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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불 쥐고 “유학길”/ 가족들엔 쌀 1가마와 돈 2천원 남
15불 쥐고 “유학길”/ 가족들엔 쌀 1가마와 돈 2천원 남 긴 채/ 정진경 목사 오랫동안 기도하고 준비한 보람이 있어선지 미국 LA아주사대학에서 입학을 허가한다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나는 뛸 듯이 기뻐하며 즉시 유학준비에 착수했다. 여권을 만들고 미국 비자를 신청했는데 여러 가지 보증을 서라는 주문이 까다로웠다. 주위에서는 나의 이런 행동을 어처구니없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3남매를 둔 가장이 더구나 35세나 된 나이에 미국유학을 가겠다고 들떠 있으니 말이다. 수속이 끝났으나 이제는 비행기 표를 마련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 사실을 안 주위에서 돈을 모아 비행기 표까지 사주었다. 한 친구는 내게“자네가 미국으로 유학하는 것은 모험이 아니라 미련한 행동일세. 연고도 없이 가서 얼마나 고생하려고 그러나?”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남대문시장에서 클랙션을 울릴 때 순식간에 흩어지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나는 분명히 미국에 가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것이다.” 혜화동교회 종각 밑 단칸방에 머무는 가족들에게 쌀 한 가마와 돈 2천원을 남기고 떠나는 내 마음도 아팠다. 1956년 3월, 드디어 여의도비행장에서 노스웨스트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나는 내 마음은 한껏 부풀어 있었다. 간단한 옷가지 몇 개와 성경 찬송가, 영어콘사이스 그리고 현금 15달러가 나의 전 재산이었다. 이 비행기는 토쿄에서 이틀을 머물렀는데 토쿄역 앞 여관에서 이틀을 기다리며 경비를 쓰다 보니 11달러밖에 남지 않았다. 금방 나는 스탠바이라며 계속 실랑이를 했고 결국 비행기에 입석제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는 에피소드다. LA에 도착했으나 나를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원스런 도로하며 건물 거리 풍경 등에 미국은 과연 축복받은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숙박비가 싸다는 YMCA호텔까지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들어간 나는 호텔에 도착, 즉시 침대 위에서 하나님께 감사함과 앞으로의 생활을 부탁하는 기도를 드렸다. 9월부터 시작되는 학교지만 3월에 온 것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벌고 언어를 익히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 막막하기만 했다. 기도를 마친 후 갑자기 2년 전 한국에서 만났던 장 목사님이란 분이 생각났다. 한 모임에서 우연히 뵈었는데 내가 미국에 유학 갈 의사가 있음을 밝히자 자신이 LA에 있으니 유학 오게 되면 연락하라고 했던 것이다.
16호 장기려 박사 신앙간증-사랑은 기적을 이룬다 간증/ 지상강좌
16호 장기려 박사 신앙간증-사랑은 기적을 이룬다 간증/ 지상강좌 2010/04/12 16:56 http://wrn2991.blog.me/50086422192 전용뷰어 보기 사랑은 기적을 이룬다 1971년 8월(대전 한국기독학생선교회의 여름모임)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장기려 박사는 자신의 서원대로 평생 가난한 자들에게 인술을 베풀었고, 북에 두고 온 아내를 기리며 홀로 살다 1995년 12월 25일 서울 백병원에서 86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1979년 8월 31일 라몬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1996년 1월 30일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했다. 1976년 4월 부산복음병원 원장을 은퇴(67세)한 후 병원의 옥탑방에서 별세하기 전까지 침대 머리맡에 30대 아내와 80세 아내의 사진을 보며 지냈다. <편집자주> 나는 1911년 음력 8월14일에 평북 용천 입암에서 출생한 것을 자라면서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한학자시고 어머님은 재취이어서 10년이나 젊었었다. 나는 2살까지 젖을 먹으면서 자랐는데 3살 곧 젖이 떨어진 후부터는 할머니 품에서 자라며 할머니에게 업히어 교회에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내 이름이 (장)기려로 된 것은 처음에 부친께서 기창으로 신고했었는데 후에 우리 친족 중에 같은 이름을 가진 분이 있는 것이 알려져서 기려(起呂)로 했다고 들었다. 의사 되면 빈자 위해 살 것을 서원 나의 믿음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다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다. 어려서부터 할머님에게 업히어 예배당에 다녔고 가정예배에 첨석했는데 성경말씀을 이해한 것은 퍽 뒤의 일이라 생각된다. 7살 때 한문 천자를 뜻도 모르고 단숨에 외어서 어른들에게 칭찬을 들은 것이 기억난다. 7살부터 12살까지 고향에 있는 의성(義聖)학교에 다녔다(그 학교는 장로교에서 경영, 숙부가 교장이었다). 학교에서 성경을 배웠다. 그래서 장차 요셉과 같이 되겠다, 다윗을 배울 때는 다윗과 같이 되겠다고 맘에 새겼다. 부흥회 때에는 죄가 생각나서 울어 회개했고, 지금도 몇 가지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하나는 다른 아이와의 팽이싸움에서 계속 져서 어떤 아이의 크고 무거운 팽이가 신발장에 떨어져 있는 것을 훔쳐 가지고 나의 것으로 만들어 내 것이라 우겨댔다. 그 후에 부흥회 때 도적질한 죄를 회개하라는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 아이에게 돈을 1전인지 2전을 갚아준 기억이 난다. 또 하나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을 이행할 수가 없어서 나는 죄인인 것을 느끼고 울면서 회개한 기도를 드린 것이다. 중․고등학교는 개성 송도고등 보통학교를 다녔다. 송도고보 제 3학년 때에 세례를 받았다. 3학년 때에는 선생이 되겠다고 생각해 보기도 했고, 4학년 때에는 공학을 해서 엔지니어가 되겠다고 생각해서 여순공과대학에 입학시험을 쳐 보았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5학년 졸업할 때에는 학비가 큰 문제가 되어 경성의전(학비가 가장 적게 들었다)을 택했고, 만일 입학하게 되어 의사가 된다면 의사를 보지 못하고 죽는 가련한 그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서원하고 기도했다. 의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내 뜻이라기보다는 환경에 연유된 점이 많다. 요새 말로 타의반 자의반으로 된 셈이며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외과를 전공하게 된 것도 처음에는 내과를 하려고 했던 것이 사정이 있어 외과로 전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나의 마음은 약하고 피동적이어서 비겁자의 특징을 여실히 나타냈다. 의학전문학교 때의 공부는 대학생답게 여러 참고서를 참고하면서 확실한 지식을 얻지 못했고, 겨우 강의 때 필기한 것을 암기해서 학교성적을 얻으려고 힘쓴데 지나지 않았다. 경의전을 졸업할 때 학교성적은 좋은 편이었으나 실력은 가련한 상태였다. 그리고 가세는 몰락해서 모교병원에 남아 전공하고 싶은 맘이 나서 결혼하여 생활하면서 공부를 계속하려고 생각했다. 아내와의 영원한 사랑을 다짐 동기동창 백형에게 졸업 후 전공과 연구를 위하여 의논을 했다. 가세가 빈곤하므로 결혼 후도 서울에 남아 있으면서 공부할 계획을 세웠다고 하니 동의하면서 우리의 대선배 딸이 평양 서문여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사 일을 돌보고 있는데 한번 만나보면 어떻겠는가고 권했다. 특별히 못생긴 데가 없건 만은 마음에 들지 않아 보통이라고 대답했다. 그 친구는 마음에 들었다고 이해했고, 신부 측에서는 혼인할 뜻이 있으니 태도를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신랑다운 조건이 미약했다. 인물도 왜소하고, 비겁하고, 불의에 대하여 싸울 줄도 모르고, 더구나 생활비를 벌어들일 능력이 없었다. 그런데 신부 측에서는 자꾸 뜻을 말해 달라고 독촉했다. 그래서 결혼조건으로 첫째, 예수를 믿는 사람 둘째, 나의 부모를 섬길 수 있는 사람. 셋째, 당분간 생활비를 해결을 제시했더니 신부(장봉숙)가 순종하겠다고 하여 약혼 후 1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가정예배에 충실했다. 평소에 좋아하던 그림, 음악 등 취미생활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내가 공부하고 늦게 집에 들어갈 때도 자지 않고 나를 기다려 주었고, 내가 부탁하는 것은 하나도 거절하지 않았다. 아내는 내 눈동자요 내손과 발이었다. 하루는 아내의 사랑이 느껴졌다. 만일 우리 둘 중에 누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어 이 사랑이 없어진다면 이 사랑도 거짓이란 말인가? 아니다. 육으로 있을 때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영원한 사랑이다고 느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이루게 하심은 하나님의 이 생명의 사랑을 체험하라고 하신 것임을 확인하고 그 후 내가 혼인을 주례할 때에는 이 말로서 주례사를 하게 되었다. 내 아내가 절대의 사랑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나도 아내에게 죽도록 충성하는 사랑을 주려고 결심했다. 경성의전 부속병원 외과에서 8년간 외과훈련을 마치고 1940년 평양연합기독병원 외과과장으로 취임했다. 1940년 9월에는 일본 명고옥제대(名古屋帝大) 의학부 교수회에서 나의 학위논문이 통과되어 그해 11월 의학박사 학위기가 나왔고, 평양 연합기독병원 원장이 되었다. 3개월 후 원장 재선에 떨어졌지만 묵묵히 책임을 수행하였다. 10개월 후 김명선 원장은 상여금을 다른 사람보다 많이 줬고, 8.15해방 후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위생과장으로 추대되자 그 자리를 나에게 물러주었다. 나는 1945년 5월 황달(간염)에 걸려 3개월간 누워 지냈다. 간염에 걸리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신경이 극도로 쇠약하여 전화벨이 울려도 몸서리가 났다. 8.15해방이 되자 건국하다가 죽겠다는 생각으로 일어났으나 15분 이상 걸을 수 없었다. 그래도 평안남도 임시 인민위원회의 위생과장으로 보건을 담당한다고 하루 20-30분을 걸으며 의자에 6시간 앉아 있는 것이 (보수 없이) 건국하는 마음이었다. 평양도립병원(제1인민병원) 원장이 되고, 평양의과대학 외과교수가 되었다. 1946년 봄 김일성대학이 서면서 평양의과대학은 그 대학의 의학부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교수진을 다시 심사하여 결정하였다. 나는 심사 없이 교수로 임명되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 대학 부총장이던 박일이라는 사람이 외과 강좌장이 되어달라고 간청했으나 나는 교수의 자격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1948년 9월에는 내가 청구하지도 않는 의학박사 학위를 주고 월급을 몇 배 더 주는 것이었으나 한편으로 불안하였다. 빈자에게 인술 펴고 아내 기리며 살아 평양에서 국군이 후퇴하던 1950년 12월 3일이었다. 평양에서 선교리로 건너오는 다리는 폭격으로 끊어지고 가설로 물위에 띄어 놓은 다리는 군대의 수송으로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다. 그 다리를 건너고자 피난민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나는 12월 3일 가족과 같이 그 다리 부근에 나와 기다렸다가 국군의 수송대에 관계되는 이에게 말하여 허락하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신 것으로 믿고 건너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믿음이 없었던 관계로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고 국군 의무대의 호의를 받아들여 버스를 타고 둘째 아들과 친척과 친구 몇 사람(7명)이 물이 얕게 흐르는 여울을 건너 선교리로 왔다. 부모님과 아내와 자녀 넷은 같이 오지 못했다. 후에 들은즉 12월 3일 저녁 5시부터 7시까지 일반인의 통행을 허락해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다 무사히 건너왔다고 한다. 만일 내가 그날 아침에 기도하고 결심하여 단행했더라면 그 대동강을 육지와 같이 건넜었을 것이다. 1950년 이남으로 내려와 제3육군병원에서 6개월간 징용되어 일하다가 1951년 7월 1일 영도에서 텐트 셋을 치고 부산 복음의원을 개설하여 무료진료를 실시했다. 3년간은 순전히 무료로 하고, 3년간은 1인당 백환을 받고 매일 외래환자 100명, 입원환자 10명 가량을 진료했다. 그런데 뜻밖에 송도에 현대식 2층 건물(250평)을 허락받아 그곳에서 10여년간 진료하게 되었다. 20년간에 수술이 1만여명에 달한 것도 감사할 일이다. 1968년부터 간호학교를 시작하게 되었고,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조직하여 가련한 환자를 돕게 된 일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정리: 박병선 기자> [출처] 16호 장기려 박사 신앙간증-사랑은 기적을 이룬다 |작성자 화평
1급 시각장애 서울대 법대 합격 최민석 씨의 꿈과 신앙/행2:26
1급 시각장애 서울대 법대 합격 최민석 씨의 꿈과 신앙 행2:26 앞을 전혀 볼수 없는 열악한 조건에서 서울대 법대에 합격한 1급 시각장애인 최민석(22·서울맹학교 고교부3)씨에 대한 본보 보도(2월4일자 7면)가 나간 이후 각계 각층에서 최씨에 대한 축하와 격려 메시지가 쇄도했다. 서울충신교회 박종순 목사는 “최씨의 합격은 어려운 역경속에서도 꿈을 잃지않는 자의 값진 승리이자 모든 이들의 귀감”이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간구로 일궈낸 참 신앙인의 간증”이라고 격려했다. 뇌성마비 3급 장애를 가진 아들을 두고 있는 국민일보의 한 독자는 “최씨의 합격소식을 듣고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며 “학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장애인들을 위해 최씨의 합격수기를 책으로 냈으면 좋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4일 오전,어머니 박동희(54·여의도순복음교회 집사)씨와 함께 여의도순복음교회 수요예배에 참석한 최씨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은 채 기쁜표정을 감추지 못했다.서울대 합격 소식이 알려진 후 최씨의 집은 방송과 신문사 취재진에 의해 집근처 도로가 막힐 정도. 최씨의 서울대 합격은 가족과 신앙,최씨의 끈질긴 노력이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어머니 박씨는 그 중에서도 기도를 통한 신앙생활이 가장 큰 힘이 됐다고 당당하게 고백했다. “수능시험일이 다가올수록 가족 모두가 심적 부담이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통해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떨쳐냈습니다.기도 없인 합격도 없었을 겁니다” 박씨의 일상생활은 아들의 학업보조와 교회봉사가 전부일 정도로 신앙 생활에 적극적이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구로교구 지역장이기도 한 박씨는 새벽기도와 철야기도 외에도 구역식구들에게 일일이 아들을 위한 기도를 요청하고 모일 때마다 함께 기도했다. 아울러 시각장애인을 위한 모임인 여의도순복음교회 시각교구 회원 50여명도 최씨를 위해 열렬히 중보기도를 아끼지 않았다.특히 수능시험일을 앞둔 지난해 11월 초 시각교구 회원들은 최씨가 최대한 실력을 발휘해 시험을 치를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방희철 시각교구 담당 목사는 “초등학교 5학년때 처음 본 민석이는 누구보다 의지가 강한 아이였다”며 “이번 합격은 민석이의 노력과 교구 식구들의 뜨거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말했다. 새내기 대학생활을 코앞에 둔 최씨는 사실 부푼 기대만큼 고민도 적지 않다.본격적인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독서를 위한 점자 단말기와 녹음장비 등 스스로 준비해야 할 장비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또 서울대학교에는 현재 자신처럼 중증 시각장애인을 위한 학업지원시설이 미흡한 부분이 많은 상태지만 이를 가능한 수용해 줄 움직임이다. 하지만 어머니 박씨는 아들의 걱정에 오히려 담담한 표정이다. “민석이는 고3때 이미 맹인견을 반납하고 흰지팡이로 혼자 다녔습니다.처음에는 불안했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지켜주시고 보호하신다고 믿은 뒤부터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앞으로의 대학 생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꿋꿋하게 헤쳐나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장애인 전문변호사를 꿈꾸는 최씨는 앞으로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전에 미국유학 등을 통한 다양한 경험을 희망하고 있다. 최씨의 장래희망은 중학교 때 처음 만났던 한국인 최초의 시각장애 박사인 강영우박사(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의 영향이 크다. 한편 강영우 박사는 본보와의 전화통화를 통해 “미국은 시각장애인이 거의 모든 분야에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특히 판검사,변호사가 많다”며 “민석군이 5년전 나를 찾아와 진로를 상담한 기억이 나며 앞으로 큰 비전과 꿈을 갖고 귀한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적극 돕겠다”고 말했다.또 “민석군이 장애인 전문변호사로 활동할 때 한국의 장애인 인권 및 복지가 향상될 수 있을 것”이라며 “최 군의 합격은 모든 장애인들에게 새로운 가능성과 도전을 심어주었다”고 덧붙였다. 서울대 합격이라는 목표달성은 최씨의 인생에 있어서 시작에 불과하다. 차별과 부당한 처우를 받으며 살아가는 수많은 장애인들의 대변자로서 해야 할 일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머니 박씨도 간절한 소망 한가지가 갖고 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민석이가 얼마나 많은 어려운 일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앙을 통해 꿋꿋하게 이겨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3실링의 기적/ 간증/ 2012-12-05
3실링의 기적 테레사 수녀가 캘커타에 큰 보육원을 짓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때 많은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보육원 건축기금은 얼마나 준비되어 있습니까? ” 테레사 수녀가 대답했습니다. “지금 준비된 기금은 3실링뿐입니다.” 그러면서 테레사 수녀는 책상 위에 실제로 동전 세 닢을 꺼내놓았습니다. 그러자 기자들은 웃었습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의 표정과 말은 진지했습니다. “이 3실링을 가지고 저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3실링이 하나님의 것이 될 때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일이었기에 3실링으로 보육원을 완성시켜 주셨습니다. 3실링의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나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을 세우고 하나님의 흔적을 남기기 위한 노력은 분명 이루어집니다. 나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 하나님의 일을 세우고 하나님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힘쓰십시오. 기적의 탄생 지금 이 순간 인식이 깨어 있는 사람은 달리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아름다워지고, 평화와 기쁨 그리고 행복을 자연스럽게 뿜어낸다. 고요하게 살짝 떠올리는 미소와 사랑을 담은 마음은 그 자신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며, 이들로 인해 기적이 일어난다. - 틱낫한의《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기적》 중에서 - * 기적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모두 기적입니다. 평화와 기쁨과 행복을 뿜어내는 곳이 기적의 현장입니다. 기적은 나와 동떨어진 남의 일도 아닙니다. 나의 삶, 나의 발걸음, 나의 마음 안에 늘 새롭게 태어나고 있습니다. 오늘도 많이 웃으세요.
