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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첫 우체통 "내게 전할 말이 있으세요?"
작성자 : 운영자(kylggc@hanmail.net)  작성일 : 2009-05-17   조회수 : 509
하늘 아래 첫 우체통 "내게 전할 말이 있으세요?"



한반도 남쪽 내륙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지리산 천왕봉(1915미터). 어리석은 이는 지혜를 얻어가고, 아무리 덕이 높은 성인(聖人)도 3번의 선행을 베풀어야 그 정상이 허락된다 했던 곳.

그 끝에 닿기 전 마지막 쉼터인 장터목 대피소(1700미터)에는 특별한 우체통 하나가 있다. 이름하여 '하늘 아래 첫 우체통'.

위대한 화가의 세밀화 같은 풍경 속, 동화 같은 이름의 이 우체통은 최고봉을 남겨놓고 잠시 숨을 고르는 이들에게 조용히 말을 건다. '혹시 내게 전할 말이 있으세요?'

◈'하늘 아래 첫 우체통'의 탄생

장터목 대피소에 우체통이 생긴 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지리산을 통틀어 백소령·로타리·세석 대피소를 포함 총 4곳에 설치되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었다. 이 일대를 지키는 지리산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산을 찾은 탐방객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 추억거리 하나를 더 안겨줄까 고민하던 중 생각해낸 묘안이었다.

처음엔 그저 이름없는 빨간 우체통에 불과했고, 우연히 이를 보고 간 사람들이 그 다음번 올 때 직접 우표까지 붙여 편지를 가져오면 직원들이 수거해주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그러다 누군가의 사진 속에 담겨 세인들에 소개되고, 점차 입소문이 퍼져 좀더 본격적으로 운영해보자 한 것이 2005년. 이때부터 대피소 산장에서 탐방객들의 편의를 위해 엽서와 우표 등을 판매하기 시작했고, 직원들이 논의한 끝에 만장일치로 '하늘 아래 첫 우체통'이란 예쁜 이름이 붙여졌다.

◈'하늘 아래 첫 우체통' 우편배달부는 누구?

그렇다면 멀고도 험한 길, 하늘 아래 첫 우체통 속 우편물을 배달하는 것은 누구일까?

바로 우체통을 탄생시킨 지리산관리사무소 직원들이다. 더 정확하게는 각 대피소에 근무하는 현장대원들이다.

이들은 산에서 평균 5~7일 정도 머물며 1~2명씩 돌아가며 쉬는데, 휴가차 산 아래로 내려가는 대원이 우편물을 수거해 직접 우체국에 전달하거나 다른 우체통에 옮겨 넣는 임무를 맡는다.

때때로 수취인 불명의 편지들이 돌아오곤 하는데, 이 경우 다시 각각의 대피소로 반송돼 6개월간 보관하다가 끝내 찾으러 오는 이가 없으면 편지는 폐기처분된다.

◈하늘 아래 첫 우체통엔 어떤 사연들이?

산 정상을 코앞에 둔(물론 시각적 차원에서) 상황에서, 어찌보면 생뚱맞고 혹은 극적이다 할 수 있는 우체통과의 만남. 사람들은 이 속에 어떤 마음들을 전하는 걸까?



편지를 뜯어볼 수 없으니 그 내용을 짐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봉투가 없는 엽서라던지, 혹은 다음날 일출 산행을 위해 산장서 하룻밤 묵고가는 탐방객 중에 특별히 사무소직원들의 권유로 편지를 쓰게 되는 경우 단편적이나마 그 사연을 엿볼 수 있다.

부부싸움을 하고 온 중년 남성. 별 많은 지리산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자니 후회스럽고 미안한 마음이 커지는데, 어쩌다 속내를 털어놓고보니 대피소 직원이 "좋은 수가 있는데 한번 해보겠냐" 운을 뗀다.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진심을 담아 편지를 쓰는 일. 그 편지는 특별히 그 다음날 새벽 일찍 하산하는 탐방객에 전달되어 남편이 집에 도착하기 전 부인이 받아볼 수 있었다. 남편이 집에 돌아갔을 때 부인은 얼른 등산가방을 받아주며 수줍게 말하더라 했다. "여보, 나도 미안했어요"(탐방객이 고마운 마음에 직접 대피소 직원에 전화를 걸어 알려준 내용)

다음은 연인들. 개중에는 산에 올라오던 중에 싸우기도 하고, 이제 갓 사귀기 시작했거나 반대로 권태기에 직면해 애정표현이 힘든 커플들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편지를 쓴다. 쑥스러워서 자주 못하는 달콤한 말이나 비밀스런 고백, 혹은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 이렇게 해달라 식의 다짐과 바람들.

처음엔 장난스럽게 시작해, 편지를 완성하고 나면 행여 상대가 볼까 봉투에 풀칠까지 해서 우체통에 넣고 간다. 산 아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연인의 편지를 확인할 그들의 표정이 어떨 지 궁금하다.

우체통 최대 이용객은 단연 학생들. 물론 힘겹게 산에 올라 부모님 생각이 간절한 이유도 있지만 선생님들의 강요(?)도 한몫하기 때문이라고.

"최선을 다 해서 종주 성공할게요. 내려가면 맛있는 거 사주세요"라는 애교형부터 "엄마 기대에 못 미쳐서 죄송해요. 하지만 열심히 하고 있으니 잔소리는 조금만" 식의 하소연형도 있다.

최근엔 경제불황 여파로 실직한 가장들이 산을 많이 찾는다고 하는데, 홀로 산에 올라 산장서 하룻밤을 묵고 간 어느 가장이 부인에게 보낸 단 한 줄의 엽서글이 마음을 시리게 한다.

"여보, 마음 정리해서 돌아가 꼭 다시 일어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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