가 있다. 가상 현실 시스템에서 소리의 역할은 현장감을 증가시키는 데 있다. 일반 스테레오 사운드는 2개의 채널을 통해 소리가 머리 중간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만든다. 입체 음향은 외이를 통해서 고막으로 전달되는 음향신호를 좌우로 따로따로 생성해 임의의 장소에서 음원이 재생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현재 가상현실 시스템에서 청각디스플레이 장치는HMD에 연결 돤 헤드폰이나 이어폰이 주로 이용된다. 3차원 공간에서 현실적인 소리의 구현은 다수의 스피커를 사람 주위에 배치함으로써 실현할 수 있다. 3차원 음향을 출력하기 위해서는 3차원 사운드 프로세서와 소리 데이터를 저장하고 있는 음원이 필요하다. 이 분야의 성과 중 하나가 NASA가 개발한 컨볼보트론(Convol- votron)이다. 컴볼보트론은 아주 강력한 오디오 전용 DSP로서 HRTF로 만들어진 아날로그형 소리를 통해 3차원 사운드 효과를 내는 데 HRTF라 불리우는 일련의 계산법을 이용해 음원이 마치 소리가 특정 위치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만든다. 이 시스템은 방음 장치가 되어 있고 소리의 반사가 없는 방에 설치된 144개의 스피커에서 출력되는 다양한 소리의 주파수에 의해 귀에 충격이 가해질 때 음향의 변화를 그려낸다. 최근에는 인간의 청각 특성에 관한 연구가 진전되어 음성 신호의 실시간 처리로 일반적인 헤드폰을 사용해 3D 공간 임의의 위치에 음원을 높은 정밀도로 정립시키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3) 촉각 디스플레이 장치 촉각과 포스 피드백은 가상현실의 완성에 있어서 필수적인 사항이다. 실제에서 촉감으 통해 사물의 존재를 인지하듯 물리적 저항 감각을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개발된 장치들은 피부에 맞닿는 표면의 질감과 작은 압력을 시뮬레이트하는 데 사용된다. 전기적 촉각 및 진동 촉각 장치들이 전류나 작은 진동으로 피부의 자극 수용체들을 자극함으로써 사용자의 손가락 끝에 표면적 착각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가상의 터치 동작은 특히 텔레로보틱스 분야나 수술 시물레에션과같은 고도의 정확성을 요하는 분야에서 매우 중요하다. 가상 촉감을 만들기 위해 개발된 것이 촉각과 포스 피드백 시스템이다. 실제생활에서 감촉이나 포스피드백에 의존하는 수많은 체험을 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촉각은 물리적 자극에 대한 수용기를 통해 일어난다. 반면 포스피드백은 손가락이나 손에 작용하는 실제적인 힘을 의미한다. 이 감각은 근육이나 관절에 적용된다. 생리학에서는 촉각과 압각의 분류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 만약 모발에 가볍게 접촉을 하면 모근의 신경말단망에 의해 촉각이 발생하고 페치니소체를 가볍게 누르면 압각이 발생한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촉각은 피부표면에서 느끼는 피부감각과 피부 밑의 근육에서 느끼는 시부감각을 통한다. 피부에는 압각, 온각, 냉각, 통각을 만드는 점들이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피부 전체에 이들 감각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 감각적음 압점, 온점, 냉점, 통점으로 불리며 각각 그 종류가 다른 감각을 만들어 낸다, 심부 감각은 근육,관절기 등 수용기의 충격에 의해 발생하는 감각이며 물체를 움직일 때의 저항감과 중량감등 운동이나 위치에 대한 감각과 심부통각으로 나누어지며 피부감각과 심부감각을 합쳐서 체성 감각이라고 한다. 가상현실에서도 체성 감각에 대한 제시는 아직 모색 단계인데 몸 전체에 분포돼 있는 촉각을 공학적으로 모방해 실시간으로 재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실현의 범위를 손에 한정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촉각의 피드백은 피부에 가해지는 힘을 말하고 포스 피드백은 근육이나 관절에 가해지는 힘의 되먹임을 말한다. 어떤 물체를 형성하고 손가락 끝으로 뭔가를 조종하고나 특정 방향에서 물체를 잡기 위해서는 손가락과 손의 움직임을 감지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범용적인 피드백 장치들은 비용,효율, 유용성에 있어서 충분치 못하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 장치들은 더욱 가벼워지고 더욱 더 나은 성능을 갖게 될 것이다. 가까운 장래에 이 장치는 센서와 액튜에이터(ACTUAYOR)가 집적된 얇고 유연성 있는 형태로 발전할 것이며 새롭게 개발된 기술이 효과적 경제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적용될 것이다. 현재 연구되어지고 있는 포스 피드백 방식으로는 마스터암, 조이스틱. 조이스트링, 데이터 글러브의 네가지를 들수 있다. 이들 장치는 현재 가상 현실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다. (4) 후각과 미각 디스플레이어 장치 현재 실현되고 있는 가상 현실은 시각과 청각 및 촉각이 중심이지만 사용 목적에 따라 언젠가는 미각과 후각도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오감은 2000년 전 아리스토 텔레스가 처음 알아낸 것이지만 과학자 들이 인간 감각의 깊은 비밀을 풀어내고 그 케카니즘을 규명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부터이다. 가상현실에서 후각과 미각은 아직 그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는 않다. 우리가 맛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은 후각으로 느끼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콧속에 들어 있는 후각세포로 4천가지의 냄새를 식별할 수 있고 향수업계의 전문가는 약 1만가지의 향내를 식별할 수 있다고 한다. 맛에 대한 감각의 대부분은 후각을 구성하고 있는 100만개의 세포에서 나온다. 후각은 뇌가 가장 원시적인 부분인 변연계와 연결되어 있는 데 이곳은 정서 식욕, 성욕을 관장하는 부분이다. 이 후각 세포들은 다양한 수용기를 갖고 있어서 특정한 화학물질만이 들어갈 수 있고 수용기는 화학 물질의 냄새가 들어오면 신경신호를 일으킨다. 가장 중요한 후각 신경 조직과 후각 세포는 코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이 3차 신경조직 세포는 각기 다른 신경을 통해 뇌로 신호를 보낸다. 이들 두감각은 물리 세계에서 화학적인 인터페이스를 갖는데 컴퓨터는 아직 적합한 인테페이스를 갖고 있지 못하다. 현재 나와 있는 가상 현실 시스템의 전조인 모턴 헤이리그(Morton Heilig)는 센서라마(sensorama)라는 시각 청각 진동외에 배기 가스 꽃의 향수 행수 등 냄새의 감각까지 제공하는 개인용 오락기구를 발명하였다. 그의 아이디어는 오늘날 가상현실의 오감 제어에 관한 선구자적인 고안의 발상이었다. 센서라마 기구는 일종의 1인용 극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상요자가 의자에 앉아 오토바이를 타고 뉴육시내를 다니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도록 영상과 음향은 물론 바람 냄새 진동까지 제공한다. 오토바이 시뮬레이터와 비슷한 체감을 갖도록 설계된 시스템이지만 사용자와의 상호작용에 대한 고려가 없기 때문에 진정한 가상현실 시스템은 아니었다. 결국 오늘날 진정한 가상현실시스템의 원형으로써 앞날을 예견하는 선구자적인 고안인 셈이었다. 또 다른 실례로써 미국 플로리다 주의 디즈니 랜드에 있는 미래도시는 선사시대의 광경, 습기를 느낄수 있는 모의 향기를 사용하고 있다. 현재 후각 입력 장치로서 개발된 방향 디스플레이가 있으나 아직까지는 기초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후각 디스플레이는 냄새의 가각이 잔존하기 때문에 급작스런 환겨의 변화에 빠르게 적용하기 힘들다. 가상 현실속에서 사용자가 갑자기 다른 환경속으로 들어가거나 다른 행동을 취할 때 이에 따른 냄새의 변화를 빠를게 바꿀 수 없는점이 후각 디스플레이의 가장 큰 단점이다. 냄새와 맛의 감각은 실제적인 분자를 받아들이기 위한 수신기 역할을 하는 코와 입을 통해 특정 신호를 뇌에 보내게 된다. 따라서 후각과 미각 디스플에이의 개발은 매우 어렵지만 궁극에 가서는 뇌파를 인위적으로 조정해 냄새나 맛을 강제로 느끼게 할지도 모른다. 5) 가상 현실의 응용 모니터와 같이 평면에 나타난 이미지를 입체영상으로 나타내려는 기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기술의 미숙으로 오늘날과 같이 폭넓게 전파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근래들어 입체시를 지원하는 각종 장치나 소프트웨어의 성능이 대폭적으로 개선되고 있다. 광고나 예술, 분자구조 모델링, 사진측량법, 모의 비행 시뮬레이터, CAD나 CAM, 방사선 수술, 컴퓨터 단층촬영, 3차원 비디오 게임, 3D TV, 다차원 데이터이 시각화에서부터 가상 현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입체영상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술은 앞으로 군사과학 의학 산업 교육 오락등 실제적인 모든 분야에 확대될수 있다. 가상 현실이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이유는 이것이 기존의 기술을 능가하는 무엇이 바탕이 되서라기 보다는 그 응용 분야가 무궁무진하다는 게 더 클 것이다. 가상 현실의 응용분야는 쉽게 설명해 가상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 공간 내에 존재하면서 안가고도 체험하는 것인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저자를 가상현실의 연습(Virtual Reality walkthrough)이라 하고 후자를 원격존재(Tele-presence)라 부른다 원격존재는 자신이 있는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 있는 자신의 분신인 로봇의행동을 손에 잡힐 듯이 알게 되고 필요한 경우 로봇을 자신의 수족처럼 조작해 마치 자신이 그 장소에 있는 듯한 감각을 가질수 있는 기술이다. 원격존재와 가상현실의 관계는 하나를 거꾸로 말하는 것과 같다. 가상현실은 자신의 주변에 현실과는 다른 자연스런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원격존재는 자신이 현재의 자리에 있으면서 별도의 환경으로 가는 것이라 이해하면 된다. 원격 존재가 한쪽이 다른편을 조작한다는 것 외에는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로봇뿐만 아니라 원격으로 조작되는 기계 전체를 일컬어 털레오페레(Teleoperator)라 부르는데 이 부분의 본격적인 연구개발이 진전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후 원자력이 본격적으로 연구되면서부터 이다. 최초의 연구는 미국 아르곤 국립연구소를 중심으로 개발된 '매직핸드'라는 이름의 마스터 슬레이브 매니플레이터(manipulator) 였다, 1960년대의 텔레오퍼레이션 연구는 엑조스켈톤형 인력증폭기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것은 1950년대 후반에 행해진 GE(Generak Electric)사의 모셔박사의 연구를 토대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연구는 다시 미국 정부와 GE사의 공동프로젝트인 '하디만( Hardymann)'으로 진전했다. 이들 연구는 사람이 장치 속에 들어가 힘을 증대시켜 무거운 것을 드는 일 등에 쓰이도록 고안됐는 데 만일 장치에 고장이 생기면 인간의 생명도 위험해지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공상영화의 '에어리언'을 본 사람이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 주인공이 '기계옷'을 입고 괴물과 싸우는 장면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1)의학분야 3차원 입체영상이 적용돼 가장 효과를 볼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의학분야이다. 3차원의 비디오 영상은 의사로 하여금 수술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시행착오를 방지하게 하며 수술경로를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외과 의사들의 사전수술 시뮬레이션 계획에 3D영상기술은 매우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실례로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임상협회는 외과의사들이 아주 미세한 범위의 뇌에서 위치를 지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 뇌수술을 위한 3D의 응용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기술은 동시에 뼈의 재봉합기술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전자적인 3차원 입체영상은 의사에게 심리적 부담감을 덜어주게 되고 뼈가 어떻게 구성되고 재위치 되어야 하는지 에 대한 계획을 제대로 세울수 있게 한다. 현미경으로 봐야 움직임을 알 수 있는 미소대상의 수술을 마이크로수술(microsugery)라고 하는데 이 수술은 현재 미소한 혐관유합 신경이나 정관 난관의 재생수술 등 다방면에서 이용되고 있다. 마이크로 수술은 대단히 미묘한 손의 동작을 필요로 하기에 고도의 숙련을 요구한다. 여기에 원격존재 기술을 도입해 보통의 수술과 같은 감각으로 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연구가 이미 시작되었다. 이것은 현재 급속히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마이크로 머신 기술의 진보에 바탕한 것이다. 손의 동작을 미소한 매니플레이터에 전달하고 환부의 영상을 확대해 관찰하면서 원격조작으로 수술한다는 것이 골자 최근에는 마이크로머신을 캡슐의 형태로 체내에 넣고 체외에서 원격존재기술을 이용해 진단이나 수술을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생각되고 있다. 가상 현실이 의료계에 대비되면서 의술혁명의 서곡을 울렸다. 병든 부위를 절개하지 않고도 가상현실 장비를 이용하여 인체 내부를 생생하게 들여다보면서 수술을 할 수 있는데 정확성도 있고 수술의 성공률도 높다고 한다. 원격지에 있는 환자에게 이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하여 시술할 수 있는 장이 열릴 경우 외국의 유명한 외과 의사를 찾아 비행기로 몇시간씩 나아가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음은 물론 의료 해택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지역의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이다. 해부 실습용 시신이 절대 부족한 상태에서 실제로 시신을 해부하지 않고도 모의 해부 실습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2) 오락 최근 우리 주변에 가상현실 기술을 응용한 예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가상 현실 게임관인 어뮤즈21에 가보면 HMD를 착용하고 일반 게임과 달리 바깥 세상과는 완전히 차단된 채 게임에 몰입해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현재 가상 현실 기술이 가장 많이 응용되고 있는 분야이며 가상 현실 산업이 발전하는 초기에 각광받을 분야가 오락분야이다. 가정용 게임기 분야에서는 3D를 이용한 입체게임기가 일본 세가사에서 개발돼 특수 LCD 안경과 함께 판매되기도 했다. 이 안경은 LCD셔터 방식을 채용한 특수안경으로 사용자에게 실감있는 입체그래픽영상을 제공해 준다. 최근 이 회사는 가상현실기술을 응용한 3차원의 비디오 게임기와 입체안경보다 더 몰입감을 주는 영상을 제공하는 헤드 마운티드 디스플레이를 개발해 제품화시켰다. (3) 가상건물 세우고 이상을 점검 아마도 가상 현실의 응용 중 가상 현실 연습 분야는 건축가들에게 큰 경제적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한 예로 미국 노스케롤라이나 대학에 설치된 가상건축의 내부를 살펴보면 건물 구조의 청사진을 CAD프로그램으로 그래 놓고 이를 컴퓨터 그래픽 워크스테이션으로 보내 이미지에 입체감을 입혀 2차원 데이터를 3차원 이미지로 만든다. 이 이미지는 엔지니어나 건축가가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 장치를 쓰고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 이 대학 연구진은 이와 함께 가상의 빌딩 공간을 자연스럽게 돌아다니기 위해 핸들이 달린 러닝머신 시스템을 개발했다. 가상 환경에서 앞으로 움직이고자 하면 사용자는 러닝머신에서 앞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코너를 돌거나 방을 보고 싶으면 걸으면서 원하는 방향에 있는 핸들을 돌리기만 하면 된다. 빌딩 주변을 걸을 때 걸음속도를 조절해 움직임의 비율을 제어할 수 있다. 이것은 실세계와 매우 비슷하다. 걷고있는 동안 머리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고 주위를 둘러본면 물체는 실세계에서와 같이 원근감을 갖고 보여진다. 이러한 시스템은 단순히 재미있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건축설계에 있어서도 기존의 설계방식에 비해 실제적 장점을 지니고 있다. 기존이 설계방식으로는 3차원적인 공간감을 2차원적인 모니터에서 표현하기란 쉽지가 않을 뿐 아니라 3차원 모델을 실제 크기로 만들어 보지 않고는 디자인의 잘못된 점을 알 수가 없었다. 가상 현실 기술은 이러한 점들을 개선시켜 줄 것이다. 건축도면을 입력해 설계단계에서 컴퓨터 속에 미리 건축물을 만들어보고 그 안을 둘러본다면 도면상에 나타나지 않는 문제점을 미리 확인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예로 가상 박물관을 들수 있다.현재 박물관들은 유적물을 컴퓨터 그랙픽 작업을 통해 복원하고 있다. 시스템 공학 연구소에서는 미륵사지탑 복원을 계기로 문화재 연구소와 계속적으로 이 작업을 진행중인데 이는 원형고증 작업에 신속성고 정밀도를 향상시켜 문화재 보존 관리를 철저히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입체영상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가상박물관이 만들어지면 멀리 떨어져 있는 유적지까지 가지 않고서도 인파에 방해받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마치 그곳에 들어가서 살펴보는 듯한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설계분야에서도 기계적 설계환경의 연구에 입체시각이 2배에서 4배까지 정확도를 증진시키며 설계오류와 변경을 덜 초래 한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CAD나 CAM등 모든 설계응용분야에서 적용될 수 있다. 입체 영상은 자동화된 도구생산을 위한 설계도를 만들며 CAD프로그램에 그대로 공급될 수 있다. 가상의 움직임으로 사용자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며 시험과 오류에 의해 실험을 할 수 있다. 건축설계의 경우 일련의 계획을 세우고 3차원의 모델을 만들며 HMD를 이용하여 그 내부를 돌아다니며 관찰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가능하다, 이 시스템을 이용하면 건축물의 완공을 미리 시뮬레이션할 수 있어 정확한 내부설계까지도 상세하게 설계할 수 있다. 또한 3차원을 통한 분석은 동시에 건축기사들이 잠재적인 문제점을 예견하는 것을 돕는다. 건축가는 3차원 공간을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하여 탐험할 수 있으며 여러각도에서 건물을 바라볼 수도 있다. 따라서 설계가 활용되는 모든 분야는 3D의적용이 매우 긴요하게 쓰일 뿐만 아니라 많은 비용과 노력을 절감시켜 줄 수 있다. (4) 인테리어 응용분야 VR연습이 실제 생활에서 가장 각광 받고 있는 분야는 인테리어 응용이다. 그 한예로 작년 시스템 공학연구소가 연구한 부엌 인테리어의 세계를 보면 이 장치는 미국의 VPL사가 개발한 데이터 글러브와 디스플레이 기술을 이용한 시스템으로 이용한 시스템으로 컴퓨터로 부엌의 CAD모델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머리에 아이폰을 쓰고 가상 부엌을 돌아 다닐수 있다. 식탁의 의자도 옮겨보고 냉장고의 색을 바꾸어도 보고 전자레인지를 즉석에서 배치하는 등 사람이 원하는 것은 어느것이나 변경 추가할 수 있다. 이 기술의 핵심은 인간의 눈으로 보는것과 동일한 3차원 입체 영상을 제작하고 제작된 입체영상을 실제와 동일한 느낌을 갖도록 실제감을 표현하며 실제와 동일하게 재작된 물체를 3차원 공간에서 자유롭게 이동시킨다는 데 있다. 이 시스템은 주방가구를 대상으로 개발되었으니 실제로는 전시장에 전시를 필요로 하는 모든 제품에 응용이 간으하다. 특히 무게가 무겁고 부피가 커서 배치가 용이하지 않고 표준품의 종류와 숫자는 많지만 전시될 물품의 수가 제한되는 제품이라면 더욱 유리하다. 가상 현실을 이용한 CAD는 디자이너가 제품을 디자인 할 때부터 사용자를 함께 참여시켜 디자인 할 수 있다. 즉 디자인 상태의 물품을 가상의 세계에서 사용자에게 이용토록 함으로써 사용상에 문제점은 없는 지를 체크해 가면서 제품을 디자인할 수 있다. 이로써 제품개발에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디자인 경비를 절약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개인별로 차이가 있는 부품은 각자에 맞는 개별 디자인이 가능해 진다. 음향설계 분야에서 콘서트 홀이나 집을 디자인 할 때 건축가는 청각적인 문제에 시달려 왔다. 건축되기 전에 건축물의 청각을 결정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콘서트 홀에 청중이 가득찼을 때 음향의 반향 등 예견되는 많은 경우를 생각해서 건축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가상현실을 이용해 가상의 건축물에 가상의 청중을 앉도록 하고 연주되는 음향을 가상의 청중을 통해 느끼도록 하면 이러한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5)비행 시뮬레이터를 이용한 교육 교육은 가상 현실연습이 적용될 수 있는 관심 분야의 하나이다. 현재 가장 높은 수준을 이루고 있는 응용분야로 꼽히는 비행기 조종사의 시뮬레이터는 바로 어떤 방식으로 VR이 교육에 접합되는 가를 잘 보여준다.신형기의 시범 비행은 위험이 따르는게 보통이다. 개발된 비행기가 안전한지의 여부는 그 비행기의 동적 요소를 조합해 제작된 플리이트 시뮬레이터로 모의 비행을 실시함으로써 미리 알아보고 있다. 자동차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로 음주나 약물 복용후의 운전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실제 운전자에게 술과 약을 먹이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를 대신하는 장치가 바로 운전 시뮬레이터다. 또한 체험이나 오락용 시뮬레이터의 한 종류인 '스페이스 월드'는 체험형 레저시설이라 고도 불리우는데 이곳에서는 미리 프로그램된 과정을 시뮬레이터로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관객의 의지에 따라 대상의 운동이나 상활이 변하도록 하는 피드백 장치가 시도되고 있다. 이는 마치 컴퓨터가 이해되는 데 컴퓨터 오락이 큰 역할을 하는 것과 같이 VR이 보통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지금도 오락과 레제 분야에서는 VR을 구체화 하기 위하여 적지 않은 연구비가 투입되고 있는데 아직까지 VR오락이 흡인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는 그동안 등장했던 첨단의 오락기 들이나 레저용 디스플레이에 익숙해진 일반인들이 이제 막 초보적인 단계에 들어선 VR게임이 어설픈 화면에 쉽게 설득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6) 사실감을 추구 목표로 한 기술 별도의 장소에 있는 3인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하는 것이 원격지 화상 회의의 큰 목표다. 종래 텔레비젼 회의 모습을 표시할 뿐 이고 배경이 달라 한자리에서 회의한다는 느낌을 주지는 못했다. 이 기술이 보편화 된다면 현재 부분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재택 근무는 좀더 본격화될 수 있다. 우선 가상의 회의실을 만들어 실공간과 같은 조명조건을 주고 컴퓨터 그래픽스 기술을 이용, 실제공간에 있는 책상이나 의자 등의 연속성있는 공간을 만들어낸 인물을 영사한다. 또 인물도 같은 조명조건 내에서 컴퓨터 그래픽스 기술을 구사해 표시한다. 실제 공간에서의 인물은 입체적으로 존재하고 파악되지만 지금까지의 디스플레이는 이를 평면으로만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가상현실을 응용한 원격지 화상회의에서는 실제와 같은 입체감이 표현되도록 한다, 이것은 수신자측에 3차원 모델을 준비하고 상대의 얼굴 크기나 복장색 등을 합해 모델을 변형시킨 후 가상 회의실에 영사하도록 해 시각적 상호작용을 만든다. 예를 들어 A라는 인물이 B라는 인물을 볼 때 B는 상대방의 시선을 느끼고 A의 방향을 향하며 또 제3자 C도 이 시선의 오고 감을 인지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것은 가상 현실의 응용에 있어 사실감의 추구를 목표로 한 것이다. (7) 군사분야 군사분야에서는 입체영상 활용도가 눈여겨 볼만하다. 근래에는 항공 촬영된 3D입체 사진을 이용해 적 지역의 정세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외에도 지형의 구조물과 형태를 3차원 정보로 저장함으로써 지질 형태를 보다 더 생생한 이미지로 관찰할 수 있다. 최근 미국방성은 스테레오 그래픽스사의 크리스탈아이즈 가상 현실시스템으로 성공적인 군사작전과 모의 전쟁 실험을 시행했다. 이 모의 훈련은 항공모함이 작전을 위해 가고 있는 동안에도 항공모함안에서 원격으로 할 수 있다, 이 기술이 좀 더 본격화된다면 가상 환경에서 실시간에 필요한 모든 훈련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8) 로봇 원격 조정 우리는 이미 일상생활에서 리모콘 사용에 익숙하다. 텔레비젼이나 오디오 등과 같이 가까이 있고 정지한 상태의 제어는 현재의 과학기술 수준으로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먼 거리에 있는 움직이는 기계라면 사정이 다르다 이같은 기계를 조종하기위해서는 간단한지 않은 원격조작(teleperation) 기술이 필요하다. 인간이 직접 들어가거나 다룰수 없는 환경의경우를 생각해 보자. 원자로 내의 냉각로를 교환하거나 해양의 바닥에 파이프 라인을 세우는 작업 또는 극히 위험한 폭발성 물질을 다루는 작업에 사람이 직접 투입된다는 것은 위험 천만한 일이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의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간만이 가진 유연성과 판단력, 정밀함 등이 반드시 요구된다.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느 도저히 인간이 행할 수 없는 이러한 상황을 가능하게 해 주는 기술이 가상현실의 한 분야로 연구되고 있다. 미래에는 모든일을 자동으로 처리해 주는 로봇이 등장하겠지만 현 상태에서는 사람이 멀리 떨어져서 로봇을 제어할 수 있는 시스템이 대안으로 개발중이다. 이 시스템이 바로 로봇에게 지능을 부여해 인간과 비슷하게 움직일 수 있는 팔을 가진 원격로봇(Telerobot) 이다. 이러한 로봇을 먼 거리에서 조종함으로써 마치 자신이 직접 작업을 하는 듯한 착각이나 자신이 그곳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것을 원견 임장, 혹은 원격 존재라고 부른다. (9) 우주항공 및 과학분야 우중항공 및 원격응용 등의 과학 분야에서도 입체 영상은 활발히 이용되고 있다. 우주과학에서의 3D입체 사진은 행성의 탐사나 분화구의 관찰에 이용된다. 미국 항공우주국에서는 달탐험 임무수행시 달표면에 첫발을 내디디는 장면과 무중력 상태에서의 골프 스윙과 같은 입체사진을 촬영해 왔으며 최근에는 목성과 해왕성의 근접통과 때도 입체영상을 시도했다. 이러한 형태의 연구는 한 행성 내의 분화구와 다른 표면의 깊이를 측정하는데 중요하게 사용된다. 행성표면에 대한 입체사진 촬영법 기술은 보다 생생한 지도를 그릴 수 있으며 이는 우리가 그곳을 직접 탐험하기 전까지 표면 상태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NASA의 제트 추진연구소에서는 마젤란이 지구로 보내오는 금성의 사진을 정확히 분석하고 해석하기 위해 스테레오그래픽스사의 입체시각시스템을 사용한다. 이 응용에서 둥근 돔이나 단층처럼 점진적으로 변하는 형상의 지리학적 모양을 정확히 확인하기 위한 추가 정보가 제공된다. 예를 들어 화산의 2차원 영상을 보는 과학자는 2차원 영상을 구성하고 있는 많은 동심원에서 색깔차이에 대한 이유를 해석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3차원에서 같은 영성을 보면 내부의 원이 원추형을 가지고 있다는 등의 화산 핵심 구조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미국 항공사인 록히드사는 우주 시스템부의 태양판넬에 대한 검사응용에 이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이 기술 응용전까지 검사자는 각 태양판넬의면에 있는 많은 수의 회로가 단절됐는지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현미경을 통해 판넬의 앞뒤로 움직여야 했다. 이로 인해 검사자의 피곤과 잦은 오류가 발생했었으나 이제는 현미경 대신에 입체 비디오시스템을 대치시켜 작업자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앚아 편안히 검사할 수 있게 되었다. 6) 가상현실의 문제점 이러한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가상현실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발견되어진다. 특히 가상 현실은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줄수도 있다. 며칠전 쯤 논문에 참고가 될 만한 것이 있으면 볼려고 비디오 가게에 가서 물어보았더니 '채널69'라는 제목의 테잎을 빌려주었다. 내용은 뉴스에 식상해 있던 전직 PD가 조작된 뉴스에 대해 반감으로 9시 뉴스시간에 컴퓨터 첨단 기술을 이용하여 이동 방송국을 만들고 해적전파를 띄워 성인용 프로그램을 보내어 이 사회를 비꼰다는 조금은 황당무개 하지만 앞으로 가능성이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나오는 대사이다. 바로 "나는 나의 동정을 사이버 섹스를 통해 샤론스톤에게 줄거야" 하는 대사이다. 그런데 현재 인터넷이라든가 아니면 가까이에 용산에 가더라도 CD-ROM을 통한 2차원적 음란물들이 많이 나와 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아무런 제재 없이 10대들에게 파는 것 또한 목격하였다. 그렇다면 가상현실 프로그램이 실용화된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가상 현실은 의학분야라든지 학문 과학 분야에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이버 섹스라든지 폭력성이 다분히 있는 게임등을 통해 청소년들의 정서는 망가질 대로 망가질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날에는 텔레비젼이나 비디오, 영화 잡지 게임등을 통해 감각이 무디어지고 있는데 가상현실이 바로 이것을 더욱 부추길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가상현실 게임이 폭력용 주제로 다루는 내용이 많아 이들의 범죄를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인이 학부에 있을 때 미션스쿨에서 남녀 8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 보았는데 성적인 행위를 하고 싶을 때가 음란비디오를 보고 있을 때 라고 대답한 경우가 60%이상이 된다는 것이며 폭력에 대해서는 폭력용 게임을 하고있을 때 이와 같은 폭력을 하고 싶다는 아이들도 절반 정도는 되었고 심하면 자기와 그 주인공과 동일시되는 느낌까지도 받는다고 진술한다는 사실이다. 가상현실은 또한 중독성이 강해 중독될 경우 마치 마약처럼 인간의 정서에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도 있다고 한다. 가상 현실이 사이버시크니스(가상질병, Cybersickness)를 유발시키고 있다. 가상 현실 시스템이 많이 보급되는 만큼 그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사이버 시크니스의 증세는 다양하다. 가벼운 현기증에서 두통 구토 시력장애 방향감각 상실 등이다. 특히 현실감각의 적응이 빨리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하며 전문가들은 "가상현실 시스템을 사용한 뒤 현실세계에 적응 못해 몇시간 동안 정상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Ⅲ. 21C와 목회(멀티미디어 중심으로) 1). 21C의 목회 멀티미디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멀티미디어는 하나의 사회적 강요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의 삶을 위하여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도구가 되어가고 있다. 멀티미디어를 모르면 세계를 모르고 멀티미디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마치 신문을 보지 않는 사람처럼 오늘날의 세계에 대한 정보와 현대인이 갖추어야 할 상식에 뒤지는 사람이 되는것이며 삶의 다양한 기능에 있어서 후진성을 면할 수 없다는 위기감까지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멀티미디어 시대는 신학적, 종교적, 처학적 상상력의 빈곤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자동화, 기계화된 정보사회에서는 그것을 다룰 수 있는 테크닉만 알면 모든 일이 해결될 수 있기 때문에 성찰 사색 명상의 중요성 신존재를 생각하는 능력이 퇴화될 수 있다. 멀티미디어의 보편화는 인간을 도덕적 인격적으로 보다는 기계적 기능적으로 평가하는 풍조를 조성할 것이다. 인간이 기계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기계가 인간을 조작하는 비극이 초래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일상의 윤리와 도덕적 자질에 대한 가르침도 멀티미디어로부터 제공받게 된다. 과거의 종교적 견해를 대신하는 대안적 세계관을 제시하는 새로운 종교로 멀티미디어가 자리매김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멀티미디어는 더 이상 인간생활의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역할가지 대신하는 메신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멀티미디어 시대는 오늘의 목회현장을 향한 하나의 문화적 도전이다, 이 도전을 회피하지 않고 맞서서 극복해 내려면 목회적 차원에서 현대문명에 대한 건전한 비판적 시각이 형성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교회공동체 스스로의자기 갱신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목회는 멀티미디어를 바르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멀티미디어의 세계가 이루어나가는 기술의 자동적 증대성에 대한 비판 능력도 필요로 한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목회는 더욱 강한 인격성,공동체성, 진실성, 거룩의 체험, 등을 나누는 신앙 공동체 형성에 목회적 역량이 모아져야 한다. 이러한 과제를 바르게 수행하기 하려면 오늘의 목회현장 속에서 문화 비판적인 통찰력이 운용됨은 물론 기존의 목회에 대한 냉철한 자기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멀티미디어 시대의 인간들도 여전히 인간이며 여전히 구원의 복음과 복음을 통한 해방적 사역을 필요로하는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앞으로 우리는 과거에 체험하던 신앙세게보다 더욱 폭 넓은 의미에서 새로운 신앙세계를 구축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하여 더욱 강한 신앙적 체험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2) 가상 현실과 목회 (1)교회에서의 활용 가상 현실이 우리 생활속에 파고들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의 되어진 과학 기술의 진보에 의하며 빠르면 5년안에 실생활속에 깊숙히 파묻힘 것이고 컴퓨터 역시 커다란 것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컴퓨터가 실용화 될것이고 음성을 인지하는 컴퓨터 시스템이 우리생활과 관련이 되며 우리는 컴퓨터와 대화하며 살아갈지 모른다. 개인화가 이루어지고 공동체 생활이 약해 지며 가족이라는 최소 사회집단의 개념까지도 흔들리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컴퓨터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인해 인간의 손과 발은 점점 퇴화될 수 있고 또 신을 생각하는 사고가 사라질 수도 있다. 이러한 일들은 컴퓨터 즉 멀티미디어가 지배하는 사회속에서 가능한 일이며 특히 이 부분에 있어서 가상현실 즉 VR기술이 한몫을 하리라 생각이 된다. 우리는 다가오는 21세기 목회에 있어서 한발 앞서가야 한다. 즉 가상현실을 무조건 비판한다기 보다는 장단점을 골고루 알아내고 목회에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컴퓨터 특히 본인이 다루는 가상현실부분에 있어서 많은 프로그램들이 개발되어야말 할 것이다. 특히 지금의 신세대들을 위한 선교방향이라든지 아니면 시대에 뒤지지 않는 교회가 되기위해서는 교회에서 자체로 그것들은 준비해 나아가야 한다. 먼저 나는 교회에서 가상현실의 프로그램을 교회에서 응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이 되어진다. 애배당이나 교육관을 건축할 때, 혹은 교회의 조경사업, 기동원시설의 장단기 계획을 세울 때 가상현실은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다. 즉 가상현실을 이용하여 프로그램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가상현실을 실용화하고 전도의 도구로서 사용하기 위해서 먼저 게임기의 제작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어진다. 게임은 청소년들이 쉽게 친해지고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끼는 시기에 중요한 청소년 선교의 한 도구가 되리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성경의 내용을 게임화한다든지 (예를 들면 다윗과 골리앗 게임,노아의 방주등)해서 성서의 내용에 친숙하게 만들어야 한다. 또한 가상 현실을 통한 예배 프로그램의 개발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에 대한 찬반 양론이 펼쳐지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 프로그램이 장애인을 비롯한 수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프로그램은 예배에 대한 새로운 시도로서 이용될 수 있다. 즉 아직까지 시도되지 않았던 어떤 예배도 시행할 수 있고 또한 예배 참석자에게 여러 가지 선택의 폭을 주어 예배에 흥미를 준다는 점도 있다. 또한 개발되어야 할 프로그램이 있다면 바로 성경에 바탕을 가상현실의 프로그램화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 하기를 원하고 아픔을 같이 나누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상상해 보라. 만약 우리가 엑소도스를 경험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그 커다란 대열 가운데서 그들과 같이 길을 떠난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병자를 고치는 데 내가 가서 옆에서 있다면 생각만해도 가슴이 설레는 것 같다. 기독교에서는 가상현실을 이용하여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해 내어야만 하는 것이다. 또 개발되어야 할 것이 성지에 대한 가상현실 프로그램화이다. 실상 신학도로서 성지에 가보고 싶지만 시간도 없을뿐더러 경제적이 어려움에 봉착하는 자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이 완성이 된다면 우리는 멀리까지 시간을 허비하며 다녀올 필요가 없다. 성가대 지휘자나 반주자 성가대원이 찬양을 개별적으로 연습할 때도 유익할 것이다. 가상현실을 통하여 오케스트라를 연주해 볼 수도 있고 자신의 파트만을 연주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상현실은 교회 교육에도 유익을 줄수 있다. 다윗과 골리앗이 나오는 성경을 말로만 설명할 것이 아니라 가상 현실로 제공하면 실제로 옆에서 구경하는 듯한 생생한 체험을 하게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상현실의 세계에서 다윗이 되어 골리앗과 겨루어 본다면 그 느낌이 어떨까? 가상현실은 새신자 양육에도 매우 유익할 것이다. 말로 잘 이해되지 않는 사람에게 가상현실을 통하여 경험하게 함으로써 좀더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도록 이끌수 있다. (2)문제점 교회에서도 이처럼 많은 부분에서 많은 유익함을 주고 있으나 반면에 단점들도 내비친다. 먼저 가상현실을 통한 예배로 인해 코이노니아가 파괴된다는 것이다. 즉 가상 현실을 에배로 제공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예배의 체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신앙의 개인화가 이루어 지고 이러한 개인화현상으로 교회 공동의 친교의 기능인 코이노니아가 파괴된다는 것이다. 혼자서 가상현실을 통해 예배를 드리는 습관이 몸에 배면 오히려 사람과 만나서 교제하는 것이 번거롭다는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교회라는 개념이 사라질 것이고 목회자들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또한 목사와 성도들 사이에 대면하는 기회가 적어져서 결속과 연대의식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이렇게 됨으로 목회자 고유의 권한인 설교의 권한이 약화되고 치유목회 또한 이루어지지 않을것이라는 우려도 된다. 이렇게 된다면 자연히 목사님과 성도들 사이에 대면하는 기회가 적어져서 결속과 연대의식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앞에서 이야기 한 부분과 겹쳐지겠지만 또 하나의 문제점으로는 재택예배로 인한 에배당의 공동화(空洞化)현상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들수 있다. 한 때 미국의 빌게이츠는 사람들이 TV나 비디오가 생기면 극장이 모두 없어질 것으로 전망하였으나 그것은 기우였으며 아직도 극장은 건재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멀티미디어가 본격적으로 생활하되면 재택근무가 늘어나게 된다. 현재에도 몇몇의 기업에서 재택근무가 실시되고 있고 또한 학교에서 재택수업이 이루어질 전망이라고 한다. 이렇게 된다면 자연히 직장일도 집에서 보는 데 왜 예배만 교회에 가서 드려야 하는냐 하는 반론이 거세어 질 것으로 보인다. 눈이나 비가 오는 날은 교회에 가지 않고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을 것이다. 교통도 복잡하고 주차장도 부족하니 재택예배를 드리자는 의식이 일반하될 우려가 있다. 또한 주5일 근무로 주말여행이 일반화 되면 여행지에서 일행과 함께 드리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가 등장하게 되고 그러면 교회는 실제로 텅텅비게 될 것이다. 실제 지금 실시되고 있는 케이블 TV를 통해 드려지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도 많이 생기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상 현실을 통해 프로그램화되어진 예배에서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가 실제 교회에 가지 않고 자기가 만든 환경속에서 자기의 구미에 맞는 목회
가상 현실과 교회의 대응
가상 현실과 교회의 대응 1. 들어가는 말 어떤 건장한 남자가 문앞에 서서 카드키( card key)를 가지고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간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 본 다음 책상 위에 놓인 헬멧과 특이하게 생긴 장갑을 낀다. 그리고 잠시후 그는 발차기를 비롯해 찌르기를 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한다. 그는 마치 실제로 싸움을 하는 듯 하다. 미친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가상 현실 프로그램을 이용해 무술을 수련중 이었다. 이런 내용은 어느 영화에서 상영되었다. 요즈음 들어 부쩍 컴퓨터의 관심이 높아지고 생활이 고도의 정보를 통한 세계화 추세에 들다보니 컴퓨터를 모르는 사람은 '컴맹'으로 불리우며 무시 당하는 세태이다. 특히 컴퓨터의 발달이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이제 컴퓨터는 기계를 떠나 생활이 되지 않을까 우려도 된다. 요즘들어 가장 관심을 끄는 컴퓨터 프로그램 가장 널리 쓰이는 게임등은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만도 대기업에서 조차 가상 현실 게임산업에 손을 댔다고 하니 가상 현실이 우리 생활에 얼마큼 영향을 주며 얼마나 널리 쓰이게 될지 환하게 알 일이다. 가상 현실이 각광 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가상 현실은 구성이 복잡한 만큼 광범위한 응용 분야를 창출할 수 있고 기술적인 면에서도 커다란 변혁과 전환을 몰고 올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러분야의 관련 기술을 하나로 집약시키는 한편 그 결과를 실생활에 접목 시킬수 있다는 점이 단지 컴퓨터 기술의 하나로 보기에는 너무나 큰 파급 효과를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이다. Ⅱ가상현실과 미래 1. 가상 현실(Virtual Reality) 란 무엇인가 요즘 신문에서 "가상 현실을 이용한 xx 개발" 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가상'과 '현실' 이라는 이질적 의미를 담고 있는 두 단어가 하나로 합쳐진 새로운 기술의 이름은 이미 그 실체 보다도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물론 이미 실제로도 군사분야와 교육, 인텔리어, 분야에서는 초보적인 실용화를 이루고 있기는 하다 수년 전 나온 '토탈리콜' 이나 '론머맨' 같은 미국의 공상 영화에[ 등장해 흥미를 끌었던 이 기술은 사람들에게 "머리로 떠올릴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실현이 가능한" 놀라운 기술로 이해되고 있다. 실제로 가상 현실이란 개념은 정의 자체부터 매우 모호하다. 단어 자체가 가상(Virtual)과 현실(Reality) 이라는 상반된 의미를 하난로 묶었을 뿐 아니라 가상 현실을 구현하는 기술도 하드웨어와 소프트 웨어를 포함하는 컴퓨터 기술 뿐 아니라 심리학 생리학 인간공학등의 다양한 분야가 망라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상 현실이란 "컴퓨터를 이용하여 가상적인 환경을 만들어 그 환경내에서 3차원의 의사체험(擬似體驗)을 가능하게 하는 첨단 기술"로 정의될 수 있다. 즉 가상 현실은 실제 물체는 없지만 이를 시뮬레이션해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느낌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2. 가상 현실의 역사 가상현실이라는 말이 일반인에게 거부감없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이 용어가 정착되기 전에는 가상 환경(Virtual environment) 인공현실(Artficial reality) 인공 두되공간(Cyber space) 등으로 이름이 불리웠는데 이 같은 용어의 흔재는 그 개념을 확실히 설정하는데 적 잖은 장애 요소로 작용했다. 가상 현실에 대한 연구는 60년대 중반 CAD의 원조로 불리우는 MIT의 이반 서덜랜드 교수에 의해 시작 된다. 넓은 의미의 컴퓨터 그래픽 기술인 CAD가 가상 현실(Virtual Reality)의 모태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컴퓨터 그래픽은 대상물을 수치화시켜 실시간 내에 표현하고자 하는데 3차원의 실세계를 평면으로 표현하는 데는 어딘지 답답하기 때문이다. 컴퓨터 그래픽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가상 현실은 3차원 공간을 표현하는데데이타를 컴퓨터에 기억시켜 그 가상공간에서 인간의 눈에 들어오는 장면을 디스플레이에 기억시키고 표시하는 것이다. 이 때 가상 공간에 있는 인간의 위치는 마우스 등의 입력기에 의해 이동 시킬수 있고 그에 따라 보이는 장면의 변화를 계산해 낸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에 인공 지능이나 산업공학, 등의 연관 과학 학문이 어우러지면서 가상 현실(Virtual Reality)기술이 본격화 된 것은 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였다. 특히 멀티 미디어의 발달에 따른 음성 인식과 화상처리 기술의 진보는 이를 통합한 기술의 하나로 가상현실의 출현을 예고 하고 있었다.85년 미항공 우주국(NASA)은 좁은 우주선의 복잡한 작업을 단순화 하기 위하여 3차원 데이터 공간을 비행하며 몇 개의 컴퓨터 조작 패널로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며 우주선 외부에서도 우주복을 입은채 조작할 수 있는 VIEW(Vitual Intreface Environment Workstation)을 만들었다. 사진이 최초로 발명된 것은 19세기 중반이었고 텔베비젼이나 영화관이 등장한 것도 20세기 초에 불과하다. 이들 매체는 모두 사물을 2차원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발명 당시 사람들에게 준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2차원의 한계를 넘어서 3차원의 표현방법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이들 발명품보다 앞서 일어났다는 것이다.그리고 그 동안 좀더 현실감 있는 입체 이미지에 접근하고자 수 많은 입체경에 발명되어 왔으며 그 맥은 오늘날 가상현실시스템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입체화 발견에 대한 연구는 1백 50년 전에 휘트스톤 이란 인물이 프리즘과 거울을 사용한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최초의 입체경을 발명해 명성을 얻은바 있는 그는 사람의 양쪽 눈이 보는 이미지 차이가 입체적인 깊이를 지각 시킨다는 사실을 영국학술원에 보고했다. 그는 마주 향하는 이미지들을 반사시키기 위해 45°각도의 거울을 사용해 두 개의 사진이 보는 사람의 눈을 향해 반사되도록 측면에 배치했다. 이 거울 입체경은 비교적 간단한 장치로 눈에 하나씩 2개의 2차원 그림을 제공함으로써 기술적으로 망막의 불일치를 만들었다. 렌즈없이 보는 유일한 입체경인 이 발명품은 이 후 관찰자의 눈 사이 거리와 이미지의 크기를 조절하는 렌즈가 부착돼 정교함을 더했다. 한편 무작위 점 입체화(random - dot stereogram)라 불리우는 입체 기술에 대한 최초의 아이디어는 베라 유레즈라는 사람에 의해 고안된 것이다. 얼마전 관심을 끌었던 '매직아이(magic eye)'라는 것은 바로 이 무작위 점 입체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난수표에서 힌트를 얻어 흑백의 점으로 그려낸 두장의 그림을 일정한 방법을 통해 보면 입체적인 도형이 떠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인간의 두눈이 양안 시각을 갖는 다는 것과 대상인식은 항상 입체시 (立體視) 이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레즈의 발견 이전까지 사람들은 한눈의 대상물 인식은 입체시전에 일어나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는 두눈의 영상은 두뇌의 중간 지점에서 합쳐지고 깊이가 인식되기 때문에 편시야 시각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시초로 그 후 입체 환경을 통해 보는 입체 영화와 3-D 영상기법이 발전하게 되었다. 데이비드 부르스터라는 인물은 양쪽 눈이 정확히 다른 그림을 보는데 도움이 되는 렌즈를 사용한 입체경을 발명했는데 오늘 날에도 사용되고 있는 이 발명품은 두눈이 같은 광경을 보는 것을 막기위해 두 개의 렌즈 사이에 경계 분리기가 동시에 놓여 있다. 이것은 후에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뷰마스터(View Master) 라는 간단한 입체 그림을 보는 도구로 발전하게 된다. 3. 인간과 가상 현실 1)생활속에 파고드는 가상현실 우리 주변에도 가상 현실 기술을 응용한 예가 적지 않다. 가장 구체적으로 가까운 예가 가상 현실 게임관인 어뮤즈21관이다(이 곳은 HMD를 착용하고 바깥 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채 게임하는 곳이다.) 가상 현실의 응용 분야는 비단 흥미 위주의 오락만은 아니다. 산업용으로도 큰 호응을 얻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한새퍼시스가 시도한 가상 부엌 시스템이 있다. 부엌용 가구를 일일이 설치하지 않아도 입체 영상을 통해 위치를 바꿀 수 있으며 냉장고나 싱크대 등을 가상 세계안에서 사용할 수 있다. 동아 건설도 가상 모델 하우스 계획을 발표해 주위의 관심을 끌었다. 아파트를 구하기 위해 모델 하우스를 찾아다닐 필요없이 아파트 데이터 베이스를 통해 원하는 스타일의 아파트를 고를 수 있는 시스템이다, 특히 아파트 실내에 들어가 걸어다닌다거나 베란다에서 바깥 풍경을 감상하는 것은 물론 벽제나 바닥제의 촉감을 느낄수 있다. 2)컴퓨터 문화를 새롭게 정의 가상 현실이 컴퓨터 관련업계에 일으키는 파장은 단순히 활용 분야가 많다는 이유외에 하나가 더 있다. 바로 가상현실의 인터페이스이다. 실제로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장비를 사용해야 한다. 가상 현실을 대표하는 장비로 알려져 있는 HMD(Head Mounted Display)를 단순히 영상을 입체로 보여주는 장치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HMD는 출력 장치로서 역할외에 사용자의 머리 움직임이나 이동을 컴퓨터 시스템에 전달하는 입력장치로서의 역할도 겸한다. 이런 면에서는 촉각 디스플레이 장치인 데이터 글러브(장갑형태)와 바디 슈트( 옷과 같은 형태)도 마찬가지 이다. 특수 장비를 통해 감지된 인간의 동적은 컴퓨터가 처리하고 결과는 디스 플레이 장치로 보내진다. 보내진 결과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다시 컴퓨터로 보내지는 일련의 과정이 계속 반복된다. HMD는 인간의 동작을 감지함은 물론 그 동작에 대한 처리 결과를 나타내 주기 때문에 입력장치와 출력 장치의 기능을 모두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과 컴퓨터 간 상호작용의 연결 고리인 셈이다. 