9.11테러 극적생존자 제이콥슨 박사-“살아계신 하나님과 일대일 관계를 맺으라” 간증/ 지상강좌
9.11테러 극적생존자 제이콥슨 박사-“살아계신 하나님과 일대일 관계를 맺으라” 간증/ 지상강좌 2011/02/14 11:26 http://wrn2991.blog.me/50105270508 전용뷰어 보기 “살아계신 하나님과 일대일 관계를 맺으라” 9.11테러로 불타는 세계무역센터건물. 저의 부모님은 헐리웃과 영국의 유명한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영국 여왕의 두 번째 친척이며, 결혼을 통해 케네디 집안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종교는 어머니 쪽은 몰몬교이며, 아버지는 천주교입니다. 나는 여러 종교를 접했습니다. 주일학교는 장로교회로 나갔고, 토요일은 유대 회당에, 주일저녁에는 몰몬교에 다녔습니다. 16세 때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주셨습니다. 어린 나이에 유명한 가수와 결혼했습니다. 남편은 8년 동안 많은 고통을 주었습니다. 술과 마약에 취해 살았으며, 나를 폭행하고 많은 여자를 집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이 결혼을 지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밤 유모와 세 살 된 아기와 함께 남편의 차를 타고 가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딸과 유모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저도 거의 죽을 번했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남편을 떠나 뉴질랜드로 갔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다” 3년 반 후 아주 유명한 경주용차 선수와 결혼했습니다. 7년 동안 2명의 자녀를 낳았고, 4명을 입양하여 길렀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1989년 모나코에서 그랑프리경주 때 사망했고, 저는 백혈병에 걸렸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예수님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때 선교사가 되어 유엔을 위해 일했습니다. 평화봉사단으로 인도, 아프리카, 아시아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호주로 돌아와 영화 제작사를 만들어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청소년을 돕는 재단을 만들어 47개국에 지부를 만들었고, 미국에 430만 명의 멤버십 회원이 있습니다. 내 삶은 매우 바빴습니다. 연예계에서는 성모마리아로 알려졌고, 많은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을 등한히 하여 가족들이 아직까지 저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 북쪽 타워 101층에 있는 식당에서 파트너와 손님, 그리고 스탭진이 모여 미팅을 갖기로 했습니다. 아침 8시 15분쯤 커피를 마시러 했을 때 조수 안나가 9시 30분 또 다른 미팅이 있다고 빨리 가자고 해서 101층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도중 96층에서 큰 폭음이 들림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나를 포함해 8명이 있었습니다. 버튼을 눌렀지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불이 꺼졌고 타는 냄새가 났고 큰 폭음이 들렸습니다. 젊은 친구 한 명이 엘리베이터 천장에 있는 구멍을 열고 나가자마자, 우리 머리 위에 큰 불이 일어나고 있다고 소리쳤습니다. 그 친구는 엘리베이터 위로 기어 올라가서 엘리베이터 옆벽에 있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자고 제안했습니다. 다섯 명의 남자 여자가 기어 올라갔지만, 나는 기도하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굉장히 두렵습니다. 지금 가야된다면 빨리 가게 해주시고, 아니면 빠져나갈 힘을 주십시오.” 기도가 끝나자마자 큰 폭발과 함께 엘리베이터 위의 왼쪽에 큰 구멍이 났고, 그곳으로 올라갔던 사람들의 신체가 산산조각이 되어 떨어졌습니다. 3분 전에 얘기했던 아주머니는 하반신이 없었습니다. 다시 폭발이 일어나더니 엘리베이터 왼쪽 밑 부분에 큰 구멍을 냈습니다. 철판이 종이처럼 찢어지고 파편이 튀어 내 옆에 있던 청년은 팔이 잘렸고, 청년의 손에서 피가 쏟아지자 나는 청년의 넥타이와 허리띠를 풀어 지혈시키고 내 가방의 내용물을 쏟아 청년의 팔을 담았습니다. 안나도 화염과 열기로 인해 옷과 살이 녹아버려 가방에 있던 물을 머리에 부어주었습니다. 4번의 기적, 코마상태에서 천국체험 나는 나의 상태도 모르고 오직 거기서 빠져나갈 궁리만 했습니다. 엘리베이터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면서 벽면에 있는 사다리 있는 쪽으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둥은 신발이 탈 정도로 뜨거웠습니다. 쓰러진 기둥을 걸어 가까스로 사다리까지 가서 그 밑으로 내려가 문을 열려고 했지만 화염에 녹아서 열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어둠속을 더듬어 94층에 내려가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엘리베이터 줄이 끊어져 밑으로 떨어졌고, 그 순간 빨려 들어갈 번했습니다. 그 통로를 통해 나가보니 많은 사람이 있었고, 시체도 여기저기 널려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계단으로 몰려 서로 먼저 내려가려고 아우성쳤습니다. 64층에 이르자 두 명의 군인이 모두 팔짱을 끼라고 했고, 온전한 사람은 부상당한 사람을 부축하라고 하여 그렇게 27층까지 내려가자 구조대가 있었습니다. 소방대원은 안나의 화상 부위에 약을 뿌리면서 저에게 붕대로 머릴 감쌀 동안 움직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는 난 괜찮으니 어서 여기를 빨리 빠져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18인치 쇠 조각이 내 목 뒤에 박히면서 왼쪽 뇌를 8분의 5인치가량 관통한 심각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내 목은 이쪽 귀에서 저쪽 귀까지 잘려 목 밑에 있는 살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또한 긴 생머리는 타 없어졌고, 팔과 등과 머리와 다리에 3도 화상을 입었으며, 코가 부서졌고, 입술이 3군데나 찢어져 있었습니다. 눈 위에도 상처가 있었습니다. 소방대원들이 나를 부축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마자 뛰기 시작했고 곧바로 빌딩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4번의 기적을 본 것입니다. 의료진은 머리에 박힌 쇠 조각을 꺼내면 죽을 거라고 했습니다. 뇌가 쏟아져 나올 거라 했습니다. 살아난다고 해도 99.9퍼센트는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식물인간이 될 거라 했습니다. 마지막이 될지 모르니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그 빌딩에서 나를 내보낼 때 분명히 뜻이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한 순간도 죽지 않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제 머리의 다른 쪽을 잘라 들어가 쇠 조각을 밀어 빼내자, 뇌를 담고 있던 주머니가 쏟아져 나왔지만 쇠 조각이 빠지면서 그 자리에서 상처가 아물었습니다. 한쪽 두개골이 부서져 타이타늄 쇠를 붙였고, 목을 꿰맨 후 화상으로 인해 얼음침대에 안치했습니다. 그리고 백혈병 때문에 3개월 반 동안 코마(Coma)상태에 빠졌습니다. 의료진들은 화상으로 어그러진 피부들이 다 펴지고 상처가 아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 번의 전기충격으로 다시 살아났지만, 세 번째는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나는 죽은 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내 식구들이 나의 장례를 위해 뉴욕으로 모였습니다. 나는 그때 무엇인가 위에서 내려와 저를 붙들어 세우는 것을 느꼈고, 잠시 무아지경에 들어갔다가 푸른 초장에 서 있는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너무나 향기로운 냄새가 났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음악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라-“내 죄를 용서해 주소서” 천국이었습니다. 여섯 번째 천국을 통해 일곱 번째 천국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었습니다. 나는 육체적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빛이 나는 덩어리 속에서 예수님이 걸어 나오셨습니다. 지성소 같은 곳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습니다. 여러 창조 이전과 창조의 사건, 그리고 7년 환난과 그 이후 것도 보여주셨고, 예수님이 쓰셨던 아람어와 천국의 언어를 배워서 천사들과 대화도 하게 되었습니다. 천국은 확실한 장소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장악돼 있는 곳입니다. 저는 고대 아랍어와 옛날 히브리어를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기 때문에 유명한 학자들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많은 과학자들이 제 뇌를 조사하고 연구했습니다. 제가 되돌려 보내진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고, 제가 대표하는 모든 직책을 사임하라고 하셨습니다. 백악관에서 관장하는 세계에서 제일 큰 청소년자문회재단과 유엔 평화대사, 다른 여러 조직을 사임했고, 1억 6천8백만 불의 재산과 여러 나라에 있는 집들을 처분하고 지금은 믿음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정치지도자와 종교지도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통해 메시지를 주시기 때문에 듣는 사람은 다 들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델라, 토니 블레어, 부시 대통령 등 현재까지 468명의 지도자들 앞에서 간증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도 간증하고 메시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 메시지 일부분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일대일 관계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이 틈 탈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놓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곧 오십니다. 이 세상이 악으로 불 탈 때 휴거를 받기 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서서 의로운 길을 걸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환란과 휴거 때의 모습을 다 보았습니다, 처음과 마지막을 다 보았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많은 사람이 거짓선지자의 꼬임에 빠지고, 많은 사람이 교회를 찾고 있지만 형식만 취하며 하나님을 향한 진실 되고 의로운 마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내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하나님을 마음 상하게 한 것이 있거든 용서해 주세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보여 주옵소서’ <정리: 이중목 기자> [출처] 9.11테러 극적생존자 제이콥슨 박사-“살아계신 하나님과 일대일 관계를 맺으라” |작성자 화평
9ㆍ11사태에 일어난 우연 같은 기적/ 이희돈 장로(세계무역센터총재ㆍ워싱턴 성광교회)의 간증/ 2014-09-27
9ㆍ11사태에 일어난 우연 같은 기적/ 이희돈 장로(세계무역센터총재ㆍ워싱턴 성광교회)의 간증 ​ 1년에 한 번 있는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 이사회가 9ㆍ11사태가 일어난 날 아침 미국 뉴욕 WTC빌딩 꼭대기 층에서 조찬모임을 시작으로 열릴 예정이었다. 나는 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며칠 전부터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 그런데 전날 밤 아내가 자다가 밤새 몸을 파르르 떨면서 불안해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었다. 9월 11일 아침은 날씨가 쾌청했다. 나는 공항 로비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커피를 마시려고 했다. 커피숍이 평소보다 무척 붐벼서 수십 분 기다려도 내 차례가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인근 가게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재빨리 그 가게로 들어갔다. ​ 커피를 주문했는데 여직원이 주저하였다. 영어도 서툰 멕시칸이었고, 첫 출근이고, 커피도 내릴 줄 모른다고 했다. 뭐라도 팔아주고 싶어서 가능하다는 딸기 주스를 주문하여 몇 모금만 마시고 비행기를 탔다. 얼마 후 비행기 창밖으로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평소 습관대로 비행기 창문에 손을 대고 세계무역센터를 위해 안수기도를 했다. 쾌청한 날씨를 보니,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잘 도와주실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 갑작스런 복통 비행기에서 내려 서둘러 공항을 빠져나오는데, 갑자기 복통이 찾아왔다. 걸음을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다. 화장실에 20분여 분 정도 앉아서 내 배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 했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 맨해튼으로 차를 타고 들어가면서 시계를 보니, 105층 꼭대기 층 라운지에서 이사들이 조찬을 들고 있을 시각이었다. 세계무역센터 대표이사들이 다 왔는데, 늦다니…. 진땀이 흘렀다. 내 스텝들은 무역센터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차를 타고 가면서 오늘 모임에 참석 못 하니까 모두 철수하라고 전화했다. 두 명이 먼저 빠져나왔다. 한 명은 전화를 받지 않아 그 아내에게 연락하여 그도 빠져나왔다. ​ 이때는 비행기 한 대가 첫 번 빌딩을 막 치고 들어간 시점이었다. 빌딩은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나는 세계무역센터를 향해 계속 차를 타고 들어갔다. 당시 나는 77층 사무실을 쓰고 있었고, 조찬 후에 가질 이사회 회의장은 84층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시각 첫 번째 비행기가 정확히 84층을 치고 들어갔다. 공항 화장실에 들어가서 지체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시각 그 방에서 죽었을 것이다. ​ 차량 라디오에서도 긴급방송이 없었다. 비행기 테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나는 차에서 내려 무역센터 호텔 건물로 걸어 들어갔다. 그때 갑자기 “윙” 굉음소리가 났다. 두 번째 비행기가 내 머리 위로 지나가고 있었다. 비행기 밑바닥에 쓰인 글씨가 눈에 보일 정도로 낮게 날고 있었다. 그리고 빌딩과 충돌했다. 나는 건물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이제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비행기 파편이 부서져서 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릴 줄 알았다. 그런데 파편이 튕겨 나오지 않았다. ​ 나는 즉시 뒤로 돌아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를 집어탔다. 운전기사는 벌벌 떨고 있었다. 나는 발길질을 하며 말했다. “밟아요, 밟아!” 차는 곁에 있던 고급차 5대를 치면서 나아갔다. 마침 찻길이 텅 비어있었다. 첫 번째 빌딩이 부딪힌 후 소방차들이 출동해서 길부터 막아놓은 덕분이었다. 천우신조인지, 도로 중앙분리대도 10미터만 열려있었다. 차는 중앙분리대를 통해 반대편 진입차선으로 달려서 강 아래 터널로 들어갔다. 천우신조로 살아나 나는 순간, 반대편에서 마주 오는 차들에게 위험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 창문을 열고 비상사태라고 외쳤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를 미친 사람 보듯 했다. 터널 바깥 10여 미터 앞에 전쟁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차에 탄 사람들은 단지 자기 눈에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세상은 평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들이 평안한 뉴욕에서 살아왔다고, 아무 일 없다고 믿고 있었다. ​ 내가 위험하다고 소리치며 차를 뒤로 돌리라고 해도, 아무도 내 경고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경찰이 차로를 막아놓았기 때문에 차는 터널 안으로 길게 밀려 있었다. 결국 우리는 차를 타고 터널 반대쪽으로 빠져나왔다. 바로 그 때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마 그 긴 터널 안에 있던 사람 절반은 죽었을 것이다. 그 때 그 사람들이 내 경고를 듣고 차를 거기 세워두고 뛰어서 반대쪽으로 나갔더라면, 나처럼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내 경고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복음의 소식을 모르고 죽는 사람도 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경고에 전혀 귀를 기울일 줄 모른다. ​ 그 당시 수석 부총재 허버 위드는 내 전화를 받았는데, 2번 빌딩에 자기 아들이 60몇 층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 아들은 2번 빌딩에서 1번 빌딩이 비행기와 충돌한 상황을 창문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강 건너 불 보듯’ 하고 있었다. 조금 지나 아들이 있는 2번 빌딩도 비행기와 충돌하고 무너져 내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2번 빌딩에서는 처음에 ‘긴장하지 말고 자리에 편안히 앉아 있으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고 한다. 