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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한흠 목사 특별인터뷰
작성자 : 운영자(kylggc@hanmail.net)  작성일 : 2008-06-07   조회수 : 92
"저보다 수준높은 평신도 세우는 게 최고의 기쁨입니다”

'미치도록 달려온 제자훈련의 길, 제자훈련 열정 30년.’ 옥한흠 목사님을 설명할 때 제자훈련’이란 단어는 빠지지 않습니다. 옥목사님에게는 그 제자훈련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한다는 강한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 확신은 30년 전이나 새로운 천년이 된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그와 잠깐이라도 얘기를 나눈다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한마디로 행복한 목회자입니다. 제자훈련의 결과, 옥목사님의 주변에는 평생이라도 옥목사님과 함께 주님이 주시는 길을 가겠다는 성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다른 목사님들의 시샘 아닌 시샘을 받는 옥목사님은 이번 특별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제자훈련, 최근 유행하는 셀 교회와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의 회장직을 연임하며 세우는 계획 등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습니다.

바쁜 중에 시간을 내 주신 목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편집자 주>



▲ 대담 중인 옥한흠 목사와 류영모 목사

▶ 바쁜 사역 가운데 시간을 내 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 류목사가 시간 내라니까 겁을 내서 꼼짝 못하고 시간 냈지(웃음).

▶ 제가 기도할 때에 한국교회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선배 목사님들의 건강을 위해서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옥 목사님을 위해서도 기도를 많이 하고 있는데 목사님의 건강은 요즘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 제 나이는 이제 어느 정도 지난 나이니까요. 건강에 신경이 안 쓰이네요. 살 만큼 살고, 일할 만큼 하고, 오라고 하시면 가면 되니까요.

▶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목회자로 살게 된 배경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목사로 소명을 받고 나서게 된 과정을 후배들을 위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 저는 거제도 출신이고, 그 섬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자랐어요. 그곳은 6·25 당시부터 포로 수용소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피난민들이 대거 몰려 있었고 평범한 시골이라기 보다는 한국의 가장 어려웠던 시대의 역사를 한눈에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삶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었죠. 고통과 눈물과 땀이 응고되어 모여 드는 삶의 현장이었죠. 어린 시절을 그런 곳에서 보냈으니까 신앙적인 면에서도 빨리 눈을 뜬 것 같고, 인생에 대한 남다른 시각들이 생긴 것 같아요.

저는 그 곳에 다 찌그러지는 허름한 집이라도 지어 놓고 살고 있었지만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이 피난온 사람들이 있었고 피난민 수용소에 화장실이 없으니까 잠자고 일어나면 온천지가 화장실처럼 지저분한 곳이었죠. 밑바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환경을 어려서부터 지켜보았는데 그런 와중에서도 사람들이 의지할 곳이라고는 그저 교회에 와서 통곡하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을 보았어요. 이런 분위기에서 신앙을 키웠던 거죠. 목회자의 입장에서 돌아보면 그 때 겪은 환경과 경험이 목회자로서 가져야 할 필요한 자양분을 공급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죠. 목사가 되고 싶다고 한 사람이 아니고 목사 안 한다고 도망다니던 사람이니까요. 어머니께서 저를 목사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지만 저는 안 된다고 했어요. 그 이유는 당시의 신앙적 풍토가 약간 잘못 되었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어요. 완전 이원론으로 치닫고 있었으니까요. 세상의 직업을 갖는 것은 세상의 일이고, 신학교 가서 목사되는 것은 주의 일이라는 개념이 팽배했어요. 이에 대한 반발이 어려서부터 있었거든요. 신학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저는 ‘신앙 좋은 사람일수록 사회 각 부분에 들어가서 지도자 역할을 해야지 전부 신학교 간다고 하면 어쩌자는 건가’라는 취지의 반발심이 있었어요.

또 목회자들이 교리와 전통과 교회안의 편협한 문화에 갇혀서 꼼짝을 못하면서, 틀에 박힌 인생을 사는 모습이 보기 싫었어요. 그래서 ‘나는 그렇게 안 산다, 나는 사회 구석으로 가서 내 역할을 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겠다’라는 생각을 어려서부터 가졌기 때문에 목사가 되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어요.

그런데 결국 목사가 되었네요. 21살 때 여러 가지 환경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앞에서 목사 되기를 결정하고 지금까지 그 길만 보고 달려왔죠.

▶ 목사님, 저는 대학에서 기독교교육학을 전공했습니다. 교육에 대해 알아가며 사람을 세우는 일이 가장 소중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몸부림을 치다가 교회안에서 실제적인 열매가 있고, 교회 현장에도 잘 접목된 제자훈련을 직접 경험하고 싶던 차에 목사님이 하시는 제자훈련 세미나에 참여해서 도전과 충격을 받고 저희 교회에서도 그 제자훈련을 시작하여 지난 주간에 1기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 할렐루야.

▶ 그래서인지 목사님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제자훈련이고 또 목사님은 한국교회 안에서 그것이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는 얼마나 소중한 운동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제자훈련은 위험한 운동이라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고, 제자훈련이 사랑의교회나 몇몇 교회 외에 열매가 있느냐라는 시선도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비본질적인 요소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고 있는 때에 목사님께서 제자훈련을 시작하게 된 배경과 사랑의교회를 통해서 나타난 열매들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저는 ‘제자훈련’ 하면 개인이 주목을 받는다는 점에서 답답한 마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훈련의 원류, 본류라고 할까요, 그것은 성경이거든요.

누구나 성경을 보면 이렇게 목회해야겠다. 목회는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죠. 그것은 사람을 세우는 목회이고, 한 영혼에 대한 열정이고, 그 사람을 통한 비전을 가지고 썩는 밀알이 될 때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가 맺힌다는 것이죠. 또 사도 바울이 보여 준 좋은 표본이 있어요. 왜 이런 것들을 주목하지 못하고, 제자훈련을 하나의 프로그램이나 상품처럼 선전을 하여서 어떤 사람이나, 개인을 주목하게 할까라는 안타까움이 생깁니다.