이런 일련의 개발과정은 키보드로 시작해서 마우스로 이어져 온 컴퓨터와 인간간의 인터페이스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우선은 인간이 컴퓨터가 할 일을 하나 하나 지시해야 하는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 말이나 손짓 등 일상적인 행동만으로 원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게 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컴퓨터를 단순한 작업도구가 아닌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하나의 개체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3)인간 연구가 기초 가상 현실을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은 매우 광범위하다. 컴퓨터와 관련된 하드웨아 소프트웨어 외에도 인간의 감각 기관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심리학 생리학 인간공학 등의 바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중 가장 비중이 큰 것은 역시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 웨어이다. 3차원 영상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는 시각 장치로는 HMD외에도 레이저 광선을 이용한 홀로그래피 등이 있다. 또 이를 뒷받침하는 소프트 웨어는 일반 3차원 그래픽보다 빠른 속도로 랜더링해야 함은 물론 사용자의 시점(view point) 변화에 따라 물체의 모든 면을 연출해 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컴퓨터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 자체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면 가상 현실 시스템은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감각이 어디에서 어떻게 감지되어 대뇌에 전달되는 지 알아야 인간 감각 기관의 어디를 어떻게 자극해서 전달할 것인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여주는 주체인 가상 현실 시스템과 그것을 즐기는 인간을 연결하는 인터페이스 또한 이에 걸맞게 진보된 것이어야 한다. 4) 가상 현실과 오감 가상 현실의 작용을 살펴보면 가상 현실을 이루는 요소들을 알 수 있다. 우선 가상 현실 시스템은 실체 세계에 있는 인간의 동작을 측정하고 입력할 수 있는 기기를 사용한다. 그 다음 입력받은 동작을 컴퓨터가 관장하는 가상 공간에 전달해 작용과 반응을 일으킨다. 이때 가상공간은 인간의 동작에 대응해 영상과 소리 체감등 다양한 감각 정보를 합성한 후 이를 특수한 하드웨어를 통해 인간에게 전달한다. 이런 일련이 과정들을 통해서 사용자는 실제 세계에서 컴퓨터가 만들어 낸 가상의 공간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가상 현실 시스템의 주요 임무는 인간의 오감을 통한 체험의 전달이기 때문에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에 대한 정확한 감성공학을 필요로 한다. 가상 현실의 공학적인 명제는 다름아닌 경험의 전달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또한 가상 현실의 효과를 충분히 나타내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각에 대한 이해와 새로운 감각 전달 방법의 개발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가상 현실은 기술적 차원의 진보뿐 아니라 인간적 요소에 대한 고려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1) 시각 디스플레이 (Display)장치 인간이 감각을 받아들이는 상당 부분은 시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가상 현실 시스템에서 각각 디스플레이 장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눈앞에 소형 컬러 액정 디스플레이를 고정시켜 3차원 영상을 보게 하는 HMD는 시각 디스플레이 장치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머리에 착용하는 헬멧 형식으로 머리의 움직임을 측정한는 센서를 함께 장착하고 있다. 또한 헬멧의 각도와 높이를 실시간으로 측정해 CGI(Computer Generated Imagery)시스템을 관리하며 약 135°의 넓은 시야에 걸친 화상을 비춰준다. HMD의 성능중 하나 중요한 것은 넓은 시야를 확보해 가상 세계에 몰입과 존재의 감각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인데 실재로 인간은 수평으로 155°의 시야를 갖기 때문에 넓은 시야를 제공하는 HMD일수록 보다 사실감 있는 가상 활경을 즐기는데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 HMD에도 문제점이 있다. HMD는 형태나 외양 및 기능에 있어서 다양하지만 모두 불편하다는 공통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며 시야의 크기와 직결되는 액정의 크기, 해상도, 새로운 이미지를 그리기 위해 걸리는 시간(Frame refresh rate), 머리에 장착함으로 해서 야기되는 위생상의 문제, 중량, 누의 피로감, 화면과 동작의 불일치로 인한 감각 기관의 혼란등이다. 또한 많은 케이블로 인해 이동에 제한이 있다는 결점도 가상 현실 시스템의 사용에 가장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첫 번째 난제는 낮은 해상도롤 인해 눈의 피로와 현실감 감쇄의 원인이 된다. 두 번째 문제점은 아직 그래픽 처리속도가 사람의 반응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점은 아직 그래픽 처리속도가 사람의 반응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시점 이동에 대한 실시간 화상처리가 약간 높다. 센서에서의 시간 자체는 시스템과 그래픽 시스템에서 비롯되는 시간 지체와 함쳐져 시스템이 반응하기 ¼-⅓초 이전의 위치가 HMD에 의해 전달된다. 따라서 사용자가 고개를 돌릴 때 가상의 그래픽 세계가 시야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현저한 시간 지연이 생기게 된다. 이런 현상은 사용자에게 방향감각의 혼란을 야기하는 등 후유증을 남기기도한다. 세 번째 머리에 장착함으로써 야기되는 위생상은 문제, 중량, 피로감, 장시간 착용시의 멀미 증상 등이다. 현재 발표된 상업용 HMD의 경우 무게가 보통 2㎏인데 현실감을 충족시키기에는 너무 무겁다. 그리고 HMD의 특성상 눈앞의 무게 비중이 커서 HMD가 앞으로 처지지 않게 손으로 잡고 머리를 회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초당 프레임수인데 TV정도의 화면에서는 매초 30프레임 이하면 보이는 것이 불안정해 눈이 피로해 진다. 현제의 가상 현실 기술은 10-20프레임 정도가 한계이다. 이 종도의 화상을 10분이상 계속 사용한다면 모니터를 10시간 사용한 것과 같다는 보고 결과도 있다. 다섯째로 HMD를 착용한고 있는 동안은 오직 한 장소로 활동이 제한도며 가상 세곙 이외의 환경에서 작업이 필요할 때마다 장치를 벗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HMD의 문제점은 현실재적응이라는 문제로 집중된다. 감각궤한의 지연 실세계의 경험과 가속 운동으로 인한 시각 및 전정기관 체성감각기관에서 대뇌로 전달되는 감각 사이에 불일치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대뇌가 혼란을 일으키게 되고 어지럼증 피로감 구토 땀흘림 방향감각의 상실 복부팽만감 등의 증세가 나타난다. 이를 전문 용어로 사이버 병(Cybersickness) 이라고 부르는 데 보통 가상현실을 체험한 후 장시간 쉬었다가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청각디스플레이 장치 가상 현실에 사용되는 음향은 HMD에 연결돼 시각과 동시에 작동한다. 현재 사용되는 이 분야의 기술수준은 스테레오로 입체음향을 재생하는 정도지만 홀로포닉스라는 신기술의 접목이 시도하고 있다. 홀로포닉스는 3차원 공간내에서 눈을 감고도 소리가 나는 곳을 감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움직임에 따라 그 감지도가 변화해 생생한 소리를 제공하는 음향기술이다. 귀는 눈과 마찬가지로 입체적인 음향을 들을 수 있는 데 사물의 위치와 얼마나 먼곳에 있는지를 뇌가 판단하도록 해준다. 중이(中耳)에는 서로 연결된 세 개의 뼈가 있어 소리 에너지를 고막으로부터 액체가 차 있는 내이 (內耳)로 보낸다. 갑자기 큰 소리가 나면 이 뼈를 고정하는 근육이 음향반사작용을 일으켜 조여지고 이 때문에 내이에 도달하는 에너지의 양을 최고 100분의 1정도로 감소시켜 준다. 이 근육은 지속적인 큰소리에 대해 10분이상 버틸수 없다. 귀는 또 어떤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주파수를 여과함으로써 주의를 집중할 수 있다. 연구에 의하면 맹인이나 눈을 가린 어른이 반사되어 돌아오는 휘파람 소리로 최고 3미터 까지 떨어진 곳에 물체가 있는 지 없는 지를 알수 있다. 강한 오디오 이미지는 사물에 대한 공간적 정보를 제공하며 체험자에게 가려진 가상존재를 알려줄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공간적 단서는 귀와 귀사이에 이르는 소리의 세기와 귀에 도달하는 소리의 시간 지연에 차이가 있다. 가상 현실 시스템에서 소리의 역할은 현장감을 증가시키는 데 있다. 일반 스테레오 사운드는 2개의 채널을 통해 소리가 머리 중간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만든다. 입체 음향은 외이를 통해서 고막으로 전달되는 음향신호를 좌우로 따로따로 생성해 임의의 장소에서 음원이 재생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현재 가상현실 시스템에서 청각디스플레이 장치는HMD에 연결 돤 헤드폰이나 이어폰이 주로 이용된다. 3차원 공간에서 현실적인 소리의 구현은 다수의 스피커를 사람 주위에 배치함으로써 실현할 수 있다. 3차원 음향을 출력하기 위해서는 3차원 사운드 프로세서와 소리 데이터를 저장하고 있는 음원이 필요하다. 이 분야의 성과 중 하나가 NASA가 개발한 컨볼보트론(Convol- votron)이다. 컴볼보트론은 아주 강력한 오디오 전용 DSP로서 HRTF로 만들어진 아날로그형 소리를 통해 3차원 사운드 효과를 내는 데 HRTF라 불리우는 일련의 계산법을 이용해 음원이 마치 소리가 특정 위치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만든다. 이 시스템은 방음 장치가 되어 있고 소리의 반사가 없는 방에 설치된 144개의 스피커에서 출력되는 다양한 소리의 주파수에 의해 귀에 충격이 가해질 때 음향의 변화를 그려낸다. 최근에는 인간의 청각 특성에 관한 연구가 진전되어 음성 신호의 실시간 처리로 일반적인 헤드폰을 사용해 3D 공간 임의의 위치에 음원을 높은 정밀도로 정립시키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3) 촉각 디스플레이 장치 촉각과 포스 피드백은 가상현실의 완성에 있어서 필수적인 사항이다. 실제에서 촉감으 통해 사물의 존재를 인지하듯 물리적 저항 감각을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개발된 장치들은 피부에 맞닿는 표면의 질감과 작은 압력을 시뮬레이트하는 데 사용된다. 전기적 촉각 및 진동 촉각 장치들이 전류나 작은 진동으로 피부의 자극 수용체들을 자극함으로써 사용자의 손가락 끝에 표면적 착각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가상의 터치 동작은 특히 텔레로보틱스 분야나 수술 시물레에션과같은 고도의 정확성을 요하는 분야에서 매우 중요하다. 가상 촉감을 만들기 위해 개발된 것이 촉각과 포스 피드백 시스템이다. 실제생활에서 감촉이나 포스피드백에 의존하는 수많은 체험을 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촉각은 물리적 자극에 대한 수용기를 통해 일어난다. 반면 포스피드백은 손가락이나 손에 작용하는 실제적인 힘을 의미한다. 이 감각은 근육이나 관절에 적용된다. 생리학에서는 촉각과 압각의 분류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 만약 모발에 가볍게 접촉을 하면 모근의 신경말단망에 의해 촉각이 발생하고 페치니소체를 가볍게 누르면 압각이 발생한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촉각은 피부표면에서 느끼는 피부감각과 피부 밑의 근육에서 느끼는 시부감각을 통한다. 피부에는 압각, 온각, 냉각, 통각을 만드는 점들이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피부 전체에 이들 감각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 감각적음 압점, 온점, 냉점, 통점으로 불리며 각각 그 종류가 다른 감각을 만들어 낸다, 심부 감각은 근육,관절기 등 수용기의 충격에 의해 발생하는 감각이며 물체를 움직일 때의 저항감과 중량감등 운동이나 위치에 대한 감각과 심부통각으로 나누어지며 피부감각과 심부감각을 합쳐서 체성 감각이라고 한다. 가상현실에서도 체성 감각에 대한 제시는 아직 모색 단계인데 몸 전체에 분포돼 있는 촉각을 공학적으로 모방해 실시간으로 재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실현의 범위를 손에 한정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촉각의 피드백은 피부에 가해지는 힘을 말하고 포스 피드백은 근육이나 관절에 가해지는 힘의 되먹임을 말한다. 어떤 물체를 형성하고 손가락 끝으로 뭔가를 조종하고나 특정 방향에서 물체를 잡기 위해서는 손가락과 손의 움직임을 감지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범용적인 피드백 장치들은 비용,효율, 유용성에 있어서 충분치 못하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 장치들은 더욱 가벼워지고 더욱 더 나은 성능을 갖게 될 것이다. 가까운 장래에 이 장치는 센서와 액튜에이터(ACTUAYOR)가 집적된 얇고 유연성 있는 형태로 발전할 것이며 새롭게 개발된 기술이 효과적 경제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적용될 것이다. 현재 연구되어지고 있는 포스 피드백 방식으로는 마스터암, 조이스틱. 조이스트링, 데이터 글러브의 네가지를 들수 있다. 이들 장치는 현재 가상 현실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다. (4) 후각과 미각 디스플레이어 장치 현재 실현되고 있는 가상 현실은 시각과 청각 및 촉각이 중심이지만 사용 목적에 따라 언젠가는 미각과 후각도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오감은 2000년 전 아리스토 텔레스가 처음 알아낸 것이지만 과학자 들이 인간 감각의 깊은 비밀을 풀어내고 그 케카니즘을 규명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부터이다. 가상현실에서 후각과 미각은 아직 그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는 않다. 우리가 맛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은 후각으로 느끼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콧속에 들어 있는 후각세포로 4천가지의 냄새를 식별할 수 있고 향수업계의 전문가는 약 1만가지의 향내를 식별할 수 있다고 한다. 맛에 대한 감각의 대부분은 후각을 구성하고 있는 100만개의 세포에서 나온다. 후각은 뇌가 가장 원시적인 부분인 변연계와 연결되어 있는 데 이곳은 정서 식욕, 성욕을 관장하는 부분이다. 이 후각 세포들은 다양한 수용기를 갖고 있어서 특정한 화학물질만이 들어갈 수 있고 수용기는 화학 물질의 냄새가 들어오면 신경신호를 일으킨다. 가장 중요한 후각 신경 조직과 후각 세포는 코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이 3차 신경조직 세포는 각기 다른 신경을 통해 뇌로 신호를 보낸다. 이들 두감각은 물리 세계에서 화학적인 인터페이스를 갖는데 컴퓨터는 아직 적합한 인테페이스를 갖고 있지 못하다. 현재 나와 있는 가상 현실 시스템의 전조인 모턴 헤이리그(Morton Heilig)는 센서라마(sensorama)라는 시각 청각 진동외에 배기 가스 꽃의 향수 행수 등 냄새의 감각까지 제공하는 개인용 오락기구를 발명하였다. 그의 아이디어는 오늘날 가상현실의 오감 제어에 관한 선구자적인 고안의 발상이었다. 센서라마 기구는 일종의 1인용 극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상요자가 의자에 앉아 오토바이를 타고 뉴육시내를 다니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도록 영상과 음향은 물론 바람 냄새 진동까지 제공한다. 오토바이 시뮬레이터와 비슷한 체감을 갖도록 설계된 시스템이지만 사용자와의 상호작용에 대한 고려가 없기 때문에 진정한 가상현실 시스템은 아니었다. 결국 오늘날 진정한 가상현실시스템의 원형으로써 앞날을 예견하는 선구자적인 고안인 셈이었다. 또 다른 실례로써 미국 플로리다 주의 디즈니 랜드에 있는 미래도시는 선사시대의 광경, 습기를 느낄수 있는 모의 향기를 사용하고 있다. 현재 후각 입력 장치로서 개발된 방향 디스플레이가 있으나 아직까지는 기초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후각 디스플레이는 냄새의 가각이 잔존하기 때문에 급작스런 환겨의 변화에 빠르게 적용하기 힘들다. 가상 현실속에서 사용자가 갑자기 다른 환경속으로 들어가거나 다른 행동을 취할 때 이에 따른 냄새의 변화를 빠를게 바꿀 수 없는점이 후각 디스플레이의 가장 큰 단점이다. 냄새와 맛의 감각은 실제적인 분자를 받아들이기 위한 수신기 역할을 하는 코와 입을 통해 특정 신호를 뇌에 보내게 된다. 따라서 후각과 미각 디스플에이의 개발은 매우 어렵지만 궁극에 가서는 뇌파를 인위적으로 조정해 냄새나 맛을 강제로 느끼게 할지도 모른다. 5) 가상 현실의 응용 모니터와 같이 평면에 나타난 이미지를 입체영상으로 나타내려는 기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기술의 미숙으로 오늘날과 같이 폭넓게 전파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근래들어 입체시를 지원하는 각종 장치나 소프트웨어의 성능이 대폭적으로 개선되고 있다. 광고나 예술, 분자구조 모델링, 사진측량법, 모의 비행 시뮬레이터, CAD나 CAM, 방사선 수술, 컴퓨터 단층촬영, 3차원 비디오 게임, 3D TV, 다차원 데이터이 시각화에서부터 가상 현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입체영상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술은 앞으로 군사과학 의학 산업 교육 오락등 실제적인 모든 분야에 확대될수 있다. 가상 현실이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이유는 이것이 기존의 기술을 능가하는 무엇이 바탕이 되서라기 보다는 그 응용 분야가 무궁무진하다는 게 더 클 것이다. 가상 현실의 응용분야는 쉽게 설명해 가상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 공간 내에 존재하면서 안가고도 체험하는 것인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저자를 가상현실의 연습(Virtual Reality walkthrough)이라 하고 후자를 원격존재(Tele-presence)라 부른다 원격존재는 자신이 있는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 있는 자신의 분신인 로봇의행동을 손에 잡힐 듯이 알게 되고 필요한 경우 로봇을 자신의 수족처럼 조작해 마치 자신이 그 장소에 있는 듯한 감각을 가질수 있는 기술이다. 원격존재와 가상현실의 관계는 하나를 거꾸로 말하는 것과 같다. 가상현실은 자신의 주변에 현실과는 다른 자연스런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원격존재는 자신이 현재의 자리에 있으면서 별도의 환경으로 가는 것이라 이해하면 된다. 원격 존재가 한쪽이 다른편을 조작한다는 것 외에는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로봇뿐만 아니라 원격으로 조작되는 기계 전체를 일컬어 털레오페레(Teleoperator)라 부르는데 이 부분의 본격적인 연구개발이 진전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후 원자력이 본격적으로 연구되면서부터 이다. 최초의 연구는 미국 아르곤 국립연구소를 중심으로 개발된 '매직핸드'라는 이름의 마스터 슬레이브 매니플레이터(manipulator) 였다, 1960년대의 텔레오퍼레이션 연구는 엑조스켈톤형 인력증폭기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것은 1950년대 후반에 행해진 GE(Generak Electric)사의 모셔박사의 연구를 토대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연구는 다시 미국 정부와 GE사의 공동프로젝트인 '하디만( Hardymann)'으로 진전했다. 이들 연구는 사람이 장치 속에 들어가 힘을 증대시켜 무거운 것을 드는 일 등에 쓰이도록 고안됐는 데 만일 장치에 고장이 생기면 인간의 생명도 위험해지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공상영화의 '에어리언'을 본 사람이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 주인공이 '기계옷'을 입고 괴물과 싸우는 장면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1)의학분야 3차원 입체영상이 적용돼 가장 효과를 볼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의학분야이다. 3차원의 비디오 영상은 의사로 하여금 수술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시행착오를 방지하게 하며 수술경로를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외과 의사들의 사전수술 시뮬레이션 계획에 3D영상기술은 매우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실례로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임상협회는 외과의사들이 아주 미세한 범위의 뇌에서 위치를 지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 뇌수술을 위한 3D의 응용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기술은 동시에 뼈의 재봉합기술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전자적인 3차원 입체영상은 의사에게 심리적 부담감을 덜어주게 되고 뼈가 어떻게 구성되고 재위치 되어야 하는지 에 대한 계획을 제대로 세울수 있게 한다. 현미경으로 봐야 움직임을 알 수 있는 미소대상의 수술을 마이크로수술(microsugery)라고 하는데 이 수술은 현재 미소한 혐관유합 신경이나 정관 난관의 재생수술 등 다방면에서 이용되고 있다. 마이크로 수술은 대단히 미묘한 손의 동작을 필요로 하기에 고도의 숙련을 요구한다. 여기에 원격존재 기술을 도입해 보통의 수술과 같은 감각으로 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연구가 이미 시작되었다. 이것은 현재 급속히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마이크로 머신 기술의 진보에 바탕한 것이다. 손의 동작을 미소한 매니플레이터에 전달하고 환부의 영상을 확대해 관찰하면서 원격조작으로 수술한다는 것이 골자 최근에는 마이크로머신을 캡슐의 형태로 체내에 넣고 체외에서 원격존재기술을 이용해 진단이나 수술을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생각되고 있다. 가상 현실이 의료계에 대비되면서 의술혁명의 서곡을 울렸다. 병든 부위를 절개하지 않고도 가상현실 장비를 이용하여 인체 내부를 생생하게 들여다보면서 수술을 할 수 있는데 정확성도 있고 수술의 성공률도 높다고 한다. 원격지에 있는 환자에게 이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하여 시술할 수 있는 장이 열릴 경우 외국의 유명한 외과 의사를 찾아 비행기로 몇시간씩 나아가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음은 물론 의료 해택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지역의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이다. 해부 실습용 시신이 절대 부족한 상태에서 실제로 시신을 해부하지 않고도 모의 해부 실습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2) 오락 최근 우리 주변에 가상현실 기술을 응용한 예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가상 현실 게임관인 어뮤즈21에 가보면 HMD를 착용하고 일반 게임과 달리 바깥 세상과는 완전히 차단된 채 게임에 몰입해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현재 가상 현실 기술이 가장 많이 응용되고 있는 분야이며 가상 현실 산업이 발전하는 초기에 각광받을 분야가 오락분야이다. 가정용 게임기 분야에서는 3D를 이용한 입체게임기가 일본 세가사에서 개발돼 특수 LCD 안경과 함께 판매되기도 했다. 이 안경은 LCD셔터 방식을 채용한 특수안경으로 사용자에게 실감있는 입체그래픽영상을 제공해 준다. 최근 이 회사는 가상현실기술을 응용한 3차원의 비디오 게임기와 입체안경보다 더 몰입감을 주는 영상을 제공하는 헤드 마운티드 디스플레이를 개발해 제품화시켰다. (3) 가상건물 세우고 이상을 점검 아마도 가상 현실의 응용 중 가상 현실 연습 분야는 건축가들에게 큰 경제적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한 예로 미국 노스케롤라이나 대학에 설치된 가상건축의 내부를 살펴보면 건물 구조의 청사진을 CAD프로그램으로 그래 놓고 이를 컴퓨터 그래픽 워크스테이션으로 보내 이미지에 입체감을 입혀 2차원 데이터를 3차원 이미지로 만든다. 이 이미지는 엔지니어나 건축가가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 장치를 쓰고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 이 대학 연구진은 이와 함께 가상의 빌딩 공간을 자연스럽게 돌아다니기 위해 핸들이 달린 러닝머신 시스템을 개발했다. 가상 환경에서 앞으로 움직이고자 하면 사용자는 러닝머신에서 앞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코너를 돌거나 방을 보고 싶으면 걸으면서 원하는 방향에 있는 핸들을 돌리기만 하면 된다. 빌딩 주변을 걸을 때 걸음속도를 조절해 움직임의 비율을 제어할 수 있다. 이것은 실세계와 매우 비슷하다. 걷고있는 동안 머리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고 주위를 둘러본면 물체는 실세계에서와 같이 원근감을 갖고 보여진다. 이러한 시스템은 단순히 재미있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건축설계에 있어서도 기존의 설계방식에 비해 실제적 장점을 지니고 있다. 기존이 설계방식으로는 3차원적인 공간감을 2차원적인 모니터에서 표현하기란 쉽지가 않을 뿐 아니라 3차원 모델을 실제 크기로 만들어 보지 않고는 디자인의 잘못된 점을 알 수가 없었다. 가상 현실 기술은 이러한 점들을 개선시켜 줄 것이다. 건축도면을 입력해 설계단계에서 컴퓨터 속에 미리 건축물을 만들어보고 그 안을 둘러본다면 도면상에 나타나지 않는 문제점을 미리 확인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예로 가상 박물관을 들수 있다.현재 박물관들은 유적물을 컴퓨터 그랙픽 작업을 통해 복원하고 있다. 시스템 공학 연구소에서는 미륵사지탑 복원을 계기로 문화재 연구소와 계속적으로 이 작업을 진행중인데 이는 원형고증 작업에 신속성고 정밀도를 향상시켜 문화재 보존 관리를 철저히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입체영상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가상박물관이 만들어지면 멀리 떨어져 있는 유적지까지 가지 않고서도 인파에 방해받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마치 그곳에 들어가서 살펴보는 듯한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설계분야에서도 기계적 설계환경의 연구에 입체시각이 2배에서 4배까지 정확도를 증진시키며 설계오류와 변경을 덜 초래 한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CAD나 CAM등 모든 설계응용분야에서 적용될 수 있다. 입체 영상은 자동화된 도구생산을 위한 설계도를 만들며 CAD프로그램에 그대로 공급될 수 있다. 가상의 움직임으로 사용자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며 시험과 오류에 의해 실험을 할 수 있다. 건축설계의 경우 일련의 계획을 세우고 3차원의 모델을 만들며 HMD를 이용하여 그 내부를 돌아다니며 관찰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가능하다, 이 시스템을 이용하면 건축물의 완공을 미리 시뮬레이션할 수 있어 정확한 내부설계까지도 상세하게 설계할 수 있다. 또한 3차원을 통한 분석은 동시에 건축기사들이 잠재적인 문제점을 예견하는 것을 돕는다. 건축가는 3차원 공간을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하여 탐험할 수 있으며 여러각도에서 건물을 바라볼 수도 있다. 따라서 설계가 활용되는 모든 분야는 3D의적용이 매우 긴요하게 쓰일 뿐만 아니라 많은 비용과 노력을 절감시켜 줄 수 있다. (4) 인테리어 응용분야 VR연습이 실제 생활에서 가장 각광 받고 있는 분야는 인테리어 응용이다. 그 한예로 작년 시스템 공학연구소가 연구한 부엌 인테리어의 세계를 보면 이 장치는 미국의 VPL사가 개발한 데이터 글러브와 디스플레이 기술을 이용한 시스템으로 이용한 시스템으로 컴퓨터로 부엌의 CAD모델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머리에 아이폰을 쓰고 가상 부엌을 돌아 다닐수 있다. 식탁의 의자도 옮겨보고 냉장고의 색을 바꾸어도 보고 전자레인지를 즉석에서 배치하는 등 사람이 원하는 것은 어느것이나 변경 추가할 수 있다. 이 기술의 핵심은 인간의 눈으로 보는것과 동일한 3차원 입체 영상을 제작하고 제작된 입체영상을 실제와 동일한 느낌을 갖도록 실제감을 표현하며 실제와 동일하게 재작된 물체를 3차원 공간에서 자유롭게 이동시킨다는 데 있다. 이 시스템은 주방가구를 대상으로 개발되었으니 실제로는 전시장에 전시를 필요로 하는 모든 제품에 응용이 간으하다. 특히 무게가 무겁고 부피가 커서 배치가 용이하지 않고 표준품의 종류와 숫자는 많지만 전시될 물품의 수가 제한되는 제품이라면 더욱 유리하다. 가상 현실을 이용한 CAD는 디자이너가 제품을 디자인 할 때부터 사용자를 함께 참여시켜 디자인 할 수 있다. 즉 디자인 상태의 물품을 가상의 세계에서 사용자에게 이용토록 함으로써 사용상에 문제점은 없는 지를 체크해 가면서 제품을 디자인할 수 있다. 이로써 제품개발에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디자인 경비를 절약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개인별로 차이가 있는 부품은 각자에 맞는 개별 디자인이 가능해 진다. 음향설계 분야에서 콘서트 홀이나 집을 디자인 할 때 건축가는 청각적인 문제에 시달려 왔다. 건축되기 전에 건축물의 청각을 결정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콘서트 홀에 청중이 가득찼을 때 음향의 반향 등 예견되는 많은 경우를 생각해서 건축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가상현실을 이용해 가상의 건축물에 가상의 청중을 앉도록 하고 연주되는 음향을 가상의 청중을 통해 느끼도록 하면 이러한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5)비행 시뮬레이터를 이용한 교육 교육은 가상 현실연습이 적용될 수 있는 관심 분야의 하나이다. 현재 가장 높은 수준을 이루고 있는 응용분야로 꼽히는 비행기 조종사의 시뮬레이터는 바로 어떤 방식으로 VR이 교육에 접합되는 가를 잘 보여준다.신형기의 시범 비행은 위험이 따르는게 보통이다. 개발된 비행기가 안전한지의 여부는 그 비행기의 동적 요소를 조합해 제작된 플리이트 시뮬레이터로 모의 비행을 실시함으로써 미리 알아보고 있다. 자동차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로 음주나 약물 복용후의 운전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실제 운전자에게 술과 약을 먹이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를 대신하는 장치가 바로 운전 시뮬레이터다. 또한 체험이나 오락용 시뮬레이터의 한 종류인 '스페이스 월드'는 체험형 레저시설이라 고도 불리우는데 이곳에서는 미리 프로그램된 과정을 시뮬레이터로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관객의 의지에 따라 대상의 운동이나 상활이 변하도록 하는 피드백 장치가 시도되고 있다. 이는 마치 컴퓨터가 이해되는 데 컴퓨터 오락이 큰 역할을 하는 것과 같이 VR이 보통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지금도 오락과 레제 분야에서는 VR을 구체화 하기 위하여 적지 않은 연구비가 투입되고 있는데 아직까지 VR오락이 흡인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는 그동안 등장했던 첨단의 오락기 들이나 레저용 디스플레이에 익숙해진 일반인들이 이제 막 초보적인 단계에 들어선 VR게임이 어설픈 화면에 쉽게 설득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6) 사실감을 추구 목표로 한 기술 별도의 장소에 있는 3인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하는 것이 원격지 화상 회의의 큰 목표다. 종래 텔레비젼 회의 모습을 표시할 뿐 이고 배경이 달라 한자리에서 회의한다는 느낌을 주지는 못했다. 이 기술이 보편화 된다면 현재 부분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재택 근무는 좀더 본격화될 수 있다. 우선 가상의 회의실을 만들어 실공간과 같은 조명조건을 주고 컴퓨터 그래픽스 기술을 이용, 실제공간에 있는 책상이나 의자 등의 연속성있는 공간을 만들어낸 인물을 영사한다. 또 인물도 같은 조명조건 내에서 컴퓨터 그래픽스 기술을 구사해 표시한다. 실제 공간에서의 인물은 입체적으로 존재하고 파악되지만 지금까지의 디스플레이는 이를 평면으로만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가상현실을 응용한 원격지 화상회의에서는 실제와 같은 입체감이 표현되도록 한다, 이것은 수신자측에 3차원 모델을 준비하고 상대의 얼굴 크기나 복장색 등을 합해 모델을 변형시킨 후 가상 회의실에 영사하도록 해 시각적 상호작용을 만든다. 예를 들어 A라는 인물이 B라는 인물을 볼 때 B는 상대방의 시선을 느끼고 A의 방향을 향하며 또 제3자 C도 이 시선의 오고 감을 인지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것은 가상 현실의 응용에 있어 사실감의 추구를 목표로 한 것이다. (7) 군사분야 군사분야에서는 입체영상 활용도가 눈여겨 볼만하다. 근래에는 항공 촬영된 3D입체 사진을 이용해 적 지역의 정세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외에도 지형의 구조물과 형태를 3차원 정보로 저장함으로써 지질 형태를 보다 더 생생한 이미지로 관찰할 수 있다. 최근 미국방성은 스테레오 그래픽스사의 크리스탈아이즈 가상 현실시스템으로 성공적인 군사작전과 모의 전쟁 실험을 시행했다. 이 모의 훈련은 항공모함이 작전을 위해 가고 있는 동안에도 항공모함안에서 원격으로 할 수 있다, 이 기술이 좀 더 본격화된다면 가상 환경에서 실시간에 필요한 모든 훈련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8) 로봇 원격 조정 우리는 이미 일상생활에서 리모콘 사용에 익숙하다. 텔레비젼이나 오디오 등과 같이 가까이 있고 정지한 상태의 제어는 현재의 과학기술 수준으로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먼 거리에 있는 움직이는 기계라면 사정이 다르다 이같은 기계를 조종하기위해서는 간단한지 않은 원격조작(teleperation) 기술이 필요하다. 인간이 직접 들어가거나 다룰수 없는 환경의경우를 생각해 보자. 원자로 내의 냉각로를 교환하거나 해양의 바닥에 파이프 라인을 세우는 작업 또는 극히 위험한 폭발성 물질을 다루는 작업에 사람이 직접 투입된다는 것은 위험 천만한 일이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의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간만이 가진 유연성과 판단력, 정밀함 등이 반드시 요구된다.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느 도저히 인간이 행할 수 없는 이러한 상황을 가능하게 해 주는 기술이 가상현실의 한 분야로 연구되고 있다. 미래에는 모든일을 자동으로 처리해 주는 로봇이 등장하겠지만 현 상태에서는 사람이 멀리 떨어져서 로봇을 제어할 수 있는 시스템이 대안으로 개발중이다. 이 시스템이 바로 로봇에게 지능을 부여해 인간과 비슷하게 움직일 수 있는 팔을 가진 원격로봇(Telerobot) 이다. 이러한 로봇을 먼 거리에서 조종함으로써 마치 자신이 직접 작업을 하는 듯한 착각이나 자신이 그곳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것을 원견 임장, 혹은 원격 존재라고 부른다. (9) 우주항공 및 과학분야 우중항공 및 원격응용 등의 과학 분야에서도 입체 영상은 활발히 이용되고 있다. 우주과학에서의 3D입체 사진은 행성의 탐사나 분화구의 관찰에 이용된다. 미국 항공우주국에서는 달탐험 임무수행시 달표면에 첫발을 내디디는 장면과 무중력 상태에서의 골프 스윙과 같은 입체사진을 촬영해 왔으며 최근에는 목성과 해왕성의 근접통과 때도 입체영상을 시도했다. 이러한 형태의 연구는 한 행성 내의 분화구와 다른 표면의 깊이를 측정하는데 중요하게 사용된다. 행성표면에 대한 입체사진 촬영법 기술은 보다 생생한 지도를 그릴 수 있으며 이는 우리가 그곳을 직접 탐험하기 전까지 표면 상태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NASA의 제트 추진연구소에서는 마젤란이 지구로 보내오는 금성의 사진을 정확히 분석하고 해석하기 위해 스테레오그래픽스사의 입체시각시스템을 사용한다. 이 응용에서 둥근 돔이나 단층처럼 점진적으로 변하는 형상의 지리학적 모양을 정확히 확인하기 위한 추가 정보가 제공된다. 예를 들어 화산의 2차원 영상을 보는 과학자는 2차원 영상을 구성하고 있는 많은 동심원에서 색깔차이에 대한 이유를 해석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3차원에서 같은 영성을 보면 내부의 원이 원추형을 가지고 있다는 등의 화산 핵심 구조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미국 항공사인 록히드사는 우주 시스템부의 태양판넬에 대한 검사응용에 이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이 기술 응용전까지 검사자는 각 태양판넬의면에 있는 많은 수의 회로가 단절됐는지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현미경을 통해 판넬의 앞뒤로 움직여야 했다. 이로 인해 검사자의 피곤과 잦은 오류가 발생했었으나 이제는 현미경 대신에 입체 비디오시스템을 대치시켜 작업자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앚아 편안히 검사할 수 있게 되었다. 6) 가상현실의 문제점 이러한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가상현실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발견되어진다. 특히 가상 현실은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줄수도 있다. 며칠전 쯤 논문에 참고가 될 만한 것이 있으면 볼려고 비디오 가게에 가서 물어보았더니 '채널69'라는 제목의 테잎을 빌려주었다. 내용은 뉴스에 식상해 있던 전직 PD가 조작된 뉴스에 대해 반감으로 9시 뉴스시간에 컴퓨터 첨단 기술을 이용하여 이동 방송국을 만들고 해적전파를 띄워 성인용 프로그램을 보내어 이 사회를 비꼰다는 조금은 황당무개 하지만 앞으로 가능성이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나오는 대사이다. 바로 "나는 나의 동정을 사이버 섹스를 통해 샤론스톤에게 줄거야" 하는 대사이다. 그런데 현재 인터넷이라든가 아니면 가까이에 용산에 가더라도 CD-ROM을 통한 2차원적 음란물들이 많이 나와 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아무런 제재 없이 10대들에게 파는 것 또한 목격하였다. 그렇다면 가상현실 프로그램이 실용화된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가상 현실은 의학분야라든지 학문 과학 분야에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이버 섹스라든지 폭력성이 다분히 있는 게임등을 통해 청소년들의 정서는 망가질 대로 망가질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날에는 텔레비젼이나 비디오, 영화 잡지 게임등을 통해 감각이 무디어지고 있는데 가상현실이 바로 이것을 더욱 부추길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가상현실 게임이 폭력용 주제로 다루는 내용이 많아 이들의 범죄를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인이 학부에 있을 때 미션스쿨에서 남녀 8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 보았는데 성적인 행위를 하고 싶을 때가 음란비디오를 보고 있을 때 라고 대답한 경우가 60%이상이 된다는 것이며 폭력에 대해서는 폭력용 게임을 하고있을 때 이와 같은 폭력을 하고 싶다는 아이들도 절반 정도는 되었고 심하면 자기와 그 주인공과 동일시되는 느낌까지도 받는다고 진술한다는 사실이다. 가상현실은 또한 중독성이 강해 중독될 경우 마치 마약처럼 인간의 정서에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도 있다고 한다. 가상 현실이 사이버시크니스(가상질병, Cybersickness)를 유발시키고 있다. 가상 현실 시스템이 많이 보급되는 만큼 그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사이버 시크니스의 증세는 다양하다. 가벼운 현기증에서 두통 구토 시력장애 방향감각 상실 등이다. 특히 현실감각의 적응이 빨리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하며 전문가들은 "가상현실 시스템을 사용한 뒤 현실세계에 적응 못해 몇시간 동안 정상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Ⅲ. 21C와 목회(멀티미디어 중심으로) 1). 21C의 목회 멀티미디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멀티미디어는 하나의 사회적 강요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의 삶을 위하여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도구가 되어가고 있다. 멀티미디어를 모르면 세계를 모르고 멀티미디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마치 신문을 보지 않는 사람처럼 오늘날의 세계에 대한 정보와 현대인이 갖추어야 할 상식에 뒤지는 사람이 되는것이며 삶의 다양한 기능에 있어서 후진성을 면할 수 없다는 위기감까지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멀티미디어 시대는 신학적, 종교적, 처학적 상상력의 빈곤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자동화, 기계화된 정보사회에서는 그것을 다룰 수 있는 테크닉만 알면 모든 일이 해결될 수 있기 때문에 성찰 사색 명상의 중요성 신존재를 생각하는 능력이 퇴화될 수 있다. 멀티미디어의 보편화는 인간을 도덕적 인격적으로 보다는 기계적 기능적으로 평가하는 풍조를 조성할 것이다. 인간이 기계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기계가 인간을 조작하는 비극이 초래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일상의 윤리와 도덕적 자질에 대한 가르침도 멀티미디어로부터 제공받게 된다. 과거의 종교적 견해를 대신하는 대안적 세계관을 제시하는 새로운 종교로 멀티미디어가 자리매김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멀티미디어는 더 이상 인간생활의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역할가지 대신하는 메신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멀티미디어 시대는 오늘의 목회현장을 향한 하나의 문화적 도전이다, 이 도전을 회피하지 않고 맞서서 극복해 내려면 목회적 차원에서 현대문명에 대한 건전한 비판적 시각이 형성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교회공동체 스스로의자기 갱신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목회는 멀티미디어를 바르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멀티미디어의 세계가 이루어나가는 기술의 자동적 증대성에 대한 비판 능력도 필요로 한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목회는 더욱 강한 인격성,공동체성, 진실성, 거룩의 체험, 등을 나누는 신앙 공동체 형성에 목회적 역량이 모아져야 한다. 이러한 과제를 바르게 수행하기 하려면 오늘의 목회현장 속에서 문화 비판적인 통찰력이 운용됨은 물론 기존의 목회에 대한 냉철한 자기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멀티미디어 시대의 인간들도 여전히 인간이며 여전히 구원의 복음과 복음을 통한 해방적 사역을 필요로하는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앞으로 우리는 과거에 체험하던 신앙세게보다 더욱 폭 넓은 의미에서 새로운 신앙세계를 구축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하여 더욱 강한 신앙적 체험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2) 가상 현실과 목회 (1)교회에서의 활용 가상 현실이 우리 생활속에 파고들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의 되어진 과학 기술의 진보에 의하며 빠르면 5년안에 실생활속에 깊숙히 파묻힘 것이고 컴퓨터 역시 커다란 것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컴퓨터가 실용화 될것이고 음성을 인지하는 컴퓨터 시스템이 우리생활과 관련이 되며 우리는 컴퓨터와 대화하며 살아갈지 모른다. 개인화가 이루어지고 공동체 생활이 약해 지며 가족이라는 최소 사회집단의 개념까지도 흔들리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컴퓨터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인해 인간의 손과 발은 점점 퇴화될 수 있고 또 신을 생각하는 사고가 사라질 수도 있다. 이러한 일들은 컴퓨터 즉 멀티미디어가 지배하는 사회속에서 가능한 일이며 특히 이 부분에 있어서 가상현실 즉 VR기술이 한몫을 하리라 생각이 된다. 우리는 다가오는 21세기 목회에 있어서 한발 앞서가야 한다. 즉 가상현실을 무조건 비판한다기 보다는 장단점을 골고루 알아내고 목회에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컴퓨터 특히 본인이 다루는 가상현실부분에 있어서 많은 프로그램들이 개발되어야말 할 것이다. 특히 지금의 신세대들을 위한 선교방향이라든지 아니면 시대에 뒤지지 않는 교회가 되기위해서는 교회에서 자체로 그것들은 준비해 나아가야 한다. 먼저 나는 교회에서 가상현실의 프로그램을 교회에서 응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이 되어진다. 애배당이나 교육관을 건축할 때, 혹은 교회의 조경사업, 기동원시설의 장단기 계획을 세울 때 가상현실은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다. 즉 가상현실을 이용하여 프로그램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가상현실을 실용화하고 전도의 도구로서 사용하기 위해서 먼저 게임기의 제작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어진다. 게임은 청소년들이 쉽게 친해지고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끼는 시기에 중요한 청소년 선교의 한 도구가 되리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성경의 내용을 게임화한다든지 (예를 들면 다윗과 골리앗 게임,노아의 방주등)해서 성서의 내용에 친숙하게 만들어야 한다. 또한 가상 현실을 통한 예배 프로그램의 개발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에 대한 찬반 양론이 펼쳐지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 프로그램이 장애인을 비롯한 수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프로그램은 예배에 대한 새로운 시도로서 이용될 수 있다. 즉 아직까지 시도되지 않았던 어떤 예배도 시행할 수 있고 또한 예배 참석자에게 여러 가지 선택의 폭을 주어 예배에 흥미를 준다는 점도 있다. 또한 개발되어야 할 프로그램이 있다면 바로 성경에 바탕을 가상현실의 프로그램화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 하기를 원하고 아픔을 같이 나누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상상해 보라. 만약 우리가 엑소도스를 경험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그 커다란 대열 가운데서 그들과 같이 길을 떠난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병자를 고치는 데 내가 가서 옆에서 있다면 생각만해도 가슴이 설레는 것 같다. 기독교에서는 가상현실을 이용하여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해 내어야만 하는 것이다. 또 개발되어야 할 것이 성지에 대한 가상현실 프로그램화이다. 실상 신학도로서 성지에 가보고 싶지만 시간도 없을뿐더러 경제적이 어려움에 봉착하는 자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이 완성이 된다면 우리는 멀리까지 시간을 허비하며 다녀올 필요가 없다. 성가대 지휘자나 반주자 성가대원이 찬양을 개별적으로 연습할 때도 유익할 것이다. 가상현실을 통하여 오케스트라를 연주해 볼 수도 있고 자신의 파트만을 연주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상현실은 교회 교육에도 유익을 줄수 있다. 다윗과 골리앗이 나오는 성경을 말로만 설명할 것이 아니라 가상 현실로 제공하면 실제로 옆에서 구경하는 듯한 생생한 체험을 하게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상현실의 세계에서 다윗이 되어 골리앗과 겨루어 본다면 그 느낌이 어떨까? 가상현실은 새신자 양육에도 매우 유익할 것이다. 말로 잘 이해되지 않는 사람에게 가상현실을 통하여 경험하게 함으로써 좀더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도록 이끌수 있다. (2)문제점 교회에서도 이처럼 많은 부분에서 많은 유익함을 주고 있으나 반면에 단점들도 내비친다. 먼저 가상현실을 통한 예배로 인해 코이노니아가 파괴된다는 것이다. 즉 가상 현실을 에배로 제공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예배의 체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신앙의 개인화가 이루어 지고 이러한 개인화현상으로 교회 공동의 친교의 기능인 코이노니아가 파괴된다는 것이다. 혼자서 가상현실을 통해 예배를 드리는 습관이 몸에 배면 오히려 사람과 만나서 교제하는 것이 번거롭다는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교회라는 개념이 사라질 것이고 목회자들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또한 목사와 성도들 사이에 대면하는 기회가 적어져서 결속과 연대의식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이렇게 됨으로 목회자 고유의 권한인 설교의 권한이 약화되고 치유목회 또한 이루어지지 않을것이라는 우려도 된다. 이렇게 된다면 자연히 목사님과 성도들 사이에 대면하는 기회가 적어져서 결속과 연대의식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앞에서 이야기 한 부분과 겹쳐지겠지만 또 하나의 문제점으로는 재택예배로 인한 에배당의 공동화(空洞化)현상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들수 있다. 한 때 미국의 빌게이츠는 사람들이 TV나 비디오가 생기면 극장이 모두 없어질 것으로 전망하였으나 그것은 기우였으며 아직도 극장은 건재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멀티미디어가 본격적으로 생활하되면 재택근무가 늘어나게 된다. 현재에도 몇몇의 기업에서 재택근무가 실시되고 있고 또한 학교에서 재택수업이 이루어질 전망이라고 한다. 이렇게 된다면 자연히 직장일도 집에서 보는 데 왜 예배만 교회에 가서 드려야 하는냐 하는 반론이 거세어 질 것으로 보인다. 눈이나 비가 오는 날은 교회에 가지 않고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을 것이다. 교통도 복잡하고 주차장도 부족하니 재택예배를 드리자는 의식이 일반하될 우려가 있다. 또한 주5일 근무로 주말여행이 일반화 되면 여행지에서 일행과 함께 드리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가 등장하게 되고 그러면 교회는 실제로 텅텅비게 될 것이다. 실제 지금 실시되고 있는 케이블 TV를 통해 드려지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도 많이 생기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상 현실을 통해 프로그램화되어진 예배에서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가 실제 교회에 가지 않고 자기가 만든 환경속에서 자기의 구미에 맞는 목회자
가정사역을 위한 21세기의 새로운 시도-Charles M. Sell의 이론을 중심으로-/ 2002-11-14