아들은 그래도 불안해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어떡할까요?’ 아버지도 1번 건물이 쿵 하고 흔들리는 소리는 들었지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다려 봐라. 방송에서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했으니….’ 하고 아들을 안심시켰다. 그 때 아들에게 빨리 대피하라고 했다면 아들은 살았을 것이다. ​ 허버 위드 수석 부총재는, 9ㆍ11사태 후 외아들을 잃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결국 사임하고 떠났다. 그리고 아들이 받은 보상금은 아들이 공부한 모교에 몽땅 장학금으로 기증했다. 2번 빌딩에 있던 사람들은 먼저 일어난 1번 빌딩의 사고를 보고 더 많이 살았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들은 당시 일어난 일에 대해 민감하지 못했다. 비행기가 2번 빌딩에 충돌이 일어났을 때 ‘대피하라’는 안내방송을 제때 했더라면, 많은 사람이 살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 사람이 이해 못해 그런데 2번 빌딩에 비행기가 충돌한 지점이 공교롭게도 ‘방송실’이었다. 그러니까 안내방송이 없으니까 사람들은 안심하고 있다가 죽은 것이다. 나는 그때 ‘복음전파’를 생각했다. 세상에 종말이 온다는 복음이 전해져도 사람들은 자기 눈에 그것이 보이지 않으니 믿지 않는 것과 똑 같다. 자기 코앞에 위기가 닥쳐도 망하기 전에는 그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세상에 별 일 있겠나!’ 하는 안이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 내가 사람들이 가지 않는 가게에 가서 마음에도 없는 주스를 사서 마시고 복통으로 지체하여 조찬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므로 오전 9시에 조찬과 함께 갖기로 했던 ‘세계이사회’ 회동이 점심식사 시간에 갖기로 하고 다들 내려왔다. 그리고 5분 후 빌딩이 무너져 내렸다. 그래서 15명 이사 전원이 살았다. ​ 나는 하나님은 우리 성도 한 사람만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복의 근원’으로 삼기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만 살았을 뿐만 아니라, 나로 인해 내 주변 사람들도 모두 목숨을 건졌다. 요셉도 살아났을 때 자기 혼자만 살아난 것이 아니다. 요셉 주변에 있던 바로와 애굽 백성이 모두 기근으로부터 구원받았다. 얼마 후 이 일로 뉴욕타임즈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기자가 정말 근사한 제목을 뽑았다. ​ “하나님의 섭리의 손은 가끔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불편함으로 우리에게 기적을 가져다주신다.” 그 날 아침 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하나님, 왜 이렇게 중요한 때에 저를 돕지 않으십니까!’ ‘왜 이렇게 중요한 날, 저를 꼬이게 하십니까?’ ‘제가 오늘을 위해서 얼마나 많이 기도해 온 줄 잘 아시지 않습니까!’ ​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불편함을 통해서 천하보다 소중한 내 생명을 건져 주셨고, 나만 아니라 내 동료들도 구해주셨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렇게 간증까지 할 수 있게 해주셔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희생자와 유가족들께는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한다. ​ 어떤 사람은 내 간증을 듣고 그것은 우연이었다고 말한다. ‘공부도 많이 하신 분이 왜 그런 우연히 생길 수 있는 일을 기적이라고 하느냐’며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기적 같은 우연은 기도할 때 수시로 일어난다. 이희돈 장로(세계무역센터총재ㆍ워싱턴 성광교회)
가수 김세환/ 삶을 주님께 맡기면 풍성해집니다 간증/ 지상강좌/ 2011-01-12
가수 김세환/ 삶을 주님께 맡기면 풍성해집니다 간증/ 지상강좌 “삶을 주님께 맡기면 풍성해집니다” 오늘 이렇게 수영로교회에서 성도 여러분과 주 안에서 함께 해서 주께 영광 돌립니다. 오늘 제 찬양과 간증도 얘기하기 전에 먼저 ‘오늘 집을 나서기 전’을 찬양 드리겠습니다. 오늘 집을 나서기 전 기도했나요 오늘 받을 은총 위해 기도했나요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리 앞길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시오 맘의 분이 가득 찰 때 기도 했나요 나의 앞길 막는 친구 용서했나요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리 앞길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시오 어려운 시험 닥칠 때 기도했나요 주가 함께 당하시면 능히 이기리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리 앞길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시오 나의 일생 다가도록 기도하리라 주께 맡긴 나의 생애 영원하리라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리 앞길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시오 오전에 윤형주 장로님이 아주 좋은 말씀을 하고 가신 줄 압니다. 저는 간증이 신통치 않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저는 신앙을 먼저 한 것이 아니라, 전도사역을 먼저 한 특이한 경우이기 때문에 평탄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간증도 신통치 않습니다. 저는 교회를 일찍 다닌 편입니다. 어렸을 적에 크리스마스나 명절 때 교회 가면 떡도 주고 과자도 주고 사탕도 줬기 때문에 그것 받아먹는 맛에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1975년도에 제콤이라는 미국 목사님이 제게 와서 찬송가를 부를 수 있느냐고 그래요. 그 때는 제가 잘 나가던 때였거든요. 한 대여섯 개 된다고 그랬더니 좋다고 그래요. 그래서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곽규석 장로님, 그 후 목사님이 되셨지만. 곽규석 장로님과 같이 젊은이들을 위한 예수 페스티벌을 하다가 미국 목사님과 2달간 미주전도여행을 마치고 와서 본격적으로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과 시험에서 주님을 영접한 분이 많지만, 저는 크나큰 시련 없이 주님께 다가가서 간증이 별로 신통치가 않습니다. 여러분들 기대를 많이 하셨겠지만. 재미가 없지만 사실은요, 그렇게 해 주신 주님께 저는 더 감사드립니다. 저는 항상 찬송가를 부르고 간증을 할 때마다 너무 너무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에는 그때 자주 부르던 ‘살아계신 주’를 찬양하겠습니다(찬양). 그렇게 해서 교회를 다녔지만 이제는 무슨 일이 있든지, 차를 운전하다가 좀 급박한 상황이 나면 그냥 주여, 아멘이 입에 붙어 다닙니다. 요새는. 찬양집회에 제가 특송을 하러 가면 여러 복음가수와 연예인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가수들은, 앞서 여러분들이 보신 윤형주 장로님 같은 분들이나 서수남 권사님, 윤복희 권사님 이런 분들은 자기 목소리 개성을 살리는 찬송을 많이 하게 되지요. 윤형주 장로님 같은 분은 아주 곱고 맑은 찬송을 합니다. 한번은 어느 교회에 특송을 하러 갔었는데 거기 나훈아 씨가 왔더군요. 굉장히 의아했어요. ‘아, 나훈아 씨도 예수님을 믿는구나’ 굉장히 반가웠지만 궁금했던 것은 과연 나훈아 씨가 찬송가를 부르면 어떻게 부를까 궁금했어요. 그전에 나훈아 씨가 찬송가를 부르면 이렇게 부를 거라고 장난삼아 불렀는데 진짜 이렇게 부르더라구요. 아주 구슬픈 트로트의 매력에 찬송이 너무너무 은혜스럽더군요. 그 때 가수마다 주어진 달란트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부르는 찬양은 부드럽고 경쾌한 찬양인데, 그 중에서 ‘사랑은’이라는 찬양을 하겠습니다(찬양). 고난, 시험 없이 영접케 한 주님께 감사 윤형주-송창식-김세환 찬양콘서트가 꿈 제가 앞서 부른 것은, 제가 오랜만에 찬양을 새롭게 담아서 시디를 만들었는데, 요즘에는 복음성가 가수들이 많지만 1975년도에는 복음성가 가수 분들이 그렇게 흔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테이프이나 찬양 곡을 구하기 힘들었죠. 제가 음악회나 예수 페스티발을 하다 보면 젊은 성도들이 카세트 녹음기를 가져와서 녹음을 한 후 집에 가서 반복해서 듣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느 성도 한 분이 카세트 녹음기를 가지고 제가 있는 대기실로 오셨더군요. 그러면서 저에게 “집사님 찬양을 제가 녹음했습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그래서 들어보니까, 찬송가 453장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 찬양이더군요. 제가 “아, 녹음 잘 됐네요. 제 목소리보다 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니까 그 분이 “집사님, 다시 한 번 들어 보세요.” 그래요. 뭐가 잘못 된 줄 알았어요. 다시 들어보고는 “아, 녹음 잘됐는데 뭐가 틀렸습니까.” 하니까 “가사를 주의 깊게 들어 보세요.” 그래요. 그래서 잘 들어보니까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를 ‘나는 주를 기르시는 목자요’라고 불렀더군요. 제가 아주 큰일 날 짓을 했습니다. 그때 아주 혼났지요. 그 다음에는 찬양 가사를 보고 부릅니다. 이렇게 열린 예배로 교회의 문턱이 낮아졌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여러분을 위해 이런 예배를 보는데 세상 노래도 해 달라고 해서 제 왕년에 히트곡 ‘사랑하는 마음’과 ‘길가에서’를 불러드리겠습니다(노래 부름). 이런 노래를 교회에서 하니까 굉장히 쑥스럽네요.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지만 저는 어디에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식칼이 유영철이라는 살인마의 손에 가면 사람을 해치는 도구가 되지만, 어머님의 손에 가면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도구가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과연 어디에 맡길 것인가. 세상의 헛된 욕망이라든가, 재물이라든가, 욕심에 맡기기보다는 주님의 손에 맡긴다면 여러분들의 삶이 풍부해 질것을 믿습니다. 지금 ‘아멘’ 하시는 분은 재물의 복이 있기를 축원하겠습니다. 놓치신 분께는 한 번 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주님의 손에 맡겨진다면 풍족한 삶이 될 것을 믿습니다’(아멘). 이번에는 ‘사랑의 종소리’를 찬양하겠습니다. 주께 두 손 모아 비나니 크신 은총 베푸사 밝아오는 이 아침을 환히 비춰주소서 오오 주 우리 모든 허물을 보혈의 피로 씻기어 하나님 사랑 안에서 늘 행복을 갖게 하소서 서로 믿음 안에서 서로 소망 가운데 서로 사랑 안에서 손잡고 가는 길 오오 주 사랑의 종소리가 사랑의 종소리가 이 시간 우리 모두를 감싸게 하여 주소서 주께 두 손 모아 비나니 크신 은총 베푸사 주가 예비하신 동산에 항상 있게 하소서 오오 주 우리 맘에 살며시 어둠을 밝게 하시어 진리의 말씀 안에서 늘 순종하게 하소서. 서로 참아주면서 서로 감싸주면서 서로 사랑하면서 주께로 가는 길 오오 주 사랑의 종소리가 사랑의 종소리가 이 시간 우리 모두를 감싸게 하여 주소서. 이 찬송을 부르면 우리 동료 연예인 중에서 두 분이 생각납니다. 한 분은 송창식 씨인데, 이 분은 언제부턴가 국적불명의 고구려 옷 같은 옷을 입고 나오면서 노래합니다. 윤형주 장로님하고 저하고의 공통기도제목이 있습니다. 윤 장로님과 저와 송창식 씨 셋이서 찬양 콘서트도 열고 찬양 시디도 만드는 것이 꿈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인데 언젠가는 송창식 씨도 응답해올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조영남 선배님이 생각이 납니다. 이분은 들쑥날쑥하고, 오락가락하시고,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분이시지만, 이 분도 언젠가는 꼭 돌아오실 것입니다. 지가 안 오고 배기겠습니까. 오늘 새 신자들이 많이 오셨다고 하는데, 바쁘신 금요일 저녁 피곤하고 지친 여러분께 저의 찬양과 노래가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시간이 끝나고 집에 가시면 주위 분들께 교회의 문턱이 이렇게 낮아졌고 여러분에게 열려 있다고 말씀해 주시고, 이번 주일에는 동네 교회를 찾으셔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 이렇게 주 안에서 만나서 반갑습니다. 끝으로 ‘나 주의 믿음 갖고’를 찬양하며 마치겠습니다. 나 주의 믿음 갖고 홀로 걸어도 나 믿음 갖고 노래 부르네 폭풍구름 몰아치고 하늘 덮어도 나 주의 믿음 갖고 실망치 않네 주는 내 친구 진실한 친구 끝 날까지도 주를 믿으리 폭풍구름 몰아치고 하늘 덮어도 나 주의 믿음 갖고 실망치 않네 내 주는 선한 목자 나를 인도해 사망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의 길을 인도 하시리 나 주를 따라 가리 언제까지나 주는 내 목자 선하신 목자 어디가든지 함께 하시네 폭풍구름 몰아쳐도 인도 하시니 나 주를 따라 가리 언제까지나 이중목 기자
가수 서유석의 간증-“재물로는 성공 못했으나 명예와 건강한 생활로는 성공했다” 간증/ 지상강좌
가수 서유석의 간증-“재물로는 성공 못했으나 명예와 건강한 생활로는 성공했다” 간증/ 지상강좌 2011/10/13 10:39 http://wrn2991.blog.me/50123485246 전용뷰어 보기 가수 서유석의 간증 “재물로는 성공 못했으나 명예와 건강한 생활로는 성공했다” 참, 세상이 좋아진 겁니까. 교회에서 ‘가는 세월을’ 부르고. 이 노래를 부르면서 제 청소년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저의 어머니, 아버지 모두 장로 출신이고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어렸을 때 교회를 안 가면 저의 부모님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어요. 다 나오는데. 아, 그 서 장로네 둘째 아들 왜 안 나오는 거야. 이래서 부모님이 얼굴을 못 들고 다녀요. 사실 뭐, 부모님 체면에 어릴 적 나이지만 가긴 갔어요. 신촌 연대 앞의 창천감리교회, 아주 오래된 교회에 다녔습니다. 100년이 넘었습니다. 그 교회에 장로님이 딱 한 분 계시는데 별명이 ‘개 장로’에요. 예수를 믿기 전에 엄청 술주정꾼이었어요. 술만 먹으면 개에요. 이 장로님 댁에 세퍼트 개가 있었어요. 개를 좋아하셨어요. 그 분이 장로가 됐으니 개 장로지요. 별명이. 저희 같은 어린 소년을 잘 다루셨어요. 제가 교회가면 아, 유석이 왔구나. 너 할 일이 있다는 거예요. 얼마나 반가워요. 교회 어른이 저에게 할 일이 있다고 하니 어깨가 으슥해지죠. 옛날에는 종을 쳤어요. 매달려 치는 종을 하루 세 번 치라는 거예요. 꼼짝 못하고 교회에 있는 거지요. 종에 매달리는 재미에 재밌게 쳤어요. 그러다가 아무 때나 친다고 목사님에게 따귀도 얻어맞았어요. 그런 교회생활을 어린 시절에 했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몸이 빠르고 운동을 좋아해서 청소년선발이 돼야 하는데, 저 국가대표 핸드볼 골키퍼를 지냈습니다. 서울중고등학교라는 데가 서울대학교 몇 명 들어가는 게 문제지, 대표선수가 몇 명 나오느냐는 안중에도 없는 학교입니다. 저는 늘 동창들에게 ‘임마, 개천에서 용 난 줄 알아’라고 큰소리 쳤어요. 저는 서울고등학교 최초로 국가대표 태극마크를 단 운동선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그 때 엔트리 15명을 뽑는데 50명을 뽑습니다. 핸드볼 실력만으로 뽑는 게 아니라, 합숙을 시킵니다. 한 방에 두세 명을 놓고 단체 생활하는 것도 성적을 먹여요. 그런데 15명 뽑는 데서 제가 1등이 됐어요. 대한민국에서 1등을 한 것입니다. 그 때 기도가 뭔지도 모르고, 기도하는 법도 모르고 세 끼 먹을 때는 물론이고 식사기도, 아침저녁으로 그냥 뽑아주세요 그것만 했어요. 기도를 다섯 번, 여섯 번 하니까 담배 피는 횟수가 줄더라고요. 기도하는 시간만큼 담배 피는 것을 잊을 것 아니에요. 여러 가지로 좋더군요. 국가대표 청소년 1등으로 됐어요. 세월이 흘러 내가 기도 안하고 선수생활만 했으면 뽑혔을까 안 뽑혔을까 한 10여년 생각했는데, 이제는 무조건 기도하면 된다고 믿기로 했어요. 매사를 그렇게. 아주 편해요. 사람 따위의 과학적 지식 그런 짧은 것 가지고 성경말씀을 분해하면 답답해요. 그런 사람 전도하지 마세요. 내버려 두세요. 병들 때까지, 망할 때까지. 전도 하다하다 지치면 저는 그렇게 해요. 과학과 수학으로 안 되는 것 아니잖아요. 우리는 그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매사를 그런 식으로 연결해 가지고 등식으로 풀려고 하지요.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저도 그런 적이 있어요. 저는 원체 공부를 안 했으니까 믿기도 쉬워요. 식자우환이란 말이 있잖아요. 아는 게 병. 예수 믿는 사람은 무식하다는 말은 들을지언정 경우 있다는 말은 듣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스포츠인으로, 연예인으로 좋은 것은 다 차지했습니다. 청소년 때부터 국가대표였죠. 대학 때 태극마크 달았죠. 연예계 나와 가지고 노래 몇 곡으로 유명해진 걸로 방송에 투입이 됐어요. 내가 굵고 짧게 갈 것이냐, 가늘고 길게 갈 것이냐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가늘고 길게 가야겠다고 결정했어요. 여러분이 아침에 들으셨을지 모르지만 교통프로를 만 25년 동안 했어요. 매일 새벽 4시 반에 일어나게 되니까 자연히 술 끊게 되데요. 술 먹고는 새벽 4시 반에 못 일어나잖아요. 체력이 굉장히 좋아야 돼요. 방송 후 오후에 한 시간씩 체육관에 가서 운동하게 돼요. 그러면 금방 한 주가 가요. 저는 교회 가면 교회 마당쇱니다. 주차봉사만 9년째 하고 있어요. 현관에 서 있어요. 추우나 더우나. 한 주가 왜 그리 빨리 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25년 전부터 술은 입에도 안댑니다. 다시 배울 생각도 없고요. 그런 생활 속에서 또 국가가 국민훈장을 주대요. 목련장 안전부분을. 또 생각해 봤어요. 내가 무늬만 크리스천인데, 무슨 말인지 알죠. 겉으로는 교회에 가서 십자가 앞에서 정숙하지만 뒤에 나가서는 담배도 피고, 골프도 치러 다니고, 다 해요. 다. 그런데 국가가 나에게 목련장을 줬다, 내가 예수를 안 믿었다면 줬을까 안 줬을까. 또 이게 의문이에요. 또 한 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는 기도를 참으로 오랜만에 했습니다. 저는 재물로는 성공 못했어요. 그러나 명예와 정신적 건강한 생활로는 성공했습니다. 자부합니다.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이 ‘가는 세월’ 노래 부르고, 아침에 교통프로 하는 사람이 예수 믿는 줄 몰랐어. 