이것도 한국교회에 약간의 비극이란 생각이 듭니다. 제자훈련은 새로운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그저 성경에 가장 근접한 목회요, 정신이요, 목회 방법이죠. 이렇게 보기 때문에 지상의 교회가 존재하는 이상 이 본질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확신이에요. 지금까지 대학생들과 5년, 이민교회에서 2년, 사랑의교회 개척하고 23년, 지금까지 30년 동안 성경을 통해서 확신하고 경험을 통해 다시 확인하고 열매를 통해 재 확신한 제자훈련에 대해서는 주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앞으로 교회의 생명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펴려면 이 길 외에는 없다는 것이 저의 확고한 신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제자훈련에 대해서 자신이 안한다고 해서 비판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해요. 왜냐하면 성경에 있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니까요. 제가 볼 때는 그래요. 얼마든지 토론할 수 있고 이 부분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어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본질, 원리, 철학이에요. 이 부분에서는 이견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봐요. 성경에 나오는 것이니까.

다만 그것을 적용하는 어떤 과정이나 방법에서는 다양성이 있을 수 있죠. 꼭 사랑의교회가 하는 식으로 해야 성경적인 제자훈련이다하는 것은 독선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기본 뿌리가 되는 정신이나 본질과 철학은 잘 모르고 자꾸 겉으로 보이는 나뭇가지만 가지고 흔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비판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위험한 겁니다.

제자훈련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만이 아니고 이민교회, 가까운 일본, 심지어 중국에까지 이 열기가 자꾸 달아올라요. 왜냐하면 목사님들도 벽에 부딪혔거든요. 그래서 갈 길이 뭔가 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며 얻은 결론이 이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그래서 관심이 많아지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하나 관심을 일으키는 중요한 이유는 제자훈련을 통해서 교회의 체질이 바뀌고 건강한 교회로 성장하는 경우가 지금은 굉장히 많아졌어요.

‘제자훈련을 해서 성공한 교회는 사랑의교회 및 몇 교회밖에 안 된다’라는 주장은 너무 피상적인 것만 아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에요. 신문에 뭐가 좀 나와야 알아주는 사람들 눈에는 몇 교회밖에 안 보이는 법이죠.

▶ 제자훈련을 교회성장의 도구, 프로그램이라는 안경으로 보니까 생기는 경우라 생각합니다.

- 사람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들이 정말 많이 있어요. 그런 교회들이 많이 자라고 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사랑의교회 이외에 몇 교회나 되는가?’ 라고 물으면 주저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요. 많은 교회들이 생기고 있거든요.

21세기에 막상 발을 들여놓고 보니까 감당을 못하잖아요. 교회가 세상을 감당하지 못하잖아요. 인터넷을 통해 밀려 들어오는 세속 사상, 문화의 타락, 가치관의 전도를 교회가 막아내고 있나요? 청소년들을 보호하나요? 못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예배, 심방이나 하면 목회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정도 갖고 교회가 얼마나 견뎌낼 수 있겠어요. 이럴수록 제자를 삼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고 사람을 놓고 씨름하는 목회를 해야 해요. 건물이나 숫자 갖고 씨름하지 말고 사람 갖고 씨름해야 해요. 그러면 사람 눈에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통해 천을 이루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거든요. 겨자씨 하나가 큰 나무를 이루듯이. 그러니까 이 원리로 돌아와야 해요. 저는 이 원리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어요.

▶ 교회를 사람이라고 보면 이해가 쉽게 될 것 같아요. 또 목회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해가 쉽죠.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 주님이 그토록 세우시기를 원했던 교회가 어떤 교회일까 하는데 대한 몸부림이 저 자신에게도 끊임없이 있거든요.

목사님 말씀 가운데 ‘광인론’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을 세우기 위해 미치도록 달려 왔다고 생각되는데 그 과정 중에 재미랄까요. 그렇게 사시면서 느끼셨던 재미, 행복, 보람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탈진에 빠져 있는 모습을 많이 보는데 그에 대해서도 한말씀 해 주십시오.

- 목회의 재미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목회의 재미는 첫째, 제대로 가르치고 훈련했을 때 저보다 훨씬 수준 높은 평신도가 세워지는 것을 보는 거예요. 영성이나, 영향력이나, 봉사나, 순수함이나, 이런 면에서 목회자보다 나은 사람들, 목회자 기 죽이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을 보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영적인 자녀, 영적인 제자가 생산되는 것을 보는 것이 목회자에게 있어서 최고의 재미요 보람이죠. 또 하나는 그들을 통해 주의 복음이 계속 사회 속에 침투하고새로운 영혼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는 것이죠. 보람을 뽑으라면 이 두 가지를 말하고 싶어요.

제자훈련 제대로만 하면 이렇게 영적인 제자가 계속 생기고, 또 그 제자들을 통해서 영적인 새 생명이 계속 태어나고 하는 일종의 축제를 항상 경험할 수 있거든요. 이런 목회를 하면 어떤 때는 출혈을 많이 해서 탈진이 될 때가 있죠.

그런데 너무 일이 안 되서 탈진하는 것과 너무 재미있는데 몸이 안 따라가 탈진이 되는 것은 차이가 있어요. 하나는 불행한 탈진이고, 하나는 행복한 탈진이죠.

이런 면에서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정말로 거듭나서 새로운 목회의 환희를 맛보려면 잡다한 것 다 접어 두고, 아예 완전히 마음에서 쓸데없는 생각들을 씻어 버리고 한 생명 한 생명을 그리스도를 담는 제자를 만들려고 하는 데 한 번 목숨을 걸어보세요. 그래서 그렇게 목숨을 걸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경험해 보면 그 다음은 본인들이 알아서 하게 될 거예요.

이게 어떻게 보면 이상론 같지만 아주 실제적인 권면이에요. 교회가 이런 본질적인 문제를 깨닫지 못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씨름하면서 목회해서 5년을 넘겼는데 열매가 별로 없다’며 허탈감에 빠지는 거나.,한 사람 두 사람을 놓고 씨름하며 5년 후에 그 열매를 보는 것이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똑같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목회자들이 눈을 떴으면 좋겠어요. 광인론, 그렇죠. 미쳐야 가능한 일이죠.

