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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존재론적 의미
작성자 : 운영자(kylggc@hanmail.net)  작성일 : 2008-06-14   조회수 : 75
사랑의 존재론적 의미

목회자를 위한 철학

사랑은 인간의 근원적 존재성이다. 인간은 사랑을 통해 그의 근원적 존재성, 즉 영원한 생명을 회복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랑하라”는 예수의 명령은 인간론적인 필연성을 가진다. 이 필연성을 밝혀보자.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성서의 모든 기록은 구원 즉, 인간의 영원한 생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구원이란 어떤 것을 새로이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원래 있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구원이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던 영원한 생명이 다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불트만은 사랑을 삶의 규정성, 즉 살아있음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했다 (Liebe ist die Bestimmtheit des Lebens).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고전 13장에서 사랑을 인간의 존재론적 근거로 제시하고 하고 있다.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사랑하면 ‘나’이고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아니다. 사랑은 인간의 근원적 존재성이다. 인간은 사랑을 통해 그의 근원적 존재성, 즉 영원한 생명을 회복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랑하라”는 예수의 명령은 인간론적인 필연성을 가진다. 이 필연성을 밝혀보자.

사랑의 인간학적 필연성을 드러내기 위해 먼저 우리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혹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와 같은 어떤 도그마적인 인간학적 정의도 전제하지 않고, 인간의 일상적 모습을 그대로 기술하는 작업에서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물들이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인지, 사회적 동물인지 아직 알 수 없다. 단지 우리가 인간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이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사람의 존재양상을 ‘세계내존재’라고 부른다. 여기서 ‘세계’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을 포함하는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사물들에서 출발해 보자. 이 사물들은 단지 우리 앞에 놓여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다루고 사용한다. 우리가 사물들과 관계할 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물들이 가지는 유용성이다. 우리는 이 사물들을 ‘도구’로서 만난다. 우리가 도구와 관계를 맺는 것은 그 도구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를 위해 사용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도구들은 고립된 개체들이 아니라, 서로 수단과 목적이라는 기능적 종합관계를 이루고 있다.
집을 짓기 위해 많은 도구들이 사용된다. 이때 목재, 망치, 기와, 시멘트 등은 집을 짓는데 도움이 되는 특정한 기능을 중심으로 서로 종합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망치는 망치질을 하기 위해 있고, 망치질을 하는 것은 못을 박기 위함이고, 못을 박는 것은 무엇인가를 고정하기 위한 것이고 등등. 이러한 종합적인 관계는 다른 도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도구들은 결국 집을 짓기 위해 필요하다. 그리고 집은 추위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도구들이 형성하고 있는 이러한 기능적인 종합관계를 우리는 ‘세계’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러한 종합적인 관계는 결국 인간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이 관계의 중심에 서있는 인간을 우리는 ‘세계내존재’라고 부른다. 세계내존재로서 인간은 이렇게 도구적 관계 속에서 사물들을 만난다.
모든 도구들은 인간을 중심으로 수단과 목적이라는 기능적인 종합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도구적 관계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이 사물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존재 또는 존재가능성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가능성)에 관심을 가지는 존재자이다. 자신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는 인간이 최종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존재가능성은 ‘죽음’이다.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될 가능성으로서의 죽음에 도달한다.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이다. 인간은 지금 사물들과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자기 자신의 궁극적 존재가능성으로써의 죽음에 미리 관심을 가지는 존재이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이 존재가능성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이미 인간의 운명으로서 존재한다. 세계내존재로서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인간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지금(현재), 미리(미래), 이미(과거)’ 라는 통일적인 작용에 기초한다. ‘지금’은 ‘미리’와 ‘이미’와의 역동적 관계 속에서만 지금일 수 있으며, ‘미리’는 ‘지금’과 ‘이미’를 내포하며, ‘이미’는 ‘지금’과 ‘미리’와의 관계 속에서만 ‘이미’일 수 있다. 이들 세 요소들은 서로 다른 속성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통일적으로 하나의 인간의 존재양상을 나타낸다. 다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다른 인간존재의 이런 삼위일체적 특징을 우리는 ‘시간성’이라고 한다.
남궁연 - 혼돈

이 ‘시간성’에서 인간존재의 유한성이 드러난다. 인간이 유한하다는 것은 자신 속에 한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한계는 넘어설 수 있는 한에서만 한계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의 존재가 ‘시간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즉 유한하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초월하여) 타자와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 존재성은 사물들과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웃’인 것이다. ‘시간성’에 근거하여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타자와 관계를 맺는 사건이 바로 ‘사랑’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웃이며 사랑이다.
인간이 타자와 맺는 관계성이 ‘사랑’이다. 그런데 인간이 타자와 맺는 관계들은 그 관계가 어떤 가치기준을 가지고 형성되느냐에 따라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난다. M. 쉘러에 의하면 인간은 4 종류의 가치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첫째 유형은 ‘유용성’을 가치기준으로 하여 형성되는 관계이다. 도구적 관계가 여기에 해당된다. 두 번째 유형의 관계에서는 ‘고상함’이나 ‘천박함’이 그 기준으로 작용한다. 세 번째는 ‘아름다움’이나 ‘추함’, ‘정의’나 ‘불의’, ‘진리’나 ‘거짓’ 이라는 가치기준에 따라 이루어지는 관계이다. 예술, 법, 그리고 학문분야에서 이루어지는 관계가 여기에 해당된다. 네 번째이자 가장 고유한 의미에서의 관계는 ‘거룩성’을 기준으로 하여 형성된다. 종교적 관점에서의 관계(사랑)가 여기에 해당된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는 타자의 존재 그 자체를 가치기준으로 하여 형성된다.
인간의 존재성을 회복시키는 본질적 의미에서의 사랑은 타자가 유용성이 있거나 고상하거나 정의롭거나 진실하기 때문에 그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타자의 존재는 단순히 나의 존재를 완전하게 해주는 하나의 본질적인 구성요소가 아니라,
그의 존재는 이미 나의 존재와 함께 총체적 통일성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타자의 존재는 이미 나의 존재의 전체이며, 나는 이미 타자의 존재의 전체이다. 따라서 나의 존재는 타자의 존재에 ‘빚지고’ 있으며, 타자의 존재는 나의 존재에 ‘빚지고’ 있다. 빚지고 있기 때문에 타자와 관계할 때 나는 감사함을 갖는다. 이러한 자세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성(사랑)은 온유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는다.


오 희 천 목사
·서울신학대학 졸업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수료
(철학과)
·쾰른대학교 철학석사(M.A)
·쾰른대학교 철학박사(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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