이런 얘기만 한 마디 해 주시면 제가 여기 온 보람이 있을 거예요. 성경 말씀에 부부얘기도 많이 나오잖아요. 그걸 눈으로만 봤지, 진짜 기독교적으로 안 본 게 사실이에요. 요즘 와서 느낀단 말이에요. 그래서 가끔 기도하다가 ‘우리 하나님도 농담 잘하실 거야. 하나님, 왜 이제 느끼게 해 주시죠’라는 실없는 소리를 기도 속에 넣어요. 이제라도 느끼게 해 주신 하나님, 고맙잖아요. 그중에 아내에게 잘해야 하는데 갑자기 하면 쇼라고 할 거잖아요. 어떻게 잘 하나. 몇 년 전에 반말을 하지 말아야 되겠다, 이것 하나 찾았어요. 정말 좋아요. 그 버릇. 아직 완벽하게 고치지는 못했습니다만…. 처음에는 ‘김신옥 씨, 나 서유석이에요.’ 그러면 놀래가지고 ‘왜 갑자기 그래요.’ ‘아 당신 이름이 김신옥 씨 아니에요.’ ‘아니 애들 이름 붙여서 누구엄마 하면 안 돼요.’ 이름은 이상하다고 해요. 굉장히 어색하다는 거예요.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니 ‘경원 엄마에요, 나 경원아빠에요.’ 이렇게 습관들여서 이제 겨우 자연스럽게 됐어요. 가늘고 길게 살자, 교통방송 25년 소중한 아내사랑 존댓말부터 실천 기독교 ‘사랑’ 노래 만드는 게 꿈 우리끼리 얘기지만 아내가 남편에게 존댓말을 들은 다음부터 어떤 분들이 밥상의 반찬이 달라진다고 하잖아요. 정말 달라져요. 현실적으로 내가 그걸 바라서가 아니라 정말 달라져요. 애들이 자라잖아요. 서로 성인으로서 인격체잖아요. 25년 동안 방송에서 잘난 척 하고 교양 있게 산 사람이 자기 아내에게 반말 한다는 것은 이율배반적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그리고 아내, 얼마나 소중합니까. 성경에도 많이 나오잖아요. 기독교인이란 사람이, 무늬만 크리스천이지만 실제 행한 것이 없다면 잘 못 믿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겨우 이것 하나 아내에 대해 실천하고 있습니다. 아내에게 내가 이담에, 우리는 어차피 천국 가야하는데 만날 때는 같이 만났는데 갈 땐 따로따로 가잖아요. 순서 없이 불러 가시잖아요. 내가 먼저 갈지, 아내가 먼저 갈지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 서로 정신이 있는 동안, 같이 믿는 동안 사랑표현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이런 노래를 자꾸 부르면, 연습하는 것이 되지 아닐까.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메어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막내아들 대학시험 뜬눈으로 지내던 밤들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큰 딸아이 결혼식 날 흘리던 눈물방울이 이제는 모두 말라 여보, 그 눈물을 기억하오. 세월이 흘러감에 흰머리가 늘어감에 모두가 떠난다고 여보 내 손을 꼭 잡았소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제 아내는 이 노래를 싫어해요. 가만히 보면, 마나님 먼저 돌아가시고 영감님이 왜 날 두고 갔소 하는 노래잖아요. 제가 이렇게 위로하죠. ‘이건 노래가 그렇고. 여보, 난 내가 먼저 죽어야 한다.’ 저희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1년 먼저 가셨는데 어머니 안 계신 아버지의 1년이란 게 처절했어요. 6개월 후 실어증까지 걸려 말을 못하셨어요. 오죽 하면 제가 ‘하나님, 저를 먼저 데려가 주세요’ 이런 기도를 하고 싶은데 아직 안 하고 있습니다. 제 아내에게 ‘걱정 마. 건강한 내가 먼저 간다.’ 이렇게 말해도 듣기 싫어해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노래로 표현하는 거지요. 자꾸 하다 보니 사랑도 새록새록 해지는 것 같아요. 예수는 어렸을 적부터 믿었는데 30년 전부터 깨달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요. 그래도 시작은 때가 없다고 하잖아요. 제가 껍데기만 크리스천이지만, 큰 것은 못하지만 작은 것은 실천하려고 무척 노력합니다. 60살이 되면 ‘사랑’을 노래로 만들어 기독교정신으로 불러야 되는데,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니 기가 질려 표현할 수가 없어요. 사랑이 1대1 이성간 이런 것도 있지만, 가족이 으뜸이 아니겠어요. 형제, 부부, 또 이웃 간의 사랑을 4분~5분짜리 노래로 해보려니까 어렵네요. 겨우 찾아낸 것이 ‘입장 바꿔 생각하는 것’이에요. 내가 네 입장이 돼 보고, 네가 내 입장이 되는 것 이게 예수님 생활이 아니겠어요. 바로 이런 걸 언젠가는 찾아내겠죠. 그때 사랑이란 두 글자를 기독교적으로 표현하는 노래를 했으면 좋겠어요. [출처] 가수 서유석의 간증-“재물로는 성공 못했으나 명예와 건강한 생활로는 성공했다” |작성자 화평
가수 이수영의 간증간증/ 지상강좌
가수 이수영의 간증간증/ 지상강좌 2012/06/15 19:41 http://wrn2991.blog.me/50143506930 전용뷰어 보기 가수 이수영의 간증 하나님 손잡고 가는 것이 제 인생에 가장 큰 행복 하나님주신 목소리 하나님노래 불러야지 어릴 적부터 가수가 꿈이었어요. 중3 때 라디오프로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주 장원을 했어요. 제가 가수의 꿈을 꾸면서 계획했던 절차 중의 첫 번째 관문이었어요. 거기서 상 받고 대학가요제 가서 그런 꿈을 꿨는데, 그전에 하나님의 계획이 계셨던 거예요. 그때는 제가 크리스천이 아니었고, 고3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된 거거든요. 고3 때 공부 시작하다가 앞으로 음악 할 거니까 가스펠이라는 장르가 있다는데 그건 뭘까, 흑인음악 같은 느낌이어서. 제가 사는 곳이 분당이었는데 그 지역 청소년사역 단체에서 가스펠 콘서트한다고 해서 그것도 모르고 그냥 갔어요. 처음에는 가수들이 나오는 걸로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게 막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가슴은 뜨겁고 눈물은 쏟아지고…. 친구 손잡고 그냥 간 건데. 친구가 나를 전도하기 위해 애를 쓴 것도 아닌데 그냥 가서 울게 되고, 그 다음날부터 제 삶이 완전히 변화되었어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그리고 호기심이 끝도 없이 시작됐어요. 고3을 온전히 전도하는 데 다 썼어요. 처음 다락방이 생겨서 말씀을 전하는 그런 시기였는데 강력한 그 말씀이 제 성격에 딱 맞았거든요. ‘복음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이런 슬로건이었어요. 제가 좀 성격이 불같은 면이 있어서 모가 아니면 도입니다. 그 말에 너무 힘이 났어요. 고 3이어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몇 달 전에 가수되기로 기획사와 계획되어 있어서 가수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 가스펠을 들어봐야지 했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 날부터 인생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가수의 꿈을 접게 되더군요. ‘하나님이 주신 목소리로 하나님의 노래를 불러야지 왜 세상 노래를 불러.’ 하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기획사에 전화했어요. 저에게는 둘도 없는 기회였고, 최고의 기회였는데 ‘저, 가수 안 해요’라고 했어요. 제가 가수하겠다고 기획사 분들에게 매달려야 하는데 오히려 가수 만들어 주겠다는데 거절한 것이 됐어요. 그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외에는 내 목소리를 쓰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처음 신앙하는 거니까. 그래서 담담하게 거절한 거지요. 기획사에서 화를 내거나 그럴 줄 알았는데 ‘나중에 가수하고 싶으면 전화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리고 가수의 꿈을 잊어버리고 그때부터 하루 종일 말씀 읽고 기도하고…. 24시간 중에 다른 친구들은 4시간 자고 20시간 공부할 때 저는 4시간 자고 20시간 전도하는 데에 시간을 다 썼어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런 믿음의 시작이었어요. 계획을 하는 거예요. 오늘은 애랑 애랑 몇 명을 찍어요. 그 애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 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나 문제 등을 사전조사하고 계속 말씀공부를 한 후에 무작정 만나서 고민을 들어주는 척하며 말씀을 전하면 그게 하나씩 하나씩 낚였어요. 저는 처음 믿음생활 시작할 때 전도가 어려운건 줄 몰랐어요. ‘하면 된다’ 라고 생각했거든요. 악몽 같은 장례식 두 번이나 겪어 고3 때 학교에 여자 반 6반이 있었어요. 제가 전도하기 좋게. 참, 하나님의 계획이 놀라운 것이, 저는 고1 때부터 유명한 학교 가수였고, 연극을 해서 아주 유명한 아이였어요. 저는 그 아이를 몰라도 그 아이는 저를 알기 때문에 너무 쉽게 찾아갈 수 있었어요. ‘야, 너 나 알지.’ 상대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성격대로 웃겨주거나 노래도 불러주고 그렇게 해서 전체에게 다 전하고, 300명 정도 전도했어요. 결신한 친구들이 거의 다였어요. 그때는 너무 신기했어요. 저희 학교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 애들도 다 전하고 열 명에 7~8명은 결신했어요. 저는 그때는 정말 몰랐어요. 그냥 당연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애들이 힘들어서 잘 먹혔어요. 너무 기뻤고. 원래는 그러면 안 되는데 복도에서 통성기도 하다가 선생님에게 맞기도 하고. 2~30명이 삥 둘러서서 손잡고 울면서 기도하니까, 고3 반 앞에서 그러니까 혼나죠. 연극할 때도 혼났어요. 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연극을 하냐고 혼냈더니 이제 기도하고 있다고 야단쳤어요. 한 2년간은 연극하는 아이로 유명하다가 1년간은 기도하는 아이로 유명해져서 교주라고도 불렸어요. 저의 집안은 불교집안이었어요. 아버지는 워낙 일찍 돌아가고요. 제가 초등학교 때. 엄마가 원래는 하나님을 믿던 분인데 결혼하고 나서 시댁의 종교가 불교여서 그렇게 됐어요.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믿음을 가지셨던 분이셨으니까 뭐라도 붙잡아야 할 마음이 그쪽으로 돌아선 거지요. 엄마는 결국 불교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제가 개신교 믿는 것을 아셨던 것 같았어요. 그때 제가 새 아버지랑 살던 때였어요. 집안이 살얼음판 같아서 집에 있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더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밖에서 더 활발한 아이일 수밖에 없었죠. 고3 때 엄마가 교회 다시는 것을 아셨는데 모른 척 해주셨어요. 제가 21살 때 가수로 데뷔하기 전 20살 때 10월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제가 여동생과 남동생의 가장이 됐어요.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을 등졌어요. 하나님께서 엄마를 데려가셔서…. 사람은 그런 상황이 오면 한 번에 다 무너져요. 너무 어렵고…. 제 나름으로는 고스란히 고3을 드려서 앞으로는 당연히 더 해주셨을 줄 알았는데. 가수도 내려놓고 고3도 내려놓았는데…. 저는 대학입학 시험도 못 봤죠. 다 안 되어지는 상황이었는데 엄마마저 돌아가시니 너무나 큰 원망이 들더라고요. 그 때는 그냥 계속 독만 남은 시기였어요. 20살의 저는. ‘그래, 하나님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세상에는 나밖에 없는 거고. 동생들 돌봐야 하고.’ 저에게는 악몽 같은 장례식장의 풍경이 두 번이나 똑같은 일로 벌어졌어요. 아빠도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똑같은 악몽이 또 되살아나서…. 장례식장에서 처음 하루는 정신 나간 듯이 울고, 그 다음날부터는 웃었어요. 울고 있으면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그만큼 독했었어요. 나와 함께 고난의 길 걸으신 하나님 새아버지랑 살아다 엄마가 돌아가시자 무일푼에 집도 없는 상황이 됐어요. 동생들 데리고. 다행히 작은 삼촌 댁에서 받아주셔서 몇 달 동안 삼촌 댁에서 생활했어요. 사고사였기 때문에 보험금이 나와 그걸로 생활하면서 다시 기획사에 전화했어요. 할 게 없었으니까. 관심이라고는 노래 외에는 없었으니까요. 다행히 받아주시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장례식장까지 와주셨어요. 그때는 몰랐어요. 당연히 생각했어요. 내가 힘들고 어려우니까 무조건 쥐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냥…. 기획사 사장님이 구세주였던 거죠. 이를 악물고 연습하고 가수가 되기 위한 노력만을 기울였어요. 가수 데뷔하고 나서도 2년 넘게 지하셋방에서 살았거든요. 동생들이랑. 처음에 히트 쳤지만 신인들은 계약관계로 제 몫이 거의 없었죠. 제일 힘들었던 게 반지하방에서 사는 것이었어요. 저의 집은 길가에서 창문을 열면 방안을 들여다볼 수 있어요. 엄마 돌아가실 때 여동생은 고 1이고, 남동생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어요. 그런데 유명해지고 그러면 좋을 줄 알았는데 더 힘들었어요. 바쁘기는 한데 돌아오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고, 자꾸 뭔가 제 안의 것이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허무하고 허망한 마음만 들었어요. ‘이렇게 해서 내가 무엇이 되고자 했던가’ 하는 생각밖에 안 드는데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깨닫지 못하고 살았어요. 계속 그런 바보 같은 생활을 한 것은 남은 건 악 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그런 저의 생활이 최고를 이룬 어느 때였어요. 가수 이지훈 씨가 같은 또랜데, 같은 회사에 소속돼 있다가 다른 회사로 옮겨가서 제가 어렵고 힘든 걸 잘 알고 있었어요. 어쨌든 제가 하나님을 등졌더라도 종교는 기독교인이라고 되어져 있어서 이 친구 보기에는 너무 안타까웠던 거예요. 이지훈 씨가 ‘왜 그러고 다니느냐’고 힐책했어요. 제가 처음 가수 되려고 찾아갔던 회사에서 이지훈 씨는 이미 고등학생 가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어서 유명했었고, 저는 그 회사에 나중에 들어가서 오다가다 몇 번 마주친 사이였어요. 그런데 자기가 처음 봤던 저는 밝고 명랑하고 강한 아이였는데 지금은 신앙생활도 하지 않고 기도라도 하고 살고 있느냐. 뭐 하고 사느냐고. 그런데 이지훈 씨 말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저에게 하신 말씀으로 뎅~ 하고 들렸어요. 그 날부터 또 다른 제가 찾아왔어요. 지훈이 손을 잡고 지훈이가 다니는 교회 새벽기도회를 한참을 쫓아다녔어요. 제가 영적으로나 마음적으로 전혀 기댈 데가 없어서 마음은 너무나 차가워져서 하루에도 백 번씩 ‘차에서 뛰어내리면 죽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할 만큼 너무 힘들었어요. 우리 하나님은 저도 모르게 지었던 죄들, 저도 모르게 받았던 상처들을 하나님이 다 끄집어내어 씻겨주셔서 너무 부끄러웠어요. 하나님도 저와 함께 고난의 길 걸으신 것을 느끼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어요. 단 한 사람도 놓치지 않으시는 그 사랑에 너무너무 감사하고, 주만 바라고 주의 손을 잡고 가는 것이 제 인생에 가장 큰 행복이고 감사예요.( [출처] 가수 이수영의 간증|작성자 화평
가수 태진아의 간증
가수 태진아의 간증 2014-11-04 11:14:32 read : 34 가수 태진아는 데뷔하여 많은 돈을 벌지 못했습니다. 꿈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역시 일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옥형이라는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아내가 돈을 벌어오면 도박의 도시 라스베가스로 달려갔습니다. 마약보다 무서운 도박꾼이 된 것입니다. 아내와의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태진아의 방탕에 끝까지 참아주었습니다. 방황의 날이 계속되고 있을 때 아내의 밤 외출이 이어졌습니다. 몰래 뒤를 밟아보니 교회에서 밤새 기도를 하고 오는 것입니다. 아내가 예수 바람이 났다고 핍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교회 가는 것만큼은 막지 말라고 눈물로 애원합니다. 듣고 보니 장모가 암 선고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남편의 방황과 어머니의 암 선고를 듣고 세상에 의지 할 데 없는 그녀는 교회에서 매일 밤 기도로 매달렸던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술이 취한 채 아내를 따라 교회에 갔습니다. 교우들이 부르는 찬송 소리에 태진아는 술이 확 깼습니다. 가수로서 노래를 많이 불렀지만 찬송 한곡이 그의 마음을 휘잡기는 처음이었습니다. 태진아는 찬송을 들으며 난생 처음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습니다. 279장입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주여 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그 후 태진아는 거듭났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았습니다. 물론 장모의 병도 완쾌되었습니다. 훗날 아내의 사랑을 생각하며 만든“옥경이”라는 노래로 크게 히트하였습니다. 태진아 집사, 그는 지금도 구원의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가장 귀한 선물/ 간증/ 2008-03-22
가장 귀한 선물/ 간증 동방박사 세 사람이 아기 예수께 예물을 드리는 동안 또 다른 한 박사가 있었다. 처음에 이들은 넷이 길을 떠났으나 알타반이라고 하는 사람은 일이 생겨서 뒤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느라 어느덧 별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도착해 보니 예수님을 경베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 드릴 예물도 점점 없어져 갔다. 자신의 몸마저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다보니 쇠약해 졌다 예수님을 만나려고 가보면 이미 예수님은 다른 곳으로 간 뒤 였다. 불쌍한 이웃을 위하여 예물도, 자신의 몸도 모두 써버린 알타반은 이제 예수님께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알타반은 드디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으나 십자가에 못박힌 뒤였다. 십자가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주님의 발에 입을 맞추는 알타반을 들어 올려 따뜻한 품에 안는 손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품이었다.