▶ 제자훈련은 분명히 주님이 하셨던 일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기에, 우리도 마땅히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훈련으로 인해 목사님 교회는 대형교회로 성장한 게 사실인데요. 제자훈련이 마치 대교회로 가는 길목처럼 여겨지는 그런 비판의 시각은 없는지요?

- 제가 볼 때 우리 교회가 대형교회 중의 하나지만 대형교회 지향적인 성격을 가진 현장으로는 보고 있지 않는 것 같아요. 그게 감사하고, 또 사실이 그렇죠. 제가 목회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의 교회에 대한 그림은 내 머리 속에 전혀 없었던 것이니까요. 흔히 말하는 목회의 청사진, 비전도 나에게는 사실 없었어요. 그저 그날 그날 저에게 주어진 귀한 성도들을 놓고 최선을 다하자는 방침으로 살아왔어요. 어떻게 보면 근시안적인 목회를 해 왔죠.

그러나 결과는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좋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사람을 계속 키워서 사람을 세워왔어요. 그러니 결과가 나빠질 수 없죠. 건물을 짓는데 출혈을 했다면 건물을 잘못 지어도 문제고, 건물이 무너지면 문제가 되지만 사람을 제대로 세우는 데는 문제될 것이 없죠. 그러니까 결과는 좋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지금과 같은 대형교회가 되리라는 생각은 못했죠.

주님 앞에 가끔 기도는 이렇게 했어요. ‘제 평생 짧은 기간의 목회지만 나와 함께 동역자로서 뛸 수 있는 사람 천명만 키워내면 좋겠습니다’라고요. 이런 기도는 했나봐요. 저는 잊고 있었는데 가끔 가다가 제 기도를 들었던 초창기 교인들이 그런 말을 해요. 저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님을 위해 살고, 소명자로서 한 생을 살고 싶어하는 자들이 한 천명만 만들어 질 수 있다면 열매 있는 목회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오늘까지 온 거예요.

가끔 생각해요. 하나님이 왜 이런 큰 교회를 허락하셨을까. 아마 제자훈련 해도 대형교회가 되려면 될 수 있다는 것 아닐까요. 제자훈련을 하면 교회가 질적으로는 높아지지만 양적으로는 안 자란다는 금기가 있거든요. 그래서 제자훈련을 해도 교회가 자라려면 교회가 자랄 수 있다는 희망을 주시려고 우리를 사용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 목사님 한국교회를 가슴에 끌어 안고 지금까지 사역을 해 오시는데 젊은 목회자들이 보는 아픈 질문을 한 가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사실 한국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가 성장하는 것이고 그것이 결국 역사를 바꾸고, 시대를 바꾸는 것이기에 교회 성장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런 확신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큰 교회 목사님들의 좋은 영향력 때문에 민족이 바뀌고 나라가 바뀌고 역사가 바뀌는 것이 아니고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악 영향 때문에 도덕성, 소위 ‘세습’ 등의 문제 때문에 교회의 전도의 문이 막히고, 교회의 신뢰가 땅에 떨어지는 어려운 현실이 되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오히려 대형교회가 망해야 민족이 산다고 외치는 사람이 생길 정도입니다. 이런 외침에도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텐데요. 목사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또, 한국교회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요? 목사님의 요즘 심경과 소신은 어떠신지요.

- 괴롭죠. 괴롭고, 어떤 면에서는 답답하고, 대형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우리 나라만이 아니고 세계적인 현상이에요. 대부분이 두 가지 안목이 다 포함되어 있어요. 누구든지 강자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일으키는 본능적인 무엇인가가 있죠. 그런데다가 대형교회가 만에 하나라도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쳤을 때는 그 반응이 날카로워지는 거죠. 우리 나라는 하나님이 축복을 주셔서 복음이 빠른 시일안에 전파되고 교회가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후유증이 굉장히 커요.

이런 것을 다 열거할 필요는 없고, 대형교회가 준 좋지 못한 영향력 때문에 사회의 지탄을 받은 것은 사실이고, 그로 인해 목회를 하는 많은 분들이 도매금으로 돌맹이를 맞고 사회에 대해서 교회가 냄새를 피우는 것처럼 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답답한 것은 사실이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결국 넘어야 할 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지가 많으면 바람잘 날이 없다고 교회가 커지다 보면 조그마한 문제가 너무 부각되어 소문이 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다가 지금까지 잘 한 것들은 묻혀 버리고 잘못 한 일 한두 가지만 갖고 교회를 매도 하거든요. 이런 시각들이 많이 팽배하기 때문에 대형교회가 본의 아니게 피해를 보는 것도 사실이에요. 이 점을 일단 우리가 감안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형교회가 망해야 민족이 산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죠. 신실한 목회자치고 큰 교회하고 싶다고 큰 교회 하는 사람 없어요. 작은 교회하고 싶다고 작은 교회하는 사람 없듯이 말이죠. 물론 작은교회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웃음).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평생 작은 교회를 한다고는 보장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어떤 뜻이 있어서 허락하시는 사역의 볼륨이라고 생각하면 되요. 그것을 인정해야 해요.

저 사람이 대형교회 안 했으면 내 교회가 컸을 텐데 하는 것은 피해 망상이죠. 현실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대형교회가 망하면 작은 교회도 함께 망합니다. 대형교회가 결국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대형교회가 무너지면 한국교회 전체가 피해를 보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만에 하나라도 실수를 했을 때는 한국교회 전체가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시각을 갖고 함께 회개하고, 함께 변호할 일은 변호해서 교회를 지켜야 해요. 그런데 지금 현재는 그러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타까워요.