가정사역을 위한 21세기의 새로운 시도 주 제 : 실천신학 목차 1장. 서론 1)연구목적과 의의 2)연구의 범위와 방법 2장. 가정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근거 1)가정의 성경적 근거 2)가정의 교육 신학적 근거 3)가정의 기독교 역사적 근거 3장. 가정사역의 근거와 C. M. Sell의 가정사역 이론 1)교회생활과 가정사역의 관계 2)가정과 교회의 상호관계에 대하여 3)교회를 통한 가정사역의 방법론들 4장. 가정사역과 교회교육-C. M. Sell의 이론을 중심으로 1)부모교육 2)가정교육 3)자녀교육 5장. 가정목회 프로그램-C. M. Sell의 이론을 중심으로 1)부모 교육-부모와의 문제를 다루며 2)가족수양회 3)가정양육프로그램 4)가족 캠프 6장. 새로운 가정목회 프로그램 1)가족간의 친밀성훈련 2)영성적 가족규율 만들기 3)가정선언문 만들기 7장. 요약 및 제언 1)요약 2)제언 참고문헌 1장. 서론 1)연구목적과 의의 왜 오늘날 가정이 문제가 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답하기 위해 사회학적으로 혹은 윤리학적으로 대답할 수 있겠지만 본 연구자는 인간의 가정의 문제를 성경적 신학적 입장에서 진단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성경적으로 그 해결방안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경우 급격한 산업사회의 도래로 인하여 인간의 삶은 경제적, 문화적, 교육적 그 외 여러 면에서 편리함과 더불어 많은 혜택을 가져왔다. 한국사회는 주지하다시피 20세기 중반까지 농경사회였다. 농경사회는 대가족사회를 지향하는 법이다. 유교는 이러한 농경사회를 지켜주는 커다란 틀이었다. 500여 년이 넘는 동안 유교는 가부장적 틀로서 가정이 중요시 되는 가운데 고유한 기능을 사회적으로 잘 수행해 왔다. 그러나 근대화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전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1960년대 이후 산업사회로 전환되면서 도시화 핵가족화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이에 따른 가정교육 약화와 여권의 신장 등으로 유교적 가치관들도 빠르게 붕괴되어 갔다. 피임기구의 발견과 기술 개발로 혼 외의 성문화가 확산되는 것도 전통적인 가정의 가치관에 영향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로 인해 가정에 대한 가치관의 공동화 현상을 경험케 된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가정은 삶의 기초이며 원천이 된다. 가정은 이러한 사회와 국가를 이루는 기본적인 공동체이며 시민양성을 위한 교육공동체 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 해마다 증가하는 이혼 률, 간통, 동성애, 낙태, 미혼모의 증가, 청소년의 비행, 노인문제 등이 증가하고 있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IMF사태로 인해 가정의 갈등이 점차 확대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가정을 전통적 가치관에 내버려둘 것이 아니라 21세기 목회현장에서 어떻게 하면 가정을 회복할 것인가를 교회는 앞장서서 연구해야 한다. 교회가 방관하고 있는 사이에 가정들의 위기는 속속들이 나타났다. 이혼율의 증가와 결손과정의 증가, 또 이에 따른 결손 가정 자녀들의 문제는 이제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되기에 이른 것이다. 오늘날 부부관계의 문제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미국을 위시하여 카나다, 유럽의 이혼율은 이미 주지하고 있는 바이지만 한국의 상황도 이에 뒤지지 않고 상승하고 있다. 1980년에 6%이던 것이 1987년에는 11%, 1992년에는 13%, 1993년에는 16.8%(결혼 320, 985쌍, 이혼 53.877쌍)라는 경이적인 통계를 보여주고 있다. 가정은 사회 공동체의 원형이며 중핵이다. 가정이 무너지면 교회는 존재기반을 잃게 되고, 사회 또한 붕괴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모든 가정의 문제는 다름 아닌 인간의 죄 성 때문이라는 것이 본 연구자의 시각이다. 그러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접근은 성경에 근거한 전인적 방법이어야 한다. 성경 적으로 볼 때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 작품이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것이었다(창1:30-31). 그러나 오늘날 믿음을 가지지 않은 일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신자들의 가정에서도 이러한 가정의 불화와 화목이 깨어지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가정과 결혼생활 문제는 점점 사회적인 조류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심지어 목회자들의 가정까지도 여러 가지 요인으로 비슷한 상황으로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교회의 사역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가정에 대한 사역을 '가정 사역(Familt Ministry)'이라고 한다. 교회의 가정사역은 성경 적이다. 전통적 개념으로 본다면 교회란 기껏해야 신자들의 영적인 일에 설교를 통하여 도전을 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교회의 목회는 이제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볼 뿐 아니라 육 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로서 보는 "전인적 인간 이해"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가정이나 사회생활도 당연히 교회가 맡아야 할 영적인 사역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 사역에 대한 교회의 이해를 넓혀준 이가 챨스 M. 셀이다. 그는 교회의 전인적 사역의 일환으로서 가정 사역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또 많은 힌트를 우리에게 주었다. 그러므로 본 연구자는 그의 이론을 중심으로 가정사역에 대한 21세기의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가정이라는 제도의 창시자가 하나님이시고(창 1:26), 예수님께서 가정 속에서 태어나셔서 양육 받고 사랑가운데 유년시절을 보내셨으며, 친히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 가셔서 그들의 기쁨에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이루는 가정의 비밀과 아름다움을 대체할 수 있는 법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가정 생활의 문제는 기독교 사역의 핵심이다. 흔히 우리는 예수님의 현대 사역을 Teaching, Preaching, Heaeing이라고 하는데 가정을 온전케 하는 것은 이 세 가지에 다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한 구원을 이루고 또한 그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의 가정들이 온전하고 건강하도록 해야 하는 데에 사역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가정생활, 결혼생활의 사역은 실제적이다. 그러므로 이는 연구해야 할 중요한 주제인 것이다. 오늘날 드러나지는 않지만 문제를 앓고 있는 가정들이 의외로 많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공고히 하고 더욱 건강한 가운데 성장하도록 하기 위해 이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2)연구의 범위와 방법 본 연구자는 가정사역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가정에 대한 교회의 목회 적 관심이 새롭게 형성되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문헌과 조사연구를 통하여 이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아래의 논문들은 문헌연구자료로 참고하려고 하는 논문들이다. 먼저 "Horace Bushnell의 입장에서 본 가정종교교육" 이라는 논문에서는 기독교 교육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학자를 중심으로 가정의 신학적 위치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가족 목회를 위한 기능적 가족 향상 프로그램 연구(V. Satir 이론을 중심으로)" 이 논문은 가정의 Communication을 중심으로 목회 현장의 실천적 방향으로 이끌어 내는데 힘을 쏟았고, "가정목회(H. Bushnell과 M. Sawin)의 이론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은 H. Bushnell를 의 이론적 배경과 M. Sawin의 실천적 프로그램을 접목을 시도함으로 목회현장에 가정목회의 가능성을 연구했다고 보이며, 그 외 "기독교 교육적 입장에서 본 가정사역 연구(1196. 12)" "신앙공동체의 가정목회에 관한 보고(1989. 12)" "한국교회의 가정목회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에 관한 연구(1993. 11)" "기독교 가정교육에 관한 연구(1995)" "가정목회에 사회 사업적 접근에 관한 연구(1994. 12)" 등 다양한 연구들이 한국교회에 가정목회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고 본다. 최근에 소개된 C. M. Sell의 저서들은 한국교회·가정목회 현장에 이론과 현장에 상당한 도움을 줄 것이라 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체계적이고 이론적 근거가 희박한 가정목회란 바람직한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본 연구는 7장으로 구성하여 2장에서는 가정의 근거가 신학과 교육과 성경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원론적인 면에 해답을 찾고자 했으며 3과 4장에서 M. Sell의 가정목회의 이론적 근거에 대해서 5, 6장에는 이러한 M. Sell의 이론이 한국적 목회현장에 접목이 가능한가? 어떤 프로그램이 정착에 합당한 가를 실제 프로그램을 제시하여 보겠다. 7장에서는 본 연구를 요약하고, M. Sell의 가정목회 현장에서 잘 진행되기 위한 절제들과 이 연구의 발전적인 제안으로 논문을 끝맺고자 한다. 2장. 가정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근거 가정 사역(Family Ministry)은 무엇인가? 이 말은 물론 기독교에서만 사용하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가정사역이라는 말은 흔하지 않은 말로서, 이는 교회가 가정목회에 초점을 모아 병 들어가는 가정을 치유하고 또 예방하고 이미 깨어진 가정의 상처받고 버림받아 고독한 자들이 된 영혼들을 어루만지는 것을 가정치유사역(Family Heaeing Ministry)이라고 한다. 이 말을 제일먼저 사용한 사람이 챨스 M. 쉘이다. Charles M. Sell박사는 미국 목회자들의 경우를 예를 들어 교회가 가정 사역을 못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목회자들이 문제에 빠져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즉 자신들의 병든 가정을 거론해야 하는 고통 때문에... 문제에 개입하기를 싫어한다." 고 했다. 이 말은 의외로 많은 목회자들도 가정 생활에서는 자신감이 없고 또한 문제점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미국내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가정의 역할을 약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성구(마6:33, 마22:30, 눅14:26, 막3:33,-35, 고전7:31,32)들이 있어서 오해의 소지도 있으나 결혼과 가정의 역할을 강화시키는 성구(요2:12, 마25:2, 엡5:,딤전 4:1-5)들이 있음을 주시해야한다. 현대 교회가 가정 사역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사역을 해야 하는 이유는 우선 가정 사역이 영적이고 도덕적인 사역이기 때문이며, (Family Ministry is Spiritual and moral Ministry)가정 사역 자체가 전도(Evavgelism)요 제자 훈련(Discipling)이요. 영적진리(Spiritual truth)란 가르침에 있어서 성경을 적용(Biblical Application)하기 때문이다. 가정 사역은 곧 교회 성장 사역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고통 분담의 사역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더더욱이 목회자에게 있어서는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흠이 없어리가 태어난 가정들, 그리고 우리가 성인으로 살고 있고 가정들이 출생부터 사망까지 우리를 만들어 간다. 그것들은 우리의 최선의 시대와 최악의 시대를 이루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 때문에 어떤 단체도 가정만큼 우리를 서로에게 연결시켜주지 못하며 어떤 것도 그만한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는 가정 사역에 절대적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다. 왜 이러한 가정의 파괴가 쉽게 일어나고 자주 일어나는 가? 그것은 현대사회가 고도로 산업화 전문 화 되면서 핵가족 중심과 개인주의, 그리고 물질주의로 인간 비 인간 화 등을 들 수있다. 또한 가족에 대한 새로운 사회현상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것으로 인해 앞으로는 더욱 높은 비율로 이혼이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게되고 이는 목회자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베리쏘온의 글에 따르면 상담자중 81%가 종교인이며 그중 41%가 기독교인이다. 이 상담 내용 중 51%는 부부에 대한 문제이다. 이러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또한 부부사이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 부부의 60%가 결혼에 불만을 갖고 있는데 그 중에 최고의 이유가 대화의 결핍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부부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우리는 성경 속에서 기독교 가정의 문제를 파악하고 이를 예방 적 차원에서 해결 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1)가정의 성경적 근거 (1) 구약 성경과 가정 Charles M. Sell은 많은 교인들이 교회 생활을 하기 위해 자기의 가정 생활을 희생시키는 것을 마음 아파했고 또 많은 교회들이 교인들이 교인들의 가정을 풍성하게 사역해 주지 못하는 것을 지적했다. 찰스 셀은 말한다. "가정 사역은 교회가 가정을 뒷받침해 줘야 한다는 입장에서 가정사역에 관한 책을 쓰게 됐다"고, 하나님께서는 가정사역을 활용하셔서 교회를 돕고, 나아가서는 가정들이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대로의 삶을 누리도록 하나님께 기대하고 기도하면서 "가정 사역" 책을 쓴 찰스 M. 셀은 가정사역의 기초를 하나님이 창조원리 가운데 하나로 주신 결혼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결혼의 성격과 근거에서 말했다. 그러므로 결혼과 가정에 대한 이해는 성경 그리고 구약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찰스 M. 셀은 결혼의 성격에 대하여 구약성경에서 볼 때, 결혼은 하나님의 의도 그리고 그 성격은 철저히 일부 일처제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결혼한 부부는 친밀한 관계로서 개인적인 헌신과 사회적 헌신과 하나님께서 승인한 헌신 이 무엇보다 기초되어야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가족의 의미는 넓은 범위의 공동체를 포함한다. 결혼을 해서 결속된 친 가족 공동체로부터 시작해서 그들 집에 함께 거하는 노예, 첩, 고용인, 외국인까지 가족개념 속에 포함시켰다. 은준관은 가정을 "하나님의 뜻"을 이 땅위에 실현하는 도구는 하나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전달되는 생활화되고 종교교육의 살아있는 현장"이라고 말했다. 은준관은 또 다른 저서에서도 "......이와 함께 성경의 역사에는 예배 공동체와 대등한 위치를 차지해 온 또 다른 공동체가 존재해 왔다. 그것은 가정공동체였다. 예배공동체가 이스라엘 민족과 교회에 있어서 공동적이고, 사회적이며, 또 공식적인 의미를 지녔다면, 가정 공동체는 이스라엘이나 교회를 향하여 신앙과 교육의 개별적이고, 비공식 적인 장르로서 역사의 심층 속에 자리를 지켜온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는 히브리 민족 공동체의 가정들은 가정을 통해 민족의 역사와 그 역사 속에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도우신 여호와께 대한 신앙의 훈련을 시키는 현장으로 삼았다. 즉 "예배적 기구"로서의 가정이 교육이나 친교보다 우선했던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 나갔던 것이다. 구약에서의 결혼의 목적과 십계명의 제5계명은 사회질서와 윤리 개념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가정은 넓은 가정인 사회와 문화를 책임지는 사명 적 공동체가 된 것이다. 이근삼은 "구약의 하나님은 최고의 생활자 또는 통치자만이 아니라, 도덕, 진리, 과학, 예술 등 모든 생활권에 있어서 자존하시는 지배자"이기 때문에 인간의 전 생활 영역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기독교 가정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존재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요약하면 예배적 기능, 교육적 기능, 안위적 기능, 보존적 기능 등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가정"이라는 용어에는 자연적, 심리적, 사회적인 용어의 뜻을 초월해서 그 가정을 창조하시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이루는 거룩한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의 참 능력은 인간들의 어떤 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힘이었다. 이스라엘의 가장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사랑하신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그들 또한 그 사랑 속에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받으며 살아가도록 지속적인 교육 훈련이 대대손손 지켜지도록 하나님이 명령하신 계명들을 재인식시키며 교육시켰던 것이다. 성경 전체의 흐름도 그러하거니와 특히 신명기서의 모든 내용들은 하나님의 사랑, 능력 약속을 자손들에게 이해시키는 반복적 명령이다. 히브리 가정의 가장은 특별히 자녀들의 교사로서 영적 복지의 수호자로서 그 사명이 주어진 것을 알 수 있다. (2) 예수의 가정관 찰스 M. 셀은 가정에 대한 예수의 이해를 눅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에서 찾는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가정에 대한 이해는 이 비유에서 볼 때 아주 깊은 친밀감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즉 가정은 사랑 안에서 친밀감을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가정에 관해서 많은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으나 이혼에 대해서는 깊이 말씀하셨고, 성적 윤리에 대해서는 구약에서의 계명보다 더 깊이 말씀하셨다. 예수는 모세 율법에 의한 이혼 방법과 이혼 증서의 허용을 반대하는 입장을 신명기 24장 1-4을 인용하셔서 말씀하셨다. 특히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성경 인용과 위선적인 삶의 태도에 대해서 심도 있게 책망을 하시고 무리들에게 당신의 깊은 진리를 전파했다. 예수 당시 바리새인들 중에는 남편의 판단과 그가 원하는 대로하게 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 되어버렸다. 어떤 랍비는 종교적인 이유( 스10 :3,44 )나 아이가 없다는 이유( 말2 : 15 )로 이혼을 허용하였다. 또 어떤 랍비는 아내가 요리는 못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이혼을 당할 정도로 율법은 타락한 인간들의 수단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지극히 사소한 일에도 이혼을 제기 하기도 하고 이혼 이유를 설명도 않고 일방적 이혼이 자행되자 이스라엘 랍비들 중에서 이혼 문제가 크게 대두되어서 논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예수께서 이혼의 질문을 받으셨을 때( 막10 :2-12, 마19 : 3-9 ) "결혼은 일부일처제가 돼야하고 일생을 나눔이 없는 결합( Cleaving )속에 살아야 한다"고 했다. 예수는 여기서도 모세 율법을 인용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너희의 완악 함" 때문이라고 지적하시고 창조주의 의지와 행위에 따라 이뤄지고 제정된 결혼은 인간이 나눌 수 없다고 반박하시고 유대교적 실천의 모순성, 즉 모세율법을 악용하는 타락의 근성에 대해 무섭게 반박하셨다. 뿐만 아니라 당시 거룩한 결혼과 가정을 파괴하는 자들에 대해서 비판하셨다. 또 예수 당시 남성들은 간음죄에 대해서 별로 자책이 없었고 유별나게 여성들이 간음죄를 지은 것에는 민감했던 것이다. 이것을 예수께서 지적, 남녀 구별 없이 똑같은 죄를 지적하셨다. 결혼과 가정의 신성함에 대한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의 최초에 창조하신 가정창조에 연결시켜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 가정, 성경적 결혼의 기초이고 기독교적 결혼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Georgia Harkness는 그의 저서 [Christian Ethics] 에서 "가정은 거룩한 관계이고 결혼은 신성한 인격적 결합이어서 가볍게 파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결혼 생활에는 기쁨이 있는 동시에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했다. 다만 예수께서는 모든 종류의 불법적인 성행위로인한 더 큰 죄악이 있을때에는 이를 제하기 위하여 이혼이 불가피 하게 허락될 수 있으나 유대인들처럼 정욕과 허영을 채우기 위해 타락의 행위로 이혼을 악용할 수 없음을 밝히시면서 창세기 1:27, 2:24을 근거로 하여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다. 예수는 가정이 일종의 생활 방편이나 사회적 관계나 개인적인 향락을 위한 것이 아님을 특별히 강조하신 것이다. 결혼이 너무 쉽게 그리고 이기적으로 행해지고 너무 속히 깨어지는 오늘의 현실에 있어서 예수의 가정 관은 영원히 인간 모두에게 깊이 뿌리 박혀야 할 진리이기도 하다. (3) 바울의 가정관 찰스 M. 셀은 바울 서신 서에 나타나는 다양한 비유와 가정에 대한 가르침을 근거로 들면서 가정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특히 바울이 가정에 대하여 강조한 것이 가정의 질서와 질서보다 더 중요한 사랑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바울은 그의 많은 서신 서들 가운데 가정 윤리에 대하여 많이 언급했다. 즉 가정은 하나님이 축복하신 거룩한 공동체로서 가정을 가정되게 지키려면 하나님이 제정하신 가정의 질서 즉 결혼의 신성, 부모와 자녀 관계의 질서, 공동체 보존에 대해서 깊은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 없는 가정은 온전한 가정이 아니며, 비참한 가정이 되지 않기 위해서 결혼의 순결을 강조했다. 하나님 없는 가정 속에는 언제나 사탄이 틈탈 수 있는 약점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했다. 특히 부도덕한 애정 관계는 가정을 파괴하고 "간음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고 했다. 고린도 교회의 성적 타락에 대해서 강력히 지적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도 하나님의 뜻은 가정의 순결임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아내를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쫓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오 거룩케 하심이니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고 가정의 신성을 일깨워 주는 서신을 보냈다. 바울은 한 가정을 형성하는 부부 관계를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밀접한 관계를 말했다. 이것은 사랑의 질서와 복종의 관계를 말한 것이다. 즉 "남편은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셔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희생적 사랑을 하고 아내는 남편을 순종하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고 했다. 이것은 남편에게 복종하는 아내만이 그리스도에게도 복종할 수 있음을 말했다. 아내의 순종은 남편의 우월이나 아내의 열등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심 같이 남편이 가정의 머리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고전8 : 11) 따라서 아내는 그리스도에게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배움으로써 남편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남편의 권위가 가정의 폭군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아내를 희생적으로 사랑하라" 고 했다. 칼빈은 바울에 이 사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남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소유했다면 마땅히 그 의무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 고 했다. 또한 바울은 자녀들에게 권면하는 메시지에서 주안에서 부모공경을 강조했고,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처럼 주종관계 즉 노사관계의 질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설명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와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관계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John Howell은 성경에 입각하여 "가정은 남자와 여자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조화됨에 그 기원이 있음을 말했고 Maston은 "기독교 가정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의 본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했고, 아담스 (Jay E. Adams)는 "가정은 사회보다 먼저 제정되었고 국가보다 먼저 존재하였기에 가장 근본적인 것이며 최초의 것이다.고 했다. 이처럼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의 작품이고 타락한 후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가정을 회복시키시고 회복된 가정을 통하여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키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생명의 장이고 사명의 현장이다. 2)가정의 교육 신학적 근거 윌리엄 바클레이는 그의 연구 저서 「고대 세계에 나타난 교육적 이념」에서 바벨론 포로 이전의 이스라엘 역사에는 "가정만이 유일한 학교"였으며 부모는 유일한 교사였다고 증언한다. 바클레이는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포로 되기 이전에는 학교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고 하면서,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포로 이전의 이스라엘 속에는 예배공동체와 가정이 민족의 신앙과 교육의 역사적 계승을 위한 양대 현장임에 틀림없다고 설명한다. 찰스 M. 셀은 신약에 와서 교회가 제도적 형태를 취함에 따라 그 교육과정이 공격을 당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정사역의 면에서 본다면 교회교육이란 가정에서의 기독교교육과는 너무나 분명하게 다르다고 했다. 목회는 어머니가 어린 생명을 돌보듯이 그리고 목자가 양떼들을 돌보듯이 하는 것이다. 즉 예수의 심정 곧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인생의 그늘진 외곽에 소외된 영혼까지 찾아 상한 심령을 치료하시던 그 정신, 그 마음 , 그 손길로 영혼을 돌보는 일이라 하겠다. 그래서 유영심은 개인영혼의 발달과 성장, 치유, 구원을 중시하고 특별히 배려하는 접근으로서 "영혼을 돌봄"이라 했다. "영혼(Seele)"은 독일어의 인격적 전인으로서의 영혼을 의미하고 "돌봄(Sorge)"이란 영혼이 병든 것을 치료하는 의미로서 라틴어의 "Cure(치료)"에서 유래한 것으로 영어의 "Care(돌봄)"과 "Cure(치료)"이고 독일어의 "Heilung(치유)", "Heilend(구세주)"는 "고침"이다. Carroll A. Wise는 목회(Pastoral Care)에서 "Care"라는 말은 "관심"을 나타내는 말로 "의학적 돌봄(Medical Care)"이 아닌 영적이고 인격적 돌봄이라는 이론을 정립했다. 목회의 초점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사역으로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내신 사랑의 관심, 즉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신 것처럼 모든 영혼에 대한(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인격적 영적 관심과 개인영혼에 대한 구체적 돌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있는 가정에 대한 목회자의 관심은 당연한 것으로서 이들 문제있는 가정도 중요한 목회적 돌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치유는 기독교교육에 의해서 일어 나는 것이 기독교목회의 특징이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침으로 되는 것이라 할 수있는데. 이러한 기독교 교육을 가정의 회복 특히 문제있는 가정을 치유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함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회대상으로서의 가정을 이해하면서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한다. 하지만 찰스 M. 셀은 가정에서의 기독교 교육에 대한 가치 평가는 절하되고 교회의 교육은 학교식 교육으로 이루어짐으로 말미암아 깊이있는 교육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현대산업 사회의 허다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그 압력을 이기기 위한 사회기본 단위이며 인간회복과 구원의 장(場)인 가정에 또 하나의 교회를 세워서 하나님의 뜻이 가정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더욱 긴요한 일일 것이다. 요즈음 미국에는 4천만 이상의 어머니가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 중 600만은 자녀가 없다. 3살 이하의 자녀를 둔 어머니들의 약 3분지1이 온종일 일하는 직장에 다니고 있으며 직장이 없는 많은 어머니들은 TV에 몰두하거나 이곳 저곳을 방황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자녀교육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산업 문명권에 속한 사회는 많은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로는 도시화의 문제로서 인류가 농경문화에서 산업문명으로 발전됨에 따라 전원적 농경문화가 도시문화로 변천하게 되었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3%만이 농촌에서 살고 97%가 도시에 몰려 살게 되었다. 따라서 도시에는 주택 난, 교통 난, 교육 난을 비롯하여 매춘, 도박, 절도, 강력범, 마약 범, 등 각종 범죄와 그리고 퇴폐풍조와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가 수없이 발생하게 되었다. 둘째로는 산업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노사문제와 이윤분배, 노동자들의 인권, 환경오염, 자원고갈, 직업병, 다국적 기업의 횡포, 생산제일주의, 공해, 복지시설 부족, 빈부의 격차 등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셋째로는 기계가 사람이 하는 일을 대신하게 됨으로서 작업의 량과 질에 있어서 사람이 기계보다 낮은 대우를 받게 되었고 사람이 기계를 수종들 뿐만 아니라 기계의 일부처럼 비인간 화 되어 가는 문제이다. 그러면 이러한 산업사회의 문제들 속에서 가정에는 어떠한 문제들이 생길 것인가? 이러한 사회 변동 중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도시현상으로 가족들이 농촌과 도시에서 헤어져서 살게 되거나, 근무시간 등으로 가족들의 얼굴보기가 힘들 정도로 자리를 같이하기 힘들게 되었다. 방치되거나 과잉보호를 받게되는 자녀와 청소년들의 문제와 부부의 탈선문제 등이 발생하고 가정불화와 이혼문제, 배교(背敎). 불신앙의 문제 등이 발생하게 되었다. 도산(倒産) 또는 실직으로 가정경제의 파탄 등의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가정문제 등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가정문제는 가정에서 해결되야 할 것이며, 그리고 그 가정의 문제는 가정을 구성하는 가정의 문제에서 그리고 그 가족의 문제는 종교문제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사회는 그야말로 급변해 간다. 따라서 이 세대는 삶의 모든 면에서 변동이 일어나고 개혁이 단행되고 혁명이 폭발한다. 그 결과 사람의 삶에 근본적으로 위협을 주는 것이다. 역사관의 변동, 가치관의 변동. 전통에 대한 도전 등은 종교인의 삶의 형태를 근본적으로 부인할 뿐 아니라 자연인과 신앙인의 삶의 형태까지 부인하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다. 그 결과 자연인이 가지는 인간과 인간과의 중요성은 무시하고 이기주의에 빠지게 되는 동시에, 종교인이 가지는 수직적인 변동을 간접적으로 부인함으로서 신앙인의 삶의 형태도 부인하고 나아가서는 삶의 근본구조를 붕괴하는 위험성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변화되어 지는 가족변동의 문제는 현대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관계가 있다. 특히 산업화, 도시화, 전문화를 통하여 나타나게 된 가족변동의 요인들인 가족형태의 변화, 가족기능의 변화, 가족윤리의 변화는 각기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야기 시키고 있다. 핵가족화, 가족기능의 변화, 역할분담의 혼동 등은 현대가족에게 사회문제를 나타나게 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족의 불안정 문제와 노인문제, 청소년문제 등은 중요한 문제이다. 가족의 불안정의 문제라 함은, 현대가족은 부부중심 가족이며 부부가족은 자유연애 결혼을 전제로 한다. 그 결과 부부의 사랑이 식으면 쉽게 해체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부부 가족의 결함은 위약하고 불안정 할 수 있다. 부부가족의 불안정성은 그것 자체도 문제가 있으려니와 그로 인한 자녀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남편이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부인이 그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여 의견충돌이 되고 감정적 대립, 나아가서는 역할수행을 포기하고 결국 가족의 붕괴 즉 이혼으로 발전하는 것에 이른다. 또한 노인문제는 산업화, 도시화, 가족의 세대적 분열에 의한 핵가족화가 가부장적 가족에서 부부중심 가족으로 바뀌어지고, 효(孝)의 권위가 흔들리고 노인의 지위와 역할의 변동으로 노인의 권위가 저하되고 노인의 지식과 경험이 별로 소용없는 것이 되었으며, 노인이 가정경제에 있어 오직 부담 적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결국 산업사회로 들어서면서 사회변동의 여러 요인들 즉 가정형태의 변화, 가정기능의 변화, 가정윤리의 변화, 등에 의하여 부부 당사자들 뿐 만 아니라 자녀 양육문제, 청소년문제, 노인문제 등 삶의 모든 세대에 걸쳐 수 없이 많은 문제들이 노출되어지고 있다. 가정이란 사회의 기본적인 요소요 기초되는 공동체이며 아울러 교회의 기초요 기본 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가정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제도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이 위기에 놓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많은 문제의 근본 원인은 죄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이러한 죄 된 세상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명령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먼저 믿게된 신자들에게 주목해야 한다. 에디스 쉐퍼(Edith Shaeffer)는 그의 저서 "What is Family?"에서 "가정은 생명체요 올바른 행위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예술로서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서로 영향을 미치는 개인들의 모임이다."고 말했다. 겐 게츠는 그의 저서 '가정생활 세미나'에서 '신약시대에 있어서 기독교 가정은 거의 교회와 흡사 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개개인의 가정은 가정이 생성되는 그날부터 지상교회의 지체였다."고 했다. 초대 교회와 그 당시 크리스챤 가정들의 형태는 교회가 가정 같았고 가정이 교회 같은 모습이었음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고전 16 :15, 롬16 :3-5; 고전16 :19 골4 : 15) 그래서 겐 게츠는 "교회는 가정을 감싸고 있는 우산과 같은 개념이 있고 가정은 교회의 축소형이다.고 힘있게 강조했다. 디트리히 본 회퍼는 "연애 중일 때에는 두 사람의 자아만 보지만 결혼을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세대를 연결하는 사슬의 고리가 된다. 연애중일 때는 자기의 행복의 천국만을 보지만 결혼 생활에서는 세상과 인류를 위한 책임을 맡는 것, 결혼을 개인적 이상의 것으로서 신분이며 임무이다."고 했다. 래리 크리스텐스(Larry Christenson) 은 그의 저서 [The Christian Family]에서 "가정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촉진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 가정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세우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로서 우리의 영적인 지각력을 개발시키며 가정을 위한 하나님의 길과 뜻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증강시키는 방법을 배우는 모험이 가정 사역" 이라고 했다. 이 모든 이론들을 종합해 볼 때,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창조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가정은 창조론 적 근원을 지닌다. 이 가정이 범죄, 타락했을 때 예수그리스도가 오셔서 하신 일도 가정의 빛을 죄로부터 회복하시는 구속과 치유, 회복의 역사이다. 이것은 인류 역사가 막을 내리는 순간까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아야 하는 구원론 적 근원을 바탕에 두고 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지속적으로 성화 되어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루는 거룩한 사명을 마지막날까지 이뤄야 하기 때문에 가정은 종말론적 근거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모름으로 인해 사람들은 가정에 대해 세속적 가치로 이 세상 풍습을 쫒는 결과로 세상의 많은 가정은 위기를 맞고 있으며 또 맞을 위기에 놓여 있다는 찰스 M. 셀의 주장은 타당 한 것이다. 이 때문에 계시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계시 안에 나타난 창조원리로서의 가정을 가르쳐야 한다. 여기에 교육적 목표가 있는 것이다. 3)가정의 기독교 역사적 근거 (1)초대교회의 가정 에디스 쉐퍼(Edith Shaeffer)는 그의 저서 "What is Family?"에서 "가정은 생명체요 올바른 행위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예술로서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서로 영향을 미치는 개인들의 모임이다"고 말했다. 겐 게츠는 그의 저서 '가정생활 세미나'에서 '신약시대에 있어서 기독교 가정은 거의 교회와 흡사 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개개인의 가정은 가정이 생성되는 그날부터 지상교회의 지체였다."고 했다. 초대 교회와 그 당시 크리스챤 가정들의 형태는 교회가 가정 같았고 가정이 교회 같은 모습이었음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고전 16 :15, 롬16 :3-5; 고전16 :19 골4 : 15)그래서 겐 게츠는 "교회는 가정을 감싸고 있는 우산과 같은 개념이 있고 가정은 교회의 축소형이다.고 힘있게 강조했다. (2)중세와 근세 S Hiltner는 그의 'Preface to Pastoral Theology'에서 개신교에 신학이 정립된 것은 19세기 때부터이다. 고 했다. 최초의 목회신학의 이론을 정립한 사람은 Bu-Cer로서 그들 종교개혁자들은 목회신학의 관심을 영혼치료와 인격회복에 두었다. 가정사역의 문제에 대한 관심은 이보다 훨쒼 뒤인 것을 알 수있다. 기독교초기(A.D.180년)에는 환란과 핍박이 극심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 단위는 교회 중심이었다고 하기 보다 가정중심이었음을 알 수있다. 빌립보성의 자주장사 루디아처럼 먼저 여자들이 신앙을 가지게 되고 그 다음 온 가정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가 흔하였다. 사도시대에서 믿음의 가정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시련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 가족들이 물건을 하나님께 바치고 땅을 팔아 바치는 은혜 충만한 생활이 있었으나, 그 반면에 박해가 겹쳐와서 가정에 대 혼란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가족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기독교의 발전 역사에 잃어버린 영혼 구원이 항상 있었던 것과 같이 가정문제는 항상 존재해 왔다. 믿음의 가정에게 박해가 심해졌을 때 믿음이 부족한 가족들은 교회를 떠나게 됨으로 가정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AD 50-200). A.D.200-306년에는 Dioclection황제의 박해 속에 견디다 못해 이탈한 사람들을 다시 그리스도에게로 연결 화해시키는(Reconciling)기능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므로 가정의 문제들을 돌아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가 기독교문화시대가 도래한다.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 후 비잔틴 문화의 개화기(동방기독교시대)에는 기독교문화예술이 번성함과 동시에 기독교 가정의례들이 새롭게 제정되는 시기가 되었다. 그러나 결혼예식이 카톨릭의 7성례 가운데 하나가 되는 등의 비정상적인 교리들이 제정되기도 하는 문제도 있었다. 중세기(AD 500-1500)에는 로마 카톨릭의 세력으로 인하여 기독교가 크게 손상을 입었으며 기독교 가정이 빛을 보지도 못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은둔 생활을 하면서 특별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카톨릭은 항상 교황과 분쟁을 일으키고 교권싸움에 몰두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려는 계획이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가정 문제를 해결하려는 어떤 프로그램도 없었으며 오직 기도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카톨릭은 기독교적인 신앙에서 크게 벗어난 생활을 했으며 오히려 기독교를 박해했을 뿐만 아니라 말살시키려 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기의 기독교 가정은 영적인 생활에 큰 수난 시대를 맞았다. 종교 개혁 시대부터 근대(AD 1500-1900)에 이르러서는 기독교의 자유를 되찾아서 활기찬 활동을 하게 되었으며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하여 대형전도 집회가 열렸고 성결 운동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개종하게 되기도 했으며 개심 자들이 많아 저서 기독교 발전에 절정기를 이루었다. 또한 선교사를 파송 하는 일을 시작하였으며 가정의 믿지 않는 많은 가족들이 구원을 얻었다. 근세에 와서는 성경공부와 개인전도 훈련 프로그램들이 교회에서 개발되었고 전도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많아졌다. 교회에서 총동원 주일을 계획하고 가족들을 초청하여 그들을 전도함으로 짝 믿음 가정의 가족들이 믿음의 가족이 되어 합심 가정이 많아졌다. 그러나 불신 가정의 가족을 구원시키려는 특별한 훈련 프로그램은 아직도 부족하다. (3)현대의 가정이해 가정 사역의 구체적인 목적은 자녀와 부모와의 연구가 처음으로 시도 된 것은 1910년대 정신분석학에 의해 체계화되기 시작했고 사이몬드(D. Symodds. 1930)에 의해 기초 이론이 형성되었고 우리 나라는 1960년대부터 가족 관계, 부모와 자녀 문제를 다루는 연구가 시작된 것으로 전해 온다. 그 동안 각계 각층의 전문가들의 연구를 분석해 보면 사회학자들은 인간의 갈등을 가정 환경과 생활 양상에서 생기는 문제점들을 중심으로 다루고 사회 복지 가들은 사회 복지 적 측면에서, 심리학에서는 가정 구성의 인격, 욕구의 부조화를, 문화인류학에서는 전통적 가정과의 마찰에서 오는 갈등을 연구해 왔으나 오늘의 가정 문제는 더욱 심각해 가고 있다. Charles M. Sell은 그의 책에서 가정문제에 경종을 울려준 사람으로 1937년 레지나 와이맨(Regina Wieman)을 꼽는다. 그는 이 책에서 "가정은 지금 길고도 위험한 위기를 겪고 있다. 그것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고, 그것이 얼마나 오래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으며, 그 결과가 어떠할 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Charles M. Sell은 이 말들을 종합하지 않아도 가족들이 문제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정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암시해준다고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교회의 모든 문제는 가정에서 문제의 확대라고 생각한다. 또 가정의 모든 문제는 교회가 마땅히 품고 치유해야 할 곧 교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가정 사역은 가정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선교의 창(Mission Home)이 되도록 예방 관리 치유의 사역이다. 그 사역의 중심은 교회의 본질과 깊은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가정이 복음으로 회복 될 때 만 가정이 가정다울 수 있고 이런 가정을 통해서 교회의 교회다움의 갱신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가정들을 둘러보면 모든 문화와 양상들은 무섭게 가정 공동체를 오염시키고 부식시켜 안정을 잃고 위기 상황 속에 고통의 정서를 느끼며 무기력해 가고 있다. 그러나 본래의 가정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신적 기관으로서 교회의 품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치유되고 회복되고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까지의 가정에 대한 이해이다. 3장. 가정사역의 근거와 C. M. Sell의 가정 사역 이론 하나님의 인간 창조는 그 이전의 만물 창조와는 다르게 창조되었다. 다른 창조물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뤄졌으나 인간은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직접 만드신 걸작품이다. 즉 신적인 속성 (지, 정, 의, 양심, 독창성, 합리성, 관계성)으로 지음 받았고 하나님을 위로 모시고 모든 피조물들을 아래로 다스리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즉 만물의 영장인 것이다. 이 명령 수행을 위한 결혼의 원리는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명령하심으로 시작됐다. "그러므로 남자가 그의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찌로다 남자와 그의 아내가 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 하더라" (창2 : 24) 여기서 결혼 관계의 3요소로서 첫째는 부모로부터 환경 적 정신적 해방을 (감정적 의존)받아 두 사람만의 가정을 만들기 위해 구조개발, 발전을 위한 새로운 환경을 만들기 위함이다. 두 번 째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있어서의 책임은 서로가 연합(Cleave)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끝까지 떨어지지 않는 물체처럼 총체적 영원 결합(Total Ceaving)이다. 세 번째 관계 요소는 '둘이 한 몸이 될 찌라'는 것으로 삶 속에 둘이 더욱 밀착되어 관심과 행동에서 계속 가까워지는 경험으로서 새로운 정체성이 개개의 존재로부터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한 몸 원리로 요약되는 결혼은 시간, 장소, 문화의 변화에 따라 변할 수 없는 영원히 함께 되는 하나님의 제정이다. 왜냐하면 결혼은 인간이 만든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시대, 모든 인간에게 규범으로 주어진 항속 적인 제도이기 때문이다. 이 결합과 조화의 목적은 전술한바와 같이 하나님과의 조화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대행 적 사명 수행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결합되어 조화를 이루기 위해 창조주와 조화를 늘 유지해야 했다. 칼빈(John Calvin)은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교통과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서 창조된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짐을 강조한다."고 했다. 이 특별한 관계란 하나님과의 교제로서 이는 하나님과의 거룩하며 신성한 연합을 뜻하는 응답, 복종, 서로의 사귐, 적정한 조화라고 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만 창조의 질서가 유지되고 인간의 인간 됨의 현주소도 망각 않고 탈선도 안하고 가정의 거룩한 목적이 이뤄지는 것이다. 즉 가정의 가정됨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장된 하나님이 그 가정의 중심이 되셔서 가정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이다. 1) 교회생활과 가정생활의 관계 C. M 셀은 그의 책 "아직도 아물지 않은 마음의 상처"에서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그 사람을 지배하는 잠재의식은 유아기 때의 기억에 위해서 결정되는데, 대개의 경우 그 유아기 때의 부정적인 상처가 사람을 무의식중에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유아기 때의 상처들이 생기게 만드는 곳이 다름 아닌 가정이라는 것이다. 가정이 정상적인 경우에는 덜 하지만 정서적인 문제를 보이는 대개의 성인의 경우는 어릴 때의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남아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사람의 일생을 시작하는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근거라 할 것이다. 거룩하고 아름답던 질서와 조화의 아담의 가정! 거기에 사탄(Satan)이 공격을 해서 범죄 타락함으로 질서와 조화가 깨어져 버렸다. 그런데 사탄은 다름 아닌 가정을 파괴함으로 어린 유아기 때에 그들의 마음속에 상처를 맡겨 놓아 일평생 부정적인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을 회복하여 가정이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하기 위한 노력이 교회의 사역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교회의 가정사역은 어떤 방향으로 나타나야 하는가? 무엇보다 성경적인 원리로 돌아와야 한다. 성경적인 원리란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따라 질서를 잡는 일이다. 성경적인 근거로 보건대, 하나님은 아담을 하와의 머리로 세우셨다. 그런데 사탄은 하나님이 정하신 아담의 해드쉽(Headship)을 무시한 채 아담을 상대 안하고 하와를 상대했다. 사탄의 가정 파괴는 아담의 해드쉽을 무시한 도전에서 봐야 한다. 가정에 죄가 들어오자마자 비극이 일어났다(창4 : 8) 사탄은 아담의 가정을 공격한 이래 가고 오는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가정을 공격해 왔다. 모든 전쟁, 살인, 파괴 등 인류역사의 모든 비극들은 죄로 말미암았고 그 죄는 가정의 죄였으며 가정의 죄는 사탄의 도전이었다. 그러므로 가정사역의 근간은 죄와의 영적 정쟁이며 결국은 그 배후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어야 한다. 이처럼 인간의 죄로 인한 가정의 타락은 가정 내에서의 살인, 증오,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 관계에도 무질서와 파괴를 가져왔다. 이와 같은 가정의 부패 현상은 종말의 징조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가족 공동체 내에서도 불신과 이기심, 시기, 질투등 불화의 요소들이 등장, 별거, 이혼, 가출, 폭력 등으로 인간 타락의 극치를 가정이라는 삶의 마당에서 수없이 경험하는 것을 그대로 지켜보아서는 안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세로 과ㅣ감히 이들과 대적하여야한다. 