간증-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나는 백 번 천 번 수구꼴통이 되겠다” 간증/ 지상강좌
간증-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나는 백 번 천 번 수구꼴통이 되겠다” 간증/ 지상강좌 2010/07/26 15:53 http://wrn2991.blog.me/50093014230 전용뷰어 보기 “나는 백 번 천 번 수구꼴통이 되겠다”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사진 좌)와 통일연대 회원들과의 몸싸움으로 머리를 다쳐 괴로워하는 모습. 북한은 폐쇄된 사회다. 김정일은 체제유지를 위해 절대 빗장을 풀지 않을 것이다. 오늘 9시 뉴스에 일본 후지 TV가 찍은 화면이 나왔다. 북한주민들이 눈 속에 파묻힌 배춧잎을 주워 경비원들 몰래 씹어 먹고, 허허벌판에서 여자가 경비원들이 보는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소변을 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북한주민들은 거의 짐승처럼 산다. 풀을 먹고, 여자가 남자들이 보는 앞에서 소변을 보는 것이 짐승처럼 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인간으로서 상상을 초월하는 곳이 북한사회다. 북한주민들은 북한사회가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사회라고 주장한다. 북한은 교과서와 영화나 선생님의 이야기를 통해 그런 사상을 주입시킨다. 인민학교 3학년 교과서에는 아펜셀러 선교사가 평양에 교회를 차려놓고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 하나를 주워 먹었다고 10살 어린이의 얼굴에 염산으로 ‘도적’이라고 새겨 넣는 그림이 있다. 고등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는 생체실험 하는 사진도 있다. ‘과거 언더우드 선교사가 평양시 역포구역 교회지하에서 북한 젊은이들의 장기를 떼고, 피를 뽑아 미국으로 보냈다. 그렇게 돈 벌기 위해 선교를 한다’고 설명했다. 북한주민들은 ‘교회’하면 무섭고 떨리는 마음으로 바라본다. 1988년 북한에 평양에서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지어졌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북한에서 1999년 13차 세계쳥년학생축제가 열렸다. 남한에서 올림픽을 한다고 하니까 그에 맞대응하기 위해 열린 것인데 그때 오는 외국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남한 삼촌과 연락하다 발각돼 탈북 1997년 두만강을 건널 당시 북한군 대위였다. 212군부대 예술선전대 작가로 복무했다. 내가 14~15살 때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다. 혼자 고아로 살다 17살에 군대에 들어갔다. 북한의 군복무는 3년 6개월이다. 북한은 17~18살에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나간다. 11년제 의무교육을 마치면 세 가지 길을 택한다. 첫째가 군대다. 군대나가야 노동당에 가입하고 발전할 수 있다. 나와 같은 반 학생 52명 중 49명이 군대 나갔다. 북한은 아버지가 높으면 높을수록 군대에 나간다. 더 충성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다. 군대, 대학, 직장 순이다. 1976년 북한에서 베트남에 파병한다는 얘기가 있었다. 정찰병들을 모아 훈련을 했는데 안 가게 되어 제대를 시켰다. 이때 군인들이 김일성에게 군 복무를 27살까지 더 할 수 있다고 충성편지를 썼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사인하면 끝이다. 통수권자의 말이 법 위에 있다. 1999년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자 군인들이 김정일에게 30살까지 군 복무할 수 있다고 편지를 써서 13년이 됐다. 나는 16년간 군대생활 했다. 23살 때 벽돌을 머리로 깨부수고, 하루에 손으로 벽돌을 천 번 내리쳤다. 백리행군, 천리행군하면 할수록 악만 생긴다. 남조선 괴뢰도당과 미국 놈들 때문에 고생한다고, 그 놈들을 쓸어버리고 조국을 통일하자고 그냥 노래처럼 나온다. 그렇게 악만 키우다가 10년 후에 제대하고 대학가면 공부가 안 된다. 나는 사병 때 열심히 글을 써서 김형직사범대학 부속 작가학원에 추천받아 졸업하고 31살에 소위로 임관했다. 남한에는 나의 작은 아버지 두 분이 계신다. 중국 보따리상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다가 들켰다. 나를 잘 아는 장교가 알려줘서 곧장 탈출했다. 그때는 두만강만 건너면 남조선으로 가는 줄 알았다. 북한에서 ‘러시아와 중국이 혁명의 붉은 깃발을 내버리고, 사회주의를 배반하고 자본주의의 길을 갔다. 중국에만 가면 남조선 놈들이 우글거린다.’고 교육받았다. 나는 남조선으로 데려갈 사람들이 많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없었다. 중국에서 3일을 굶고 산에서 불 피우고 옷을 말렸다. 자동차 바퀴에 깔린 바나나를 주워 먹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교회였다. 사람을 죽인다는 교회를 내가 어떻게 찾아갔을까. 북한에서 레미라제블을 봤다. 거기서 우리가 배우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적어도 밥은 먹여줄 것이라 생각했다. 여전도사의 안내로 12시간 버스를 타고 연길의 조선족교회에서 머물렀다. 한국 밀항 발각, 북송 도중 탈출 내 목적지는 한국이었다. 대련에 가서 한국 배에 타려다 중국공안에게 넘겨졌다. 족쇄를 차고 42일 동안 중국 감옥에서 조사 받고, 도문의 탈북자수용소에서 8일 지낸 후 북한 군보위부원에게 넘겨졌다. 나는 호송 도중 족쇄를 찬 채 열차의 유리를 깨고 뛰어내렸다. 아무 데도 다친 데가 없었다. 앉아서 하염없이 기도했다. 8일 만에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짧았지만 자유가 그리웠다. 교회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1999년에 대한민국에 왔다. 김포공항에 내리니까 새까만 양복을 입은 국정원 조사기관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북한에서 이렇게 교육했다. ‘남한에 가면 비밀을 다 털어놓고 죽인다. 여군들이 목에 각목을 대고 눌러서 죽이고, 손에 못을 박는다.’ 까만 차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하니 문이 자동적으로 닫혔다. 정말 죽었구나 생각했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거기서 남한 사회에서 살 수 있는 기초생활을 배웠다. 자그마한 공간이지만 설비가 잘 돼 있었다. 토요일에는 간식을 줬다. 처음에 사이다를 줬다. 큰 페트병의 사이다를 숨 한 번 쉬고 다 마셨다. 북한은 계획경제체제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불필요한 것은 다 지워버린다. 1972년 사이다가 없어졌다. 그러니 어떻게 아껴 먹을 수 있겠는가. 다음에는 코카콜라를 줬다. 코카콜라는 북한의 외화상점에만 있다. 외국인이 고객이다. 나도 그곳에 한 번 간 적이 있다. 미국 놈 것은 없을 줄 알았는데 콜라 캔이 있었다. 당시 값이 바꿈돈 1원이었다. 야매로는 100원이다. 북한노동자 한 달 임금이 100원이니, 콜라 사 먹을 사람이 없다. 나는 불로장생약으로 생각했다. 나와 한 방을 쓰던 사람은 장교출신으로 북한에서 전문해커였다. 그와 한국의 음료수 168개를 찾고는 포기했다. 계속 신제품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이발소에 갔다. 머리를 깎은 후 주인이 물을 줘서 마셨더니 가그린이라고 했다. 이발소에 있던 아주머니는 입을 가리고 웃고, 애들을 소리 내어 웃었다. 도망치듯 나와 하염없이 하늘을 보며 가슴을 쳤다. ‘나쁜 놈들. 북한 사회주의가 최고라고 하던 선생님과 마을 어른들에게 분노가 치밀었고, 하나님처럼 받들었던 김일성과 김정일이 개새끼처럼 보였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정신적 불구자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원통해 눈물을 흘렸다. 인터넷방송으로 남한실상 알릴 터 3개월 만에 처음으로 명동으로 외출을 나갔다. 차에서 내려 머리를 척 드니 20대 초반 남녀가 보였다. 청바지에 구멍이 나서 거지로 생각했다. 여자 브라자를 파는 가판대에서 한참 머물렀다. 북한에서는 ‘가슴띠’ ‘젖싸개’라고 한다. 종류를 세어보니 18가지였다. 색깔 다른 것은 24가지였다. 기절할 뻔 했다. 북한에서는 사이다 공장이 없어졌듯 80년대 중반 가슴띠 공장이 없어졌다. 여성들은 스스로 만들어 쓴다. 1992년 김정일이 평양주민들에게 중국에서 분홍색 브라자를 수입해서 나눠줬다. 여성들은 사용하지 않고 가보처럼 보관했다. 그런 장면이 연상되자 눈이 뒤집히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영락교회에서 집사 된 지 얼마 안 된다. 탈북자 중에서 열심히 제일 먼저 교회에 나간다. 나는 연세대학 3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했고, 중앙대 예술대학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탈북자 1호 시인으로도 등단했다.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으로 상근하며 인터넷방송국에 매달리고 있다. 남한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봤다. 촛불시위, 반미시위, 친북성향을 띤 여러 단체들의 움직임. 나는 동물적으로 확신한다. 김정일은 죽어도 변하지 않는다. 그의 통일은 무력통일이다. ‘우리 민족끼리’ ‘자주’ 이런 구호를 내놓으니까 일부 남한인사들은 민족끼린데 뭐가 잘못 됐냐고 비판한다. 반대하는 자들을 수구꼴통이라고 한다. 김정일의 무력통일을 잘 아는 나는 백 번, 천 번 수구꼴통이 되겠다. 김일성은 6.25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동족을 죽였다. 김정일은 수백만 북한 주민민족을 굶어죽게 했다. 김정일은 간책으로 남한의 분열을 노리는데 남한의 많은 사람이 동조하고 있다. 우리 탈북자 4천 명이 그들 한 명을 못 당한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우리가 살아온 인생역정을 알리는 것뿐이다. 우리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인터넷방송국(자유북한방송)을 만들었다. 김일성이 탄생한 4월 15일에 개국하기로 했다. 남한 주민들에게 우리가 겪은 것 그대로 방송할 것이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우리 민족끼리’, ‘자주’를 계속 주장할 것인가 이런 엄숙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리고 북한주민들에게 남한의 실상을 알려줄 것이다. KBS 사회교육방송에서는 ‘지금 때가 어느 때인가’ 라며 단번에 묵살했다. 그러나 북한으로 15분간 매일 방송할 기회를 잡았다.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제작비를 지원해 주겠다고 했다. 우리가 방송을 한다고 해서 남한과 북한사회가 변하지는 않는다. 우리 민족의 통일은 주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확신한다. 코카콜라 1캔과 한 달 노임을 바꿔야 하는 북한주민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란다. [출처] 간증-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나는 백 번 천 번 수구꼴통이 되겠다” |작성자 화평
간증-이희돈 워싱턴 성광교회 장로(세계무역센터협회 총재) 간증/ 지상강좌
간증-이희돈 워싱턴 성광교회 장로(세계무역센터협회 총재) 간증/ 지상강좌 2010/06/11 16:00 http://wrn2991.blog.me/50090113865 전용뷰어 보기 “하나님은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 버리지 않아” 이희돈(48)장로는 서울 출신으로 스페인 마드리드국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HMC 종신교수와 세계무역센터협회(WTC) 총재로 재임 중이다. 9·11 테러 발생 당일 이 총재는 세계무역센터 110층에 열리는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아침에 먹은 음식이 잘못돼 모임에 30분 늦게 도착해 화를 면했다. 비행기 동체가 꽂힌 무역센터 77층이 이 총재의 방이었다. 이 간증은 무역센터 부총재 시절인 지난 2006년 2월 11일 영국 런던의 한 교회에서 가진 것으로 본지가 발췌 정리한다. <편집자주> 세계무역센터는 세계 92개국 320개의 무역센터를 관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세계무역센터 이사를 역임했고, 수석부총재가 되었다. 60살 이상이 돼야 이사가 될 수 있는데 나는 38세에 세계이사가 됐다. 아무 것도 아닌 나 같은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런던에는 세계무역센터를 건립하기 위해 왔다. 유럽에서 힘든 삶을 살았다. 사람들은 내가 미국의 주류사회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그러나 믿음이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칠 수 있는 것이다. 비전은 하나님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일을 믿고 행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을 위한 꿈을 가지고 할 수 있음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그런 작은 믿음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나는 시간이 없다. 15분마다 스케줄이 잡혀있다. 삶은 우선순위의 문제다. 무엇을 위해 사느냐가 중요하다. 새벽 3시 반에 일어나야 다른 나라와 교류할 수 있다. 전세계 320개의 무역센터는 하루 한 곳을 다녀도 3년이 걸린다. 그러나 새벽기도는 하루도 빠지지 않는다. 이번 달에도 세계를 두 번 이상 돌아다녔다. 어떤 때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세계를 돌아다녀야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하나님과 기도를 통해서도 하나님과 더불어 세계를 품에 안을 수 있다. 하나님 앞에 무릎 끓고 기도하지 않는 삶은 결단코 비전을 가질 수 없다. 나는 매주 금요일에 철야기도를 한다. 성전에서 혼자 침낭에서 잔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이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그런 정성을 드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이끄시겠는가. 나의 삶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나는 시간의 십일조도 드린다. 1년의 10분의 1은 해외선교에 나선다. 나는 한 번도 휴가를 보낸 적이 없다. 오지에서 선교사들과 보낸다. 유럽에서 무지하게 고생하며 꿈을 키웠다. 역경은 왜 오는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이다. 나를 축복하기 위해서다. 내가 유럽에 올 때 나의 부모님은 비행기 표만 주었다. 그것도 원 웨이 티켓이었다. 가서 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어머니가 준 봉투 속에는 돈은 없고,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 너를 도울 것이다.’는 글이 쓰인 종이만 있었다. 공항에는 아무도 안 나왔다. 40세에 수상급들과 겨뤄 WTC 수석부총재 올라 주1회 철야기도…“정성 없이 어떻게 이끄시나” 유럽에서 공부하면서 선교에 대한 꿈을 잊지 않았다. 성적은 중간이었다. 유럽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비했지만, 시간의 50퍼센트는 전도에 투자했다. 갈 표만 가지고 전도여행을 떠났다.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하고 싶어 찾아갔다. 직원은 학장을 만날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위의 사람이 보내서 왔다“고 말하자 놀라서 면담을 주선했다. 직원은 내가 대통령의 소개서를 지침하고 온 줄 알았을 것이다. 학장은 소개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하나님이 보내서 왔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학교에 들어오려면 정식으로 입학원서를 제출해야 한다며 난색을 표명했으나, 나는 확실한 비전을 제시했다. “옥스퍼드가 투자해서 손해 볼 것 없다. 빨리 잡으라. 배낭 메고 오는 사람 봤느냐.”고 반문했다. 하루를 기다리니 스칼라십을 줬다. 그래도 걱정이 됐다. 다음으로 캠브리지대학의 캠브리지 미션을 찾아갔다. 나는 옥스퍼드에서 스칼라십을 받았으나 먹고 입고 잘 데가 없으니, 일하며 먹고 입고 자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담당자는 다음날 오라고 했다. 학교 층계에서 자고 다음날 가니 중국말을 아느냐고 물었다. 말은 모르나 중국 글은 안다고 하자, 중국성경을 가져왔다. 성경은 다 알기 때문에 한문글자를 보고 설명하자 반색을 하며 중국계 선교담당을 맡겨줬다. 그렇게 해서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에 다녔다. 과연 하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셨다. 유럽에서 미국에 갔다. 박사학위가 끝나지 않았을 때다. 사람들은 내가 받은 학위를 가짜라며 믿지 않았다. 학력이 너무 많이 겹친다는 것이다. 그 나이에 그렇게 학위를 받을 수 있느냐고 의심했던 것이다. 도전하는 사람에게는 못 이룰 것이 없다. 마음에 믿음이 있고, 하나님과 같이 여행하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선교센터가 미국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미국에 가겠다고 하자 선배들이 미쳤다고 했다. 이번에는 절대 안 된다. 결혼도 안 했고, 돈도 없고, 재정증명해 줄 사람도 없기 때문이라 했다. 마음속으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보내겠다는데 자기가 뭐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도한 다음 글을 썼다. 내가 미국에 들어가야 할 10가지 이유를 용지 1장에 써서 그것만 미국대사관에 제출했다. 직원은 결격사유가 많아 영수증을 안 주고 영사에게 보고했고, 한참 후 영사와 면담했다. 그는 “이 글을 당신이 썼느냐, 이렇게 믿느냐, 미국에 도움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3시간 만에 비자를 내주었다. 나는 1년에 2백만 불 이상 헌금한다. 내가 수석부총재가 될 때 굉장히 어려웠다. 아내만 나를 믿어줬다. 우리 총재에게 출마해도 되겠느냐 하니 ‘노’라고 답했다. 그러나 아내는 “당신 같은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이 누구를 쓰시겠느냐. 당신 같은 사람에게서 쓰여져야 하나님의 뜻인 줄 안다.”며 격려했다. 기도하는 중에 ‘30밖에 없는데 30으로 하겠다고? 그러면 네가 다른 점을 얘기해 보라.’는 생각이 떠올라 기도했다. ‘하나님, 세계무역센터에서 총재를 보기 전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하나님만을 위해 사는 사람 보셨습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사람은 하나님이 버리지 않는다. 캐나다에서 회의가 열렸다. 각국의 수상도 하고, 나보다 20~30세 나이도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내 이름은 거론도 안됐다. 미국과 유럽이 경쟁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미국 팀의 리더가 일어나 “지금까지 일하는 것을 봤는데 데이빌 리가 최고 적격자다.”고 말했다. 총재도 “우리가 새로운 길을 가야하는데, 하나가 되어 이 사람을 뽑자”고 지지하자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작년에 제네바 회의에서 나에 대한 재신임투표가 있었다. 반대파는 이번 기회를 놓치면 내가 후계자(총재)가 되니 나를 떨어뜨리기 위해 비밀투표를 했다. 그러나 재신임됐다. 이렇게 해서 파워 있는 수석부총재가 되었다. 하나님의 일은 굉장히 익사이트하다. 유럽에서 공부한 사람은 미국에서 굉장히 우대받는다. 그러나 친구들은 나를 걱정했다. 그 실력 가지고 밥 먹고 살겠냐고. 나는 “하나님은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주신다.”고 말했다. 나중에 이 말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근간이 됐다. 29살에 캘리포니아주립대학 교수가 됐는데 교수임명 시 “네가 실력이 있어 된 것이 아니라 희소가치가 있어서다. 나이도 젊고 여러 나라에서 공부했고, 여러 나라 언어를 알기 때문이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추월당한다.”며 과소평가했다. 미국에 갔으나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 눈물밖에 안 나왔다. 가장 비참하고 힘든 상황이었다. 그 후 실력을 보장받기 위해 여러 나라에 논문을 보냈는데 교토대학에서 초빙교수로 초청했다. 나는 아내에게 “고생 끝 행복시작”이라 말했다. 아내는 기도한 후 말했다. “늘 선교 나가겠다고 말한 사람이 지금 안 나가면 언제 나가겠는가.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고 쏘아붙였다. 처음으로 결혼한 것을 후회했다. 결국 아내의 말대로 멕시코 적도지방의 선교사로 나갔다. 학교에서는 돌아와도 자리 없다며 만류했다. 선교지는 목욕도 할 수 없는 곳이었다. 벼룩이 개미떼처럼 덤벼들었다. 무지 고생했다. 전도의 열매가 무어냐고 기도했다. 밤하늘의 별이 보였다. ‘너는 별만큼 선교하는 사람을 별만큼 도우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응답받았으니 나가자고 했다. 그러나 아내는 “잔칫집에서 앞자리에 앉았다가 주인이 뒤로 나가라 하면 얼마나 창피한가. 뒤에 앉았다가 앞으로 나오라 하면 영광이다. 하나님이 나오라 할 때까지 기다리자”며 반대했다. 국제무역센터에서는 날마다 나오라고 펙스를 보냈다. 나오라고 사정해도 안 나가자 반대로 내 주가가 올라갔다. 유례가 없을 정도로 수직상승했다. 노르웨이 국왕과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궁정에 초대받았다. 그 후 다시 초대받았으나 예배시간과 겹쳤다. 두 왕가의 약속을 취소했다. 예배드리기 위해 비행기 타고 갔다. 새벽기도는 하나님께 달라고 기도하는 시간이 아니다. 사탄이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 앞에 믿음의 길을 가야 한다. 나는 5개국어를 한다. 내 친구들은 방언을 하지만 나만 못했다. 나는 외국어로만 기도한다. 새벽기도에서 동시통역도 한다. 하나님 앞에서 못할 것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아지처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무나 기쁘다. 하나님께 맡기면, 꿈이 인정만 되면, 하나님 앞으로 향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받으신다. <정리=이중목 기자> [출처] 간증-이희돈 워싱턴 성광교회 장로(세계무역센터협회 총재) |작성자 화평
간증/ 2009-08-01