그래서 마치 자기 마음에 있는 피해 의식을 복수하고자 하는 대상으로 대형교회를 보는 것 같아요.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시각이고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전제해야 해요. 대형교회일수록 잘못될 확률이 훨씬 많다. 그런 면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또 대형교회가 잘못되었을 때는 이것이 그 교회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가 된다는 공통의식을 가져야 해요. 그리고 또 하나는 대형교회가 있음으로 한국교회가 어떤 유익을 누리고 있는가 하는 것도 우리가 충분히 감안을 해야 해요. 작은 교회 100개가 모여서 못하는 일을 대형교회가 할 때도 있어요.

작은 교회에서 영적으로 너무 채워지지 못한 상태에서 봉사하는 데만 신경을 쓰던 신도들이 ‘잠깐 쉬고 싶다, 어딘가 그늘이 있으면 찾아가고 싶다’하는 탈진의 현상에 있는 사람들이 이름도 밝히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려면 찾아갈 곳은 큰 교회밖에 없어요. 이런 사람들을 받아야 해요. 받는 곳이 있어야 하고요. 이것은 대형교회가 아니면 절대로 못해요. 그리고 요즘같이 젊은 청년들이 사방에서 방황하며 자신들의 요구를 채울 수 있는 교회를 찾고 있을 때 젊은이들이 잠깐이라도 괜찮다 싶어서 몸을 기댈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것은 한국교회 전체가 책임을 져야 해요. 이런 것은 작은 교회보다 큰 교회가 훨씬 유리하죠. 왜냐하면 젊은이들에게 맞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든지, 젊은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좋은 지도자들을 교회가 모신다든지, 아무래도 터가 넓기 때문에 많은 교제권이 형성된다든지, 이런 이점들이 있기 때문에 큰 교회가 그들을 품어 줄 수 있는 여건을 갖추는 것은 한국교회 전체를 위해서 굉장히 중요해요. 또 큰 교회가 아니면 한국교회를 위해서나 세계선교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영역이 채워지지 않을 수 있는 부분이 많죠. 그러니까 큰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우리가 접어야 해요.

다시 말하지만 큰 교회하고 싶다고 큰 교회를 할 수 있다면 누가 큰 교회 안 하겠어요. 다 하지. 그러니까 큰 교회도 하나님이 뜻이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소명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새로운 바람, 셀교회에 대해

▶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다 하나님의 교회죠. 큰 교회도 있어야 하고, 작은 교회도 있어야 하고, 목사님께서도 크기에 걸맞는 사역을 해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큰 교회들이 좀더 몸부림을 했으면 좋을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미국의 새들벡이나 윌로우크릭 교회처럼 구도자들을 위한 몸부림. 그래서 교회가 성장하고, 지역사회가 바뀌고, 나라가 바뀌는, 그런 몸부림이 한국교회의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에게는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신도시들 주변에 중대형교회들이 생기는데 요새 일종의 ‘이동 성장’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에요. 그런 면에서 사람들이 옮겨 다니다 보니 모이는 교회들이 생기게 마련이죠.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더 구도자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있는 세상, 바깥의 불신자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 한국교회 목회자들, 특별히 대형교회 목회자들에게 부족했기 때문에 안 좋은 얘기가 나오는 것 아닐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미국의 새들벡이나 윌로우크릭 교회와 비교하자면 턱없이 부족하죠. 그러나 한국에서는 소위 구도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목회, 어떤 면에서는 교회보다도 구도자가 우선 순위에 있는 목회, 구도자들을 위해서라면 교회 전통을 파괴할 수도 있고, 심지어 교리적인 한 부분도 양보할 수 있는 폭을 갖고 접근하는 목회는 한국교회 문화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거예요. 예를 들어 윌로우크릭 교회가 우리 나라에서 시작했다면 그게 가능했을까요? 한국적인 교회 풍토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미국같이 신학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환경이 아닌 이상 우리가 그들을 그대로 따라할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기죠.

구도자들을 위한, 다시 말해 지역사회의 복음화를 우선에 두는 목회를 잘 못하고 있다는 점은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똑같아요. 어떤 점에서는 작은 교회가 그 점에서는 더 열악하죠. 큰 교회는 나름대로 1년에 안 믿는 사람들을 전도하고 세례를 주고 그들을 교인들로 만드는 비율을 보면 만만치 않아요.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죠.

우리 교회가 새가족들을 섬기기 가장 좋은 비율은 제 기억으로 새가족 중 40%~45%가 전도받아서 들어온 사람일 때에요. 그러면 지금같이 일년에 4천명이 등록을 한다고 할 때 그 중에 적어도 40%면 1,600명이 우리의 전도 열매라고 해야 할 텐데 어떤 때는 미치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러나 대각성 전도집회시 결신하는 숫자를 다 포함하면 그 숫자를 넘어서죠. 대각성 전도집회 나흘 동안 결신하는 숫자만도 2천 명이 넘어가니까요. 그러나 그 사람들은 결신하면 다 가까운 교회로 우리가 보내 주고 그 중 30%만 저희 교회에 와요.

어쨌든 큰 교회는 큰 교회 나름대로 복음을 전해서 지역 사회를 복음화하는 데 엄청난 노력을 쏟고 있어요. 그것을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고, 거의 모든 교회가 수평이동을 해서 교회가 커졌다고 하는 것은 오해예요. 오히려 작은 교회들이 왜 10년 전에도 100명이고, 10년 후에도 100명이고 왜 계속 그 한계를 못 벗어나느냐 하는 것을 반성해야 되요.

우리 한국교회가 제대로 되려면, 한국교회의 80%가 작은 교회고, 500명에서 1000명의 성도들을 갖고 있는 허리에 해당하는 교회들이 상당히 많거든요. 이 교회들이 참으로 구령의 열정을 갖고 좀더 열심히 뛰면 한국교회의 판도가 달라지죠. 대형교회 몇 개가 뛴다고 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구령운동의 문제는 대형교회가 반성해야 할 점이기도 하지만 한국교회 전체가 반성해야 할 문제예요. 우리가 좀더 믿지 않는 이웃을 향하여서 마음을 열고 그래서 필요하다면 전통도 무너뜨리면서 영혼을 더 아끼고 구원하려고 하는 자세를 가지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교회의 문턱이 낮아지게 되겠죠.

