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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 창시자 문선명은 누구?/ 2012-09-07
작성자 : 운영자(kylggc@hanmail.net)  작성일 : 2013-08-02   조회수 : 215
메시아·참부모·평화의왕 등 스스로 신격화…남북 경제 협력 등 평화통일 운동도 기여



▲ 통일교 창시자인 문선명 총재가 9월 3일 새벽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자칭 메시아이자 평화의 왕이었던 문 총재는 남북 경제 협력을 이끌어 낸 평화통일 운동가로도 알려져 있다. (사진 제공 통일교)

통일교 창시자이자 교주인 문선명 총재가 9월 3일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문 총재는 스스로 재림주이자 메시아로 여겨 기독교로부터 이단·사이비 교주로 규정되기도 했지만, 남북 경제 협력 등 평화통일 운동에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고인은 1920년 1월 6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에 8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문용명. 15세 때 가족과 함께 장로교 신자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그는, 만 16세 되던 해 부활절에 예수의 계시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문 총재는 기도하던 중에 예수가 이루지 못한 인류 구원이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한다. 통일교는 이를 문 총재의 '메시아 자각'으로 규정하고, 이후 그가 구원 섭리의 해답을 찾았다고 주장한다.

문 총재는 1934년 오산보통학교에 편입하여 신학문을 배웠고 이듬해인 1935년 정주공립보통학교에 진학한다. 이후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를 입학하는데, 이때 이용도 파인 예수교회 소속 명수대교회에 나가 주일학교 반사직을 맡으며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1941년엔 일본 와세다대학 부설 고등공업학교 전기과에 입학한다. 통일교는 이때 일본 유학 중인 문 총재가 비밀 결사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전개한 혐의로 1944년 체포, 1945년 2월에 풀려났다고 말한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문 총재는 경기도 파주군에 있는 '이스라엘 수도원'(김백문)에 들어가 6개월간 상도동 집회소의 인도자를 맡는다. 이후 그는 1946년 6월 6일 평양으로 월북하여 '광야교회'라는 이름으로 선교를 시작한다. 하지만 1948년엔 지상천국을 전파하여 인심을 현혹했다는 이유로 흥남감옥에서 2년 8개월 투옥되고, 한국전쟁 시 유엔군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나 남하한다.



▲ 한국전쟁 이후 남하한 문선명 총재가 1954년 5월 1일 서울 성북구 북학동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를 창립했다. (사진 제공 통일교)
1951년 부산 범냇골에서 토담집을 지어 새출발한 문선명 총재는 대구와 서울 등 전국에 거쳐 포교활동을 하던 중 1954년 5월 1일 서울 성북구 북학동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를 창립한다. 이때 기독교 사학인 연세대학교와 이화여대에서 교수와 학생들이 통일교로 개종하는 일이 발생한다. 학교 측은 관련 교수를 파면하고 학생들을 제적 조치했으며, 기독교는 통일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예수가 못 이룬 인류 구원은 내가"



▲ 승공·멸공을 외치던 문 총재는 1991년 12월 6일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난다. 그는 이 자리에서 금강산 개발 투자 등 대북 사업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 제공 통일교)
이후 문 총재는 해외로 눈길을 돌려 1958년 일본, 1959년 미국으로 선교사들을 파송한다. 1965년에는 일본·미국·유럽 등 40개국을 순회하였고, 1974년에는 미국 백악관을 방문하여 닉슨 대통령과 만나는 등 그 위세를 자랑하기도 했다. 1982년에는 미국의 보수 여론을 대변하는 <워싱턴타임즈>를 창간, 미국 정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 신문은 레이건과 부시 대통령도 애독할 정도로 미국의 보수파에게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1981년 탈세 혐의로 기소된 문 총재는 2년 9개월의 재판 끝에 댄버리교도소에 수감되어 13개월간 복역한다.

미국에서 승공·멸공을 외치던 문 총재는 돌연 공산권 국가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1990년 4월 11일엔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만나 한-소 수교 및 경제 협력에 대한 면담을 하고, 이어 1991년 12월 6일엔 김일성 주석과 만나 금강산 개발 투자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통일교 계열 회사인 평화자동차가 2002년 북한 남포에 자동차 공장을 설립한다.

통일교가 일반인에게 알려진 건 국제 합동결혼식과 가정당 창당이다. 1961년 36쌍의 부부 결연으로 시작한 국제 합동결혼식은, 1992년 8월 서울 잠실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3만 쌍 결혼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2008년 8월에는 '가정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라는 기치를 내세워 평화통일가정당(가정당)을 창당하여 전국구에 후보를 내기도 했다.



▲ 통일교는 1992년 8월 서울 잠실주경기장에서 문선명 총재 주례로 3만 쌍의 국제 합동결혼식을 거행했다. (사진 제공 통일교)



▲ 통일교는 2003년부터 국제 클럽 축구 대회인 피스컵을 2년 주기로 개최해 왔다. 사진은 2012년 피스컵 대회에서 손흥민 선수와 기념 사진을 찍은 문 총재. (사진 제공 통일교)
문 총재는 일화·일신석재·일성종합건설·청심병원·용평리조트 등 다양한 분야의 기업들에 진출했다. 여수엑스포·평창동계올림픽 등 국제 사업 유치에도 깊이 관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3년에는 국제 클럽 축구 대회인 피스컵을 개최하여 2년 주기로 대회를 열고 있다. 그 외에도 선화예술학교·경복초·선정중고·청심국제중고·선문대학 등 교육기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언론으로는 미국 UPI통신, 일본 <세카이니포>, 중동 <미들이스트타임즈>, 국내 일간지 <세계일보> 등이 있다.

교주에서 세계 쥐락펴락하는 인물로

기독교로부터 이단·사이비로 규정된 문 총재는 1994년 창립 40년 만에 정식 명칭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에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으로 변경한다. 2009년 9월 15일에는 세계 4대 종교인 기독교·불교·유교·이슬람교를 대표하는 성인상 및 상징물을 제작하여 '초종교·초교파 평화 이념'을 내세운다. 기독교 진영을 벗어나 범종교적인 평화 단체로 방향 전환을 꾀한 것이다.



▲ 문선명 총재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천정궁박물관. 문 총재는 2006년 6월 이곳에서 '평화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뉴스앤조이 김은실
하지만 그는 2006년 6월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송산리 장락산 일대에 대지 1만 2000평, 연건평 9200평인 천정궁을 지어 스스로 평화의 왕으로 추대되는 등 메시아이자 참부모로서 신격화 작업에 열을 올린다. 2010년부터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을 다시 '통일교'라는 명칭으로 바꾸기도 했다.

자신이 구순이 되던 해에는 후계 구도를 정리했다. 막내아들 문형진 씨(33)에게는 통일교의 가장 핵심 분야인 종교, 넷째 국진 씨(42)에겐 기업 경영, 셋째 현진 씨(43)에겐 평화 활동 NGO를 맡겼다. 하지만 칠남 형진이 삼남 현진에게 재산권 관련 소송을 거는 등 형제 간 법정 소송이 오가고 있어, 문 총재 사후 후계 체제에 대해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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