이것이 교회가 할 일이다. 타락한 인간들이 불꽃 문명을 이뤄놓고 손뼉을 쳤으나 그 빛은 참 빛이 아니고 탕자문명(하나님 멀리 떠난 인간의 금자탑?) 이며, 현대인은 이 탕자의 계절 속에서 쥐엄 열매를 먹는 동물적 인간화가 돼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원섭 박사는 "문명의 발전은 신(Godship) 적인 것으로부터 인간적인 (Human)것을 지나 동물적인 것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고 했다. 하나님의 권위 아래 하나님의 정하신 남성 헤드쉽(남녀동등 전제) 의 원리를 깨뜨린 사탄은 가정을 계속 파괴하고 있다. 그의 수단은 탕자 문명을 최대로 활용하고 발판 삼고 있다. 일부다처(창4:19,23), 성비행(창9:22), 간음(창16:1-3), 동성연애(창19:4-11), 강간(창34:1-2), 근친상간(창38:13-18), 유혹(창39:7-12)등 모두 사탄의 흉계화 작업의 결과인 것이다. 가정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타락된 가정 회복을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경건 된 가정의 품(마리아)을 통해서 이 땅에 오셨다. 그는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인류의 죄를 청산하셨고 죄의 형벌로부터 해방 받은 백성들의 공동체인 가정과 교회를 통해 지금도 끊임없이 가정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을 당시 유대 나라는 지위가 짓밟혀 있는 때였다. 오로지 생식과 남성을 위한 존재였다. 간음의 경우 남자가 처녀와 관계를 가지면 간음이 되지 않았다. (처녀를 범한 남자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적당한 예물을 주고 결혼하면 되었고 그가 받은 유일한 법은 그녀와 이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혼한 여자와 관계를 갖는 것은 간음죄로 여겼다. 간음한 여자는 남편의 '명예'를 훔치(?)는 것이고, 부정한 아내는 그 남편에게만 소유된 것을 남에게 제공함으로서 남편의 권한을 무시하고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서 여성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오로지 남편의 소유였고 재산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의 유대 전통의 타락성과 전혀 다른 자세로 당시의 유대 전통과 멸시받던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셨다. 수많은 여아들(병든 여인들. 죄인들)을 만나 죄를 용서하시고 저들의 불구 된 인격과 정서를 치유하셔서 새 인생을 살아가게 하셨다. 또 어린아이들을 '천국인의 모형'으로 제시하면서 당시 교만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다. 그리고 천국에서는 성차별도 없음을 말씀하셨다. Leon Smith 와 Edwad D.Steples, Oscar E.Feuht의 기독교 가정의 본질적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기독교 가정은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두 사람 이상으로 이루어져야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사랑 안에서 신앙으로 복종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사람이다. 기독교의 가정의 근본적인 징표는 주인이신 예수 안에서 신앙이다. 기독교 가정은 완성된 모임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만들어져 가기 때문이다. 어린 아기나 아직 신앙에 대해서 부정적인 식구가 있다해도 기독교 가정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부 관계 어버이 됨, 가족 관계가 충실해야 한다. 기독교 가정은 자연법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아래 충성해야 한다. 이를 가르치는 책임이 교회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으로서 결혼은 개인적인 만족이나 사회의 외부 압력이 아닌 기독교적 사랑과 신실에 기초한 거룩한 관계다. 기독교 가정은 각 개인들의 요구와 가정 전체의 요구가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기독교 가정의 특징은 자신 존중과 함께 타인 존중이다. 셋째 기독교 가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 신앙과 "기독교인"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다. 이것은 삶의 질을 의미한다. 넷째 기독교 가정은 가족들의 관계의 질에 의해 드러난다. 기독교 가정의 관계는 성령 안에서 삶을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각 사람들을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드리는 것이다. 기독교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을 위한 통로이다. 이 사랑은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며 돌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원천이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가족 공동체를 강하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활동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적 위기를 만나도 성숙한 반응을 할 수 있으므로 최선의 노력으로 좋은 결과를 얻는다. 여기에 교회의 장이 있다. 그것은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라 성령의 감화와 인도를 받는 삶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기독교 가정은 세상에서 "제자의 직분"을 수행하려는 사명감이 있다. 기독교 가정은 "하나님의 나라"로서 작은 단위이다. 제자의 직분을 수행하기 위하여 기독교 가정은 이 세상에서 작은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하나님께 책임적으로 응답하는 청지기 직 수행의 공동체다. 여섯째 기독교 가정은 일반 가정의 문화와는 달리 그 문화가 기독교 전통과 가치에 의하여 개발되고 정신을 전달해 줘야한다. 기독교 문화의 원천은 성경이고 문화를 전달하는 주요 기관은 교회와 가정이다.예배가 살아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가정이어야 한다 성령을 통해 전통적이고 평상적인 교회구조를 넘어가서 복음을 들을 수 있으며 또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 2) 가정과 교회의 상호관계에 대하여 (1) 가정과 교회의 상호관계 챨스 M 셀은 성경은 교회의 조직보다 우선한 것이 가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가정은 천지창조의 한 중요한 부분이었다(창1:27-28) 때문에 교회는 각 가정들이 모여 성립이 된다. 교회는 가정이 타락하고 파괴된 결과로 이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나온 하나의 대안이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단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은 가장 먼저 부부관계의 파괴로 그 결과로 나타났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던 그 배필을 하나님의 준엄한 진노 앞에서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한 채 책임을 전가시켜 멸망으로 내어 모는 배반으로 내어 모든 인간의 나약함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아담의 가정은 자식들의 반목과 질시, 그리고 존속 살인이라는 엄청난 파국으로 그 비극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가장 순결하고 신뢰되어야 할 가정의 관계가 인간의 죄성 앞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는 거기에서 머물지 않는다. 홍수 뒤에 노아의 실수로 말미암아 자식들이 저주받게된 사건이나 야곱의 형과 부모를 속이며 결국 밧단 아람으로 쫓겨가게 된 일 요셉의 형제들의 미움을 사서 애굽으로 팔려가게 된 일등은 인간세상의 가정 파괴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파괴되어 있는 가정을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으로 회복시키며, 나아가 지역사회와 국가까지도 회복시키려는 원대한 꿈을 가져야 하며, 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가정들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함으로 다른 가정도 회복시키는 일에 적극 동참하여야 한다. (2) 가정이 교회를 향한 기대 한 개인이 영적으로 거듭나서 신앙의 성장을 할 때 그것은 곧 교회생활을 의미한다. 60년대 한국교계에 간혹 일어났던 무 교회주의나 탈 교회주의는 개인의 철학적 인생관이나 신앙 관은 될지 몰라도 그 가정이 건전하게 신앙 성장을 시키는 데는 허약하다 하겠다. 그러므로 가정은 교회에서 공급하는 많은 영향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각 가정이 요구하는 신앙성장의 프로그램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 거듭하는 얘기지만 챨스 M 셀의 이론에 의하면 오늘의 교회는 각 가정에 유익한 프로그램은 주지 않고 모든 프로그램을 교회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각 가정은 많은 피해를 입고 있으며, 또 어떤 이는 교회 일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가정 일을 등한시하는 경우까지 생겨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파탄지경까지 이르게 되는 수가 허다한 것이다. 이러한 예는 한국교회에 얼마든지 있으며, 교회중심의 프로그램이 너무 많다보니(매일 새벽기도, 삼일기도, 철야기도, 또 주일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정을 위한 프로그램이야 기껏 구역(속회)예배밖에는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는 적어도 매주 1회 이상은 가정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시행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교회가 성도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기독교적인 가정 문화정착이 일어나도록 연구 개발해야 할 책임이 있다. 아직까지 한국사회는 불교와 유교의 혼합적인 가정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교회부흥의 전초기지로서의 가정 가정목회의 목표는 전 가족의 구원에 있다. 한 가정 안에서 서로 신앙이나 가치관의 다르면 결국 보이지 않는 불화가 깊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신앙을 가진 식구들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 왜냐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십자가를 지고 짐을 대신 져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0% 복음화의 목표를 가지고 도전하고 기도해야 할 책임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있는 것이다. 때문에 전 가정이 다 같이 믿고 한 교회에 등록하게 되면 가정의 평화와 교회봉사에 도움이 되고 아울러 교회도 따라서 부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자는 가정목회가 곧 교회부흥의 지름길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가정목회란 결코 가정교회(House Church)가 아니다. 가정을 올바른 믿음으로 육성하고, 전 가정이 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돕는 사역이며 따라서 교회의 지체가 된 그 가정을 통하여 또 다른 가정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그러한 순화가정이 일어나도록 유도하는 사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가정목회는 교회부흥의 절대적인 요소 이다고 할 수 있다. 성도들의 가정이 정상화 될 때 교회도 정상화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정을 도전하고 가정을 교회를 견고케 하는 상호작용의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3) 교회교육 프로그램에 있어서의 가정사역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고 세상에서의 과제와 역할을 부여 받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안에서 예수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이 지음을 받았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요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인 것이다. 아울러 시민으로서의 과제와 역할도 부여받았다.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교회 이미지의 이해는 새로운 인간이 자신의 회복된 커뮤니케이션을 표현하도록 부르심을 입게되는 구체적인 장에 대해 더 분명한 상을 제시해 준다. 신약의 교회 이미지는 네 가지인데 하나님의 백성, 새로운 피조물, 믿음 안의 교제(관계),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백성(고전1:2)으로서의 교회 이미지는 그 중의 강조 점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를 만들고 존재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교회는 자의에 의해서 모인 백성들의
거세 환상/ 2017-01-02
거세 환상 삼각 로맨스 : 아빠와 엄마와 나 유아기(2-6,7년)에 삼각관계에 빠진다. 엄마와 나와 아빠가 그렇다. 정신분석에서는 남근기에 해당된다. 이때 아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진입한다. 리비도가 성기에 집중되는 시기다. 오이디푸스는 엄마사랑, 아빠미움을 가리킨다. 근친욕과 살부욕이다. 정욕의 실체가 이것이다. 오이디푸스 해소는 거세에 의해서 일어난다. 남아는 거세 공포로 인해 근친욕을 포기한다. 그리고 아빠에게 복종하고 아빠의 말(법과 질서)을 수용한다. 이렇게 아이는 남자가 된다. 거세 환상은 실제로는 거세된 것이 아니지만 거세되었다고 무의식적으로 믿는 것을 말한다. 거세된 자는 낮은 자존감을 갖는다. 열등감과 패배감을 갖는다. 경쟁을 싫어하고 욕망이나 지배 욕구가 약하다. 거세 환상은 여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아에게도 있다. 실제로는 아닌데, 자신이 거세되었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면 그 아이에게는 거세 환상이 있는 것이다. 여아는 자신의 거세를 인정하지 않는다. 클리스토리스가 자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그 믿음은 깨진다. 분노와 원망이 일어난다. 이때 타깃은 엄마다. 엄마 탓을 한다. 엄마가 자기를 불량품으로 낳았다. 엄마가 나를 잘못 키웠다고 탓한다. 아빠를 우러러 페니스를 소망해도 그 소원은 이뤄질 수 없다. 자포자기로 아빠에게서 물러나 엄마에게로 간다. 아이는 클리스토리스를 싫어한다. 자위를 그만둔다. 경쟁이나 싸움도 그만둔다. 남아의 그것과 비교가 안 된다. 기분 나쁜 감정을 느끼기 싫어서 그것을 외면한다. 거세 환상에 빠진 자는 경쟁을 회피한다. 싸우지 않는다. 양보하고 물러난다. 지배욕이나 소유욕도 약하다. 하지만 이 환상은 여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아에게도 있다. 여아도 실제로는 거세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거세되었다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남아도 거세된 것은 아니지만 거세되었다고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남자임에도 여자처럼 행동할 수 있다. 여기서 여자처럼은 싸움과 경쟁을 싫어하는 것을 말한다. 트랜스 젠더나 게이를 말하는 게 아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정상적임에도 경쟁을 싫어하고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거세 환상에 빠진 자다. 오이디푸스 아이는 엄마를 욕망하고 아빠를 미워한다. 아빠가 경쟁자다. 그런데 이 경쟁 또는 싸움은 승부가 결정되어 있다. 아이의 패배는 필연적이다. 아빠와 어찌 경쟁이 된단 말인가? 그런데 변수는 있다. 엄마다. 엄마가 아이 편을 들면 이 싸움에서 승리자는 아이가 된다. 하지만 엄마는 이때 아이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동을 한다. 내가 아니라 아빠에게 꼬리를 치는 것이다. 아빠와 사이가 좋은 것이다. 아빠와 달콤한 사랑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이의 억장을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아이는 엄마의 대한 신뢰를 접는다. 아이는 엄마에 대한 구세주 환상을 품어었다. 폭군 아빠의 압제로부터 구원할 대상으로 보았다. 나는 영웅이다. 엄마를 괴롭히는 악당과 싸워 이기는 존재다. 나는 엄마의 구원자다. 그런데 이런 나의 마음을 몰라주고 아빠에게로 간다. 충격을 받는다. 좌절하고 분노한다. 그리고 혐오감을 갖는다. 엄마는 구원 받아야 할 연약한 인간이 아니다. 처벌을 받아야 할 지조(志操) 없는 창녀다. 남성의 여성 혐오의 원인은 두 가지다. 첫째는 지조(志操) 없는 엄마, 둘째는 고추 없는 엄마다. 남아의 구세주 환상 남아의 구세주 환상은 고상한 환상이다. 아빠의 폭력에 의해 거세된 엄마를 구원하고자 하는 소망이기 때문이다. 약자를 보호하고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훼손된 자아를 복원시켜주고 싶은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거다. 그런데 이런 나의 마음을 몰라주고 아빠에게 실실 거리며 꼬리를 쳐 !!! 너는 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 천한 것 !!! 대상으로부터 사랑을 거두는 마음의 습관의 뿌리가 이거다. 남아는 엄마로부터 고상한 마음을 거둔다. 엄마에게는 차가운 마음만 남는다. 혐오와 경멸과 분노를 갖는다. 남근기에 남아는 두 가지 얼굴을 가진다. 첫째는 오이디푸스이고, 둘째는 구세주이다. 거세 이전에 남아는 오이디푸스다. 거세 이후에는 구세주다. 아빠는 폭군이다. 아빠에 의해서 나는 거세 위협을 받고 엄마는 거세되었다. 엄마는 피해자다.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엄마에 대한 긍휼과 연민의 감정 그리고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을 갖는다. 엄마를 구원해주고 싶다. 그런데 이런 나의 마음을 몰라주다니....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고마움을 모른다. 윗사람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는 사람을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도와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의 이런 도움을 몰라주고 윗사람에게 아부를 떨며 잘 보이려 애를 쓴다. 나와 같은 처지로 보이는 아웃사이더, 사회에서 버림받고 배제된 약자에게 상부상조(相扶相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도움을 주지만 그 약자는 강자, 가진자로부터 혜택을 받고자 그의 편을 들고 머리를 조아린다. 여기서 혐오가 일어나는 것이다. 남아는 폭군에게 동조할 수 없다. 엄마는 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 아이는 외롭다. 고독하다. 쓸쓸하다. 찹찹하다.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자가 단 한 사람도 없구나. 나는 항상 혼자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사랑할만한 대상도 없다. 세상에 대한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다. 사회에 나가 치열하게 경쟁하며 마땅히 누려야할 것들에 대해서 욕망을 가져야 하나 아무런 의미도 느낄 수 없다. 엄마는 구원의 대상이자, 향유의 대상이다. 엄마가 구원의 대상에서 배제되었을 때 아이는 엄마의 대한 향유권도 포기한 것이다. 아빠는 사회 구성원에 상응하고, 엄마는 세상, 회사, 성공, 권력, 명예, 돈에 상응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어른이 되어서도 재연되고 반복된다. 사회에 나가면 삼각관계에 놓인다. 아빠 같은 사람이 있고 엄마 같은 사람이 있다. 싸워야 할 대상과 연합해야 할 대상이 있다. 문제는 오이디푸스 때와 똑같다는 데 있다. 즉 경쟁자는 강하다. 협력자는 지조가 없다. 겉으로 어떤 핑계를 대어도 그의 물러남과 포기는 어렸을 때의 경험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거세된 사람이다. 이 세상과 아무 상관 없다. 경쟁할 수 있는 여력도 없다. 경쟁자에 비해서 나는 한없이 부족하다. 욕심도 없다. 특별히 하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게 없다.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을 몰아내고 어찌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생존본능은 생명의 기본 본능인데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살겠다고 하는데 내가 양보하지, 어떻게 그 사람과 똑같이 내가 행동할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은 엄마 탓이다 하나님의 대한 신앙은 절망적이다. 엄마의 대한 상이 세상에서 하나님으로 옮겨간다. 엄마가 나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 나의 기대를 저버리고 아빠 편을 들었던 것처럼 세상도 나에게 가혹하고, 하나님도 나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들고 괴롭게 아무것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 탓이다. 하나님도 내 편이 아니다. 하나님은 만인을 돌봐야 되니깐, 특정한 사람만 편애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 하나님은 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순수하지 않아서,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없으니, 그렇게 자위하면서 아무것도 없는 삶을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좋은 일이 생기고, 우울해지고, 이상한 일들이 반복되면, 또 남들과 비교해서 나의 삶을 뒤돌아보게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모든 게 하나님 탓이다. 어쨌든 섭리하는 것은 하나님이지 않은가? 이렇게 예정하고, 이런 시나리오를 짜고, 남들에게 희생만 하는 캐릭터로 정하신 분이 하나님 아닌가? 왜 나만 희생되어야 하는가? 한 사람이 전체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이 룰은 깨져야 한다. 그것을 통해서 위대한 성취를 이뤄내도 말이다. 어떻게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을 수 있는가? 내가 한 게 얼만데, 이렇게까지 나를 몰라줄 수 있는가? 이 세상과 아무 상관이 없음에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뭔가? 도대체 왜 나에게만 이렇게 하나님은 섭리하시는가?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증오한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대한 마음들이 어렸을 때의 엄마의 대한 감정의 재현이고 복사라는 것이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돌아보면 왜 항상 나는 삼각관계에 놓이는 것이지, 한 사람은 좋고, 또 한 사람은 나쁘고, 나쁜 사람은 왜 항상 나에게 화를 내지, 그리고 좋은 사람은 왜 나에게서 등을 돌리지 ....왜 나는 경쟁하지 않고 양보하고 물러나기만 하는 것일까? 삼각 로맨스의 해피엔딩 답은 간단하다. 엄마는 무조건 아이 편을 들어야 한다. 엄마는 아들의 말을 들어야 하고 그를 지지해야 한다. 아빠도 아이를 사랑해야 한다. 용서하고 허락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아빠를 인정하는 것이다. 아빠의 존재, 아빠의 지위를 말이다. 그리고 아빠는 거세 위협이 아닌 신상필벌(信賞必罰), 상선벌악(賞善罰惡)으로 아이를 교육해야 한다. 이때 엄마의 지혜가 필요하다. 아이 편을 들면서 아이에게 아빠의 말을 잘 들어야 나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뉘앙스를 주어야 한다. 남아는 아빠의 말 즉 법과 질서에 복종하고 순응하는 것을 통해서 아빠를 닮게 되고, 사회적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이렇게 해소되고 극복된다. 거세 환상도 사라진다. 보통의 대다수의 남자애들처럼 학교에서 경쟁하고 뛰놀고 싸우고 그렇게 살게 된다. 세상으로 나간다.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는다. 그러한 일반적인 길을 가게 된다. 그러나 거세 환상이 있는 이상, 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해소되지 않는 이상 그와 같은 자연스러운 삶은 그에게는 부자연스러울 수가 있고, 그와 같은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버뮤다 삼각 지대에 빠진 우리들 아빠는 경쟁자이고, 경쟁자는 아빠다. 엄마는 배신자이고, 배신자는 엄마다. 엄마는 세상이고, 세상이 엄마다.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는 사람은 그것이 종교적 이유라 할지라도 그 원인은 해소되지 않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있다. 엄마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엄마다. 엄마 탓은 곧 하나님 탓이고 하나님 탓은 엄마 탓이다. 하나님의 대한 원망과 분노, 적의와 혐오의 근원은 무의식적인 욕동에 있다. 특히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무심하고 매정한 하나님의 대한 인식은 오이디푸스 때의 나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엄마의 이미지가 투영된 것이다. 윗사람은 아빠다. 아랫사람이나 옆사람은 엄마다. 초자아는 아빠다. 이드는 엄마다.(초자아, 에고, 이드) 상위자아는 아빠다. 하위자아는 엄마다. 아우마쿠아는 아빠다. 우니히피리는 엄마다.(아우마쿠아, 우하네, 우니히피리) 초의식은 아빠다. 잠재의식은 엄마다.(초의식, 의식, 잠재의식) 엄마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엄마의 마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아빠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어렸을 때 그 경험을 하였더라면 주위 사람들에게 잘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그랬을 것이다. 노력을 하지 않는 이유는 어렸을 때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아빠와 엄마로부터의 물러남은 곧 세상으로부터의 물러남을 뜻한다.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노력하지 않는다.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간을 들여 노력하려 하지 않는다. 경쟁하기 위해서 필요할 경우 더욱 그렇게 된다. 나에게 근육이 필요한데, 나에게 운전 면허증이 필요한데, 그것이 잘 안된다. 면허증을 어렵게 딴다. 이상하게 방해와 꼬임이 있다. 운동은 작심삼일(作心三日)이다. 하고 싶고 시간이 많아도 안 된다. 이러한 삶의 모든 것들이 버뮤다 삼각지대와 같은 삼각 로맨스의 비극적 결과다. 여아의 거세 환상 여아들도 거세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아빠를 우러른다. 아빠에게 잘 보이려 노력한다. 아빠와는 경쟁을 회피한다. 그러나 엄마와는 경쟁한다. 엄마는 향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아는 남아와 달리 세 얼굴을 가진다. 첫째 오이디푸스다.(처음에 여아는 주체적 인간으로 생각한다) 엄마는 향유의 대상이다. 둘째 구세주다. 동병상련(同病相憐)으로서 엄마는 구원 대상이다. 셋째 엘렉트라다. 엄마는 여우로서 경쟁 상대다. 오이디푸스 욕동은 거세로 인해서 사라진다. 그 이후 엄마와 유대감을 형성한다. 마지막에 엘렉트라가 되면서 엄마는 경쟁자가 된다. 거세 콤플렉스로 인해서 엄마의 대한 향유 욕망은 여아에게서는 소멸한다. 그에게 남은 것은 구세주와 엘렉트라다. 전자로는 잘 뭉치고, 후자로는 시기, 질투하며 돌아선다. 거세 환상이 여아에게서 향유 대상으로서 엄마를 배제시킨 것이다. 기타 엄마 탓은 남아와 여아에게 공통적이다. 낳았다는 점과 양육하는 점에서 그렇다. 남아는 그것과 아울러 지조(志操) 없는 엄마 이미지가 더해진다. 여아도 마찬가지다. 전자의 이유와 후자의 이유가 있다. 경쟁자 여우로 인해서 아빠로부터 물러나게 되면 그렇다. 사회에서의 경쟁이나 연애나 결혼에서도 소극적이 되거나 양보자, 배려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남아도 똑같다. 그래서 패배자. 아웃사이더,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누리는 것 없는 자가 되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남을 원망하고 그렇게 산다. 엄마도 자기 탓을 한다. 아이도 엄마 탓을 하는데, 엄마도 자기 탓을 한다. 내가 잘못 낳아서, 또는 잘못 길러서 네가 이렇게 사는구나, 불행하게,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채로 쓸쓸하게 그렇게 사는구나 다 내 탓이다라고 그렇게 자책을 한다. 그런데 남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짓과 같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인 구조는 운명이다. 남아도, 여아도 무의식의 심리 기제는 육체에 근거한다. 인간의 정체감은 육체가 결정한다. 나는 남성이고 여성이다라는 인식과 느낌도 육체에 근거한다.(트랜스 젠더는 다름) 자존감도 육체의 완벽성 유무에 근거한다. 남자는 기본적으로 자존감이 정상적이다. 여자는 기본적으로 자존감이 낮다. 육체에 문제가 있거나 장애가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에고의 집은 육체다. 그래서 에고의식은 이원적이다. 요약) 삼각 로맨스 :아빠와 엄마와 아이의 삼각 관계를 일컫는다. 이것은 사회에서 재현되고 반복된다. 예를 들면 윗사람은 아빠, 아랫사람이나 옆사람은 엄마다.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 사이의 나, 남성의 여성 혐오의 원인 : 첫째 지조(志操) 없는 엄마, 둘째 고추 없는 엄마 남아의 두 얼굴 : 첫째 오이디푸스, 둘째 구세주 여아의 세 얼굴 : 첫째 오이디푸스, 둘째 구세주, 셋째 엘렉트라 거세 환상 : 무의식상에서 거세되었다고 상상하고 믿는 것을 말한다. 거세 환상에 빠진 사람은 경쟁을 회피하고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세상과 상관 없는 삶을 살려고 한다. 구세주 환상 : 남아의 엄마에 대한, 여아의 엄마에 대한 구원 환상을 말한다. 이때 아빠는 거세의 검을 휘두르는 폭군이다. 하나님 탓이나 남 탓은 유아기 시절의 엄마 탓에 근거한다. 현요한 목사
건강한 교회를 향한 실제적 제안 7가지/눅5:31
건강한 교회를 향한 실제적 제안 7가지 이장석 부장(교회성장연구소 전략개발부) 눅5:31 첫째, 하나님과 동행하라 기도, 금식, 묵상을 통해서 비전을 품어야 한다. 비전은 고독의 안식처에서 시작된다. 매달 하루정도는 금식기도와 깊은 묵상을 위해 따로 떼어두는 것이 좋다. 하나님과 홀로 대면할 때, 비전을 재발견할 수 있다. 둘째, 영적인 은사를 연구하라 의외로 생각보다 많은 교회가 영적 은사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고 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무분별한 은사 남용의 폐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영적 은사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가 있어야 한다. 풀러 신학교의 교수인 로버트 클린튼(Robert Clinton)은 \"은사배합(mix)은 영적 은사와 천부적인 재능을 융합한 것이며, 경험의 총합이다\"라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은사영역 안에서 비전을 주신다. 셋째, 은사의 우선 순위를 정하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타고난 재능이 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 은사들 속에 한 가지 지배적인 은사가 있다. 여기에다 우리는 대부분의 힘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비전과 영적 은사는 서로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넷째, 비전을 기록하라 하나님께서는 비전을 포기하고 절망에 빠진 하박국 선지자에게 \"이것을 기록하라. 명백히 하라.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생각을 글로 표현할 때 그 생각이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존 하가이는 \"비전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비전을 현실로 변환시킬 행동목표와 프로그램의 순위가 정해지고 신실하게 실천되지 않는 한, 한낱 무용지물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비전은 행동을 위한 목표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다섯째, 기대하라 하나님께서는 하박국 선지자에게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 2:3) 고 말씀하셨다. 신뢰에다 기대를 더한 것은 신앙과 같다. 오랄 로버츠(Oral Robert)는 수년 전에 우리에게 \"기적을 기대하라(Expect a miracle)!\"는 도전을 던져 주었다. 매일 우리는 하나님께서 놀랄만한 일과 비전을 이루실 것을 기대하여야 한다. 여섯째, 꿈꾸는 자가 되라 워렌 베니스(Warren Bennis)는 꿈꾸는 것이 \'실용적인 공상가\'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꿈과 비전은 성공의 견인차요, 행복의 청사진이다. 현재는 노력하는 사람의 것이지만 미래는 꿈을 가진 사람의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미래의 생각, 즉 꿈과 비전을 쓰신다. 역사상 성공한 사람의 최대 공통점은 꿈의 사람, 비전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일곱째, 비전을 포기하지 마라 사도 바울은 이교도의 왕 앞에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겠다\"고 선언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은 사람들의 눈을 멀게 만든다. 비전은 사도 바울의 우선 순위와 충성심을 바꾸어 놓았다. 우리의 지침으로서 하늘의 비전을 가질 때, 우리는 아도니람 쥬드슨(Adoniram Judson)이 \"전망이 하나님의 약속만큼 밝다\"고 한 것처럼 확언할 수 있다. 비전을 가진 사람은 오늘에서 미래를 볼뿐 아니라 미래의 시점에서 오늘을 보는 능력을 가진다. 내일의 비전이 오늘을 움직이는 동기가 되며 오늘의 결단과 행동이 과거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교회 지도자들은 미래에 대한 명확한 비전이 있어야 한다. 그들은 진정한 영적인 삶의 질을 향상시킬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교회가 건강하고 성장하려면 비전은 필수적이다. 교회의 건강상태는 하나님의 비전에 달려 있다. 교회지도자는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비전을 구하고, 식별해 내며, 소유하고, 수행해야 한다. 일단 교회가 비전으로 이끌려 간다면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쳐 거룩한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공단 교회와 생활권 개혁/ 행17:1-9
공단 교회와 생활권 개혁/ 행17:1-9 1. 공단 일꾼의 문제점 1) 미래 2) 가정, 환경 3) 건강 4) 이성과 사회문제 2. 공단 복음화의 필요성과 중요성 1) 산업현장 2) 국가의 장래와의 관계 3) 세계 복음화(외국인 취업)와 관계 3. 공단 복음화의 열쇠 1) 기도 응답의 실제적 운동 2) 말씀운동과 인생 해답 3) 영적 문제 해결 4) 공단교회 4. 공단 교회의 역활 1) 생활권 개혁 2) 전문 지식의 필요 3) 학업과 사회 보장 교육의 필요 4) 건전한 사회인 육성의 시급
교육목회에로의 길
교육목회에로의 길 이 글은 저자가 목회현장에서 경험한 교육경험을 반성평가하여 정리한 것이 다. 그는 5년반동안 Waverly, Iowa에서 교구목회를 한 후 스콧틀랜드의 성 앤드 류 대학에서 2년반 동안 실천신학을 연구했다. 공부하는 중 하절기에는 루터교회 의 임시직 목사로서 목회하기도 했다. 이 때 그는 그의 지난 목회를 회상하며 교 육목회에 있어서 목사의 역할등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나는 애초 우리와 같이 목회에 있어서 목회자의 모든 행동이 다 교육적인 것 이라고 생각했다. 케리그마(Kerygma)와 디다케(Didache)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 다고 생각했다. 세례, 결혼식, 그리고 장례식등과 같은 교역활동에 있어서 사제 적인 기능들 모두 광범위한 의미에서 교육일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유아세례를 위한 부모교육, 견신례를 위한 고등학생들의 학습모임, 죽음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를 찾도록 토론그룹등을 형성하여 운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목회 활동들에 포함되는 교수활동(teaching) 은 사람들로 하여금 창의적으로 사고하도록 고무시 키는(enabling)하는 것이며 이런 것을 교육목회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지배하고 있던 바 교육목회에 있어서 목사의 역 할을 아래와 같이 두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목사는 그의 전체 목회에 있어서 열정을 보일 필요가 있다는 것과 둘째, 목사는 모든 교수활동에 있어서 학습의 분위기를 재미있게 해야한고 믿 는 것이다. 열정은 목사가 그의 과제들을 수행함에 있어 말보다도 훨씬 더 효과 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목사의 열정은 그의 교수활동에 있어서 교인들의 열정을 끌어내게 한다고 믿는다. 열정은 사람들을 소심증에서 해방시켜 다양한 경험의 세계로 나오게 하고 활발한 리더쉽을 가지게 한다. 실제로 교사훈련을 받던 한 주일학교 교사가 내게 말하기를 "나도 당신처럼 열정적이 되기를 원한다."고 한 적이 있었다. 열정은 학습자로 하여금 재미를 가지고 배움에 임하게 하는 요소라 고 믿는다. 내가 나의 전목회를 통해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교사가 할 일이란 모 든 학습상황에 있어 좋은 감정(good feelings), 친근감(friendness) 그리고 재미 (joy)를 최대한으로 조성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사고는 점차 다음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변화되어왔다. 1.강의하는 것에서 듣는 것으로(From Lecturing to Listening) 나는 신학교 신입생 시절에 학교에서 배운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흥분을 느꼈고 내가 배운 것을 누군가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혔 다. 그래서 교회엣 27명의 세례받는 교인들을 가르치는 일에 참여했다. 나는 나 의 강의 방법으로 교인들을 5,60분 동안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으로 인하여 대단 한 기쁨과 긍지를 느꼈다. 나는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강의를 하는 동안 많은 유모어를 사용하기도 하는 등 교회에서의 나의 교육활동에 최선을 다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 나는 내가 사람들의 관심을 자극하지 못하는 문제와 이슈 그리고 주제들에 대해서 자주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서서히 나 는 교육목회에 있어서 목사의 주된 기능은 듣는 것이며 사람들이 서로의 말을 듣 도록 고무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나는 사람들의 상처 와 그들의 실제적인 문제가 무엇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내가 이끄는 그룹과 나의 가르침 사이의 간격이 점점 밀착하개 되었다. 그러자 한 사 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그 설교와 그 토론은 바로 나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었습 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점차로 강의하는 것으로 부터 듣는 것에로 전향하게 되었고 목사 로서의 나의 역할은 학습분위기를 인간화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독교 교육은 인간중심(person-centered) 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학습자의 정신 뿐만 아니라 전인이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경험들과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때부터 나는 교육목회에 있어서 수용과 개방의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노력 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서로 조우하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 중심 이 아니라 서로 대화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루우엘 하우(Reuel Howe) 의 "대화의 기적(The Miracle of Dialoge)"이라는 책을 다시 읽었다. 그것은 내 가 목회에 있어 대화적인 자세를 가지도록 도와주었다. 마침내 나는 분위기를 조 성하고 학생들이 자신들의 감정과 어떤 주제들에게 대한 그들의 개념(Ideas)을 스스로 평가해보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터득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학생들이 그들 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찾도록 도우려 하는 것이다. 나의 학생들은 그들의 진지하고 생동감있는 그들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주간 또는 여러 달동안 교실에서 또는 그들의 집에서 그리고 때로는 주말의 툇회등을 통해서 서로 배우려고 애썼다. 그 결과 서로 신뢰하게 되었고 그들은 점점 더 쉽게 그들의 감정 깊은 곳에서 부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율학습방법(listening method)은 강의식의 접근법보다는 다소 느슨 한 감이 없지 않지만 그들 스스로 문제들과 씨름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삶 전체가 학습의 장이 되게 할 수 있다. Paul Tillich는 말한 바와 같이 "오직 복음이 대 답할 수 있는 질문들을 물음으로써 그들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2.일방적 강의에서 인격화하는 것으로의 변화(From Propound to Personalizing) 이전에 목사로서의 나의 할 일은 내가 신학교에서 배운 많은 것들을 교인들에 게 주입시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자율학습법으로 전향해가면서 나는 예수의 복음을 인격화해야 하는 것이 나의 임무임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강단과 강의안 을 치워버리고 내 학생들과 원탁에 둘러 앉아서 또는 그들의 거실에서 또는 야외 의 모닥불 둘레에서 또는 상가댁에서 팝콘을 먹고 콜라를 마시면서 인격대 인격 으로써 상호작용하는 대화와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특별한 교육상황에 있어서 목사의 역할이란 말과 제스 쳐로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배우고 우리의 매일의 삶에다가 우리 신앙의 진리들을 적용하기 위해서 자신과 싸우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 다. 3.소극적인 참석에서 참여에로(From Attending to Participating) 목회 초기에 나는 예배와 각종 집회에 참석하는 교인수에 집착해있었다. 그러 나 자율학습법을 택한 후에 나는 점점 더 교인들이 교육에 있어서 얼마나 적극적 으로 참여하고 있느냐는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애초에 나는 교인들이 그들의 지도자인 나와만 상호작용을 하기를 원했다. 그 들이 서로 배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Paul Tillich는 말하기를 "적극적인 참여가 없는 곳에서는 아무런 의사소통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 나는 그룹을 소그룹으로 나누어 그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도록 도우고 있 다. 그룹을 소그룹화하면 사람들은 더 적극성을 가지고 서로에 대해서 알려고 하 게 된다. 여기서 목회자가 할 일은 그들이 그들 가운데서 리더를 발견하도록 돕 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 깊은 의미연관을 가지게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그들이 창조적으로 그리고 희생적으로 참여하면서 그들의 삶의 경험을 기독교적 인 용어로써 해석하도록 촉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나는 가르치고 인도할 뿐 아니라 예배 속에 평신도들을 참여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 래서 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성공회에서 예배시간에 평신도들이 참여시키는 것에 대해서 연구해보았다. 나 역시 그들을 성경봉독과 설교하는 일과 예배를 인 도하는 일 등에 참여시켰다. 4.기억하게 하는 것에서 사고하게 하는 것으로 (From Remembering to Thinking) 나는 교육목회에 있어서 목사가 할 일이란 교인들로 하여금 많은 사실들과 행동의 규범들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사고하도록 가르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할 수 있는 교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나는 교인들의 마음이란 채워져야할 창고가 아니라 사용되어져야 할 도구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또한 나는 교인들의 사고를 촉발시켜줄 기회들을 제공 하는 것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성인 그룹들과 함께 기독교 윤 리의 이론을 연구할 뿐아니라 낙태,사면,그리고 혼혈결혼등의 문제를 가지고 서 너시간씩 씨름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이와같은 방법은 기억학습법 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지만 이런 작 업을 통해서 얻어낸 그들의 견해는 그들의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더욱 더 의미 깊은 것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5.소극적인 수용의 자세에서 적극적인 행동으로 (From Absorbing to Acting) 목사는 교인들을 생각하게 할 뿐만아니라 사람들을 행동하도록 지도해야 한 다. 이것은 내 개인적으로는 가장 어려운 과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교육목회 분야에서 해야 할 많은 일들은 교인들이 사건과 경험들을 기억하게 하고 사고하 게 하고 그들이 수용할 수 있는 경험들과 감정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 의 어떤 평신도는 가끔 예배가 끝난 후 내게 와서 "반복해서 듣는 설교지만 좋은 설교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그 설교의 말씀처럼 행하려고 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 그는 토론 후에나 사고를 촉발하는 영화를 본 후에 내게 와서는 "나는 우리가 그 영화에서 보고 그것에 대해 토의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지만 그것은 너무 완벽하게 그 상황에 맞도록 셋트 화되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그것으로 그의 태도나 행동에 변화를 일으키 지는 않을 것이다."고 말하곤 했다. 그 평신도가 회의주의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나에게 실제적인 문제에 관한 도 전을 받게 했다. 나는 어떻게 하면 교인들은 청중의 자리에서 이끌어 내어 변화 된 태도와 행동으로 실천의 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을까? 교인들의 행동의 변화는 재촉할 수 없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문제 해결 그룹들을 형성하고 그들에게 현실적으로 가장 당면한 주제들을 주고 씨름하 게 하는 동안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6.행동을 주도하는 것에서 행동의 촉발자로 (From Doing to Enabling) 목사는 자기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로 하여금 교역에 구체적으로 참 여하게끔 촉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목사가 팔을 걷어 부치고 설치면 그의 교인 들의 비젼을 제한하는 것이 된다. 목사는 교인들로 하여금 목사의 교역에 참여하 도록 고무시킬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시내로 외출을 나가는 동안 봉사의 일을 평신도에게 맡기곤 하는데 그 때 그는 그 일을 썩 잘 수행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 예배를 드리 게 되는 경우에도 그 평신도는 성경봉독등의 일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을 보았 다. 나는 이와같이 나의 자리를 성도들에게 내어주었다. 내가 인도하던 성경공부 그룹에서도 평신도들은 내가 없는 동안 나의 직무를 맡아 썩 잘 수행하는 것을 보았다. 주일학교를 이와같이 활성화하기 위해서 나는 Open Space Program을 실시해보 았다. 이것은 칸막이가 없는 넓은 공간에서 여러조의 문제해결 그룹을 테이블별 로 나누어 앉히고 각조별로 자유롭게 문제 해결을 위한 토의를 자유롭게 진행한 후에 각조의 대표가 나와서 자신들의 토의 결과를 이야기 형식으로 또는 드라마 로 또는 신문기사처럼 또는 시로써 발표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전체적인 분위기 를 열정적으로 고조시킴으로 즐거움을 조성할 수 있고 적극적인 참여와 리더쉽을 촉발시킬 있다. 또 지도자는 전체 학습의 장과 다양한 타입의 프로그램 진행방법 을 관찰할 수도 있다. 결 론 1)목사는 위와 같은 교육목회를 할 때 목사의 가르침의 내용들은 교인들의 삶 과 밀접하게 연관될 수 있고 목사는 교인들에게 더 깊은 신뢰를 받을 수 있게 된 다. 목사가 위와 같은 변화를 수용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재능과 창의성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목사의 역할은 평신도 지도자와 학생들의 재능과 잠재적인 지도력이 계발되는 방향으로 그들의 에너지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2)목사는 행동의 주체자가 아니라 촉발자가 되어야 하고 리더쉽을 기꺼이 나 누어야 한다. 3)목사는 그의 교역에 대한 평신도의 평가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어야 한다. 4)목사는 교육목회의 결과로 그가 배운 점에 대해서는 교인들에게 솔직하게 감사를 표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목사 역시 "기도의 필요를 느끼는" 죄인으 로서 교인들과 함께 순례하는 삶을 사는 자임을 시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5)목사는 실제적인 삶의 문제들과 선포사이에서 창조적인 긴장을 유지해야 한 다. "당면한 문제"들에 치중하다가 보면 교인들을 주이신 예수의 가르치심 앞에 직면하게 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6)목사는 교육목회에 있어서 그들의 역할이 항상 변화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 고 변화에 개방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성령이 그의 전 목회과정 속에 항상 동행 하심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교육목회에서 그의 안내자로 현존하시며 목사는 여전히 목회의 완성에 이르지 못했다(I know I haven't)는 것을 깨닫는 믿음이다. 7)이글에 자주 사용되는 바 teaching ministry와 educational ministry 의 정의를 명확히 하는 것이 요구됨.