▶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정체성을 새롭게 의식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살려 내려는 몸부림을 하며 사람을 키우고, 제자훈련을 하고 또 그들을 세워서 주변에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가고 그렇게 우리가 본질에 충성하다 보면 숫자가 백 명이든, 천 명이든, 만 명이든, 누구하고 비교하지 않고도 행복한 목회를 할 수 있겠죠. 그것이 제일 중요할 것 같고요.

그래서 요즘 저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무얼까 성경적인 교회가 무얼까 라고 몸부림을 치며 살펴보는 가운데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로 만들려는 몸부림 가운데 하나가 셀교회 운동이라고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물론 제자훈련과 셀교회는 어떻게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키워서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하는 본질과 목표는 분명히 같습니다. 그런데 자칫하다 보면 제가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이 셀교회, 셀교회하다가 너무 급진적으로 접근을 해서 한국교회가 많은 상처를 받을까봐 염려되기도 합니다. 한국교회에서 이것이 잘 다듬어져야 할 부분일텐데 목사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 우리가 명칭에 너무 좌우될 필요가 없어요. 셀이란 말은 바꿔 말하면 소그룹이란 말이 되고, 우리 교회에서는 이것을 다락방이라고 하니까요. 이름을 뭐라고 하든간에 일단 제자훈련이나 셀목회 운동이나 참 소중한 것이죠.

저도 셀목회의 신학적 배경이나 철학에 대한 책을 읽어봤는데 상당히 중요한 부분들을 터치한 것은 사실이에요. 다만 제가 볼 때 제자훈련은 포커스를 사람에다가 둬요. 그런데 셀목회는 잘못 본 것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포커스를 소그룹의 function(기능)에다가 둔다고 생각해요. 소그룹의 기능을 극대화시키려고 하는 여기에 일단 포커스를 둔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 제자훈련을 하는 쪽에서는 소그룹에 대한 것을 셀교회를 통해서 좀더 많이 배울 수 있어요. 그래서 상호 보완적인 좋은 점이 있다고 생각하고요, 단지 제가 볼 때 이미 제자훈련은 검증이 된 프로그램이에요.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교회 안에서 검증이 돼서 거기에 대한 결과를 이미 여러 가지 데이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나 셀교회는 사실 순복음교회로부터 시작해서 세계에 유행하게 된 운동이고, 밖으로 돌다가 이론적으로 체계화되고, 또 싱가폴에서 그런 현장이 생기면서 역수입이 돼서 요사이 한국에서 셀교회다, 셀목회다란 말이 돌고 있는거죠.

그러나 이 셀교회 목회가 한국에서 제대로 검증이 되기 위해서는 앞으로 한 10년 기다려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그게 실제로 목회에 어떤 결과를 갖고 왔는가를 확실하게 보여 주기 전까지는 실험적인 단계라는 거죠. 한가지 제가 우려하는 것이 있다면 신학적인 문제예요.

셀교회는 평신도 셀 지도자를 일단 교역자와 맞먹는 영적 권한을 줘서 사역을 시키려고 해요. 미국에 있는 ‘the Church on the Way’같은 교회가 좋은 케이스인데 제가 30년 전에 세미나에 참여했을 때 보니까 평신도 지도자들, 가정교회 책임자들에게는 엄청난 영적 권한을 주더군요. 심지어 평신도 셀 지도자가 세례식, 성찬식을 하게 하죠. 주일날 교회에 나오지 않고 가정교회에서 자신들끼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재량권을 주고,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그 속에서 이뤄지고, 그 평신도 셀 리더 밑에서 사람이 또 양육이 되어서 그 사람이 재생산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인데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이상적인데 한국교회 풍토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그렇게 셀리더들에게 영적인 권한을 이양하지 않고 성공할 수 있느냐, 제가 볼 때 성공할 확률이 없어요.

셀교회 이론을 펴는 사람도 인정했어요. 18세기 경건주의 운동이 왜 성공을 하려다가 주저앉았느냐, 당시에도 교회안의 교회라고 하는 소위 셀교회운동이 아주 확산되었잖아요. 그 때 걸린 문제가 셀의 지도자에게 어느 정도의 권한을 줄 것이냐, 그 당시에는 교권주의 체제였기 때문에 절대 평신도에게 어떤 권한을 줄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경건주의 운동을 하다가 보니까 결국 성공을 못했다고 인정을 했거든요.

한국교회에서는 그런 신학적인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과감한 현장이 생길지 모르겠어요. 교단에 소속이 안 되어 있으면 가능할 지 모르겠지만 소속된 경우에는 셀 교회 프로그램이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궁금한 것인데 아무리 평신도가 유능해도 교역자가 양육하고 검증해서 훈련해 낸 평신도 지도자만큼 안심할 수 있는 지도자를 만들 수 있겠느냐하는 점이에요. 제가 목회 30년을 했지만 그것은 ‘No’예요. 저희 교회 훌륭한 평신도 지도자들이 많지만 나는 그들에게 당신 제자훈련을 시켜서 앞으로 평신도 지도자들을 만들라고 말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그들은 할 수 있는 한계가 있어요. 그 이상은 못해요.

그러니까 어떤 성령운동이나 은사 운동을 힘있게 하는 배경을 갖고 있는 교회에서는 어떤 수준을 측정할 때 얼마나 은사체험을 했는가, 얼마나 뜨겁냐, 얼마나 열정적이냐 하는 점, 즉 감성적인 면에 점수를 많이 줘요.

그런 감성적인 면에 점수를 줘서 사람이 평신도 지도자로서 역할을 하도록 한다면 아마 셀안에서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은 수월할지 몰라요. 그러나 말씀의 기초에 단단히 세우고, 그리고 교리적인 분명한 주체성을 갖고 평신도 지도자, 교회 지도자의 지도와 교회의 질서의 범위 안에서 자기 역할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평신도 지도자, 교회에 해를 끼치지 않고 또 교회의 질서를 어그러뜨리지 않는 균형잡힌 평신도 지도자를 만드는 것은 교역자 손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볼 때 셀교회 프로그램을 무작정 받아들이고 시행하는 것은 상당히 혼선을 겪을 위험이 있다고 우려하고 있어요.