간증 할렐루야! 먼저 하나님께 모든 영광 돌립니다. 저는 제가 체험한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전하고자 글을 올립니다. 제 나이는 25세이고,2004년 9월에 외국의 대학으로 공부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피아노를 전공합니다. 환경과 문화가 다른 곳에서 1년정도 혼자 생활하려다 보니 많이 힘들고 지쳤습니다. 극복하고자 애도 써 보았습니다. 점점 더 그러한 상태로 되어지다가 2학기를 끝내고,많이 벅차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영육간에 약해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방법 저 방법 써 보고,결국에는 기도를 통해서 치료와 회복을 받았습니다. 올해는 학교에 다니고 있고,운동을 하면서 그러한 활동을 통해 더욱 강건함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기도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 선교 사명을 주셔서 그러한 비젼을 갖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기도는 능력이 있고,우리가 가장 힘써야 할 일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저는 기도원을 선전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원장님은 모르고 계십니다. 또 그런 걸 싫어하시고요. 다만 제가 만난 하나님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에 너무 감사하고,또 어려운 문제들을 가지신 분들이 같이 기도하면서 은혜 나누기를 원하고 주님의 뜻을 알아 행하기를 원함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기도하면서 여러 어려운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을 목격하였기에 감히 이글을 올립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셨습니까? 하나님을 만나야 문제 해결이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간증/ MBC 아나운서 최윤영
간증/ MBC 아나운서 최윤영 “하나님은 바라는 것보다 더 많이 얹어 주시는 분” 목사님께서 앙코르를 너무 강조하셔서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오늘 처음 녹화를 방금 마치고 왔는데요. ‘꼭 한 번 만나고 싶다’는 프로그램도 MBC에서 제가 맡게 되었거든요. 금요일 저녁 7시 20분입니다. 꼭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MBC에서 아나운서로 일하고 있는 최윤영입니다. 연륜이 짧은 제가 여러분들과 나눌 수 있는 얘기가 얼마나 될까 해서 처음에 간증 얘기를 들었을 때 많이 망설였습니다. 저는 예수님 자랑할 것밖에 없거든요. 정말. 그래서 용기를 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지금 굉장히 떨리고요. 4대째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 저는 4대째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증조할머니부터 예수님을 영접했어요. 그리고 외가 쪽으로도 3대째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고, 거기다 저의 어머니, 지금 이 자리에 오셨는데 너무너무 독실한 크리스천이셔요. 1년 365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예배를 거르지 않는 그런 분이십니다. 저는 저의 할머니들께서 기도해 주신 것, 어머니의 기도의 저축통장에서 축복만 빼 먹고 살고 있습니다. 참 그렇게 느낄 때가 많아요. 저는 너무나 연약하고, 보잘 것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존재인데 정말로 축복을 받으면서 살고 있구나. 제가 하는 건 없이 너무나 많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구나 그런 과분한 축복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제가 고등학교 대학교 또 방송을 하게 된 계기라든가 또 MBC에 입사한 것까지 그 단편적인 얘기들만 가지고 제가 뭐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데 제 힘으로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철저히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만들어 주신 그런 과정이었어요. 그 얘기를 하자면 1년 365일 모자랄 정도로 정말 여러분들께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데, 하나님은 제가 가진 것보다 항상 더 많이 얹어주신 그런 분이십니다. 제가 모태신앙입니다. 저의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예수님을 알고 교회를 다녔는데, 정말로 인격적으로 하나님이라는 구체적인 인격을, 그러니까 최윤영의 하나님을 만난 건 중학교 찬양집회 때였어요. 하나님은 다가가시는 방법이 다 다른데, 저한테는 아무런 동기도 없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찬양을 하다 저를 그냥 만나주셨어요. 너무 감격스럽고, 너무 벅차고, 너무 감사하고 막 눈물이 흐르는데 어떻게 주체를 못하겠더라고요. 그 다음부터는 항상 제 옆에서 늘 저와 함께 다녀주십니다. 그걸 느껴본 분들은 알 거예요. 정말 내 옆에 계신다는 것을 항상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방송 일은 내 일이 아니다’ 생각 그리고 기도를 해도 그냥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과 대화를 하게 돼요. 내가 필요한 것을 막 조를 때도 있고, 애처럼. 또 하나님과 상의하고 의논할 때도 있고. 그냥 여기까지만 들으면 하나님이 얘를 참 많이 보호해주셨구나. 무조건 축복만 해주셨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모르겠는데요. 저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아나운서가 꿈이었거든요. 그래서 방송이라는 게 정말 평생 업으로 삼아도 좋은 건지, 정말 나한테 맞는 건지. 그게 알아보고 싶어서 리포터로 방송 일을 시작했습니다. 대학교 4학년 때였는데요. 교육방송에서 하는 한 작은 프로그램이었어요. 딱 7분 나가는데 그 7분 중에서도 제가 나가는 부분은 왜, 여러분들도 화면 보시면 알겠지만, 다른 그림 다 나가고 리포터가 나가는 건 1분, 2분 정도밖에 안되잖아요. 그 7분짜리 작은 코너에 1분, 2분을 나가기 위해 나흘을 아침부터 밤까지 꼬박 일을 했어요. 제가 처음에 방송 시작하기 전에 몰랐던 그런 부분들, 정말 힘들고 너무 괴롭고….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 내가 방송 잘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이게 나의 적성에 맞지도 않은 것 같고…. 그래서 많이 울고요. 또 토론이 굉장히 많아요. 해보면. 저보다 더 어렵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으신 분도 있겠지만 저보다 정말 많이 울고 힘들고 그랬습니다. 몇몇 분이 가끔 이런 말을 할 때가 있어요.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방송인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는데, 그런 말씀 들을 때 조금 섭섭하기도 해요. 그런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서 이건 내 길이 아니다 확신을 했어요. 내 길을 내가 개척해 보자. 그때 한창 어학연수가 유행이었기 때문에 어학연수를 떠나려고 마음먹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서류를 여기저기 다니며 신청을 하러 가봤는데, 이상하게도 제가 늦게 준비한 것도 아닌데 마감됐다, 다음 클래스에 신청해라, 그리고 다음날 다른 데를 찾아가 보면 바로 어제 마감이 됐는데요, 하루만 빨리 오시지요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얼마나 원망을 한지 모릅니다. 방송도 못하는데 이렇게 어학연수 가려는 저의 의지까지 막으십니까. 이런 원망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제가 지금 생각해도 너무 부끄럽고 어이가 없는데요. 개척하려던 길 다 막혀 하나님원망 그래도 내가 내 길을 개척해 보겠다고 여기저기 동분서주하고 있는데, SBS 접속무비월드란 프로그램에서 전화가 왔어요. EBS 프로그램를 봤는데 같이 한 번 일 해보고 싶다는 연락이 왔어요. 그리고 몇 주 뒤에는 한밤의 TV에서 같이 일해 보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일주일에 딱 한 번 있는 교육방송의 7분짜리 코너에 1분, 2분 나가는 저를 보고서…. 저희 방송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야, 정말 너는 운이 좋다고 말할 정도로 정말 드문 일이거든요. ‘나는 안 해, 방송 못해.’ 딱 마음을 먹은 그 순간부터 길이 열렸어요. 항상 꿈이 아나운서였기 때문에 프리랜서로 대학교 다닐 때 방송을 하다가 모 방송국의 아나운서 시험을 봤습니다. 감사하게도 합격을 했어요. 그런데 그 전에 우연히 찍게 된 광고 때문에 이 합격이 취소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이 뛰어다니면서 사정사정 했어요. 막 울면서. 아나운서는 방송국 직원이기 때문에 다른 광고를 할 수 없게 돼 있거든요. 사규상. 그래서 광고회사에 쫓아가서 사정사정을 하고 취소해 달라고 했는데, 광고회사도 그게 일인데 그걸 어떻게 들어줄 수가 있겠어요. 저는 너무너무 낙심했고 마음고생이 심했지요. 정말 될 것 같이 될 것 같이 될 듯 될 듯 했는데도 안 되는 그 시간 속에 정말 많이 울고, 정말 많이 실망하기도 하고, 사회는 이렇게 매정한 데구나 저 혼자 괴로워하고.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MBC 에 입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안 된다고 했던, 모 방송국 시험 때문에 광고를 조정해 달라고 해도 안 된다고 했던 그 광고회사가 MBC에 입사를 며칠 앞두고 있는데, 어떻게 할 거냐 이런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갑자기 양보를 해주겠다는 거예요. 갑자기. 너무 감사하고 고맙다고 하며 MBC에 입사하게 됐습니다. 최선의 길 열어주신 주님 그 과정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계속 원망한 거예요. 하나님, 그냥 들어가게 해 주시지, 차라리 광고를 찍게 하지 마시지 왜 이렇게 저에게 힘들게 하셨습니까. 그때도 교만하게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았습니다. 모 방송국에서 일하는 저랑 친했던 분들에게서 ‘이런 저런 일이 있어서 네가 거기에 들어갔으면 조금 마음고생을 했을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그 방송사에 계시는 분들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저는 MBC에 들어와서 너무도 감사하게 아주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여러분을 자주 찾아뵐 수 있게 됐고, 너무도 감사한 그런 일들이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정말 주님이 어려움을 통해서 저를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이끄시고 계시는구나 이런 걸 알게 됐어요. 항상 주님은 저에게 최선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때 인도해 주신 것 생각하면 계속 눈물이 나요. 사실 이 얘기 목사님께도 했는데 그런데 제가 거만해질까봐 제가 그런 과정들을 거치지 않았으면 내 힘으로 아나운서가 됐다고 생각할까봐, 그런 착각을 하게 될까봐 하나님이 그런 과정들을 통해서 저를 연단시키고 단련시켜 주신 것 같습니다.( [출처] MBC 아나운서 최윤영 간증|작성자 화평
간증/ 김영주 판사 -하나님의 간증이 되게 하신 하나님 간증/ 지상강좌
간증/ 김영주 판사 -하나님의 간증이 되게 하신 하나님 간증/ 지상강좌 2010/09/09 15:07 http://wrn2991.blog.me/50095877659 전용뷰어 보기 간증/ 김영주 판사 하나님의 간증이 되게 하신 하나님 (2010. 8. 26) 간증하는 김영주 판사.1982년생. 인하대 법학과 졸, 49회 사법고시,39기 사법연수원, 현 창원지법 판사 나는 믿지 않는 가정에서 자랐다. 고2 때 우연히 받은 성경책을 뒤적이다 시편 150편 6절의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는 말씀을 보고 순간 ‘나도 호흡을 하고 있으니 여호와를 찬양해야 하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학교 친구와 교회에 가서는 ‘주만 바라볼지라’는 헌금찬송을 듣고 눈물이 났다. 그 때부터 혼자 말씀 듣고 돌아오는 교회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에 들어가 하나님께 봉사하고 싶어 사랑부 봉사를 시작했다. 대학 4학년이 되자 특별한 꿈도 없었지만 진로가 고민되어 교회에 다니는 사촌언니와 아르바이트했던 보습학원 원장님 두 분께 나의 진로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로부터 두세 달 후 거의 동시에 ‘하나님께서 고시공부를 원하시는 것 같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당시 인하대 법학과에는 고시 공부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딱 3년만 공부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나의 진로 ‘기도해 달라’ 부탁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승낙해 주셨다. 친구들은 취직할 때였다. 나는 공부를 썩 잘한 편이 아니었기에 부모님께 비용을 달라기가 죄송했다. 살아갈 수 있는 최소비용만 가지고 신림동고시촌의 책상 하나 덩그러니 있는 방에 짐을 풀었다. 그러나 너무 행복했다. 그동안 한 번도 부모님께 교회 다닌다는 말을 못했다. 부모님이 워낙 교회를 싫어하셨기 때문에 집에서 성경책을 읽거나 무릎 꿇고 기도하지 못했다. 환경은 최악이었으나 마음껏 성경을 읽을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고, 주일에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어 정말 행복했다. 고시생들의 생활은 단순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공부하고 밥 먹고 다시 공부하다 지쳐 쓰러져 자고 다시 일어나 공부하는 생활의 연속이다. 나는 하나님으로 인해 시작한 공부였고, 하나님이 즐거운 마음을 주시니까 공부하는 게 너무 즐거웠다. 공부가 내 인생의 우상이 되고 있었다. 주일에도 공부하고 싶어 ‘대예배만 드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사랑부봉사도 그만 두고 싶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뒤엎는 사건이 벌어졌다. 주일 캠프에 가서 아이를 데리고 산책했지만 공부 생각만하다가 길을 잃었고, 다리가 아프다는 아이를 업고 가다 넘어져 정강이뼈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그런데 아이의 걱정보다 ‘시험에 떨어져도 좋으니 사랑부를 계속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회개의 기도가 나왔다. 아이 어머니는 오히려 나를 위로해줬고, 아이는 깁스를 하고 매주 교회에 나왔다. 사법시험 1차를 봤다. 그 때는 주일에 시험을 치렀다.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때인데도 시험 보러 가는 게 너무 싫었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보고 싶었고, 대예배도 드리고 싶은데 교회에 갈 수 없어서 속상했다. 하나님께 처음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붙여주세요. 떨어지면 내년에도 또 교회에 못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다. 1차 사법고시에 떨어진 해 집안에 악재가 겹쳤다. 가게에 불이 나서 아버지가 화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했고, 어머니는 관절염으로 수술 받아 역시 병원에 입원했으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부모님의 간병을 위해 집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사탄은 부모님께 완악한 마음을 줬다. 어머니는 ‘우리 가정이 힘든 것은 너 때문이다. 네가 교회 다녀서 그렇다.’며 성경책과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을 버렸다. 집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학원 오전반을 끊어놓고 조금 일찍 나와 새벽예배를 드리면서 ‘사법고시고 뭐고 다 필요 없고, 그냥 믿는 집에 시집가서 기도하며 살고 싶다’고 기도했다. 하나님께 봉사는 절대플러스 다시 신림동에 들어갔다. 하나님의 은혜로 즐겁게 1년 동안 공부하여 사법시험 1차를 합격하고 2차 공부를 하게 됐다. 그런데 2차는 1차보다 과목 수도 많고, 외워야 할 것도 많아 또다시 시험에 들었다. ‘주일에도 공부해야 할 텐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사랑부 예배부장 직을 맡으라고 했다. 이 직을 맡으면 한 주도 교회에 빠질 수 없고, 여력이 되면 평일에도 일해야 한다. 그때 ‘아, 하나님이 주일에도 공부해야 한다는 시험에 들까봐 기회를 주시는구나’ 생각되어 고민할 틈도 없이 응낙했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신림동에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부평성전에 달려가 대예배를 드리고, 임원회의를 하고, 사랑부 예배를 드리고 난 후 임원회의를 하고, 다음 주 예배를 준비해야 하는 등 주일을 온종일 드려야 했고, 토요일 밤에도 교회 일을 해야 했으며, 평일에도 선생님들과 연락을 해야 했다. 그때 고시생인 나에게 제일 중요한 시간을 드리면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겠구나 생각하고 ‘하나님, 저의 시간의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간증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전달하실 메시지는 이거 하나라고 생각한다. 고 3이든 중요한 시험이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든 주일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주일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봉사하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플러스요, 하나님께 기쁨 돌려드리는 일이라는 것을 간증하게 해 달라고 기도드렸지만 자신은 없었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다.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워 물을 안마시고, 이빨도 안 닦았으며, 씻지도 않고 공부에 전념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토하기가 일쑤였다. 다시는 돌아가기 싫은 끔찍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마음은 기뻤다. 모의고사를 공부하는데 성적이 안 나왔다. 하나님에게 기도했다. ‘하나님 뜻이면 3년으로 끝나게 해 달라’고. 처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딸아, 내가 언제 네가 기도할 때 안 들어 준 적 있느냐” 다시 마음을 부여잡고 하나님의 은혜로 2차 시험에 합격했다. 어머니께 전화하자 어머니는 ‘장하다, 내 딸아. 네가 엄마 말 잘 듣고 교회 안다녀서 시험에 붙었구나’라고 말씀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교회에 다녔어요. 하나님이 붙여주셨어요.’ 어머니는 나중에 얘기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연수원과정이 경쟁보다 힘들었다. 나는 학벌이나 집안 등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하고 나약한 사람인데 연수생 천 명 중 70~80퍼센트는 학벌이나 집안 등 좋은 환경에 사는 사람들이어서 인간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이 사람들 틈에서 잘 이겨낼 수 있을까.’ 이런 것을 놓고 기도하자 마음속에서 ‘네가 가진 것 없고 보잘 것 없기 때문에 너를 택했다. 하나님이 그래서 더욱 영광 받으실 것이다.’는 마음이 일어났다. 연수원생활하면서 주일에는 교회에 나갔다. 사람들은 ‘이렇게 공부할 것이 많은데 교회 가느냐’며 의아해했다. 교회 갔다 오면 밤이 된다. 사람들은 ‘그렇게 살다 나중에 어떻게 되는가 두고 보자’는 시선을 주었다. 내가 열심히 해야 하나님이 드러날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공부하여 4학기 시험을 마치고 좋은 성적으로 법원에 지원해서 판사로 임용되었다. 그 후 연수원 사람들을 만나 식사를 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렇게 신앙생활 열심히 하더니… 정말 하나님이 계신가 보다”라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그렇게 교회 다니면서도 판사가 될 수 있구나. 나도 교회 다녀야겠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재판하는 것이니…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부족하게 하신 이유와 나에게 이런 믿음을 주신 이유와 이런 결과를 주신 이유는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나를 판사 시키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부모님이 이 자리에 오셨다. 나의 부모님은 내가 교회 다니는 것을 싫어하셨다. 아버지는 거짓말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시는데 나는 거짓말 하며 10년 동안 몰래 교회에 다녔다. 아버지는 ‘든든한 백이 되어 주지 못해 어떻게 하냐.’ 이런 말씀을 하신다. 하지만 나는 내가 힘들어 하고 괴로워할 때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아버지가 가장 든든한 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고난이 닥쳤을 때 함께 기도하고 이겨낼 수 있는 우리 가정이 됐으면 하는 소망 하나밖에 없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주신 것만도 감사하고 행복하다. 부모님께 건강하게 잘 키워주신 것, 평생 성실함을 온몸으로 보여주심에 감사드린다. 판사로 임용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재판할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나의 판결이 그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뀌게 할 수도 있기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나는 능력도 없고,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적다. 사람이 어찌 같은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이 하라고 해서 하는 것뿐이다. 나는 판결문 쓰기 전에 하나님이 재판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로 도와달라고 기도한다. 나는 아직도 많은 것이 부족하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사건을 오판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으로 판결하도록 기도를 부탁드린다. <정리: 박병선 기자> [출처] 간증/ 김영주 판사 -하나님의 간증이 되게 하신 하나님 |작성자 화평