교회 개척론
교회 개척론 오정현 목사 I. 교회 개척은 하나님의 뜻이다. 교회 개척은 하나님의 뜻이다. 세계 복음화의 가장 확실한 전략은 모든 족속을 위한 교회를 개척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모으는 것이다. 현재 35만여개의 교회를 가진 미국이 복음화 되기 위해서는 100만개의 새로운 교회가 개척되어야 한다고 교회 성장학의 아버지인 맥가브란 박사는 말했다. 한국도 남북한이 통일되었다고 가정할 때 민족 복음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현재 4만여교회 외에 10만 개의 교회가 새로 설립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교회 개척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경제 성장, 레저혁명, 치솟는 부동산 가격, 교계의 무차별 경쟁 등 교회의 내외적인 상황 변화에 적응하기가 점점 어렵기 때문이다. 남가주 사랑의 교회는 한국의 ‘사랑의교회’ 를 모델로 하여 1980년대 까지 한국에서 유행한 제자훈련을 이민사회라는 독특한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접목시킨 담임 오정현 목사는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려는 목회자들과 작은 교회 신드롬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동역자들에게 신선한 도전을 주고 있다. 교회 개척의 필수요소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교회 개척을 위한 44가지 요소” 라는 책의 저자 라일 샬러(Lyle Schaller) 박사에 의하면 가장 중요한 3대 요소가 개척자, 리더십, 비전이라고 했다. 리더십과 비전도 결국 개척자에게 달려있는 만큼 가장 중요한 요인은 역시 개척자이다. 그렇다면 성공적인 개척목회자의 자화상을 이루는 절대요소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네가지를 정리해보겠다. II. 교회 개척론 세상의 사업도 마찬가지이지만 교회 개척에 성공하려면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특히 개척자 자신이 총체적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사역적으로 많이 준비되면 될수록 유익하다. 첫째, 신앙적으로 구원의 체험과 영적 배경이 확실해야 한다. 깡패가 갑자기 은혜 받아 목사가 되고, 세상적으로 죄와 쾌락으로 치닫다가 극적인 변화의 체험 때문에 목회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건강한 성장과정과 온전한 영적 배경이 없는 목회자가 성공할 확률은 점점 희박해질 것이다. 나는 4대째 예수를 믿는 신앙의 가정의 산물이다. 할아버지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부친은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고생하며 목회해 온 개척 목회자이다. 나는 부친의 목회 과정에서 개척의 고달픔을 간접 체험했고, 고생을 낙으로 아는 부친의 신앙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미 16세에 첫 설교를 했고 20세에 중,고등부, 23세부터는 대학생들을 말씀으로 가르치는 일을 전담했다. 둘째, 신학적 훈련이 필요하다. 나는 한국과 미국에서 네 곳의 신학교를 거치면서 다양한 신학적 교육을 받았다. 개혁적 복음 주의가 나의 신학의 기조이지만 미국의 실용주의적 신학노선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통주의적 신학의 컬러도 나의 열린 목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디서 무슨 신학을 했느냐 보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신학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단지 신학을 위한 신학은 무의미하다. 교회를 섬기는 신학, 사람을 살리는 신학적 방법론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셋째, 사역적 훈련으로 준비되어야한다. 어떤 사역으로 준비되었느냐가 남은 생애의 사역 전체를 결정하기 마련이다. 나는 전도사 시절 대학생 제자훈련으로 유명한 내수동 교회에서 사역을 감당해서 괄목할 만한 열매를 거두었고, 사랑의교회에서 협동목사로 있으면서 제자훈련의 전과정에 익숙할 수 있었다. 남가주 사랑의교회가 제자훈련으로 성공했고 한국 사랑의교회와 형제교회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도 우연이나 무리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1988년 청년 10명과 장년 1가정으로 개척할 때 이미 나의 내면에는 제자훈련이라는 사역의 틀이 확립 돼 있었던 것이다. 성공의 이면에는 반드시 준비라는 배경이 깔려있다. 신앙과 신학과 사역과 함께 개척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준비사항은 영적스승, 즉 멘토와의 만남이다. 이른바 멘토쉽(mentorship)이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목회의 성격과 성패 여부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선 부친이 훌륭했고 또한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이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 외에도 한국의 영광스러운 1세대 목회자를 자신의 멘토로 삼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나는 자신보다 나은 사람에게는 먼저 연락하여 자신의 멘토나 파트너로 삼는 일에 앞장섰다. 그 결과 좋은 목회자를 자신의 협력자로 삼을 수 있었다. 나의 지혜로운 전략적 준비였다. III. 목회 철학 1. 교회론 교회를 성장시키려면 방법이나 기술보다 목적과 본질에 더 충실해야 한다. 어떻게 (how)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why)와 무엇(What) 이다. 즉 목적의식과 사명의식이 분명해야 성공한다.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는 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개척자나 목회자 자신이 분명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개척 목회자의 교회론과 목회철학은 그가 가진 경험이나 기술 혹은 학력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가장 중요한 관점은 건강한 교회에 대한 자화상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다. (에베소서1:23) 더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의 제 2의 성육신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셨지만 그가 보내신 성령이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이다. 지금 예수는 이 땅에 안 계시지만 성령과 교회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계속 일하신다는 것이 바로 목회의 본질이 아닌가. 교회가 예수 사역의 연장이라면 예수가 건강하셨듯이 교회도 건강해야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다. 건강한 교회란 예수께서 하신 일을 그대로 하는 교회이다. 예수께서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구원받은 자들을 제자로 키우시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는 구원의 확신을 주고 더 나아가 사람을 제자로 키우는 교회이다. 생명을 주되 더 풍성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생명을 나누어 주도록 구비시키는 교회이다. 목회자가 해야 할 최대 최선의 일은 건강한 교인 만들기와 건강한 교회 만들기다. 진정 교회성장을 원한다면 교회성장 자체를 추구하지말고 교회건강을 추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건강한 교회는 성장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성경적 교회론으로 교인 만들기에 전심전력했다. 병든 교회, 아픈 교회가 되지말고 건강하고 역동적인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즉 병원으로서의 교회가 아닌 헬스클럽으로서의 교회가 되게하는 예방목회로서 제자훈련을 이해했다. 나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건강하고 충성된 평신도 사역자를 허락해 달라고 기도했다. 또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사오니 불쌍히 여겨달라는 세리의 기도를 많이 드렸다. 평신도가 일하는 교회, 누더기가 아닌 예수의 영광이 나타나는 교회, 좋은 예배자가 많이 나타나서 좋은 예배가 가능한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몸부림쳤다. 그 결과 불가능하다는 이민목회에서 수백 명의 평신도 사역자와 제자를 키워내는 기적을 이루어냈다. 양적으로도 초기 5년 동안에는 매년 100퍼센트 이상 성장했고 최근들어서도 30퍼센트 이상씩 성장하고 있다. 수백만 불이 넘는 교회당을 건축했고, 올해 내로 미국 내 한인교회 중 가장 큰 대지와 건물을 가지는 교회가 될 예정이다. 교회론이 분명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2. 목회자의 창조성 개척자고서 내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창조성(creativity)이다. 1990년 이전까지만 해도 개척자가 지사충성, 즉 죽도록 충성만 해도 교회는 성공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더 나아가 21세기 목회는 단순한 충성과 열정만 가지고는 충분치 못하다. 이른바 탁월성(excellence)과 창조성이 없으면 괄목할 만한 성장과 성공의 열매를 거두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시대적인 감각과 미래를 보는 안목, 영적 세계에 대한 비전 그리고 사람들의 필요를 파악하는 통찰력이 열정과 열심에 추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비둘기같이 순결하되 뱀같이 지혜로워야 세상을 이기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이민교회는 한국의 교회보다 10년 가량 늦은 사이클을 가진다. 반면에 한국의 교회는 미국의 본토 교회보다 약 10년 가량 늦은 발전속도를 가진다. 이 사실을 간파한 뒤 한국교회에서 제자훈련이 자리잡은 80년대 말에 미국의 이민교회에서는 처음으로 본격적인 제자훈련 목회를 시작해서 성공할 수 있었다. 단지 한국교회의 모방이 아니라 한국교회보다 10년 이상 앞서나가는 미국 본토 교회의 좋은 사역과 프로그램 그리고 방법론을 창조적으로 응용하여 추가했다는 점이 남다르다. 나는 목회가 힘들 때, 놀랍게 성장하는 미국교회에 가서 예배와 탐방과 묵상으로 재충전하여 목회에 창조적인 역동성을 불어넣는데 정력을 기울인다. 즉 한국교회의 순수성이라는 장점과 미국교회의 역동성이라는 장점을 극대화시켜 자신의 목회에 활용하는 지혜를 총동원하고자 노력한다. 사실상 제자훈련만 가지고는 교회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제자훈련과 함께 사람을 모으는 전도, 예배, 특히 메시지가 은혜로워야 한다. 끊임없는 열정적 기도는 물론 필수이다. 제자훈련이든 성령운동이든 크게 성공한 교회는 거의 공통적으로 예배가 매우 은혜스럽다. 예배가 실패하면 만사가 실패하고 예배가 성공하면 만사가 성공한다. 그래서 오 목사는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예배를 위해 지혜와 아이디어와 노력을 총동원한다. 설교도 그냥 듣는 설교가 아니라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처럼 성도들이 함께 적어나가는 노트식 설교를 유머와 열정과 감동으로 엮어나간다. 광고를 하나 하더라도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지루한 시간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흥분 시키는 동기부여, 즉 모티베이션의 시간이 되게 한다. 우리 교회가 가지는 창조성은 교회 주보를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내용은 한국교회와 다를 바 없지만 형식은 여지없이 성장하는 미국교회 스타일이다. 맨 앞면에 교회비전과 예배순서가 있고, 바로 뒷면에 목회자가 가장하고 싶은 메시지가 칼럼형식으로 게재된다. 주보 사이의 간지는 한국교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들로 가득 차있다. 사랑 설교노트, 한주간 성도들이 체험한 감사 간증의 기록, 가족과 함께 주일 저녁예배를 드리도록 배려하되 부부, 청소년, 어린이에게 맞는 순서지와 말씀지, 미국과 조국과 세계를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하도록 돕는 중보기도 카드, 한 달에 걸쳐 세부적으로 계획되어있는 캘린더 등 교회 전체가 살아서 움직이는 모습을 앉아서 볼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이처럼 목회의 능력은 바로 창조력이다. 3. 목회 리더쉽 목회자의 존재(준비와) 비전(교회론)과 전략(창조성)은 결국 목회자의 그릇(리더쉽)에 정비례한다. 목회란 사람을 키우는 것이다. 사람을 키우는 자가 바로 지도자요. 그 지도자의 행위가 바로 리더쉽이다. 목회의 최대 관심사는 사람을 낳고 그 낳은 사람을 키우는 아비의 사역이다. 즉 목회는 생명 창조요, 생명 양육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목죄자로서의 지도자는 스승이 아닌 아비요, 계모가 아닌 어미의 자화상이다. 리더쉽이란 이처럼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단지 교회 등록자나 출석자가 아니라 예배자요, 제자요, 사역자로 평신도를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성공적인 개척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단지 지식이 많은 그리스도인(informed Christian)도 아니요, 교파나 교단이나 교회의 규범에 순응하는 그리스도인(confirmed Christian)이 되는 것이 사람 키우는 리더쉽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사역은 나눌 수 있되 리더쉽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급적 많은 평신도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지도자의 목회 철학과 전략과 방향이 일정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열린 마음과 모험심 그리고 열정이 식지 않아야 한다. 열정이 식어지는 것이 늙는 것이다. 늙어지면 격식, 고집, 율법, 자기 스타일을 주장할 뿐 새로운 창조와 가능성을 부정하려 한다.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자신의 안전지대를 깨는 대신 자신의 성과와 소유에 집착하려 한다. 성장과 발전보다는 현상 유지에 급급해 한다. 한국교회가 이러한 모습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걱정하는 내 자신의 리더쉽 개발을 위해 애쓰고 있다. ‘약점이 아닌 강점을 주장하는 교회가 되라. 성령과 말씀, 공부와 기도, 고정과 현대의 균형 있는 사역을 하라. 이미 결정된 것에 집착하지 말고 더 잘할 수 있는 것에 모든 것을 걸라. 개척 전에 적어도 성경공부 하나만큼은 눈감고 인도할 수 있도록 마스터 하라.’
교회 개척론
교회 개척론 2002-01-30 09:42:56 read : 75 오정현목사 -------------------------------------------------------------------------------- 교회 개척론 I. 교회 개척은 하나님의 뜻이다. 교회 개척은 하나님의 뜻이다. 세계 복음화의 가장 확실한 전략은 모든 족속을 위한 교회를 개척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모으는 것이다. 현재 35만여개의 교회를 가진 미국이 복음화 되기 위해서는 100만개의 새로운 교회가 개척되어야 한다고 교회 성장학의 아버지인 맥가브란 박사는 말했다. 한국도 남북한이 통일되었다고 가정할 때 민족 복음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현재 4만여교회 외에 10만 개의 교회가 새로 설립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교회 개척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경제 성장, 레저혁명, 치솟는 부동산 가격, 교계의 무차별 경쟁 등 교회의 내외적인 상황 변화에 적응하기가 점점 어렵기 때문이다. 남가주 사랑의 교회는 한국의 ‘사랑의교회’ 를 모델로 하여 1980년대 까지 한국에서 유행한 제자훈련을 이민사회라는 독특한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접목시킨 담임 오정현 목사는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려는 목회자들과 작은 교회 신드롬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동역자들에게 신선한 도전을 주고 있다. 교회 개척의 필수요소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교회 개척을 위한 44가지 요소” 라는 책의 저자 라일 샬러(Lyle Schaller) 박사에 의하면 가장 중요한 3대 요소가 개척자, 리더십, 비전이라고 했다. 리더십과 비전도 결국 개척자에게 달려있는 만큼 가장 중요한 요인은 역시 개척자이다. 그렇다면 성공적인 개척목회자의 자화상을 이루는 절대요소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네가지를 정리해보겠다. II. 교회 개척론 세상의 사업도 마찬가지이지만 교회 개척에 성공하려면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특히 개척자 자신이 총체적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사역적으로 많이 준비되면 될수록 유익하다. 첫째, 신앙적으로 구원의 체험과 영적 배경이 확실해야 한다. 깡패가 갑자기 은혜 받아 목사가 되고, 세상적으로 죄와 쾌락으로 치닫다가 극적인 변화의 체험 때문에 목회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건강한 성장과정과 온전한 영적 배경이 없는 목회자가 성공할 확률은 점점 희박해질 것이다. 나는 4대째 예수를 믿는 신앙의 가정의 산물이다. 할아버지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부친은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고생하며 목회해 온 개척 목회자이다. 나는 부친의 목회 과정에서 개척의 고달픔을 간접 체험했고, 고생을 낙으로 아는 부친의 신앙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미 16세에 첫 설교를 했고 20세에 중,고등부, 23세부터는 대학생들을 말씀으로 가르치는 일을 전담했다. 둘째, 신학적 훈련이 필요하다. 나는 한국과 미국에서 네 곳의 신학교를 거치면서 다양한 신학적 교육을 받았다. 개혁적 복음 주의가 나의 신학의 기조이지만 미국의 실용주의적 신학노선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통주의적 신학의 컬러도 나의 열린 목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디서 무슨 신학을 했느냐 보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신학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단지 신학을 위한 신학은 무의미하다. 교회를 섬기는 신학, 사람을 살리는 신학적 방법론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셋째, 사역적 훈련으로 준비되어야한다. 어떤 사역으로 준비되었느냐가 남은 생애의 사역 전체를 결정하기 마련이다. 나는 전도사 시절 대학생 제자훈련으로 유명한 내수동 교회에서 사역을 감당해서 괄목할 만한 열매를 거두었고, 사랑의교회에서 협동목사로 있으면서 제자훈련의 전과정에 익숙할 수 있었다. 남가주 사랑의교회가 제자훈련으로 성공했고 한국 사랑의교회와 형제교회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도 우연이나 무리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1988년 청년 10명과 장년 1가정으로 개척할 때 이미 나의 내면에는 제자훈련이라는 사역의 틀이 확립 돼 있었던 것이다. 성공의 이면에는 반드시 준비라는 배경이 깔려있다. 신앙과 신학과 사역과 함께 개척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준비사항은 영적스승, 즉 멘토와의 만남이다. 이른바 멘토쉽(mentorship)이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목회의 성격과 성패 여부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선 부친이 훌륭했고 또한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이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 외에도 한국의 영광스러운 1세대 목회자를 자신의 멘토로 삼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나는 자신보다 나은 사람에게는 먼저 연락하여 자신의 멘토나 파트너로 삼는 일에 앞장섰다. 그 결과 좋은 목회자를 자신의 협력자로 삼을 수 있었다. 나의 지혜로운 전략적 준비였다. III. 목회 철학 1. 교회론 교회를 성장시키려면 방법이나 기술보다 목적과 본질에 더 충실해야 한다. 어떻게 (how)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why)와 무엇(What) 이다. 즉 목적의식과 사명의식이 분명해야 성공한다.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는 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개척자나 목회자 자신이 분명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개척 목회자의 교회론과 목회철학은 그가 가진 경험이나 기술 혹은 학력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가장 중요한 관점은 건강한 교회에 대한 자화상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다. (에베소서1:23) 더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의 제 2의 성육신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셨지만 그가 보내신 성령이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이다. 지금 예수는 이 땅에 안 계시지만 성령과 교회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계속 일하신다는 것이 바로 목회의 본질이 아닌가. 교회가 예수 사역의 연장이라면 예수가 건강하셨듯이 교회도 건강해야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다. 건강한 교회란 예수께서 하신 일을 그대로 하는 교회이다. 예수께서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구원받은 자들을 제자로 키우시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는 구원의 확신을 주고 더 나아가 사람을 제자로 키우는 교회이다. 생명을 주되 더 풍성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생명을 나누어 주도록 구비시키는 교회이다. 목회자가 해야 할 최대 최선의 일은 건강한 교인 만들기와 건강한 교회 만들기다. 진정 교회성장을 원한다면 교회성장 자체를 추구하지말고 교회건강을 추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건강한 교회는 성장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성경적 교회론으로 교인 만들기에 전심전력했다. 병든 교회, 아픈 교회가 되지말고 건강하고 역동적인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즉 병원으로서의 교회가 아닌 헬스클럽으로서의 교회가 되게하는 예방목회로서 제자훈련을 이해했다. 나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건강하고 충성된 평신도 사역자를 허락해 달라고 기도했다. 또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사오니 불쌍히 여겨달라는 세리의 기도를 많이 드렸다. 평신도가 일하는 교회, 누더기가 아닌 예수의 영광이 나타나는 교회, 좋은 예배자가 많이 나타나서 좋은 예배가 가능한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몸부림쳤다. 그 결과 불가능하다는 이민목회에서 수백 명의 평신도 사역자와 제자를 키워내는 기적을 이루어냈다. 양적으로도 초기 5년 동안에는 매년 100퍼센트 이상 성장했고 최근들어서도 30퍼센트 이상씩 성장하고 있다. 수백만 불이 넘는 교회당을 건축했고, 올해 내로 미국 내 한인교회 중 가장 큰 대지와 건물을 가지는 교회가 될 예정이다. 교회론이 분명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2. 목회자의 창조성 개척자고서 내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창조성(creativity)이다. 1990년 이전까지만 해도 개척자가 지사충성, 즉 죽도록 충성만 해도 교회는 성공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더 나아가 21세기 목회는 단순한 충성과 열정만 가지고는 충분치 못하다. 이른바 탁월성(excellence)과 창조성이 없으면 괄목할 만한 성장과 성공의 열매를 거두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시대적인 감각과 미래를 보는 안목, 영적 세계에 대한 비전 그리고 사람들의 필요를 파악하는 통찰력이 열정과 열심에 추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비둘기같이 순결하되 뱀같이 지혜로워야 세상을 이기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이민교회는 한국의 교회보다 10년 가량 늦은 사이클을 가진다. 반면에 한국의 교회는 미국의 본토 교회보다 약 10년 가량 늦은 발전속도를 가진다. 이 사실을 간파한 뒤 한국교회에서 제자훈련이 자리잡은 80년대 말에 미국의 이민교회에서는 처음으로 본격적인 제자훈련 목회를 시작해서 성공할 수 있었다. 단지 한국교회의 모방이 아니라 한국교회보다 10년 이상 앞서나가는 미국 본토 교회의 좋은 사역과 프로그램 그리고 방법론을 창조적으로 응용하여 추가했다는 점이 남다르다. 나는 목회가 힘들 때, 놀랍게 성장하는 미국교회에 가서 예배와 탐방과 묵상으로 재충전하여 목회에 창조적인 역동성을 불어넣는데 정력을 기울인다. 즉 한국교회의 순수성이라는 장점과 미국교회의 역동성이라는 장점을 극대화시켜 자신의 목회에 활용하는 지혜를 총동원하고자 노력한다. 사실상 제자훈련만 가지고는 교회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제자훈련과 함께 사람을 모으는 전도, 예배, 특히 메시지가 은혜로워야 한다. 끊임없는 열정적 기도는 물론 필수이다. 제자훈련이든 성령운동이든 크게 성공한 교회는 거의 공통적으로 예배가 매우 은혜스럽다. 예배가 실패하면 만사가 실패하고 예배가 성공하면 만사가 성공한다. 그래서 오 목사는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예배를 위해 지혜와 아이디어와 노력을 총동원한다. 설교도 그냥 듣는 설교가 아니라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처럼 성도들이 함께 적어나가는 노트식 설교를 유머와 열정과 감동으로 엮어나간다. 광고를 하나 하더라도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지루한 시간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흥분 시키는 동기부여, 즉 모티베이션의 시간이 되게 한다. 우리 교회가 가지는 창조성은 교회 주보를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내용은 한국교회와 다를 바 없지만 형식은 여지없이 성장하는 미국교회 스타일이다. 맨 앞면에 교회비전과 예배순서가 있고, 바로 뒷면에 목회자가 가장하고 싶은 메시지가 칼럼형식으로 게재된다. 주보 사이의 간지는 한국교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들로 가득 차있다. 사랑 설교노트, 한주간 성도들이 체험한 감사 간증의 기록, 가족과 함께 주일 저녁예배를 드리도록 배려하되 부부, 청소년, 어린이에게 맞는 순서지와 말씀지, 미국과 조국과 세계를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하도록 돕는 중보기도 카드, 한 달에 걸쳐 세부적으로 계획되어있는 캘린더 등 교회 전체가 살아서 움직이는 모습을 앉아서 볼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이처럼 목회의 능력은 바로 창조력이다. 3. 목회 리더쉽 목회자의 존재(준비와) 비전(교회론)과 전략(창조성)은 결국 목회자의 그릇(리더쉽)에 정비례한다. 목회란 사람을 키우는 것이다. 사람을 키우는 자가 바로 지도자요. 그 지도자의 행위가 바로 리더쉽이다. 목회의 최대 관심사는 사람을 낳고 그 낳은 사람을 키우는 아비의 사역이다. 즉 목회는 생명 창조요, 생명 양육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목죄자로서의 지도자는 스승이 아닌 아비요, 계모가 아닌 어미의 자화상이다. 리더쉽이란 이처럼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단지 교회 등록자나 출석자가 아니라 예배자요, 제자요, 사역자로 평신도를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성공적인 개척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단지 지식이 많은 그리스도인(informed Christian)도 아니요, 교파나 교단이나 교회의 규범에 순응하는 그리스도인(confirmed Christian)이 되는 것이 사람 키우는 리더쉽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사역은 나눌 수 있되 리더쉽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급적 많은 평신도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지도자의 목회 철학과 전략과 방향이 일정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열린 마음과 모험심 그리고 열정이 식지 않아야 한다. 열정이 식어지는 것이 늙는 것이다. 늙어지면 격식, 고집, 율법, 자기 스타일을 주장할 뿐 새로운 창조와 가능성을 부정하려 한다.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자신의 안전지대를 깨는 대신 자신의 성과와 소유에 집착하려 한다. 성장과 발전보다는 현상 유지에 급급해 한다. 한국교회가 이러한 모습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걱정하는 내 자신의 리더쉽 개발을 위해 애쓰고 있다. ‘약점이 아닌 강점을 주장하는 교회가 되라. 성령과 말씀, 공부와 기도, 고정과 현대의 균형 있는 사역을 하라. 이미 결정된 것에 집착하지 말고 더 잘할 수 있는 것에 모든 것을 걸라. 개척 전에 적어도 성경공부 하나만큼은 눈감고 인도할 수 있도록 마스터 하라.’
교회 교육 행정 및 관리/ 2004-02-06
교회 교육 행정 및 관리 강사 : 이종국 장로 Ⅰ. 일반 행정학의 개념 행정의 기본적인 원리는 인간의 협동 행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행정이라 함은 공동목적을 달성함에 필요한 협동적 단체행동이다. Ⅱ. 교회 행정학의 개념 교회도 하나의 공동생활이라는 상황에서 조직과 다스림 (행정)이 필요하게 된다. 교회는 "에클레시아(Ekklesia )"라는 원어의 뜻 그대로 하나님으로 부터 세상에서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 들의 집합체 즉, 공동생활체로써의 인간적 실재요, "큐리아곤(Kuriakon)"이라는 원어의 뜻과 같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신적기구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하나님의 말씀 전파를 위하여 형성 된 공동체 즉, 신적실재이다. 1. 교회행정의 정의 교회행정은 현대 교회의 목적인 전체목회를 성취하기 위하여 교회를 인도하는데 관련된 교회 지도자들의 필요한 활동을 말한다. 이러한 활동은 교회의 활동은 교회의 목적 (사명)을 달성 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업에 참여하도록 모든 교인들을 동참케 규정하고 교회 프로그램을 계획 하고, 조직하고, 통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교회행정학은 교회의 목적과 의사를 실현 시키고 맡겨진 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조직과 교인과 운영의 기술과 능률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교회행정의 필요성 교회의 구조는 성경에 근거하여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 구조는 단순했었으나 수 세기를 지나 는 동안 교호가 당면한 그 시대와 그 시대의 문화적인 상황에 따라 조직과 운영의 방법이 변했으며, 종교개혁과 함께 교회의 구조가 다양하게 되었다. 현대 사회의 광범하고 복잡한 조직생활 구조와 같이 교회의 구조도 점차적으로 복잡하여져서 목회자의 그 복잡한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더욱 많은 기교가 필요하게 되고 그 시무 방법은 더욱 치밀해야 하고 조직적이 여야 되게 되었다. 즉, 늘어나는 구역관리, 새산자의 보호, 육성, 교인들의 훈련, 교회학교 의 운영관리 , 남여 전도회와 청년회, 학생회의 생활지도와 관할, 청지기 훈련과 재정출납의 조정, 회계의 기장과 출납사무 체계화, 교회 건물의 유지와 관리 등을 위해서 공평하게 분배 는 물론, 생소한 임무에 대하여는 지도하고 탈선은 제재해야 할 것이니 교회행정의 과제는 임무의 변화 또는 가중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 하는데 있어서 목회자는 이사무 를 제한된 시간에 가장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교회 행정학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현대교회는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당회, 제직회, 각위원회, 교회학교, 남·여전도회, 청년회, 학생회 등의 복잡한 조직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회개한 영혼이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헌신 하기로 결정한 사람들로 구성된 특수사회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안에 계속 보존되 어야 하며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배양되어야 하고 그들의 전 기능은 그리스도를 위해 활용 할 수 있도록 조직되고 동원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위하여 교회행정은 교인들과 함께 목표를 세우고 조직체의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의무를 분배하며 모든 계획과 사업이 교회의 목적을 달성 할 수 있도록 조직운영되어야 한다. 한교회안에서의 각양 교인 한사람 한사람의 형태는 직간접으로 교회행정 형태 체계의 일부임을 명심하고 한사람이라도 교회 조직형태, 체개밖에 방치되는 일이 없도록 함이 교회행정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Ⅲ. 조 직 행 정 1. 조직의 본질 행정학에 있어서 조직행정, 인사행정, 재무행정은 행정의 삼대 주측을 이룬다. 이 삼대 주축은 관리와 행정의 기본이기 때문에 그 중 하나라도 위축되거나 위배될 때에는 관리 기능은 마비되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조직과 관리는 상호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어 모든 조직은 효과적인 관리 기능을 위한 이상적인 관리 체계의 행정에 그 목표를 두어야 한다. 2. 조직의 정의 조직이란 광의로는 공동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모든 인간의 협동체를 이룬 형태를 말 한다. 협의에 있어서 조직이란 복수의 인간이 공통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상하병열의 질서 관계 를 통하여 그 지위와 기능을 규명하며 일체적인 협동체를 이루고 있는 형태라고 정의할 수 있다. 3. 조직의 형태 가. 일반 행정 조직의 분류 1)계선조직 : 중앙집권화 한 형태로써 한사람의 상사와 여려사람의 부하를 가지는 각 단계의 책임자는 여하한 임무라도 담당하고 수행한다는 가정아래 상사의 명령과 지휘에 복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2)막료조직 : 전반적인 계획, 지휘, 통제 및 조직에 대하여 지식적 요소를 제공하여 관리면에 영향을 끼치나 직접 권한 행사나 명령하는 기능은 아니다. 3)보조조직 : 기존조직 본체에 특수한 임무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이 기관은 계선조직에 대하여 협조하고 조력하는 봉사기관. 예를 들면, 남녀전도회, 청년회, 학생회등 4)기능형 조직 : 막료 조직이 계선 조직에 보조의 확대 또는 전문가의 시무제공 원칙의 분권적 확대와 정교화를 목적하는 조직 5)회의체형 조직 : 관리 책임을 두 사람 이상으로 구성되는 회의체에 그 권한을 인정 하는 위원회 또는 집단 지도 체제로 조직하는 것이다. 6)계선 및 기능 조직 : 계선 조직에 기능형 조직을 절충하며, 조화한 형태 7)계선 및 막료형 조직 : 계선 조직과 막료 조직의 쌍방 장점을 적절히 결합시킨 조직 으로서 현대의 대규모 조직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요건을 구비 하고 있어서 광범위하게 채용되고 있다. 8)비공식 조직 : 그룹 조직이나 특별활동을 위한 조직에 이용되는 조직 형태로서 어떠한 원리나 규정에 규제를 받지 않고 형편과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조직 하는 형태 4. 교회행정 조직의 분류 가. 에스피코팔 양식 (the Episcopal form) 이 행정 조직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표본이 된다. 교황은 그의 권위를 하나님으로 부터 직접 받았기 때문에 그것은 신성불가침의 절대적 귄위를 장악 나. 프로테스탄트 감독 교회 (the protestant Episcopal church) 이 교회의 행정조직은 감독의 선출을 3년 대회에서 선출하는 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하여 상하 두개의 의회를 소유하고 있다. 상 원 : 감독 회의 하 원 : 목사와 신도의 대표로 구성 다. 감리교회 (The Methodist church) 감독이란 명칭을 사용. 총회에서 감독을 선출하며 감독은 총회에서 위임한 사항을 실행 하기 위한 행정상의 수반에 불과 함 라. 개혁파 조직 (Reformed system) 이 행정 조직은 종교개혁의 산물. 이 행정 조직의 양식은 개혁 교회 여러 파와 장로교회 행정구조가 그 표본이다. 이 조직은 개교회의 통솔이 평신도들이 선출한 평신도 대표에 의하여 시행 된다. 그들은 임직 될 때만 아니라 안수를 받아 목사와 동등한 지위를 갖 는다.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특징은 장로 정치이다. 이 장로는 개교회의 모든 활동의 중심이며 통제의 권한을 장악하고 처리기관의 회원이 되며 교인 대표로 활동한다. 장로 의 회는 재단의 법적 권한을 장악한다. 마. 회중교 양식 (The congregational form) 이 행정 조직은 회중교회, 침례교회, 그리스도의 제자 교회 등이 채택하고 있다. 이 행정 조직의 특색은 개교회의 독립성이다. 이 행정 체계의 양식은 전적으로 민주적이며 모든 사업은 회중들에 의하여 위임된 위원회에서 관장한다. 회중의 투표를 받지 않고는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직될 수 없으며 개교회 이상의 여하한 상회도 인정하지 않음이 그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둔 푸로태스탄트 교회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채택하는 것은 제직회와 당회가 개교회 신도들의 권한을 위임 받아 이것을 실행할 권위를 갖도록 조직되어 있는 것이다. 5. 교회조직 가. 당회조직 : 당회는 노회원의 대표자인 목사(당회장)와 교인의 대표자인 치리 장로로 조직 되는 기본 치리회이다. 총회는 헌법 해석에 관한 전권이 있고, 노히ㅗ는 목사를 다스리는 전권이 있으며, 당회는 교인을 다스리는 전권이 있는 개교회의 최고 기관이다. 이것 은 각각 고유한 권한 특권으로 다른회가 침해할 수 없다. 비록 상회라고 해도 상소로 말미암지 않고는 간섭할 권한이 없다. 당회는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모이기에 적당한 정규적인 당회로 회집하여 신실하고 충성스섭게 책임을 감당한다. 1) 당회의 직무 가)당회는 신령상 모든 시무를 처리하는 것으로 (히 13:17) 교인의 지식과 신앙상의 행위를 총찰한다. 나)당회는 학습과 입교할 자를 시취하고, 주소변경한 교인에게는 이명 증서를 접수 또는 교부하고 제명을 한다. 다)당회는 예배와 성례를 거행한다. 라)당회는 장로와 집사를 선택하여 교육하고 장로는 노회의 승인과 고시한 후 집사는 당회가 시취한 후에 임직한다. 마)당회는 각종 헌금 수집하는 일을 주장한다. 각종 헌금 수집의 날짜와 방침까지도 작정한다. 바)당회는 교회헌법에 의한 권징을 행한다. * 권계, 견책, 수찬정지, 제명, 출교 사)당회는 신령적 유익을 도모하며, 교인을 심방하고 각 기관을 감독한다. 아)당회는 노회에 총대를 파송하고 청원과 보고를 한다. 2) 당회의 권한 당회는 예배모범에 의하여 예배의식을 전관하고 (시간,장소) 교회에 소속된 토지 건물 등의 부동산 관계를 장리한다. 나. 제직회 : 제직회는 목사, 장로, 집사(안수집사)등 항존직과 당회가 허락하는 전도사, 전도인, 권사, 남여 서리잡사등 모든 임시 직원으로 구성하는 당회 관할 아래의 한 실무회이다. 회장은 선거에 의하지 아니하고 당회장이 되며, 서기와 회계는 반드시 선거하여 선택해야 하나 대형교회에서는 임명에 의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단, 미조직 교회에서는 당회장의 허락으로 남전도사가 제직회 임시 회장이 될 수 있다. 제직회의 임무는 공동의회가 세워준 교회의 예산을 가지고 교회의 살림을 영위 하며구제와 봉사등의 직무를 수행한다. 그리고 매년 공동의회에 1년간 경과 상황과 일반 수지 결산을 보고하며 익년도 교회경비 예산을 편성하여 제직회에 통과하며 회계감사도 받는다. 별첨 1993년도 충현교회 조직 참조
교회는 말씀을 따르는 성령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말씀을 따르는 성령공동체입니다 박동현 교수와의 대담 대담 진행 : 박삼열, 홍순석 기자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보다 잘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 말씀을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교회는 ‘성령’ 하면 강력하거나 초월적이고 다분히 신비적인 체험을 먼저 떠올리는 분위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교회의 급속한 성장도 많이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무엇보다 사도행전, 특히 오순절 성령 사건에 대한 이해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닐까요? 말씀하신 대로 우리들은 대개 성령을 개인적인 체험이나 능력을 소유하는 것과 많이 연결짓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무엇보다 사도행전 2장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 사건은 성령의 체험을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 승천하신 이후 하나의 신앙공동체로서 교회가 본격적으로 태어나는 시점을 이야기한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 사도행전 2장을 근거로 성령에 관한 이야기도 해야 하지만, 교회도 강조를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 본문에서 교회를 이야기할 때는 흔히 42절 이하만 강조합니다. 신약의 성령의 역사는 처음부터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또는 그 중심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즉 42절 이하의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그 이전의 성령강림 사건과 이어지는 흐름 가운데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강림 사건을 너무 개인적인 체험으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또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나는 불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이점에 대해서도 한국교회가 별로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성령 체험을 통해 내가 무슨 말씀을 들었는가 라는 면보다는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어떤 뜨거움이 있느냐에 좀더 비중을 많이 두는 것 같습니다. 또한 성령 체험을 통해 자신이 무엇인가를 들었다고 하면서 굉장히 이상한 말들을 많이 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도행전 2장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성령 받았다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이점이 굉장히 중요한데, 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들이 행한 것은 ‘하나님의 큰 일’(11절)을 선포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특히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체험을 제대로 했다면 본인이 굳이 ‘내가 불 받았다’라는 식의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러이러하게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을 새롭게 알고 확신하고 증거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체험은 이제까지 인간이 듣지 못한 무슨 신비로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이미 적혀 있는 것, 교회 역사가 잘 알고 있는 것, 특히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을 더 확실하고 설득력 있게 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을 체험한 사람은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 곧 모든 인류의 구원이 되는 성경에 계시된 진리를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계시된 성경의 진리와 이미 알고 있는 성경의 내용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명확하게 또 사람의 마음에 강력하게 작용하도록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2장의 성령 체험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하나 생각해 볼 문제는 능력이나 성장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것이 결국 변화라는데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즉 제대로 성령 받아 ‘하나님의 큰 일’을 선포하면,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잘못을 깨닫고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안에서는 종종 성령 때문에 달라진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예전보다 더 나쁘게 달라지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볼 때 결국 우리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한국교회가 사도행전 2장 사건을 흔히 초자연적이거나 신비한 뜨거운 체험으로 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2장을 자세히 보면 성령 받은 사람들이 뜨거운 경험을 했다는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겨우 앞부분에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에게 내렸다는 정도의 표현이 있을 뿐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대부분은 베드로 설교입니다. 성령이 내리셨다는 것은 간단하게 언급했고 간접적으로 술에 취한 사람 같다라는 표현을 했을 뿐이지, 실제 그것을 받은 사람들이 어떤 뜨거운 경험을 했느냐 하는 것에 대한 묘사는 없어요. 이런 점은 신약 전체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구약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 임하면 어떤 상태가 되는지에 대해 기껏 사울이 입신한 경우가 나올 뿐이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뜨거운 것은 없습니다. 뜨거움과 관련해 보아야 할 것은 누가복음 24장인데, 부활하신 주님이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을 만난 사건이 나옵니다. 32절에서 제자들은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뜨거움은 사람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키는 그런 뜨거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꾸 성령에 대해 오해하는 것은 본문을 꼼꼼히 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본문에 나오는 한두 단어를 보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이나 전제들로 으레 그러려니 생각해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즉 우리에게 많은 전제가 있기 때문에 자꾸 그런 식으로 보는 게 아닌가 하는 거죠. 그 중에는 샤머니즘적인 요소도 있겠고, 황금만능주의나 성공주의도 오늘날 큰 영향을 끼치는 전제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이 세상이라는 한계 속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는 초월의 경험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꼭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일반 종교들 속에서도 초월을 추구하는 모습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평상시 상식적으로 안 되는 일을 순간적으로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죠. 성경에도 그와 관련시킬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이죠. 분명히 이것은 얼마나 좋은 말씀인지 모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초월적이시지 않거나, 전능하시지 않다면 진정한 구원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자기 초월 경험이 정당하지 못할 때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온 초월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것과 또한 인간의 힘으로도 어느 정도 해낼 수 있는 몇 가지 초자연적인 경험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특히 요즘은 사회가 너무 답답하니까 불만이 많고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모두가 매우 힘든 상황 속에 놓이게 되니까 특히 서민들은 더욱 공허해 하고 뭔가에 갈급해 합니다. 한 번 제대로 숨쉬고 살고 싶은데 이게 안 되는 거죠. 이렇게 되니까 간단하게 넘어서고 싶은 종교적인 욕구가 강하게 작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초월적인 존재, 신적 존재의 힘을 한순간에 빌려 보고 싶어집니다. 이게 기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면 그리스도인 역시 혼란에 빠지고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비록 나에게는 손해가 있고 고난이 따른다 하더라도 그 말씀을 따라 살겠다고 굳게 다짐하면서 성령의 이끄심을 받기보다는 우선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라는 의식이 더 강해집니다.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사도행전 2장 사건뿐 아니라 교회와 성령의 관계를 보여주는 성경의 다른 본문의 증거들도 있지 않습니까? 교회와 성령의 관계에 있어 또 다른 측면들도 있을 것 같은데요. 사사기에 보면 ‘여호와의 영’에 대해 언급하는 본문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문맥에서 사사나 예언자들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고 말하는 것은 엄밀하게는 개인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사들은 이스라엘이 남의 나라에 지배를 받을 때 이스라엘을 거기서 해방시키려고 그에 대항해서 군사를 일으킨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생각해서입니다. 기드온 같은 사람이나 엘리야, 엘리사 같은 사람도 그렇고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왕이나 예언자같은 특별한 직책을 맡기시기 위해 하나님의 영을 두신 경우입니다. 이것을 지금의 교회에 적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즈음 교회에서 직분자들을 세울 때, 교인들이 모여 직분자들을 뽑는 선거를 하고, 표를 많이 얻으면 당선됐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끝납니다. 그러나 적어도 사사기 본문에 비추어 보면, 선거도 선거지만 직분자에 대한 성령의 보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영감을 달라고 했잖아요. 즉 성령의 정상적인 승계, 곧 성령의 확증 없이는 직책의 승계가 안 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 일은 철저히 성령의 역사 가운데서 진행해야 하는데 요즘은 그것에 대해 별로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요. 결국 이 같은 성령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방금 말씀하신 성령과 교회 안의 직분과 연결해 볼 때, 한국교회 목회 현장은 상당히 심각한 것 같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성령으로 진행되어 간다는 것은 곧 교회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의 몸된 성도들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을의미할 뿐 아니라, 목회 현실에서 교회 안에 직분자들을 세울 때 철저히 성령의 보증을 고려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약의 표현대로라면 성령의 은사를 따라 세워지는 직분으로 움직여지는 교회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점에서 우리의 목회 현장이 이미 너무 많은 양보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비단 집사나 장로를 세울 때뿐 아니라 심지어는 목사 임직에도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두렵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게 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느냐 하는 것의 실제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요? 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은 사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알아야 할 점은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인 스스로가 알 것입니다. 정말 내 욕심을 접어놓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지 스스로가 알아요. 그러므로 교역자 본인부터 당회에서 모든 교회의 과정을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성령의 뜻이 무엇인지를 추구하는 태도가 있어야 하고 아울러서 당회원, 신자 모두에게 그것을 늘 강조해야 합니다. 설교 시간 혹은 교회 공동체 앞에 우리가 “장로님을 선출합니다, 권사님을 뽑습니다”라고 할 때 이것이 정말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성령의 뜻을 따르는 일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강조되거나 전제되지 않고 교역자 자신부터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교인들이 변화되겠습니까? 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측면을 강조하는 오순절 쪽의 교회들은 말씀과 교리를 강조하는 장로교 같은 쪽에 대해 성령의 자유로운 운행과 인도하심을 제한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 같고, 반대로 말씀과 교리를 강조하는 교회 쪽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강조하는 오순절 쪽이 너무 말씀의 기준 없이 자유 방임 쪽으로 가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나타내곤 하는데, 이 둘 사이의 긴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긴장은 요즘에 새로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시대부터 있어 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초기에는 예언 활동과 성령의 역사가 나란히 나타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소위 아모스 같은 문서 예언자들이 등장하면서 달라집니다. 이 문서 예언자 쪽으로 가면 성령과 관련된 표현이 바뀝니다. 예컨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시느니라”라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성령이 임하셨다”라고 하면 되었는데, 그런 성령에 대한 표현들이 문서 예언자들에게 와서 좀 달라집니다. 또 “여호와의 손이 아무개 위에 있다”라는 것 등이지요. 이것은 이미 구약시대에 이미 그런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반영하는 거예요. 초인적인 체험을 자꾸 강조하고 예언의 내용 자체는 경시하게되니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보다는 실제로 그런 체험을 통해 하나님이 들려주신 말씀이 중요하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실은 이 성령을 통해 말씀이 계시되는 것인데도, 인간 편에서는 성령을 통하여 계시되는 말씀을 무시하고 체험 자체만을 생각하게 되다 보니 이제 말씀을 강조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의 계시 자체도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안됩니다. 결국 성령과 말씀이 같이 간다는 것이 사도행전 2장에 선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니까 교회가 부흥하는 것입니다. 성령과 말씀과 부흥은 서로 떼어놓을 수가 없는데, 이걸 다 서로 각각의 것인양 갈라놓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령에 대한 이해와 말씀에 대한 강조, 그리고 부흥에 대한 바램 사이에 균형을 이루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시대 흐름에 따라 한쪽으로 좀더 기울어지기가 쉽습니다. 교회 역사 가운데서도 시대에 따라 조금씩 초점이 달라지고 교정이 되어 왔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한다는 자체도 제한이 있습니다. 성령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는데 사도행전을 보면 교회가 ‘부흥한다’는 내용도 있지만 말씀이 ‘흥왕하여’라는 말도 나옵니다. 다시 말해 성령을 통해서 새롭게 깨우치는 말씀이라는 거죠.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니까 자기의 죄를 보고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고 참으로 회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이 곧 초대 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좀 다른 질문일수도 있지만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령이 불처럼 임했다’고 할 때 이 불의 상징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불’ 이미지는 구약 전통과 상관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임하실 때 불 가운데 임하시는데(18절) 그 전통을 여기 오순절과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유대교에서도 칠칠절을 시내산에서 율법 받은 것과 관련시킵니다. 구약의 유월절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시기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계시하실 때는 어떤 두렵고 영광스럽고 초자연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실 텐데 여기 보면 불같은 것으로 되어 있어요. 불의 혀같이 그리고 이제 실제로 자연 현상에서는 아주 신비스러운 구름과 거기에 광채가 나는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있어요. 옛날 사람들은 어디서나 일반적으로 어떤 성스러움을 표현할 때 그렇지 했겠지요. 한국적인 문화 속에서는 불이라고 하면 우리 인간의 정성을 모으는 지극 정성이나 열정적인 신앙으로 이해되기 쉬운데 그것은 자칫 맹목주의나 맹신주의에 빠져 들어가게 할 우려도 있지 않나 생각되는데요. 불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출애굽기 19장이나 사도행전 2장 같은 데서 말하는 불의 실제적 의미는 감동의 정도를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억제할 수 없는 힘에 사로 잡혔다는 것이지요. 사실 기드온의 경우에도 우리 한글개역판 성경이 사사기 6장 34절에서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라고 점잖게 번역했지만 실제 히브리 원문에 보면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을 옷 입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영이 한 인간을 사로잡아 버린 것이고 완전히 뒤집어엎어 놓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불 이상입니다. 우리 나라 성도들이 표현할 때는 ‘불 받았다’라고 하는데, 사실은 이 불 받은 것이 기드온이 성령을 받은 것에 비해 그 정도가 약합니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이 임해서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개인이나 공동체가 개선되는 사건이 있고 반목하던 사람들이 화목하는 이런 일들 말입니다. 즉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느냐 하는 거죠. 그럴 때 성령 임함은 정당성을 보증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꾸 갈등이 생기고 미움이 있다면 아무리 성령에 대해 말한다 해도 애초의 경험부터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령을 체험했다는 그 순간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삶까지 전체적으로 폭을 넓혀 놓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에 대한 오해가 금방 끓었다 금방 식는 냄비같은 신앙과도 관련이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교수님의 책이나 글들을 보면 성경 본문을 개인적으로 번역하시는 경우가 종종 눈에 띄고, 또 다른 성경 번역본들을 자주 참조하시는 것을 보았는데요, 본문에 대한 교수님의 자세가 남다른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문에 주의하는 자세가 성경이 말하는 성령 이해에 있어서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그 문제에 대해서 저는 ‘설교보다는 본문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말로 요약하고 싶습니다. 즉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그 설교가 본문을 능가할 수는 없잖아요? 이게 지금 우리 나라의 교회들와 목회자들의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본문이 얼마나 드러나느냐 하는 것이지, 본문 해설을 얼마나 잘했느냐가 아니라고 봅니다. 설교 잘한다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본문하고는 상관이 없는 내용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 분들을 아주 위대한 목회자요 설교자로 알려져 있고책도 내지만 성서 신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는 참 염려되는 면이 적지 않아요. 조금은 답답한 말씀일지 모르겠습니다만, 기본 태도가 중요합니다. ‘말씀을 듣겠다’는 태도,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내가 무엇을 끄집어내어,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던 것을 발견해 던져주겠다’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제가 늘 주장하는 내용인데, 설교자도 우선은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심지어는 설교하는 순간에도 설교자 자신은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사람입니다. 심심찮게 어떤 사람들은 자기는 항상 말씀 위에 있는 것처럼 설교합니다. 이런 분들이 목회하는 교회 교인들이 어떻게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에 대한 오해도 근본적으로는 성경 본문에 대한 소홀함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죠. 앞에서 말씀 드렸지만, 우리의 문제는 사도행전 2장을 읽으면서도 성령 임한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에는 별로 관심 없어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의미는 대충 뛰어 넘은 채 교회의 발전만 보는 겁니다. 교회가 어떻게 하면 한순간에 이렇게 커질 수 있을까 하는 거죠. 성경 본문에 대해 소홀히 여기는 태도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겠죠.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내 생각을 앞세우지 않도록 정말 조심해야 해요. 나의 의견이나 전제를 집어넣지 말고 성경에 적힌 대로 읽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구약의 광야 교회로 묘사되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볼 때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금송아지 사건은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순종하는 것에 대해서 어떤 통찰을 주지 않나 생각되는데요? 신약의 교회를 새 언약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이에 상응하는 옛 언약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약의 교회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 형태에 있어서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 곧 광야 교회가 갔던 길이 오늘날 우리 신약 교회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줄 수 있겠죠.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사건의 경우는 백성들이 믿고 따르는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된 현실이 그들에게 아주 심각한 문제로 다가온 것입니다. 즉 지도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하나님 또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여기게 되면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항의한 것이죠.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는 것처럼 믿고 살아가는 것인데, 이게 그리 쉽지 않아요. 오늘 우리 기독교회에서도 목사님이 대단하다든지 교회가 부흥 발전하든지 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종종 교인들이 좌절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좌절하게 되니까 눈에 보이는 것을 찾아 나서죠. 그래서 박사학위 있는 목사님을 모시려고 애쓰고 하나님의 진짜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따져보기도 전에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외형적으로 커지기를 추구하거나 건물 짓는 데 엄청나게 힘을 들이는 경우가 생기는 것 같아요. 술사 발람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다시 그것을 거두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사건이 오늘날 교회의 성령 이해에 혼란을 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당연히 혼란이 오겠죠. 성령의 역사하심이 한시적인 경우도 있고 지속적인 경우도 있고 하여간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여기서 전제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모든 물음에 대해 명쾌하게 대답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이에요. 이미 수십 년 아니면 수백 년 전부터 논란이 되어오고 있지만 아직까지 해결이 나지 않는 주제들이 얼마나 많아요? 모든 논란이 다 해결될 수 없다는, 그래서 참으로 겸손하게 성경 본문을 읽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는 것 같아요. 적지 않은 경우 우리 인간의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과도하게 해결하려다가는 종종 너무 주관적인 이해에 얽매일 수가 있거든요. 참 어렵긴 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기본적으로 예수를 구주로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때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성령에 대한 이해가 너무 다양하고 이것 때문에 신앙의 근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결코 마땅하지 않은 삶이 매우 영적인 것으로 미화 내지는 착각되는 경우들이 잇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명확하게 제시할 필요성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안타깝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런 안타까움을 남겨 놓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과도하게 명쾌한 설명이라는 것에는 항상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명쾌’하다면 그 나머지는 다 감추어져 버려요. 어느 하나가 명쾌하면 다른 것은 다 거짓으로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그래서 그런 안타까움은 주님께서 불완전한 인간에게 그냥 감수하게 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실제로 우리 개인이나 교회가 믿고 살아가는 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 가지고도 큰 문제는 없거든요. 그러니까 많이 몰라서 우리가 못 한다기보다는 어떻게 보면 너무 많이 알려고 하다 보니 안 되는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우리가 싸워야 할 부분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욕심이고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죄성일 것입니다. 그런 안타까움은 그냥 그대로 두고,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분명하게 아는 그것을 좀더 열심히 해 나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로서는 꼭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기본 마음가짐입니다. 내가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다 이해를 못하고 심지어 성령에 관한 교훈도 다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쨌든 나는 교회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성령의 다스림대로 이끌어 가겠다든지 섬기겠다 하는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성경을 연구하고 또 배운다면 실제적으로 많은 문제가 줄어들으리라고 봅니다. 끝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목회자와 온 성도를 포함한 교회가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개혁교회 전통 중에 하나는 말씀 앞에 서는 교회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교역자도 말씀을 듣고 성도들도 기본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겸손한 교회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과 성령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성령에 대해 성경에서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공부를 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이제는 성경공부도 공동체적으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은 주로 목사님들이 성경을 읽고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식으로 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성경을 펴놓고 목사님도 교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봅니다. 성경공부도 공동체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마도 목사 중심이 아닌 성경 중심의 교회 공동체로 교회의 체질을 바꿀 수 있는 틀이 아닐까 해요. 그렇다고 목회자가 손해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과정에서 목회자도 정말 귀한 것들을 많이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귀한 말씀 대단히 감사합니다. 박동현/서울대를 나와 장로회신학대학교(M. Div., Th. M.)와 독일 베를린신학대학(Dr. theol.)에서 공부했으며, 지금은 장로회 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로 있다.