그러나 셀의 기능을 극대화시켜서, 왜냐하면 현대인들이 자꾸 어떤 소속감을 찾으니까 셀의 기능을 극대화시켜서 거기서 진짜 코이노니아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려고 하는 이 욕구는 앞으로 계속 커질 거예요. 그래서 제자훈련을 하는 교회는 앞으로 이 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나 저희 교회는 이런 점에서 걱정을 안 해요. 다락방이 많이 보완이 되고 잘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런 점에서 경험이 부족한 교역자들은 제자훈련 하면 무조건 성경공부만 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고, 셀교회하면 소그룹에서 하는 것으로만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단선적으로 생각을 하니까 문제가 됩니다.

▶ 지금 한국교회가 당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준비되지 않은 지도자들을 소그룹의 지도자로 세운다는 점에 있죠. 그래서 구역의 기능이 약화되어 구역의 제기능을 상실함으로 한국교회가 죽어지는 그런 느낌이 있다는 차원에서 셀교회의 역할은 상당히 기대가 됩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 말씀해 주신 대로 셀교회가 한국적인 틀, 문화적인 틀에서 교역자가 해야 할 역할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해야 할 사역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번에 싱가폴에 있는 교회를 저희 교인들하고 다녀왔습니다. 몇 가지 차원에서 도전이 됐습니다. 저희 교회도 예배라든지, 소그룹이라든지, 나름대로 살아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싱가폴에 있는 이 교회들이 한국에서 60년대 70년대에 성령운동이 강력하게 나타나던 때의 모습을 보여 준다는 점이었어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거기 있는 모든 목회자들이 구도자들을 살려내려고 작은 교회, 중형교회, 대형교회들이 하나로 뭉쳐 함께 몸부림을 하는 것을 보았어요. 그리고 그곳에는 큰 교회라고 해서 시기하는 것도 없고 작은 교회라고 해서 자괴감에 빠지지 않더군요. 전부 다 함께 하나가 되어 지역사회를 살리려고 몸부림을 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소그룹 지도자들의 살아가는 삶이 장난이 아니었어요. 예수 믿는 게, 예수 믿는 게 인생의 전부다라는 것을 보여 주더군요. 그들이 셀을 섬기기 위해서 밥도 먹고, 셀을 섬기기 위해서 직장도 가고, 셀을 섬기기 위해서 집도 옮기는 면을 보면서 상당히 도전이 됐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제자훈련이나 셀이나 함께 손잡아야 될 점이 충분히 있다고 느껴집니다. 제가 한가지 목사님께 배우고 싶은 점이 있어요. 제가 목사님 교회를 피상적으로 1~2년 보고 있는데요, 이 교회 부교역자들이 여기서 시스템을 배워서 바깥에서 목회를 ‘이렇게 해 봐야지’ 하는 것보다는 옥목사님과 함께 하는 목회를 생각하더군요. 여러 사람을 제가 만나봤는데 평생이라도 옥목사님과 함께 이 길을 가겠다는 의지가 분명했어요. 부교역자 중에 이 교회를 위해서 죽을 사람이 있다는 점에서 목사님은 참 행복한 분이란 생각이 듭니다. 부교역자들을 어떻게 세워주시는지요?

- 세워주긴 뭘 세우겠습니까.

▶ 그들이 가만히 뒀는데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 그렇죠. 가만히 뒀는데 그렇게 됐죠(웃음). 그러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고. 그 다음에 우리 교회의 분위기에 들어오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 수정이 일어나요. 자기 의식의 전환이 생기죠. 보는 눈도 달라지고, 물론 투자도 하고요. 나름대로 그게 억지로 되지 않아요. 아무리 제 곁에 있으라고 해도 떠난다면 할 수 없고, 내가 당신을 키워주겠다고 해도, 나 당신 싫소 하면 그만이고, 그러니까 아마 인간적으로 보면 복이죠.

그리고 우리 교회에 저와 10년 정도 사역을 하고 나간 분들이 다 제자훈련을 통해서 교회가 잘 된다는 점도 흐뭇합니다. 또 장기 사역을 하는 분들은 ‘같이 죽겠다’ 하는 마음으로 사역을 하는 것이 사실이고. 왜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단지 지도자로서 일단 중요한 것은 오픈 리더십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제가 부교역자로 있을 때는 머슴취급을 받았어요. 그것도 아니면 담임목사의 가방을 들고 다니는 비서식으로 인정을 받았어요. 이것이 너무나 모순이라는 것을 경험했죠.

부교역자가 절대 담임의 비서도 아니고, 하인도 아니고 함께 동역하는 주님의 종이고, 그래서 부교역자를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는 이것이 분명하지 않으면 평신도를 세울 수 없다고 봅니다. 평신도에게 ‘당신 나하고 동역할 동역자가 되어서 함께 뛰면 주님앞에 가서 당신도 나와 똑같은 칭찬과 상급을 받을 수 있다’는 소명에 있어서의 평등성을 주장할 수 없죠. 담임 목회자가 부교역자를 종 다루듯 하면서 평신도들을 향해서는 ‘당신은 위대한 사역의 동역자입니다. 부리스가와 아굴라같이 함께 뛸 수 있는 동역자입니다’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부교역자들이 참으로 긍지를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또 부족할 때는 채워주고 또 각자의 은사를 따라 적재적소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장을 열어 주고 하는 이런 넓은 품만 있으면 제가 볼 때 팀사역이라는 것이 어렵지 않아요. 이렇게 제가 열거한 몇 가지 중에 한 두가지만 빠져도 안 되요. 인격적인 대우는 해 주는데 사역의 장은 절대 열어주지 않고 담임 목사가 독점을 하고, 그저 심부름이나 시키듯이 일을 시키고 하는 것은 사라져야겠죠. 반대로 사역의 장은 열어주고 비인격적으로 대우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부교역자들이 담임 교역자를 기대면서 사역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담임 교역자의 바른 자세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리더십을 일컬어 저는 오픈 리더십이라고 해요. 오픈 리더십은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뛰게 만들고 사역을 분담하여 함께 보람을 느끼게 하고, 서로의 아픈 고통이나, 실패를 함께 짊어지고 실험하게 만드는 그런 분위기를 가져와요. 그런 점에서 저는 노력을 한다고 해 왔는데 그렇게 참담한 결과를 맺은 것은 아닌 것 같아요.