간증/ 마침내 구원/ 나의 아버지
간증/ 마침내 구원/ 나의 아버지 샬롬! 나의 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글을 읽는 나의 믿음의 형제자매님들, 주님의 품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계시지요! 제가 구원 받은 것은 1980년 초, 뉴욕의 지하철에서 한국인 목사님을 만나고부터서입니다. 저에 관한 간증은 차후에 할 기회가 있을 줄 믿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매우 완고하시고 기독교인을 매우 싫어하셨습니다. 제가 기도를 하면 아버지는 “백 날을 기도해 봐라. 소용이 있는가?” 하면서 제가 다시 불교 신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이 돌아가시면 저로부터 제사상도 받지 못하겠다고 걱정을 하시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매우 단단한 체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올해로 나이가 만으로 74세가 되셨지만, 면허를 가지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셨습니다. 그런데 올해 들어와 아버지가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점 치니까 내가 올해 저승사자를 피할 수 없다고 하는 구나!”하고 말씀하시길래, 말로라도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마시라고 권고 했습니다. 그런데, 2월경, 숨쉬기가 가쁘다고 하시면서 상봉동에 있는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폐렴이 심하나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면서 한 일주일 입원하면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폐렴에는 차도가 없었습니다. 문병 온 보험아줌마로부터 큰 병원으로 가시라는 조언을 듣고 서대문에 있는 고려병원 내과에 입원하셨습니다. 증세는 당뇨에 폐렴이었으나 과히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종합 진단에서 위암 초기 중에서도 초기라는 것이 따로 밝혀졌고, 당뇨가 가라앉으면 수술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의사는 하루 속히 수술할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의료기관에 근무하는 세계적인 소장 미생물학자인 매제인 피터(영국인)와 제가 아버지가 당뇨 증세가 있는 줄을 모르고 수술을 권해,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병세는 기대했던 것보다는 빨리 완쾌되지 않았으나 의사들은 걱정이 없다고, 폐렴으로 입원하여 위암을 발견하여 치료하였으니 행운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저의 집안의 먼 친척뻘 되는 나이 어린 목사님(30)가 찾아와 “아저씨, 예수님 믿으세요. 그러면 빨리 나아요.” 하고 권고하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젊은 사람이 일은 안하고 맨날 하나님 어쩌구 돌아다닌다구 야단을 치시면서 다시는 오지 말라.”고 면박을 주시곤 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어머니마저 신경성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비밀을 지키지 못하는 여동생이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찾아온 목사에게 “어젯밤! 할망구 때문에 밤새도록 기도했지. 빨리 나야할 텐데!”하고 말씀하시면서 “그래! 나도 빨리 날수 있도록 어디 기도해 봐.”하시면서, 목사님이 한 기도 끝에 아멘 하셨습니다. 낮에는 동생이 병실을 지키고 밤에는 제가 병실을 지키는 2주 정도가 지났습니다. 병세는 호전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4월 15일 아침에 아버지가 일어나시더니 “이상한 꿈을 꾸었어! 내가 죽었어. 그리고 강물에 갔지. 그런데 그 속에 들어갔다 나오니 다시 살아났어. 그리고 내가 어디로 가더구나.” 낮에는 별 이상 없이 자나갔습니다. 그런데 밤 8시경, 아버지가 갑자기 숨이 가쁘다고 하셨습니다. 심상치 않아 보여 의사에게 달려갔지만, 의사는 사진을 보이며 “어제보다 이렇게 좋아졌는데 걱정 없다”면서 수면제를 주사할 테니 가서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마침 장사 때문에 병실에 가끔 들르는 동생이 왔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와서 보더니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피 속의 산소가 갑자기 줄었다고 하면서 중환자실로 가야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급히 동생에게 목사님에게 전화를 걸라고 했습니다. 목사는 급히 왔고, 권사님이 오셔서 중환자실로 내려가는 아버지의 이마에 손을 대고 기도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중환자실로 내려가시면서 의사에게 “다시 수술 받는 거야?” 의사가 아니라고 말하니까 “까짓것 죽기 아니면 살기지.” 하면서 중환자실로 내려가셨고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목사님이 아버지를 위해 기도해 주는 가운데 숨을 거두셨습니다. 아버지의 표정은 매우 평화스러웠습니다. 나이 많으신 권사님은 아버지가 마지막에 부끄러운 구원이지만 구원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고 기뻐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점쟁이가 아버지의 죽음을 달 까지 정확히 맞추었고, 돌아가시는 날 새벽에 일어날 일을 꿈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어머니도 교회에 다닙니다. 미신이 팽배하던 우리 집 식구들은 복음화 되었고, 지난주에 있었던 백일제에도 무덤에서 기도로 대신했습니다. 저의 형(정신박약아)도 약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형도 동네 목사님이 기도하는 가운데 “아멘”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모르고 있던 친분 있는 전도사님이 대낮에 기도하다가 저의 형이 “천사가 끄는 마차를 타고 신나서 하늘에 가는 것을 환상으로 보았다”면서 스스로 흰 옷을 입고 저의 집에 오셨습니다. 형의 장례식 날, 해가 중천에 떴지만, 무지개가 장례 행렬을 오래 동안 따라 다녀, 같이 가셨던 분들이 참으로 이상하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제가 백일장에 쓴 “무지개를 타고 간 형아”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은 그것을 약간 가공하여 쓴 소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그 소설 속에 적고 싶었지만, 백일장을 이용하여 전도하려 한다고 오해할 것이 분명하여, 믿음의 형제자매님께만 공개합니다.
간증/ 석은옥 여사(강영우 전 미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 부인) 간증/ 지상강좌
간증/ 석은옥 여사(강영우 전 미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 부인) 간증/ 지상강좌 2011/07/14 16:33 http://wrn2991.blog.me/50115771519 전용뷰어 보기 간증/ 석은옥 여사(강영우 전 미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 부인) 순종하며 받은 축복 1945년 서울 출생. 원래 이름은 석경숙이다. 1967~68년 미 펜실베이니아주 주정부에서 시각장애분야 특수자격증을 취득했고, 1972년 숙명여대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1985년에는 미국 인디아나주 퍼듀대 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인디아나주 개리시 교육청 시각장애순회교사로 28년간 봉직 후 은퇴하여 2006년부터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나는 그대의 지팡이, 그대는 나의 등대’가 있다. 그의 아름답고 숭고한 삶의 이야기를 CGN WORLD WIDE 여성특강 동영상에서 녹취, 게재한다.(편집자주) 하나님께서는 1961년 5월 한 맹인소년을 안내할 수 있는 용기의 축복을 주셨다. 당시 나는 숙명여대 1학년생으로 걸스카우트 지도자훈련을 받던 중 시력을 잃은 중학교 1학년 고아소년이 재활의 길을 걷는 이야기를 듣고 이 학생을 돕는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그 소년을 보는 순간 동정하는 마음만 있었다. 당시 조금 시력이 있어 더듬더듬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내 시력으로 무엇을 도와줄까 하는 마음이 생겼다. 이 소년을 안내하겠다고 자청한 것은 하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대로 순종한 것 밖에 없는데 오늘날 많은 축복을 받았다. 1년 동안은 자원봉사를 했다. 그 후 가정형편을 알고는 누나가 되겠다고 자청했다. 나는 대학생이고 소년은 중학생이니 적어도 5~6년은 후배일 거라 생각하고 누나가 돼 주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때부터 누나로 6년을 보냈다. 누나로서 해야 할 일도 많아졌고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41년 후인 2001년에는 미국 백악관으로 안내하는 영광을 받게 되었다. 나는 무남독녀 외딸로 서울에서 출생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교회에 간 적은 없다. 아버님은 일본에서 전문학교 교육을 받고 서울에서 체육교사가 됐다. 나도 체육을 좋아했고 국민학교에서는 무용반에 들어갔다. 6.25전쟁이 나서 전주에서 초등학교를, 군산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국민학교에서 크리스마스 때 성극을 했는데 친구들이 교회에 와서 천사의 춤을 춰 보라해서 교회를 갔던 것이 교회에 다니게 된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다. 어린이를 좋아하여 장차 교사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에 들어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대한적십자사 청년봉사회에 들어가 인류애를 배우고 서울 맹아학교에 들어가 봉사하며, 걸스카우트 지도자 교육도 받았다. 이상했다. 왜 맹인을 안내하고 다닌 것이 그렇게 즐거웠는지. 5~6년 봉사활동을 하다가 시각장애인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고, 동생의 장래를 생각했다. 당시 맹인들은 맹인학교를 나오면 주로 안마를 했다. 나는 1967년 미국에 가서 시각장애인 교사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때 동생은 고등학교 3학년생이었다. 미국에서 맹인기관을 방문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미국에서는 시각장애인들을 일반인과 같이 대한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나를 미국으로 보내셔서 강영우 씨를 미국으로 오게 하셨다. 한국여성이 모국의 장애인을 위해 미국으로 공부하러 왔다고 하니, 선교사의 딸이 강영우 씨가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펄벅 여사도 만찬에 초청하여 축복해 주었다. 1년 후 강영우 씨는 연세대학교 1학년이었다. 머리 스타일도 달라졌고, 성인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큰 누나가 되겠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시력을 잃고 2년 동안 방황하고,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2년 동안 교회를 쫓아다니고, 점자를 1년 동안 배우다보니 5년 늦게 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나와 한 살 차이였다. 내가 미국에서 돌아오니 동생은 25세의 현명하고 씩씩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1961년 이후에 만난 사람들은 나에게 시각장애자 친동생이 있는 줄 알고 있다. 어머님의 주선으로 여러 군데 선을 봤다. 선 본 사람이 데이트를 신청하면 나에게는 시각장애인 동생이 있고, 앞으로 평생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 모두 의아해 했다. 그런 자리에 동생을 데리고 나간 적도 있다. 무남독녀 외딸인 나에게 강영우는 든든한 후견자였다. 강영우는 연세대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며 자신이 생겼고, 내가 미국에서 시각장애인들도 훌륭한 일을 한다고 알려주니 유학 갈 계획도 세웠다. 동생은 겨울방학 마지막 시험을 끝내고 돌아오던 날 “누나가 빨리 시집가야 내 차례가 오지”라고 말했다. ‘내 차례가 오지’ 하는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아, 우리가 헤어져야 할 때가 있구나’하는 마음에 말을 못하자, “그렇게 고르기 어려우면 나에게 시집오면 어때”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이게 가능한 일이야. 이게 하나님께서 7년 동안 예비해 주셨구나’ 깨달았다. 내가 “가능할까.” 반문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렇게 된 것이다며 “우리는 이제 오누이가 아니라 연인의 관계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며 석은옥으로 개명해야 한다고 했다. 돌밭을 걷는 어두운 ‘석’의 시대 10년이 지나면 10년의 ‘은’의 시대가 오고, 한국 최초의 박사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축복받는 ‘옥’의 시대가 온다고 했다. 얼마나 아름답고 의미 있는 이름인가. 이렇게 멋있는 남성이 내 앞에 있었는데 어두워서 못 봤구나 깨달았다. 봉사자에서 누나로, 누나에서 아내로 변신 남편을 한국최초맹인박사, 미정책차관보로 ‘석은옥장학금’ 만들어 시각장애학생 도와 강영우 씨가 졸업할 동안 3년을 누나 역할을 하며 기다렸다. 당시 맹인과 결혼하려는 여성이 가족의 반대로 큰 난관에 부딪친 사건이 있었다. 내가 무남독녀 외딸인 게 다행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미국 가기 전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우리 두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왔다는 것을 이해하시고 어려움 없이 허락해 주셨다. 3년을 기다리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 사랑장을 많이 읽었다.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리고, 믿어주고, 바라고, 견뎌낸다.’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외적인 것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믿음 안에서 우리는 축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희망이 생기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결혼식에는 재미나는 일이 많았다. 2~3주 전까지 누나라고 했는데 아내가 된다고 하니 놀라면서도 축복해 주셨다. 나의 친구 중에는 팔자가 사나워서 맹인에게 시집가느냐며 창피하다고 오지 않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요 은사라고 생각되어 많이 웃었다. 참으로 행복했다. 하나님이 나의 삶 속에 있기 때문에 행복했다. 연세대학을 졸업한 남편은 미국에 유학을 갔다. 미국 시각장애인들은 혼자 흰 지팡이를 가지고 등하교를 하고 직장을 다니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다. 내가 남편을 모시고 학교에 가면 미국 친구들은 동양 사람들은 부부 사이가 좋아서 떨어지지를 못하는구나고 생각했다. 후에 남편은 보행지도를 받아 독립적으로 다니게 되었다. 당시 장학금으로 200불을 받았다. 90불은 아파트비를 내고 나머지로 세 식구가 살았다. 남편은 3년 8개월 동안 공부하여 한국 최초 시각장애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오라는 곳이 없었다. 생활비도 떨어지고 학생비자도 마감됐다. 친구 집 3층 꼭대기 방 하나를 얻어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도와주며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실 것이라고 감사하며 생활했다. 구직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남편을 인디아나 교육청으로 취직시켜 주시고 나도 취직시켜 주셨다. 1977년 당시 미국에서는 장애인들이 일반학교에 다니게 되어 장애인전문교사가 부족했다. 석사를 해야 정교사가 된다고 하여 밤과 여름방학에 공부하여 석사학위를 받아 28년을 시각장애인 교사를 했다. 나는 한국의 시각장애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석은옥장학금’을 만들었다. 인세와 간증사례금을 모아 1년에 6백만 원씩 대학 입학을 하는 시각장애인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저의 기도문을 소개한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존귀한 생명을 허락하시고 저를 선택하여 자녀 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인간애를 허락하시어 곤궁에 처한 맹인에게 인정을 베풀어 인간의 고귀한 만남을 이루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행복의 원천인 하나님은 저를 여자로 태어나게 하시어 지아비를 섬기고 지아비의 사랑과 보호 속에 사는 아내의 행복을 알게 하시고, 생명을 잉태하여 출산하는 고귀한 체험을 하게 하시고 모성애를 허락하시어 두 아들을 양육하는 기쁨과 보람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존귀하신 하나님은 미천하고 나약한 저를 도구로 남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회에 봉사하는데 동참하게 하시고 두 아들이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으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자양분이 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고귀한 인간 생명을 주신 순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 생애에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남은여생도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해 주시어 값진 삶을 살게 하여 하옵소서. 세상에 사는 동안 나에게 주어진 모든 사명을 수행하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정리: 이중목 기자) [출처] 간증/ 석은옥 여사(강영우 전 미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 부인) |작성자 화평
간증/ 정애리 권사 간증/ 지상강좌