교회는 말씀을 따르는 성령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말씀을 따르는 성령공동체입니다 2002-01-30 09:44:25 read : 35 특집/성령의 시대와 교회 공동체 교회는 말씀을 따르는 성령공동체입니다 - 박동현 교수와의 대담- 대담 진행 : 박삼열, 홍순석 기자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보다 잘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 말씀을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교회는 ‘성령’ 하면 강력하거나 초월적이고 다분히 신비적인 체험을 먼저 떠올리는 분위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교회의 급속한 성장도 많이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무엇보다 사도행전, 특히 오순절 성령 사건에 대한 이해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닐까요? 말씀하신 대로 우리들은 대개 성령을 개인적인 체험이나 능력을 소유하는 것과 많이 연결짓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무엇보다 사도행전 2장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 사건은 성령의 체험을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 승천하신 이후 하나의 신앙공동체로서 교회가 본격적으로 태어나는 시점을 이야기한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 사도행전 2장을 근거로 성령에 관한 이야기도 해야 하지만, 교회도 강조를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 본문에서 교회를 이야기할 때는 흔히 42절 이하만 강조합니다. 신약의 성령의 역사는 처음부터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또는 그 중심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즉 42절 이하의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그 이전의 성령강림 사건과 이어지는 흐름 가운데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강림 사건을 너무 개인적인 체험으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또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나는 불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이점에 대해서도 한국교회가 별로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성령 체험을 통해 내가 무슨 말씀을 들었는가 라는 면보다는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어떤 뜨거움이 있느냐에 좀더 비중을 많이 두는 것 같습니다. 또한 성령 체험을 통해 자신이 무엇인가를 들었다고 하면서 굉장히 이상한 말들을 많이 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도행전 2장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성령 받았다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이점이 굉장히 중요한데, 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들이 행한 것은 ‘하나님의 큰 일’(11절)을 선포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특히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체험을 제대로 했다면 본인이 굳이 ‘내가 불 받았다’라는 식의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러이러하게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을 새롭게 알고 확신하고 증거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체험은 이제까지 인간이 듣지 못한 무슨 신비로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이미 적혀 있는 것, 교회 역사가 잘 알고 있는 것, 특히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을 더 확실하고 설득력 있게 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을 체험한 사람은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 곧 모든 인류의 구원이 되는 성경에 계시된 진리를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계시된 성경의 진리와 이미 알고 있는 성경의 내용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명확하게 또 사람의 마음에 강력하게 작용하도록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2장의 성령 체험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하나 생각해 볼 문제는 능력이나 성장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것이 결국 변화라는데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즉 제대로 성령 받아 ‘하나님의 큰 일’을 선포하면,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잘못을 깨닫고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안에서는 종종 성령 때문에 달라진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예전보다 더 나쁘게 달라지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볼 때 결국 우리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한국교회가 사도행전 2장 사건을 흔히 초자연적이거나 신비한 뜨거운 체험으로 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2장을 자세히 보면 성령 받은 사람들이 뜨거운 경험을 했다는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겨우 앞부분에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에게 내렸다는 정도의 표현이 있을 뿐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대부분은 베드로 설교입니다. 성령이 내리셨다는 것은 간단하게 언급했고 간접적으로 술에 취한 사람 같다라는 표현을 했을 뿐이지, 실제 그것을 받은 사람들이 어떤 뜨거운 경험을 했느냐 하는 것에 대한 묘사는 없어요. 이런 점은 신약 전체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구약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 임하면 어떤 상태가 되는지에 대해 기껏 사울이 입신한 경우가 나올 뿐이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뜨거운 것은 없습니다. 뜨거움과 관련해 보아야 할 것은 누가복음 24장인데, 부활하신 주님이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을 만난 사건이 나옵니다. 32절에서 제자들은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뜨거움은 사람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키는 그런 뜨거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꾸 성령에 대해 오해하는 것은 본문을 꼼꼼히 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본문에 나오는 한두 단어를 보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이나 전제들로 으레 그러려니 생각해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즉 우리에게 많은 전제가 있기 때문에 자꾸 그런 식으로 보는 게 아닌가 하는 거죠. 그 중에는 샤머니즘적인 요소도 있겠고, 황금만능주의나 성공주의도 오늘날 큰 영향을 끼치는 전제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이 세상이라는 한계 속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는 초월의 경험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꼭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일반 종교들 속에서도 초월을 추구하는 모습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평상시 상식적으로 안 되는 일을 순간적으로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죠. 성경에도 그와 관련시킬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이죠. 분명히 이것은 얼마나 좋은 말씀인지 모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초월적이시지 않거나, 전능하시지 않다면 진정한 구원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자기 초월 경험이 정당하지 못할 때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온 초월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것과 또한 인간의 힘으로도 어느 정도 해낼 수 있는 몇 가지 초자연적인 경험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특히 요즘은 사회가 너무 답답하니까 불만이 많고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모두가 매우 힘든 상황 속에 놓이게 되니까 특히 서민들은 더욱 공허해 하고 뭔가에 갈급해 합니다. 한 번 제대로 숨쉬고 살고 싶은데 이게 안 되는 거죠. 이렇게 되니까 간단하게 넘어서고 싶은 종교적인 욕구가 강하게 작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초월적인 존재, 신적 존재의 힘을 한순간에 빌려 보고 싶어집니다. 이게 기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면 그리스도인 역시 혼란에 빠지고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비록 나에게는 손해가 있고 고난이 따른다 하더라도 그 말씀을 따라 살겠다고 굳게 다짐하면서 성령의 이끄심을 받기보다는 우선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라는 의식이 더 강해집니다.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사도행전 2장 사건뿐 아니라 교회와 성령의 관계를 보여주는 성경의 다른 본문의 증거들도 있지 않습니까? 교회와 성령의 관계에 있어 또 다른 측면들도 있을 것 같은데요. 사사기에 보면 ‘여호와의 영’에 대해 언급하는 본문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문맥에서 사사나 예언자들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고 말하는 것은 엄밀하게는 개인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사들은 이스라엘이 남의 나라에 지배를 받을 때 이스라엘을 거기서 해방시키려고 그에 대항해서 군사를 일으킨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생각해서입니다. 기드온 같은 사람이나 엘리야, 엘리사 같은 사람도 그렇고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왕이나 예언자같은 특별한 직책을 맡기시기 위해 하나님의 영을 두신 경우입니다. 이것을 지금의 교회에 적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즈음 교회에서 직분자들을 세울 때, 교인들이 모여 직분자들을 뽑는 선거를 하고, 표를 많이 얻으면 당선됐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끝납니다. 그러나 적어도 사사기 본문에 비추어 보면, 선거도 선거지만 직분자에 대한 성령의 보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영감을 달라고 했잖아요. 즉 성령의 정상적인 승계, 곧 성령의 확증 없이는 직책의 승계가 안 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 일은 철저히 성령의 역사 가운데서 진행해야 하는데 요즘은 그것에 대해 별로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요. 결국 이 같은 성령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방금 말씀하신 성령과 교회 안의 직분과 연결해 볼 때, 한국교회 목회 현장은 상당히 심각한 것 같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성령으로 진행되어 간다는 것은 곧 교회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의 몸된 성도들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을의미할 뿐 아니라, 목회 현실에서 교회 안에 직분자들을 세울 때 철저히 성령의 보증을 고려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약의 표현대로라면 성령의 은사를 따라 세워지는 직분으로 움직여지는 교회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점에서 우리의 목회 현장이 이미 너무 많은 양보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비단 집사나 장로를 세울 때뿐 아니라 심지어는 목사 임직에도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두렵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게 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느냐 하는 것의 실제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요? 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은 사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알아야 할 점은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인 스스로가 알 것입니다. 정말 내 욕심을 접어놓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지 스스로가 알아요. 그러므로 교역자 본인부터 당회에서 모든 교회의 과정을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성령의 뜻이 무엇인지를 추구하는 태도가 있어야 하고 아울러서 당회원, 신자 모두에게 그것을 늘 강조해야 합니다. 설교 시간 혹은 교회 공동체 앞에 우리가 “장로님을 선출합니다, 권사님을 뽑습니다”라고 할 때 이것이 정말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성령의 뜻을 따르는 일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강조되거나 전제되지 않고 교역자 자신부터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교인들이 변화되겠습니까? 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측면을 강조하는 오순절 쪽의 교회들은 말씀과 교리를 강조하는 장로교 같은 쪽에 대해 성령의 자유로운 운행과 인도하심을 제한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 같고, 반대로 말씀과 교리를 강조하는 교회 쪽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강조하는 오순절 쪽이 너무 말씀의 기준 없이 자유 방임 쪽으로 가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나타내곤 하는데, 이 둘 사이의 긴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긴장은 요즘에 새로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시대부터 있어 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초기에는 예언 활동과 성령의 역사가 나란히 나타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소위 아모스 같은 문서 예언자들이 등장하면서 달라집니다. 이 문서 예언자 쪽으로 가면 성령과 관련된 표현이 바뀝니다. 예컨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시느니라”라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성령이 임하셨다”라고 하면 되었는데, 그런 성령에 대한 표현들이 문서 예언자들에게 와서 좀 달라집니다. 또 “여호와의 손이 아무개 위에 있다”라는 것 등이지요. 이것은 이미 구약시대에 이미 그런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반영하는 거예요. 초인적인 체험을 자꾸 강조하고 예언의 내용 자체는 경시하게되니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보다는 실제로 그런 체험을 통해 하나님이 들려주신 말씀이 중요하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실은 이 성령을 통해 말씀이 계시되는 것인데도, 인간 편에서는 성령을 통하여 계시되는 말씀을 무시하고 체험 자체만을 생각하게 되다 보니 이제 말씀을 강조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의 계시 자체도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안됩니다. 결국 성령과 말씀이 같이 간다는 것이 사도행전 2장에 선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니까 교회가 부흥하는 것입니다. 성령과 말씀과 부흥은 서로 떼어놓을 수가 없는데, 이걸 다 서로 각각의 것인양 갈라놓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령에 대한 이해와 말씀에 대한 강조, 그리고 부흥에 대한 바램 사이에 균형을 이루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시대 흐름에 따라 한쪽으로 좀더 기울어지기가 쉽습니다. 교회 역사 가운데서도 시대에 따라 조금씩 초점이 달라지고 교정이 되어 왔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한다는 자체도 제한이 있습니다. 성령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는데 사도행전을 보면 교회가 ‘부흥한다’는 내용도 있지만 말씀이 ‘흥왕하여’라는 말도 나옵니다. 다시 말해 성령을 통해서 새롭게 깨우치는 말씀이라는 거죠.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니까 자기의 죄를 보고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고 참으로 회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이 곧 초대 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좀 다른 질문일수도 있지만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령이 불처럼 임했다’고 할 때 이 불의 상징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불’ 이미지는 구약 전통과 상관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임하실 때 불 가운데 임하시는데(18절) 그 전통을 여기 오순절과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유대교에서도 칠칠절을 시내산에서 율법 받은 것과 관련시킵니다. 구약의 유월절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시기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계시하실 때는 어떤 두렵고 영광스럽고 초자연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실 텐데 여기 보면 불같은 것으로 되어 있어요. 불의 혀같이 그리고 이제 실제로 자연 현상에서는 아주 신비스러운 구름과 거기에 광채가 나는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있어요. 옛날 사람들은 어디서나 일반적으로 어떤 성스러움을 표현할 때 그렇지 했겠지요. 한국적인 문화 속에서는 불이라고 하면 우리 인간의 정성을 모으는 지극 정성이나 열정적인 신앙으로 이해되기 쉬운데 그것은 자칫 맹목주의나 맹신주의에 빠져 들어가게 할 우려도 있지 않나 생각되는데요. 불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출애굽기 19장이나 사도행전 2장 같은 데서 말하는 불의 실제적 의미는 감동의 정도를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억제할 수 없는 힘에 사로 잡혔다는 것이지요. 사실 기드온의 경우에도 우리 한글개역판 성경이 사사기 6장 34절에서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라고 점잖게 번역했지만 실제 히브리 원문에 보면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을 옷 입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영이 한 인간을 사로잡아 버린 것이고 완전히 뒤집어엎어 놓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불 이상입니다. 우리 나라 성도들이 표현할 때는 ‘불 받았다’라고 하는데, 사실은 이 불 받은 것이 기드온이 성령을 받은 것에 비해 그 정도가 약합니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이 임해서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개인이나 공동체가 개선되는 사건이 있고 반목하던 사람들이 화목하는 이런 일들 말입니다. 즉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느냐 하는 거죠. 그럴 때 성령 임함은 정당성을 보증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꾸 갈등이 생기고 미움이 있다면 아무리 성령에 대해 말한다 해도 애초의 경험부터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령을 체험했다는 그 순간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삶까지 전체적으로 폭을 넓혀 놓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에 대한 오해가 금방 끓었다 금방 식는 냄비같은 신앙과도 관련이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교수님의 책이나 글들을 보면 성경 본문을 개인적으로 번역하시는 경우가 종종 눈에 띄고, 또 다른 성경 번역본들을 자주 참조하시는 것을 보았는데요, 본문에 대한 교수님의 자세가 남다른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문에 주의하는 자세가 성경이 말하는 성령 이해에 있어서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그 문제에 대해서 저는 ‘설교보다는 본문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말로 요약하고 싶습니다. 즉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그 설교가 본문을 능가할 수는 없잖아요? 이게 지금 우리 나라의 교회들와 목회자들의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본문이 얼마나 드러나느냐 하는 것이지, 본문 해설을 얼마나 잘했느냐가 아니라고 봅니다. 설교 잘한다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본문하고는 상관이 없는 내용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 분들을 아주 위대한 목회자요 설교자로 알려져 있고책도 내지만 성서 신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는 참 염려되는 면이 적지 않아요. 조금은 답답한 말씀일지 모르겠습니다만, 기본 태도가 중요합니다. ‘말씀을 듣겠다’는 태도,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내가 무엇을 끄집어내어,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던 것을 발견해 던져주겠다’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제가 늘 주장하는 내용인데, 설교자도 우선은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심지어는 설교하는 순간에도 설교자 자신은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사람입니다. 심심찮게 어떤 사람들은 자기는 항상 말씀 위에 있는 것처럼 설교합니다. 이런 분들이 목회하는 교회 교인들이 어떻게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에 대한 오해도 근본적으로는 성경 본문에 대한 소홀함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죠. 앞에서 말씀 드렸지만, 우리의 문제는 사도행전 2장을 읽으면서도 성령 임한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에는 별로 관심 없어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의미는 대충 뛰어 넘은 채 교회의 발전만 보는 겁니다. 교회가 어떻게 하면 한순간에 이렇게 커질 수 있을까 하는 거죠. 성경 본문에 대해 소홀히 여기는 태도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겠죠.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내 생각을 앞세우지 않도록 정말 조심해야 해요. 나의 의견이나 전제를 집어넣지 말고 성경에 적힌 대로 읽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구약의 광야 교회로 묘사되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볼 때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금송아지 사건은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순종하는 것에 대해서 어떤 통찰을 주지 않나 생각되는데요? 신약의 교회를 새 언약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이에 상응하는 옛 언약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약의 교회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 형태에 있어서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 곧 광야 교회가 갔던 길이 오늘날 우리 신약 교회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줄 수 있겠죠.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사건의 경우는 백성들이 믿고 따르는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된 현실이 그들에게 아주 심각한 문제로 다가온 것입니다. 즉 지도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하나님 또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여기게 되면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항의한 것이죠.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는 것처럼 믿고 살아가는 것인데, 이게 그리 쉽지 않아요. 오늘 우리 기독교회에서도 목사님이 대단하다든지 교회가 부흥 발전하든지 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종종 교인들이 좌절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좌절하게 되니까 눈에 보이는 것을 찾아 나서죠. 그래서 박사학위 있는 목사님을 모시려고 애쓰고 하나님의 진짜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따져보기도 전에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외형적으로 커지기를 추구하거나 건물 짓는 데 엄청나게 힘을 들이는 경우가 생기는 것 같아요. 술사 발람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다시 그것을 거두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사건이 오늘날 교회의 성령 이해에 혼란을 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당연히 혼란이 오겠죠. 성령의 역사하심이 한시적인 경우도 있고 지속적인 경우도 있고 하여간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여기서 전제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모든 물음에 대해 명쾌하게 대답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이에요. 이미 수십 년 아니면 수백 년 전부터 논란이 되어오고 있지만 아직까지 해결이 나지 않는 주제들이 얼마나 많아요? 모든 논란이 다 해결될 수 없다는, 그래서 참으로 겸손하게 성경 본문을 읽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는 것 같아요. 적지 않은 경우 우리 인간의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과도하게 해결하려다가는 종종 너무 주관적인 이해에 얽매일 수가 있거든요. 참 어렵긴 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기본적으로 예수를 구주로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때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성령에 대한 이해가 너무 다양하고 이것 때문에 신앙의 근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결코 마땅하지 않은 삶이 매우 영적인 것으로 미화 내지는 착각되는 경우들이 잇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명확하게 제시할 필요성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안타깝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런 안타까움을 남겨 놓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과도하게 명쾌한 설명이라는 것에는 항상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명쾌’하다면 그 나머지는 다 감추어져 버려요. 어느 하나가 명쾌하면 다른 것은 다 거짓으로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그래서 그런 안타까움은 주님께서 불완전한 인간에게 그냥 감수하게 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실제로 우리 개인이나 교회가 믿고 살아가는 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 가지고도 큰 문제는 없거든요. 그러니까 많이 몰라서 우리가 못 한다기보다는 어떻게 보면 너무 많이 알려고 하다 보니 안 되는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우리가 싸워야 할 부분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욕심이고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죄성일 것입니다. 그런 안타까움은 그냥 그대로 두고,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분명하게 아는 그것을 좀더 열심히 해 나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로서는 꼭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기본 마음가짐입니다. 내가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다 이해를 못하고 심지어 성령에 관한 교훈도 다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쨌든 나는 교회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성령의 다스림대로 이끌어 가겠다든지 섬기겠다 하는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성경을 연구하고 또 배운다면 실제적으로 많은 문제가 줄어들으리라고 봅니다. 끝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목회자와 온 성도를 포함한 교회가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개혁교회 전통 중에 하나는 말씀 앞에 서는 교회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교역자도 말씀을 듣고 성도들도 기본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겸손한 교회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과 성령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성령에 대해 성경에서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공부를 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이제는 성경공부도 공동체적으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은 주로 목사님들이 성경을 읽고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식으로 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성경을 펴놓고 목사님도 교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봅니다. 성경공부도 공동체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마도 목사 중심이 아닌 성경 중심의 교회 공동체로 교회의 체질을 바꿀 수 있는 틀이 아닐까 해요. 그렇다고 목회자가 손해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과정에서 목회자도 정말 귀한 것들을 많이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귀한 말씀 대단히 감사합니다. 박동현/서울대를 나와 장로회신학대학교(M. Div., Th. M.)와 독일 베를린신학대학(Dr. theol.)에서 공부했으며, 지금은 장로회 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로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소망을 먹고 산다
교회는 하나님의 소망을 먹고 산다 해외특별기고 게르하르트 자우터(조직신학 교수) <번역자의 말> 독일어로는 동일한 말 호프눙(Hoffnung)을 성경이 말하는 의미로 사용될 경우에는 자우터 교수가 옹호하는 개념인 ‘소망’이라는 단어로 번역했고, 인간적 기대나 바람 혹은 소원, 상상을 나타내는 비신학적인 개념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희망’이라는 단어로 번역했다. 자우터 교수는 복잡한 논의를 끌어나가면서도 이 두 가지 구별은 언제나 분명하게 한다. 번역은 본대학에서 자우터 교수의 지도로 박사과정에 있는 천병석 목사가 맡았다. 필자는 최근 한국을 방문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기독교적 소망을 지향하는 필자의 신학적 작업을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그 때 사람들이 종종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왜 소망이 교회에게 그토록 중요한가? 기독교적 믿음에 대해, 그리고 그 믿음이 겉으로 드러나는 데 있어 중요한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은가?” 이에 대해 필자는 단지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벧전3:15). 소망에 대한 이유 이것은 바로 베드로전서 3장 15절 말씀인데, 이 베드로전서는 기독교인들을 위한 기본지침을 가르치는 성경으로서, 배움의 여정에 있어 기초를 놓아 주는 초등학교에 비유할 수 있다. 초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소망에 대한 고백이 최우선적 위치에 있었다. 그들은 오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강렬한 기대 속에 살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우리들에게 전해 준 바에 따르면, 초대 교회의 예배는 하나의 부름 혹은 기도로 마쳤는데, 그것은 팔레스타인 교회에서 쓰던 표현이었다. 곧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마라나 타)!”(고전16:22, 계22:20)라는 표현이다. 기독교인들이 나사렛 예수, 그의 삶, 그의 고난과 죽음, 그의 부활과 승천을 기념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기념은 ‘오시는 분’에 대한 소망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예수님 자신의 명령에 따라 성찬을 거행할 때마다 이 소망은 다시금 되새겨졌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 이 말씀을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니다: “주가 다시 오실 때까지 너희는 만찬을 행하라. 그러면 그 때 비로소 주께서 너희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이보다 오히려 바울의 의중은 이러하다: “주께서는 너희들, 곧 그의 교회 가운데 있다. 하지만 주를 소망하고 전폭적으로 신뢰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그렇게 주께서는 너희 가운데 있는 것이다. 너희는 언제나 당당하게 삶을 헤쳐 나가도 된다. 그것은 너희가 나를 고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은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는 것이 네게 무슨 위로가 되느뇨?”라는 질문(52번)에 이렇게 답한다. “모든 시련과 박해 가운데서도 하늘을 우러러 위로부터 오실 심판자를 기다리는 것은, 그분이 나를 위해 하나님의 심판을 행하시고, 나의 모든 죄과를 도말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 위해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우리 속에 깊이 감추어진 것을 털어놓아야 하는가? 우리로 매일 새출발 할 수 있게 하는 우리의 열정, 즉 삶의 가장 깊은 근원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인가? 많은 것을, 아니 거의 모든 것을, 이를테면 일자리, 건강, 다른 사람들의 지지 등을 빼앗긴 대다수의 사람들은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누구도 내게서 희망을 빼앗을 수는 없어요. 그것은 잃어버릴 수 없는 삶의 힘이지요.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답니다.” 이것은 존중할 만한 용감한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신선한 우유가 들어 있는 냄비에 빠진 두 마리 개구리에 대한 교훈적인 이야기를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다. 한 개구리는 비관적이어서 생각하기를 “이 냄비를 결코 벗어 날 수 없구나. 그렇다면 노력한들 나아질 게 아무것도 없어. 그래봤자 괜히 고통스레 죽게 될 거야” 했다. 그리고는 모든 희망을 포기한 채 빠져 죽고 말았다. 다른 개구리는 낙관적으로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 그런 신념으로부터 그 개구리는 언제나 새로운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그 날 밤 내내 허우적거렸고, 그 결과 그 우유를 버터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그 개구리는 멋진 버터 덩어리 위에 서서, 너끈히 냄비 밖으로 뛰쳐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이야기는 진실을 말하기에는 너무 단순하다. 결코 우리는 우유로 가득 찬 냄비에 빠지는 것도 아니며,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해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다. 우리가 전력을 다해 허우적거리고 목숨을 구하려고 애쓸 때 우리는 대체로 우리보다 약한 존재, 곧 생명을 지닌 다른 존재들을 짓밟는다. 소망은 낙관주의와 같은 말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희망을 잃는다 해도, 그것이 반드시 비관적이고 살고 싶지 않은 태도에 대한 증거는 아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행하심을 두 개구리의 경우에 관련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기껏해야 위험하고 그릇된 사고에 도달하고 만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단순히 ‘성공’과 동일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전서가 기독교인들, 곧 이제 막 세례받은 기독교인들에게 자신들의 소망에 대해 답변하도록 권면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세례와 그리고 새로운 출생과 더불어 그들 안에 들어와 있는 소망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1:3). 이 산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의 권세에서 살려내신 하나님의 능력에 관계된다. 그 소망은 우리의 생사를 하나님의 생명 의지에 붙들어 맨다. 이 소망은 우리의 타고난 천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엇 때문에 살고 죽는지에 대해 질문 받는다면 우리는 대답할 말이 있어야 한다. ‘너희 속에 있는 그 소망’은 우리 안에 잠복해 있어서 우리가 충분히 깊이 우리 내면을 들여다 볼 경우 찾아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이라는 말씀에 대한 신약성경 헬라어 본문은 ‘너희 가운데 있는 소망’이라는 말로도 번역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누가복음 17장 20~21절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의 생애로부터의 한 장면을 기억나게 한다. 곧 “하나님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와 함께 예수님은 그 관심을 자기 자신에게, 즉 우리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어떤 비밀스러운 진리에로 이끄셨다. 그 비밀은 하나님이 자기 안에 현재적이시라는 것과,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시며 모든 인간적인 저항을 뚫고 어떻게 그분의 뜻을 이루시는가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보여진다는 비밀이다. 우리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은 놀라운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숨기어져 있으나 믿는 이들에게, 그리고 소망과 사랑에 대하여 노출되어 있는 분이시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때문에 골로새서에서는 “너희 안에 있는 예수 곧 거룩한 소망(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1:27)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은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의 말씀으로, 그의 성찬으로,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 즉 우리의 절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해 내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고 세상을 위해 우리와 함께 행하시고자 하는 것에로 우리를 개방시키는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 약속 없이는 소망도 없다 우리 안에 이런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없는 자들이 될지도 모른다! 에베소서 2장 12~13절은 가장 또렷하게 그것을 말한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즉 ‘너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부름 받았다.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은 더욱 더 너희에게 가까이 오신다 - 너희에게 소망을 선사하시는 그의 약속을 가지고’라는 말이다. 얼마나 놀랍고, 흥분되고, 초조하게 하는 문장들인가! 인간과 더불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언약, 즉 하나님의 약속이 그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위탁되었는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낯설 뿐이며, 그런 사람은 소망 없이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소망 없음!’이라는 판단 때문에 사람이라면 누구나 “희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부인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여기서의 희망은 ‘미래로’ 향한다는 의미에서의 희망이며, 미래는 동경과 불안 속에서 상상되는 미래에로 향한다는 의미에서 그들 자신의 미래인 것이다. 그러나 이 희망은 이중적 의미가 있다. 즉 이 희망은 미래에 확증될 수도 있고 혹은 실망으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희망하는 미래란 지금의 우리에겐 아직도 닫혀 있는 비밀스런 상자와 같으며, 그 희망은 모든 기대했던 것을 넘어서는 놀라운 것일 수도 있으나, 또한 예상하지 못했던 참담한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런 불확실성으로는 성경이 말하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이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소망에 더 이상 견고하게 서 있지 않는다면 그 불확실성은 도리어 우리를 위협하게 된다. 교회의 기원에는 엄청난 기적에 대한 놀라움이 자리잡고 있다. 그 기적은 사람들이 신뢰가운데 소망할 수 있는 것인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해도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다: 하나님이 그의 의를 나타내시는 약속, 그 화해를 통해 화평을 이루신다는 약속, 우리는 그와의 사귐으로 불안한 우리 삶의 한가운데서 우리의 고향과 안식을 찾는다는 약속,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죽음으로 폐기될 수 없는 그와의 영원한 삶의 연합을 주시리라는 약속, 결국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한 분인가를 알게 된다는 약속, 그리고 우리가 그 앞에 불림을 받을 때에 마침내 우리 자신이 얼마나 진실한지 알게 된다는 약속이다. 이런 다양한 소망 가운데서만 교회는 존재할 수 있고, 생동적일 수 있다. 이 소망은 교회에 친숙한 것인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우리 세계의 재앙에 대해 방어막을 치는 교회의 소유물로서가 아니라, 온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실, 오시는 분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보증으로서 그러한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은 당연히 우리 자신의 희망, 즉 기껏해야 우리의 죽음과 더불어 소멸될 우리 삶의 활력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 우리 인간의 기질이나 본성에게는 낯선 것이며, 인간 밖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이 소망은 언제나 놀라게 하는 소망이며, 하나님을 향해 우리를 열어서 그의 미래의 길로 출발시키는 그런 소망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약속들을 부단히 환기시키지 않는다면, 자기 스스로에게만 골몰할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결국 무력해 질 것이다. 그의 소망에 대한 깨어있음이 없다면 교회는 하나님께 낯설게 될 것이고, 당연히 하나님 없는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인간적 기대들과 맞서 싸우는 소망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은 우리를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사귐인 교회에로 인도하며,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다 준다. 이 소망은 하나님을 망각함과 그로 인한 소망 없음에서 생겨나는 우리의 타성에 맞서 싸우며, 우리의 천성적인 기대들과, 우리의 살려고 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살아남으려는 의지와, 우리의 완고한 고집과 그리고 우리가 행복하게 되리라고 희망적으로 상상하는 미래에 대한 갈망과도 논쟁을 벌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평생 동안 배워야만 하는 것이며, 또한 그 배움은 극히 쓰라린 과정일 수도 있는 것이다. 창세기 15장 1~6절의 아브라함 이야기가 이미 그 사실을 말해 준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알지 못할 먼 곳으로 왔다.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주실 그 땅에서, 그에게 후손을 주시고, 그로 큰 민족의 조상으로 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장막에서 잠 못 이루며 뒤척이던 어느 날 밤 그에게 회의가 생겼다. 그는 이미 아주 늙었고, 그의 아내는 오래 전부터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그에게 아들이, 상속자가 선사될 수 있겠는가? ‘내가 세상을 떠나면, 지금까지 내가 이뤄놓은 것은 뭐가 되나? 도대체 이 나이에도 내 몸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그는 이 혼잣말과 더불어 자기의 주어진 가능성들의 주변을 맴돌았고, 이로 인해 스스로 자기자신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그의 큰 머슴을 입양하여 자기의 상속자로 삼을 것을 궁리한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에게는 자기 스스로 해결을 보아야만 할 어떤 약속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소망 없는, 그래서 당연히 ‘하나님 없는 혼잣말’로부터 하나님은 그를 이끌어 내신다. 하나님은 장막 밖으로 그를 부르시고, 그가 지으신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게 하시고는 셀 수 있나 보라고 주문하신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어쩔 수 없이 벙어리가 되어야만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러한 침묵에서 소망이 잉태된다. 이 소망으로 아브라함은 자기자신의 기대와 근심들로부터 눈을 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이 소망의 침묵을 하나님은 신앙의 응답으로 간주한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브라함의 긍정으로 간주하신다. 그리고 이 긍정과 더불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닻을 내리는 것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소망하는 것을 배웠는지를 말해 주는 이 이야기를 수용했다. 그리고 로마서 4장 18절에 기록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롬4:18). 바울은 자기 안에 있고, 자기를 그 자신의 가능성들과 묶어주는 희망에 맞서 싸워야 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에게 친숙하고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이런 희망은 하나님만 신뢰하고, 자기를 하나님의 행하심에 연결시키는 소망에 대립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은, 바울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언제나 골고다의 십자가 아래, 십자가에 달린 분의 부활절 아침 무덤가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기서 행하시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4:17). 만일 누가 하나님을 실제로 소망한다면 이것은 죽은 자의 부활의 기적과 같은 일이다. 이런 살아 있는 소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얽매여 있는 많은 것들로부터 풀려나야만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기대는 실제로 우리의 마음을 열게 하지 못하고, 또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피조물이 지닌 아픔과 기쁨에로 개방시키지 못한다. 우리의 기대는 우리 자신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것들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우리가 참으로 소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런 기대들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 ‘소망으로’라는 말은 알지 못하는 미래라는 시간에로의 독자적인 운동이 결코 아니다. ‘소망에로’는 하나님의 현실성 혹은 하나님의 확신성에로의 운동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소망에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소유하고 있고 기대하기 때문에 나의 삶을 지탱하게 해 준다고 약속하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낸 희망이 지닌 저항과 싸워야 하고 이겨내야만 한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병든 아들을 둔 회의적인 아버지가 - 그에게 예수님은 분명한 믿음을 요구한다 - 예수님에게 한 이 간구(막9:24)는, 아브라함과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달리 표현되고 더욱 첨예화되어야 한다: “내가 믿는다고 한다면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위해 나의 희망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이런 소망을 우리 안에 두실 수 있고 우리 안에 ‘불러 일깨울’ 수 있는데, - 이는 마치 우리 안에 잠재된 것이어서 일깨워 져야만 하는 것처럼, 단지 ‘깨울’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은 오히려 죽은 자의 부활과 같은 것이다. 즉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고 그분의 심판(판단) 아래 두지 않은 우리들의 기대들과 더불어 우리 자신에게와 다른 이들에게 저지른 자기 파멸로부터의 부활과 같은 것이다. 단지 하나님만이 자신 곧 하나님의 행하심에 여지를 제공하는 소망을 우리 안에 불러 일깨우실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우리도 거기에 철저히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불림 받게 되고, 우리의 기대들과 염려들 그리고 우리의 갈망과 그와 결부된 불안들과 옥신각신하는 우리의 혼잣말들로부터 불려 나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둘러싸고 돌아가는, 그와 동시에 우리 자신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이 순환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는 뭔가를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야말로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이다.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을 향해 열어 주시며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하시는 분이다: “나의 희망은 내게서 모든 믿음을 빼앗아 갑니다 - 나는 단지 소망함으로만 믿을 수 있습니다. 나는 진실로 하나님만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 내가 품고 있는 희망은 전혀 이런 소망에 아무런 기초도 마련해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나는 내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게임을 하고 있으며, 이 게임은 내 희망을 인하여 단지 회의적으로 그리고 종종 절망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를 말하게 되는 데, 그것은 이 두 가지 사이에 서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 이며, 이 약속은 이런 운동의 근거이지만 또한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호소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사이’에서 신앙의 기적이 일어난다: 기대와 맞서는 소망. 이 소망은 아무도 ‘가질’ 수 없다. 우리 인간 안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품고 있는 희망은, 그들에게와 그들을 통해 일어나게 될 모든 것들을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바뀌어 져야 한다. 그들에게서 희망을 빼앗아 가버리거나, 그들에게 단순히 다른 소망을 전해 주거나 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그들에게 일러주심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 즉 하나님이 이 역사 속에 성취하시고자 하는 것은 그들 없이도 아니며, 그렇다고 그들의 가능성들을 잘 이용하게 하는 방식으로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준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소망과는 대립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소망함은 기도함을 의미한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소망하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이런 자세는 기도에서 표현되는데 탄원, 간구와 중보기도, 찬양과 감사가 그것이다. 하나님을 소망한다는 뜻은 그분을 기도 가운데 부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자신을 알려주신 대로 부른다는 것이다. 절망적인 탄원에 못지 않게 절실한 간구에서, 기도자에게 이 소망이 꼭 의식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망 없이는 누구도 진실되게 기도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도자가 고려할 수 있는 ‘자신의’ 희망이 아니다. 우리는 소망 가운데에서만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이 침묵하는 듯이 보이고 우리에게 멀리 있는 듯이 보이는 바로 그곳에서 자신을 내보이시는 그 소망 안에서, 우리에게 당신이 뜻하시는 바를 보이시고, 소망 안에서 우리를 당신의 뜻에로 이끌어 들이신다. 감사 기도는 성취된 소망에 대한 표현, 즉 하나님의 행하심에 화답할 수 있고 더 이상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이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은, 기도하는 사람을 이미 사로잡고 있는 하나님의 행하심에서 드러나는데, 비록 그 사람이 이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해도 그러하다. 소망은 여하간 그 가장 내적이고 영적인 핵심에 있어서 - 바로 ‘기대에 맞서는 소망’에서 보듯-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인식과 경외가 여러 번 교차되는 과정이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은 하나님의 현존에 직면한 떨림으로부터, 그의 약속의 말씀을 들음으로부터 생겨난다. 소망은 하나님이 인간들을 엄습하시는 것, 자신의 운명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을 실제로 거기서, 즉 그들 자신의 퇴행적 혹은 진보적인 관점들로 인해 스스로 박제화되고 고착되어 있는 곳에서 만나시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의 오심은 이런 폐쇄성을 열어 젖히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가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사귐, 즉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교회는 단지 이런 소망으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다. 한번은 예수님이 질문을 받았다: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 “오실 그 이” 혹은 “오시는 분,”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세계에 가져오는 메시아에 대한 당시의 일반적 표현이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는 어떤 대답을 하려느냐? 너희는 다른 이를 기다리느냐, 아니면 나를 기다리느냐?”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교회는 소망 가운데 있는 교회이고, 교회의 소망의 고백을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 알지 못하면서도 기다리고 있다. 바로 많은 기대와 두려움으로 꽉 찬 새 천년으로 진입하고 있는 지금 말이다. 게르하르트 자우터(G. Sauter)/ 튀빙엔과 괴팅엔대학에서 공부했으며, 괴팅엔과 마인츠대학 교수를 거침
교회는 하나님의 소망을 먹고 산다
교회는 하나님의 소망을 먹고 산다 2002-01-30 09:43:31 read : 29 해외특별기고 교회는 하나님의 소망을 먹고 산다 게르하르트 자우터/ 조직신학 교수 <번역자의 말> 독일어로는 동일한 말 호프눙(Hoffnung)을 성경이 말하는 의미로 사용될 경우에는 자우터 교수가 옹호하는 개념인 ‘소망’이라는 단어로 번역했고, 인간적 기대나 바람 혹은 소원, 상상을 나타내는 비신학적인 개념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희망’이라는 단어로 번역했다. 자우터 교수는 복잡한 논의를 끌어나가면서도 이 두 가지 구별은 언제나 분명하게 한다. 번역은 본대학에서 자우터 교수의 지도로 박사과정에 있는 천병석 목사가 맡았다. 필자는 최근 한국을 방문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기독교적 소망을 지향하는 필자의 신학적 작업을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그 때 사람들이 종종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왜 소망이 교회에게 그토록 중요한가? 기독교적 믿음에 대해, 그리고 그 믿음이 겉으로 드러나는 데 있어 중요한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은가?” 이에 대해 필자는 단지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벧전3:15). 소망에 대한 이유 이것은 바로 베드로전서 3장 15절 말씀인데, 이 베드로전서는 기독교인들을 위한 기본지침을 가르치는 성경으로서, 배움의 여정에 있어 기초를 놓아 주는 초등학교에 비유할 수 있다. 초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소망에 대한 고백이 최우선적 위치에 있었다. 그들은 오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강렬한 기대 속에 살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우리들에게 전해 준 바에 따르면, 초대 교회의 예배는 하나의 부름 혹은 기도로 마쳤는데, 그것은 팔레스타인 교회에서 쓰던 표현이었다. 곧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마라나 타)!”(고전16:22, 계22:20)라는 표현이다. 기독교인들이 나사렛 예수, 그의 삶, 그의 고난과 죽음, 그의 부활과 승천을 기념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기념은 ‘오시는 분’에 대한 소망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예수님 자신의 명령에 따라 성찬을 거행할 때마다 이 소망은 다시금 되새겨졌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 이 말씀을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니다: “주가 다시 오실 때까지 너희는 만찬을 행하라. 그러면 그 때 비로소 주께서 너희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이보다 오히려 바울의 의중은 이러하다: “주께서는 너희들, 곧 그의 교회 가운데 있다. 하지만 주를 소망하고 전폭적으로 신뢰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그렇게 주께서는 너희 가운데 있는 것이다. 너희는 언제나 당당하게 삶을 헤쳐 나가도 된다. 그것은 너희가 나를 고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은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는 것이 네게 무슨 위로가 되느뇨?”라는 질문(52번)에 이렇게 답한다. “모든 시련과 박해 가운데서도 하늘을 우러러 위로부터 오실 심판자를 기다리는 것은, 그분이 나를 위해 하나님의 심판을 행하시고, 나의 모든 죄과를 도말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 위해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우리 속에 깊이 감추어진 것을 털어놓아야 하는가? 우리로 매일 새출발 할 수 있게 하는 우리의 열정, 즉 삶의 가장 깊은 근원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인가? 많은 것을, 아니 거의 모든 것을, 이를테면 일자리, 건강, 다른 사람들의 지지 등을 빼앗긴 대다수의 사람들은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누구도 내게서 희망을 빼앗을 수는 없어요. 그것은 잃어버릴 수 없는 삶의 힘이지요.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답니다.” 이것은 존중할 만한 용감한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신선한 우유가 들어 있는 냄비에 빠진 두 마리 개구리에 대한 교훈적인 이야기를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다. 한 개구리는 비관적이어서 생각하기를 “이 냄비를 결코 벗어 날 수 없구나. 그렇다면 노력한들 나아질 게 아무것도 없어. 그래봤자 괜히 고통스레 죽게 될 거야” 했다. 그리고는 모든 희망을 포기한 채 빠져 죽고 말았다. 다른 개구리는 낙관적으로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 그런 신념으로부터 그 개구리는 언제나 새로운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그 날 밤 내내 허우적거렸고, 그 결과 그 우유를 버터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그 개구리는 멋진 버터 덩어리 위에 서서, 너끈히 냄비 밖으로 뛰쳐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이야기는 진실을 말하기에는 너무 단순하다. 결코 우리는 우유로 가득 찬 냄비에 빠지는 것도 아니며,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해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다. 우리가 전력을 다해 허우적거리고 목숨을 구하려고 애쓸 때 우리는 대체로 우리보다 약한 존재, 곧 생명을 지닌 다른 존재들을 짓밟는다. 소망은 낙관주의와 같은 말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희망을 잃는다 해도, 그것이 반드시 비관적이고 살고 싶지 않은 태도에 대한 증거는 아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행하심을 두 개구리의 경우에 관련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기껏해야 위험하고 그릇된 사고에 도달하고 만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단순히 ‘성공’과 동일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전서가 기독교인들, 곧 이제 막 세례받은 기독교인들에게 자신들의 소망에 대해 답변하도록 권면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세례와 그리고 새로운 출생과 더불어 그들 안에 들어와 있는 소망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1:3). 이 산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의 권세에서 살려내신 하나님의 능력에 관계된다. 그 소망은 우리의 생사를 하나님의 생명 의지에 붙들어 맨다. 이 소망은 우리의 타고난 천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엇 때문에 살고 죽는지에 대해 질문 받는다면 우리는 대답할 말이 있어야 한다. ‘너희 속에 있는 그 소망’은 우리 안에 잠복해 있어서 우리가 충분히 깊이 우리 내면을 들여다 볼 경우 찾아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이라는 말씀에 대한 신약성경 헬라어 본문은 ‘너희 가운데 있는 소망’이라는 말로도 번역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누가복음 17장 20~21절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의 생애로부터의 한 장면을 기억나게 한다. 곧 “하나님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와 함께 예수님은 그 관심을 자기 자신에게, 즉 우리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어떤 비밀스러운 진리에로 이끄셨다. 그 비밀은 하나님이 자기 안에 현재적이시라는 것과,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시며 모든 인간적인 저항을 뚫고 어떻게 그분의 뜻을 이루시는가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보여진다는 비밀이다. 우리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은 놀라운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숨기어져 있으나 믿는 이들에게, 그리고 소망과 사랑에 대하여 노출되어 있는 분이시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때문에 골로새서에서는 “너희 안에 있는 예수 곧 거룩한 소망(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1:27)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은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의 말씀으로, 그의 성찬으로,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 즉 우리의 절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해 내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고 세상을 위해 우리와 함께 행하시고자 하는 것에로 우리를 개방시키는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 약속 없이는 소망도 없다 우리 안에 이런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없는 자들이 될지도 모른다! 에베소서 2장 12~13절은 가장 또렷하게 그것을 말한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즉 ‘너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부름 받았다.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은 더욱 더 너희에게 가까이 오신다 - 너희에게 소망을 선사하시는 그의 약속을 가지고’라는 말이다. 얼마나 놀랍고, 흥분되고, 초조하게 하는 문장들인가! 인간과 더불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언약, 즉 하나님의 약속이 그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위탁되었는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낯설 뿐이며, 그런 사람은 소망 없이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소망 없음!’이라는 판단 때문에 사람이라면 누구나 “희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부인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여기서의 희망은 ‘미래로’ 향한다는 의미에서의 희망이며, 미래는 동경과 불안 속에서 상상되는 미래에로 향한다는 의미에서 그들 자신의 미래인 것이다. 그러나 이 희망은 이중적 의미가 있다. 즉 이 희망은 미래에 확증될 수도 있고 혹은 실망으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희망하는 미래란 지금의 우리에겐 아직도 닫혀 있는 비밀스런 상자와 같으며, 그 희망은 모든 기대했던 것을 넘어서는 놀라운 것일 수도 있으나, 또한 예상하지 못했던 참담한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런 불확실성으로는 성경이 말하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이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소망에 더 이상 견고하게 서 있지 않는다면 그 불확실성은 도리어 우리를 위협하게 된다. 교회의 기원에는 엄청난 기적에 대한 놀라움이 자리잡고 있다. 그 기적은 사람들이 신뢰가운데 소망할 수 있는 것인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해도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다: 하나님이 그의 의를 나타내시는 약속, 그 화해를 통해 화평을 이루신다는 약속, 우리는 그와의 사귐으로 불안한 우리 삶의 한가운데서 우리의 고향과 안식을 찾는다는 약속,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죽음으로 폐기될 수 없는 그와의 영원한 삶의 연합을 주시리라는 약속, 결국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한 분인가를 알게 된다는 약속, 그리고 우리가 그 앞에 불림을 받을 때에 마침내 우리 자신이 얼마나 진실한지 알게 된다는 약속이다. 이런 다양한 소망 가운데서만 교회는 존재할 수 있고, 생동적일 수 있다. 이 소망은 교회에 친숙한 것인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우리 세계의 재앙에 대해 방어막을 치는 교회의 소유물로서가 아니라, 온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실, 오시는 분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보증으로서 그러한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은 당연히 우리 자신의 희망, 즉 기껏해야 우리의 죽음과 더불어 소멸될 우리 삶의 활력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 우리 인간의 기질이나 본성에게는 낯선 것이며, 인간 밖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이 소망은 언제나 놀라게 하는 소망이며, 하나님을 향해 우리를 열어서 그의 미래의 길로 출발시키는 그런 소망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약속들을 부단히 환기시키지 않는다면, 자기 스스로에게만 골몰할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결국 무력해 질 것이다. 그의 소망에 대한 깨어있음이 없다면 교회는 하나님께 낯설게 될 것이고, 당연히 하나님 없는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인간적 기대들과 맞서 싸우는 소망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은 우리를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사귐인 교회에로 인도하며,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다 준다. 이 소망은 하나님을 망각함과 그로 인한 소망 없음에서 생겨나는 우리의 타성에 맞서 싸우며, 우리의 천성적인 기대들과, 우리의 살려고 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살아남으려는 의지와, 우리의 완고한 고집과 그리고 우리가 행복하게 되리라고 희망적으로 상상하는 미래에 대한 갈망과도 논쟁을 벌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평생 동안 배워야만 하는 것이며, 또한 그 배움은 극히 쓰라린 과정일 수도 있는 것이다. 창세기 15장 1~6절의 아브라함 이야기가 이미 그 사실을 말해 준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알지 못할 먼 곳으로 왔다.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주실 그 땅에서, 그에게 후손을 주시고, 그로 큰 민족의 조상으로 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장막에서 잠 못 이루며 뒤척이던 어느 날 밤 그에게 회의가 생겼다. 그는 이미 아주 늙었고, 그의 아내는 오래 전부터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그에게 아들이, 상속자가 선사될 수 있겠는가? ‘내가 세상을 떠나면, 지금까지 내가 이뤄놓은 것은 뭐가 되나? 도대체 이 나이에도 내 몸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그는 이 혼잣말과 더불어 자기의 주어진 가능성들의 주변을 맴돌았고, 이로 인해 스스로 자기자신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그의 큰 머슴을 입양하여 자기의 상속자로 삼을 것을 궁리한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에게는 자기 스스로 해결을 보아야만 할 어떤 약속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소망 없는, 그래서 당연히 ‘하나님 없는 혼잣말’로부터 하나님은 그를 이끌어 내신다. 하나님은 장막 밖으로 그를 부르시고, 그가 지으신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게 하시고는 셀 수 있나 보라고 주문하신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어쩔 수 없이 벙어리가 되어야만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러한 침묵에서 소망이 잉태된다. 이 소망으로 아브라함은 자기자신의 기대와 근심들로부터 눈을 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이 소망의 침묵을 하나님은 신앙의 응답으로 간주한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브라함의 긍정으로 간주하신다. 그리고 이 긍정과 더불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닻을 내리는 것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소망하는 것을 배웠는지를 말해 주는 이 이야기를 수용했다. 그리고 로마서 4장 18절에 기록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롬4:18). 바울은 자기 안에 있고, 자기를 그 자신의 가능성들과 묶어주는 희망에 맞서 싸워야 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에게 친숙하고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이런 희망은 하나님만 신뢰하고, 자기를 하나님의 행하심에 연결시키는 소망에 대립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은, 바울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언제나 골고다의 십자가 아래, 십자가에 달린 분의 부활절 아침 무덤가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기서 행하시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4:17). 만일 누가 하나님을 실제로 소망한다면 이것은 죽은 자의 부활의 기적과 같은 일이다. 이런 살아 있는 소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얽매여 있는 많은 것들로부터 풀려나야만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기대는 실제로 우리의 마음을 열게 하지 못하고, 또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피조물이 지닌 아픔과 기쁨에로 개방시키지 못한다. 우리의 기대는 우리 자신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것들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우리가 참으로 소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런 기대들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 ‘소망으로’라는 말은 알지 못하는 미래라는 시간에로의 독자적인 운동이 결코 아니다. ‘소망에로’는 하나님의 현실성 혹은 하나님의 확신성에로의 운동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소망에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소유하고 있고 기대하기 때문에 나의 삶을 지탱하게 해 준다고 약속하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낸 희망이 지닌 저항과 싸워야 하고 이겨내야만 한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병든 아들을 둔 회의적인 아버지가 - 그에게 예수님은 분명한 믿음을 요구한다 - 예수님에게 한 이 간구(막9:24)는, 아브라함과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달리 표현되고 더욱 첨예화되어야 한다: “내가 믿는다고 한다면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위해 나의 희망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이런 소망을 우리 안에 두실 수 있고 우리 안에 ‘불러 일깨울’ 수 있는데, - 이는 마치 우리 안에 잠재된 것이어서 일깨워 져야만 하는 것처럼, 단지 ‘깨울’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은 오히려 죽은 자의 부활과 같은 것이다. 즉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고 그분의 심판(판단) 아래 두지 않은 우리들의 기대들과 더불어 우리 자신에게와 다른 이들에게 저지른 자기 파멸로부터의 부활과 같은 것이다. 단지 하나님만이 자신 곧 하나님의 행하심에 여지를 제공하는 소망을 우리 안에 불러 일깨우실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우리도 거기에 철저히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불림 받게 되고, 우리의 기대들과 염려들 그리고 우리의 갈망과 그와 결부된 불안들과 옥신각신하는 우리의 혼잣말들로부터 불려 나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둘러싸고 돌아가는, 그와 동시에 우리 자신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이 순환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는 뭔가를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야말로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이다.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을 향해 열어 주시며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하시는 분이다: “나의 희망은 내게서 모든 믿음을 빼앗아 갑니다 - 나는 단지 소망함으로만 믿을 수 있습니다. 나는 진실로 하나님만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 내가 품고 있는 희망은 전혀 이런 소망에 아무런 기초도 마련해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나는 내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게임을 하고 있으며, 이 게임은 내 희망을 인하여 단지 회의적으로 그리고 종종 절망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를 말하게 되는 데, 그것은 이 두 가지 사이에 서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 이며, 이 약속은 이런 운동의 근거이지만 또한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호소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사이’에서 신앙의 기적이 일어난다: 기대와 맞서는 소망. 이 소망은 아무도 ‘가질’ 수 없다. 우리 인간 안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품고 있는 희망은, 그들에게와 그들을 통해 일어나게 될 모든 것들을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바뀌어 져야 한다. 그들에게서 희망을 빼앗아 가버리거나, 그들에게 단순히 다른 소망을 전해 주거나 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그들에게 일러주심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 즉 하나님이 이 역사 속에 성취하시고자 하는 것은 그들 없이도 아니며, 그렇다고 그들의 가능성들을 잘 이용하게 하는 방식으로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준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소망과는 대립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소망함은 기도함을 의미한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소망하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이런 자세는 기도에서 표현되는데 탄원, 간구와 중보기도, 찬양과 감사가 그것이다. 하나님을 소망한다는 뜻은 그분을 기도 가운데 부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자신을 알려주신 대로 부른다는 것이다. 절망적인 탄원에 못지 않게 절실한 간구에서, 기도자에게 이 소망이 꼭 의식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망 없이는 누구도 진실되게 기도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도자가 고려할 수 있는 ‘자신의’ 희망이 아니다. 우리는 소망 가운데에서만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이 침묵하는 듯이 보이고 우리에게 멀리 있는 듯이 보이는 바로 그곳에서 자신을 내보이시는 그 소망 안에서, 우리에게 당신이 뜻하시는 바를 보이시고, 소망 안에서 우리를 당신의 뜻에로 이끌어 들이신다. 감사 기도는 성취된 소망에 대한 표현, 즉 하나님의 행하심에 화답할 수 있고 더 이상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이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은, 기도하는 사람을 이미 사로잡고 있는 하나님의 행하심에서 드러나는데, 비록 그 사람이 이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해도 그러하다. 소망은 여하간 그 가장 내적이고 영적인 핵심에 있어서 - 바로 ‘기대에 맞서는 소망’에서 보듯-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인식과 경외가 여러 번 교차되는 과정이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은 하나님의 현존에 직면한 떨림으로부터, 그의 약속의 말씀을 들음으로부터 생겨난다. 소망은 하나님이 인간들을 엄습하시는 것, 자신의 운명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을 실제로 거기서, 즉 그들 자신의 퇴행적 혹은 진보적인 관점들로 인해 스스로 박제화되고 고착되어 있는 곳에서 만나시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의 오심은 이런 폐쇄성을 열어 젖히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가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사귐, 즉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교회는 단지 이런 소망으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다. 한번은 예수님이 질문을 받았다: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 “오실 그 이” 혹은 “오시는 분,”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세계에 가져오는 메시아에 대한 당시의 일반적 표현이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는 어떤 대답을 하려느냐? 너희는 다른 이를 기다리느냐, 아니면 나를 기다리느냐?”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교회는 소망 가운데 있는 교회이고, 교회의 소망의 고백을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 알지 못하면서도 기다리고 있다. 바로 많은 기대와 두려움으로 꽉 찬 새 천년으로 진입하고 있는 지금 말이다. 게르하르트 자우터(G. Sauter)/ 튀빙엔과 괴팅엔대학에서 공부했으며, 괴팅엔과 마인츠대학 교수를 거침.