▶ 목사님, 조금만 질문을 확장하겠습니다. 합동측 목사님으로서 한목협 회장으로 오랜 동안 활동하신 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합동측에서 통합측 목사들 강단에 세우면 징계한다고 해서(웃음)…. 합동측 목사님들은 두루마기 입고 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요즘 목사님이 큰 일을 맡으셨는데 한국교회가 개교회주의적이고, 이기적이고, 서로 질투심도 있고 그렇지 않습니까? 연합사역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닌데 그런 점에서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이하 한목협)를 하시게 된 배경이라든지, 하시면서 느낀 보람을 얘기해 주세요. 또, 몸부림을 치며 막대한 재정을 투자하면서도 구체적 열매는 없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연합 사역에 대한 애로사항이 있을 것 같은데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 한목협을 하게 된 동기는, 제가 교단에서 교회갱신협의회를 했잖아요. 일하면서 보니까 교단안에서 참으로 목회적 성취를 위해 뛰는 사람은 힘을 쓰지 못해요. 시간이 안 나니까. 그런 사람은 자기 교회 일에 매여서 뛰어다닐 수가 없죠. 반면 목회에 별로 재미를 못 느끼는 사람, 또 목회를 해도 힘이 넘치는 사람들이 결국은 조직활동에 뛰어드는 성향이 있죠. 그래서 나름대로 힘을 얻게 되고, 자기 활동 영역을 넓히려고 하는 야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교권이 결국 교회를 병들게 하는 풍토가 되고, 좀 나쁜 말로 하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살벌한 분위기가 되죠. 이런 와중에 교단 전체의 움직임은 목회를 성실하게 하려는 사람들의 의지는 전혀 반영이 안된 채 몇 사람의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 교단이 옳든 그르든 움직이는 거예요. 보다 못해 목회만 성실하게 하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장이 생기면 신음소리를 한 마디 해도 100명이 하면 그만큼 큰 소리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어요.

‘일단 모이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치고받고 싸우면서 뭘 할 수는 없지만 광야의 소리역할이라도 하자, 그러면 뭔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라는 취지에서 교갱협이 시작됐죠. 교갱협을 몇 년 하다 보니까 각 교단마다 비슷비슷한 성격을 가진 그룹들이 있다는 게 눈에 띄었어요. 그렇다면 각개전투하는 것보다는 같이 모이는 것이 좋겠다 해서 시작된 것이 한목협이죠. 한목협이 시작되고 나서 3년을 넘기고 보니까 이 사역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했어요.

그러나 얻은 것이 참 많아요. 일단 14개 교단의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다른 신학의 벽을 뛰어 넘어, 각자의 교단의 개성이나 특성을 수용하면서 한 자리에 앉고 보니까 진짜 한 교회예요. 그리고 그런 한 교회 의식을 우리가 느끼면서 공감한 것은 우리가 너무 행복하다는 거예요. 모이면, 너무 행복해요. ‘이럴 수가 있구나.’ 그런데 교회가 왜 지금까지 물고 찢고 싸우고 나누어졌느냐 생각할 정도로. 이런 하나됨의 행복을 서로가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은 굉장히 큰 의미가 있었죠.

지난 번에 한목협 일일 수련회 때는 일부러 성찬식을 성공회에 맡겼지요. 그래서 성공회 신부들이 매주 하는 자기들식의 성찬식을 집례했는데 얼마나 은혜스러웠는지 몰라요. 그 성공회 집례자와 교인들이 주고 받고 읽는 신앙 고백문에서 장로교의 입장에서도 흠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참 그러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됨의 행복을 찾았습니다. 교단의 다양성, 신학의 다양성을 포용하면서도 하나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교단에서 이런 갱신 그룹들의 움직임을 통해서 뭔가 계속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대신교단에서는 이미 교단의 지금까지 부조리라고 인정되었던 많은 부분이 개선되고 있어요. 그리고 고신정신바로읽기 그룹이 교단의 내부에 뛰어들어 영향을 끼치는 소식을 듣고 있어요. 또 우리 교단을 보면 그렇게 금권 타락 선거로 오랫동안 진통을 겪고 있었는데 금년부터 제비뽑기로 완전히 선회했어요. 작년 총회에 만장일치로 결의해서 통과했어요. 금년에 저희 교단에서 처음 실행을 하는데 일부에서는 ‘이거 안 된다’고 반대가 나오고 있어요. 그러나 일단은 우리 교단에서 제비뽑기를 하기로 하고 계속 수순을 밟고 있는데 다른 해 같으면 지금쯤은 교단 분위기가 말이 아니예요. 전문적인 선거꾼들이 돈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선거운동을 하면서 정신들이 없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평안해요. 보이지 않게 변화가 계속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 교단에서는 교갱협 멤버가 거의 1천명 가까이 되거든요. 교역자 천 명이면 힘이 만만치 않죠. 계속 힘의 결집이 생기는 거죠. 그리고 이제 통합측 바목협을 보니까 이제 제비뽑기 쪽으로 가면서 선거 풍토를 바꾸자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고 있잖아요. 통합측에서 그것이 실천되면 실로 엄청난 파워를 지닐 수 있게 되죠. 이렇게 계속 교단마다 뭔가 자꾸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그래서 이런 힘들이 모이면 결국은 한국교회에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여는 하나의 시발점이 되지 않을까라고 보고 있거든요. 그런 면에서 제가 볼 때 한목협의 역할이나 존재가치는 대단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제도권 안에 들어가서 어떤 이슈를 갖고 ‘네가 옳다, 내가 옳다’ 싸우는 것을 우리는 금해요. 싸우면 결국은 똑같아 지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혁명은 못해요. 교회역사에서 혁명은 존재 의미가 없어요. 다만 우리는 모범을 보이면서 광야의 소리를 계속 외치고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을 결집시키고, 또 후배들이 어떤 소망을 갖고 그래도 배우면서 따라올 수 있는 지름길을 계속 만들어서 열어 나가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어요. 결국 이것이 한국교회의 미래를 밝게 할 수 있는 터닦기가 되지 않느냐는 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이런 면에서 한목협이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보고, 지금 우리가 힘을 쓰는 것은 한국교회가 일단은 대사회적인 면에서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어떤 제도적인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1백만인 서명운동 계속하고 있고 한 달에 한 번씩 한국교회 일치를 위한 정례기도회를 30여 개 단체가 돌아가면서 하고 있고, 각 교단마다 우리가 호소문을 보내고 있어요. 더 이상 개신교의 대표자가 가톨릭의 추기경이라는 인상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KNCC나 한기총이 서로가 어떻게 좀 하나가 되어서 한국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어떤 형태의 조직이라도 만들어서 노력을 하면 좋은데 이게 안 되는 거에요. 이제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교단에서 이 일을 전담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뭔가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해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 보기에 오합지졸처럼 보이는 한국교회의 이미지를 하루 빨리 갱신해야 해요. 정치하는 사람들이 제일 다루기 쉬운 것이 개신교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이런 망신을 수십 년 동안 당해오면서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교단주의, 개교회주의로 계속 가면 이것은 안 될 말이에요. 이런 점에서 앞으로 한목협은 어떡하든 한국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제도가 나와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한국교회에 건전한 주장을 전할 수 있는 채널을 확보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 <교회와신앙>은 한국교회의 갱신과 개혁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를 어지럽히는 이단들을 밝혀내고 이단 사이비성이 있을 때는 경고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교회와신앙>이 가야 할 방향에 목소리를 가지신다면 훨씬 한국교회가 건강해질 것이란 바람이 있습니다. 한 말씀 해 주시지요.