간증/ 정애리 권사 간증/ 지상강좌 2010/05/14 13:51 http://wrn2991.blog.me/50088327106 전용뷰어 보기 “우리를 두 팔로 안고가시는 주님” 정애리(탤런트.영화배우): 1960년 8월 11일 생. MBC KBS연기상 MBC방송연기대상 서울연극제 최우수연기상 수상, 월드비전,생명의전화,독어노인,평화의마을 홍보대사, ‘밝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사람’으로 행정자치부선정 대통령표창. 저는 일찍 안수권사 직분을 받았습니다. 이 직분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일을 하라고 주신 것으로 압니다. 안수 받을 때 많은 분이 축하해 주었고, 운동화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곳저곳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다. 오늘도 마음의 운동화를 신고 왔습니다. 제가 기독교 텔레비전에서 한 프로를 10년 동안 진행하고, cbs라디오에서 일하며 많은 분들을 만났는데 다들 저를 모태신앙인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모태신앙인이 아닙니다. 제가 처음 교회에 간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크리스마스 때 부른 ‘탄일종이 울리네’ 가사와 챠트 그림이 선명합니다. 저와 교회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주변에 교회 가자는 사람이 없어 교회를 가지 못하다가 중학교 3학년 때 친구 따라 다시 다니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제 안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냥 놀러 다녔죠. 어쩌다 가고, 간혹 은혜가 아닌 감동도 받고 그랬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저를 관리하고 계셨다고 생각됩니다. 저의 의지가 아니지만 고등학교 때 미션스쿨을 가게 됐습니다. 추첨에 의한 것이지요. 일주일에 한 번 채플시간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목사님은 영화를 통해서 때로는 성경책을 통해 성경말씀을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신앙에 눈을 뜨게 됐지요. 찬양도 가깝게 느껴졌고, 하나님과 예수님이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감사하게도 저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정말 있을까’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물건도 만든 사람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듯이, 이 천지도 창조한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존재한 것이다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존재하심이 믿어지지 않아 고생하는 분들을 만나고 나서 그냥 믿어졌던 내 믿음이 큰 복을 받은 것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는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됐습니다. 그리고 탤런트가 됐지요. 저는 무용을 해서 무대에 서는 것은 익숙하지만, 연극이나 이런 것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셋째 오빠가 kbs에서 현상금을 걸고 탤런트를 모집하니 한 번 해보라 해서 나갔는데 덜컥 대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랐죠. 그 다음부터 이게 내 일이구나 싶었습니다. 저는 뭐든 한번 내 일이라고 생각하면 열심히 합니다만 이론이나 실기 등 아는 것이 없어 선배님들을 통해 배우고, 또 공부를 하며 배웠죠. 저는 내성적이었기 때문에 저희 친척들도 제가 아닌 저의 언니가 탤런트가 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구하지 않았음에도 주님께서 아주 좋은 것으로 채워주셨지요. 좋은 역할을 주시고, 많은 축복을 해 주셔서 인기와 부도 얻었습니다. 아주 바쁜 생활의 연속이었지요. 다람쥐 쳇바퀴 돌듯 촬영 끝나고 집에 가고, 다시 촬영하는 연속이었지요. 날마다 밤을 새고 일하는 스탶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었습니다. ‘나는 뭔가. 이게 도대체 뭐야. 이렇게 살다 끝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전에 예배드렸을 때 느낀 평안함이 그리워져서 바쁜 시간이었지만 주일날 큰 교회를 찾아가게 됐습니다. 누가 아는 체 하고 일 시킬까봐 주일날 모자를 눌러쓰고 기둥 뒤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이 축도할 때가 되면 바로 교회를 빠져 나오곤 했어요. 나중에는 그게 좋았어요. 평안함이 찾아왔어요. 그 때는 특별히 주님께서 저를 사용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착하게 살면 되지, 교회만 나가면 되지 그런 생각이었는데 주님은 저를 조금씩, 조금씩 만져주셨습니다. 저는 이슬비 신앙인입니다. 조금씩 주님의 사랑에 젖다 보니까 어느 날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가 돼 있는 거예요.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저는 예수님 만나고 굉장히 많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 가지 복 중에서 가장 큰 복인 감사의 복을 헤아릴 줄 아는 복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나이도 더 먹었지만 제가 제 얼굴을 보면 지금의 얼굴이 옛날 얼굴보다 더 좋다고 느낍니다. 저 예쁘지 않나요. 푼수여서가 아니라 전 정말 그렇게 느낍니다. 제가 변했어요. 옛날에는 많은 것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갖지 않은 것들을 바라봤는데 지금은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합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오늘도 나에게 하루가 주어지다니 정말 감사합니다.’고 기도합니다. 저는 할 일도 있고, 수입도 얻고, 나눌 수도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저는 많이 받아서 하늘나라에서 받을 게 없으면 어쩌나 걱정할 만큼 많은 사람이 저를 사랑해 주십니다.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제가 봉사를 열심히 한다고 말하는 분도 있지만, 저는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예배드리고 성로원 아기집을 들러서 왔습니다. 17년 동안 이 기관을 섬겨왔고, 많은 분이 동참해 주고 있습니다. 그 시설을 찾아간 건 촬영 때문입니다. 그때는 신생아부터 만 5세까지 90명 정도의 유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시설을 보면서 부모를 그리워하는 어린 아이들을 보고 다음에 다시 오겠다 말하고 한 달 후에 갔더니 다를 놀래요.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사람이 온 사람이 없대요. 처음에는 얼굴도 예쁘고, 깨끗한 차림의 아이가 있으면 저도 모르게 그 아이에게 눈이 갔지요.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부모의 사랑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내가 아이와 눈을 마주치면 그 아이는 곧장 나에게 달려와요. 그 아이를 안아주다가 다른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음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감기 걸려 코를 흘리는 아이가 있으면 휴지부터 챙겨서 그 아이에게 달려가 코를 닦아줍니다. 그건 제가 변한 거라고 봐요. 겉으로 예쁜 아이들밖에 사랑할 줄 모른 저였는데 주님처럼 저도 아파하는 아이들을 먼저 바라보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됐어요. ‘내가 연약하고 힘들 때일수록 저를 더 많이 챙기시겠구나, 더 많이 안타까워하시겠구나.’ 아이들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일용할 양식이 얼마나 감사의 조건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기도문을 읽을 때 ‘일용할 양식’은 그냥 읽고, ‘시험에 들지 말게’만 강조했었지요. 그런데 탈북자들과 만남을 통해서 일용할 양식도 주님이 허락해 주지 않으면 나에게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많은 회개를 했습니다. 노인들을 섬기게 되면서도 주님의 사랑을 경험했어요. 몇 년 동안 방안에서 똥오줌을 누셨던 치매할머니를 목욕시켜 드리면서도 전혀 냄새를 맡지 못했어요. 저의 코를 막아주시면서 저를 사용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즐거움과 감사함이 넘쳐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불평을 해요. 추운 밤에 촬영하러 일산에 갔을 때입니다. 밤에 방송 5분 나오려면 몇 시간을 찍어야 됩니다. 그런데 준비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고 불평하다 무료하여 주변을 돌다가 놀이방 벽에 종이가 펄럭여서 떼어보니 ‘발자국’이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지난 삶이 화면처럼 바닷가 하늘위에 펼쳐지고 있는 꿈을 꾸었다. 그는 모래사장에 나 있는 두 개의 발자국을 보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발자국이 하나인 것을 발견했다. 자기가 어렵고 절망적인 순간들이었음을 때 발자국이 하나였던 것을 알고 하나님 따졌다. 하나님, 당신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한다고 하셨는데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저 혼자였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사랑하는 자여, 네가 가장 어렵고 힘들어 할 때마다 내가 너를 나의 두 팔로 안고 걸어갔단다.” 그 글을 일고 깜짝 놀랐어요. ‘어머, 세상에 그렇군요. 하나님, 죄송합니다. 지금 나를 끌어안고 걸어가시는 순간이군요.’ 이런 깨달음이 오니 너무 즐거운 거예요. 마음이 너무 기뻐서 글귀를 간직하고 싶어 복사하려고 했는데 아무도 볼 사람 없으니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날 그 글을 볼 사람은 바로 저였던 것입니다. 내가 불평하고 있을 그 순간조차도 주님께서 힘들지 않게 예비해 주셨던 것입니다. 살다보면 예수님을 만나 살지만 연약한 존재인지라 불평하고 답답하고 힘들 때가 많이 있지요. 저의 막내 오빠가 암을 얻어서 힘들어 해요. 그 오빠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어요. 오빠를 계기로 다른 식구들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구나, 만지는구나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지금 육체적으로,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외롭고 힘든 시간이라면 이 시간이 바로 주님께서 여러분을 두 팔로 안고 걸어가는 시간임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저는 주님의 많은 사랑을 받기 때문에 저를 예쁘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전 정말 예뻐졌다고 말합니다. 10년 후에 더 예뻐질 거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제가 주님을 놓지 않으면 주님께서는 절대로 저를 놓지 않을 것이기에 10년 후의 저의 모습은 지금보다 더 아름다울 것이라 믿습니다. 10년 후에 만나 우리 확인해 볼까요.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주안에서 사랑합니다. [출처] 간증/ 정애리 권사 |작성자 화평
간증/ 차인홍 교수(미국 오하이오주 라이트주립대학 바이올린 교수 겸 오케스트라 지휘자) 간증/ 지상강좌
간증/ 차인홍 교수(미국 오하이오주 라이트주립대학 바이올린 교수 겸 오케스트라 지휘자) 간증/ 지상강좌 2013/04/16 10:31 http://wrn2991.blog.me/50169524021 전용뷰어 보기 간증/ 차인홍 교수(미국 오하이오주 라이트주립대학 바이올린 교수 겸 오케스트라 지휘자) “가진 사람은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빚진 사람입니다” 제가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음악회이기도 하지만, 중간 중간 말씀을 나누며 진행하겠습니다. 먼저 여러분께 고백하고 싶은 것은, 저는 참으로 축복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축복이라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축복을 받은 사람이지만, 세상적으로 생각해도 그렇고, 신앙적으로 생각해도 그렇고, 저는 정말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제 자신을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여건이 좋지 않았고, 여러 가지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이 자리까지 오게 되어 여러분께 박수를 받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제 자신도 신기합니다. 감사밖에 드릴 수 없습니다. 축복 받을 사람 아닌데 축복 받아 누가 나를 이렇게 도와줬을까 생각해 보면, 물론 많은 사람의 도움이 결정적인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신이 나를 도왔다고 말을 합니다. 저는 잘 몰랐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려운 순간들이 지나 잘 되고 보니 이것은 내 힘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제 인생을 세밀하게 계획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신앙이 깊어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축복을 받을만한 인물이 아닌데도 일방적으로 축복 받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제가 정장을 입고 연주하면 박수를 쳐 주십니다만, 제가 더 이 자리에까지 온 것이 저는 기적 같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고 재활원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24살까지, 제 친구들이 대학을 마칠 때가지 학교를 가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저에게 걷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소아마비와 낮은 학력이 그야말로 장애였습니다. 굉장히 주눅이 들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성인이 되었을 때까지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것 때문에 큰 좌절을 느끼고 목숨을 끊으려고도 했습니다. 그 정도로 저에게 좌절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청년기에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젊음은 곧 희망인데, 저는 그런 자신감 같은 게 전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다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닐까’ 하는 절망감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아내를 만나 결혼할 시기쯤 유학을 갔는데, 그때부터 ‘장애는 불편할 뿐 무능의 의미가 아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나만 열심히 하면 뭐든 가능하다’는 눈을 떴습니다. 미국에 가서 제가 가진 잠재력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재활원에 있던 제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주신 분이 가장 결정적인 도움을 주셨습니다. 열악하고 형편없는 곳에서 밑바닥 생활을 할 때 강민자 선생님이 자원봉사를 하러 오셔서 바이올린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봉사하러 오신 분들은 장애인들을 불쌍하다며 먹을 것을 주고 가는 게 보통인데, 강 선생님은 제게 4년간 엄청난 열정과 사랑으로 바이올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암담했던 밑바닥 인생에 꿈과 용기를, 희망의 빛줄기를 비춰 주셨습니다. 지금도 찾아뵙는 양어머니 같은 분이십니다. 그런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충격적입니까. 그냥 불쌍하니까 와서 가르쳐 줄 수 있었지만 선생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불우한 사람들에게 철저히 빚졌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삐뚤어지지 않고 공부하고 싶지만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결과가 좋아 고등학교까지 검정고시로 패스가 되었고, 뜻하지 않게 미국에 유학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렇게 되어서 이 자리에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말씀이 늘 마음에 남아있었습니다. 제가 만약 음악을 하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분명한 것은 다른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음악을 하지 못할 것은 틀림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당시 선생님의 제자들 틈에 끼어 바이올린을 배운 그 시절이 잊어지지 않습니다. 그때 학생들을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그 도시에서 내놔라하는 부유한 가정의 자녀들만 바이올린을 배울 때였습니다. 보통사람은 바이올린은커녕 피아노도 배우기 어려웠습니다. 나의 장애가 축복의 근원 제가 건강한 사람이었더라도 저의 집 형편이 안 좋아 음악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소아마비에 걸린 것이 오히려 저에게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 축복의 근원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저의 장애로 인해 한때는 좌절하고 절망적인 순간도 있었지만, 지금은 제가 걷지 못한 것에 대해 실망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얼마 안 된 인생을 살았지만 장애를 가졌다는 것이 인생에 좌절을 할 만큼 결정적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사느냐,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삶을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있을 때 저의 친구들과 놀러갔다가 여관에서 자게 됐는데, 키에 대해 얘기가 나왔습니다. 친구들은 키를 재고 난리를 쳤지만 저는 거기서 제외 됐습니다. 키를 잴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친구들이 양팔을 벌리면 키가 나온다고 하여 엎드려서 양팔을 재보니 제가 제일 키가 컸습니다. 186이 나왔습니다. 저의 바로 위의 형님은 저와 체질이 같습니다. 키가 190정도 됩니다. 제가 키가 크다는 것을 안 순간 안타깝고, 분하고, 화가 났습니다. 순간적으로 나도 멋진 옷 입고 자랑하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절실했습니다. 내가 그런 태도를 보였더니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너는 걸어 다녔다면 강남이나 나이트클럽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고 하여 나도 그렇게 해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놀기 좋아하고 제가 걸어 다녔다면 꼭 그렇게 됐을 겁니다. 음악은 우리에게 좋은 것이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음악은 듣고 감상하고 연주하고 노래하고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 소리로 내는 음악이 없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회에서 목사님의 설교가 좋아도 설교만 듣고 찬송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봤습니다. 음악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까요. 음악은 아름답고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열심히 노력을 했습니다만 그것만 가지고 이 자리까지 올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래서 저에게 도움을 주신 분들과 신께 늘 감사를 드리며 삽니다. 세상적으로 불리한 조건에 처한 사람일지라도 여러분들이 돕고,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자신이 노력하면 그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그러한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만 어려웠던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저런 일로 고통당하는 분들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격려의 손길이 펼쳐졌으면 합니다. 이제 내가 받은 것을 갚아야 할 때 저를 굉장히 부잣집 아들로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저의 가정은 저를 경제적으로 뒷받침 할 수 없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이 자리까지 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그래서 저는 많은 사람 앞에서 얘기할 때마다 저는 정말 축복 받은 사람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을 변치 않고 제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나누며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나만 잘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해야겠다는 마음을 늘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잘 걷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저에게 빚을 진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이런 마음을 나눈다면, 이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빚졌다고 생각하고, 많이 배우신 분은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어려운 사람들에게 빚졌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은 돈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마음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습니다. 저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 저에게 찾아와 바이올린을 가르쳐 주신 것은 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를 도와주신 분들의 사랑과 보살핌이 저에게 가장 큰 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그렇게 보살펴 주셨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왜 이렇게 만드셨나’하는 원망 비슷한 것과 ‘왜 나만 이렇게 됐을까’를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장애인으로 만드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적으로 철도 들고 뭔가를 어느 정도 이루고 나니, 제가 이렇게 된 것도 하나님 뜻이 있었고, 그래서 더욱 세워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제가 받은 것을 갚아야겠다는 마음입니다. 장애를 가진 국내외 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후원하는 것입니다. 돕겠다는 분들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많은 분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않을까요. 이 일이 시작되면 굉장히 기쁠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보람과 힘도 생길 겁니다. 이 일을 하면서는 대가나 고마움을 기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도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일일이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도움은 도움으로 끝나야 합니다. [출처] 간증/ 차인홍 교수(미국 오하이오주 라이트주립대학 바이올린 교수 겸 오케스트라 지휘자) |작성자 화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