교회와 섬김: 교회의 본질로서 섬김
교회와 섬김: 교회의 본질로서 섬김 2002-01-30 09:45:08 read : 102 -------------------------------------------------------------------------------- 교회와 섬김: 교회의 본질로서 섬김 김옥순(안동교회 부목사) I. 들어가는 말 한국 개신교는 개헉교회의 전통에 서 있는 교회로서 이미 과거에 개혁된 교회의 전통과 함께 끊임없이 개혁되고 개혁되어 가는 교회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는 한국교회가 현재도 개혁에로 요청받고 있음과 갱신에로 또한 도전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개혁과 갱신은 한국교회가 틀 다시 짜기와 함께 다시 새로워져야 함에로의 도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새로워진다는 것은 현재 낡아서 버려야 할 것이 있음을 전제로 그것이 버린 바 되고 고쳐져서 다시 쓸모 있게 되는 질적 변화를 의미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다시 태어남이다. 이 거듭남이란 중생인 바, 회개와 돌이킴에 의해 따라오는 결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교회가 갱신되어야 한다는 것은 회개와 돌이킴이 있어야 함을 뜻한다고 하겠다.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기도로서의 회개는 돌이킴의 증거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현재의 잘못된 점들을 지양하고 보다 더 좋게 만드는 일을 지향하는 돌이킴의 행동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그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높이 평가받을 만한 양적 성장을 이룩해왔다.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교회가 그의 양적 성장에 비해 질적인 성숙이 결여되어 왔다는 지적이 있기도하다. 이때 질적 성숙에 대한 개념 정의가 구체적으로 논의되어야 하겠으나 필자는 이 개념을 교회의 섬김의 관점에서 정의하는 바, 교회는 그의 본질적인 섬김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질적으로 성숙하는 참 교회를 이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교회의 질적 성숙은 교회가 섬기는 삶을 사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국교회의 질적 성숙을 위한 갱신에로의 요청은 곧 섬기는 교회로의 요청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교회의 틀 다시 짜기에 대한 요청은 그의 질적 성숙을 위한 구조에 대한 도전이다. 그 동안의 한국교회의 틀은 양적 성장을 위해 만들어진 틀로 볼 수 있으며, 이는 한국사회의 변화와 무관할 수 없다 하겠다. 한국사회의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추구해온 물량주의와 경제 성장주의를 위한 틀은 강자지배의 논리에 의한 수직구조다. 여기서는 힘있는 자들이 으뜸이 되어 지배하고 군림한다. 한국교회 안에서도 크게 다르다고 보기 어려운 구조는 교회 안의 물량주의와 성공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경쟁의 틀이며 이는 결과적으로 군림하는 교회의 양태로 나타날 수 있다. 한국교회가 다시 짜는 틀은 경쟁하는 틀을 극복할 수 있는 구조여야 한다. 그것은 소수의 이익을 위하는 지배구조가 아닌 함께 더불어 사는 평등구조여야 한다. 평등구조는 섬김 속에서 함께 사는 공동체의 구조다. 이러한 구조를 통해 한국교회는 질적으로 성숙해갈 수 있으며 섬기는 교회의 양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다시 짜는 틀은 섬김의 원리에 의한 서로가 함께 사는 틀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섬기는 삶의 원리를 위한 기초를 놓아보려고 한다. 이를 위한 접근방법으로는 성서적이고도 신학적인 전거에 기초하는 것과 관련하는 것으로만 한정하기로 한다. II. 담는 내용들 먼저,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함께 사는 원리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선 기독교인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동시에 하느님, 예수,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산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으로 예수를 섬겼고 또한 인간을 섬기신다. 예수는 자기를 비우는 순종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생명을 내주기까지 인간을 섬기셨다. 성령은 하느님과 예수로부터 섬김을 받고 또한 그들을 섬기며, 탄식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인간과 피조물 전체를 돌보고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는 데까지 섬기신다. 이에 상응하여 기독교인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고 성령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요청 받는다. 이러한 요청적 삶은 기독교인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와 섬김을 통해 함께 사는 공동체적 관계의 삶을 유비적으로 나타내며 이 세상에서 인간들의 관계 가운데서 살아야 함을 의미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섬김의 원리를 통한 함께 사는 삶의 근거를 성서 속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1. 성서 속에서 섬김과 관련되는 단어들 1) 신약성서 속의 단어들 우리말로 사용되는 '섬김'은 동사형 '섬기다'에서 온 명사적 쓰임으로서 그 의미는 일반적으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받드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명사형 '섬김'과 동사형 '섬기다'의 쓰임을 신약성서 속에서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먼저, 헬라어 동사 '섬기다' (diakonein)는 신약성서 속에서 37회 쓰였고, 명사인 '섬김 또는 일'(diakonia)의 사용은 34회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명사로서 '종 또는 섬기는 자, 일꾼'(diakonos)으로 29회 사용되어 우리말의 섬김과 관련된 것이 전체적으로 100회 사용되었다. 신약성서에서 명사형(diakonia, diakonos)과 동사형(diakonein)의 쓰임을 본문별로 구분해보면, 공관복음에서는 거의 동사형이 사용되었고 단지 누가복음(눅 10:40)에서 명사형 'diakonia'가 나온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을 서신 가운데 대부분은 명사형 'diakonia'와 'diakonos'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명사적 또는 동사적 사용법에 따라 다양한 강조점과 각각의 차이 있는 뉘앙스를 가진다. 신약성서 가운데 섬김과 관련하는 용어의 의미를 살펴본다면, 먼저 동사 '섬기다' (diakonein)에 관해서이다. 이 말은 신약시대 이전 그리스 주변에서 오랫동안 세속적인 의미에서 '식탁에서 시중들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여기로부터 파생되는 보다 광범위한 그 의미는 생명에 관건이 되는 일을 하는 것으로서 그 범위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넓은 분야까지도 포괄하는 생계부양의 의미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바을 서신에서 쓰이고 있는 명사형 'diakonos'는 바울이 자신의 사도적 직무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하였고, 'diakonia'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에 대한 뜻으로도 표현되었다. 그런데 명사의 쓰임인 섬김(diakonia)은 그리스 헬라 세계에 있어서는 거의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 사고에서 섬김은 굴종적인 행동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증거로는 구약성서를 그리스말로 번역한 <칠십인역>(Septuaginta LXX)에 잘 나타나고 있다. 즉 구약성서에서 자주 사용된 '섬기다', '섬김', '종' 등의 단어들에 비해서 <칠십인역>에는 그러한 말들이 그리스말의 'diakonein'이나 'diakonia' 등으로 거의 번역되어 사용되지 않는다. 독일에서는 신약성서의 쓰임인 'diakonein', 'diakonia', 'diakonos'가 가지는 의미 전체를 포괄해서 디아코니(Diakonie)라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때의 디아코니 개념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가 있다. 디아코니란 우선적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일로서 복음을 받드는 사도적인 봉사와 함께 이웃과 세상을 섬기는 것이다. 그 내용으로는 인간들 사이에 개인적 혹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생명보호와 법적이고 제도적인 장치를 통해서 그들의 권리를 찾아 사회적 주체로 일으켜주는 일이다. 이는 개인구원과 사회구원, 그리고 생태계 전체를 포함하는 창조세계 전체의 총체적인 구원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디아코니는 이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교회의 행동화이며, 기독교 신앙인의 그 말씀에 대한 실천적인 삶의 외연화이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필자는 독일의 'Diakonie' 라는 용어규정과 그 개념정의에 합의하면서 그 사용에 따르고자 한다. 그러므로 본 고에서 사용되는 용어인 섬김은 그 의미에 있어서 주로 독일어 쓰임인 디아코니(Diakonie)에 상응하는 개념이다. 2) 구약성서 속에서 구약성서에서는 '섬기다', '섬김', '종'이라는 단어들이 모두 합해서 1,000회 이상 사용되며 또한 의미적으로 이에 상응하는 용어들도 있다. 이러한 단어들 가운데 대부분의 히브리어의 명사형 섬김에 대한 표현방법은 그리스어의 섬김과는 다른 뉘앙스를 준다. 즉 그것은 한편으로는 하나의 종속적인 관계의 표현으로서 노예의 섬기는 일과 관련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보다 강력한 종교 의식적인 섬김을 말하는 바, 예전 또는 예배와 관련하여 사용된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에서의 섬김은 그 강조점이 일반적으로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규율에 놓여 있기보다는 주로 종교 의식적인 의미와 관련해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그 비중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때의 하느님을 섬기는 일로서 하느님 앞에서의 종교 의식적인 행위는 특히 계약법에서는 약자를 위한 보호와 정의 실천과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 이렇듯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에 나타난 섬김에 대한 의미가 다양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약에 나타난 기독교 섬김에 대한 구약 신학적 기여에 대한 물음은 다른 모든 기독교 신학적 주제들과 마찬가지로 그 물음이 섬김과 관련하는 신학적인 현상 자체로부터 출발될 수 있다. 즉 고통받는 인간의 상황이 질병이나 가난, 신체적 장애 그리고 배척받는 이방인의 형태로 구체화될 때, 이때의 섬김이 고통받는 인간과 피조물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이며 그 고통으로부터 인간과 피조물들을 해방하는 신학적인 주제를 가진다면, 어떻게 구약성서 속에서 인간적 고통에 관련하는 모든 주제들이나 문제들, 그리고 현재적인 경험과 실천적인 질문들에 대해 해결을 시도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즉 인간이 각각의 사회적 상황 속에서 다양하게 겪는 고통들이 어떻게 신학적으로 이해되고 그에 대한 실천적 해결들이 어떻게 신학적으로 반성되었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섬김을 위한 구약 신학적 기여로서 구약 시대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깊이 놓여 있는 문제들 가운데 몇몇 주제들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실천적 규정으로써 사회의 약자보호법에 대한 신학적 반성은 숙고될 만하다. 2. 섬기시고 섬김받는 하느님 1) 탄식을 통한 하느님의 주는 섬김과 받는 섬김 탄식은 개인적, 집단적 불의로부터 생성된 상처받은 고통에 대한 인간의 가장 우선적이고도 중요한 반응으로서 인간을 위협하고 불안케 하는 모든 것들을 가차없이 토해내는 것이다. 양식사적 연구에 따르면 탄식의 가장 중심에는 기도와 간청이 놓여 있다. 이 기도와 간청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간구다. 하느님은 위기를 토해내는 탄식에 대해 예언자나 제사장을 통해 예전적인 위탁의 말씀을 주신다. 이러한 치유의 신탁을 통해 탄식자는 하느님으로부터 수용됨을 인식하며 하느님과 갱신된 만남으로서의 전환을 가진다. 하느님은 위기에 빠진 탄식자에게 위기를 극복하도록 힘을 주신다. 이 힘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얻은 힘이기에 불의로 인한 위기를 극복하고 사랄과 정의에 의한 새로운 관계를 창조해낼 수 있는 창조의 힘이다. 즉 탄식자는 신뢰 속에서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린다. 이 희망의 기다림은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으로 우선적으로는 자신을 주체로 세우며 나아가 파괴된 관계를 치유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탄식과 관련하는 최초자이시며 최종자로서 인간으로부터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요 동시에 인간을 섬기시는 분이 되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탄식은 하느님과 인간, 삶과 죽음 그리고 죄책감과 용서가 만나는 점이요 치유받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즉, 탄식의 통로를 통해 인간은 하느님을 만나며, 치유를 통해 불의로 뒤틀렸던 관계들이 올바른 인격적인 관계로 전환되고 서로가 주고받는 섬김을 깨닫게 된다. 2) 불쌍한 자들을 섬기시는 하느님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은 비참하고 불쌍한 자들의 권리를 보호해주시는 것과 연관된다.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는 신이야말로 공법과 정의의 신이었다. 이들에 대한 정의를 이루는 일이 신들의 존재와 신성에 대한 기준이 되었다. 불쌍한 자들의 권리를 돌보아주면 그는 참 신으로서 보증될 수가 있으나 포악한 자들의 힘을 부수는 법 권리를 제정하지 않으면 그는 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공법의 수행이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 자체에 대한 기준이 된다. 기독교인이 믿는 신은 고통받는 자들의 권리를 찾아주고 섬기시는 자다. 거기로부터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행동이 근거를 가진다. 그러므로 교회의 고유성이란 불쌍한 자들에 대한 신원과 그들의 권리보호에 대한 관심, 그리고 섬김 없이는 생각될 수가 없는 것이다. 3) 하느님의 거룩성과 섬기시는 하느님 성법전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거룩성은 섬김의 거룩성이며 이것은 이웃 사랑과 이방인을 사랑하는 실천적인 활동이다. 특히 레위기 19장에 나타난 사랑에 대한 계명은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토라의 목적을 위해 약자들이 보호받고 섬김받는 보호규정들이 나온다. 하느님은 자기 백성을 분리해내어 스스로 거룩하게 하셨다. '너희는 거룩하라. 왜냐하면 나는 거룩한 너희 하느님 야웨니라(레 19:2). 이러한 거룩성은 먼저 하느님에 의해 부여된 은사다. 물론 기독교인은 이 거룩성에 상응해야 하는 바, 이때의 상응은 무엇보다도 전통적으로 의식적-예전적인 영역과 얽혀 있는 거룩성에 대한 개념이 바로 일상생활에서 사회적 약자를 사랑하는 실천적인 행동으로 구체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성과 관련하는 사랑의 섬김은 오늘날까지 기독교인들에게 성화의 신학적-윤리적 개념으로 작용하고 있다. 4) 약자 보호를 위한 사회법을 통해 섬기시는 하느님 구약성서에서는 그 당시 인간의 사회적 고통의 형태들에 대해 법적 수단으로 반응하였다. 이는 가난한 자와 불쌍한 자들의 권리를 쟁취해주고 보호해주기 위한 법으로서 그들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할 뿐 아니라 기업의 경제가 국가의 억압과 착취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는 제도적인 장치에로까지 조직화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오경(토라)의 중심이며, 정경화의 출발이었다. 성서적 사회법은 사회, 정치적으로 약자인 과부, 고아, 가난한 자. 작은 자. 그리고 이방인들을 위한 보호 규정으로 되었으며 이 보호법 제정은 바로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해방하신 행동에 대한 하나의 상응이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보호 규정들은 생명의 필수적인 것을 저당잡는 일을 금하는 것이다(출 21:2ff; 신 15:12ff).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자의 노예법과 관련하여서는 6년 동안 일을 시키고 제7년째에는 노예들을 해방시켜야만 한다(출 21:2ff; 신 15:12ff). 도망한 노예들을 위한 보호법은 난민법이다(신 23:16ff). 왕조 말에 나타나는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날품팔이꾼들에 대한 보호가 있어야 했다(신 24:14f). 이스라엘에서는 사회적 경제법으로써 이자금지와 고리대금업을 금지하였다(왕하 4:Uf). 이자 금지와 함께 규칙적인 빚 면제가 나타나기도 한다(신 15:1ff). 특히 제3년째 드려지는 십일조는 최초의 사회 세금제도로서 이스라엘에서 땅을 가지지 않은 레위인과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이방인, 고아, 과부들과 같은 약자를 위한 사회제도였다. 이는 국가세금의 삼 분의 일이 사회적 약자들의 기본생명을 보호하는 일에 사용되도록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법들이 항상 신학적으로 반성되었다. 계약의 책(출 20:22-23:33)에서는 사회적 위기와 비참함에 대한 신학적인 반응을 보인다. 즉 사회적으로 약자인 그들을 보호하고 사회의 정의를 실행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 앞에서 종교적 의식행위를 하는 것과 똑같은 가치를 가진다고 본다. 특히 예언자들은 사회적 위기 속에서-특히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의 극단화-작은 자와 권리가 없는 자(여자, 과부, 고아, 이방인, 그리고 노예)들에게 세력을 휘두르는 자들을 향해 심판을 외쳤다. 이상과 같이 하느님의 법은 법 제정을 통해 인간들 사이에서 구체화될 수 있으며, 그러한 장치 속에서 큰 힘을 가진다. 그런데 이러한 큰 힘의 구속력은 국가적인 힘과 권력에 의한 승인이 아니라 인간의 자발적인 승인에 의한 권위다. 이러한 법들의 실제적 효웅성은 자발성과 사회 정치적 정황들, 그리고 많은 다른 것들에 의존하나 이스라엘에서 그의 실효성은 하느님을 섬기는 신앙에 의존하는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함께 얽혀 있다. 기독교인은 약자들의 권리보호를 위한 사회법 제정의 필요성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법은 국가의 권력에 의해서 실효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아울러 신앙인들은 사랑과 믿음에서 나오는 섬김을 통하여 사회의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3. 섬기시고 섬김받는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인과 교회에서 섬김의 활동의 근거는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섬기는 삶을 산 것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총체적 사역은 바로 인간을 위한 섬김 자체였다. 이러한 섬김은 그의 인간 되심. 세례 받으심, 시험 받으심, 그의 사역, 십자가와 부활의 삶으로 이어졌다. 1) 예수의 사역과 섬김 예수의 성육신은 높은 자리를 버리고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예수의 자기 비움의 종성에 의한 섬김이었다.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인식한 메시아적인 과제는 권력과 지배를 통한 통치가 아니라 오히려 섬김을 통한 메시아 상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세 가지 내용은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즉 인간이 쉽게 야합할 수 있는 물질, 권력과 명예를 미끼로 던지면서 유혹하는 자에게 예수는 하나의 질적인 방향전환의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지배하는 권력에의 의지가 아니라 섬기는 길이요, 영광의 길이 아니라 자기를 비우면서 섬기는 길이었다. 이러한 섬김이야말로 뭇 생명을 살리는 길임을 예수는 그의 사역을 통해 구체화시켰으며 그의 십자가의 길을 통한 부활에서 그 정점을 이루었다. 예수의 섬김은 그의 대리적 고난과 인류를 위한 죽음 가운데서 그 절정을 보인다(막 10:45; 눅 22:27; 빌 2:5-11; 요 3:16). 2) 하느님 나라 운동과 섬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선포로 출발하는 예수의 사역은 섬김 사역의 결정체다. 그는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의 긴급성 앞에서 회개와 돌이킴을 촉구하였다. 이때의 회개는 바로 기득권자들이 가진 가치관의 전환과 사회적 약자들의 수용에 대한 촉구였다. 예수가 선포하는 하느님 나라께서는 종교적이고 사회적으로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절대적 가치관이 끊임없이 상대화되고 있다. 하느님 나라는 정체되어 고정화된 하나의 종교적-법적 이념이 아니라 시공간 속에서 구체적으로 활동하는 운동성이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지만 지금도 오고 앞으로도 올 것이다 이 운동의 주체는 하느님이시고 인간 또한 그 주체가 된다. 절박하게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직면해서는 먼저 하느님의 백성을 모으는 일이 관건이다. 이때의 하느님의 백성을 모음은 율법에 의한 종교적 제약 속에서 방향지어진 운동-바리새적이거나 에쎄네적인 운동-과는 달리 사회적, 종교적으로 소외된 자들을 모으는 하나의 열려 있는 운동이다. 이것이 예수가 실행한 하느님 나라의 운동이었고 이 운동의 구체화로 나타난 양태들은 종교적인 법에 내몰려 죄인으로 낙인 찍힌 세리와 창녀, 병든 자와 가난한 자 등 사회적으로 치여 밀려난 자들에 대한 관심과 섬김의 돌봄이었다. 그들과 친구가 된 예수는 섬김을 통해 그들도 한 인간으로서 존엄한 가치를 가지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들이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선입관으로 인해 당하고 있는 고통의 상황을 깨뜨려 부쉈다. 이러한 하느님 나라 운동은 예수의 섬김을 통해 자기를 열고 가장 작은 자들을 식탁에로 초대하여 기쁨을 나누며, 버려지고 소외된 자들이 하느님의 은혜 안에서 새로 창조되는 하느님의 인격적인 자녀들임을 확인시켜주는 섬김이었다. 예수의 질병치유도 그의 섬김을 통한 하느님 나라 운동이다. 질병의 고통 속에서 탄식하는 병든 자에 대한 그의 연민이 질병에 대한 당시의 의식적-예식적인 부정적인 관점을 하느님 나라 속에서 상대화시키고 있다. 이때의 질병치유는 바로 종교적 규정에 의해 배타당하는 이들을 위해 열어놓은 하느님 나라였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그들을 주체로 일으켜 주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섬기며 인간을 섬기는 모범을 보인 섬김의 원형이다. 이 세상에서 약하고 작고 멸시받는 자들을 택하셔서 그들을 섬기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이들 가운데 함께 계신다. 그가 인간들로부터 받으시는 섬김은 바로 이들이 인간들로부터 받는 섬김을 통해서다(마 25:35-45). 우리는 예수를 교회에서도 만나며 또한 사회 속에서 지극히 작은 자들 가운데서도 만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3) 원시공동체와 섬김 부활사건 이후의 원시공동체는 예수의 죽음을 죄인을 위한 속죄의 죽음으로서 이해했을 뿐 아니라 공동체 자체 내의 섬김을 통한 교제의 모범으로서 파악하였다. 그들은 예수의 살아 계신 동안의 발자취를 섬기는 자(christos diakonos)로 규정하고 이 땅에서 섬기는 모범을 보이신 예수의 말씀과 행위에 뿌리를 둔 섬기는 삶을 목표로 하였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도움의 형태로 섬김의 활동에 대한 기초적인 증거는 사도회의에서 결정된 합의에서 볼 수 있다. 갈라디아서 2장 10절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부활의 증인들을 통해 바울이 그의 사도적 권위성을 확인 받고 복음을 가지고 나갈 때 가난한 자를 기억할 것에 대한 위임을 받게 된다.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바울의 연보는 하나의 섬김(diakonia)이었다. 이렇듯 가난한 자들과 위기에 빠진 자들을 돕는 섬김은 예배하는 일과 서로 동떨어지지 않는 바, 바울적인 교회 공동체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모금을 통한 섬김은 예배적인 등급으로 고양된다(롬 15:25-27). 여기서 돌봄으로의 섬김의 의미가 하느님이 영화롭게 되는 데까지 확장된다. 이때의 복음이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 대한 관심 속에서 섬김을 통해 구체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한 자와의 만남의 표현이다. 기쁜 소식의 역사적인 형태는 다를지라도 부활한 자는 그의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형제의 궁핍함을 돕는 일에 대한 사명을 준다. 그러므로 부활한 자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궁핍과 고통 속에 있는 형제와 자매를 돕고 섬기는 일과 뗄 수 없는 것이다. 부활신앙에 근거하는 교회는 섬기는 교회여야 한다. III.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의 섬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는 섬기는 실존이요 그 섬김은 교회의 본질이고 교회의 삶의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교회는 그 섬김에 있어서 말씀의 증언과 예전과 성례전과의 관계 속에서 함께 조명되어야 하는데, 이것들은 온전한 교회를 이루기 위해 각각의 고유성을 가지면서도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여기로부터 나오는 교회의 섬김은 고유하면서 질적으로 높은 사랑의 섬김을 가능케 하며, 이는 섬김이 인본주의에 의한 기술성과 효율성으로 빠지기 쉬운 위헌성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1. 섬김과 말씀 선포와 예전 교회의 본질로서 섬김의 봉사는 말씀 증언과 예전과 함에 삶의 외형화로 나타나야 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이 활동하는 곳으로서 복음의 증언과 함께 사랑의 섬김을 통해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만나는 것이다. 이들에게 증언하는 말씀은 섬김을 통해 침묵하는 말씀의 증언이며 개인을 전도하기 위한 목적하에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섬김이 아니다. 말씀 증언과 예전 없는 섬김의 봉사는 세속화된 인본주의에 입각한 사회복지에 머물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섬김은 예전이 집행되는 제단을 그 근거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속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사회복지에 머무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섬김 없는 말씀 증언은 열매 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과 같으며, 하나의 기계적인 예배의식 행위이거나 빈 껍데기의 경건성을 보이기 위한 것에 불과할 수 있다. 즉. 도상에서 강도를 만나 반쯤 죽은 자의 곁을 비켜 지나친 자비심 없는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그러므로 섬김의 실천이 없는 예전은 진정한 예배를 파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섬김이 곧 예배에 상응할수 있기 때문이다(롬 15:25-27). 2. 섬김과 성례전 섬김은 세례와 성만찬과 관련하는 성례전 속에서 산다. 성만찬은 신앙인을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함께 받아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하는 공동체로 만들어준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지체들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불가 분리의 지체 공동체다. 지체들 사이에 다양성은 있으나 어떠한 존재론적 차이도 없다(엡 1:2; 2:15f). 존재론적으로 볼 때 몸이란 정치적인 은유로 사회적 존재를 의미한다. 이 때의 사회적 존재라 함은 서로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는 서로의 연대이며 찢겨진 존재들이 하나의 통일성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교회의 몸 성은 성도의 공동체로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섬김의 공동체다. 신앙인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은사를 통한 서로의 섬김 속에서 그들의 신앙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완성시킨다. 이는 서로 섬기는 가운데 교회의 질서를 세워가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섬김은 세상 속에서 약자와 병든 자 굶주린 자와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인식하면서 그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를 세상에서 이루어가는 것이다. 나아가 교회의 섬김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사회악의 요소, 구조적인 악에 대해 비판적으로 대응하여야만 할 것이다. 3. 교회와 사회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와 사회 내지 국가에 대한 관계성은 끊임없이 논란 되어왔다. 교회는 물론 위급한 사안이 항상 새로 발생하는 사회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 교회는 원초적으로 사회와 분리하여 존재한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모든 사회적 그룹들의 관심과 돌봄을 위해 개방적으로 존재하는 섬김의 실존을 갖는다. 우리가 적어도 여기서 논할수 있는 것은 교회는 교회의 정체성이 있으며 사회는 그 자체의 정체성을 가지는 바, 양자는 서로 완전히 분리되지 않으면서 혼동 되지 않고 서로 비판적인 연대를 할 수 있는 관계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교회 안에서뿐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기독성으로 사회 속에서 함께 일해가는 세상적인 것으로서 비기독교인을 포함한 모든 사회의 구성원의 책임적 자유를 수용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혹자는 이미 지나간 논의로 접어놓은-책임 사회론과 관련하여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다시 한번 짚어야만 할 것이다. 본회퍼(D. Bonhoeffer)는 책임사회는 세상의 질서를 신성화 내지 교회화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질서에 진정한 세상성으로의 해방을 가져오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주권성의 의미이며 그 목적이라고 보았다. 이에 상응하여 교회의 섬김의 활동도 교회 내에서의 범위를 넘어 사회 정치적 영역에서의 섬김의 활동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 한복판에서 빛과 소금으로서 문제들을 해결하는 역할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섬김은 인간의 육체적 위급한 상황을 제거하는 개인구호뿐만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섬기는 봉사가 되어야 한다. 이때의 섬김은 단순히 사후 치료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사전 예방적인 것까지도 포함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 사랑의 섬김의 양태는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인 위급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도움을 통해 나타나며 이러한 위급한 상황의 사회 구조적인 원인들을 제거하는 데까지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교회의 섬김이 교회 내부의 구조와 직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으로의 원심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것이다. 기독교의 섬김은 하느님으로부터 보시기에 좋았던 이 세상에 현존하는 창조물의 충만함을 위협하는 것에 대항하여 신앙인들이 함께 섬김을 통한 실천적인 활동으로 연대하여 싸우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섬김을 위해 우리는 위급한 상황 자체, 그의 원인들, 돕는다는 것 등에 대해 인간학적, 사회학적, 생태학적 그리고 신학적인 방법으로 모든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파악해야할 것이다. 교회의 사회 섬김을 위해 연대하는 영성은 하느님의 피조물을 위협하는 창조세계의 사회적, 생태적 위기의 상황을 통찰하는 통찰의 영이고, 탄식하는 피조물의 소리를 듣고 함께 아파하는 공감의 영이며, 이들의 생명구조를 위한 책임적인 활동을 실천하는 사랑의 영이고 이들을 주체로 일으켜세워 사회로 재통합시키는 정의의 영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연대적 섬김의 영성은 교회 공동체 내에서 싹이 나오며 성장하여 무르익는 것이다. 이것은 홀로 한적한 곳에서 명상이나 수련을 통해 얻어 지는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세상 한복판에 서 있는 교회의 온전하지 못한 그리스도의 다양한 지체들이 모여 예배하는 공동체 속에서 말씀 선포를 통해 동기를 부여받는 영성이며, 이 영성은 선포된 말씀에 대한 침묵의 증언으로서 세상 속에서 개인적, 사회적인 위기를 극복하게 하는 섬김에 의해 성장한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 사회 속에서 성장한 이 섬김의 영성은 다시 교회 안에서 말씀으로 반성되고 재구성되면서 성숙해가는 예배와 섬김의 상호 순환적 침투성의 원리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와 섬기는 공동체의 상호 형평성을 유지하는 구조와 내용을 가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 바로 모이는 것과 보내는 것의 동등한 비중을 갖는 양자의 동시 확보성에 대한 필요성과 당연성이 있다. 섬기는 실존으로서의 교회는 그의 본질적인 섬김과 그의 삶의 양태를 이 세상 속에서 구체화하는 바 하느님과 인간을 섬기는 교회는 이 땅에서 고통, 비방, 박해 속에 있는 이들과 연대하는 관계로 나아가야 하며 때로는 인간의 존엄성과 주체성을 파괴하는 세상의 악의 권력과 대항함속에서 고통받을 수도 있어야 한다. IV. 나가는 말 참다운 하느님의 교회를 위한 한국교회의 새로운 틀은 섬김의 원리에 의한 틀이어야 한다. 이러한 섬김의 원리는 지배하고 으뜸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고 섬기는 준비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독교의 섬김의 원리는 우리에게 생명의 충만함과 다양성, 그리고 통일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새로운 삶의 형태를 줄 수 있다. 자기를 비워 스스로 낮아짐에 의한 섬김만이 적자 생존의 경쟁논리에 의한 삶의 수직적 구조를 극복하고 수평적 관계를 이룩하면서 함께 사는 공동체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찢겨진 현실 속에서 가난한 자들과 사회에서 소외되어 주변부로 쫓겨난 자들을 섬김은 바로 전체 창조물과 생명을 나누는 신의 공동체성인 삼위일체적 경륜 속에 근거하며, 이 섬김은 인격적 주체들의 주고받는 공동체적 섬김이다. 이러한 원리에 의한 틀이 바로 만인 섬김직(Diakonenamt; Diakonentum aller Glaeubigen)이며 한국교회가 다시 짜야 할 틀이다. 이는 섬김 속에서 자기 비움을 통한 화해와 정의로운 사회적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오고 있는 미래 사회를 위한 하나의 새로운 사회구조의 틀로서 자리해야 할 것이다. 우리와 한국교회에게 아직도 늦지 않게 남겨진 선택은 이러한 섬김을 통한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 인식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 인식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대담·김명용 (장신대 조직신학) 교수 진행·장병두 목사 오늘날 사람들이 열 명 모이면 열 가지 교회관이 생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교회에 대해 각자 다른 관점을 가졌다는 뜻인데, 교수님은 한국교회 안에 왜 이런 교회관 혼동의 문제가 생겼다고 보십니까? 교회관에 관한 문제는 사실 신학적인 문제에 그 뿌리가 놓여 있습니다. 즉 교회가 무엇이며 왜 존재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신학적 혼동이 그 원인입니다. 사실 평신도들도 나름대로 신학을 가지고 있고 신학을 공부한 분들도 자기 신학으로 교회를 보기 때문에, 선교를 중요하게 보는 분들은 선교 지향적인 교회를 좋아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거나 봉사하는 디아코니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디아코니아 지향적인 교회가 옳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니면 좀더 정치적인 것에 대해서 민감한 교회가 참 교회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소수이지만 한국 교회 안에 실질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의 중심에는 교회론의 위기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교회는 무엇이며 또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럼 교수님은 교회의 본질과 바른 역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 최근에는 제도적 교회를 거부하고 개인주의적 교회관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 지역교회의 바른 정체성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지요. 다 알고 계시겠지만, 교회의 본질은 제도나 건물이 아닙니다. 즉 눈에 보이는 건물 속에 참 교회가 있지 않고, 바른 말씀의 선포와 그 말씀에 반응하는 곳에 교회가 존재합니다. 칼 바르트는 “교회의 본질은 제도나 조직이 아니고 말씀의 사건”이라고 정의했는데, 그에 따르면, 교회가 말씀의 사건이라는 뜻은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그 말씀을 듣는 인간이 만나는 곳에,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이 응답하는 그 곳에 참 교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칼 바르트에 의하면 이 ‘말씀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제도적 교회는 우상숭배 단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 개신교 교회론에 중요한 공헌을 한 또 한 명의 신학자는 에밀 브룬너인데, 그는‘교회에 대한 오해’라는 저서에서 교회가 본질적으로 제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난 1800여 년 동안 제도와 동일시되어 왔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렇듯 바르트와 브룬너의 ‘사건으로서의 교회 개념’은 교회를 조직체로 생각하고 교권에 눈이 먼 많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참 교회가 무엇인지 일깨워 주는 좋은 도전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교회의 생명은 교회가 갖고 있는 제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사랑의 사건이 일어나는 곳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사건으로서의 교회’ 개념은 그 개념 자체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후유증을 남겼습니다. 그것은 무교회주의가 신학적으로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게 된 것입니다. 무교회주의란 ‘교회’가 필요 없다는 사상이기보다는 ‘제도적 교회’가 필요 없다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교회주의자들은 교회의 본질이 말씀의 사건이므로, 비록 그것이 제도적 교회 안이 아니라고 해도 말씀의 사건만 일어나면 모두 참 교회라고 주장했습니다. 더구나 제도적 교회가 불의한 정부의 앞잡이가 되거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권 싸움으로 여념이 없을 때, 무교회주의는 철저하게 그 정당성을 입증 받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이것은 「흩어지는 교회」라는 책을 쓴 호켄다이크에 와서는 더욱 급진적으로 발전해 “교회는 고정된 장소가 없고, 나그네로 존재한다”는 말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교회의 제도성은 거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무교회주의의 교회관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교회의 제도성에 대해 무가치하다고 결코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분명 성령의 사건이고, 오순절 성령의 강림이 없었다면 초대교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사건으로 탄생한 교회가 그 초기부터 이미 제도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에서 보듯이, 감독이라는, 교회의 매우 중요한 직제가 성령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제도성은 성령의 사건을 구현시켜가는 과정 속에서 나타났고, 교회의 제도성은 성령의 사건으로서의 교회를 도와주는 구체적인 도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교회를 위해 감독을 세운 것은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방어하고 양육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직제는 교회가 참 교회가 되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이며, 성도를 양육하고 신앙을 강화하는 데 매우 필요한 보조 수단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성령께서 직접 교회를 양육하고 인도하시지만 목사와 교사라는 인간적인 수단을 사용하셔서 양육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제도적인 교회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개의 극단적인 교회관을 주의하고 피해야 합니다. 첫째는 극단적인 중앙집권적 교회관입니다. 이는 주로 카톨릭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가시적인 제도 속에 교회의 모든 것을 가두어 버리는 교회관입니다. 이 교회관에 의하면 성령이 교회의 제도 속에 갇히게 되고 교회의 제도가 신성화되며 절대화되는 문제점이 발생합니다. 둘째는 방금 말씀드린 극단적인 개인주의 교회관으로, 교회의 제도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무교회주의로 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주로 우리 개신 교회 안에서 많이 발생합니다. 우리는 이 두 극단을 모두 경계하면서, 교회의 직제와 제도는 인정하되 그것이 언제나 성령의 활동에 봉사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교회의 직제나 제도가 말씀에 봉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령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이 교회의 제도성 역시 한 번 만들어진 것이 영원히 계속되어야 한다는 의미의 제도성은 아니라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의 필요에 따라, 있던 제도가 폐기되기도 하고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제도성은 교회를 양육하고 인도하기 위한 성령의 필요에 따라 변천되어야 하고,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성령의 ‘사건’인 동시에 ‘제도’입니다. 연관된 질문이 되겠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은 제도적인 지역 교회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혼자 조용히 교회에 와서 말씀만 듣고 돌아가거나 아예 유럽처럼 혼자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유럽에 가면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혼자서, 그러니까 제도적인 교회 밖에서, 신학적으로 사고를 하면서 제도적인 교회는 나가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의 특징은 모두 교회를 다녀 본 경험은 있는데, 뭔가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에 대해 실망을 한 것이지요. 그러한 실망들이 그들로 하여금 제도권 교회 밖에 머물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는 물론 게을러서 그럴 수도 있겠지요. 즉, 기존 교회에 대한 실망이 주된 원인이 되고 거기에 자신의 게으름도 합쳐져서 일어난 위험한 신앙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에 대한 해결책은 오직 ‘교회를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바른 교회를 만들면 결국 그분들도 자연스럽게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분들에게도 깊은 관심을 드리고 가능한 교회 안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중요한 이유는, 성도들의 신앙은 역시 공동체 속에서 가장 바르게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신앙이 자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공동체 안에 들어 와야, 서로가 서로를 가르치고 기도해주고 도와주는 가운데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교회를 가리켜 ‘성도들을 양육하는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 제도적인 교회를 떠나서는­어머니의 품을 떠나 있는 아이처럼­ 제대로 자라나기 어렵다는 뜻이지요. 결국은 ‘바른 공동체’만이 ‘바른 교회관’을 가진 성도들을 키워 낼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목회자를 중심으로 의식 있는 평신도들이 함께 협력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바른 교회관을 갖기 위해 가르쳐야 할 교회의 사명과 존재 목적은 무엇입니까? 제가 볼 때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쪽에 좀 더 무게 중심이 가 있고, 사회 역사 속에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그분의 의와 생명을 추구하여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영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좀 약하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오늘날 교회론 속에 간과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교회의 ‘역사적 책임’의 강조가 교회의 ‘영적 책임’을 희석시키고 있다는 것이긴 합니다. 이것은 상당수의 진보적 신학자들의 교회론 속에서 심각하게 나타나는데, 그들의 주장에서는 복음 전도에 대한 교회의 책임이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이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교회가 영혼 구원 외에 이웃 섬김과 디아코니아적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하는 면에서 상당 부분 낯설어하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그러한 생각들은 이원론적인 전제 속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의하면 예수님 자신이 먼저 자신의 삶을 가리켜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다시 말해 섬김의 삶이 참 제자도의 핵심인 것입니다. 즉, 교회의 삶 자체가 섬김(디아코니아)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는 많고 그리스도인들도 많다고는 하지만 사회에서의 이러한 섬김의 모습이 없는 것이 한국교회의 신뢰감을 떨어뜨렸다고 봅니다. 즉, 말씀을 듣고 세상에 나가 자신의 위치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실패함으로써 세상에 대한 교회의 이미지를 흐리고 사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것이지요. 한국 교회가 특별히 하나님 나라의 구현에 대한 책임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왜 그런 현상이 생겼다고 보십니까? 핵심적인 이유를 저는 두 가지로 보는데, 첫째는 교회 안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펠로우십’(친교)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교회에 새로운 사람이 와도 누가 누군지 모르고 관심도 없는 상황입니다. 교회의 본질적 과제 중의 하나인 ‘성도의 교제’가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처럼 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교회론의 혼동과 더불어 세상을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구현 사명에 장벽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가 대형화되어 갈수록 더욱 선명하게 나타나는데, 사실 이는 상당수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여전히 익명으로 남고 싶어하는 것도 그 원인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로는, 교회가 평신도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이 교회 안이나 세상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뚜렷하게 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교육하는 일에 상당수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전체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드리는 그 곳에만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흩어져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그 곳에도 교회의 삶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어떤 모이는 공동체로만 생각하고 흩어지는 공동체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결국 교회의 목적이 제도적인 교회의 교세 성장으로만 치달을 위험이 높습니다. 실제로 이런 현상은 이미 한국교회 안에서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과정에서는, 세상 속으로 보냄 받은 평신도들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것은 또 직업과도 관련이 있는데, 예를 들어 평신도 판사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평신도 판사가 주일날 교회에서 헌금을 담당하는 집사의 일을 하는 것도 물론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이분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의로우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이 땅에 구현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분은 하나님의 의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 실제적으로 하나님께 부름 받은 일꾼입니다. 그래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그는 의로운 하나님을 대신하는 그 역할을 이 사회 속에서 성실하게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는 어떻습니까? 자신의 직업과 구체적인 삶에 관련된 소명의 문제를 교회가 잘 안 가르치고 있고, 또 실제적으로 많은 성도들이 그 중요한 부르심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한국교회의 아주 큰 문제점 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청소부를 생각해도 이 문제는 동일합니다. 요즘 환경문제가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하나님 나라의 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하나의 큰 소명이므로, 청소부라는 역할도 그것과 직접 관련되어 있는 중요한 직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자신의 일을 스스로 비하할지는 모르겠지만,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 직업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잘 설명하고 그 깊은 소명을 실천하도록 가르쳐 나가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이렇게 교회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두 가지 큰 테두리를 생각하면서 목회를 해 나간다면 상당히 바른 교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교회의 목사는 모여 있는 제도적 교회가 잘되기만을 바라며 설교해서는 안됩니다. 교회의 삶이란, ‘모여 있는 공동체의 삶’ 뿐만 아니라, 흩어져서 살아가는 삶 전체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전체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도록 목회자는 설교해야 합니다. 교수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이렇게 교회관이 혼재하게 된 데에는 말씀을 맡은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사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목회자들이, 교회성장을 주된 목표로 하는 ‘교회내향성의 병’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칼 라너에 의하면 교회의 성직자들이 특히 이 교회내향성의 병에 걸리기가 쉽다고 하는데, 그는 독일의 나치 통치 시기에 교회가 자체 존속을 너무나도 많이 생각하고 염려한 나머지 600만 유대인의 학살을 방치한 역사야말로 교회내향성의 병의 대표적 실례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도 목회자들이 교회성장에만 너무 매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염려가 됩니다. 너무 성장 일변도로 흐른다고 할까요? 아니면 교회성장이 하나의 우상으로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니까요. 즉 대형교회가 목사님들에게는 하나의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교회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대형교회가 되고 싶어함에도 불구하고, 조사에 의하면 90년대에 들어와 오히려 교회가 정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아이러니한 현상이지요. 그렇게 우리가 성장을 목표로 하고 대형교회를 부러워하는데도 지금 한국교회는 성장을 안 하는 거예요. 교수님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한국교회가 성장을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개신교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체되어 있는 같은 기간에 카톨릭 교회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고 지금도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카톨릭 교회는 성장을 하는 반면 우리 기독교 교회는 정체에 빠졌을까요? 그 핵심은 국민들이 카톨릭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카톨릭 교회를 ‘훌륭한 교회’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가장 이미지가 좋은 종교로 카톨릭이 뽑히고, 가장 이미지가 좋은 종교인으로 신부님이 뽑히는 거예요. 카톨릭 교회와 기독교 교회의 이미지 차이는 굉장히 크게 벌어져 있습니다. 물론 신부님과 목사님 사이의 이미지 차이도 굉장히 벌어져 있지요. 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을 하거든요. “카톨릭은 정의의 상징이다”,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또 “김수환 추기경이나 명동성당은 하나의 상징적인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암암리에 사람들의 종교 선택에 영향을 미치면서 카톨릭 교회로 사람들이 몰려가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개신 교회가 성장을 멈추고 있는 것도, 개신교 성도들 중 상당수가 카톨릭으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가 카톨릭 교회 신부님들하고 대화를 해 보면 실제로 우리 개신교에서 그쪽으로 많이 개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카톨릭은 자체적으로 일반 무신론자들로부터 개종자를 많이 얻는 동시에 기존 개신교인들로부터 채우는 숫자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성장의 정체 현상 뒤에 그런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 속에서 목회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어떤 것이겠습니까? 사실 카톨릭 교회가 우리처럼 전도나 교회성장을 그리 강조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성장을 했다는 것은, 교회의 이미지와 사회적 신뢰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교회성장에 있어서 그 교회가 ‘바른 교회’가 되는 것이야말로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가장 결정적인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이 ‘교회를 반드시 성장시켜야 되겠다’는 의식보다는 ‘내가 섬기는 교회를 성경적이고 바른 교회로 만들겠다’는 의식을 더 강하게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이 문제가 해결되리라 봅니다. 저는 ‘바른 교회’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시간은 많이 걸리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가장 성경적이고 빠른 성장의 길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목회자들 사이에서 바른 교회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빨리 교회를 크게 키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더 앞서다 보니까, 여기에 옳지 못한 일들이 많이 발생한 것이지요. 무리한 일들이 발생하면, 꼭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을 수 있는 일들이 뒤이어 발생을 하고, 결국 교회가 당연히 해야 할 일들조차 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우리 한국교회의 성장이 벽에 부딪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모든 목회자들이 ‘성장’이라는 우상에서 일단 벗어나, ‘내가 섬기는 교회를 정말 신학적으로 바른 교회관을 가진 교회로 만들어야 되겠다’는 결심으로 차근 차근 한 걸음씩 걸어 나간다면 머지 않은 장래에 한국교회가 굉장히 달라지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물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복음에 대한 문제입니다. 즉 교회에서 복음을 바르게 깨달으면 사람들은 카톨릭으로 안 갈 것입니다. 아니 가기가 싫어질 것입니다. 본래 이 기독교가 탄생하게 된 것은 그 핵심이 복음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충, 복음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로 개신 교회에 출석을 하다가, 교회의 좋지 않은 모습을 보고는 카톨릭으로 넘어가는 분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복음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고 복음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는 것이 실제적인 대안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을 읽는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에게 교회론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한 말씀해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신학생이나 목회자들은 제가 볼 때에 우선 신실한 삶의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황된 생각을 버리고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를 보호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하고 설교를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바른 교회를 만드는 중심에는 바른 설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문제가 있거나 어려운 교회들을 보면 거의가 ‘목사님의 설교에서 들을 것이 없다’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한마디로 목사님 말씀에 은혜가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목회의 길을 가는 사람은 다른 테크닉을 자꾸 배우려고 뛰어 다니지 말고, 오직 말씀을 바르게 연구하며 교인들에게 큰 은혜를 끼칠 수 있는 설교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실한 목회자가 될 때 신실한 교회가 자연히 만들어지게 되어 있어요. 뜬구름 잡는 것에 너무 현혹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신실하게 만드는 것에 먼저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김명용/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장신대 신대원(M.Div., Th.M.)과 독일 튀빙엔 대학교(Dr.theol)에서 공부했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의 객원교수와 반석교회의 담임목사를 역임했고, 현재 장신대 조직신학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열린 신학 바른 교회론」 외 여러 권이 있다.