- 양방과 한방이 다 중요해요. 양방은 병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고, 한방은 그런 병이 생기지 않도록 강한 체질을 만드는데 역점을 두는 것처럼 이단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이단성을 드러내고 경계하는 양방적 처방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한편 이단이 왜 생기느냐 하면 교회가 부패하기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한국교회 전체의 건강이 약해졌기 때문에 그런 병이 생기는 거죠. 이런 면에서 한국교회 체질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은 이단을 공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런 면에서 양면을 다 중요하게 여기고 나가야 되겠죠.

저는 이단이 생기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를 신학교 교육의 저질화와 사역자들의 대량배출이라고 보고 있어요.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가요. 많은 이단들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이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이단들을 때려잡자’ 이것은 자가당착입니다.

우리가 좀더 냉정한 판단을 해서 대처를 해야 되요. 신학교도 정비하고 대량생산 가운데 인격을 쌓을 수 없는 목회자들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반성해야 되요. 전 주님의교회 이재철 목사의 메시지를 감명깊게 들었습니다. 그 설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고등종교가 타락할 때 나타나는 양상중에 하나가 성직자의 급증이라고.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겁니다. 한국교회가 그 수위에 와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단을 방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올바른 지도자를 양성하고 교회의 건강을 좀 더 잘 다지는 것이 이단을 막는 가장 좋은 지름길이죠. 기성교회가 부패하고 실망하니까 이단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죠. 그렇잖아요? 이단치고 기성교회 교인 안 뺏고 자기들이 직접 전도해서 이단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요. 대부분이 교회 교인들 뺏잖아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에 대해 우리가 깊이 반성하고 한국교회의 체질을 강화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제가 볼 때 제자훈련밖에 없어요.

사람을 위해서 10개월 잉태해서 입덧에서 시작해서 낫는 작업까지 고통하면서 생명이 하나 탄생하는 이런 해산의 수고 없이 쉽게 그냥 설교 한 두 편 갖고 사람을 낳는다고 착각하는 오늘의 목사들 참 한심하다고 생각해요. 그것도 설교나 똑바로 하면 몰라요. 시시한 예화 섞어 가면서 시간 때우는 것이 태반인데. 제가 나쁘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우리 정신 차려야 되요.

▶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고 목회를 하는 젊은 목회자들을 위해 조언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보면 목사님, 이제 잘 마무리하셔서 우리 같은 후배들에게 유산을 물려줄 단계 아닙니까. 목사님께서 정말 그 동안 하셨던 목회들을 가마솥에 넣고 푹 끓여서 한방울 환으로 만들어서 후배들에게 남겨 주신다고 생각하고 한 마디 해 주십시오.

- 목회의 본질을 붙들고 씨름하세요. 뭐가 목회의 본질이고 뭐가 비본질인가 하는 것을 구분할 눈이 없다면 아예 목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질을 분명히 알면 그것이 비록 좁은 길이고 십자가를 지는 길이라고 할 지라도 그 길을 가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고, 교회가 사는 길이에요. 괜히 이 프로그램 저 프로그램 갖다가 해보다가 안 되면 손털고 또 저거 해 보고 그래서 남대문 시장에 가서 마음에 드는 물건 나왔다고 하면 자꾸 사다가 쌓는 이런 어리석은 목회는 하면 안 되요. 본질을 바로 붙들고 그 본질을 위해서, 그 본질에 충실한 목회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프로그램을 받아들이고 보완해야지 그냥 뿌리도 없이 계속 쇼핑만 하는 목회, 이건 정말 위험해요. 본질을 붙드세요. 그게 중요해요.

▶ 목사님 긴 시간 이렇게 대담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가 이렇게 길게 하기는 처음입니다. 완전 고문이군요(웃음)

류영모
한소망교회 담임목사, 월간 <교회와신앙>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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