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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 총리서리 남편 박준서교수의 외조기
작성자 : 운영자(kylggc@hanmail.net)  작성일 : 2008-06-21   조회수 : 88
…"아내 존경"








장상 신임 총리서리(오른쪽)와 남편 박준서 교수
(왼쪽)가 군에서 휴가나온 둘째아들 찬석군과 이
화여대 교정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팔불출이라 불러도 좋아요. 저는 아내를 존경합니다. 아내와 같이 미국 예일대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1973년 첫아들 찬우를 얻었을 때 느꼈던 기쁨과 놀라움에 버금갑니다."
 
박준서 교수(연세대 신학과)는 아내 장상씨가 한국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총리로 임명되자 자신을 '타고난 페미니스트'로 스스럼없이 정의했다. 가부장제를 당연시 여기는 사회 분위기에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다.
 
박교수는 서울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64년 연세대 신학대에 입학한 뒤 장총리 서리를 만났다. 장총리 역시 이화여대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박교수와 같은 과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집안 모두 독실한 기독교 전통이 깊었고, 실용적 학문인 법학과 수학에서 한국적 이해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신학으로의 전공 변경도 공감대를 넓혀줘 금세 가까워졌다. 우정과 치열한 경쟁이 공존했다. 전공에 대한 토의로 서로 부딪히고 조율되는 가운데 사랑이 소리없이 싹텄다.
 
박교수는 어려서부터 여성에 대한 편견이 동시대 남성들에 비해 훨씬 적었다. 당대 X세대였던 셈이다. 7남매 가운데 외동아들이었기에 남녀의 동등한 역할분담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누나 3명, 여동생 3명 사이에서 자란 환경은 성인이 된 뒤에 이론이나 책을 통해 익히고 배운 남녀평등과 달리 거의 생득적으로 박교수를 여성예찬론자로 키웠다.
 
그런 박교수에게 장상 총리는 그야말로 이상형이었다. 조신하기보다는 자신만만하고 자기 주장이 확실하고 적극적이며 당찬 모습은 '매력 덩어리' 그 자체였다. 그 매력을 평생 가까이서 느끼고 싶었다. 2년간 지켜보던 끝에 인생의 동반자가 돼 달라고 장총리에게 제의했다. 박교수는 첫사랑이던 장총리와 결혼하게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했다. 부창부수일까. 장총리 역시 박교수 못잖게 내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낯선 미국땅에서 함께 유학생활을 하면서도 장총리는 박교수의 도시락을 꼭 챙겨줬다.
 
박교수는 만삭의 몸으로 늦은 밤까지 책과 씨름하던 장총리를 생각하면 지금도 안타깝다고 한다. 제대로 도와주지 못한 게 미안해 첫아들 찬우가 태어난 뒤에는 아이가 밤에 보채고 울 때마다 피곤에 지친 아내가 깰까 봐 아이를 업고 방에서 나와 잠이 들 때까지 마당을 서성였다. 어쩌다 아이가 몸에 열이라도 날 때마다 들쳐 업고 낯선 미국의 병원응급실로 달려간 것도 박교수였다.

박교수는 "첫애는 거의 반을 내가 키웠다"며 흐뭇해하며 육아에 관련된 서적도 상당히 읽어 웬만한 응급처치도 척척해냈을 정도라고 말했다. 육아에 대한 화답으로 지금까지도 아흔세살의 시어머니를 깎듯이 모시는 효부이기도 하다.
 
박교수는 아내가 거쳐야 할 인사청문회 때문에 걱정이 크다. 큰아들 찬우씨의 미국적 소유문제를 놓고 벌써부터 여론이 들끓고 있다. 미국에서 태어난 찬우씨가 지금까지 미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의심스러운 시선이 부담스럽고 자식에게 자칫 큰 상처를 주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가뜩이나 척추가 좋지 않아 고등학교 때는 뒷목에서부터 엉치까지 휜허리를 교정하기 위해 갑옷 같은 교정복을 입고 힘든 척추수술까지 받았던 아들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세요, 한창 민감할 나이에 몸에 철갑을 두르고 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인지."
 
박교수는 그러면서도 큰아들이 삐뚤게 나가지 않고 올바르게 성장해줘 고맙단다. 박교수는 "우리 부부는 하느님 앞에 결코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 덕에 아내도 일인지하 만인지하의 여성 재상 자리에 오른 것 아니냐"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의 미소 속에는 행복한 남편의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를 담고 있었다.



남궁성우 기자 socio94@hot.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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