교회의 본질 인식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 인식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2002-01-30 09:54:50 read : 57 교회의 본질 인식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대담·김명용 (장신대 조직신학) 교수/진행·장병두 목사 오늘날 사람들이 열 명 모이면 열 가지 교회관이 생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교회에 대해 각자 다른 관점을 가졌다는 뜻인데, 교수님은 한국교회 안에 왜 이런 교회관 혼동의 문제가 생겼다고 보십니까? 교회관에 관한 문제는 사실 신학적인 문제에 그 뿌리가 놓여 있습니다. 즉 교회가 무엇이며 왜 존재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신학적 혼동이 그 원인입니다. 사실 평신도들도 나름대로 신학을 가지고 있고 신학을 공부한 분들도 자기 신학으로 교회를 보기 때문에, 선교를 중요하게 보는 분들은 선교 지향적인 교회를 좋아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거나 봉사하는 디아코니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디아코니아 지향적인 교회가 옳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니면 좀더 정치적인 것에 대해서 민감한 교회가 참 교회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소수이지만 한국 교회 안에 실질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의 중심에는 교회론의 위기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교회는 무엇이며 또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럼 교수님은 교회의 본질과 바른 역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 최근에는 제도적 교회를 거부하고 개인주의적 교회관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 지역교회의 바른 정체성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지요. 다 알고 계시겠지만, 교회의 본질은 제도나 건물이 아닙니다. 즉 눈에 보이는 건물 속에 참 교회가 있지 않고, 바른 말씀의 선포와 그 말씀에 반응하는 곳에 교회가 존재합니다. 칼 바르트는 “교회의 본질은 제도나 조직이 아니고 말씀의 사건”이라고 정의했는데, 그에 따르면, 교회가 말씀의 사건이라는 뜻은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그 말씀을 듣는 인간이 만나는 곳에,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이 응답하는 그 곳에 참 교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칼 바르트에 의하면 이 ‘말씀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제도적 교회는 우상숭배 단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 개신교 교회론에 중요한 공헌을 한 또 한 명의 신학자는 에밀 브룬너인데, 그는‘교회에 대한 오해’라는 저서에서 교회가 본질적으로 제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난 1800여 년 동안 제도와 동일시되어 왔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렇듯 바르트와 브룬너의 ‘사건으로서의 교회 개념’은 교회를 조직체로 생각하고 교권에 눈이 먼 많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참 교회가 무엇인지 일깨워 주는 좋은 도전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교회의 생명은 교회가 갖고 있는 제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사랑의 사건이 일어나는 곳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사건으로서의 교회’ 개념은 그 개념 자체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후유증을 남겼습니다. 그것은 무교회주의가 신학적으로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게 된 것입니다. 무교회주의란 ‘교회’가 필요 없다는 사상이기보다는 ‘제도적 교회’가 필요 없다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교회주의자들은 교회의 본질이 말씀의 사건이므로, 비록 그것이 제도적 교회 안이 아니라고 해도 말씀의 사건만 일어나면 모두 참 교회라고 주장했습니다. 더구나 제도적 교회가 불의한 정부의 앞잡이가 되거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권 싸움으로 여념이 없을 때, 무교회주의는 철저하게 그 정당성을 입증 받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이것은 「흩어지는 교회」라는 책을 쓴 호켄다이크에 와서는 더욱 급진적으로 발전해 “교회는 고정된 장소가 없고, 나그네로 존재한다”는 말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교회의 제도성은 거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무교회주의의 교회관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교회의 제도성에 대해 무가치하다고 결코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분명 성령의 사건이고, 오순절 성령의 강림이 없었다면 초대교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사건으로 탄생한 교회가 그 초기부터 이미 제도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에서 보듯이, 감독이라는, 교회의 매우 중요한 직제가 성령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제도성은 성령의 사건을 구현시켜가는 과정 속에서 나타났고, 교회의 제도성은 성령의 사건으로서의 교회를 도와주는 구체적인 도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교회를 위해 감독을 세운 것은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방어하고 양육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직제는 교회가 참 교회가 되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이며, 성도를 양육하고 신앙을 강화하는 데 매우 필요한 보조 수단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성령께서 직접 교회를 양육하고 인도하시지만 목사와 교사라는 인간적인 수단을 사용하셔서 양육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제도적인 교회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개의 극단적인 교회관을 주의하고 피해야 합니다. 첫째는 극단적인 중앙집권적 교회관입니다. 이는 주로 카톨릭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가시적인 제도 속에 교회의 모든 것을 가두어 버리는 교회관입니다. 이 교회관에 의하면 성령이 교회의 제도 속에 갇히게 되고 교회의 제도가 신성화되며 절대화되는 문제점이 발생합니다. 둘째는 방금 말씀드린 극단적인 개인주의 교회관으로, 교회의 제도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무교회주의로 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주로 우리 개신 교회 안에서 많이 발생합니다. 우리는 이 두 극단을 모두 경계하면서, 교회의 직제와 제도는 인정하되 그것이 언제나 성령의 활동에 봉사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교회의 직제나 제도가 말씀에 봉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령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이 교회의 제도성 역시 한 번 만들어진 것이 영원히 계속되어야 한다는 의미의 제도성은 아니라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의 필요에 따라, 있던 제도가 폐기되기도 하고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제도성은 교회를 양육하고 인도하기 위한 성령의 필요에 따라 변천되어야 하고,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성령의 ‘사건’인 동시에 ‘제도’입니다. 연관된 질문이 되겠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은 제도적인 지역 교회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혼자 조용히 교회에 와서 말씀만 듣고 돌아가거나 아예 유럽처럼 혼자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유럽에 가면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혼자서, 그러니까 제도적인 교회 밖에서, 신학적으로 사고를 하면서 제도적인 교회는 나가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의 특징은 모두 교회를 다녀 본 경험은 있는데, 뭔가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에 대해 실망을 한 것이지요. 그러한 실망들이 그들로 하여금 제도권 교회 밖에 머물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는 물론 게을러서 그럴 수도 있겠지요. 즉, 기존 교회에 대한 실망이 주된 원인이 되고 거기에 자신의 게으름도 합쳐져서 일어난 위험한 신앙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에 대한 해결책은 오직 ‘교회를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바른 교회를 만들면 결국 그분들도 자연스럽게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분들에게도 깊은 관심을 드리고 가능한 교회 안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중요한 이유는, 성도들의 신앙은 역시 공동체 속에서 가장 바르게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신앙이 자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공동체 안에 들어 와야, 서로가 서로를 가르치고 기도해주고 도와주는 가운데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교회를 가리켜 ‘성도들을 양육하는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 제도적인 교회를 떠나서는­어머니의 품을 떠나 있는 아이처럼­ 제대로 자라나기 어렵다는 뜻이지요. 결국은 ‘바른 공동체’만이 ‘바른 교회관’을 가진 성도들을 키워 낼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목회자를 중심으로 의식 있는 평신도들이 함께 협력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바른 교회관을 갖기 위해 가르쳐야 할 교회의 사명과 존재 목적은 무엇입니까? 제가 볼 때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쪽에 좀 더 무게 중심이 가 있고, 사회 역사 속에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그분의 의와 생명을 추구하여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영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좀 약하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오늘날 교회론 속에 간과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교회의 ‘역사적 책임’의 강조가 교회의 ‘영적 책임’을 희석시키고 있다는 것이긴 합니다. 이것은 상당수의 진보적 신학자들의 교회론 속에서 심각하게 나타나는데, 그들의 주장에서는 복음 전도에 대한 교회의 책임이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이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교회가 영혼 구원 외에 이웃 섬김과 디아코니아적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하는 면에서 상당 부분 낯설어하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그러한 생각들은 이원론적인 전제 속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의하면 예수님 자신이 먼저 자신의 삶을 가리켜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다시 말해 섬김의 삶이 참 제자도의 핵심인 것입니다. 즉, 교회의 삶 자체가 섬김(디아코니아)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는 많고 그리스도인들도 많다고는 하지만 사회에서의 이러한 섬김의 모습이 없는 것이 한국교회의 신뢰감을 떨어뜨렸다고 봅니다. 즉, 말씀을 듣고 세상에 나가 자신의 위치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실패함으로써 세상에 대한 교회의 이미지를 흐리고 사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것이지요. 한국 교회가 특별히 하나님 나라의 구현에 대한 책임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왜 그런 현상이 생겼다고 보십니까? 핵심적인 이유를 저는 두 가지로 보는데, 첫째는 교회 안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펠로우십’(친교)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교회에 새로운 사람이 와도 누가 누군지 모르고 관심도 없는 상황입니다. 교회의 본질적 과제 중의 하나인 ‘성도의 교제’가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처럼 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교회론의 혼동과 더불어 세상을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구현 사명에 장벽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가 대형화되어 갈수록 더욱 선명하게 나타나는데, 사실 이는 상당수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여전히 익명으로 남고 싶어하는 것도 그 원인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로는, 교회가 평신도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이 교회 안이나 세상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뚜렷하게 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교육하는 일에 상당수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전체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드리는 그 곳에만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흩어져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그 곳에도 교회의 삶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어떤 모이는 공동체로만 생각하고 흩어지는 공동체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결국 교회의 목적이 제도적인 교회의 교세 성장으로만 치달을 위험이 높습니다. 실제로 이런 현상은 이미 한국교회 안에서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과정에서는, 세상 속으로 보냄 받은 평신도들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것은 또 직업과도 관련이 있는데, 예를 들어 평신도 판사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평신도 판사가 주일날 교회에서 헌금을 담당하는 집사의 일을 하는 것도 물론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이분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의로우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이 땅에 구현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분은 하나님의 의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 실제적으로 하나님께 부름 받은 일꾼입니다. 그래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그는 의로운 하나님을 대신하는 그 역할을 이 사회 속에서 성실하게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는 어떻습니까? 자신의 직업과 구체적인 삶에 관련된 소명의 문제를 교회가 잘 안 가르치고 있고, 또 실제적으로 많은 성도들이 그 중요한 부르심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한국교회의 아주 큰 문제점 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청소부를 생각해도 이 문제는 동일합니다. 요즘 환경문제가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하나님 나라의 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하나의 큰 소명이므로, 청소부라는 역할도 그것과 직접 관련되어 있는 중요한 직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자신의 일을 스스로 비하할지는 모르겠지만,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 직업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잘 설명하고 그 깊은 소명을 실천하도록 가르쳐 나가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이렇게 교회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두 가지 큰 테두리를 생각하면서 목회를 해 나간다면 상당히 바른 교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교회의 목사는 모여 있는 제도적 교회가 잘되기만을 바라며 설교해서는 안됩니다. 교회의 삶이란, ‘모여 있는 공동체의 삶’ 뿐만 아니라, 흩어져서 살아가는 삶 전체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전체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도록 목회자는 설교해야 합니다. 교수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이렇게 교회관이 혼재하게 된 데에는 말씀을 맡은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사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목회자들이, 교회성장을 주된 목표로 하는 ‘교회내향성의 병’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칼 라너에 의하면 교회의 성직자들이 특히 이 교회내향성의 병에 걸리기가 쉽다고 하는데, 그는 독일의 나치 통치 시기에 교회가 자체 존속을 너무나도 많이 생각하고 염려한 나머지 600만 유대인의 학살을 방치한 역사야말로 교회내향성의 병의 대표적 실례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도 목회자들이 교회성장에만 너무 매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염려가 됩니다. 너무 성장 일변도로 흐른다고 할까요? 아니면 교회성장이 하나의 우상으로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니까요. 즉 대형교회가 목사님들에게는 하나의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교회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대형교회가 되고 싶어함에도 불구하고, 조사에 의하면 90년대에 들어와 오히려 교회가 정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아이러니한 현상이지요. 그렇게 우리가 성장을 목표로 하고 대형교회를 부러워하는데도 지금 한국교회는 성장을 안 하는 거예요. 교수님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한국교회가 성장을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개신교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체되어 있는 같은 기간에 카톨릭 교회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고 지금도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카톨릭 교회는 성장을 하는 반면 우리 기독교 교회는 정체에 빠졌을까요? 그 핵심은 국민들이 카톨릭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카톨릭 교회를 ‘훌륭한 교회’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가장 이미지가 좋은 종교로 카톨릭이 뽑히고, 가장 이미지가 좋은 종교인으로 신부님이 뽑히는 거예요. 카톨릭 교회와 기독교 교회의 이미지 차이는 굉장히 크게 벌어져 있습니다. 물론 신부님과 목사님 사이의 이미지 차이도 굉장히 벌어져 있지요. 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을 하거든요. “카톨릭은 정의의 상징이다”,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또 “김수환 추기경이나 명동성당은 하나의 상징적인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암암리에 사람들의 종교 선택에 영향을 미치면서 카톨릭 교회로 사람들이 몰려가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개신 교회가 성장을 멈추고 있는 것도, 개신교 성도들 중 상당수가 카톨릭으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가 카톨릭 교회 신부님들하고 대화를 해 보면 실제로 우리 개신교에서 그쪽으로 많이 개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카톨릭은 자체적으로 일반 무신론자들로부터 개종자를 많이 얻는 동시에 기존 개신교인들로부터 채우는 숫자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성장의 정체 현상 뒤에 그런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 속에서 목회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어떤 것이겠습니까? 사실 카톨릭 교회가 우리처럼 전도나 교회성장을 그리 강조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성장을 했다는 것은, 교회의 이미지와 사회적 신뢰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교회성장에 있어서 그 교회가 ‘바른 교회’가 되는 것이야말로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가장 결정적인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이 ‘교회를 반드시 성장시켜야 되겠다’는 의식보다는 ‘내가 섬기는 교회를 성경적이고 바른 교회로 만들겠다’는 의식을 더 강하게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이 문제가 해결되리라 봅니다. 저는 ‘바른 교회’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시간은 많이 걸리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가장 성경적이고 빠른 성장의 길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목회자들 사이에서 바른 교회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빨리 교회를 크게 키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더 앞서다 보니까, 여기에 옳지 못한 일들이 많이 발생한 것이지요. 무리한 일들이 발생하면, 꼭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을 수 있는 일들이 뒤이어 발생을 하고, 결국 교회가 당연히 해야 할 일들조차 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우리 한국교회의 성장이 벽에 부딪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모든 목회자들이 ‘성장’이라는 우상에서 일단 벗어나, ‘내가 섬기는 교회를 정말 신학적으로 바른 교회관을 가진 교회로 만들어야 되겠다’는 결심으로 차근 차근 한 걸음씩 걸어 나간다면 머지 않은 장래에 한국교회가 굉장히 달라지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물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복음에 대한 문제입니다. 즉 교회에서 복음을 바르게 깨달으면 사람들은 카톨릭으로 안 갈 것입니다. 아니 가기가 싫어질 것입니다. 본래 이 기독교가 탄생하게 된 것은 그 핵심이 복음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충, 복음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로 개신 교회에 출석을 하다가, 교회의 좋지 않은 모습을 보고는 카톨릭으로 넘어가는 분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복음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고 복음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는 것이 실제적인 대안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을 읽는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에게 교회론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한 말씀해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신학생이나 목회자들은 제가 볼 때에 우선 신실한 삶의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황된 생각을 버리고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를 보호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하고 설교를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바른 교회를 만드는 중심에는 바른 설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문제가 있거나 어려운 교회들을 보면 거의가 ‘목사님의 설교에서 들을 것이 없다’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한마디로 목사님 말씀에 은혜가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목회의 길을 가는 사람은 다른 테크닉을 자꾸 배우려고 뛰어 다니지 말고, 오직 말씀을 바르게 연구하며 교인들에게 큰 은혜를 끼칠 수 있는 설교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실한 목회자가 될 때 신실한 교회가 자연히 만들어지게 되어 있어요. 뜬구름 잡는 것에 너무 현혹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신실하게 만드는 것에 먼저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김명용/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장신대 신대원(M.Div., Th.M.)과 독일 튀빙엔 대학교(Dr.theol)에서 공부했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의 객원교수와 반석교회의 담임목사를 역임했고, 현재 장신대 조직신학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열린 신학 바른 교회론」 외 여러 권이 있다.
교회의 본질 인식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 인식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2002-01-30 09:47:38 read : 75 교회의 본질 인식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대담·김명용 (장신대 조직신학) 교수/진행·장병두 목사 오늘날 사람들이 열 명 모이면 열 가지 교회관이 생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교회에 대해 각자 다른 관점을 가졌다는 뜻인데, 교수님은 한국교회 안에 왜 이런 교회관 혼동의 문제가 생겼다고 보십니까? 교회관에 관한 문제는 사실 신학적인 문제에 그 뿌리가 놓여 있습니다. 즉 교회가 무엇이며 왜 존재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신학적 혼동이 그 원인입니다. 사실 평신도들도 나름대로 신학을 가지고 있고 신학을 공부한 분들도 자기 신학으로 교회를 보기 때문에, 선교를 중요하게 보는 분들은 선교 지향적인 교회를 좋아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거나 봉사하는 디아코니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디아코니아 지향적인 교회가 옳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니면 좀더 정치적인 것에 대해서 민감한 교회가 참 교회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소수이지만 한국 교회 안에 실질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의 중심에는 교회론의 위기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교회는 무엇이며 또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럼 교수님은 교회의 본질과 바른 역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 최근에는 제도적 교회를 거부하고 개인주의적 교회관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 지역교회의 바른 정체성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지요. 다 알고 계시겠지만, 교회의 본질은 제도나 건물이 아닙니다. 즉 눈에 보이는 건물 속에 참 교회가 있지 않고, 바른 말씀의 선포와 그 말씀에 반응하는 곳에 교회가 존재합니다. 칼 바르트는 “교회의 본질은 제도나 조직이 아니고 말씀의 사건”이라고 정의했는데, 그에 따르면, 교회가 말씀의 사건이라는 뜻은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그 말씀을 듣는 인간이 만나는 곳에,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이 응답하는 그 곳에 참 교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칼 바르트에 의하면 이 ‘말씀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제도적 교회는 우상숭배 단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 개신교 교회론에 중요한 공헌을 한 또 한 명의 신학자는 에밀 브룬너인데, 그는‘교회에 대한 오해’라는 저서에서 교회가 본질적으로 제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난 1800여 년 동안 제도와 동일시되어 왔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렇듯 바르트와 브룬너의 ‘사건으로서의 교회 개념’은 교회를 조직체로 생각하고 교권에 눈이 먼 많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참 교회가 무엇인지 일깨워 주는 좋은 도전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교회의 생명은 교회가 갖고 있는 제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사랑의 사건이 일어나는 곳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사건으로서의 교회’ 개념은 그 개념 자체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후유증을 남겼습니다. 그것은 무교회주의가 신학적으로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게 된 것입니다. 무교회주의란 ‘교회’가 필요 없다는 사상이기보다는 ‘제도적 교회’가 필요 없다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교회주의자들은 교회의 본질이 말씀의 사건이므로, 비록 그것이 제도적 교회 안이 아니라고 해도 말씀의 사건만 일어나면 모두 참 교회라고 주장했습니다. 더구나 제도적 교회가 불의한 정부의 앞잡이가 되거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권 싸움으로 여념이 없을 때, 무교회주의는 철저하게 그 정당성을 입증 받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이것은 「흩어지는 교회」라는 책을 쓴 호켄다이크에 와서는 더욱 급진적으로 발전해 “교회는 고정된 장소가 없고, 나그네로 존재한다”는 말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교회의 제도성은 거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무교회주의의 교회관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교회의 제도성에 대해 무가치하다고 결코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분명 성령의 사건이고, 오순절 성령의 강림이 없었다면 초대교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사건으로 탄생한 교회가 그 초기부터 이미 제도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에서 보듯이, 감독이라는, 교회의 매우 중요한 직제가 성령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제도성은 성령의 사건을 구현시켜가는 과정 속에서 나타났고, 교회의 제도성은 성령의 사건으로서의 교회를 도와주는 구체적인 도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교회를 위해 감독을 세운 것은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방어하고 양육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직제는 교회가 참 교회가 되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이며, 성도를 양육하고 신앙을 강화하는 데 매우 필요한 보조 수단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성령께서 직접 교회를 양육하고 인도하시지만 목사와 교사라는 인간적인 수단을 사용하셔서 양육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제도적인 교회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개의 극단적인 교회관을 주의하고 피해야 합니다. 첫째는 극단적인 중앙집권적 교회관입니다. 이는 주로 카톨릭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가시적인 제도 속에 교회의 모든 것을 가두어 버리는 교회관입니다. 이 교회관에 의하면 성령이 교회의 제도 속에 갇히게 되고 교회의 제도가 신성화되며 절대화되는 문제점이 발생합니다. 둘째는 방금 말씀드린 극단적인 개인주의 교회관으로, 교회의 제도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무교회주의로 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주로 우리 개신 교회 안에서 많이 발생합니다. 우리는 이 두 극단을 모두 경계하면서, 교회의 직제와 제도는 인정하되 그것이 언제나 성령의 활동에 봉사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교회의 직제나 제도가 말씀에 봉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령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이 교회의 제도성 역시 한 번 만들어진 것이 영원히 계속되어야 한다는 의미의 제도성은 아니라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의 필요에 따라, 있던 제도가 폐기되기도 하고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제도성은 교회를 양육하고 인도하기 위한 성령의 필요에 따라 변천되어야 하고,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성령의 ‘사건’인 동시에 ‘제도’입니다. 연관된 질문이 되겠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은 제도적인 지역 교회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혼자 조용히 교회에 와서 말씀만 듣고 돌아가거나 아예 유럽처럼 혼자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유럽에 가면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혼자서, 그러니까 제도적인 교회 밖에서, 신학적으로 사고를 하면서 제도적인 교회는 나가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의 특징은 모두 교회를 다녀 본 경험은 있는데, 뭔가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에 대해 실망을 한 것이지요. 그러한 실망들이 그들로 하여금 제도권 교회 밖에 머물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는 물론 게을러서 그럴 수도 있겠지요. 즉, 기존 교회에 대한 실망이 주된 원인이 되고 거기에 자신의 게으름도 합쳐져서 일어난 위험한 신앙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에 대한 해결책은 오직 ‘교회를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바른 교회를 만들면 결국 그분들도 자연스럽게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분들에게도 깊은 관심을 드리고 가능한 교회 안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중요한 이유는, 성도들의 신앙은 역시 공동체 속에서 가장 바르게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신앙이 자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공동체 안에 들어 와야, 서로가 서로를 가르치고 기도해주고 도와주는 가운데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교회를 가리켜 ‘성도들을 양육하는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 제도적인 교회를 떠나서는­어머니의 품을 떠나 있는 아이처럼­ 제대로 자라나기 어렵다는 뜻이지요. 결국은 ‘바른 공동체’만이 ‘바른 교회관’을 가진 성도들을 키워 낼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목회자를 중심으로 의식 있는 평신도들이 함께 협력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바른 교회관을 갖기 위해 가르쳐야 할 교회의 사명과 존재 목적은 무엇입니까? 제가 볼 때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쪽에 좀 더 무게 중심이 가 있고, 사회 역사 속에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그분의 의와 생명을 추구하여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영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좀 약하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오늘날 교회론 속에 간과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교회의 ‘역사적 책임’의 강조가 교회의 ‘영적 책임’을 희석시키고 있다는 것이긴 합니다. 이것은 상당수의 진보적 신학자들의 교회론 속에서 심각하게 나타나는데, 그들의 주장에서는 복음 전도에 대한 교회의 책임이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이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교회가 영혼 구원 외에 이웃 섬김과 디아코니아적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하는 면에서 상당 부분 낯설어하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그러한 생각들은 이원론적인 전제 속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의하면 예수님 자신이 먼저 자신의 삶을 가리켜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다시 말해 섬김의 삶이 참 제자도의 핵심인 것입니다. 즉, 교회의 삶 자체가 섬김(디아코니아)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는 많고 그리스도인들도 많다고는 하지만 사회에서의 이러한 섬김의 모습이 없는 것이 한국교회의 신뢰감을 떨어뜨렸다고 봅니다. 즉, 말씀을 듣고 세상에 나가 자신의 위치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실패함으로써 세상에 대한 교회의 이미지를 흐리고 사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것이지요. 한국 교회가 특별히 하나님 나라의 구현에 대한 책임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왜 그런 현상이 생겼다고 보십니까? 핵심적인 이유를 저는 두 가지로 보는데, 첫째는 교회 안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펠로우십’(친교)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교회에 새로운 사람이 와도 누가 누군지 모르고 관심도 없는 상황입니다. 교회의 본질적 과제 중의 하나인 ‘성도의 교제’가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처럼 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교회론의 혼동과 더불어 세상을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구현 사명에 장벽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가 대형화되어 갈수록 더욱 선명하게 나타나는데, 사실 이는 상당수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여전히 익명으로 남고 싶어하는 것도 그 원인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로는, 교회가 평신도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이 교회 안이나 세상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뚜렷하게 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교육하는 일에 상당수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전체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드리는 그 곳에만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흩어져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그 곳에도 교회의 삶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어떤 모이는 공동체로만 생각하고 흩어지는 공동체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결국 교회의 목적이 제도적인 교회의 교세 성장으로만 치달을 위험이 높습니다. 실제로 이런 현상은 이미 한국교회 안에서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과정에서는, 세상 속으로 보냄 받은 평신도들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것은 또 직업과도 관련이 있는데, 예를 들어 평신도 판사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평신도 판사가 주일날 교회에서 헌금을 담당하는 집사의 일을 하는 것도 물론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이분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의로우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이 땅에 구현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분은 하나님의 의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 실제적으로 하나님께 부름 받은 일꾼입니다. 그래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그는 의로운 하나님을 대신하는 그 역할을 이 사회 속에서 성실하게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는 어떻습니까? 자신의 직업과 구체적인 삶에 관련된 소명의 문제를 교회가 잘 안 가르치고 있고, 또 실제적으로 많은 성도들이 그 중요한 부르심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한국교회의 아주 큰 문제점 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청소부를 생각해도 이 문제는 동일합니다. 요즘 환경문제가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하나님 나라의 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하나의 큰 소명이므로, 청소부라는 역할도 그것과 직접 관련되어 있는 중요한 직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자신의 일을 스스로 비하할지는 모르겠지만,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 직업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잘 설명하고 그 깊은 소명을 실천하도록 가르쳐 나가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이렇게 교회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두 가지 큰 테두리를 생각하면서 목회를 해 나간다면 상당히 바른 교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교회의 목사는 모여 있는 제도적 교회가 잘되기만을 바라며 설교해서는 안됩니다. 교회의 삶이란, ‘모여 있는 공동체의 삶’ 뿐만 아니라, 흩어져서 살아가는 삶 전체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전체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도록 목회자는 설교해야 합니다. 교수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이렇게 교회관이 혼재하게 된 데에는 말씀을 맡은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사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목회자들이, 교회성장을 주된 목표로 하는 ‘교회내향성의 병’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칼 라너에 의하면 교회의 성직자들이 특히 이 교회내향성의 병에 걸리기가 쉽다고 하는데, 그는 독일의 나치 통치 시기에 교회가 자체 존속을 너무나도 많이 생각하고 염려한 나머지 600만 유대인의 학살을 방치한 역사야말로 교회내향성의 병의 대표적 실례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도 목회자들이 교회성장에만 너무 매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염려가 됩니다. 너무 성장 일변도로 흐른다고 할까요? 아니면 교회성장이 하나의 우상으로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니까요. 즉 대형교회가 목사님들에게는 하나의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교회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대형교회가 되고 싶어함에도 불구하고, 조사에 의하면 90년대에 들어와 오히려 교회가 정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아이러니한 현상이지요. 그렇게 우리가 성장을 목표로 하고 대형교회를 부러워하는데도 지금 한국교회는 성장을 안 하는 거예요. 교수님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한국교회가 성장을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개신교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체되어 있는 같은 기간에 카톨릭 교회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고 지금도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카톨릭 교회는 성장을 하는 반면 우리 기독교 교회는 정체에 빠졌을까요? 그 핵심은 국민들이 카톨릭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카톨릭 교회를 ‘훌륭한 교회’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가장 이미지가 좋은 종교로 카톨릭이 뽑히고, 가장 이미지가 좋은 종교인으로 신부님이 뽑히는 거예요. 카톨릭 교회와 기독교 교회의 이미지 차이는 굉장히 크게 벌어져 있습니다. 물론 신부님과 목사님 사이의 이미지 차이도 굉장히 벌어져 있지요. 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을 하거든요. “카톨릭은 정의의 상징이다”,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또 “김수환 추기경이나 명동성당은 하나의 상징적인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암암리에 사람들의 종교 선택에 영향을 미치면서 카톨릭 교회로 사람들이 몰려가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개신 교회가 성장을 멈추고 있는 것도, 개신교 성도들 중 상당수가 카톨릭으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가 카톨릭 교회 신부님들하고 대화를 해 보면 실제로 우리 개신교에서 그쪽으로 많이 개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카톨릭은 자체적으로 일반 무신론자들로부터 개종자를 많이 얻는 동시에 기존 개신교인들로부터 채우는 숫자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성장의 정체 현상 뒤에 그런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 속에서 목회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어떤 것이겠습니까? 사실 카톨릭 교회가 우리처럼 전도나 교회성장을 그리 강조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성장을 했다는 것은, 교회의 이미지와 사회적 신뢰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교회성장에 있어서 그 교회가 ‘바른 교회’가 되는 것이야말로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가장 결정적인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이 ‘교회를 반드시 성장시켜야 되겠다’는 의식보다는 ‘내가 섬기는 교회를 성경적이고 바른 교회로 만들겠다’는 의식을 더 강하게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이 문제가 해결되리라 봅니다. 저는 ‘바른 교회’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시간은 많이 걸리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가장 성경적이고 빠른 성장의 길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목회자들 사이에서 바른 교회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빨리 교회를 크게 키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더 앞서다 보니까, 여기에 옳지 못한 일들이 많이 발생한 것이지요. 무리한 일들이 발생하면, 꼭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을 수 있는 일들이 뒤이어 발생을 하고, 결국 교회가 당연히 해야 할 일들조차 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우리 한국교회의 성장이 벽에 부딪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모든 목회자들이 ‘성장’이라는 우상에서 일단 벗어나, ‘내가 섬기는 교회를 정말 신학적으로 바른 교회관을 가진 교회로 만들어야 되겠다’는 결심으로 차근 차근 한 걸음씩 걸어 나간다면 머지 않은 장래에 한국교회가 굉장히 달라지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물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복음에 대한 문제입니다. 즉 교회에서 복음을 바르게 깨달으면 사람들은 카톨릭으로 안 갈 것입니다. 아니 가기가 싫어질 것입니다. 본래 이 기독교가 탄생하게 된 것은 그 핵심이 복음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충, 복음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로 개신 교회에 출석을 하다가, 교회의 좋지 않은 모습을 보고는 카톨릭으로 넘어가는 분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복음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고 복음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는 것이 실제적인 대안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을 읽는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에게 교회론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한 말씀해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신학생이나 목회자들은 제가 볼 때에 우선 신실한 삶의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황된 생각을 버리고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를 보호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하고 설교를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바른 교회를 만드는 중심에는 바른 설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문제가 있거나 어려운 교회들을 보면 거의가 ‘목사님의 설교에서 들을 것이 없다’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한마디로 목사님 말씀에 은혜가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목회의 길을 가는 사람은 다른 테크닉을 자꾸 배우려고 뛰어 다니지 말고, 오직 말씀을 바르게 연구하며 교인들에게 큰 은혜를 끼칠 수 있는 설교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실한 목회자가 될 때 신실한 교회가 자연히 만들어지게 되어 있어요. 뜬구름 잡는 것에 너무 현혹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신실하게 만드는 것에 먼저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김명용/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장신대 신대원(M.Div., Th.M.)과 독일 튀빙엔 대학교(Dr.theol)에서 공부했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의 객원교수와 반석교회의 담임목사를 역임했고, 현재 장신대 조직신학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열린 신학 바른 교회론」 외 여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